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꿈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가 중요하게 느껴져야 한다.
사회가 감당할 무질서의 양을 바꾸지 않으면 완전한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


 

풍요를 적절하게 활용하려면, 사람이 성숙함에 따라 통제된 순수한 경험에 대한 욕망이 약해질 수 있는 사회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폐단의 기원은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성장하는 동안 청소년기의 문제들에 묶이거나 사로잡힌 데서 비롯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참는 법을 배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인 성인기의 조건은 이미 분명한지도 모른다.

 

 

순수한 정체성을 넘어서 성장하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젊은이들의 이 모든 꿈이 실현되지 않으며, 사람은 좌절하는 가운데 그나마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꿈을 지킬 수밖에 없다. 최근에 벌어진 사태로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경험한 것과는 달리, 대다수 성인들은 이런 실패를 겪으면서 꿈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느낀다. 그리고 대다수 성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틀에 박힌 삶을 기다린다. 이제 문제는 특별하지 않은 성인들이 젊은 시절의 꿈을 잃어버리는 것 자체가 '성장'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마치 성인기가 청소년기에 꿈꾸었던 불운한 활동과 희망의 수동적인 종결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161

 

 '포기'는 풍요로운 성인들이 자기 성인기의 방침을 묘사하는 아주 흔한 방식이다....'포기'는 편한 행동이며, 포기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틀에 박힌 삶과 평화에 도전하는 이들을 억누르기 위해 뭉칠 수 있다. 내가 묘사한 젊은 급진주의자들 같은 특별한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왜 그들이 자신의 첫 번째 꿈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신념을 계속 부여잡았는가 하는 점이다. 풍요로운 공동체 생활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이런 힘을 장려할 수 있는 수단이다. 161-162

 

성인기의 힘으로 이동하는데에는 4가지 단계가 존재한다. 

 

1단계 - 경험을 감당할 수 있는 역량과 새로운 능력과 힘을 얻는 데 필요한 경험의 축적 사이에서 불균형이 극에 달한다.  2단계 -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순수한 경험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런 성장의 불균형에 존재하는 긴장을 해소할 수 있다....현대도시의 사회적인 제도들은 이런 식으로 개인의 성장을 동결시키려고 한다. 그리하여 위협적이지 않는 동일성 속에서 그대로 성인의 사회 생활에 도입된다. 이런 정상적인 성인의 양상을 깨뜨려야 한다. 특별히 강한 몇몇 젊은 혁명가들의 경험은 3,4단계에서 가능성을 넌지시 보여준다. 

 

 3단계 - 젊은이는 일관된 질서의 전망을 실행하려고 노력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장애물이나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사회 상황과 마주친다. 무질서한 세계는 일관성과 유대라는 꿈을 좌절시킨다. 좌절이 어떻게 일어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좋은 편이고 그들이 나쁜 편이라는 가정이다. 이런 순수한 이미지는 무너지고 동정이 생겨난다.  4단계 - 주변 세계에 관한 아동기의 호기심이 부활한다. 모든 것이 정돈된 모습을 보려는 욕망은 제쳐두고라도 세계를 보려는 욕망이 다시 생겨난다. 다시 말해, 미지의 장소들을 보고 전에 마주치지 않았던 느낌과 상황을 경험하려는 용기가 다시 솟아오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에 대한 관심 같은 게 생겨 세계에서 '다름'을 인식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이 극단적인 형태의 순수 욕망을 개인 '병리학'으로 해석한 것처럼, 이런 질환을 가진 개인들의 치료를 보면 사회적인 형태의 병리학을 어떻게 치료할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62-165

 

사람이 자기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깨닫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에게는 일정한 자족적인 고독과 독자성이 생겨난다...사람이 사회 세계의 주인이자 거울이 아니라 '다수 가운데 하나'라고 자신을 보게 되면 '자신이 가진 속성보다 자신이 더 크다'는 느낌이 생겨난다....자아의 주인다운 능력에 대한 믿음을 버림으로써 일정한 힘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166

 

 사람이 전능해지고 싶다는 청소년기의 욕망을 상실하면 그가 가지는 관심의 특질에도 어떤 일이 생긴다. 이 변화는 '돌봄'이라는 단어의 두 가지 용법으로 구체화된다. 일상 언어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걱정하는 일'과 함께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168

