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중세인,근대인, 그리고 현대인?과 한국인의 대위(ing)

낭만적 사랑의 변천 - 사랑,결혼,섹스(성)



1. 열정. 어떻죠. 위험한가요? 개인이란 존재감이 없는 시대라면, 신에 대한 사랑만이 이해되었다면? 일방을 향한 열정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요? 그것도 주체할 수 없다면? 말입니다. 아마 이상한 취급을 받았겠죠.

2. 중세에는 어떠했을까요? 기사와 귀부인의 슬픔을 감수하는 로망(마조히즘적 사랑이라고도 하더군요.) 물론 결혼은 번외였습니다. 결혼과 사랑을 같이 생각한다는 것은 별반 오래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3. 우리들에게 각인된 로멘스의 스토리가 있죠. 뻔한 스토리인데? 그 뻔한 스토리대로 우리 행동이 프로그래밍 되었다면 어떡하죠. 비

4. 그 뻔한 스토리, 뻔한 프로포즈로 대응하지 않죠. 진실을 가장한 일방의 요구는

5. 개인, 가족, 어쩌면 전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사회의 구성물이자 빚을 지고 있는 셈이죠. 

[  ]의 코드 (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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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ng)
    from 木筆 2009-05-06 10:17 
      아무생각없이 봤는데, 심보가 생긴다. 가시자ㅇ미님 글에 보태고 싶기도 하구 말이다.
  2. 사회적 역행_우리를 떠받치던 지지대의 소멸(ing)
    from 木筆 2009-11-10 11:29 
        -[  ]의 고고학- 키워드 - 열정으로서 사랑, 낭만으로서 사랑, 섹슈얼리티, 결혼, 사랑, 친밀함, 경제의 화폐, 정치의 권력, 학문의 진리, 쾌락/사랑의 차이, 정보, 통지, 소통, 주고받는것, 우정, 사랑과 우정,인격적관계/비인격적관계,개체화, 차이,재귀적,역설,문제,코드,프로그래밍,체계,환경,주체, 둘만의 친밀성, 진리/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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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책사이 소로나 샛길은 없는 것일까~. 학자와 학자 사이에도 그 길은 없을까? 잔잔히 스며드는 그  소통의 공간은 없을까? 독립된 성처럼 장벽을 드리우고 서있는 책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가? 그 공간을 채워주는 일들을 지식인들은 하고 있는가? 어디 장사될만한 것에 혈안이 되어 이식하는데 급급할 뿐, 그 앎들이 스며들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식의 사대주의 분위기에서 자유로운가? 그 앎들이 암초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소통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나다닐 수 있는가? 사회학도 아니고, 경제학도 아니고, 코끼리 다리만지듯 느낌만으로 나눈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도 하지만, 젊은? 소장?학자들의 고민의 결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제를 넘어본다.

[일상의 시화] 부문이나 분과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이 낱개가 아니라 모두 한묶음이라는 말. 그리고 마음이 박제화되는 것이 아니라 늘 말랑말랑하게 살아있게 만드는 시의 세계. 학문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것을 반성해야된다는 점.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어렵지 않은가? 지극한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지금 여기에 비춘다면 얼음처럼 굳어있는 마음경직주의자가 대부분인 현실에 조명한다면, 그 얼마나 엄청난 바꿈의 말씀을 전하는지도 눈치채야할 것 같다. 등대에서 조망하면 본다면(그럴만한 능력이 생긴 것이 다행이라고 봐야되는지?!) 그렇게 단선으로 평가의 일획을 긋는 것이 평론가의 능력과 마음이겠지만, 인식의 시선을 몸높이로 가져내려와 본다면 새기거나 느껴야될 열정이 만만치 않다. 그리고 기본적인 문제의식에서 보고 새기고 하면 평론이 일점으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다점으로 풍요로움을 만드는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김우창

[몸으로끌면서] 이분은 어렵다.아니 너무쉽다.아니 무서운가.그의 인문의 흔적을 쫓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숱한 서양학자들은 그의 사유의 결에 아주 조금 필요한 부분으로 존재하는데 쉽고 명쾌하다. 에둘러 올라갈 필요없이 숱한 방황을 너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무섭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동무의 그물은 넓고 크다. 외려 넓고 큼이 단점이기도 하겠지만, 생각과 연인과 친구의 벽을 넘으면서 넓다. 구체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그 추상을 작심하고 따라가볼만하지 않을까? 그가 뜬금없이 뱉는 생각의 다양한 결. 일상을 점유하고 있는 술과 사유. 그가 감추고 보이지 않는 일상의 다른 사물.정물.움직이는 물이 어떻게 포착되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지금을 넘는 것도, 이 시대, 이 자본주의시대를 타넘는 방식. 몸으로 끄을 면서... ... 자유롭되 자유롭지 않은...어쩌면 머리의 사유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말하고 있는 것은 가르키는 엄지손가락이 아니라 나머지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 몸의 사유를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영민


