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광인이 하나의 사건, 상황, 관계 등에 왜곡된 사고에 사로 잡혀 있다면, 정상인은 자동차, 아파트, tv, 육류, 상품, 화폐 등 여러가지에 대해 왜곡된 사고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정상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광인이 자본주의의 욕망을 정지시키고 재배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광인 되기는 소수자 되기의 기본적 구도를 가르쳐 준다.

 

17 소수자되기는 단순히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동물, 식물, 광석, 분자, 자연도 포함한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의 도구가 되어 낮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물의 처지가 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육식문명에 대한 반성은 있을 수 없다. 물론 동물은 원래 무리를 짓고 광야를 누비던 존재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모품으로 전락시킨 동물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고 절박하다. 이러한 동물뿐만 아니라, 말 못하는 뭇 생명에 대한 감성어린 교감과 그들과 비 언어형태로 관계맺기, 그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이 새로운 삶의 형태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17 하  소수자되기는 기존 통념에서 드러나는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걸고 나서는 역동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사랑의 힘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차원을 열 수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사랑이 약속하는 새로운 생태적 삶이다.

 

18 인민의 진실한 욕망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자신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욕망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 상 미래로 향하는 무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색다른 관계맺음이다.

 

20 하  무의식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관계망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은 개인이 지닌 매우 은밀하고 신기한 심리상태를 분석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어떤 관계맺음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에서 나올 수 있다. 무의식이 모든 곳에 깃들어 있다.

 

21중 무의식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가 새로운 관계망을 만드는 행동에 나서는 것, 예를 들어 경쟁관계가 아닌 호혜관계를 만들거나, 입시 경쟁을 중심으로 한 학교가 아니라 대안학교를 만들게 되면 색다른 관계망에 따라서 새로운 무의식이 만들어지고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수성이 생겨난다.

 

21하 '관계망에 대한 배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계망에 대한 배치'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거나, 별명이 있는 공간, 시간의 리듬 바꾸기, 새로운 관계맺음의 차원으로 기존 관계를 바꾸기, 물질과 에너지, 화폐의 흐름에 대한 새로운 구상과 실행, 동식물과 독특한 관계맺기, 음악, 미술, 춤, 몸짓, 가면을 통한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관계망 만들기 등 공동체의 실험과 실천으로 새로운 무의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은 미래를 향하고 있으며 늘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5중 사람들 사이에서 욕망의 흐름은 무의식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욕망의 흐름은 '바로너'라고 지목하거나 혹은 '바로 나만이'라고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어디에선가 '어느 누군가'가 될 수 있다. 공동체가 갖고 있는 강렬한 욕망의 흐름에 스스로 몸을 맡기거나 느끼며, 홀연히 등장하는 욕망의 주체성이 있다.

 

26하 누군가를 지명하고 호출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강렬함 속에서 새로운 주체가 나타나고 자율적인 행동양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정말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만을 할 때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느냐'라는 사람들의 선입견은 욕망이 갖고 있는 자율 능력을 평가절하하고 전체의 구도를 생각하며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결정권과 권한을 많이 주게 된다. 문제는 책임이라기보다는 주체성 생산이 가능할 만큼 그 공동체의 관계망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이며 그만큼 욕망이 강렬한가이다.

 

34중 공동체의 부분들이 자기생산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한 명이냐 두 명이냐 혹은 여러 명이냐의 차원을 떠나 바로 독자적인 자기 자신을 생산해 낼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이다. 여러 명이라도 자기생산적인 자율성을 갖고 있지 못할 수 잇고, 한 명뿐이라도 자기생산적인 기계를 갖고 있을 수 있다. 기계의 본질은 자기생산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갖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34 하 공동체는 외부로 공동체를 확장하거나 외부를 배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늘 새로운 형태로 공동체 자체를 자기생산하는 것이 목표이며, 이러한 자율성이 기계적 자율성을 뜻하는 것이다. 도한 자본주의를 하나의 거대한 구조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잘 들여다보면 작은 기게부품들이 조립되고 연결되어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자본주의를 통째로 바꿀 수 없지만, 기계부품의 연결을 달리하거나 작동방식을 바꿔 자본주의를 고장 나게 하거나 색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35 자기생산은 스스로 집요하게 폐쇄되어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다양한 타자 관계 형태들을 유지하는 진화적이고 집합적인 본질체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제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40하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가 언어를 쓰지는 않지만, 춤, 후각, 무리짓기, 반복동작, 울음소리 들을 통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가타리는 동물들에게 도표의 기호화양식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이성의 존재로서가 아닌 욕망의 존재로서 존엄의 영역을 발견해낸다. 아이, 동물, 광인이라는 욕망의 존재들은 말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존엄하다.

