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뉘. 이 책에서는 저자가 많은 부분 플루서의 논문에서 출발한다.

 

기획하는 인간과 플루서

 

플루서는 오늘날 개별 과학의 연구단위가 '미립자' 수준에 도달했음을 지적한다. "물리학에서만 현상이 미립자로 분해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에서는 유전자로, 신경생리학에서는 단위자극으로, 언어학에서는 음소로, 민속학에서는 문화소로, 심리학에서는 행위소로 분해된다." 미디어 이론가 로이 애스콧 Roy Ascott은 "우리 후기생물학적 우주의 빅뱅 big B.A.N.G."에 대해 얘기한다. 여기서 "B.A.N.G"은 Bit, Atom,Neuron,Gene의 약자로, 온늘날 과학의 연구단위를 가리킨다.  54


플루서의 이론은 이 새로운 시대를 위한 존재론과 인간학이다. 주어진 세계가 만들어진 세계로 교체될 때 고전적 의미의 '객체' Object도 사라진다. ..객체가 사라지면 그것의 상관자인 주체Subjekt도 존재할 수 없다. 카를 마르크스는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 말했다...문제는 아직 없는 세계를 기획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대안적 세계를 디자인하는 인간은 더는 객체를 인식하고 변형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앞으로 Pro 던저서 Ject 기술적으로 실현해나가는 존재, 즉 '기획Project"이다.  54-55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종언은 '종말론적'이지만 플루서에게 역사의 종언은 그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일 뿐이다..이 모든 변증법적 운동의 끝에서 헤겔은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전지에 도달한다. 반면 플루서는 그 운동의 끝에서 일어나야 할 사건들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 도달한다. 헤겔에게 이 모든 것이 '인식'의 과정이라면 플루서에게 그 모든 것은 '제작'의 과정이다...플루서의 이론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의 현대적 버전(양자론)으로 물구나무세운 뒤, 니체의 미적 형이상학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유형의 유물론이라 할 수 있다.  56-57

 

가상을 '실재-비실재'의 관계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 플라톤주의라면, 니체주의는 그것을 '잠재-현재'의 관계 속에서 사유한다. 이 맥락에서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은 질 들뢰즈의 철학이다. 그의 사유는 잠재와 현재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두 상태의 사이에는 물론 '현재화'가 있을 것이다. 플루서가 현재화를 기획으로서 인간의 능동적 활동으로 본다면, 들뢰즈는 '주체'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것을 하이데거의 의미에서 '사건'으로 파악한다...들뢰즈의 '현재화'가 예술가에게 '사건으로 엄습하는 것이라면, 플루서의 '현재화'는 기술자가 자신의 기획을 테크놀로지를 통해 실현하는 것에 가깝다 107

 

 

가상적 현실


선사시대의 세계에는 일상과 몽상, 현실과 가상이 중첩되어 있었고 두 세계는 '샤머니즘'이라는 선사적 테크네로 매개되었다. '샤만'이라고 불리는 주술사는 댄스나 약물로 자신과 타인을 환각에 빠뜨렸다. 샤만은 인간이 '대안적 세계'와 접속하는 선사시대의 인터페이스였다...로이 애스콧에 따르면, 우리 역시 "생태공간의 물리적 현전, 영적 공간의 신비적 현전, 가상공간의 원격 현전, 나노공간의 진동 현전"의 중첩된 존재다. 이 현전의 모드 사이를 오가게 해주는 테크놀로지의 '그루'guru들은 디지털 시대의 '샤만'이다.  69


[사진적 데칼코마니 대 회화적 데칼코마니] 2007 , 한성필의 회화적 가상은 슬쩍 현실의 피사체로 행세한다. 이런 전략을 작가는 再現과 구별하여 製現이라 부른다. 78


복제가 반드시 원본의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어설프게 베낀 세트가 정작 필름 위에서는 생생한 현실이 되는 것처럼, 때로는 복제가 또다시 복제되는 것을 통해 외려 원본의 현실성으로 상승한다. 한성필은 이 카메라의 마술을 통해 가상과 현실의 존재론적 차이를 무화한다. 81


이명호 - 내 이야기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장치들이 필요했는데, 거기에는 다른 해석이 딸려 나올 여지가 있었다. 그건 것들이 너무 강하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많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가장 흔하고 평범한 우리의 일상 소재들 가운데 나무라는 대상을 택했다.  88


 


촛불, 나꼼수와 음모론

 

촛불시위 속에서 저개발의 정치, 즉 투쟁의 정치는 과개발의 정치, 즉 놀이의 정치와 하나가 되었다. 서사학 narratology과 유희학 ludology은 앞으로 정치학에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분야가 될 것이다.  147


촛불대중의 욕망은 무정부주의적 자유주의에 가깝다. 그들의 유토피아는 역사의 끝에 텔로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말하자면 국가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방구에 '일상'이 정지된 카니발의 현재로 존재한다. 무서운 권력과 지겨운 일상의 효력이 정지되는 크로노토피아 chronotopia , 즉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상도 아닌 제3의 시공에 존재하고 싶은 것이 디지털 대중의 욕망이다. 149

 

사람들은 저희마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믿는다. 음모론의 보편적 형식이 빛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대중이 음모론을 믿는 것은 그 음모론을 만드는 데 자기들이 직접 참여했기 때문이다. 계몽의 패러다임이 실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대중은 사실의 발견, 논리의 제공 등 모든 면에서 음모론 구축에 참여했다. 디지털의 음모론은 '집단지성'의 변종으로 나타난다. 나꼼수는 서사를 향한 디지털 대중의 열망을 음모론에 가둬버리고 말았다. 실험이 갖는 의의는 무시할 수 없지만..160

 

한국문화의 특성


구술문화에서는 로고스보다는 뮈토스가 중요하다. 거기에는 객관적 기술보다는 주관적 상상이, 논증의 정합성보다는 플롯의 개연성이, 이성적 비판보다는 정서적 공감이 더 잘 어울린다. 구술문와에서 중요한 것은 사태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복잡한 사태를 영웅적 스토리와 압축 변환하는 능력이다. 153


디지컬 시대의 인간은 "선형적 문자로 쓰인 비판으로부터 물러나 그것을 분석한다. 그리고 새로운 상상력에 힘입어 그 분석을 통해 얻은 합성 이미지를 투사한다." 사실 문자문화의 지식인들은 현실을 '비판'만 할 뿐 새로운 현실을 '기획'하지는 못했다. 154