[포월소내행복....]말을 만든다. 지금 관성에 짓눌려있는 단어를 되새김질한다. 잘게잘게. 그리고 그 단어의 폭이 여러층위이면서 그 설명을 듣다보면 어느새 나만의 사유가 너의 사유로 가까이 가고 있다. 그리고 일상의 뜨거움으로 남는다. 나의 너의 고정관념은 벌써 곧 빠질 치아처럼 흔들리고 있다. 보수는 진보는 이들의 말에 눈길을 주고 있는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찾아내려고 하는가? 그저 일개 소부르조아 지식인의 영양가없는 말들인가? 마음에라도 그 말과 단어를 담갔다가 꺼내보았는가? 밑져야 본전 아닌가? 한번 마음에 적셔봐서 아니면 말구. 마음이 굳어 도대체 움직일 수 없다구. 그렇다면 아예 얘기하덜말던가?? 생각의 결을 넓히는 마술을 가진 분들이다. 늘 당연한 사물이 아니라 추상단어의 결을 넓히는 재주?(감히). 그러니 당신의 일상이 그로인해 풍요로울 수 있다는 점. 다른 센서를 가질 수 있다는 점. 당신이 사랑하는 애인들에게도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점. 궁금하지 않은가? 김진석 김용석

[서로주체] 나르시스. 개인의 천국. 그로인한 불행. 서구철학과 학문의 맹점. 우리사유의 구할은 이것. 그러므로 몸에도 가슴에도 손과 발에도 맞을 수 없다. 더 이상 남을 것도 없다. 학자들이 인정을 한다면, 그 전제의 잘못을 시인한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출발한 학문의 맹점을 파고들어야할 의무가 있다면. 움직임이 없다. 말을 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와 너. 이기의 사유가 아니라 되기. 나의 사유, 너의 사유가 아니라 나-너의 사유. 너-나의 사유는 출발할 수 있을까? 그 사유가 일상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 문턱과 저지선을 만드는 사람은 없을까? [나]의 불안에 서있는, 붙임살이에 대해 사유가 번져나갈 수 있을까? 학문과 학문사이를 넘나들 수 있을까?  김상봉

[이기가 아니라 되기]머리의 공백을 너무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분. 하지만 너무도 이지적인 분들. 사유의 날은 서고 다가서면 베일 듯 날카롭다. 그 사유를 넘어서면 부드럽고 애잔하고 어깨와 웃음이 동생처럼 형처럼 정겹다. 천양 학자. 완벽.이란 단어가 겹친다. 그들이 현실을 몸을 끌면서 너머서고 있다. 소수자이기가 아니라 소수자되기. 그들의 사유는 머리에 멈춰서고 있지 않다. 끊임없는 하향의 향기. 가슴향이 난다. 손발의 소금내가 나기 시작한다. 했다. 되기란 용어는 아무나 쓸 수 없다. 쓴 적도 별반없다. 몸과 가슴, 손발의 뜨거운 효용성을 녹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정우 윤소영

[용광로] 사유를 머리로 녹이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과 손, 발로 녹이는 학자가 있다. 그래서 늘 그의 글을 읽다보면 먼저 데인다. 주춤거려지고 나의 정체를 무너뜨릴 각오를 하고 그녀의 생각을 넘겨야 한다. 아리고 아프고 말미 공황의 지경까지 생각은 흐뜨러진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 큰 한숨을 쉰다. 며칠이 지나 몸은, 몸이 누리고 있는 권력은 머리보다 먼저 잊는다. 잊으려 몸부림친다. 머리의 악다구니로 다가서지 않으려 애쓴다. 다음글이 무서워진다. 그의 가슴과 손발의 공간엔 머리의 구획이 필요없다. 부문의 울타리가 필요없다. 열정과 동사, 형용사가 일상을 다 채우기에 머리의 성벽은 이미 무너져있다. 그러니 집착이고 머리사유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 거울에 비춰 얼핏 보인다. 존재이전이 필요한 사유의 용광로이다. 정희진