 

41중. 똑딱거리는 시계소리처럼 단조롭게 반복되는 자본주의의 등-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 탈주와 횡단의 자유가 갖고 있는 웅대한 폭의 화음이 보여주는 생명의 횡당-리듬을 구성하여 삶의 리듬을 바꾸어 나가자

 

45 공동체는 특이한 입장, 독특한 주체성, 색다른 욕망이 나타날 경우 자신의 관계망 자체를 그러한 특이성의 화음, 색깔, 물들임, 공명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공동체의 관계망은 더 풍부하고 충만해진다. 그러한 공동체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생명에너지가 발산될 수 있는 프랙탈적인 방향으로 진화되어 나갈 것이다.

 

53 정신분열자가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예숙술가, 어린이, 청년에 모든 중요한 열망 형태에 포함되어 있는 분열과정이 혁명적인 것이다.


57 모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고 그 욕망에 감응할 수 있는 형태의 조직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대안적인 생명운동은 욕망이라는 생명에너지의 흐름을 통해서 하나의 전형, 하나의 모델, 하나의 모범에 사로잡히지 않고 끊임없는 창조적 진화를 통해서 생명이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과 형태, 관계망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89 자기생산적인 집단의 역능이 구조적 수준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서 나타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을 개척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변혁의 기획은 구조를 바꾼다는 기획이 아니라, 자기생산적인 자율성의 영역을 확대하고 보호하면서 기존영역과 교섭하는 방향으로 궤도 수정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은 어쩔 수 없는 구조에 맞선 자본주의적 삶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라는 도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것은 대안적인 활동방식이라기보다는 대안의 자율성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의 운동이다.

 

94 삶의 영역은 유무형의 양상으로 진화했다. .시간-공간-에너지의 감수성이 달라지며, 새로운 모습으로 삶의 방식이 개척되고 있다. 이것을 좌표로 보자면 횡단면이 넓게 존재하고, 새로운 방향성 속에서 벡터를 형성하는 그림이 될 것이다. 시간의 의미는 현실의 리듬과 가상 리듬의 합성물이라고 할수 있으며, 공간의 의미는 현실의 질서와 가상의 질서를 관통하는 혼성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중적이라기보다는 다중적이며, 다중적인 것에 중심이 있다기보다는 서로 이질적인 조각들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118 욕망과 역능을 대립시키는 것은 불합리할 것입니다. 욕망은 역능입니다. 그리고 역능은 욕망입니다.

 

뱀발. [세가지 생태학] 윤수종 교수의 라이히 소개이후 다시 접한다.  신승철님의 노고로 좀더 쉽게 다른 각도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여우님의 책소개가 닿아 이렇게 되짚게 되어 감사드린다. 정신분석에 대해 주눅들 필요가 없다.  조직론에 대한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 현실 속에서 적절한 설명해내는지 증명만 된다면 충분하다. 모임이 자기생산을 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욕망을 만들어내고, 꿈도 새롭게 꿀 수 있다면 어느 덧, 삶도 세상도 변해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만난 이들을 따라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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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권위를 믿는 남녀차이


 우리는 무의식중에 책으로 엮어지면 권위가 있다라고 가정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나 완결성도 없이 표지와 영어제목과 내용이 다른 책들을 보면서도 말이다. 그런면에서 고전이 검증을 거쳐 나름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별반 관심들이 없다. 얕음에 대한 익숙함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차이가 보인다. 그래 그렇게 얘기해서 어쩌자구. 나한테 관계있는 것이 무엇인데. 그래서 내 삶과 관계가 있는 것은 무엇이냐구. 그것도 이야기 못해주잖아. 아 책 괜찮지 않아요. 쌈박하지 않나요. 전 흥미로웠는데요. 논리를 풀어가는 점이 신선하고 자료도 만찮아요.
 

