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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꿈가장자리다. 운동은 없다. 운동은 없었다라고 쓰고 지운다. 운동은 죽었다라고 쓰고 중간을 펜으로 그었다. 그렇게 긋고 쓰는 편이 더 빠르다고 다짐한다. 연연해하지 않고 다른 삶을 살아내는 길로 접어드는 것이 빠르다고 쓴다. 민주화에 연연해하고 민족에 끌려다니고 가치에만 기웃거리고 자유에 목을 메이는 편을 택하지 않는다. 시민만을 탐하지 않으며 노동만을, 녹색만을, 환경만을 정도라고 생각지 않는다. 하나로 가는 길은 길이 아니다. 내편도 네편도 없다라고 다짐해낸다. 다짐만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쓴다. 다른 삶을 살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려는 것이라고 쓴다. 상아탑처럼 올라가버린 학문들은 사람의 격이란 맷돌로 갈려야 한다. 갈린 모든 앎을 사람으로 삶으로 다시 소화되어야 한다. 일상과 사람으로 삶으로 뿌리내리지 않으려는 모둠의 저항과 관성을 거부해낸다. 모둠의 색깔과 치적으로 가치를 부여안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낸 삶들로 평가받고 이어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삶들의 걸음걸이만큼만, 삶들의 빼곡한 지문만큼만 시공간의 터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꿈의 끝자리 신경은 빠져나가는 듯 쇠약하다. 아직 꿈의 가장자리다.

 

 

볕뉘. 아무도 삶이 겹치지 않는다.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더 더욱 만나기가 어렵다. 공간도 일상도 삶도 겹칠 줄 알았으나 원심력은 점점 강해지고 점점 멀어진다. 유대인이 강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주일에 싫든 좋든 보는 것이다라고 한다.  싫으면 싫어서 보지 않고, 좋으면 좋아하는 일만 하느라고 보지 못한다. 경험이 공유되지 않고 지평은 섞이지 않고 넓어지지 않는다. 네트워크의 만남, 유선상의 만남, 대면의 만남 사이 그 결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면이 갖고 있는 풍부한 감정들의 정보, 시공간에 드리는 여운을 잊은 듯하다. 지금까지 유대를 지탱해오는 것들이 그러한 것들이라는 것조차 건망한다. 지역은 지역을 말만하되 말하면서 만나지 않는다. 지역은 말하되 같은 말만 하고 다른 소리를 듣는 귀를 닫아버렸다. 사람들은 수시로 전하고 만나면서 감정을 남발하되 감정을 담지 못한다. 다른 삶과 굴곡을 여쭈지 않는다. 여쭙지 않으니 다름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못하니 일상에 다름이 휘감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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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송취소


 

1.

 

 

 

몇번씩 마음보다 앞서간 말들을
그러모은다

 

말이 먼저 닿을까 마음을 재촉하여
말을 잡아 고삐를 돌린다

 

가을도 저물어
마음도 단풍같아
여물지 않은 말들을
따놓고 둥글게 깎아 건다

 

가을햇살이 말들의 습기에 스민다

 

 

 

2.

 

 

몇번씩 삶보다 앞서간 마음들을
그러모은다.

 

마음이 먼저 닿을까 삶을 재촉하여
마음들을 잡아 고삐를 돌린다

 

가을도 뉘엿 저물고
삶도 단풍같아
여물지 않은 마음들을
시간의 날줄에 꿰어본다
시간의 씨줄로 엮어보다

 

불쑥불쑥 나와버린
마음들을 솎아보다 와락
너의 마음들 곁에 널어본다

 

가을햇볕이 마음들의  말들에 꽂힌다

 

 

3

 

말도
마음들도 이리 되돌아오지만
이렇게 말들도 마음들도 삶도 너에게 발송되고 싶은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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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아가 된 성적 동물: 사람 사귀기는 목적인가 수단인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종속된 상태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제한의, 되물릴 수도 없으며 '다음 통보가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조항도 붙어 있지 않는 헌신에 몰두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한 의무를 지는 것은 오늘날의 유동적인 사회의 처세술에는 맞지 않는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이 대개는 삶을 다른 식으로 표출하며 열심히 피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헌신에 눈을 뜨는 것은 트라우마적 경험이 될 수 있다. 산후 우울증이나 출산 후의 부부관계의 위기는 거식증이나 폭식증, 무수한 변종 알레르기와 마찬가지로 특히 '유동적인 현대'에 고유한 질병처럼 보인다. 116


가볍게 하늘을 나는 것은 환희지만 방향타 없이 나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변화는 축복이지만 변덕은 짜증스럽다. 섹스의 해방. '섹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고나  할까  122


요즘 유행 중인 모든 형태의 친밀한 관계는 한때 부부간의 사랑 그리고 나중에는 자유연애가 했던 것과 똑같은 거짓 행복의 가면을 쓰고 있다....그러한 가면을 벗기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족되지 못한 열망, 녹초가 된 신경, 실망한 사랑, 상처, 공포, 외로움, 위선, 자기중심주의, 반복강박증 등을 발견할 수 있다.....연기가 환희를 대신했으며 몸과 돈 등 물질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정신적인 것은 퇴물 취급된다.  금욕과 일부일처제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난잡한 성행위 모두 똑같이 관능의 자유로운 삶으로 부터 저 멀리 유리되어 있다. 123


기교에 대한 관심은 감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성행위를 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환희를 맛볼 시간이나 여지를 갖지 못한다. 육체는 정신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섹스의 매력이 흘러나왔던 것은 감정과 환희와 정신으로부터였다. - 지금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신비는 사라졌으며, 따라서 열망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123


