[펌] 1988년 칸느광고 대상 작품_ 워싱턴 올리베또감독 작

 

 

 

 

 

 

 

 

 

 

 

 

 

 

모처럼 퇴근 뒤 도서관에 들러 독서시간을 갖는다.  책을 알랭 드 보통 책 두권과 전에 봤던 [호모파시스투스] 책을 빌리다.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보았던 장을 다시 보니 되살아난다 싶다.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는 [파시즘]을 [계급]이 있는 9장만 여운을 남겨두는데 다소 산만하다 싶다. 느낌이 오는 것이 아니라 퍼지는듯 산란되는 듯하다. 이에 대한 느낌은 또 라이히나 가타리에서 오는 것과 다르다. 최근의 논쟁이나 이론을 반영하는 '새로운 합의'와 색깔이나 강도에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잠도 자야하니 [작은강의] 뒤의 느낌들과 버무려 흔적을 남겨야지 싶다. 여부는 전적으로 제마음... ...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보아야할는지도 ...  다소 제목이 선정적이기도 한데 읽은 뒤 많은 부분 공감한다. 그 이유도 나누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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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임의 꽃, [어떻게]와 [왜]의 첫날밤, 가출?, 가석방~(作)
    from 木筆 2008-11-29 15:09 
    [무엇]을 할까가 고민이죠. [무엇]을 해야하는데, 무엇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무엇]을 물어봐도 답변도 잘 해주지 않고 응답도 무덤덤하기만 합니다. 어제 [파시즘] 작은강의가 있었죠. 파시즘이 무엇일까?라고 물어보면 막막합니다. 파시즘이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무엇이다라고 하며 파시즘을 꽉 잡아버리는 순간, 손가락사이를 빠져나가는 놈들이 무진장 많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한번, 조금만 힘을 다른 곳으로 써 봅시다. 궁금증을 무엇이다에 두지말
 
 
 

 

 

 

 

 

 

 



여전히 '가능한 선택지' 파시즘에 대하여... (평점:)

http://blog.aladin.co.kr/cognize/1763934 인식의힘(mail) 2007-12-16 16:23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랬다. 보름 남은 2007년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 3일전이다. 총선과 달리 비례 대표도 없다. 한 놈만 정해서 찍어야 한다. 2002년과 다르다.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놈현과 비교될 만 한 놈도 없다. 이제 정치도 개인의 역량과 능력보다 시스템과 제도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보는 데 그렇게 될 수는 없다. 4천만이 한 마음이라면 그게 어디 사람 살만한 사회인가. 어쨌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지만 감동도 희망도 없는 선거가 돼 버린 지 오래다. 콘크리트 지지층의 결집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긴 맹박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나. 아니 망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한국노총이 맹박이 지지선언을 하는 꼴을 마르크스가 봤어야 하는건데. 희대의 코미디가 벌어지는 현실 때문에 더 이상 ‘개콘’이나 ‘웃찾사’는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박정희를 파시스트라고 볼 수 있을까? 21세기에 다시 읽는 파시즘은 무엇으로도 바꾸기 힘든 인간의 욕망과 본성들이 내재해 있다. 대중들의 파시즘에 관한 심리를 가장 탁월하게 읽어낸 사람 중의 하나인 빌헬름 라이히는 <대중심리의 파시즘>을 통해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자본가라는 단어가 욕설이 아닌 것처럼 욕설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특수한 종류의 대중지도와 대중적인 영향력을 특징짓는 개념이다. 즉 파시즘은 권위주의적이며, 일당체제이며 따라서 전체주의적이며, 또한 권력이 본질적 이해관계보다 우선하며,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사실이 왜곡되는 체제인 것이다.(P. 307)”라고 선언한 바 있다.

