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뒤 걸러지는 말들 - 돈 호세,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 8세, 多여행,시인친구들.게로니카,세잔,마티스,아프리카,오묘한감각전달,장곡토,시,희곡,올가,박물관,콜라쥬 

>> 접힌 부분 펼치기 >>


 

1.  날림-신박연대 공연도 있던 송년회 소묘

따뜻하고 포근한 모임, 풀어내는 올해 책들의 시선 한올한올은 마치 짜 맞춘 듯하다. 소외,열외 이땅에 눈길한번 제대로 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목소리로 향하고, 그 울림을 찾는 책들로 가득하다. 예수를 다시 불러내고, 나르시즘에 빠진 철학을 되묻는 철학자를 맞고...생활에, 삶에 녹힐 것을 이야기한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엘지넌에게 꽃을/엄마와나/위험사회/공장이여잘있거라/철학삶을만나다/술취한코끼리 길들이는법/예수없는예수교회/천둥치는밤/무탄트메시지/사찰그속에깃든의미/지금이대로괜찮아/서로주체성의 이념
 

 

  

 

 

  

 

 

 

 

 

 

  

 

 

 

 

[함께라면 우린 지는 법이 없다]란 현수막 가운데 [함께]에 내내 마음이 걸린다.

 

2. 올해 마무리 책읽기

호의와 호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백과 소문도 믿을 것이 별반 없다고 한다. 연정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나로 되먹임되고 증폭되는 이상, 나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이 상처나 슬픔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면, 이 상처나 슬픔은 나로 증폭되는 것이 아니라 너로 가는 길이므로 나 이상의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마음의 최소주의를 이야기한다. 사랑은 애초에 거품이 잔뜩 끼거나 안개이거나.


   
  월하정인 " 달은 기울어 밤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 그러나 삼경이든 오경이든, 두 사람의 마음을 두 사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하는 법.
 
   

 


   
 

고백과 소문의 사이는 좁아보인다. 그 좁은 틈을 열어 다른 삶의 지평을 불러내는 방식은 삶의 극진함 외에는 없다. 고백보다 깊고 소문보다 빠른 생활의 조직을 재구성하는 '극진함'에서 人紋의 미래는 재가동할 것이다. 254

고진은 고백조차 권력의지의 발현이라고 본다. "왜 항상 패배자만 고백하며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 의지이기 때문이다. 고백은 약자의 언설양식을 취하는 듯하지만, 그 양식은 이른바 소통행위의 순수성, 진정성, 충일성을 전유하려는 피학대-가학적 권력의지의 도착을 숨긴다.247

나는 이해를 오히려 상처와 결부시킨다. 이해를 감정이입과 추체험, 실존범주, 그리고 은총의 장 속으로 수렴하는 태도에는 각기 그 나름의 일리가 있겠지만, 근년의 내 해석학적 고민은 무엇보다도 '상처'를 둘러싸고 회전한다. 라캉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상처에 대해 무지한 한, 인식과 이해는 영원히 그 스스로를 놓칠 수밖에 없는 숨바꼭질의 상태에 빠질 것이기 대문이다. 빛에 의해서 감각되는 모습은 그 그림자와 더불어 완결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227

사랑을 현상학적으로 환원시켜 그 순수한 본질을 얻겠다는 발상이란 현실의 수사를 그저 비현실적으로 도착시킨 것에 지나지 않아보인다. 본질이란 그저 매개 이전을 희구하는 유토피아적 박제물일 뿐이다. 인간사의 무수한 열정처럼 사랑은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꼬이고 얽히고 비틀이고 갈라지고 증식하고 불붙어 타고, 혹은 잿뱇의 폐허를 만드는 '환원불가능한'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219

 
   


 

 

 

 

 

 

 

동무론

   
 

무엇보다도 상처는 삶을 미로로 만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처받은 자는 주행로/이동로가 아닌 미로의 삶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미로를 걷는 것으로서의 산책은 상처가 덧나는 원천인 의도와의 싸움에 다름 아니다. 산책은 상처입은 미로의 삶이 그 기억, 혹은 의도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외출이며, 그 오연한 의도의 체계, 앓을 수밖에 없는 기억의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려는 생활정치다. 329