[나쁜소년] 나는 그에게서 김수영을 본다. 그가 마누라에게 스스로에게 남편에게 김수영의 언설을 뱉으리란 것을 안다. 그리고 무뎌진 세월의 겨울을 그의 푸른 유리조각이 실금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조금씩 김수영이 되어가고 있는 밥벌이의 비루함을 끌며가는 후원군들이 있음도 안다. 밥벌이의 비루함이 그렇게 유리조각을 품고가다 그렇게 밥벌이의 신성함, 밥벌이조차 되지 않는 현실을 끌고 만나고 할 것이라는 허언도 만나게된다. 그리고 이미 바닥에 긴 채로 끌며 가는 찬연한 꽃들의 소리도 인지하게 된다. 아마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흔적의 탑을 쌓아왔음을 저 봄꽃 떨어지면 느끼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땅엔 김수영이 너무도 많다. 이땅엔 김수영의 방언이 너무도 많다. 다만 듣지못할 뿐, 맛보지 못할 뿐, 느끼지못할 뿐. 섞이지 못할 뿐. 그로인해 외로움을 한수 던다. 그로인해 김수영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로인해 김수영이 일상을 뜨겁게 달굴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게 된다.  허연

뱀발.  

1. 한결같이 [나] [개인]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그것에 중독되어 있음을 말한다. [너]로 향하고 [몸]으로 향하고, [가슴]으로 향하고 [몸]으로 끈다. 하지만 인문을 말하는 지식권력은 아무말이 없다. 그 성이 이미 무너졌음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 잘난 인문을 읍조리고 팔고 있다. 성밖의 외로운 싸움과 인문의 길을 내는 분들의 외로움만이 더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 유행하는 학자의 생각꼬리를 잡아 이땅에 풀고 있다. 맥락도 이력도 밝히지 못하면서 소매를 하고 있다. 그런면에서 얼마나 든든하고 틈실한가? 현실에 우리에 착근하는 학자의 길이 놀랍지 않은가? 고진에 들썩이고, 지젝에, 또 다른 맥락없는 수입이 유행처럼 바닥을 훑고, 인문의 지평은 넓고 깊어지지 않는다. 사대의 그늘아래선, 일그러진 근대의 패턴을 되풀이하고선...(너무도 독선적이고 주제넘은 생각..시건방..말을 듣더라도 느낌을 나누고 싶을뿐...) 

2. 사차원의 세계에서 한결같이 이차원을 이야기하다니, 부대끼고 부딪치고 담쟁이 덩굴처럼 절망의 벽을 넘는 방법은 타넘는 것이라고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그렇게 넘다보면 지금 우리를 옥죄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길도 그것이라 한다. 얼마나 지금여기의 우리가 몰핀에서 벗어나는가가 관건인가? 지금여기를 느낄 수 있는 방법도 그것밖에 없다는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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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_9 내맘대로 독서 편린 결산 (1) (ing)
    from 木筆 2009-09-09 16:56 
    내맘대로 독서 편린 모음  지금 1. 통제가능하지 않는 과학기술에 대한 앎의 경고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에 잘 나타나 있다. 과학기술의 단맛만 우려낼 경우, 그 과학기술이 끌고가는 위험은 어떻게 되돌아올 것인지, 자본의 세계화와 같은 흐름으로 위험은 지구화되고 있다. 경제만의 세계화와 위험은 어찌 그리 짧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자웅동체처럼 자신을 증식시켰는지 모른다. 2. 니클라스 루만은 우리가 어떻게 다른 세상을 볼 수 없는
  2. [깜짝이벤트] 누구일까요?
    from 木筆 2009-11-20 13:54 
            자신의 머릿속에 어떤 사상을 갖는 자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될 위험성에 빠진다.   같은 생각을 갖는 두 사람은 바보로는 취급될 수 있어도 미친 사람으로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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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반납기한을 하루 넘겨 에돌아 반납하다. 도시의 틈새,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건물들을 지나고 버스를 타고, 언덕에 지식의 위용을 부리고 있는 듯한 도서관으로 들어서다. 빼곡이 들어선 신간도서에 눈길이 가 한참을 들여다보다. 몇주전과 그대로이지만, 간간이 섞여있는 시집들이 봄의 색같다. 그러다가 [천하나의 고원]을 집어든다. 들뢰즈/가타리,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낯설기만한 유행처럼 현란하기만한 활자들을 생성한, 겉맛만 돌아다니는 현실 속에, 철학자 이정우의 사유는 얼마나 깊을까? 어디를 가고 있는 것일까? 집어든 책에 빨려든다. 후기부터 거꾸로 보다. 부제가 소수자의 윤리학을 위하여이다. 다 정리하고 하고싶은 이야기가 말미 가지런히 놓여있다. 