서구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비교적 탄탄한 문자문화를 형성해왔다면 한국에서는 문자문화의 역사가 매우 짧았다. 공동체적 구술문화의 전통이 강고하다는 점이 인터넷이나 sns 위에 가상공동체가 형성되는 데 유리한 조건이 되어준다. 하지만 그것이 문자문화의 비판적 이성으로 뒷받침되지 못할 때 그 발달한 테크놀로지를 들고 1차 구술문화로 함몰하기 쉽다.  155

 

현실로서 일베와 심리적 특성

 

일베의 병신대결 - 병신 문화에는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그 안에는 중세의 카니발이나 공옥진의 병신춤 비슷한 '해방적' 계기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병신"이라는 말에는 아직 우리가 신분과 계급으로 나뉘지 않았던 우주적 평등의 상태로 돌아가고픈 원초적 욕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 해방적 계기는 곧바로 부정당한다. 여성과 외국인과 호남인 등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공격함으로써 일베는 차별을 폐지하는 대신 거기에 동참한다...현실에서는 차별의 대상이지만 적어도 일베에서 그들은 차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165


 

피라미드의 아래쪽에 위치한 계층은 '배제'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크다. '배제'를 당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다수에 속해야 한다. 이 원시적 생존본능에서 소환되는 것이 바로 사회 절대다수가 공유하는 안전한 가치, 즉 애국이다. 주류에서 배제당한 그들은 자신도 주류에 속해 누군가를 배제해보기를 절실히 원한다. '주류'에 속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을 심리적으로 국가와 동일시해놓고 이제 거기서 배제할 누군가를 찾는다. 그것이 '종북세력'이다. 배제의 공포에서 비롯된 사이코드라마는 여기서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붉은 무리에 맞서 싸운다는 장엄한 애국서사로 둔갑한다. '애국서사'는 이제 온라인게임이 된다. 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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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6-10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독서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말씀드리면,

지금이 만약 한일합방 초기라면, 그래서 친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 그에게 (정의, 도덕, 아니면 현실적 이익을 포함하여) 어떤 시각/방식으로 그것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는지 고민 중입니다.

'배제'를 당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다수에 속해야 한다. 라는 생각으로 친일을 했다면...

여울 2014-06-10 17:57   좋아요 0 | URL
친일했다는 것이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더군요. 친일이 도움주지 않았느냐 되묻는 학자나 집안의 친인척으로인해 부를 합리화시키는 친일후손들이 많지만 말입니다. 부친과 말씀을 나눠본 적이 있는데 그 피해를 실감한 분들에게 그 아픔의 농도는 옅어지지 않더군요. 객관화될 수없어요. 피해자에겐 ᆞ ᆞ친자본이란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양극화와 삶에 얼마나 아픈지 공감할 수 있어야해요. 마름이 얼마나 많아서인지 인지조차 하는지 모르겠지만 다섯시의 출근 지하철이 만원이란 사실에 공감해야 되지 않을까요.

글샘 2014-06-1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방 후 친일파를 천 명만 죽였어도...

지금쯤 친일파 후손들은 벌벌 기었을 겁니다.

이승만이가 친일파를 살려주고, 외려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개박살 낸데서 첫단추가 엉터리로 꿰인 거죠.

잘못을 했으면, 총살을 당한다는 걸 이 백성들은 겪어보질 못한 거죠.

여울 2014-06-10 17:59   좋아요 0 | URL

네, ㅠ.ㅠ

살려준 이들의 혼맥이 정말 지금 현실을 여실히 보고 느끼게 만들죠.

아~ 방법이 없을까요.....

노이에자이트 2014-06-11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도 차별받는 소수자이면서 차별의 주체가 됨으로써 자신의 한을 풀려는 이들이 있죠.그게 소수자들끼리 연대하는 것보다 더 손쉬운 해결책인 것 같지만 결국 차별의 종류가 늘어날 뿐입니다.

여울 2014-06-11 17:39   좋아요 0 | URL

그래요. 그것이 눈에 보이는 방법이고 손쉬운 해결책이죠. 이해하는 방법도 저자들은 원래 그래하는 것도 손쉬운 것 같아요. 이면을 들여다보고, 이면의 논리나 습속이 회자가 되면 더 좋을텐데. 점점 늘어나는 차별과 바뀌지 않는 판단들이 애석합니다.
 
새누리지지자들을 위한 변설들

1.

 

 다른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질문이 달라질 수 있을까? 판에 박힌 선거후기가 아니라 좀더 다른 질문을 만들어볼 수는 없을까? 10개, 100개, 1000개의 질문? 당연하고 누구나 예상하는 질문이 아니라 입장을 바꾸어서 느껴볼 질문은 없는 것일까? 그 가운데 제대로 키울, 제도로 만들 질문을 구해낼 수 있다면 어떨까?

 

2.

 

[강준만의 이론으로 보는 세상]에서 두 컬럼을 새겨보게 된다. " 왜 '싸가지 없는 진보'는 진보에게 해가 되는가"가 하나이고, "왜 새정치는 새인물로 하기 어려운가"가 최근 컬럼이다.

 

 

2.1 싸가지 없는 진보는 문재인이 민주화와 진보적 가치를 표방한다고 보수보다 다른 세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란 질문을 곱씹어보고 있다. 싸가지라는 말보다 도덕의 부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면서  도덕을 보는 입장의 차이가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보수에서 보는 것과 진보에서 보이는 관점차이를 분류해본다.

 

 


또 하나 도덕은 이성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데 오히려 미학적 가치와 같이 그림을 보면 선뜻 느끼는 감정같은 것이라고 한다. 신경과학자의 말을 들어 본능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도덕이라는 것이 진보가 흔히 생각하는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공동체를 보는 관점, 그리고 신성, 영혼의 가치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한다. 개인과 공동체, 영혼을 공통으로 아우르는 것이라고 하며 진보세력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제한적인 반면 보수적인 사람은 셋 다 중시한다고 한다.


진보세력에 대한 보수적인 사람들이 품는 생래적인 거부감은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를 뒤흔드는 '비도덕적인' 정당이라는 시선을 바꿀 새로운 궁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레이코프는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고 혐오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싸가지 없는 진보는 진보에 해가 되는가(원문) ▼

 

강준만의 이론으로 보는 세상

 

 

'싸가지 없는 진보'

진보에 해가 되는가?