 

이런 돌봄 개념은 인간의 한계, 즉 세계 속에서 한 사람의 관심과 힘의 한계를 배운 결과물이다. 이렇게 하여 어린이의 자유로운 호기심과 주변에 있는 경험의 대상 자체에 대한 관심은 정신장애에 시달리는 성인의 치료를 통해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이제 청소년기와 달리 관심과 특별한 돌봄은 사전에 형성된 가치 구조의 지시를 받지 않아도 된다. 개인의 세계 속 정체성 의식에 '들어맞지 않는' 것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 치료를 거치면서 환자는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와 마주해도 좌절하지 않는 생존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한다. 170

 

성인기의 불안정한 성격과 자기 안의 퇴행적인 행동방식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성인의 의향은 둘 다 삶에서 우연을 수용하는 데 이른다. 하지만 정서적인 힘의 우연한 성격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수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걱정'의 힘을 확장하게 된다. 173

 

정서적인 성장은 신체적인 성장과 달리 불가피하고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인기를 불안정한 것으로 파악하면, 평범한 삶의 일상적인 문제들에 그토록 많은 고통이 존재한다는 어두운 현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 고통을 경감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175

 

성인의 성장은 변형적이기보다 부가적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실재의 다른 요소들이 언제나 끼어든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 사이의 고통과 무질서는 불가피하다. 이런 퇴행은 어떤 유토피아 사회에서도 절대 없앨 수 없는 사회적인 현실의 본질을 형성한다. 176

 

성인기는 흔히 제한된 사건들을 걱정하되 소유하거나 차지하려고 시도하지 않으면서 돌보는 시기로 여긴다. 성인의 돌봄이라 함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 소유하려는 힘을 느끼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것들을 책임질 수 있을까? 176

 

신체적인 나이 듦과 윤리적인 나이 듦의 시간적인 불일치로 이 문제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을 소유한다 함은 그것을 시간에서 빼내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것의 운명을 빼앗는 셈이 된다. 성인으로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옹호하면서도 그 사람이나 사물의 운명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대한 관심은 다름 아니라 좋은 돌봄은 시간 속에서, 삶의 역사에서 구체적이고 제한된 사건들을 다룬다는 의식이며, 또한 이 관심은 사람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제한된 전망이라는 의식을 수반한다. 176-177

 

 열여덟 살에 보수적인 사람은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마흔 살에도 보수적인 사람은 변명에 여지가 없다. 177

 

 과거의 파노라마를 현재의 사건들과 분리하는 것이 성인기의 힘이다. 청소년기의 힘이 이 파노라마를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렇게 해서 성인은 '강박', 즉 지난 삶의 역사의 의해 엄격하게 형성된 현재의 의미와 관심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정체성의 규칙 형성 능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의미가 개인의 자기 역사 인식에 스며들 수 있도록 이 능력을 길들이는 것이다. 178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관해 정말 유연하게 '역사적'으로 인식하려면 청소년기의 힘을 실행하고 실패하는 경험을 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와 미래의 다양한 경험을 과거의 쟁점 측면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며, 설상가상으로 이 젊은이가 청소년기에 나타난 힘을 좇아 행동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면, 과거에 충분한 힘을 가졌다면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이 마주치는 모든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인식에 시달릴 수도 있다...179 

 

이런 자유의 선물은 젊은이들이 고통 없는 꿈을 행동에 옮기고 건설적인 실패를 하도록 만드는 사회적인 상황으로부터 나온다. 180

 

도시의 병폐는 교통 개선이나 재정 확충 같은 기계적인 문제가 아니다. 도시의 병폐는 사람들이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장소, 성인들이 정말로 사회적인 실존에 계속 참여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인간적인 문제이다. 181

 

순수를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율적인 사람들과 달리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다른 이들 돌볼 힘이 없다. 이 사람들은 특히 긴장된 순간에는 자기 행동의 결과에 무관심하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다른 이들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할 자원은 거의 없이, 일관된 상징들을 매개로 해서 현재 상태를 일반화된 추상적인 삶의 상태로 변형하려는 강렬한 힘만 존재한다. 성인의 돌봄은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좀 더 책임성이 있다. 세부 사항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개인은 미지의 사회적 경험에 이끌이면서 여기서 종종 끔직하게 고통스러운 발견을 하기 때문이다. 185 

