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하는 것들, 해야만하는 것들, 일들 사이에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일부스러기도 일들 사이 부딪치면서 생기기도 하고, 일의 기세에 눌려 숨으려하는 것들도 있을테고, 해야할 것들에 눌려 식은 땀 흘리는 감정도 있을테고,  혼자가 아니라 같이 템포도 패턴도 맞추지 못해 서걱거리는 것도 있을테고, 일의 성취감에 뿌듯함도 어깨를 들썩이기도 할 것이고...잘한 것 빼고, 잘한 것 나누고...행간과 사이 사이, 소소하거나 미쳐 눈치채지 못한 것들, 보지 못했던 것들, 아마 일의 즙같은 것들, 사이사이 생기는 화나 울화, 미쳐 따라가지 못하는 마음들, 조바심, 안타까움들, 이런 것들을 묶어 감성이나 감정이라고 하자. 일의 그림자나 하고싶은 것들의 여운들이라고 하자.

 

그리고 시간의 그릇에, 시간의 용기에 총량과 느낌이 일정하다고 하면 그 느낌의 성질이나 느낌의 정서를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크나큰 아둔함은 아닐까. 그 화가 거꾸로 일을 불사르려하거나 하고싶은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거나....일과 해야할 것, 하고싶은 것 하고마는 것의 용기의 팔할은 이렇게 쓸데없거나 쓸모없거나 한 것은 아닐까. 일을 잘하는 능력 하고싶은 것을 잘 해내는 것의 하나는 그림자들을 잘 모아 잘 쓰고, 잘 풀고 잘 다루는 것에 있지는 않을까... ...

 

덧붙여 보는 마음들! (콕)

 

어젠 보름달은 아니지만 노아란 은행단풍처럼 얇고 은은하다. 언제부터인가 꿈을 기억해내고 기록하고 미처 다다르지 못한 느낌들을 살피고 있다. 사람들은 지식과 지혜를 얻고 넓히는 만큼 잔학무도함, 잔인함, 악날함, 공포심들을 같은 높이와 넓이로 키워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불쑥 불쑥 비집고 나오는 꿈들은 무엇일까, 감정의 켜, 발산을 하지 못한 응어리들, 말로 표현되지 못한 형상들... 일정시간의 용기에 들어있는 앎과함, 그리고 담겨져 있는 감정들. 그 감정들은 발산이나 앎과 함과 잘 어울려지고 풀어졌는가 궁금해졌다.

 

하루에도 몇번씩 꿈꾸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불쑥불쑥 생기고 욕망하는 감정들은 발산되거나 발랄하게 소화되는 것일까? 음악도 체육도 미술도 없는 앎밖에 없는 그들이 꾸는 꿈은 무엇일까? 그렇게 쌓인 감성과 감정의 켜들은 얼마나 몸을 비틀고 있을까? 일터에 회의만 있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닌듯 폐기처분되는 일상에 얼마나 신음할까? 변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살거나 풀 수 없는 몸틀, 일틀의 왜곡은 어찌하여야 되는 것일까?

 

모임은 하고싶은 것만, 해야되는 일만 챙긴다. 아무도 감성과 감정의 결을 살피지 않는다. 불쑥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그만두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감정과 감성을 소화해내는 틀이나 방식도 없어 헤매고 치이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것은 아닐까? 지식과 지혜는 파괴 본능과 일소해버리는 함으로 구태를 반복해왔다고 한다. 배회하는 감성과 감정이 궁금해진다.

 

되는 곳과 되지 않는 곳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바람은 나는걸까? 하게하는 것일까? 풀게하는 것일까? 그런면에서 보면 농사를 짓고 축제를 하고, 디오니소스 찬가를 부르는 것은 정말 사려깊고 현명함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야할 일에만 목매여서 고삐를 틀어쥘 감정과 감성에 맥없이 끌려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시간의 총량, 몸이란 용기의 총량에서 감성이나 감정의 온도를 잴 수 있을까? 모임이란 용기에 온도계를 넣어볼 수는 없는 것일까? 관심은 있는 것일까? 감정이 어깨걸고 뿔이 나서 황량한 겨울바람처럼 씽씽 나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꿀 수 있는 꿈이 궁금하다. 꾸어지는 꿈이 궁금하다. 나누는 일상이 달라질 틈은 없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성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고 착각하면서 시간에 누적되는 감정들을 다루는데 어색해하거나 곤란해하거나 그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다루려고 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가끔은 눌린 감정들의 이빨에 물려 서로 꼼짝달싹 못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은 절름발이 이성만 써서 절뚝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오버겠지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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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한국의 위로부터의 근대화 전략은 경제성장 최우선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다. 이로 인해 국가는 자원을 개인의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경제개발에 투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개인 보호 의무를 가족에게 떠넘겨왔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생존을 위해 가족을 중심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장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즉 한국의 가족은 사회복지 기능 대부분을 떠안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족주의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면서 가족 내에서 전통적인 가치가 선별적으로 재구조화되었다.  320


서구에서는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어왔던 가족이 한국에서는 국가 존립과 국가 기능의 최소 단위로서 작동되면서 준공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는 유교적 국가와 가족의 관계가 근대적 상황에서 재구조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은 전통과 근대의 분리와 중첩 상황을 보여주는 전형 중의 하나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혈연,지연,학연은 말할 것도 없고 재벌 등의 사기업과 종교단체까지 사회 전반적으로 자식 대물림과 배타적, 폐쇄적 공동체 및 공동체주의 등이 지속되고 있는 근저에도 한국 근대의 가족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 근현대의 가족이 사회철학의 대상으로 중요하게 분석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이처럼 한국의 가족이 한국 근현대의 변화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320


대부분 서구철학과 전통철학이 가족을 철학함의 핵심문제로 다뤘지만, 근대 이후 서구 철학 수용사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질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가족이 왜 철학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철학적 중심 의제로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근대 이후 철학 전문가들은 현실에 기반을 둔 철학적 사유를 확장하는 걸 대신해서, 서구 철학 이론을 그들의 사유와 기호에 의거해서 소개하고 해석하는 데 집중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특정 서구 이론에서 제기된 가족 관련 이론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간간이 있었지만,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적 논의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생소한 영역이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개인, 사회, 국가, 시민 등 한국 근현대에 진행되어온 사회적인 문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도 사정은 유사하다.  322