우리네 일상의 세속이 속절없는 우연이라는 사실에 대한 역설적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 우연이 제도와 관습과 체제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깊이 은폐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우연의 바깥이 없다는 사실이 거꾸로 그 우연을 필연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겸허하고 예리한 배움이다.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사원, 그리고 기업과 국가는 모두 한갓 역사의 우연일 뿐이다. 실은 누구나 알기 때문에 곧 그 사실은 우리의 체질과 공동체의 공기 속에서 깨끗하게 잊혀진다. 322

공원이든 무엇이든, 어떤 공간 속에 참여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각자의 삶이 일상의 속력과 방향을 재조정하면서 자그마한 결절을 맺으며 미래를 재조명할 수 있다면, 公園공원, 혹은 空圓으로서의 그 사회적 가치는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321

정신분석의 지혜가 반복해서 일러두듯이, 필경 삶은 앎이 아니라 견딤의 물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파우스트적 욕망이란 단지 앎에의 의지가 아니라 앎을 견딤으로써 개시되는 새로운 삶의 욕망이다. 진선미의 이데올로기야말로 삶의 진실에서 가장 멀리 놓인 박제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악의 명상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315 [해바라기 콤플렉스]

그 모든 신화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처럼 삶의 시작은 곧 위반이며 상처다. 해바라기 콤플렉스란 삶을 체계적으로 되-풀이하게 만드는 그 원초적 오염과 흠결, 위반과 상처를 외면한 채 반 초월론적으로 가꾸는 거울방 속의 광학적 행복을 가르키는 것이다. 314 [해바라기 콤플렉스]

상식적인 얘기지만, 우선 나르시시즘의 생산성을 긍정하되, 그것을 내내 응연히 지목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메타적 비판의 층위가 생활양식의 구체성 속에 안착, 유지되어야 한다. 가령(약간 더 따끔한) 아이러니나 (약간 덜 따끔한) 유머는 곧 그러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안이한 비판은 관념론으로 흐른다. 혹은 심하게는 신비주의적 수행도에 빠져 또 다른 형식의 나르시시즘을 반복할 뿐이다.304  [나르시시즘과 함께, 나르시시즘을 넘어가는 새로운 사이길] 304

이성적 지식은 존재자의 고독을 완성할 뿐, 타자를 만나는 실천적 매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성은 스스로의 의도 속에 보편을 품은 채 그 자체로 오만한 고독 속에 머문다. 레비나스의 선택은 공간보다는 시간, 남성보다는 여성, 앎보다는 사귐, 그리고 자아보다는 타자로 실그러진다. 그에게 "사귐이란 앎을 통하지 않고 있음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며,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일면 그것은 시간과의 사귐이 지닌 어떤 맥리를 살핀 것이라고 볼 수 도 있다. "그 자체로 모든 자기정립을 거부하는 시간"은 이로써, 이론적 자기차이화의 변증법적, 상징적 일상 속에 구금된 지식인들의 뺨을 때리며 변함없는 실재로서 침범한다. 292 [타자]

타자의 개입이 없는 자아만의 공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겹의 진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로써 다만 언어가 발설되고 유통되는 조건과 담론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근거를 물었을 뿐인 블랑쇼처럼, 나와 타자가 만나고 헤어지거나 섞이고 해소되는 지점과 방식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생각이 앎을 죽이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실천적 노력인 셈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아직 앎이 아니다. 앎은 의심이라는 교차/교통의 마찰에서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생성적 한계와 조건을 통해 재구성, 재서술된 것임을 보임으로써 거꾸로 타자를 주제화하는 계기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동무로서의 연인, 연인으로서의 동무도 이러한 역설적 타자의 지평을 느리게, 몸을 끄-을-면-서, 그리고 이드거니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서 조형된다. 290-1 [타자]