 

 지난 20년의 풍요로운 사회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공동체 개념이 실은 사람들이 서로로부터 숨기 위한 한 방편이며, 이런 숨기의 결과물이 노예상태와 무관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동체의 유대 대신 이제 다른 성인 사회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186 

 

 이런 사회가 조밀한 도시의 다양한 혼란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고 믿는다. 성인의 삶은 복잡한 환경에서만, 사람들의 삶에서 가능한 온갖 복잡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사람들의 모든 윤리적인 본성은 불안정하고 허약하며 무질서한 사건들에 연류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불안정한 사회만이 그 사회에 고유한 풍부함을 가지고 청소년기를 넘어 성장하기 위한 매개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혼란스러운 도시 생활만이 청소년기의 노예 상태에 도전하고, 그 결과로 지금은 소수만이 누리는 성장의 기회를 많은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다는 점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187

 

 

볕뉘.

 

1. 피곤이 손쉽게 와 이른 잠을 청하다가 학번을 묻는 전화에 일어나 쌓인 시집 한권을 집어든다. 히스테리아였다.  위의 책 가운데 히스테리, 정신질환 등 개인의 심리학, 병리학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나에 갇힌 어른들. 마흔이 넘어도 보수인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이 사회. 어른이 아니라 어른이들만 버글거리는 사회.  사회의 병리학을 다뤄야 한다고 말이다.  새벽까지 갈 것 같아 피곤을 경계삼아 절반을 보다 그쳤다.  가을은 살랑거린다. 이불 반틈이 부족하다.

 

2. 사회적인 유년기, 사회의 유아기란 말이 겹친다. 이반 일리히는 역사라는 것은 단계를 밟는 것이 아니라 불쑥 단속적이기는 하지만 이전의 역사에 접목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이념도 이론도 부질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경도된 반세기 이상의 경험을 유산처럼 안고 있다.  이론도 나만을 과잉화하여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가 한다. 저자가 순수한 정체성을 이야기하면서 청소년이 자신의 맥락을 만들어가며 지탱하는 모습이 어쩌면 그간 과정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3. 저자의 말처럼 파노라마를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 청소년기의 힘이라면 파노라마와 현실의 사건과 분리하는 것이 성인기의 힘이라고 한다. 순수와 환원으로 경도된 이론과 이념은 유아적이거나 어린 혁명가와 같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세상의 허망함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 깨달음의 과정이 없는 이상, 자책과 죄스러움을 평생에 안고가는지도 모르겠다. 이론이나 이념도 제것이 최고라는 유아기에서 벗어나서, 현실과 부딪치며 생기는 상처와 잔유물들을 다시 거름삼아 사상의 씨앗이 생기거나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국면까지 바랄 수 없더라도, 무엇인가 선악의 이분법으로 사고하고 움직이고 더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자각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싶다.

 

4. 멋진 실패와 포기, 자중심성에 대한 대오가 있었을 때 곁의 너가 보인다.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와너가 기대고 궁금해도 아주 조금밖에...더 나빠질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때만이라야 아마 더 나빠지지 않는 지지대라도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읽기 몇 장이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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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꿈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가 중요하게 느껴져야 한다.

 

현대 공동체 생활에서 손꼽히는 기묘한 특징은 풍요의 문제가 혁명의 구분선을 가로지른다는 점이다....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공동체 생활로 무엇을 할까? 혁명으로 부는 재분배되었지만,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혁명의 결과물인 풍요를 삶에 어떻게 도입할지, 이제 먹을거리가 충분해 싸울 필요가 없어졌을 때 사람들은 무엇에 전념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17

 

혁명의 길이 사회에서 폭군을 제거하는 것을 넘어서는 정서적인 경험이어야 한다고 프란츠 파농이나 마르쿠제 같은 사람은 믿는다. 이 길은 지배권력이 없는 상태, 즉 아나키와 일정한 삶의 무질서를 받아들이도록 사람을 길들이는 교육이어야 한다. 사회가 감당할 무질서의 양을 바꾸지 않은 채 사회 지도자만 바꾼다면 완전한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도 1844년 수고에서 경제적 풍요 자체 때문에 질서에 대한 사회의 구조적 요구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18 