첫째, 한국 근대 가족에 대한 논의를 위해 '복합 성찰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한국 근대의 가족은 서구 가족의 역사에서처럼 전통 가족에서 근대, 현대 가족으로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한국 근대의 가족에서는 압축적 근대화,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전통과 근대 그리고 현대적 요소들의 중층적 현존과 이들의 상호 영향 주고받기를 통한 변용과 중첩화, 그리고 이로 인한 다양하고 이질적인 가족 형태의 혼성화'라는 특유의 복합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323


산업화사회, 지식정보사회로의 사회의 역동적 변화에 적응해온 한국의 근대 가족이 농촌형 직계가족 유형이나 농촌형 핵가족 유형에서 도시형 핵가족 유형이나 일인가족 유형으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가치관을 역동성에 맞추어 변화시킴으로써 특정한 가치관을 절대화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대화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25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주도권을 넘기고 받는 데 익숙해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편차 큰 가치관의 변동이 현실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사회 자체가 역동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한국 사회는 이처럼 빠른 변화와 역동성으로 인해 각 세대의 가치관도 사회의 역동적 변화와 함께 변화함으로써 각 세대 혹은 가족 구성원이 특정 가치관을 상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적 헤게모니의 변화에 대해서도 하나의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한 사회적 헤게모니와 주도적 가치들을 성찰적으로 상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325


둘째, 서구 사회철학 이론에서 사용되고 있는 자유주의/공동체주의, 사적 영역/공적 영역 등의 양자택일적 이분법을, 한국 근대 가족의 복합적 구조를 고려해, 최소한 오분법으로 세분화할 것을 제안한다. 326


근대화, 산업화 이후에도 국가가 복지를 가족에게 전가함으로써 가족은 삶을 위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왔는데, 가족 구성원 사이의 희생과 헌신, 사랑과 친밀성은 강화된 반면, 가족 이외의 타인과 타 가족에 대한 고려나 배려는 찾아볼 수 없는 반사회적 가족이 양산되었다. 1990년대 이후 국가가 사회복지 투자를 하고 가족 구성원에 대해 최소한의 사회보장을 함으로써 공과 사 개념이 변화하면서 개인과 가족공동체 그리고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327


해결책은 가족주의가 지니고 있는 긍정성을 시대에 맞게 재구조화하고 부정성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동체의 문제에 국한해서 보자면 한국 가족의 문제는 강한 폐쇄적, 위계적 가족공동체를 개방적, 수평적인 민주적 공동체로 변경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자기 가족만의 폐쇄적 사랑과 친밀성을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랑과 친밀성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328


한국 가족을 분석할 경우,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는 1) 자유주의, 2)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 3)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4)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5) 공동체주의로 세분하고 그 분석의 중심축을 1)과 5)로 보지 않고, 이를 대신해서 2)와 3) 그리고 4)로 두는 시각의 전환을 제안한다. 한국 가족에서는 1)과 5)는 이념형인데, 현실에서 작동되고 있지 않는 1)은 이론적으로 유입된 서구적인 이념이었으며 5)는 근대 이전에 작동되었던 전통적인 유교 가족주의 이념과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된 폐쇄적 가족주의의 특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329


1) 개인, 2) 개인 중심 공동체, 3) 개인과 공동체, 4) 공동체 중심 개인, 5) 공동체/ 1) 사적영역, 2) 사적 영역 위주에 공적 영역이 혼합된 영역, 3)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4) 공적 영역 위주에 사적 여역이 혼합된 영역, 5) 공적 영역  330


셋째, 한국 근대 가족에 대한 철학적 제안은 세계적으로도 타당한 하나의 모델로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근대의 산물이기도 한 한국 근대 가족이 지니고 있는 특징들을 세계사적으로 주변부의 특수한 사례로서 평가절하할 필요가 없다. ...서구 근대는 한국 근대에 비해 훨씬 단선적이거나 복잡성이 덜한 상태로 전개되어 왔으며, 이에 따라 이론적 맥락도 훨씬 더 단순 논리적 양자택일의 방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전통적으로 존재해온 체계 및 가치와 자의적으로 단절하고 서구 근대성을 근대화를 위한 전략으로 선택, 수용해왔던 한국의 혹은 더 넓혀서 비서구의 근대화의 길은 그만큼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331


한국의 근대적 유산들에 대한 분석과 성찰에 의거한 해석은, 서구적 맥락에서 유래하는 현실에 대한 이론 해석 작업과는 변별력이 있는, 또 다른 현실과 이론의 어울림이나 결합 형태를 보여주고 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이 축적될 때, 그리고 새로운 결합 체계가 완전한 형태로 그 이론적 모습을 갖출 때 우리는 서구 이론에 대한 적확한 자리매김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332


철학이 현실과 사유 주체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소산이라면, 사회철학은 사회 현실과 그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자와의 부단한 대화의 소산일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근대 내내 이러한 상식적인 철학함에 너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너무도 오랫동안 오직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라는 구도 속에 전문 용어들을 해석해왔기에, 철학에 고유한 영역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온 것이다. 특히 대학의 강단 철학에서의 가르침과 사유 방식은 현실과 연동된 문제 중심의 철학함을 너무나 도외시 해온 결과 철학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시민의 삶과 유리된 채 오로지 죽은 철학자들의 텍스트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 ....한국의 근대 이래 지속되어온 이 구도가 지속된다면, 우리 앞 세대와 우리 세대가 겪어야만 했던 정신적 망명객 생활이, 학문적 종속성과 악순환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33 사회 현실 분석을 위해 우수한 트레이너를 만나 열심히 사사받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그러나 청춘을 트레이닝 기간에 다 고갈시켜버리면 그저 자기가 배운 것을 무기 삼아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트레이너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가족의 역사적 진행이나 근대화 과정에 대해서는 서구보다는 오히려 한중일 3국의 경험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 유사성과 차이성을 더 실체적으로 보여준다. 336 한국의 가족주의가 갖는 폐쇄성과 이기주의는 3국 비교에서도 가장 높게 나타난다....한국의 가족주의가 가족 이기주의를 벗어나지못해 이것이 타인과 다른 가족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시로 이어지는 반사회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는 점도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근대화 시기의 폐쇄적, 이기적 가족주의의 강화와 가족에 대한 배려, 헌신, 친밀성, 이타적 사랑 등의 동시 강화가 한국 가족의 양면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양면적인 가족주의의 가치가 아직도 한국 가족 내에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337


넷째, 서구의 개인주의에 내포된 자기중심성이 지닌 난점을 지적하고 실체적 규범만을 옹호하는 실체적 공동체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서 철학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논점으로서 이상적인 의사소통 공동체 이론을 한국 가족 분석에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한국 가족의 미래상을 구상하기 위해 서구적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상호 보완적 구조화를 제안한다. 338