 환원에 대한 유혹

 

 학문은 집요함을 발판으로 하지만 한편 환원에 대한 욕망은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감이나 증폭없이 그대로 주조할 위험에 빠진다.  책을 보면서 미국의 현대인이란 개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백만년 이백만년전으로 옮긴 듯하다.  그 개인이란 존재는 경쟁하고 싸우는 만인의 투쟁을 가정한 개인이다. 민속지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의 논리를 관철하기 위한 용도로 편집한 것은 아닌가. 칼폴라니가 언급하듯이 호혜나 상호부조를 관점이나 홀로 떨어진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인식하지 못하는 시선으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인류가 화식을 통해 진화했다. 침팬지가 불씨를 가지고 논다. 한편으로 인류가 불이나고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유인원과 달리 있다. 그것이 결정적이다라고 하면 자료를 견강부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컬럼 한쪽으로 될 이야기를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것은 아닌지. : 한편 이렇게 과학적 사실을 읽기 쉬운 문체로 쓴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사람들이 지금도 밥과 음식의 관계로 여러가지 권력관계도 이어지는 것을 보면 그런 점들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익명과 노출

 

 도시의 익명성이 좋다. 자신을 온전히 놓고 관심없음을 즐길 수 있다. 나의 생활과 삶에 관여하지 않는 자유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다. 시골마을의 너나들이가 싫다. 온전한 나는 어디에도 없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 언제 사고친 누구의 딸, 밥먹는 습관이 그러저러한 누구다.  자유로운 나로 그 마을에 들어설 곳이 없다. 말 사이에도 없다. 그래서 징글징글하다. 난 도시가 좋다.  난 도시가 싫다. 알갱이 하나 하나 발라내어 정작 모니터만 만지작거리는 나의 옆엔 너가 없다. 그래서 너가 그립다. 아 공동체가 그립다. 너와 맺는 새로운 관계도 그립다. 잔소리하던 엄마가 측은하다. 밥도 따로따로 먹는 아이와 아빠와 외식도 물린다. 이젠 밥에 도란도란 얘기가 곁들이면 좋겠다.  어깨를 짓누르는 일들의 강도가 이렇게 우리사이를 갈라놓은 것인가. 아마 정답은 익명과 노출, 도시와 마을,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의 움직임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해도 해도 끝없는 일이 아니라 해도해도 끝이 보이는 일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동치미 사용후기
 

 동치미는 맹글로브 나무 같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습지의 나무를 이렇게 부르는데 그곳에 나무는 몸뚱이에 뿌리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단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바로 그것에 적응해서 뿌리를 내리든, 뿌리를 감추든지 한다. 그런 적응력이 있는 것 같다. 색깔도 하나하나 숨죽지 않고 그렇다고 배척하는 것도 아니고 적절한 긴장도 있는 것 같다.
 

 어젯밤 꿈

 

 초등학교 2층교실인듯. 교탁과 교실을 옮기며 연신 사람을 만나는데 잡지가 부족하다. 부족한 잡지가 차 뒤 트렁크에 있다. 그 기억을 쫓아 가서  잡지를 찾아보면 원본한권과 다른 한권뿐 손님한테 줄 것이 아니다. 그렇게 몇번을 꿈속에서 이층과 일층, 그리고 분교 초등학교 운동장을 마음만 분주히 다닌다.

 

 여성과 남성


- 인류라는 종족은 화식으로 인해 이빨과 창자가 짧아지는 변화를 거쳐 고효율 소화능력을 갖게되어 뇌용량이 크게 진화했다. 화식은 불씨를 보존하는 화덕을 갖게 만들고, 남녀의 성차를 낳고 결혼 등 사회적인 문화를 낳게 된다. 폭력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요리를 하지않는 여자때문이다.