 

파농은 도시가 관료제와 익명성으로 인간의 감정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고 믿은 것처럼 조밀한 장소에서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서 당황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안전하고 틀에 박힌 삶만을 찾는다. 사람들은 결국 개인적으로 안전한 범위 안으로 쪼그라들어 혁명가로 성장하지 못한다. 19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조밀한 도시 정주지에서 함께 살아갈 때 나타나는 사회적인 다양성에 재갈을 물려야 하는 것이다. 틀에 박힌 생활을 피하려는 요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사회적인 경계를 폐소공포증으로써 충족할 수 있다. 20

 

풍요의 공동체는 인간에게 자유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폭정의 새로운 가능성도 열어준다. 결핍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공동체 생활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어두운 욕망, 즉 사람들이 사회관계에서 받아들이는 안전하고 확실한 노예 상태에 대한 욕망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스스로 인정하기를 혐오하는 이런 종류의 감정을 조사해야만 자유에 대한 욕망의 특징과 풍요로운 현대라는 조건 아래서 자유를 달성하는 수단을 제대로 밝힐 수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청소년기에 일련의 힘과 욕망이 형성되어 자발적인 노예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현존하는 도시 공동체의 조직은 사람들에게 청소년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노예가 되도록 부추긴다는 것, 무질서와 고통스러운 어긋남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유의 본질로 삼는 성인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 틀을 깨뜨리는 게 가능하다는 것, 청소년기에서 이와 같이 새롭고 충분히 가능한 성인기로 옮겨가는 이행은 조밀하고 통제 불가능한 인간 정주지, 즉 도시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경험의 구조에 좌우된다는 것 등이다. 21

 

..도시라는 정글, 도시의 광막함과 고독에 긍정적인 인간적인 가치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22


순수한 정체성


첫발을 내딛는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스스로를 작은 신으로 여기는 한편 재판관처럼 환자를 판결하고 환자를 약간 경멸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전능욕망"이라고 지칭한 이런 태도는 환자들이 가진 문제에 연루됨으로써 자신이 상처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때문에 생긴다고 결론지었다. 환자의 문제에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깊숙이 연루되면 자신들의 자기 인식이 약해질까봐 염려한다는 것이다. 31-32

 

젊은 의사들의 경우, 엄격한 자아상을 통한 이런 혼동에 대한 방어가 환자들의 거대한 고통에 휩쓸리는 사태를 막아준다. 이 고통이라는 병은 환자가 그것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혁명가와 의사 모두 어려운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압도당할 수 있다는 위협에 대비해 미리 자아상을 고정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사회 상황에 따라 움직이기 쉬운 열린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고정된 사물이 되는 것이다 33

 

청소년 후반기에 일어나는 정체성의 위기는 개인의 자아상과 그 자아 바깥에 있는 삶에 대한 상 사이의 관계를 평가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정체성의 위기는 단순히 '나의 성격이 어떤지'를 말하는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위기는 자라나는 인간이 처음으로 자아상과 자아 바깥의 세계상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의 규칙이나 양상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의식적인 시도이다. 46

 

자기순수화의 동력으로부터 압도적이면서도 본질적으로 편안한 죄의식이 나올 수 있다. 이 죄의식은 세계의 구체성을 다루는 인간의 능력을 파괴한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이 행동한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과 문제에 직면해서도 수동적인 태도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병적인 상태다. 이 사람은 어떤 해악을 유발하든 편안하게 용인할 수 있다. 스스로를 끔찍한 죄인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54


순수한 공동체라는 신화


특정한 종교운동과 나중에 일어난 경제 운동이 유사한 이유야말로 베버가 찾고자 한 것이었다. 두 운동 모두 불안을 바탕으로 세워졌고, 둘 다 부덕한 행동에 대한 자기부정과 공동체의 억압으로 이어졌다. 베버가 추구한 방향은 매우 분명했다. 그는 종교를 내팽개친 시대에 어떻게 해서 순수한 자아를 향한 어떤 충동이 하나의 사회적 가치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61

 

공동체의 감정은 형제애이며, 여기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물질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인정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수반된다. 공동체의 유대는 공동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 즉 '우리'와 '우리가 누구인가'를 인정하는 데 따르는 기쁨이다. 63