도덕 이론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도덕 이론

혹시 우리가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선을 그어 편을 가르거나 우월감을 갖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1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 후보였던 문재인의 대선 회고록 1219 끝이 시작이다에 나오는 말이다. 문재인이 민주당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잘 짚었지만,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표현은 문제의 심각성을 담기엔 모자라다. ‘도덕이라고 보는 게 옳다. , ‘도덕의 부재또는 도덕의 왜곡이 오늘날 민주당의 위기를 불러온 주범일 수 있다. 우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도덕은 잊고 넓은 의미의 도덕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사람 도덕적이야.” 이건 좋은 의미다. “그 사람 도덕주의적이야.” 이건 별로 안 좋은 의미다. 누군가를 도덕적이라 했을 땐 그 사람 개인의 행실에 국한시켜 하는 말이지만, ‘도덕주의적이라 했을 땐 그 사람이 세상을 도덕의 잣대로만 본다는 의미다.


도덕주의의 부정적 의미는 크게 보아 세 가지다. 첫째, 사고가 편협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의미다. 둘째, 복잡한 세상 이해를 종합적으로 하지 않고 도덕이라는 일면만 보는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다. 셋째, 그 어느 쪽이든 이념 공동체 내에서 이념적 대의의 실천에 충실하지 않다는 비판의 의미다.


가급적 도덕주의는 피하되 도덕은 갖는 게 좋다. 그런데 어찌된 게 우리 사회에선 도덕은 박약하고 폄하되는 반면 도덕주의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도덕은 자신을 향하지만 도덕주의는 남을 향하기 때문이다. 남을 단죄할 땐 도덕주의의 칼을 쓰고, 자신의 처신은 도덕을 초월하는 풍토가 만연되어 있다.


도덕을 초월하다 못해 유린하면서 쓰는 말이 대의(大義)에 충실하자거나 대국적으로 보자는 말이다. ‘시대정신이라는 말도 쓰인다. 도덕은 개인 수준의 사소한 것인 반면 대의시대정신은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일이라는 자기암시가 내포되어 있는 용법이다. 도덕을 초월하는 사람들이 도덕적 우월감을 갖는 진기한 현상도 목격된다. 아니 따지고 보면 진기할 것도 없다. 이 경우의 도덕적 우월감은 대의시대정신과 관련된 것으로 개인의 행실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사소한 것인가? 영국 정치학자로 현재 미국 뉴욕대학 정치학 교수로 있는 스티븐 룩스(Steven Lukes, 1941~)마르크스주의와 도덕(Marxism and Morality)(1985)이라는 책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망친 건 도덕개념의 부재라고 했다. 물론 그가 망쳤다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방향이 그쪽이란 건 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도덕은 변화하는 물질적 환경에 의존하며, 상대적일 뿐 아니라 폭로되어야 할 환상이고, 그 뒤에 계급적인 이해관계를 감추고 있는 편견의 다발일 뿐이다. 예컨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듀링론(Anti-Duhring)(187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도덕이 국가들 사이의 차이와 역사를 넘어선 영원한 원리를 가진다는 것을 구실로 하여 그 어떤 도덕적인 도그마를 영원하고 궁극적이며 불변의 윤리적인 법칙으로서 우리에게 부과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반대로 우리는 모든 도덕 이론은 궁극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시대에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회는 이제까지 계급 갈등 속에서 움직여왔으므로, 도덕은 항상 계급의 도덕이었다.”2


룩스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도덕관은 결과주의(consequentialism)’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주의는 영국의 분석철학자 엘리자베스 앤스콤(Elizabeth Anscombe, 19192001)1958년에 쓴 현대의 도덕 철학(Modern Moral Philosophy)이란 논문에서 만든 말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the ends justify the means)”는 이론이다.3 룩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과주의는 결과에 의해서만 행위들을 판단하며 행위 주체들에게 모든 것을 고려할 때 가능한 한 최선의 결과를 산출하도록 요구하는 이론을 의미한다. 결과주의는 행위 주체가 전체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행동한다면 항상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옳음과 좋음을 연결 짓는다.”4


흔히 결과주의의 반대로 명분주의 또는 명분론이 거론되지만,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한 건 아니다. 명분을 앞세운 결과주의도 있기 때문이다. 명분을 앞세운 결과주의는 자신들의 목적이 더 선하고 정의롭다고 믿는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세력에게 많이 나타난다. 마르크스주의가 꿈꾸는 인간 해방의 과정이 짧다면 결과주의의 강점이 두드러지겠지만, 과정이 길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간 해방은 멀고 인간 행태는 가깝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이는 인간 행태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공포가 인간 해방이라는 가치를 압도할 수밖에 없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근대의 그늘(2000)에서 이 원리를 한국의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평가에 적용시킨다. 그는 한국 좌익의 몰락은 반드시 일방적인 정치적 탄압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 당시 좌익의 급작스러운 정치노선상의 변화는 좌익의 도덕성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으며, 한국전쟁 기간의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이들이 펼친 부정적 정책들은 사회주의 일반이 지닌 호소력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데 기여했다.……여기서 필자는 한국 사회주의자들이 도덕성(morality)’의 문제를 등한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고 말하고 싶다.……전통적으로 유교적 도덕률이 사회적 힘을 갖는 한국에서처럼 이것이 잘 적용된 예도 드물 것이다. 민중은 원래 그러하지만, 특히 한국 민중이 지도자나 정치가를 평가하는 기본 잣대는 도덕성이다.”5