- 존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보면 아마 불편할 것이다. 백년이 훨씬 넘은 이야기지만 직접 접속을 해보면 지금여기에 또 다시 불편이 덕지덕지 붙을 것이다. 불편을 감내하고 현실을 되짚어보고 싶다면 권한다. 애써 그럴 필요는 없지만 서두.

 

 

 본능의 주조성과 무의식


 사람들이 본능은 자연스럽다고 하는데, 상당부분 억눌림에 기인한 반대방향을 담고 있다. 과도한 관계에 의한 자유를 갈구하는데 그러할 생각이나 마음, 결정적인 것은 몸공간이겠지만 그렇게 억눌림의 누적되어 몸에 인이 박힌다. 문제는 개인은 이것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잘 모른다.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봐도 보이지 않는다. 온전히 홀로 있는 야생의 자신을 발견한다. 놀이터에서 시 c팔 ** 욕을 달고사는 초등학교 고학년의 불량스러움은 어떻게 주조되는 것인가. 본능대로 한다라는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이런 주조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나는 자유다라고 선언하고 해방되는 순간, 그 억눌림의 나를 한가닥도 수선할 수 없다.

 

 무의식의 대부분은 이렇게 갈망과 욕망이 차고 들어가지 않는 부분의 합이 몸에 스며들어 생긴다. 유의식이 모이는 자신을 살펴보는 일과 분위기, 문화가 흐르는 지점과 내가 충돌하는 점을 면밀히 살피고, 나의 눈이 아니라 너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또 하나의 자유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자유는 디테일의 발산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무의식을 만드는 일도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신경을써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는 먼지의 힘, 거꾸로 먼지 한점을 올려놓는 일이 큰 일이기도 하다. 서투르지 않는 서투름이라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관 계 만 들 기

 

 만들다와 하다. 삶의 관성은 대부분 보수적이게 만든다. 기존의 맺어진 관계들. 가족, 친구, 선후배 사이에 삶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온몸의 온도를 40도까지 끓어오르게 하는 열정도 없는 듯하다. 365일 그저 안이하거나 순탄한 관계만을 고집하는 삶의 무게는 다른 길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학연의 습속에서 벗어나는 길. 나이의 장벽에서 벗어나는 길. 지연의 단순함에서 벗어나는 길. 삶의 울타리로, 보호마개로 기댄 것들을 낯설게 보는 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가슴으로 , 뜨거운 40도의 관계를 만드는 일도, 36.5도의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얕지만 긴 농도의 관계를 만드는 일. 아마 이런 새로움은 시도해볼만 하지 않을까. 틀에 안주하지 말고, 삶을 뒤집고 새롭게 사는 생각들도 조금씩 자라났으면 좋겠다 싶다.

 

 

 한 달 에  한 번

 

 불편을 감내하면서까지 책을 보고 싶지 않다. 이런 기회에 읽기 어려운 책을 읽고 싶다. 언제 내가 이런책을 읽을까 하다가 정작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달라져 있다. 나의 범주에서 벗어난 책이 새롭게 스며들 때가 있다. 그러면 불편한 이야기를 감당해보실까. 아뇨 아직. 그래도 책은 싫으면 덮을 수 있어 낫다. 불편한 이야기가 주류로 번지면 싫다.

 

뱀발. 뒤풀이 장소가 새로운 곳이 생겼다. 조용하고 얘기나누기 편하다. 달은 총총, 별은 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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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이제 정치에 관심갖다 

111202  닥치고 삶, 닥치고 행복...늘 유행의 고점이 드나든다. 막걸리 생각이 나 두부한모를 사들고 들어가니 처형이 와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꼼수로 인해 정치에 관심이 거의 없던 처형이 바뀌었다. 정봉주의 열혈한 팬이 되었고, 정치 담화를 시작하는 것이 왠지 낯설다. 관심을 갖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강**삐리같은 이로 인해 학벌에 대한 선입견도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서열이란 것이 위에 있는 친구들 편하라고 만들어놓은 허위라고, 그래서 그런 것에 마음 주면 이미 지는 것이다라는 것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분권매체에 대한 고민과 교감