타인의 고통은 감정이입의 자동성에 의해 삼투되는 것이 아니라 힘겹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혹은 수잔 손택의 지적처럼,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 독아론에서 벗어나는 길은, "유물론적 마주침의 외상'을 겪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 기질과 버릇을 털어내면서, 내 몸을 끄-을-고 너를 향해 끈질기게 나아가는 지난한 마찰의 반복을 통해서 조금씩 극복된다. 심리적 동일시의 환상을 벗어나 무한하게 개방된 '현실'로 나아가려는 태도다. 무한으로 열린, 무한이란 부재를 향해 몸을 질질 끄-을-며 자신의 외부를 향해서 쉼없이 걸어나가려는 태도를 말한다. 288-90 [타자]

비평이 가능해지는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교통공간은 사막이나 바다나 도시처럼 사방이 툭 트인 공간이다. 나와 너의 사이,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 규칙과 규칙의 사이, 현재와 미래의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창발적 외상의 효과를 말한다. 비평은 이 사이를 창의적으로 견디는 일이며, 그 사이에서 얻는 효과의 생산성에 체계적으로 기대는 일이다. 결국 비평은 사회성이라는 사이공간을 뚫어 타자의 자리를 얻으려는 일련의 언술적 실천이다. 위기이면서 기회인 사이공간의 교통-생산성을 노리는 사유와 실천. 286-7 [비평]

신뢰는 타자를 향해 자신의 몸을 끄-을-며 나아가는 사회적 비약의 이치다. 요컨대 그것은 나와 너 사이의 심연을 사회적 실천의 새로운 버릇으로써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건축이다. 신뢰는 마음과 함께, 마음을 넘어가려는 실천적 관계의 재구성에 대한 문제다. 마음을 짐작하거나 유추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적으로 제어하려는 근기와 슬기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뢰는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을 공대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조금 더 물러나서 말하자면, 그것을 나의 현재와 너의 미래 사이에 놓인 원초적 심연을 근기 있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실천방식이다.  283-4 [신뢰]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연역한 사랑, 혹은 마음에 의해 정당화된 사랑은 나르시시즘일 뿐이며, 프로이트처럼 냉정하게 말하자면 결국 수음의 심리적 상관물이다. 사랑의 발생과 기동이 특별히 마음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음은 워낙 실없는 인과와 자기중심적 필연성을 제멋대로 짜맞추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랑이라고 불러줄 만한 움직임이나 흔적이 기동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 속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사이', 내 계교지심의 레이다를 솔개처럼 벗어나는 타자들과의 '관계'다. 당연히 대안적 모색의 지점으로 숙고해야 할 것은 '마음의 최소주의'다. 심리적인 동물인 인간이 남의 마음을 넘보는 일을 마냥 피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려는 결기이며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버릇이다. 아울러, 연정에 관한 한, 마음은 주려고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것은 마음이라는 사이비 사랑밭을 폐기한 채, 그리고 거꾸로, 말과 살을 적실히 아는 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 동일시의 어휘를 모르는 체, 삶의 방식과 문화로서의 연정을 이드거니 계발하라는 것이다. 280-281 [연정]

타자로서의 연인이란 무엇보다도 '진리를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관계의 양식이다. 그것은 쉼없는 재서술의 진리가 아닌 일리들로써 생활의 무늬를 조금씩 겹치며 변화해가는 방식이다. 278 [연정]

슬기롭지 못한 호의는 오해와 아집의 늪 속에서 소금뿌린 지렁이처럼 뒹군다. 그리고 타자의 물성에 이르지 못한 '생각'은 따개비의 천국이다. 호감이나 호의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닌 듯이 응대하는 실천적 결기를 얻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273 - 인간관계의 새로운 실천을 통해 확립된 그 체질만이 호감과 호의의 풍경을 넘어 그 계보학적 넓이와 무의식적 깊이를 통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272 -호감과 호의는 그 자체로 아직 사회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결국 개인의 나르시스적 구심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중성적 에너지에 지나지 않는다.(그 심리상태는 아침 안개처럼 허망하게 악감과 악의로 돌변할 수 있는 유동적 나르시시즘의 변형태에 불과하다.) - 호의과 신뢰를 구별하는 것은 현명한 인간관계를 건사하기 위해 극히 요긴한 실천적 지혜다. 새로운 버릇을 들이고, 그 버릇을 이드거니 건사할 수 있을 때라야 그 뻔하고 듣기 좋은 말, '일상의 진보'와 '새로운 주체'는 그 내실을 얻는다. 그 누구의 말처럼 '지키는 것은 비록 적으나 얻는 것은 많다. 271 [호감/호의,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