  나치의 상징이었던 하켄크로이츠를 인간이 얽혀 있는 성적 상징으로 읽어 낸 라이히는 성경제학과 가족 내의 억압 구조를 통해 대중들의 파시즘에 경도되는 현상을 간파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음 사용했던 ‘파시스트fascist’라는 용어는 보수와 진보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던 정치 세력과 20세기 초 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상황과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발현되었다. 제 1,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개별 국가들의 정치 상황과 맞물렸던 파시즘은 투표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여성의 정치 참여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을 강타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페미니즘과 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즘ism’들의 향연 속에서 파시즘은 강렬한 유혹으로 대중들을 사로잡는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보수 세력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고 있던 시기, 바야흐로 혁명의 후폭풍에 시달리면 세상은 불안한 동거가 계속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을 비롯한 나라들에서 서서히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광기는 단순하게 우생학과 인종주의로 설명될 수 없다. 유대인의 절멸만이 게르만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는 히틀러나 괴벨스의 개인적 성향의 문제로 귀결될 수는 없다. 케빈 패스모어의 <파시즘>은 유럽에서 자생한 ‘파시즘’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의 광풍이 일어나기 전의 파시즘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보수주의와 결합한 파시즘의 현상을 되돌아보며 이것이 민족과 인종과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젠더와 계급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관점 중의 하나이다.

공산주의 초기의, 파시즘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의는 1935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에 따르면 ‘권력을 장악한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이고 쇼비니스트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금융자본주의 요소의 개방적이고 테러적인 독재체제’다. - P. 35

이 관점은 경제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파시즘의 대한 정의이긴 하지만 파시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더더욱 놀라운 것은 파시즘도 결국은 “민주적인 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선거와 기술적 수단이 없었다면 파시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P. 72)”라는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파시즘도 우리들의 선택이었다는 전제가 가능해진다. 이 책은 파시즘의 역사와 변천 과정 현실 정치와 현실과의 관계를 고찰하면서도 여전히 ‘here and now지금-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

  폭력과 대응 폭력은 미국의 패권적 제국주의와 이슬람문화와의 갈등 관계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무한 순환 구조는 권위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파시즘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민족적 대중주의’가 파시즘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노파심은 기우에 불과하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걱정과 우려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언제든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닐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민주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단순한 믿음만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광기와 폭력은 친구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07년의 현실은 어디쯤 위치해 있는 것일까? 하늘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고 싶다. 아득한 태초에서 출발해서 보이지 않는 미래로 여행 중이라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아니 지금 현재의 모습보다 먼 미래의 모습보다 짧은 미래라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아니 타인들의 희망에 대해 살펴보고 싶다. 그래도 2008년은 시작될 것이고, 우리의 삶도 계속되겠지만 파시즘이 여전히 ‘가능한 선택지’라는 저자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기에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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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요. 그래도 꼼꼼이 읽으셔야해요. 당신의 대출이자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당신 월급이나 일자리에 관계된 문제이기도...아니 당신 삶에 관한 현실에 대한 진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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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2008-11-2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넵. 잘 읽었어요. 꼼꼼이는 아니고 얼렁뚱땅...ㅎㅎ 다음번 작은강의 '파시즘'도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군요.

여울 2008-11-26 17:18   좋아요 0 | URL
얼렁뚱다앙. 답답한 이야기여서 미안쿤요. ㅎㅎ
 

     
  1. 구조주의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생각하는 이성을 지닌 인간 주체가 상정되었습니다만, 구조주의의 주장들은 이렇게 데카르트적인 ‘나’ 중심의 사고를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2. 스튜어트 홀에 의하면 나에 관한 세 종류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온전히 나의 의지에 의한 주체적 정체성이 있는가 하면 타인과의 관계를 의식하는 상호작용적 정체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생각하며 남의 눈에 의해 나라는 사람을 포장하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푸코의 담론적 정체성입니다. 나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끼리의 얘기와 평가에 의해서 내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3. 세 번째는 고대그리스와 동양적 사유에 감동을 받고 주체에 천착한 시기입니다. ‘개인은 도덕적인 주체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성의 역사> 2,3권에서 다룹니다.

푸코에 관해 흔히 오해되는 것은 푸코가 억압적 사회·억압적 권력구조에 대해서만 주장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절대 권력자가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이죠. 하지만 푸코의 초점은 특정권력의 억압에 대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생산에 대한 부분입니다. 어떻게 권력이 생산 되는가. 그 과정에 주체의 구성이라는 문제가 자리합니다. 도대체 푸코는 왜 그리 주체에 관심을 기울일까요?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로부터 철학을 전개하는 태도가 푸코의 매력입니다.