국가는 개인과 가족을 더 이상 방기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개인이 최소한 국가으 시민으로서 살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강화해야 하며 가족을 근간으로서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개인과 가족이 바로서지 않는 국가는 더 이상 긍정적인 미래상을 만들어가지 못할 것이기때문에 그렇다. 339


폐쇄적인 가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체적 공동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이상적인 형태의 공동체를 성찰적으로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체적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 가족과 근대적 개인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개인주의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전망이 없어 보인다. 그것은 한국 근대 가족이 내포하고 있는 복합적 사태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폄으로는 근대 내내 발달하지 못했던 개인과 개인주의를 일정 부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반명에 근대 가족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가족 구성원 간의 헌신과 배려, 사랑과 친밀성 등의 공동체적 덕목들을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으로 해체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이것 또한 근대 가족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340-341


다섯째, 지식 기반 사회와 지구화의 확장이라는 달라진 사회 환경 속에서 변화하고 있는 인간관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42

 

 

한국인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보인다....한국의 문화는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46


현세구복적이란 현세만을 유일한 세계로 인정한다는 것과 현세에서 초월이 아닌 세속적 복을 염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현세구복적이란 말을 내세도 인정하는 것으로 보아, 현세에서는 복을 내세에서는 영생을 염원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한국에서의 함의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럼 지금 이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는 믿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죽은 후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 다시 말해서 내세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고는 한국인에게는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현세가 내세를 위한 준비단계라든가 내세가 참된 세계이고 이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  49-50


신약은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부활, 즉 내세는 없다. 죽어서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유대교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도 유대교에서는 선지자 중의 한명일 뿐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믿으면서도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독특한 믿음체계를 갖고 있기에 확고한 믿음 속에서 현실세계를 꿈꾸며, 그들의 눈부신 성공과 생존력은 이런 믿음체계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내세를 신봉하는 인도의 경우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50


주자는 "제사의 이치는 역시 자손의 정성이 있으면 조상의 신이 있고(이르고), 정성이 없으면 신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귀신의 이치는 바로 이 마음의 이치이다"(어류)라고 말하고 있다. 55


불교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깨달음에 의해 윤회의 사슬을 끊어야만 한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은 자인 불타는 생애를 마치면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즉 윤회에 속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에게는 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58


기독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타력구제 신앙이다. 한국에서 기독교문화는 기본적으로 예수를 거쳐 하느님이 신자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즉 불교에서 아미타불을 거쳐 부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구조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기독교 역시 스스로를 수양하거나 선행을 하는 것보다 예수를 믿는 일이 더 중요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는 없다. 예수를 통하거나 성당을 통하거나 중개자를 통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타력구제 신앙인 것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불교와 기본적 구조가 다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즉 믿는 대상이 부처에서 하느님으로, 아미타불에서 예수로 바뀌는 것뿐이다. 63


일본인들이 큰소리로 싸운다면 그것은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결심이 선 후에나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열심히 큰소리로 싸운다. 하지만 돌아서면 이 세상이 다이고 시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67


나름 합리적이다 - 구조가 바뀌어 일하는 대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의 모습이 바로 이런 합리적 선택의 결과이다. 북한에도 이런 모습이 있는 것 같다.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일을 열심히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이 효과가 있을 때에는 열심히 일했고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폐쇄정책이 더이상 인민들에게 식량을 줄 수 없는 것이 증명된 후에는 모두가 자신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눈물겹게 노력하고 있다. 73


빨리빨리 현상은 나름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생존이 문제가 되었던 시대에는 남보다 한발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빨리빨리하는 것은 합리적인 대응이었다. 생존을 해결한 후의 생활의 시대까지 빨리빠리는 남아 있었지만, 행복과 의미으 시대에 빨리빨리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75


저승이 이승의 일부로 존재하거나 저승이 이승보다 더 진실된 세계라면 한국인들의 스트레스는 상당 부분 감소할 것이다. 흔히 홧병이라고 불리는 한국적 현상은 조급성이 가져다준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해결되어야 하는데 해결이 안되면 마음이 급해지고 마음의 병이 홧병으로 도진다. 홧병을 한국 특유의 병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의 정신세계, 한국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짧은 인생에서 할 일은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억울하고 기막힌 일들이 생긴다면 홧병이 안 생길 수는 없다. 즉 조급성이란 특정한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76


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는 결코 인간중심 사회가 될 수 없고, 인간중심이 아니라면 인생주의도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라고 해서 인생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제도나 인간이 만든 작품에 삶 자체보다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문화는 자연이나 인간의 제도나 작품이 아닌 인생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생주의다. 78

 

 

볕뉘.  점심에 잠깐 도서를 반납하러 갔다. 한권을 깜박하여 반납을 하지 못하여도 오늘까지 대출을 할 수 있다한다. 검색란에 동학이라고 치고 도서번호를 옮겨적고 찾는다. 생각보다 원하는 책들이 보이지 않아  분류번호 200대로 옮겨 고르다 보니,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고르게 된 책이 세권이다. 동경대전과 한국가족, 한국인이다.  보름으로 가는 가을달이 참 이쁘다. 도서관 한자리에서 주섬주섬 책을 본다.

 

돌아와 손길을 끄는 문학의 아토포스 책 1장을 펼쳐든다.  저자는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이란 책을 설레이면 읽었다고 한다. 2000년대 시인들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있기나 한 것인지라고 말한다. 예술과 정치, 그리고 삶.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가장자리를 넓히려고 애쓰는 학자로 알고 있다. 시인들에게 되묻고 있다. 랑시에르의 입을 빌려서 말한다.

 

위의 저자 권용혁은 강단 철학에 대해 말한다.  서구철학, 동양철학 우리 몸과 삶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그런 의문에서 시작하여 10여년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듯하다. 한중일 가족연구도 그 연구 결과물이라고 한다.  지금 여기의 음악의 변천사도 그러하지만 딱 무엇이라고 규정짓기가 쉽지 않다. 다른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기도 그렇다. 우리 몸말, 현실과 생각의 차이, 아 맞다 무릎치는 이론이 있다면 더욱 서로 나아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탁석산은 조선과 한국은 지층의 단절처럼 전혀 다르다고 가정하면서 이야기를 출발한다. 절과 성당과 교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옮겨다니는 현실은 서구에서 용납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복을 구한다는 의미에서 장려되기도 하는 곳이 여기라고 한다.