1990년대의 학생운동권, 특히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과 오늘날의 일부 진보 정당도 마찬가지다. 김형민은 19976월 벌어진 두 차례의 프락치혐의자에 대한 타살 과정은 괴물의 탄생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는 탄압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을 외면하고, 옳다고 믿는 시대적 정의를 위해 현실 감각을 포기하고, ‘자심한 프락치 공작을 이유로 또래 젊은이들을 물 적신 담요에 말아 두들기고 맞고 불래? 불고 맞을래?’를 뇌까리며 녹음기를 들이미는 괴물이 되었던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최근 수삼년 동안, 나는 한총련 몰락의 데자뷔를 어느 진보정당의 노정에서 발견하고 있다. 자신들이 옳다는 가치를 근거로 당 대회장을 점거하고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고, 밖으로는 전파되기 어려운 자신들만의 신념 체계 속에 갇힌 채 정권의 탄압을 자신들의 정당성의 도구로 삼으며 현실 세계와는 점차 멀어지고 있는 이들의 행보는 한총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6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P. Lakoff, 1941)도덕의 정치(Moral Politics)(2002)에서 미국의 민주당 공화당 대결 구도를 도덕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인 그는 보수주의자가 승리를 거둔 1994년 중간선거 기간 동안 내 눈에 보수주의자(공화당)와 진보주의자(민주당)가 서로 판이한 도덕 시스템을 가졌고, 양 진영의 정치적 담론은 상당 부분 그들의 도덕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 뚜렷하게 보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많은 진보주의자들처럼 나도 한때는 보수주의자들을 천박하고, 감정이 메마르거나 이기적이며, 부유한 사람들의 도구이거나, 혹은 철저한 파시스트들일 뿐이라고 얕잡아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고도의 도덕적 이상주의자로 간주하며, 그들이 깊이 믿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보수주의에 왜 그토록 열렬하게 헌신적인 사람들이 많은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보수주의를 잘 이해하게 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보수주의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7


레이코프는 그런 성찰 끝에 자신이 지지하는 민주당 진영에 이런 고언을 내놓는다. “진보주의자들이 정치에서 도덕과 신화와 감정적인 측면을 무시하는 한, 정책과 관심을 가진 그룹과 사안별 논쟁에만 집착하는 한, 그들이 이 나라를 뒤덮은 정치적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게 될 희망은 전무하다.”8


같은 맥락에서 뉴욕대학 심리학자 조너선 헤이트(Jonathan Haidt, 1963)는 도덕성은 이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며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 판단은 미학적 판단과 비슷하다. 우리는 그림을 보는 순간 그 그림이 우리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안다. 누군가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도덕적 논쟁도 이와 매우 흡사하다. 두 사람이 어떤 문제를 놓고 강력한 감정을 표출한다. 감정이 먼저이고, 이유는 서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도중에 만들어진다.”9


잘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이념에 분노하지 않는다. 도덕에 분노한다. 거대한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 사소한 것에 분노한다.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과 비교해서 분노한다. 이념이나 정책은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분노의 소재로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한국의 현 여야 관계도 도덕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류학자 리처드 슈베더는 전 세계의 도덕 체계를 두루 살핀 끝에 도덕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하는 차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통합과 질서를 중시하는 차원, 그리고 영혼의 깨끗함과 신성을 중시하는 차원 등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연구에선 개인·공동체·신성이라는 도덕의 세 차원 가운데 진보적인 사람들은 개인을 특히 더 중시하는 반면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셋 다 비슷하게 중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진화심리학자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전중환은 보수와 진보의 도덕이라는 제목의 한겨레(20131029) 칼럼에서 위와 같은 연구 결과를 소개한 뒤 유권자들은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에 따라 투표한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보수와 진보가 이해하는 도덕은 사뭇 다르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유용한 시사점을 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에서 저소득층이 새누리당을 훨씬 더 지지한 이유는 교육 수준이 낮아서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갔기 때문이며, 그러니 진보 세력이 그들의 삶을 향상할 유일한 대안임을 확실히 인식시키기만 하면 문제가 저절로 다 해결되리라는 분석은 이런 점에서 한계가 있다. 진보 세력은 보수적인 국민들이 그들에게 품는 생래적인 거부감, 곧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를 흔드는 비도덕적인정당이라는 시선을 어떻게 바꿀지 궁리할 필요가 있다.”10


탁월한 분석이다. 전중환은 말을 조심스럽게 했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 돌직구를 날리자면 민주당(이젠 새정치민주연합이 되었지만, 논점을 살리기 위해 민주당으로 부르겠다)은 우선적으로 도덕에서 새누리당에 패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민주당 지지자들은 당장 어떻게 새누리당의 도덕이 더 낫단 말이냐?”고 펄쩍 뛰겠지만, 보수와 진보가 이해하는 도덕은 사뭇 다르다는 점을 상기하는 게 좋겠다. 물론 진보가 억울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만, 보수와 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판단 준거점이 다르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 똑같이 과오를 저질러도 진보가 더 욕먹게 되어 있다. 세상 민심이 그런 걸 어이하랴.


그럼에도 도덕을 강조하는 건 진보 죽이기의 음모라거나 진보가 그런 음모에 휘말려들면 안 된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펼치는 진보 논객들도 적지 않다. 진보 진영의 내부 비판에 대해서도 그럴 시간과 힘이 있으면 보수 진영을 비판하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런 주장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진보 진영은 사실상 그간 그런 식의 대응을 해온 셈인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젠 한번쯤 뒤돌아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무력혁명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면서, 즉 선거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면서 일반 유권자들의 정서를 무시해서 어쩌자는 건가.


민주당에 가장 필요한 건 레이코프가 했던 종류의 자기성찰이다. ,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고 혐오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민주당이 수십 년째 신봉해오고 있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신념이자 구호는 민주당에 독약이 되고 있다. 설사 이런 이분법 구도에서 민주 쪽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민주당을 지지하면 민주요 반대편을 지지하면 반민주라는 도식은 시대착오적인 정도를 넘어 속된 말로 찌질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 정치는 기본적으로 반감의 정치이므로 예전에도 그랬듯이,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스스로 무너짐으로써 민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질 수는 있다. 또 막상 선거 때가 되면 평소 지지율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도 한국 정치의 익숙한 풍경이다. 민주당도 그런 생각으로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 공격에 심혈을 기울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정당을 지지하든 우리가 그런 식의 정권교체나 선거 승리를 기대한다는 건 국가적·국민적 차원에서 볼 때에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이 점에서 보자면, 최근 민주당 의원 최민희가 박근혜 정부가 성공해야 진보 집권 기회가 온다진보와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절제의 미덕을 가져야 한다. 예의를 지키는 게 진보의 미덕이다고 말한 건 매우 고무적이다.11