                                          [녹취록에서 가져온 몇꼭지, 녹취록은 아래 접혀있음]
 
     


후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작은강의를 듣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이것저것 궁금증도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녹취록을 보고나니 여러 맥락들이 잡혀지는 것 같아 반갑고 고맙기도 합니다. 뜨문뜨문 보아서 뜨문뜨문거렸는데, 맥락을 잡아주니 중동난 느낌들이 이어지고 살아나는 듯 반갑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식한 이야기 거들까 합니다. 논의한 이야기를 일상으로 가져와 봅니다. 푸코의 이야기를 전제로 한다면 역으로 담론을 생산할 수 있고 권력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죠. 주체라는 것도 역으로 데카르트의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에 섞여있거나 담론에 의해 구성된 나-너가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렇게 구성된 근대적 주체나 근대의 도구들은 여전히 지금 숨쉬고 있다는 것으로 정리해보아도 될까요?

1.  성인이 되고, 삶을 살면서 내가 가진 생각들에 의문을 별반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들의 생각에 관여하지도 않습니다. 그 생각을 우러나게 하는 주변의 생각장치들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지지 않는 세상이죠. 옆집이 가전도구를 구입하면 하고싶으니 그렇게 하구. 남들이 아이들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구. 성인이 된 뒤로 나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끊임없는 살아지기를 강요당합니다. 그리고 가끔 모든 주변이 거세된 자아만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런 나가 너로부터 비롯되었다면, 거꾸로 담론을 만들, 하고싶게하는 나-너의 복수체계를 만들 수 있다면, 주입된 욕망의 체계에 구멍을 낼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해봅니다.

2. 너의 생각을 품을 수 있다면, 너의 하고자하는 마음들을 스며들게 할 수 있다면, 그런 너-나의 하고픈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향유하고 싶어진다면, 인식하는 것을 너머 만든다면 만들 수 있다면, 균열을 낸 지점들이 또 다시 너로 스며들 수 있다면....

3. 니체, 들뢰즈, 푸코의 자살은 자아나 주체, 강한 나만으로 사유를 극단으로 쌓아올린 때문은 아닐까?  도자기는 비어있어 도자기인데 마치 빈 것을 있다라구 있어야한다구 강박한 연유는 아닐까? 서양철학의 빈 지점들에 대해서도 궁금해지고 질문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아~ 섣부른 오독인가요...

0. 아래 작은강의 녹취록--이것도 너무 기네요. 다 읽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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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오늘 올라온 녹취록에 보탠다. 좀더 포인트를 잡아 이야기를 건네야 하는데, 몽글하다싶다. 건네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정리도 못하고 있다는 얘기같다. 생각을 부여잡고 있는 것들에 작은강의로 도움을 많이 받는다 싶다. 좀더 일상으로 모임으로 다르게 품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인데 혼자만의 오버일까? 또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를 소리만 한다고 구박받겠다 싶다. 고생한 한선생님께 거듭 감사. 술한잔 기부해야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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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2008-11-26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꼼꼼이 읽으면 머리에 쥐가 날듯. 그래서 설렁설렁 건너뛰며 제맘대로 읽었어요. 휴~

여울 2008-11-26 17:17   좋아요 0 | URL
꼼꼼이 읽으면 쥐나는 글이죠. 설렁설렁 읽으시는게 낫지요. 다음에 혹시 남는 단어들 있으면 다시 보세요. ㅎㅎ
 

     
  [경계를 그어 소유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데 이 목적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  
     



[윤증고택 홈피에서 가져옴]


후기의 금을, 아니 밑줄을 장난삼아 그어봅니다. [경계] [소유] [관계] [벽]...