 

참 할말이 많으면서도 말을 잇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방법의 문제도 여전히 잠복하는 있는 것이 현실인 듯하다.  어쩌면 다 없는 것으로 여기는 파격까지 포함해서... ... 여러 생각이 많이 스미는 따듯한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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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들은 헌신, 특히 장기적인 헌신은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과 관련해 다른 어떤 위험보다 더 먼저 피해야 할 덫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한 전문 상담가는 독자들에게 "썩 내키지 않는데도 누군가에게 헌신하려 할 때는 훨씬 더 만족스럽고 성취감도 더 클 수 있는 다른 로맨틱한 가능성을 향한 문을 닫아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또 다른 전문가의 말은 훨씬 더 퉁명스럽다. "헌신에 대한 약속은 장기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다른 투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계 맺기'를 바란다면 거리를 유지하라. 함께함에서 뭔가를 이루려 한다면 헌신하지도 헌신을 요구하지도 마라. 언제든 모든 문을 열어 두라. 22


'가벼운 외투처럼 어깨에 걸쳤다가'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23


관계들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고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 보이고 '헌신이 무의미해진다면' 파트너 관계를 네트워크로 바꾸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하면 이전보다 안착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질(그래서 더욱 달갑지 않을)뿐이다 - 그러면 그나마 과거에는 통한 또는 통할 수 있던 기술이 그리워질 것이다. 계속 움직이는 것 - 이것은 한때 특권이자 성취의 상징이었다 -이 이젠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한때는 아주 신나는 모험이었으나 이젠 사람의 진을 빼는 따분한 일이 되었다. 26


대체로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기준을 높이기보다는 낮추어왔다. 그 결과 '사랑'이라는 말로 언급되는 경험의 범위는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원 나잇 스탠드'도 '사랑을 나눈다'는 암호명의 하나가 되었다. 37


사랑이 돈 조반니의 지칠 줄 모르는 탐색과 실험의 목적이었다면 '다시 한번 해봐야지'라는 강박관념이 그러한 목적을 좌절시켰다. 사랑의 '기술'의 표피적인  '습득'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사랑에 대해 전혀 무지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즉 돈 조반니의 경우에서처럼 사랑에 대한 '훈련된 무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38


겸손과 용기 없이는 사랑도 없다. 누구든 전인미답의 미지의 땅에 들어갈 때는 언제나 이 두가지가 요구되며, 게다가 끊임없이 엄청나게 새로 공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생길 때 그것은 그들을 그러한 영역으로 안내할 것이다. 42


욕망이 구심성인 데 비해 사랑은 원심성이다. '거기 존재하는' 것에까지 관계를 확대하고, 넘어가고, 손을 뻗으려는 충동이다. 그것은 대상 속의 주체를 삼키고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욕망과는 정반대이다. 사랑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 매번 이처럼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 사랑하는 자아의 살아 있는 자취가 된다. 사랑에서 자아는 조금씩, 조금씩 세상에 옮겨 심어진다. 사랑하는 자아는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확대된다. 47


욕망이 소비를 원한다면 사랑은 소유를 원한다. 욕망의 충족은 대상의 소멸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 반면 사랑은 대상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커지고, 오래 지속될수록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욕망이 자기-파괴적이라면 사랑은 자기-영속적이다. 48


이중 최악의 것은 욕망의 충족이 지연되는 것으로, 분명 속도와 가속을 중시하는 우리 세계에서 가장 혐오하는 희생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은 점점 더 근본적인 것이 되고, 줄어들고, 무엇보다 간결해진 바람으로 체화되면서 그처럼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속성을 대부분 잃어버린 반면 좀 더 철저하게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음 가는 대로, 그러나 기다릴 필요없이' 53


아무리 보아도 이처럼 사업적 거래로 바라본 관계는 불면에 대한 치유책이 아니다. 관계에 대한 투자는 안전하지 못하며, 아무리 달리 희망하더라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두통거리이지 약이 아니다. 관계를 이익을 가져다줄 투자나 안전의 보장책 또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라보는 한 어떤 결과에서도 모두 지게 될 것처럼 보인다. 외로움은 불안을 낳는다. - 관계들은 단지 그런 것 밖에는 하지 않는 것 같다. 58


"불안감을 느낄 때 연인들은 비위를 맞추거나 아니면 통제하려 들거나 심지어는 물리적으로 몰아세우려는 등 비건설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게 만들기 쉽다." 일단 불안감이 스며들면 항해는 결코 자신감 있고 사려 깊고 안정될 수 없다. 방향타를 잃은 인간관계의 허약한 뗏목은 수많은 인간관계들이 좌초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두 암초 사이에서, 즉 전면적인 복종과 완전한 권력행사 또는 양같이 온순한 수용과 오만한 정복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자기 자신의 자율성을 없애버리고 파트너의 자율성을 질식시켜버린다. 이 두 암초 중의 하나와 부딪치기만 해도 노련한 승무원이 모는 배도 난파되기 쉽상이다. 59


감정에 압도당하도록, 그래서 붕 뜨도록 하면 안 된다. 또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편의성이다. 편의성은 냉정한 머리의 일이지 따듯한 가슴의 일이 아니다. 72


본래 위치인 윗주머니에서 빠져나오도록 놔두어서는 안된다. 항상 정신 차려야 한다. 경계심이 낮잠을 자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자비가 '감정의 저류'라고 부르는 것에서 생기는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면밀히 감시하라.(분명히, 계산에 포함되지 않게 되자마자 감정은 '저류로 흐르는' 경향을 띠게 된다.) 예상하지 못하거나 신경을 쓸 용의가 없는 어떤 것이 간파되었을 때는 바로 "기왕의 관계를 청산하고 다른 파트너를 찾아나서야 할 때"임을 명심하라. 72


70년대에 세넷은 '정치적 범주들을 심리적 범주들로 바꾸어버리는' '친밀성의 이데올로기'의 도래를 지적한 바 있다.  90


'버디-버디'류의 관계에서는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가 오고가는 것, 즉 메시지의 유통자체가 메시지이다....오늘날 마치 강박증에 걸린 듯 고백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하는 것과 30년 전에 세넷이 우려한 바 있는 신뢰의 남발을 혼동하지 말라. 무슨 말을 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목적은 더 이상 영혼의 내면을 상대방이 가만히 살펴보고 동의하게 하려는 데 있지 않다. 말이나 문자로 보내는 단어들은 더 이상 정신적 발견의 여정을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말을 끝내면 당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침묵은 배제와 동의어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95-96

 

 

 

 

 

 

 

 

 

"칠 조심" ---

 

내 마음이 조심하지 않는 바람에

내 기억은 종아리와 뺨과

팔과, 입술과, 눈에 온통 얼룩져 버렸다.