노골적인 친()공화당 노선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미국 폭스뉴스 사장 로저 에일리스(Roger Ailes, 1940)저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푸른 주(민주당이 승리한 주)’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고 있다고 했다.12 폭스뉴스는 그런 반감을 밑천으로 성공적인 장사를 한 셈이지만, 그걸 뒤집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새누리당과 그 지지자들을 어리석고, 탐욕스럽고, 더 나아가 사악하다고까지 생각하는 한 민주당은 필패(必敗)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롭고도 놀라운 사실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논객들과 언론인들의 대부분이 그런 시각으로 새누리당과 그 지지자들을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분노하게끔 조롱하면서도 그걸 풍자나 정당한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게 바로 싸가지의 문제요 도덕의 문제라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도 도덕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노선과 정책과 법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물론이다. 그러나 그 중요한 걸 해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정치인과 정치집단이 도덕적 신망을 잃어 식물화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그 목적이 아무리 숭고해도 도덕이 파탄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게 바로 결과주의의 한계다. 도덕주의는 내쫓고 도덕을 불러들여야 한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진보에 해가 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 19051997)의 말을 빌리자면,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13 우리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황을 바꾸는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좋지 않을까? 좌우(左右), 여야(與野), 지역, 계층, 세대 등의 분열과 갈등 구도, 그리고 프랙털 원리에 의해 그 구도 안에 자리 잡은 또 다른 분열과 갈등 구도를 넘어서 우리 모두 화합과 평등을 지향하는 한 단계 발전한 세상의 실현을 위해서 말이다.

인물과 사상 2014.5

작가

인물과사상 편집부

출판

인물과사상사

발매

201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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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재인, 1219 끝이 시작이다(바다출판사, 2013), 310.
2. 스티븐 룩스(Steven Lukes), 황경식·강대진 옮김, 마르크스주의와 도덕(서광사, 1985/1994), 27·36.
3. Consequentialism, Wikipedia.
4. 스티븐 룩스(Steven Lukes), 앞의 책, 211.
5. 김동춘, 근대의 그늘: 한국의 근대성과 민족주의(당대, 2000), 265266.
6. 김형민, 의장님만 믿고 또래 젊은이를 고문했는가, 한겨레, 201438.
7.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손대오 옮김, 도덕의 정치(생각하는백성, 2002/2004), 33·402.
8.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앞의 책, 41.
9. 조나 레러(Jonah Lehrer), 강미경 옮김, 탁월한 결정의 비밀: 뇌신경과학의 최전방에서 밝혀낸 결정의 메커니즘(위즈덤하우스, 2009), 274.
10. 전중환, 보수와 진보의 도덕, 한겨레, 20131029. 전중환은 도덕은 본능이다. 곧 도덕성은 우리의 조상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적응적 문제들을 풀고자 선택된 보편적인 심리기제의 산물이다고 말한다. 전중환, 오래된 연장통: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사이언스북스, 2010), 192.
11. 박성우·강태화, 친노 최민희 박근혜 정부 성공해야 진보 집권 기회, 중앙일보, 2014214.
12. 마이클 르고(Michael LeGault), 임옥희 옮김, 싱크! 위대한 결단으로 이끄는 힘(리더스북, 2006), 99100.
13.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 이시형 옮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1984/2005), 137; 톰 버틀러 보던(Tom ButlerBowdon), 이정은 옮김,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흐름출판, 2003/2009),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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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강준만 교수는 이 컬럼, 아니 논문인 이 컬럼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 특히 한국의 문화지체 현상을 살핀다. 서구의 300년을 일본이 100년이 걸려서 문화의 간극을 메우려 했다면, 압축성장을 한 한국은 불과 30여년만에 그 숱한 역사-정치-경제의 질곡을 겪었다고 본다. 문화의 지체 현상만이 아니라 정치의 지체, 역사의 지체 현상까지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한다. 한국의 문제점은, 미래의 모습을 먼저 설정하지 않은 채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성인의 몸집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 대표하는 사례로 연고주의를 든다. 정치판의 연고주의를 비난하지만 일상적인 삶에서 연고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한국 특유의 정 문화는 정치를 이념이나 노선보다 '인간관의 예술'로 변질시킨다.  개혁 대상으로 삼는 구정치인일수록 인간관계가 탁월한 반면,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무능한 경우가 많다.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유권자들도 입으로는 개혁을 원한다고 하지만, 정치인을 평가할 때에는 인간관계 능력을 중요시한다. 대중의 일상적 삶도 촘촘한 인간관계 그물망에 의존하기 있기 때문에 그런 평가는 거의 본능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왜 새 정치는 새 인물로 하기 어려울까 (원문)▼

 

강준만의 이론으로 보는 세상

 

 

왜 새 정치는 새 인물로 하기 어려울까?

문화 지체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문화지체

 

주요 구성원은 대부분 국회의원·장관 지낸 구인물이다. 그들은 안 의원이 비판하는 구정치에 몸담았다. 일부는 잦은 변신으로 철새라는 비판을 받는다. 구정치 출신이라고 반드시 구정치에 책임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새 정치에 어울리는 참신성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안 의원 주장처럼 새 정치의 가치가 절박한 것이라면 개혁적 현직 인사들이 핵심을 이뤄야 한다.”1


민주당과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연합이 통합해 새 정당을 만들기로 했다.……명분이 불충분함에도 변신을 택한 건 안 의원이 여러 현실적인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새정치연합 지지율은 한때 민주당의 2배를 넘었으나 최근엔 비슷한 수준으로 추락했다. 새정치연합은 지역 기반이나 인물·정책의 차별화에서도 빈약함을 드러냈다. 새 인물의 영입이 여의치 않아 구정치와 관련된 인물들이 주류를 이뤘다. 이런 점 때문에 안 의원이 서둘러 새 정치의 텐트를 걷고 민주당이라는 구건물로 도피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2


중앙일보2014219일자에 실린 안철수의 새 정치에 새 인물이 없다는 사설과 201433일자에 실린 민주안 통합, 개혁 못하면 구정치 합병이라는 사설이다. 보수 언론만의 비판은 아니다. 진보 언론에도 이와 유사한, 또는 이보다 훨씬 독한 비판들이 난무한다.


안철수에 대해 어떤 비판을 하든, 이 문제를 일반론의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그 누가 주체가 되든 왜 새 정치는 새 인물로 하기 어려운지에 대해 우리 모두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설사 안철수 현상이 불발로 끝나더라도, 이후 또 언젠가 나타날 새 정치를 위한 시도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적 제약이 있다는 데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그 제약은 바로 문화 지체.