생성과 존재가 층위가 다른 것처럼 편취해가는 현실을 보고, 그릇된 해석에 그것을 같은 층위에 점선으로 섞어놓는다. 그리고 [ ]이기가 아니라 [ ]되기의 읽기는 실선과 점선처럼 날카롭다. 끊임없이 따라붙는 이분법의 질곡을 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듯 모를 듯, 모를 듯 알듯 이어나간다. 달팽이처럼 기어서 넘는, 현실을 넘는, 사회운동의 뿌리깊은 문제도 그 안에 담겨있다. 그리고 시집과 책들앞에 서다가 그림들을 보다가 일어서다. 도시의 불빛은 완연하고, 불빛에 바랜 목련은 차마 눈을 건네기가 아쉽다. 

도서관 정문을 나서는 길. 책의 말미가 복받쳐 올라오고 뭉클거린다. 사람들 생각이나 마음은 다 한결같은 것은 아닐까 싶다. 넘거나 감싸안아 넘는 길의 험함도 그려려니와 마음의 렌즈에 모아지는 시선들이 친구의 가슴처럼 따듯하다 싶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시집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딱딱하고 낯선 책을 보고 뜨거워지다니 이해할까? 때로 건조하기만 한 책들을 보다가 나면 그럴 때도 있는 것을 어떡하랴.  

박재동화백의 그리스 여행 1,2부(올림포스산)도, [권력의 병리학], 고통의 이해도 함께 섞는다.  

blog.naver.com/pkies/11004390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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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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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자들은 서양의 중세를 암흑 시대로 보았다. 이런 중세관의 근저에는 고전 문화에 대한 동경의 감정이 있었고, 자신들의 시대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근대 특유의 세계관이 있었다. 이런 부정적인 중세관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와 19세기, 심지어는 20세기 전반부까지 이어졌다......최근 몇십 년 동안 중세사 연구자들이 거둔 중요한 연구성과가 서양 중세의 역동성 이다. 상식적인 역사가라면 중세 사히를 야만과 무지가 지배하고 기술과는 거리가 먼 사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늦어도 9세기부터 생산 방법상의 수많은 기술이 혁신되었고, 이는 고전 고대에 비해 커다란 진보를 뜻하는 것이었다. "몇 세기 동안의 비밀스런 혁명"이란 표현을 쓰면서 강조한 중세의 전반적인 발전에 대해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서양 중세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중세사회의 역동성의 핵심을 이루는 기술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변화를 알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독특하게도 근대인, 고대인, 기독교인의 교차점에 서 있다. 그는 또한 종종 이교도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을 뒤섞어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비판적이지 않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쉽게 저지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다양하면서도 통합된,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재현을 보여주는 주제표현 방식이다. 셰익스피어의 입지는 그리스인의 호메로스의 입지, 로마인들엑 베르길리우스의 입지, 이탈리아인에게 단테의 입지, 에스파냐인들에게 세르반테스의 입지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의 시적 상상이라는 거울을 모든 자연과 역사에 비춘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우리를 초대한다.  그의 시선은 인간의 넓은 세계 전체에 뻗어있는 동시에 인간 감성의 가장 깊숙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그는 '실재한 인생'의 이야기, 즉 역사적 인간으 생애가 신화적 이야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천재성은 인물묘사에 일차적으로 표현되는데 900명이나 되지만 각각 다른 인물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이며, 각자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다. 45-46 

베르길리우스(로마, BC70-19년)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는 호메로스의 모방물인 동시에 그것과 매우 다른 시도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시의 여인 무사가 노래하지만, [아이네이스]는 전쟁과 영웅을 내가 노래한다는 행으로 시작한다. "내"가 노래를 부른다. 아이네이스의 운명은 호메로스의 영웅들의 운명과 같은 종류가 아니다. '모든 유럽의 고전'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방식으로 전통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문학을 개인과 사회의 투쟁으로 삼은 것은 이것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40 