 

내가 너를

그 모든 성공과 실패보다 더 사랑한 것은,

너와 함께 있으면

누르스름한 흰 빛이 하얗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어둠 또한

친구야, 맹세하건대, 어떻게든 하얗게 되리,

헛소리보다 전등갓보다도

이마에 감은 흰 붕대보다도 더 하얗게!

_보리스 파스테르나트, [칠 조심] 전문

 

볕뉘.

 

1. 제목처럼 책은 사랑에 대해 희망을 비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액체근대, 리퀴드러브, 액상인 사랑은 뿌리내지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관계'라는 말도 부담스러워 네트워크로 회피하고 욕망처럼 소비해내지 못하면 숱한 상처들로 일상도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1장을 읽고 덮는다. 될수록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싶어하는 책으로 읽고 있다. 답이 있거나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2. 전봉준의 공주전투 장면을 읽으면서 그 우금티를 떠올렸다.  날짜로는 11월 8일부터 그러니 3-4일 뒤다. 그때는 발목까지 눈이 내렸다고 한다. 만명이나 되는 농민군이 500명으로 줄면서 퇴각하기까지, 그리고 순창에서 밀고로 잡히기까지 따라가본다. 전봉준 훈장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정약용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서당을 차리기도 하고...아직 정확한 사료가 부족하거나 신화화된 것에서 이이화선생님은 좀더 친근하고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한다.

 

3. 진은영 책이 걸려 구해본다. 실망시키지 않을 듯싶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도 꼼지락거리는 됨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서문의 끝부분은 칠조심이란 시로 시작하고 있다.  너에 대한 마음들은 늘 그러하지만 나도 너도 이 세상에 흘러가기만 해 어쩌지 못하고 있다.

 

4. 책이 우르르 몰려와 어떻게 할지 궁리하느라 가을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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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5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06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날 예술과 기술을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계가 우리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이전에는 한편으로는 양적 요구와 일의 효율이,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을 반영하는 질적 가치와 목적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였다. 주관적 형태의 창조적 표현에 발명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은 유기체 자체의 통일성과 인격의 각인을 부정하는 것이다. ....디자인의 끝없는 흐름도 다른 예술의 특성을 만들고 평범한 항아리나 직물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떤 물건도, 매일 사용하는 그냥 그런 물건조차도, 그림으로나 스타일로나 모양으로나 인간 정신의 어떤 각인이 새겨지지 않은 한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 미적 발명의 양은 지난 수세기 동안에 이뤄낸 기계 발명의 총량에 견줄 만하다. 그러나 결코 오늘날처럼 경제가 예술을 억누르는 식으로 기술을 압박하지는 않았기에, 이들 두 발명 양식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462-463


화이트헤드는 수공예 절정기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그의 시대에 대한 성격규정은 서구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 곧 민주적 기술이 거대 기술의 권위, 권력, 그리고 양적 성공에 압도되었던 시점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역사를 마주보고 그 결과를 설명하기 이전에, 2000여 년동안 작동되어 왔던 그 반대의 힘 -주축 종교와 철학-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들은 모든 변화의 지향점을 환경이 아니라 개인 영혼의 변혁에 둠으로써 무거운 '문명'의 멍에에 도전하고 그것을 제거하려 했던, 종류는 다르지만 성질은 같은 가치 체계였다. 468


지배계급은 자기들이 무자비하게 독차지했던 재화와 쾌락에 싫증이 나 무기력하게 되었다. 수많은 거만한 지배자와 그 충복들이 인간에게 영락없는 원숭이 수준으로 타락하였다. 원숭이처럼, 그들이 먹거리를 저 혼자 차지하고 집단과 함께 나누려 하지 않았다. 원숭이처럼, 힘있는 자들은 자기 몫 이상으로 여자를 요구하였다. 역시 원숭이처럼, 잠재적인 라이벌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신경질적으로 공격하였다. 요컨대 그들은 분명한 인간적 잠재 능력에서 멀어졌고, 그런 의미에서 늘어난 권력과 부는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 469


새로운 중추적 종교와 윤리 재정립은 기술에 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그것은 노예의 불운을 덜어주었고, 나아가 노예제 자체를 점차 폐기토록 만들었다. 전쟁에서는 아닐지라도, 평화적 일에서는 거대기계의 권력 원천은 해체되어 버려졌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은 인간을 사용하지 않는 대안적 동력 체계와 기계의 발명 속도를 빠르게 하였다. 이것이 긍정적 진보였음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럽에서는 '문명'의 옛 유물론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반대해온 주된 종교 조직이 로마의 관료제 행정제도를 물려받음으로써 그 자체가 권력으로 떠올랐다. 477


기계화의 선구자들


누르시아의 베네딕트가 6세기에 세운 베네딕트 수도회가 수많은 비슷한 다른 수도원 조직들과 구별된 것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원장에게 복종하며 가난을 견디고 서로의 행동을 점검한다는 통상적 수준을 넘어서는 특별한 의무를 과한 데 있었다. 베네딕트수도회는 일상의 일을 기독교도의 의무로서 수행한다는 새로운 의무를 덧붙였다. 하루에 적어도 5시간씩 육체노동을 하도록 하였다. 또 인간기계의 원초적 조직처럼 수도승을 10명씩 조를 짜 주임사제의 감독 아래에 두었다. 483


수도승에게 자기 의지를 포기하도록 동의를 구한 것은 초기 거대기계가 인간 부품에 과한 것과 빼닮았다. 권위, 복종, 상급자 명령에 대한 예속이 영혼화되고 도덕화된 거대기계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24시간제였다는 점에서 후대의 기계화 단계를 내다보기까지 하였다. 483


직접적 이유가 무엇이든가 간에, 그 궁극적 결과는 초기 도시 문화에서 혜택 받은 계급이나 억압받는 노동자들 모두에게 없던 그 무언가를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균형 잡힌 삶, 곧 지적으로 낮은 수준이었지만 기초적 마을 문화에서 보전되던 종류의 삶이었다. 수도원이 부과한 박탈과 절제는, 더 많은 재화나 권력을 지배계급의 처분에 맡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 헌신을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484


하루 동안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면서, 이 체제는 정통 '문명'의 가장 나쁘고 완결한 결함, 즉 평생을 한가지 일에 묶이고 하루 종일 완전히 지칠 정도의 일에만 전념하던 문제점을 극복하였다. 그런 적당함, 노력의 평등, 다양성 증진은 이전에는 더 풍부한 지적, 정신적 발달이라는 이점을 포기한 전통적이고 야심 없는 소규모 공동체에서만 가능하였다. 이제 그것은 최고의 문화 단계에서 협동적 노력을 위한 모델이 되었다. 485