문화 지체(cultural lag)’는 미국 사회학자 윌리엄 오그번(William F. Ogburn, 18861959)1922년에 만든 말로, 광의의 문화 요소들 사이에 변화의 속도가 달라 그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문화의 비물질적인 측면들이 문화의 물질적인 측면들의 발달에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테크놀로지, 경제, 사회조직, 가치 등 4가지 요소를 변동 속도가 빠른 순서대로 보자면, 그대로 테크놀로지, 경제, 사회조직, 가치 순이다. 4가지의 변동 속도의 차이가 낳기 마련인 상호 간 심한 부조화는 문화적 갈등은 물론 정치사회적 혼란의 요인이 된다.3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동양권 나라들에 물질문화와 정신문화 사이에 문화 지체를 야기했고,4 한국은 문화 지체역사 지체까지 가세했다. ‘압축 성장(condensed economic growth)’과 더불어 강력한 독재 체제가 인위적으로 특정 부문(정치)은 억누르고 특정 부문(경제)은 키웠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발생했을 문화 지체가 훨씬 더 증폭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압축 성장의 나라. 서구에서 300년이 걸린 변화를 우리는 불과 30년 만에 해치웠으니, 그로 인한 문화 지체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할 수밖에 없다. 김진경은 삼십년에 삼백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100년 동안에 서구의 근대 300년의 변화를 압축해 따라갔다면 한국은 60년대 이래 30년 동안에 서구의 300년을 압축해 따라갔습니다. 이러한 속도 속에서, 이러한 광기 어린 변화 속에서좀 과장해 말한다면우리는 30년의 생물학적 시간에 300년의 서사적 시간을 살아버린 것입니다. 무서운 속도의 서구 흉내내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고 필요한 일로도 간주되지 않았습니다.”5


프랑스 언론인 장 피엘(Jean Piel)2000년에 출간한 한국, 사라지기 위해 탄생한 나라?에서 지금 한국에서는 고대와 현대가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공자가 위협받고 있지만, 아직은 죽지 않았다고 썼다.6 다소 과장된 관찰이긴 하지만, 이게 바로 문화 지체와 역사 지체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예컨대, 독재 정권은 사라졌지만 독재 정권에 길들여진, 또는 싸우면서 닮아간, 의식과 관행이 사라지기까진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면, 여러 시대가 발현의 형태를 달리한 채 공존하고 있다는 데에도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장 피엘이 긍정적으로 인용한, 한국인들의 다음과 같은 자기 평가에도 동의하긴 어렵지 않다.


한국의 문제점은, 미래의 모습을 먼저 설정하지 않은 채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지금 우리는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성인의 몸집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7


이렇듯 한국은 전근대·근대·탈근대적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는 나라다. 어느 나라에서든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룬 나라인지라 이게 유독 심하다. 한국에서 이와 같은 비동시성의 동시성(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은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를 제대로 보는 걸 매우 어렵게 만든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인간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진 못한다.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드는 게 아니며, 그 환경은 직접 과거로부터 발견되고 주어지고 계승된 것이다고 했다. 정치 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유권자들은 과거에서 무엇을 물려받았는가? 연고주의다. 그들은 정치판의 연고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일상적 삶에선 연고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물론 그들에게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요 방어 논리지만, 이게 문제라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게 바로 문화 지체 때문이다.


2006년 한국개발연구원(KDI)사회적 자본 실태 종합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회적 관계망 가입 비율은 동창회가 50.4퍼센트로 가장 높고, 종교단체 24.7퍼센트, 종친회 22.0퍼센트, 향우회 16.8퍼센트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공익적 단체들의 가입률은 2퍼센트대에 머물렀다.8 , 자신의 삶의 문법은 전근대의 것을 고수하면서 공적 영역을 향해선 근대나 탈근대로 나아가달라고 요구하는 셈인데, 이건 속된 말로 턱없는 소리다. 더욱 중요한 건 유권자들의 그런 이중성이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평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한국 특유의 정() 문화는 정치를 이념이나 노선보다는 인간관계의 예술로 변질시킨다. 그런데 우리가 곧잘 개혁 대상으로 삼는 구정치인일수록 인간관계가 탁월한 반면,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무능한 경우가 많다.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치권엔 조폭을 연상시키는 형님문화가 만연되어 있다.


지난 20136월 여당에서 리더십이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어느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후배 의원에게서 받은 문자 메시지가 카메라에 포착되어 공개됨으로써 논란을 빚었지만, 실은 그 메시지는 한국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는 리더십의 본질이라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저는 요즘 어떻게든 형님 잘 모셔서 마음에 들어볼까 노심초사 중이었는데 이런 소문을 들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형님께서 무엇이든 시키시는 대로 할 생각이오니 혹시 오해가 있으시면 꼭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중에 시간을 주시면 찾아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리더십을 지금처럼 인간관계 중심으로 평가할 경우 신진 개혁가는 리더십이 없거나 약하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게다가 세력을 결집해 선거에라도 출마하려고 하면 인물난에 시달리게 되어 있다. 선거에 나설 정도의 인물들은 일반 유권자들과는 달리 인간관계와 더불어 고려해야 할 현실적인 것이 많아 당위나 명분만으론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권자들도 입으로는 개혁을 원한다고 하지만, 정치인을 평가할 때에는 인간관계 능력을 중요시한다. 대중의 일상적 삶도 촘촘한 인간관계 그물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평가는 거의 본능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인간관계의 볼모가 되어 있는 정치는 개혁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다. 그건 우리의 총체적 삶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정치 개혁을 염원하는 유권자들의 선의는 의심할 필요가 없지만, 문화 지체와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사로잡힌 그들이 부지불식간에 갖고 있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고정관념은 정치권과의 인간관계 제로상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신진 개혁가들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다. 신진 개혁가는 문화적인 동시에 구조적인 무능을 드러내면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설의 제물로 바쳐진다.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감내하자. 근데 왜 우리는 그러면서도 새 정치를 원한다고 하는가? 그런 이치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새 정치를 외친 사람의 무지 또는 경솔함을 비판하더라도 유권자들 역시 면책되기 어렵다는 걸 깨닫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인물과 사상 2014.5