근대인들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신에게 내쫓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 주장한다. ..'자연상태'에서 가지고 있던 '자연권'이 시민사회에서도 보장된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뻔한 것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혁명적인 개념이다. 83

 
   

  

   
 

 한국인들은 현대 사회에 이르면서 자기의 마음 속에 여러 가치들을 공존시키고 있다. 때로는 샤머니즘적, 때로는 불교적, 때로는 기독교적 가치를 그리고 때로는 전통적 가치를, 혹은 현대 서양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 것들이 자기의 마음속에서 정제되어 나름대로의 통합된 자아를 형성치 못하고 낱개로 흩어져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최근 20-30년 사이에 일어난 한국 사회의 급작한 변화 속에서 더욱 확연하게 표출되고 있다. 상가를 가면 때로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그 뒤에 바로 스님이 와 염불을 하며 대개의 조문객은 유교식의 예를 올린다. 모든 가치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편리에 따라 이 가치 저 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의 갈등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러한 여러 가치의 공존은 자아를 괴롭힌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의 특징은 조각난 자아의 고통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동시 다중적 자아'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동시성적 자아는 역사적 현실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혼란기는 대세의 편에 자기의 생각을 맞추도록 작동하면서, 자신은 애매하면서도 타인에게 분명한 것을 요구하는 흑백논리를 부추겼다. 

이러한 동시성적인 자아는 사회적 논쟁이나 갈등에 있어서 논리적 일관성을 파괴하고 상황에 따라 자기편에 유리한 방향으로의 변명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무의식은 목적 강조를 위한 과정의 무시, 그리고 감성 위주의 비논리성과 함께 상승효과를 내면서 퇴행적 양태로 변모되기 쉽다. 한국사회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도 이러한 퇴행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74-77 요약

 
   

 

뱀발.  

1. 마지막 책은 58쪽 이후 한국인의 집단무의식-병리원인 장이 읽을 만하며, 다른 장은 너무 보수-진보를 정신분석적의미로 해석을 하여 착 달라붙는 맛이 없다.  

 2. 인문학스터디는 인문공부의 필요성을 문학,예술-철학정치에서 긴밀도가 있으나 역사학과 기독교사상은 필요성과 소개의 간극이 너무나 큰 것 같다. 강유원이 서구정치사상 고전읽기에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고전을 읽는 이유, 그 맥락에 대해 요긴한 책들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람이 왜살고 어떻게 살고,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관계를 형성한 시대의 흐름은 여전히 중요한데, 지금 이곳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시선이 고정되고 몸도 고정되어 아예 다른 관점조차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현대인이 일차원의 인간을 제조해내고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삶이라면, 조금만 시선을 달리해도 너무도 다른 시선 관점, 열정, 마음, 손발의 차이를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만 맞춘다고 하더라도 지금여기를 위한 자양분은 넘치는 것은 아닐까? 

3. 이념교육이든 커리큘럼이든 르네상스의 배후 중세, 근대인이 소멸시킨 공동체나 공적인 장, 지금의 다른 곳, 나라의 삶에서 얻으려하지 않고, 늘 알량한 조명등으로 늘 재단해버린 것은 아닐까? 

4. 늘 원전보다 어려운 해설서에 답을 구하려했던 것은 아닐까? 인문의 요지가 지금을 어떻게 살 것이라면, 늘 수평면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면 인문의 진보는 없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을 한다면 나름 무장해제를 하고 온몸으로 고대-중세-근대-지금의 맛보고 느끼고 그 차이, 그 숨결에 더 가까워져야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말로만 하는 조각난 자아의 나, 너, 나-너를 치열하게 비교 감수할 생각을 하면서...우리의 퇴행을 하나하나 벗겨나가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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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낭만적 사랑의 변천사(ing)
    from 木筆 2009-04-02 17:28 
    낭만적 사랑의 변천 - 사랑,결혼,섹스(성) 1. 열정. 어떻죠. 위험한가요? 개인이란 존재감이 없는 시대라면, 신에 대한 사랑만이 이해되었다면? 일방을 향한 열정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요? 그것도 주체할 수 없다면? 말입니다. 아마 이상한 취급을 받았겠죠. 2. 중세에는 어떠했을까요? 기사와 귀부인의 슬픔을 감수하는 로망(마조히즘적 사랑이라고도 하더군요.) 물론 결혼은 번외였습니다. 결혼과 사랑을 같이 생각한다는 것은 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