불행하게도 수도원 조직의 성적 편벽성은 기계화에 왜곡된 공헌을 하였다. 그 후의 발달에서 한쪽에는 공장과 사무실, 라른 한쪽에는 가정이라는 식의 분리는, 전쟁과 노역을 위한 고대의 원형적 독신자 집단과 그들이 나왔던 혼성 농경 공동체 간의 분리처럼 뚜렷하게 되었다. 중성 생물이 전문화된 일을 가장 잘한다는 개미집의 교훈이 점점 인간 공동체에도 적용되어, 기계 자체가 비남성화와 비여성화 인자가 되었다. 그러한 반섹슈얼리즘은 자본주의에도 기술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똑같은 자연적 충동들이 머지 않아 수도원적 질서의 표면을 뚫고 나왔다. 힘에 대한 욕망도 욕망의 힘도 통제하기 어려웠다. 486


온종일 밭일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신경안정제이며 가장 양질의 수면제이기는 하지만, 모든 중노동 후에 정신의 높은 기능은 잠들게 된다. 실제로 날마다 일을 가혹하게 강요하는 데 대한 반항을 막는 데는, 독주나 야만적 압박보다도 육체적 피로가 더 효과적이다. 온화한 성품의 에머슨조차도 잎에 풀칠도 할 수 없는 돈을 받으며 하루 15~16시간씩 일하여 최초의 철도를 건설한 이민 노동자 부대에 대해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그것이 경찰보다 나았다"고 말을 하였다. 488


[기술과 문명]에서 '원기술기'라 일컫던 이 단계에서 자유에너지 확산은 대규모 인간 집단에 집중하는 파라오식보다 기술 공학에 훨씬 더 크게 공헌하였다. 물이 빠르게 흐르고 바람이 부는 곳은 어디나 원동기를 설치하여 태양에너지나 지구의 회전을 인간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자주 작은 마을이나 수도원도 가장 큰 도시만큼이나 새로운 기계가 많이 필요하였고, 그런 자연력을 점점 더 많이 이용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혁신은 자유도시의 발생과 그 후의 번영에 직접적으로 공헌하였다. 자유도시에서의 자유노동자들은 이제 봉건적 권력이나 왕권에서부터 대체로 독립된 협동조합이나 동업조합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490


미뉴,[교부연구]-

"강은 수문 벽이 허용하는 만큼 대수도원으로 흘러들었다. 우선 제분공장으로 세차게 흘러가서 바퀴 무게로 곡물을 빻고 겨와 가루를 분리하는 가는 체를 흔드는 데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러고는 다음 건물로 흘러들어가 보일러를 채우고, 그 물은 데워져서 수도승들이 마시는 맥주를 만드는 데 쓰인다. 포도 풍작이 포도주 양조업자의 노고에 보답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강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제분 공장에 이어 모직물의 올을 촘촘하게 하는 축융기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제분 공장에서는 수도승의 음식을 마련했지만, 이번에는 수도승의 옷을 만드는 일을 한다. 강은 이 일을 그만두지도 않거니와 어떤 일을 부탁해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강은 무거운 망치와 메, 좀 더 정확하게는 축융기의 나무발을 번갈아 올렸다 내렸다 한다. 아주 빠르게 휘저어 모든 바퀴를 날래게 돌리면 강은 거품을 일으키면서 스스로를 가루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강은 무두질 공장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수도승의 구두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준비하는데 열과 성을 다한다. 그러고는 많은 작은 갈래로 나뉘어 여러부서들은 바쁘게 통과하면서 취사, 회전, 분쇄, 급수, 세탁, 연마 등 무슨 목적이든 물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찾아가서 언제나 도와주며 거절하는 법이 없다. 마지막에는 크게 감사를 받으며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쓰레기를 휩쓸어가면서 모든 것을 깨끗이 하고 떠난다." 491-492


노동의 해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중세 노동자들이 누린 휴일 수로 알 수 있다. 낙후된 광산촌에서조차 16세기까지도 기로된 날들의 절반 이상이 휴일이었다. 유럽 전체로 보면 일요일을 포함하여 휴일은 모두 189일에 이르렀다. 이것은 로마제국  때보다도 많을 정도이다. ...페르시아의 발명품인 풍차가 12세기에 수입되면서, 이 에너지원을 기댈 수 있는 지역의 동력 공급이 크게 늘었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죽 늘어선 풍차들이 선진적 주거지역이라면 어디든 에워싸고 있었다..492

 

기독교의 검약과 절제, 규칙성은 반드시 세속의 성공으로 이어지리라는 지적이었다. 막스 베버가 16세기 칼빈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특질로서 잘못 취급했던 습관이 중세의 시토 수도원에서 대부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길드는 가난하고 훈련을 못 받은 탓에 불리한 입장에 있는 늘어나는 임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배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생산력과 창조력에서 생긴 이득은 공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환점이 되는 16세기까지의 전체적 성과는 괄목할 만하였다. ...17세기에 이르러 많은 분야에서 농촌과 도시,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 정적 요소와 동적 요소 간의 균형이 훌륭하게 잡혔다. 이 체제는 힘으로 부족한 것을 시간으로 메웠다. 평범한 물건조차도 오래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위대한 건축물들은 수백 년에 걸쳐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수백 년이라도 견딜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495-497


수도원 제도가 원래 개인의 구원을 추구한다는 단 한가지 목적에 바쳐진 것인데 반하여, 정통적 자본주의는 이윤과 자본의 축적, 과시적 소비의 기회 확대에 의한 물욕 신의 찬미와 더 실질적인 구원의 성취에 바쳐졌다. 그런 것들을 집중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모든 중추적 종교의 삼가고 절제하는 관행을 뒤엎는 쪽으로 나아갔다. 칼 마르크스는 놀라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포기와 자기희생이라는 원래의 수도원적 명제가 탐욕과 소유욕이라는 자본주의적 반명제를 낳았다는 것은, 심술궂은 역사 전환으로 남아 있다. 498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적했듯이, 돈에 대한 욕망은 한계를 모르는 반면에 음식, 옷, 가구, 집, 정원, 밭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표현되는 모든 자연적인 부에는 그런 물자의 성질 및 사용자의 생물적 욕구와 능력에 의해 정해지는 생산과 소비의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인간의 기능에 한계가 없다는 생각은 불합리하다. 생명은 모두 아주 좁은 온도, 공기, 물, 음식의 한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금전만이 또는 다른 사람을 부려먹을 수 있는 권력이, 그런 분명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정신착란이다. 502