작가

인물과사상 편집부

출판

인물과사상사

발매

201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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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설] 안철수의 새 정치에 새 인물이 없다, 중앙일보, 2014219.
2. [사설] 민주안 통합, 개혁 못하면 구정치 합병, 중앙일보, 201433.
3. 이원규, 해방 후 한국인의 종교의식구조 변천연구, 권유식 외, 현대 한국종교변동 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184; R. P. 쿠조르트(Ray P. Cuzzort)·E. W. (Edith W. King), 한숭홍 옮김, 20세기 사회사상(나눔사, 1980/1991), 312.
4. 임현진, 사회과학에서의 근대성 논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역사문제연구소 편, 한국의 근대근대성비판(역사비평, 1996), 191.
5. 김진경, 삼십년에 삼백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당대, 1996), 8283; 정영태, 개발연대 지식인의 역할과 반성, 장회익·임현진 외, 한국의 지성 100(민음사, 2001), 175176쪽에서 재인용.
6. 장 피엘, 한정석 옮김, 한국, 사라지기 위해 탄생한 나라?(자인, 1998/2000), 15.
7. 장 피엘, 앞의 책, 14~15.
8. 오관철, 소득·학력 높을수록 연줄 중시, 경향신문, 2006122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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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의 관점에 따르면 개인의 권리와 자유, 이념과 정책에 높은 비중을 두는 진보세력은 우리나라의 구체적인 풍토나 현실을 제대로 살피고 있지 않다. 새누리당과 새누리당 지지자들을 어리석고, 탐욕스럽고, 더 나아가 사악하다는 관점으로 일관되어 있다.  "어떻게 새누리당을 지지하거나 좋아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상대가 분노하게끔 조롱하면서도 그걸 풍자나 정당한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게 바로 싸가지의 문제요. 도덕의 문제라는 것인데 전혀 깨닫고 있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4. 페북의 한 친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올렸다.

BUS44에서 승객들이 나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승객들만의 잘못인가?
-세월호참사와 6.4 선거

4.1 인천에서 세월호참사의 책임을 져야할 새누리당의 유정복후보(전 안행부장관)가 당선된 이유는 무엇일까?

4.2 안산이 있는 경기에서 박근혜대통령을 지키겠다는 남경필후보의 당선은 무엇을 말하는가?

4.3 서울시민들은 왜 조희연교육감을 선택했는가? 이것은 기적인가?

4.4 대구의 김부겸시장후보의 40.3%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4.5 대전의 권선택시장후보의 당선을 새정치민주연합의 승리로 봐야할까?

4.6 광주의 윤장현시장후보의 당선은 안철수의 손을 들어준 것인가?

4.7 강원의 시군장당선자가 대부분 새누리당소속인데, 최문순지사의 당선은 무엇때문일까?

4.8 진보교육감의 대거당선은 세월호참사가 원인인가? 시대의 흐름인가?

4.9 대전의 진보교육감은 왜 둘이었나? 왜 진보시민단체의 한숭동후보지지에도 불구하고 한숭동후보와 최한성후보의 투표율엔 차이가 없었나?

4. 10 경상도와 전라도의 선명한 당지지의 공통점와 차이점(이유)는 무엇인가?

 

5. 4번의 질문이 합당한가?  2.와 3를 되비추면 다른 질문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뱀발. 

 

1. 선거 당일 벙개로부터 이야기를 잇고 다시 듣고, 생각과 꿈은 온통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안간힘을 쓴다. 몇가지 마음자락이나 좀더 다른 의견들을 듣고 싶다. 질문을 잘하게 된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근본적인 회의가 들어도 좋으니 좀더 부여잡고 바닥까지 가보면 좋겠다. 너무도 안이한 평가, 안이한 토론 그리고 잊혀지는 평가보다는 지역정치에 대한 질문을 다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논란이 된 부분도 서로 상처가 되어도 좋으니 더 과정과 결과, 사전 준비도 짚어보는 것이 어떨까?  하지만 다른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없다.  일터 동기모임에서 집값때문에 보수로 돌아서는 50대부터, 보수화되는 어쩔 수 없음을 피력하기도 하지만, 아무말없던 새누리지지자는 목소리를 높이지 못한다. 정치얘기는 그만두자고 할 뿐이다. 아전인수가 될 것 같아 미리 걱정이다. 질문 좀 건네받으면 좋겠다.

 

2. 0604 선거벙개, 0605 복수동모임, 0606 일터모임, 0607 연*,연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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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흐린데 초록은 더 짙어져있다. 익숙한 꽃들은 하나 둘 지고, 또 다른 꽃이 그 자리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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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의 끝이 아니라 일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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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시대다. 불행에 물드는 시대다. 그 불행이 제대로 발효된다면 불행의 시대를 고발하고 나아가 거스르는 힘으로 분출할 수 있겠으나, 이 시대의 불행은 대체로 안에서 고이고 부패하여 기억력과 사고력 그리고 정치적 능력을 좀 먹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 불행에 익숙해져 버렸다. 불행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자보다 불행에 익숙해진 자는 더욱 불행하다.  107

 

 

2


과거에 진실은 폭로를 통해 세상으로 뛰쳐나오곤 했다. 진실은 갑작스럽게 베일을 찢고 나와 세상을 전율케 했다. 그러나 오늘날 진실의 정치학은 검열의 논리에서 포화의 논리로 넘어갔다. 대중매체는 쉴 새 없이 이것저것을 뒤섞어 진열한다. 과다노출되어 음영을 잃은 사진처럼 모든 것이 엇비슷해 보인다....검열의 논리에서 포화의 논리로 이행한 후에는 영사막에 자주 올라와야 현실에서 발생한 일이 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음화적인 죽음의 상태로 내밀린다. 어제 짤막한 기사로 등장한 희생의 사건은 오늘 세상에서 없던 일인양 다른 소식들에 파묻혔다. 침묵 속에 잠겨 버렸다.  108


정치평론가들은 정치를 평론- 행동이 아닌 수다의 영역으로 바꿔가고 있다....그들의 발언은 대부분 현실추수적 분석이자 상식적인 처방에 그친다. 대신 그들은 청와대 자리를 두고 벌이는 대권경합에 맞춰 모든 정치적 이슈를 해석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그들은 정치를 좌우 엘리트가 벌이는 대중 획득 게임으로 중계한다. 정치에 대한 과정의 철학이 되어야 할 민주주의는 권력을 둘러싼 이전투구의 극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정치적 세계'는 '정계'로 축소되고 '정치권력'은 '정권'으로 물신화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정치와 민주주의의 느린 자살을 목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109