 
   

 

 


댓글(0)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올해 [081231]이 나에게 남기는 말
    from 木筆 2008-12-31 11:48 
    참새들이 30여마리 몰려왔다. 잣나무 및 덤불 사이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부리를 쪼아대고 있다. 잠시 후 인기척이 있으면 어느 녀석의 추임새로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무가지로 포로롱 자리를 잡는다. 잠시 뒤 기척이 잠잠해지면 어느 녀석의 깃발때문이지 모르겠지만, 손살처럼 덤불사이로 축지법을 쓴 것처럼 머리가 반쯤 파묻히는거다.  이 녀석들은 제법 부푼 햇살로 입가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해의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2 o o 8 년에 대한 작은 돌아봄 (3)

여기저기 생각뿌리를 두다보면 그것들이 한데 엉겨붙지 않는다. 이미 세상은 혼자 어쩌지 못하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는 사회다. 흐름이 생겨 몰려다니기엔 서로 정보도 많고, 갈 길의 갈래도 많다. 씨앗들이나 마음들이나 고민들이나 고생들이 몸에 붙지 않을 때, 혼자 감당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고민도 연애하듯 종자돈처럼 뭉치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다는 것에 절감한 해이다.

아마 경험이 많치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생각 또한 깊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그런 부분은 경험을 쌓으면서 후에 되돌아볼 나머지를 둔다. 좁은 사고와 행동밖에 할 수 없는 지금에 비춰 돌아볼 뿐이다. 상상력이라는 것도 그것을 별반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동안 마음을 줄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거울면처럼 반사되기 일쑤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마음이 전달될 수 있거나 온기처럼 따듯해지는 것이라고 호수 수면의 동심원처럼 퍼져나갈 수 있다는 느낌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겉돌던 마음이나 생각들이 더 늘 수 있다는 가능성때문인지도 모른다. 현실은 늘 가능성보다 작게 되는 것은 알지만, 아마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해 이렇게 추스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머리의 의욕이나 기억이나 지식보다 몸과 가슴이 훨씬 더 적확하다. 하고자 하는 것으로 뭉치면 1년, 2년을 넘기기 힘들고, 가슴만의 연대는 무엇을 할지몰라 불만 태우다가 말 뿐이며, 몸의 연대는 진하고 오래가기는 하지만, 가슴과 머리를 만나지 못하면 외롭기 그지없고 울림없는 삶으로 지칠 수 있는 것 같다.

몸도 가슴도 머리도 서툴다. 몸이 더 서투르고 그래서 늘 마음주는 공부라도 해야할 듯싶다. 마음을 받아 챙기는 것도 서투르다. 지나간 뒤 한참에서야 그 마음들을 눈치채기도 하는 것처럼 느리다. 나란 울타리도 너무 좁게두어 영토확장을 잘하지 못한다. 어불성설이기도 하지만 너를 이야기한다는 것. 나의 울타리를 희미하게 한다는 말은, 지금 나를 넘어서는 일인지도 모른다. 머리에 머무는 것을 선언하고 마는 것일 수 있다. 아마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 자신을 알아가는 나이긴 하지만.