수백 년 사이에 새로운 자본자 정신은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윤리에 도전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가치 구도는 사실상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7가지 큰 죄중 다섯 가지 죄 - 교만, 시기, 과식, 탐욕, 정욕 - 를 모든 경제 사업에 필요한 자극으로 보고 긍정적인 사회적 덕목으로 바꾸었다. 반면에 사랑과 겸손을 위시한 기본 덕목은, 노동계급이 냉혹한 착취에 더 순종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정도 이외에는 '사업에 나쁜 것'으로서 배척당하였다. 504


자본주의가 번영한 곳에서는 성공적인 경제 기업을 위한 3개의 주된 규준이 확립되었다. 곧 수량의 계산, 시간의 관측과 통제, 그리고 추상적인 금전적 보수에의 전심전력이다. 자본주의의 궁극적 가치 - 힘, 이윤, 위세 - 는 이들 원천에서 나왔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위장 아래의 그 모든 것은 피라미드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첫번째 규준은 이윤과 손실의 보편적 셈법을 만들어냈고, 두 번째 규준은 기계와 아울러 인간의 생산효율도 확보하였으며, 세 번째 규준은 기본적으로는 수도승이 추구한 천국에서의 영원한 보상과 같은, 일 할 동기를 일상생활에 끌어들였다. 돈의 추구는 정열과 집념이 되었고, 다른 모든 목적을 수단화하는 목적이 되었다. 508


자본주의는 원시사회에서는 훌륭한 인간적 이유 때문에 건드린 적이 없던 강력한 긍정적 동기를 착취하고 보편화하였다. 자본가는 수백 년 동안 노동자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보상보다는 처벌이라는 부정적 방식을 계속 써온 반면에, 자기나 동료 경영자, 투자가들에게는 제멋대로 보상하였다...사업체의 목적론에서는, 이윤이 생활의 최종 목적이었다. 이것과 비교한다면, '생명, 건강, 번영'을 추구한 고대 파라오 체제가 유기체의 현실에 더 잘 뿌리박은 것이었다.  510


캄파넬라(16세기인물)는 그의 이상향 [태양의 도시]에서 "노 젓는 사람이나 바람의 힘없이, 놀랄 만한 장치에 의해 물 위를 가는" 배를 그렸다. 그리고 그 이야기 말미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대영주님이 말씀하신다. "가가올 대에 대해 점성가들이 이야기한 것, 곧 지난 4,000년 동안 세상에 있었던 모든 일보다 더 많은 일들이 앞으로 100년 사이에 일어나리라는 것을 너희들이 아느냐." 514


일련의 최초 발명들은 유리를 제조한 덕분에 탄생하였다. 로저 베이컨의 기록에 따르면, 과학적 광학 지식이 증대하면서 안경용의 맑은 유리가 만들어져 시력장애, 특히 나이 들어 생기는 시력장애를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안경의 발명으로 성인의 정신생활은 평균 15년 연장되고 풍요롭게 되었다. 45세에 기대 수명이 60세라면 그렇다는 셈인데, 근시가 더 일찍 시작되는 경우 정신활동이 연장되는 기간은 더 길어질 것이다. '문예 부흥'을 설명하기 위해 밝혀진 요인들 중에서도, 확실히 안경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516


시계는 자동 장치의 본보기였다. 우리가 자동 장치에서 이룰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우선 시계에서 해결되었다. 16세기의 거대한 성당 시계에서부터 달력과 알림 기능을 갖춘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조그마한 팔목시계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오늘날 전자공학 기술이 당연하게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는 소형화 과정의 최초의 예를 볼 수 있다. 시계에서의 시간 자동화는 더 큰 모든 자동화 체계의 원형이다. 519


발명가이자 기술자인 레오나르도를 평가하면서, 학자들은 그가 기계의 환상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어지러웠는지를 놓치곤 한다. 로저 베이컨처럼 그도 역시 평소의 불가사의한 방식(꿈이라 이름 붙인)으로 "인간은 움직이지 않고도 걸을 것이고(자동차), 눈앞에 없는 사람과 이야기할 것이며(전화),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축음기)"라고 예견하였다. 그러나 편지 형식으로 쓴 다른 환상에서, 레오나르도는 인류를 공격하고 파괴할 무시무시한 괴물의 모습을 그렀다. 레오나르도는 그 괴물에 실체적이고 거대한,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부여했지만, 그가 실제로 묘사한 것은 우리 시대가 목격하고 있는 과학이 저지르는 무시무시한 몰살 행위에 아주 가깝다.


" 아아, 이 미친 듯이 날뛰는 악마에게 얼마나 숱하게 공격을 퍼부었던가.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어. 오, 가엾는 사람들아, 당신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도, 도시의 높은 성벽도, 크게 무리 지을 사람들도, 집도, 궁전도 없었어! 게나 귀뚜라미처럼 안전하게 피할 곳을 찾아도 작은 구멍이나 땅 밑의 굴 말고는 어떤 곳도 남아 있지를 않았어. 오 얼마나 많은 가엾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식을 빼앗겼든가! 얼마나 많은 불행한 여인들이 짝을 잃었든가...사실 그건 곤경에 빠졌을 때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생물종을 부러워해야 할 필요가 있다네..우리 가엾는 인간에게는 도망갈 길이 없어. 이 괴물은 천천히 움직일 때라도 제일 날랜 준마보다도 훨씬 빠르기 때문이야." 521-522


아무리 순화되고 정화되었다 한들, 지성만으로 생명의 필요성과 목적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다.  522


레오나르도는 기계적 세계의 그림에 없는 무언가를 어렴풋이나마 알았다. 그는 자기가 해부하여 정확하게 그린 사람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살아 있는 인간을 묘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해부용 메스로 드러낼 수도 없었다. 인간의 역사, 문화, 희망과 기대를 통찰하지 않고서는 인간 존재의 본질 그 자체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해부학적 묘사와 기계 발명의 한계를 알았다. 그의 그림에서 표현된 가시적 세계는 내장을 제거한 미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무의식 세계의 억압된 부분이 마침내 오늘날 모든 인류에 떨어지 않는 것과 똑같은 악몽으로 폭발하리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에서도 드러내었다. 523