 

청교도 공동체 생활이나 분투하는 기업가들의 공동체 생활에서는 갈등을 배제하지 않았다. 사실 고결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종 갈등을 부추기기도 했다.뉴욕 주 북부의 작은 마을이나 '해로운' 흑인 가족을 배제한 교외는 갈등을 두려워했다....공동체 유대의 신화는 의지를 드러낸 행동을 통해, 어떤 경우에는 거짓말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겁쟁이가 되어 서로로부터 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68

 

일관된 공동체 이미지를 순수화하면 사람들의 '다름'에 대한 사랑보다는 두려움이 승리를 거둔다. 이런 두려움이 경험의 위조를 낳는다. 비슷해지려는 욕망을 표현하는 '우리'라는 감정은 사람들이 서로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대신 서로에 관해 모든 걸 안다고 상상하며, 사람들의 지식은 그들이 어떻게 서로 똑같아져야 하는지에 관한 환상이 된다. 72

 

이렇게 해서 현실에서 전혀 다른 것 같은 외부인을 공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라는 감정이 자라날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서로가 거의 공유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이없다. 가짜 공동체 의식이다. 73

 

공동체 유대를 통한 존엄이라는 신화는 세가지 뚜렷한 사회적인 결과를 낳는다. 첫째, 공동체 생황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 줄어든다. 두번째 결과는 일탈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이 그것이다. 공통적인 정체성의 표현과 일탈에 대한 억압은 둘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측면이다. 세번째 결과는 욕망과 폭력과의 관계에 존재한다...그들 자신의 삶에서 무질서를 조금도 용인하지 않고 또한 무질서를 경험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차단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긴장이 분출하는 상황이 되면 공격과 폭력적인 힘, 보복 등의 최종적인 방법이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데에도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76-79

 

풍요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향한 욕망을 형성하는 데서 더 미묘하고 어쩌면 더 위험한 역할을 한다. 가난한 공동체에서나 결핍의 시기에는 개인과 가족 사이의 공유가 생존에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이런 공유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야말로 풍요의 증거이다...공유하는 게 훨씬 적어야 하는 경우 각 개인이 서로의 성격을 평가하기 위해 의존할 수 있는 경험의 축적이 한결 적어진다. 공동체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와의 관계에서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자신들이 동일한가를 상상하려는 성향이 훨씬 강하다. 83

 

 다시말해, 풍요는 공동체 접촉에서 고립을 만들어내는 힘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인 관계성을 서로에 대한 필요보다 유사성이라는 측면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이러한 것들이 공동체 유대라는 신화의 특징들이다. 84


도시는 어떻게 신화를 되살리는가


가족 구조와 도시 발전, 새로운 풍요의 조건 등이 한 흐름으로 합류하는 지점을 보면서, 이전엔 사람들이 도시라는 넓은 무대에서 추구하던 사회적 기능과 접촉을 지난 수십 년 사이에 가족이 전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정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던 사회적인 '공간들'이 가족에게 전유되면서 도시 지역에 남은 사람들의 공동체 관계와 가족 자체에 왜곡을 부추겼다. 이런 왜곡은 복잡성과 무질서가 야기할 수 있는 유대와 경험의 두려움을 추구한다. 89. 사람들이 도시에서 상상하는 가족과 가족형 관계가 중요해짐에 따라 청소년기의 순수화 양상이 공동체와 가족 구성원들 개인적인 삶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89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의 사회적 관계 속에 먹고 살기 위해 자기 삶에서 "접촉점의 다양성"을 만들어야 했다. 그들이 속한 제도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정치적인 '호의'나 커피숍과 술집이라는 안전판, 유대교 회당과 교회의 가르침 등의 지원에 계속 의존했다. 93

 

작은 마을 생활의 두드러진 특징은 마을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구성원이 마을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을 문화는 널리 퍼져 있었다. 분리되거나 고립된 사회 영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 분업과 지위 구분은 존재했지만, 모든 사람이 분리된 활동의 성격이 있었다. 94

 

개인들은 일상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사회영역에 침투할 자격과 필요가 있었다. 이 영역들이 조화롭게 조직되지 않고 심지어 적대적인 관계일지라도 말이다...도시에서 사라진 것은 바로 이런 접촉점의 다양성이다. 그 대신에 더욱 일관된 형태의 사회 활동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95