일터에도 마음도 몸도, 마음을 섞기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본다. 아마 거울면을 뚫거나 조금은 뜨듯하게 덮혀졌는지 모르겠다. 아주 조금 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속도보다 점점 커지는 외로움이나 각박함의 속도는 더 크다. 그 각박함보다 그 안의 따듯함에 마음을 섞는다는 일이 훨씬 위험하기 때문에 주저하는지도 모른다. 그 따듯함으로 각박함을 감싸 너머설 수 있다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기에, 자칫 기우뚱하다가는 스스로 망칠 수 있는 일이기에 그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듯한 온기에 한눈파는 순간 저멀리 또 다른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수지타산이 더 익숙해서 일 수도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작다. 하지만 덜 각박해지거나 최소한 미지근하는데 도움은 주었을지도, 저 넓은 대양에 물한방울 보탰는지도 모르겠다.

그 많은 따듯함의 연대에 몰염치했던 나이기에 아마 보지도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터에 녹아있기보다는 외도의 마음들이 비치었기에 다가서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스스로 서툰지도 모른다. 그 양쪽 사이에 아마 내가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자신을 위로하는 해석이자 소회일 수 있다.

대학생 친구 한명만 있으면....청년 전태일의 한마디다. 세상을 뚫고 간다는 일. 혼자 해내야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혼자 하는 일도 아니다.  마음을 담은 [몸-가슴-머리]의 연대가 불씨가 되지 않는 이상. 단 한사람의 마음도 녹일 수 없다. 그렇게 마음들이 응겨붙지 않으면, 가슴과 몸의 눈길을 느낄 수 없다면, 모임의 고독감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따듯하지 못한 이유를 여전히 이들의 연대가 아니라 이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상, 따듯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온기에 목마른 시절, 또 다른 찬바람이 불지 않기 바래본다.

하고싶은 것, 해야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잠재되어 있는 혼자의 옆좌석에 같이나 함께를 태우고 이렇게 구분해볼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회자되는 2 o o, q(Q)년을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운영, moim 3.0 그리고 우석훈, 소통 (酌)
    from 木筆 2009-02-16 16:54 
    1. 090214-15   +: 삶과 지금 고민의 연결, 방향성 있는 고민의 숙성. +: 평범한 주부를 대상으로 하며 기획의 결과가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자체 세미나로 삶의 결에 대한 고민, 방향의 결을 모을 수 있는 것일까?(초기 운영단위에서 목적의식은 공유되었는가? 강사와 대상과 이야기한 논제에 대해 공감하였는가? 대상의 의도와 추진주체의 의도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나? 활동가 프로그램으로 접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고민하는 일의 풍요로움

 

 대전 근대사산책이 있던 날, 일요일 늦잠을 자구 버스를 기다리는데 도통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젊은 친구가 건네온다. 먼저 기다리던 여학생은 서울 모대를 수시입학하고, 뒤늦게 온 뚱뚱한 편인 친구는 재수를 결심한 모양이다. 이리저리 나누는 이야기들에 엄연한 현실의 존재감은 둘을 가른다. 쌀쌀한 날씨 두둠하게 내의까지 챙긴 차림, 목도리에 비해 갸날픈 여학생의 모습은 너무 추워보인다. 서빙으로 80만원을 벌었다는 현실. 친구와 영화보러가는 길. 버스에 오르자마자 영화를 보기로한 그 여학생친구. 뚱뚱한 편인 친구는 섞이지 못하고 다른 곳에 앉는다. 늘 이 사회가 그렇듯이 친구의 경계는 선명한 듯하다. 

그렇게 기형도의 시집을 넘기며 만*동 중학교 근처에 버스가 지나자 30대의 아가씨 목소리인 듯한데, 뒤에서도 다 들리도록  어디를 가느냐라구 묻는 소리같은데 곧 관심을 벗어난다. 시대의 우울이 배인 시집 이곳저곳을 들춘다. 그런데 상기된 억양과 톤의 목소리를 계속 이어진다. 아마 화답하는 사람도 없는 듯 싶다. 뚜렷한 대화의 흔적은 없는데 일정한 색깔의 목소리는 짙어지고 마주치는 시선은 없다. 곧 화면에 들어온 30대초중반의 아가씨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지만 모자에 분홍색 하이힐을 신고 깔끔한 차림으로 여전히 공중에 대화를 하고 있다. 버스가 서고 차문이 열리고 주공 3단지 앞 주차장에 내리자 마자 버스에 대고 밝은 목소리로 "즐거운 하루"를 외치고 사라진다. 