아마 사람은 하루에 숨을 팔만구천몇번 쉰다죠. 후기를 보다 딴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 우리가 하루(의식-반의식-무의식, 반의식은 뭔지 모르겠지만서두--낮술상태인가??)에 직선을 팔만팔천몇번을 본다고 칩시다. 어릴 때부터 누적된 직선은 아마 차곡차곡 마음 어느 한구석에 쌓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억지를 부려봅니다. 이런 직선이 자연을 닮은 선에 하루 팔만번을 노출된 친구와 만나 연애를 한다고 해봅시다. 아마 직선은 늘 곡선을 찌를 겁니다. 이곳저곳. 2급수에 사는 물고기에 1급수에 살 수 없듯, 2급수 직선은 1급수 곡선을 망가뜨릴지 모릅니다. 곡선은 직선으로 바뀌어야 살아남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온통 직선으로 가득찬 냇가는 3급수, 4급수로 망가져 1급수인 곡선도, 2급수인 직선도 살 수 없을지 모릅니다. 자연에 대한 치유력은 아마 직선을 품은 곡선들이, 직선에 상처난 곡선들이 더 유리할 것입니다. 편안하고 따듯한 선들은 아마 이렇게 바쁜 직선에 맞지 않는다고, 더 날카로운 직선을 들이대는 녀석들에게 핀잔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직선의 생명력은 늘 파닥거리다 맙니다. 그래도 어릴 적 곡선의 아우라와 동산을 내달리던, 곡선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치유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날카로운 직선에 끊임없는 압박을 당하는 우리 아이들은 차마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뾰족한 직선들이 만나 표독한 칼끝이 될는지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한권의 책들을 마음에 가져와 봅니다. 소유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늘 경계짓고, 선을 긋는데 익숙한 일상들을 되돌아봅니다. 사람들 사이를 늘 직선으로 경계짓던 나날들. 사람으로 아프고 사람으로 슬픈 경계의 직선을 사람으로 기쁘고 사람으로 넉넉한 곡선으로 두면 어떨까요. 그러지 못한 스스로 돌아보며 자책하기도 하지만, 그 경계의 곡선을 구멍 숭숭나게하거나 햇볕 스며드는 한지이거나 마음 들낙거리는 경계의 점선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나에 대한 애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경계가 강한 듯 보이는 사람이 약하다죠. 너와 경계에 너가 스며들면 들수록 곡선으로 닮아간다죠. 경계가 허물어진 담엔 관계의 꽃이 핀다죠. 관계로 시작한 나날과 일상. 그것이 늘 나날을 포위하여야 한다는데... ....

그러고보면 시도 음악도, 미술도 조각도, 인문도 철학도 경계를 긋고 소유하려는 욕심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모두 네모난 직선이거나 날카로운 직선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그 녀석도 흐물흐물 허물어져야 할터인데. 미학모임 그렇게 날카로운 직선의 성들을 무너뜨리는 재미를 느껴보면 어떨까요.    몇꼭지 생각이 스며들어 흔적을 남기네요.  

후기도 누가 독점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죠. 한참 명사형이냐, 동사형이냐가 유행했죠. 아니 지금도 관계지향인 동사형이 우리코드에 맞는다고 하며 그런 책들이 나온다죠. 그런데, 우리에게 맞는 것은 부사나 형용사형이라면 어떡하죠. 아마 부사형이 더 적절할 겁니다. 전통한옥의 벽이 그런 것처럼 관계에 박자와 멋을 부려주는 그런 것 말입니다. 아마 동사와 명사를 타고넘는 그런 맛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체질에도 맞고, 우리 정서에도 맞고....음 그러면 여기 후기도 그러면 안될까 싶기도 합니다. 더 늘이거나, 보태거나, 고명을 위에 살짝...그런 것을 보면 저도, 당신도 우리도 직선의 소유의 경계안에 사는 우물안의 올챙이임에 틀림없는 것 같아요. ㅎㅎ.  그냥 횡설....날이 싸늘합니다. 건강유념하시구요.

 뱀발.  지난 주 미*모임 후기에 덧글을 단다. 내용과 형식, 내용-형식의 경계는 없다. 그것을 발딛고 넘어선 것들이 우리에겐 많다. 판소리든 산조든......그런데도 중독된 머리는 다 버리고 다른 것에서 제것을 찾는다. 그리고 나같은 인간은 관계를 다버리고 나를 찾는다. 그 나란 것이 온전히 너로부터 인한 것임에도 그래서 생각도 몸도 마음도 관계도 비좁은 직선의 틈바구니다. 명사란 사상에 중독되어 동사도 형용사도 부사도 어쩌지 못하는 부끄러움이나 자화상만 잔뜩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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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목재신문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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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8-11-25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정합니다.하루에 숨을 이만삼천사십번 쉰답니다. 혹 틀릴지도 몰라 다시 찾아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