 

 

3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혀 우리가 돌아올 곳은 우리 자신이다. 그렇게 상대와 맞붙어보지도 못한 채 뒷걸음질쳐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여 거기서 무기의 재료를 구해야 한다. 상대를 향해 뻗어가지 못한 까닭에 퇴행증세를 보이는 분노를, 번져가는 체념을 활용하는 것이다. 점착성 물질처럼 끈적하고 석회질 침전물처럼 남아 자신을 침묵으로 가라앉히는 무력감을 분석하여 침묵하는 무게를 표현하는 무게로 바꿔내는 것이다. 112


불행한 시대에는 결국 불행이 시대의 자원이지 않겠는가.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유일한 자원은 아니겠지만, 불행의 감정은 개체의 내면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바깥으로 분출되면 사회적 감염의 힘을 지닐테니 유용한 자원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행의 감정이 내면세계에서 응고되지 않고 사회적 용법을 지니도록 끄집어내는 데 오늘날 사상의 한 가지 역할이 있지 않겠는가 113

 

 

4


사상은 내면 세계에서 쌓이는 감정, 이미지의 자기누적에 따른 고정화를 무너뜨리며 거기에 공유가능한 언어를 입힌다. 아울러 사상은 그 작업에 나서기 위한 자원을 바깥에서 구하지 않는다. 바깥에서 자명한 틀을 빌려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의미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 공동의 표현을 발효시킨다. 그렇게 안을 통해서 안을 넘어서는 전망을 추구하는 것이 사상일 것이다. 113


개체의 감정이 개체의 감정인 채로는 곧바로 공동의 무기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감정은 부조리하다. 그 부조리에 리를 채워가야 하며, 그것이 무력한 위치에서 거머쥘 수 있는 사상의 역할이자 가능성일 것이다. 무력한 자에게는 무력함을 철저히 파고드는 것이 능력이며, 병든 자에게는 병의 무거움을 철저히 의식하는 것이 일종의 건강함의 표시이지 않겠는가  114

 

 

 

 볕뉘. 제목이 '한국, 2014년 4월 16일이후'이다. 책갈피를 한 곳을 옮겨적다. 그리고 번호를 매기고 밑줄을 그어본다. 굵은 글씨로 입혀본다. 덧붙일 마음을 쓰고 다시 지운다. 발효라는 익숙한 말을 입에 공굴려본다. 꾹 삼킨다. 할말은 많지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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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은 일의 끝이 아니라 일의 시작이다.' 어제 본 윤여일과 서동진의 글의 여운이 남아있다. 결과의 초점과 과정을 동시에 살피는 거듭 제곱의 사유, 정치만 경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 뫼비우스의 띠, 루빈의 컵처럼 동시에 볼 수 없으나 함께 봐야하고 함께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고 ᆞᆞᆞ

 

나는 교육감도 시장도 야당도 진보도 믿지 못한다.  당분간 아큐에 침잠하는 수밖에 ᆞᆞ 능력이 아니라 시간 ᆞᆞ행정가로 전락하고 마는 정치인들이 되어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반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도안과 밖 그리고 곁, 스스로 하고 있는 일,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구별이 가능한가. 거듭제곱의 사유조차 하지 못하는 행정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후보자보다 주변 인물들은?

 

글 두편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원성이 들끓는 4년뒤가 되지 않으면 좋겠다.

 

 

여전히 꽃은 붉고 아침은 밝다. 바다는 푸르다.

 

 

 

 

 

 

 

 

2.

 

엔엘 NL '주체'는 없다고 하지 않는가 진중권에게 배울 건 배워야되지 않겠는가
 피디 PD 우리나라 사람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하지 않는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하고, 진보를 만나면 진보를 죽여야 진보가 사는 건 아닌가. 엔엘과 피디의 안부를 묻고 싶지 않다. 묻지 않아야 더 할 일이 많아지는 건 아닌가 - 딴지가 있으면 좋겠다. 표현의 자유는 있는 것이겠지. 궁금한 것은 없는가.

 

 

 

 조금 부족하면 어때요. 바람은 시원하고 아직도 배워야

 할게 있잖아요. 대전시민아카데미는 더 좋은 강좌와 생

 각으로 회원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뱀발. 

 

1.선거개표방송을 함께 보고 나눈다.  일찍 선거하고 막내와 집안 청소 겸 식사하고 노닥거리다가 책 몇권을 챙긴다. 몇몇 구절이 박힌다. 말과활의 표지와 표지 속 그림, 그리고 루쉰이라면 어떻게 지금을 볼까 궁금하던차에 윤여일의 글을 본다. 루쉰 역시 꽃다운 청춘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도하고 평생 그것을 안고 살았다. 진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진보는 민주적인가? 여전히 질문만 송곳처럼 맺힌다. 

 

2. 새벽처럼 나서서 기차를 탄다. 깨지 않는 취기에 고생한 님들의 문자가 마음을 달래준다. 그래도 몇몇 교육감 당선이란 달콤함을 삼켜본다. 서동진의 글도 좋다. 두 제곱이란 표현보다 거듭제곱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아닐까?  이과나 공대생이 아닌 사회학과 출신은 이렇게 써도 되는가?

 

3. 지역의 진보는 있는가? 페북에 올리고 전화를 받았다. 소속을 빼달라고 말이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거듭제곱의 사유는 여전히 여기 진보에도 필요한다.  자칭진보?분들이 환원주의자인 것이 가장 아쉽다. 오늘도 술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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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행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자보다 불행에 익숙해진 자는 더욱 불행하다
    from 木筆 2014-06-05 16:53 
    1 불행한 시대다. 불행에 물드는 시대다. 그 불행이 제대로 발효된다면 불행의 시대를 고발하고 나아가 거스르는 힘으로 분출할 수 있겠으나, 이 시대의 불행은 대체로 안에서 고이고 부패하여 기억력과 사고력 그리고 정치적 능력을 좀 먹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 불행에 익숙해져 버렸다. 불행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자보다 불행에 익숙해진 자는 더욱 불행하다. 107 2과거에 진실은 폭로를 통해 세상으로 뛰쳐나오곤 했다. 진실은 갑작스럽게 베일을 찢고 나와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