그녀를 오늘 다시 기억에서 불러내어 [즐거운하루]님으로 이름을 붙이기로 한다. [즐거운하루]님은 약간 들떠있고  "솔"에 약간 못미치는 음을 낸 것 같다. 그 기억은 쌀쌀해진 대전역, 한켠에 모이고 약간 늦은 다른 분을 기다리는 장면과 겹친다. 대합실 전경을 넣으려고 사진을 찍은 일행의 후레쉬에 날카롭거나 아니면 심심하던, 아니면 일과 가운데 하나로 이을 요량인 노숙하는 아저씨의 실갱이로 이어진다.  초상권을 침해하였다는 것인지 그것을 빌미삼아 뭐를 하자는 것인지. 촛불의 심심치 않은 행동대원 아저씨들이 그날도 어김없었다. 

정신장애인에 대해 서툴다. 편견도 시각도, 더구나 몸으로 겪은 적이 거의 없기에 더구나 더 그러하다. 그저 활자화된 지식으로 지금의 사회가 받아내지 못하거나 격리되거나 폐쇄병동으로, 가끔씩 선생님들의 협박용으로...너희들 그러다가 저기로 간다거나...영화의 잔상으로 남아있는 정도이다. 먼댓글의 [지금도 이대로도 괜찮아]를 읽다가 생각이 겹쳐들어 흔적을 남긴다. 

기형도는 어릴적 기억을 불러낸다. 부친의 사업실패와 병마, 어려운 생활이 그대로 그의 온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정신장애를 갖는 사람들이 일련의 수세대 수십년에 걸친 악순환의 구조뿐만 아니라, 각박한 현실이 제조해낼 수도 있다는 징후에 무척 아프다. 성실한 학생, 회사원, 주부를 가리지 않는다. 정신병을 갖고 있는 경우 더욱 더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강박이 더 어렵게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솔직한 물음을 던지는 것 같다. 아무런 소통방법도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 잘모르겠지만 

자기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너를 마음에 두지 못하고, 관계에 단절된 모습은 우울한 현실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 반대편을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즐거운 하루]님은 안녕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강한 사람의 사회, 구름 위에 있으며 번영하고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사회, 그런 학교나 기업, 지역은 , 생각하면 그 얼마나 부족하고 약한 인간관계밖에 가질 수 없었던 것일까? 둘러보면 어디에나 규칙이나 설명서, 교훈, 지혜 등이 산더미처럼 있는데도, 사람들은 진실에 연결되어 있지 않고, 연결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정신의 황야에 고립되어 있다. 270  

>> 접힌 부분 펼치기 >>



2. '정신장애'라는 꺼림칙한 병에는 인간 자신에 대한 심오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원래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런 생활 방식의 방향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그 생활 방식의 방향이 바로 '계속 내려가는 '방향이고 상승하는 생활 방식에 대한 '하강하는 생활 방식'인 것이다. 266   

 

>> 접힌 부분 펼치기 >>


 

3. 어쩌면 성공이라는 것이 이룰 수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그 다른 한끝에는 절망이란 것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이겠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공이란 것이 신기루에 자신을 맞추어 넣기에 모든 다른 것을 외면하는 것이라면 절망이라는 광맥은 모든 고생과 고민이 이 세상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고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299로 이어진 생각  

>> 접힌 부분 펼치기 >>

4.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발버둥을 쳐도 해결할 수 없는 고생이나 고민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는 고생이라든가 살기 힘든 것을 모두 제거해 가벼워지고 편하게 살고 싶다는 그런 결벽증 같은 바람이 질병처럼 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환경이든 사람은 분명히 [고민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고민하는 힘이 있기에 병을 고민하고, 병과 함게 살아가는 인생을 고민하고, 살아가는 것의 풍요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고민하는 힘을 되찾고, 고민을 깊고 넓히려는 일이 필요하다. [고민하는 일의 풍요로움]. 문제나 고생, 고민을 없애지 않는다. 177,8,9 요약 