 

순수한 도시를 계획하기


현대의 비평가들은 분업이 적었던 산업화 이전의 목가적인 질서로 회귀하자는 꿈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다. 기술적인 문제와 경직성에 대한 해답으로 도시생활의 의도적인 단순성을 주장하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았다. 마치 사람들이 자신의 창조 능력을 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루이스 멈퍼드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이기 위해 도구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129

 

전체가 효율을 극대화하게끔 기능하는 것이 부품들의 수명을 위해 최선의 방법이란 사실은 기계 설계에는 타당하지만, 어떻게 인간사에서도 이런 원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사람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서로를 상대하는 가장 편한 방법에서 벗어나도록 장려해야 한다. 전에 존재한 것과는 다른 양상과 방향의 관계를 만들도록 장려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 현상을 보면, 인간은 이런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 139

 

인문학자들은 종종 정복할 수 없는 기술적인 힘들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앞에서 절망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성장하는 것들이 대개 그렇듯 기술의 양상은 자신의 성장과 관련이 있는 힘들에 대해서만 통제권을 가진다. 기계 기술은 도시의 사회 구조와 직접 관련된 사회적인 힘들에 의해 성장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성장한 기술을 도시에 다시 적용하면 기술적인 상징은 실용적이지 않고 효과가 없다. 145

 

도시계획 공동체는 조화와 예정된 질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미래를 기획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사회 생활을 구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성숙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147

 

볕뉘. 다시 읽다.  4장까지 저자의 목차에 따라 옮긴다. 나머지 책날개는 조금 미루다가 이어 달려고 한다.   이 책 속에 소개된 앙드레 말로 책을 읽고 난 뒤다.  68 혁명의 시대적 맥락에 이어 개인사에 말끔하지 않았던 부분을 반추하면서 쓴 것이다. 왜 뜻대로 되지 않는가? 그 이유에 대해 되물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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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8세에 보수적인 청년은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마흔에도 보수적인 사람은 변명에 여지가 없다.(2)
    from 木筆 2014-09-05 13:11 
    풍요를 적절하게 활용하려면, 사람이 성숙함에 따라 통제된 순수한 경험에 대한 욕망이 약해질 수 있는 사회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폐단의 기원은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성장하는 동안 청소년기의 문제들에 묶이거나 사로잡힌 데서 비롯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참는 법을 배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인 성인기의 조건은 이미 분명한지도 모른다. 순수한 정체성을 넘어서 성장하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1. 독서 모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발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발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텍스트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다른 것들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 공유한 고민이나 씨드, 씨앗을 어떻게 건사할 것인가? 책을 읽고 나누는 전후의 과정을 통해 좀더 '모임의 양'뿐만이 아니라 '모임의 질'을 높이는 방법은 없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나누는 토론회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할 수 있을까? 해야만 하지 않는가? 초빙강연을 통해 얻고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느낌까지 바래는 것은 아닌가? 그저 소비되는 것은 아닌가?  좀더 색다른 계기나 열정을 줄 수 없었는가? 여운들을 살피지 않아 공부의 때를 놓친 이들은 없는가? 강독을 하고 낭독을 하고, 분담을 하는 과정에서 준비과정이 미흡한 것은 아닐까? 분량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학생들도 아닌데 텍스트나 줄거리에 접근하는 방법이나 저자를 집중탐구하는 방법이 천편일률이지는 않은가? 


2. 독서 모임 진행사항을 사무적으로 기계적으로 녹취하고 회의같은 분위기로 남기는 것이 합당한가? 질문을 남길 수는 없을까? 몇가지 경로와 사유, 토론을 통해 남겨보는 질문? 질문들이 저자에게 피드백이 될 수 있다면? 강도높은 고민이나 격정, 의식전환에 밑거름이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면 그것을 남기고 보듬을 수 있는 틀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3. 독특한 학습습관이나 테마에 따른 색다른 접근법, 대상에 따라 좀더 색다른 과정을 발견하는 맛을 보는 것이 어떤가?