"하늘이 다시 찢어지고, 거리서 쏟아내린 불길이 날아다니다 사라지는 공포 속에서 보리라.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이 인간의 언어를 말하는 것을 들으리라. 가만히 있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의 여러 곳으로 이동하리라.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것을 보리라. 경탄할 만한 인간이여! 어떤 열광이 당신네들을 이처럼 몰아 부쳤는가!" 526

 

볕뉘.  도서 반납일이 다가왔다는 문자가 왔다.  그의 책을 겹쳐 읽으면서 몸에 착 달라붙은 선입견이 쉽게 증발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관성과 복원력을 지닌 앎들은 쉽게 그 틀을 바꾸려하지 않는다. 빌린 책들의 3/4정도는 읽어낸 지금 그는 역사를 다시 읽어내고 있음을 느낀다. 막스 베버가 이야기한 자본주의의 프로테스탄트는 이미 중세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중세의 여러과정을 되새겨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명한다. 이는 도구의 발명으로 너무 손쉽게 설명하는 역사관과 배치된다. 그의 책 참고문헌에서 보이는 방대한 신석기시대의 사례와 중세의 저작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르네상스의 관점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레오나르도가 잠수함을 발명하고 내놓을 수 있음에도 그는 숨겼다고 한다. 기술과 기계에대한 발명과 함께 그가 숱한 꿈에서 그 기술이 가져올 악몽을 의식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세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기술, 기계의 발명, 발달은 수력과 풍력을 다양하게 이용하고, 노동력을 기계로 줄인 시간을 인간을 위해 썼던 사례도 보여주고 있다. 화석연료가 아닌 자연에너지를 이용하여 돌아가는 마을의 묘사에는 뭉클하기도 하다. 성적인 감금과 분류가 낳은 수도원의 이분법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가사와 일의 구별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지성과 감성은 분리는 필연적으로 문제를 심화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은 물론 사회가 의도하는 의식의 분리 역시 사회적 문제를 낳는다. 무의식을 의식하지 않는 하루하루는 시간의 지층에서 자신을 왜곡하게 만든다.

 

그의 역사인식은 따로따로 끊어져있지 않다. 외부와 내부는 긴장하며 영역을 넓히고 있으며, 여러 학문의 고리를 끊임없이 되물고 있는 것 같다. 주문한 책들이 오고 읽어야 할 여분의 책들도 많지 않다.  온전하게 인간의 모습, 사람과 사회, 기술, 예술의 관계를 한번 더 다른 시각으로 느껴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어쩌면 지나쳤을지 모르겠다. 먼저 알았거나 이런 저런 다른 이력을 갖지 않았다면 이리 오래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고 올해 가을에 불쑥 마음에 들어와 고맙다 싶다. 그의 통찰의 여진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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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입구

 

여자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혼자입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혼자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바람은 불어오고

또다른 국면에서는 미늘에 걸린 물고기들이

죽음을 향해 튀어오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수동 카메라로 여자의 여름을 함께 들여다본 사람

불가능을 사랑했던 시간과 풍랑이 잦았던 마음

잠시 핑, 눈물이 반짝입니다

 

수면 위로 튀어오르는 물고기의 비늘도 반짝입니다

모든 오해는 이해의 다른 비늘입니다

아픈 이마에선 눈물의 비린내가 납니다

생각해보면 천국이 직장이라면 그곳이 천국이겠습니까?

또다른 국면에서는 사랑도 직장처럼 변해갑니다

 

사, 라, 합, 니, 다

이응이 빠진 건 눈물을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첫사랑을 빌려 읽기도 합니다

 

 

 


흑국보고기

 태백

               

쓸쓸하고 퇴락한 나라
서럽고 황폐한 나라
걸인조차 돌아오지 않는
유령의 나라
진폐증을 앓는 검은 뼈들이
화광(火光)아파트 베란다에서
검은 해바라기 꽃으로 피는 나라
아버지의 청춘이 묻힌 나라
어머니가 늙어가는 나라
방문을 향해 놓인
주인 없는 신발들만 사는 나라
주인 없는 신발들만 우는 나라
내 아버지는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주항항 광부였고
내 어머니는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합숙 밥해주는 아줌마였지만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은 한번도 대한석탄공사 연탄처럼 활할 타오른 적도 없는

막장 같은 나라
뼈만 아픈 나라
천제단도 있고
발원수도 샘솟지만
무저갱의 검은 피만 쏟아지는 나라
서럽고 황폐한 나라
(태백이 아니라
태백이 아니라)

 

 

 

볕뉘.

 

어느 날, 마음에 먼지가 날 즈음이 되면, 지인들에게 몇권의 책추천을 건네받는다. 한 시인에게서 받은 문자에는 [사랑은 어느 날 수리된다]라고 찍혀있었다. 마음에 아마 먼지가 폴폴 날린 날 서점에 들러 시집에 대한 갈증에 허겁지겁 챙겨왔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 조금씩 마셨다. 그러다가 가을도 허겁지겁 도망가는 날, 그 시의 집을 건네들었고 옹알거렸다.

 

시인도 시인의 고향도 잘 몰랐다. 하지만  공간을 공유한 느낌에 참 마음은 묵직해지는 것이었다. 아직도 부친이 군인으로 그곳에서 만나 결혼을 한 어머니의 외가 소식을 다 알지는 못한다. 당신들은 말하셨고, 많은 아픈 얘기를 감추셨고, 아직도 다 귀기울여 듣지 못하고 들었던 이야기는 서로 섞이거나 잊혀진 것도 있다. 어린시절이 증명사진처럼 마음에 남아있는 그곳은 지금쯤 함백산 정상은 벌써 눈으로 뒤덮일 것이고, 가을 키큰 해바라기와 낮은 집들 사이 아이들의 소리와 동선을 따라 고추잠자리가 지천으로 돌아다니는 곳이었다. 거슬러 올라가 여름은 멱감기 좋은 곳들, 하루종일 산으로 돌아다니던 그곳에서 부모님의 삶은 없었다. 시인의 시집에는 마지막 두 구절이 없었다. (태백이 아니라, 태백이 아니라는 빠졌고 제목의 부제로 올라와 있는 것 같다.) 부모님의 삶을 자꾸 담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

 

그리고 눈물의 입구라는 시도 소리내어 읽어 보았다. 사,라, 합, 니, 다 하지만 이렇게 이응이라는 눈물이 빠진 곳은 천국도 직장처럼 되어버린다고 한다. '사랑합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 눈물을 채울 수 있도록 애틋한 곳이 많이 늘었으면 싶다. 가을은 눈물의 습기가 너무 말라 하늘이 지나치게 푸르른 날이다. [사랑은 어느 날 수리된다]라는 제목의 시도 시집안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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