댓글(2)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즐거운 하루님은 안녕할까?
    from 木筆 2008-12-26 00:34 
       대전 근대사산책이 있던 날, 일요일 늦잠을 자구 버스를 기다리는데 도통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젊은 친구가 건네온다. 먼저 기다리던 여학생은 서울 모대를 수시입학하고, 뒤늦게 온 뚱뚱한 편인 친구는 재수를 결심한 모양이다. 이리저리 나누는 이야기들에 엄연한 현실의 존재감은 둘을 가른다. 쌀쌀한 날씨 두둠하게 내의까지 챙긴 차림, 목도리에 비해 갸날픈 여학생의 모습은 너무 추워보인다. 서빙으로 80만원을 벌었다는 현실. 친구와 영
 
 
파란여우 2008-12-26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려요. 날 밝으면 읽을테니 감추지 마세요.

여울 2008-12-3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님덕분에 좋은 책 보았습니다. 어쩌면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지도..ㅎㅎ
 

2 o  o   8

지금 [입속의 검은 잎]과 [지금 이대로 괜찮아]를 보고 있다. 어찌하다보니 벌써 짧은 시간을 잘라 들여다 봐야할 것 같은 세밑. 굳이 되돌아봐야하는 숙제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저런 생각이 겹쳐들어 흔적을 남긴다.

1. [소리의 뼈]를 보다가 마음의 뼈 생각이 든다. 그렇게 치환해서 읽고 있다. 마침표가 끝난 뒤에도... ...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한 학기 내내 그는/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그러나 어쨌든/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1984. 7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에서 )

2. 이제는 다가올 일을 예상하고 점을 치는 일이 쉬워졌다. 조만간 식품위생 관련하여 문제가 생길 것이다라구. 기상이변이 아니라 외려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 되었기때문에 폭설이 오구 가뭄이 올 것이다라구. 정부는 철학도 없고 정책도 없고 행동력만 있으므로 사고를 치기만 할 것이라구. 사람들은 거시와 비평의 전망탑에서 살고 있으므로 자신의 발과 손이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것이라구. 키보드좌파라구 가두고, [우리가 하면 로맨스가 남이하면 불륜이기에]가 [우리-----불륜]까지를 낳고 낳고, 무한 수렴을 하다보면 우리는 없고, 불륜만 자가증식하게 되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론상 없는 것으로 귀결되기때문에. 잘한 것은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못한 것은 그놈때문이기에 어김없이 [때문에]의 거미줄에 걸려들게 되어있고. 히틀러가 그렇게 [유대인이기때문에]란 사고의 함정에 걸려든 것처럼 내사랑좌판 그렇게 로망의 마법에 빠졌을 뿐이고, 거기에 헤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불륜과 [때문에]를 증식할 뿐이고. 그렇게 좌파는 좌판대에 오르고 있을 뿐이고. 여전히 거시와 비평의 전망탑 속으로 향한 길만 내고 있을 뿐이고...  
           
                         이것이 2oo8년의 진보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이자 자신에 대한 소회이다.

3. 책으로 만난 사람 가운데 손을 꼽으면 니클라스루만이 인상적인데 초입만 들어서다만 느낌이구, 기세춘선생님의 동양고전입문은 아직 심호흡을 하며 발을 들이지 않고 있지만 관점이 워낙 파격적이라 주춤거리고 있다. 스피박할머니는 여전히 마음만 가득하지만 마음을 자라게 하지 못한 한해가 된 것 같다. 지젝-고진은 얼핏얼핏 읽지만 윤수종교수님이 소개하는 라이히, 가타리의 시선에 자꾸 걸린다. 들뢰즈의 열풍처럼 지식계의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올해 독서 가운데 좋았던 것은 풍경-그림으로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러고보니 말미에 본 김상봉교수의 관점도 인상이 깊다.