만명이 교감하거나 교신할 수 있는 잡지나 매체. 111203 서울서 온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찌라시같은 무가지, 동네 카페에 무심이 놓여있는 잡지의 효과를 논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잡지가 아니더라도 좀더 다양한 접근과 컨텐츠가 나돌아다녔으면 하는 바램을 상상잡지를 보며 건넨다. 혁명이든, 대중운동이든, 민족주의든 대중이 어떻게, 왜, 존재에 기반을 달리해서 움직이는가? 팩트(사실)만을 밝혀보자라고 한 책이 [맹신자들]이다. 125가지 꼭지마다 씌여있는 꼬리를 보다나니 그냥 훑어볼 일은 아니다 싶다. 천명을 겨냥하든, 만명과 교감하든 그 마음을 관통하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구전으로 이어지는 속도를 높이는 강열함이든, 더디지만 파고가 크든, 아니면 꼭 그 끈을 잡고 싶은 것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수단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꼽사리다 - 과학편

111130 기획단골수멤버 쫑파티를 했다. 사진을 넣은 문자의 강열함도 매체의 수단이다. 나꼼수가 하지 못하는 것. 나는 꼽사리다의 과학편. 원자력을 논할 수도 있다. 지금은 돌맹이를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발화되고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면 언젠가 또다른 관점의 전환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111125 참터운영위 뒤풀이 이런 이야기가  보태졌다. 참터는 꼽사리다. 붙어살게 만들어주면 고맙다고, 말과 논란이 없는 과학계에 잔잔한 파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꺼리나 능력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응집을 시키거나 렌즈로 빛을 모아 저기를 비추이는가란 고민이 든다.

새로운 단체 作 - 충고편 

111126 상가집에 가기전 인권연대 오**국장이 내려와 식사를 같이하구 서대전역에 내려준다. 서울과 대전의 문화격차는 몸으로 각인되어 있다. 지방과 지역. 그리고 인권단체를 만들려는 연두부와 상가에서 신**의 신신당부가 이어졌다. 세심한 부탁이자 권유인 셈인데, 즉답하려는 습관을 버리고, 충고를 몸에 삭히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단체를 만드니 더 세세하게 챙겨야 한다는 부탁의 말이 두시간내내 접수가 되지 못한다. 운영위의 확대,  겹침, 운영의 질적차별화도 잠깐 논하다. 
 

나꼼수, SNS, 컨텐츠 그리고 지역과 중심 


111130 뒤풀이, 111202 뒤풀이 나꼼수란 유행은 또 다른 정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미국과 달리 팟캐스트 방식이 여기에 유효한 것은 도시중심 문화이기 때문이다. 지역의 소식의 유의미성보다 전국적인 방식과 소문을 타는 것이 여기다. 친밀함으로 구나 동, 다른 컨텐츠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 의미는 달리 확산되지 않는다. SNS 역시 컨텐츠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꼼수로 인해 청춘이 정치도서를 읽는 문화의 역류가 생기듯이, 삶의 지류에 대한 접근이 생기도록 통로의 다변화가 필요하다. 크로포트킨이 청년에게 의사, 변호사, 건축사가 삶에 어떻게 엮이는지 생생하게 전달하는 백삼십년전의 고민이나, 가족 과연 믿을만한가?라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정치라는 것도 지역대학의 30% 해당구에서 할당제로 뽑는다고 하면 굳이 서울로 가려할까? 이런 파격을 담는 문화의 역습과 언로가 필요하다.