4. 윤*샘 텍스트 논문 두가지로 강독모임을 갖은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돌아간 뒤에 텍스트에 대한 여운이 남는 모임이었다. 키워드와 생각의 맥락이 여러차례 반복되어 논의되기에 강독모임 자체로 복습이 많이 되는 체험이었다.  뒤풀이 겸 얘기를 나누다가 독자마다 읽는 패턴이 다르지만 저자, 비평가, 연구자, 번역자가 되어 여러 시선으로 다시 살피는 것을 직접 체험한 셈이다. 아니면 저자의 책을 여러권을 반복해서 읽고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인으로서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갖고, 그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한다는 점이다. 텍스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좀더 출렁거리는 읽기를 통해 그 파장이 번져나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5. 모임과 모임사이 겹침이 없다. 한 모임이 관성을 갖게 되면서 오는 정체감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도 문제로 삼을 수 있겠다. 

 

 

볕뉘.

 

1. 독서모임은 물론 사교의 속성을 갖는다. 친교만큼 좋은 것도 없으리라.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도 한달이나 한주가 기다려지고 설레인다.  지난 모임 뒤 한**샘이 이야기를 건넨다. 공감하고 미리 나눠주는 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는 터라 반가웠다. 토론회를 만들고 나눠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 요지다.  성인 대상은 쉽지만 않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진도만을 고려하고 고집할 수도 있다. 모임 역시 여건이 되지 않아 오래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텍스트나 책을 미쳐 살피지 않아 핵심이 아니라 변죽이 논의되기도 쉽상이다. 분야별로 책읽는 방법도 기술도 바꿔야 한다는 팁과 책을 최근에서야 접한다. 잔기술이나 과정과 방법에 대한 논의도 활발했으면 한다.

 

2. 일일 회계 결산처럼 게정과목에 따라 넣고 다른 사람, 모임, 조직과 거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지만  친구의 동의를 더 곰삭여서 올 가을이 가기 전 토론회를 한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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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강과 노랑 

 


그의 작품에는 빨강과 노랑, 연붉음과 연노랑의 선명하게 때론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있다. 가족사진에서 처럼 선명하기도 하지만 그를 둘러싼 특유의 애절함과 강렬함이 배여있다. 홍군과 인민복이기도 하며 칼과 손에 남겨진 노랑은 단절과 명상이기도 하다. 붉은 아기의 탯줄에 이어져 있는 책과 화면과 천안문, 그리고 윗편 희미하게 박혀있는 악보의 숫자는 또 다른 이명으로 들리게도 하는 것 같다.  회한과 기억, 망각을 번갈아 표현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비치는 것 같다.

 

 

 

2. 책과  전등  그리고 전통

 

 

 


처음 소비에트 교과서와 같은 판본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졸업시험도 통과하지 못해 그림을 캔버스에도 그릴 수 없어 종이에 그렸다고 한다. 전시회 출품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두점 가운데 작은 작품만 출품하라고 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표현기법이 맞는 전시회를 찾아가거나 별도의 전시회를 마음이 맞는 친구와 기획했는데 이런 교류로 다른 기법이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한 전시회에서는 행위예술이나 파괴를 모방한 전시가 있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6.4 전시관 총기사건이후로 과연 그것이 작품일까라는 고민을 했다고 하며, 작품성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술사에 대한 공부는 대부분 책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한 계기로 과연 중국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되물음으로 빨강과 노랑의 색조만 남겨두고 일년동안 아무런 작품 활동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계기가 되어 독일, 유럽의 여러 미술사조를 경험할 수 있었다하며 독일에서 장예모 감독의 영화를 보다 도저히 그것을 보고 독일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한다. 중국의 상업적인 것만 골라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닌가하고 중국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재삼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3. 표현과 기법


혁명적? 리얼리즘과 같이 판에 박힌 미술수업은 아무것도 자신에게 가르쳐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멀뚱멀뚱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모습, 그리고 유럽의 표현주의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밀레, 고흐, 달리, 피카소, 마그리트를 배우면서 습작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그룹을 남서부 예술이라 칭하는데 북부예술을 접하면서 많이 익히고, 독일 등의 경험을 통해 그동안 책으로 공부해두었던 예술사조에 대해 특별하게 배웠다고 한다.