4. 관점을 품지 못하는 시대 - 아니 관점을 다르게 품을 여유가 없는 시대라고 해야하나 싶다. 아마 조바심을 내거나 어설픈 앎으로 재단하려는 사적욕망인지도 확인을 해보아야 하나라는 반대질문을 놓아두고 이야기를 이어 가본다. 삶이 정치로 녹아든 상황. 그것이 녹을지 겹칠지 겹치는 와중인지는 모르겠지만, 삶과 운동, 활동을 중첩시키지 않고서는 논의를 전개시키기가 힘든 사회가 되었다. 각개약진의 탁월한 실력들을 존중해야하지만, 고민을 좌판에 깔아놓거나 전시하지 않는다.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듯 사적공간에서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 물론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부터 확인을 해봄직한 것일까? 무엇을 고민해야하는지부터 질문을 늘어놓는 것이 순서이겠다 싶다. 어떻게 하고싶은데, 어떻게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는데가 시식코너에 있다고 하자. 기역이란 사람이 니은이라고 품평을 하고 디귿이란 사람이 리을이라고 품평을 하고 ....미음이 비읍을 품평한다고 하자. 왜 품평을 하냐구, 오히려 절대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품평을 하지라고 되묻는다면 언제까지 품평을 의탁할지 되물어보자. 맛의 품평이 다르면 다를수록(물론 품평하기까지 공부도 준비도 감도 익혀야하겠지만) 다가올 현실은 양쪽 극단사이에 있을 확율이 높다.

어쩌면 우리가 자꾸 마음들의 렌즈를 모아야할 지점을 모으지 않으려고 하거나, 자꾸 대행시키는 습속이 걸림돌이지 않나 싶다. 다르게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에 시선이 멈추도록, 서서히 좁아져서 빨리 지나가는 관이 아니라 확 넓어져서 서서히 갈 수밖에 없는 시공간을 만들지 않고서는 그 다음은 없다라고 해야하는 것일까? 일리와 오감의 체험을 나눌 수 있도록, 그것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시간과공간을 만드는 일이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인지?란 생각도 겹쳐든다.

사회가 자꾸 삶과 정치-경제의 공간을 서로짓누르면서도 간간이 답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 그 공간사이로 짓눌려있지만 한데 엮여 숨쉬는 진보의생공간이 들여다보이는 것은 아닐까?
살갗애이는 삶과 연결시키는, 마음들을 렌즈에 쏘이게 해서, 햇침이 모여 검은종이를 태우듯 태울 수는 없는 것일까?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애타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게 하기엔 자칭진보라 칭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눠줄 것이 정말 많은 것은 아닐까? 처리하지 말고 느리게 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정말 빨리갈 수 있는 지름길은 아닐까? 우리는 꼭지점을 너무 빠르게 통과시켜왔고 바뀌어 왔다. 너무도 빨리빨리 회계년도의 고점을 통과시키는 버릇이 있어 늘 늦었던 것은 아닌가? 꼭지점을 돋보기로, 현미경으로 셈으로 템으로 들여다보고 걱정하거나 될수록 천천히 아픔을 공감하면서 지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5. 루만은 소통을 이야기하면서 소통을 세가지요소로 나눈다. 정보-통지-이해로 말이다. 통지한다고 해서, 정보를 준다고 해서 소통되는 것이 아니란다. 이해되지 않으면 결코 소통할수도 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패션으로 소통, 유행으로서 소통을 색바랜 깃발처럼 끝이 났다. 이해하는 척이 아니라 정녕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하지 않으면 다음을 접어들 수 없다. 그래서 십년이 지나도 소통하지 않았으므로 늘 부단히 이해하려고 할 뿐이다. 그러니 결국 하거나 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6. 올 한해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고 만나게 되었다. 마음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늘 감사하고 고맙다. 하지만 마음이나 생각, 고민을 품고 나누고 자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서로 키울 수 있는 느낌-아픔-즐거움들부터 생각해보아야겠다. 마음 가득한 인사와 만남들이 기대된다. 그래서 2OO9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올해 감사하는 소회 가운데 하나이다.

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