닥치고 삶, 그리고 행복의 소소함, 재중심 

결국 삶으로 귀결되고, 그 삶의 결을 세세히 녹아날 때에서야 겨우 닥치고 삶이나 닥치고 행복의 화두로 본연의 고민이 녹아나는 것이다. 정치도 행정도, 그로 인한 삶의 횡포가 너무 중앙집중적이다. 지역의 모든 곳, 모든 의제, 모든 논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땅의 삶의 고통은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다. 그 중심과 컨텐츠로 이땅이 들썩거려야 한다. 그래야 아주 조금 삶은 달리 생각해볼 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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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자연을 인간 경제생활의 척도로 받아들이면 자유로움이 절로 이루어진다. 자연과 경제가 다시 만나면 그만큼 민주주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경제도 자연도 추상적으로 운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을 척도로 삼을 때, 우리에게는 지역 차원의 현명한 방식이 필요해진다. 이를테면 특정 농장을 아무 농장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특정 장소에 대한 특정 지식은 중앙집권적 권력이나 권위의 권한을 벗어난다. 자연, 즉 특정 장소의 본연을 척도로 삼는 농업은 농민이 잘 알고 사랑하는 농장을, 잘 알고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작은 농장을, 잘 알고 사랑하는 이웃과 더불어 잘 알고 사랑하는 연장과 방법을 사용하여 돌봐야 함을 뜻한다.

 

단락꼬리 - 책갈피를 해두었는데, 꽂힌 문구는 자연과 경제가 만나면 그만큼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부분에서다. 민주주의는 늘 염두에 두는 것이지만, 한가지 개념으로만 생각을 하는 습관의 위험함을 되짚고 싶다. 정작 두가지 문구를 동시에 고려하는데 서툴다. 아니 뒤에 언급한 추상화하는데 익숙해서 오히려 관심이 없다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디테일의 힘이라는 것이 거꾸로 추상으로 환원해버리는 버릇이 아니라 하나하나 겹쳐서 깊이 생각해보는 다른 취미가 필요한 듯 싶다. 문득 민주주의란 연습은 개념의 겹침, 혼란스러움 하지만 깊숙이 천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을 이어본다.

 

136 생산성이라는 유일 기준에 따라 이룩된 산업농업은 독백극 연기자나 연설자의 태도로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다루어 왔다. 부탁을 하는 법도, 반응을 듣고자 기다리는 법도 없었다.

 

단락꼬리 - 독백극 연기자나 연설자의 태도로 산업농업을 비유하는 것에 걸렸다. 이어서 이렇게 전체주의적이고 중앙집중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자연을 척도로 삼는 농업과 비교한다. 대화를 즐기는 사람의 태도로 접근하면서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당장 도달하려 하지않고, 여건과 부딪히게 될 곤경을 심각히 염려하는 일부터 한다고 표현한다. 어쩌면 홀로 몸에 배인 것 가운데 하나는 반응을 듣고자 기다리는 것에는 열려있으나 부탁이라는 단어도, 부탁하는 방법도 서투르다. 그래서 움직임은 독백으로 멈추거나 연설자의 마음으로 그쳤던 것은 아닌가 되짚어본다.

 

132-134 오랫동안 우리는 국가 차원에서 땅에다 생산만을, 농민에게도 생산만을 요구해 왔다. 우리는 이렇게 생산만을 강조하는 경제 기준이 좋은 성과를 보장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도가 궁극적으로 참되고 옳다는 것을 밝혀 주리라 믿었다. 경쟁과 혁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제약과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요리조리 다 피해 갈 수 있으리라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버렸다......농업은 생산적이어야 하지만 계속 생산적이기 위해 두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땅을 보존하고 땅의 비옥함과 생태적 건강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땅을 건강하게 이용해야 한다. 또 하나의 요건은 땅을 건강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땅을 잘 알고, 땅을 잘 이용할 시간이 있어야 하고, 땅을 잘 이용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 [ 척도로서의 자연, 1989 ]

 

128 여러 일들이 언제나 ‘소비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중개인과 대리인과 검사관이 자꾸 늘어나게 만드는 시스템이 어떻게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가? 소비자는 이 모든 난관을 다 극복하고 어떻게 자신의 취향과 필요를 생산자가 알게끔 할 수 있는가? 소규모 생산자를 망하게 함으로써 생산비가 소매가격을 높이지 않고서는 ‘개선’이라는 것을 할 수 없어 보이는 이 시스템이 어떻게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가?