 

 

 

 

 

 

2007년 서울 가을 그는 41년전 마오저뚱의 사상집을 곁에 두고 읽고 있다.  "바른 사랑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걸까? 아니다. 그럼 개인의 머릿속에서 가지고 있는 것? 아니다. 바른 사상이란, 사회 실천에서 오는 것이다. 사회에서 생산투쟁, 계급투쟁, 그리고 과학실험 이렇게 세 가지를 실천함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란, 그 사람의 사상으로 결정지어진다."를 되새기고 있다.

 

 

"우리의 도시는 더욱 화려해진다. 우리의 밤은 더욱 밝아진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은 더욱 단순해진다. 우리의 사고는 더욱 즉각적이 된다. 우리의 감정은 훨씬 복잡해진다. 우리의 의사소통은 더욱 획일화된다. 우리의 기술은 더욱 명료해진다. 우리의 상상은 더욱 합리적이 된다. 우리의 소망은 더욱 통합적이 된다. 우리의 지식은 더욱 우스꽝스러워 진다. 우리의 고통은 더욱 개인적이 된다. 우리의 기억은 더욱 짧아진다. 우리의 과거는 더욱 멀어진다. 우리의 얼굴은 더욱 젊어진다. 우리의 음악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우리의 감각은 더욱 심각해진다. 우리의 영화는 더욱 발전한다. 우리의 옷은 더욱 낡아진다. 우리의 작업실은 더욱 커진다. 우리의 전시는 더욱 빈번해진다. 우리의 저녁모임은 더욱 화려해진다. 우리는 더욱 모이기 어려워진다. 우리의 생각은 더욱 피상적이게 된다. 우리의 대화는 더욱 느긋해진다. 우리는 더욱 쉽게 운다. 우리의 잊고자 하는 욕구는 더욱 강렬해진다. 우리의 친분은 더욱 단순해진다. 우리의 가슴은 더욱 차가워진다. 우리의 의지는 더욱 확고해진다. 우리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우리의 판단은 더욱 모호해진다."

 

그림의 이력(콕)▼

 

 

 

 

 

 

 

 

 

 

 

 

 

 

펼친 부분 접기 ▲

 

 

볕뉘. 

 

1. 일짬 잠깐 들러본다는 것이 사뭇 긴장하게 한다. 빨강과 노랑 그리고 그 흔적이 무엇일까? 돌아서 나오는 길 몇부의 복사본을 손에 쥔다. 출입구 위편에 장샤오강의 인터뷰가 끌려본다. 이력과 추구하는 것과 삶의 질곡이 읽힌다. 백년의 급진 원텐진의 논문이 겹친다. 자신의 대지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자각이 겹친다. 대지에 뿌리내리는 것은 고사하고 썪지 않는 거름을 퍼다가 나르는 것이 지금-여기의 현실은 아닐까 싶은 느낌이 스민다. 반시간의 공유에 들떠있고, 어쩌면 충격이 내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당분간은 ... ..

 

2. 싸가지 진보로 지식인?들이 시끄럽다.  그런데 의심스럽다. 완독을 해보기나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물어뜯고 컹컹거리는 것이 분간이 가지 않는다.  지식인은 에티켓은 없는가? 뜬다 싶으면 취할 것을 가려내고 짚을 것은 짚지 않고  씹는 만큼 나의 이름도 영양가도 높아질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가? 만약 그렇다면 심각한 습속이 아닐 수 없다.  뭐가 어떻다고 하면 다들 몰려들어 썩은 살점하나씩 물고 거봐 그랬잖아를 외친다.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비판정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비난습속이 무섭다.  한점 틀린 점이 없는 신의 경지에 오른 지식인들의 문화적 굴레가 안타깝다.  아무도 진지하게 자신과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다른 지식인의 생각과 고민을 접목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한번이 아니라 질리도록 반복되는 퇴행이다 싶다.  잘못본 것이길 바란다. 지식인들이 너무나 확신에 가득차 있다. 자신의 오류를 돌보지 않는다.  이런 지식인의 문화에서는 아마 큰 인물이 나올 수 없는 듯싶다. 아마 죽은 뒤에나 알아주면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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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이른 아침 기운이 좋아 마실을 나선다. 먹구름이 가리긴 하지만 나팔꽃으로 지천인 강변이 조금 다른 맛이다.  나팔꽃밭을 담으려 하지만 느낌이 올라오지 않는다. 햇살도 가을내음도 맡으면서 기운차려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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