 

단락꼬리 - 미국 켄터키의 지역 도살장들이 없어지는 것을 예로들면서 위생을 빌미로 한 육가공업체의 대규모화와 소농의 몰락과정을 문제삼고 있다. 곰곰 생각을 해보니 소비자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생협도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도 있겠다 싶다. 자칫 생협회원들에게 집중한다고 하면서 지역의 또 다른 도소매상이 문닫는 모습들도 고려해야 한다. 글에 지적하듯이 소비자와 생산자사이를 좁히는 방법과 시스템에 대해 같은 무게로 고민하지 않으면, 글자 그대로 착한 소비의 그물에 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상 [위생과 소농], 1971

 

111 길든 것과 야생은 실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 두 세계에서 정말 낯선 것은 기업화된 산업주의다.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삶이 이용하는 물자에 대한 존중도 없는, 난민의 경제생활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던져 봐야 할 질문은 야생 세계와 길든 세계가 별개의 것인지, 나눌 수 있는 것인지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 둘의 분리할 수 없는 연관성을 인간의 경제에서 어떻게 하면 적절히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117 건실한 농민이 생산한 산물에 대하여 받는 대가는 형편없으며, 보존에 기여하는 노릇에 대한 대가는 아예 없다. 오늘날 건실한 농민은 질이 우수한 농산물을 시장에 내놓고 앞서 말한 역할들을 모두 잘해 낸다 하더라도 건강보험료를 낼 형편이 되지 않으며 언론에서 촌뜨기나 무식꾼으로 풍자되고는 한다.

 

122 생산물의 공급을 결정하는 것은 화폐나 신용이나 시장밖에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토지 이용자와 보존론자가 너무 많았던 것 같다. 달리 말해 그들은 땅을 착취하는 기업의 주장에 항상 내재되어 있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경제와 생태 사이에, 인간이 길들인 세계와 야생의 세계 사이에 안전한 단절이 있을 수 있다거나 실제로 있다는 생각 말이다.....내가 보기에 보존론자와 토지 이용자 양쪽이 너무 단절되어 있는데, 그런 현실을 교정할 방법은 무엇일까? 각자가 자기 언어 안에만 갇혀 있으려고 하는 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둘은 이제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서로에게 말을 해야 한다. 보존론자는 토지 이용의 방법론과 경제학을 알고 능숙하게 다루어야 한다. 토지 이용자는 보존의 필요성이 갖는 긴급함을 경제적인 것까지 포함하여 알아차려야 한다. [보존주의자와 농본주의자], 2002

 

단락꼬리 - 생산물 공급을 결정하는 것이 화폐나 신용이나 시장밖에 없다는 착각은 정말 강하다. 이런 자본주의의 밖, 외부에 대해 고민을 가져가지 보다는 사람을 무의식중에 뺀 숲이나 생태만을 논하거나 농사만을 이야기하고 서로 원칙을 가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외부는 이렇게 소소한 것에서 살아내고 있다. 고민과 언어를 섞는 연습과 자본주의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살고 있는 경제가 있다는 점들을 느껴서야 다른 세계가 보이는 것은 아닐까? 시장과 돈이 많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 결을 벗어나는 연습은 정말 가까이 있는 것들을 꿰뚫는 노력과 연습, 논란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뱀발.  [온 삶을 먹다]를 읽다가 책갈피를 해둔 곳을 다시본다. 놀랍고 두렵다. 생각들이 현실에 뚜벅뚜벅 걸어나올 듯 싶어 더 당황스럽다. 현실을 담지 못하는 추상적인 연습습관을 돌이켜보자니 부끄럽다. 현실을 녹이면서 생각길조차 만들지 못하는 지금이 괴롭다.  접힌 곳들이나  흔적을 남겨둔 곳을 다시 새겨봐야겠다. 겨울이 서서히 익는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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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아마 다른 길위에 서있는건 아닐까. 걸어온 길들도 챙겨봐야 하고, 몸에 붙은 감각들도 손봐야 한다. 점심 무렵 산책을 하다가  민들레꽃, 개망초꽃, 국화 몇점 건져 담다. 아마 시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별반 볼품은 없지만 서두. 지금껏 버텨낸 이력으로 은은함은 능히 겨울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아마. 새로운 관계의 시작에 즈려놓은 손모둠꽃다발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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