유동적 현대의 이성은 공간적인 것이든 시간적인 것이든 어떠한 구속과 속박의 권리도 부정한다. 억압당하고 의존하고 속박될 필요도 또 그렇게 해서 좋을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현대의 유동적 소비자들의 합리성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속박과 구속은 인간관계를 '불순'하게 만든다 125


"합리성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바람과 욕구들"이 곧 복귀해 복수할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연적 본능과 영원한 가치 등 지금까지 역사적, 정치적으로 핵심까지 썩어들어간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대응할 수 없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단지 섹스나 성행위에 적법하게 투자될 수 있는 기대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이상의 것이 요구될 것이다. 즉 다름 아니라 소비자의 합리성이라는 주권으로부터 섹스를 제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아마 그것 말고도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126

 

섹스와 관계

 

 

생산자의 삶이라는 모델 내부에서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의 사랑이나 영원으로 가는 다리를 놓는 것 또는 '운명의 포로'가 되는 데 동의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헌신을 약속하는 것 등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다 - 그것을 구속적이거나 억압적인 것으로 느꼈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그와 반대로 그것들은 호모 파베르에게는 '자연적 본능'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고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것은 호모 파베르의 섹스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다 127


과거와 현재의 고통을 서로 견주어 어느 쪽이 더 견딜 만한지를 가늠해보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시대가 다른 만큼 각각이 겪는 고통과 괴로움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으 오늘날 고뇌는 소비하는 인간의 고뇌이다. 양자는 함께 태어났다. 만약 그것들이 사라진다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없어질 것이다. 128


어떤 육체적 결합이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사회적으로 틀 지워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으며, 사회적 존재의 다른 측면들과의 연관성을 모두 제거할 수는 없다. 이전의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으로 승인된 의미를 박탈당한 섹스는 유동적인 현대적 삶의 주요한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끔찍한, 무시무시한 불확실성을 하나로 압축하고 있다. 133


부부스와핑 - 그곳에서 친밀함과 기쁨, 부드러움, 애정이나 자부심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물론, 방문자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바보야, 이건 섹스야! -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런저런 세상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러나 만약 그의 말이 맞는다면 도대체 섹스가 왜 중요할까? 또는 오히려 지구쉬의 말을 반복하자면, 만약 성행위의 본질이 순간적 쾌락을 끌어내는 데 있다고 할 경우 "그렇다면 우리가 (의도를 갖고) 행하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단지 그것이 일어난다는 것만 중요해지는 것"이 아닐까? 138


'성적 선호'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냐 아니면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수의 성 정체성 중 어떤 것이 자신에게 가장 맞느냐를 결정하는 것(발견 또는 발명하는 것)이 성적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냐, 아니면 '출생 공동체'의 경우의 호모 사피엔스처럼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여 그처럼 바꿀 수 없는 운명을 개인의 소명으로 개주해 삶을 살아가야 하느냐이다. 140


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영원히 불완전하고 충족되지 않은 채로 있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 과거라면 성의 불길이 곧 잦아들었을테지만 지금은 경이로운 신체 단련 체제와 특효약의 공동 협력에 의해 불길이 되살아나는 그런 나이에도 말이다. 이 여행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여정은 각 역에 도착할 때마다 재조정된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는 여행 내내 미지의 것으로 남는다. 141


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다.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상태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으로 무수한 시행착오, 위험천만한 발견 여행, 우발적인 발견들로 가득 차 있으며, 도처에 수많은 실수가 끼어들며, 놓친 기회들 때문에 슬픔에 잠길 때가 많지만 때로는 즐거운 일이 서서히 떠오르는 기쁨도 맛볼 수 있다.143


성적 본능의 승화와 억압(프로이트는 이것은 사회의 어떠한 질서있는 배치에서도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간주했다) 간의 연관성은 무너진 것 같다. 유동적인 현대 사회는 성적 본능을 억압하지 않고도 또는 근본적으로 그것의 한도를 제한하지 않고도 그것을 승화시키려는 인류의 성향/순종성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승화 과정에 대한 규제가 점차 해체된 덕분인데, 이제 그것은 널리 확산되고 만연된 채 어떤 강제적 압력이 아니라 얼마든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성적 욕망의 대상들이 이끄는 대로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146

 

네트워크와 관계


당신은 휴대폰 없이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동시에 일단 휴대폰이 있다면 당신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 수 없다. 항상 안에 있는 것이다. - 다만 한 장소에 갇혀 있지 않는다. 150


끊임없이 움직이는 집합으로, 이동하는 각각의 단위들은 똑같은 것을 하지만 함께하지는 않는다. 단위들은 규정을 따르지 않고 발을 맞추어 나간다. 통상적인 군중이라면 무리를 벗어나 있는 단위는 쫓아내거나 그대로 밟고 지나간다. - 하지만 우리의 떼가 용인하는 것은 오직 그러한 단위들뿐이다......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휴대폰들이 무슨 소용이겠는각/ 152


휴대폰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준다. 휴대폰은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이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도록 해준다. 153


가상적 인접성의 도래로 인해 인간들 간의 접속이 보다 빈번해진 동시에 보다 얕아지고, 보다 집중적으로 된 동시에 보다 짧아졌다. 유대 관계로 발전하기에는 접속들이 너무 얕아졌고 너무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목전의 일에 초점을 맞추느라 주고받는 메시지의 범위를 넘어서거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간 외로 관계를 확장시키지 못한다. 155


인간관계란 본래 다방면에 걸치고 또 많은 공을 들여야 발전하는 것이다.  이제 계약을 맺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으며, 그것은 깨는 데서도 마찬가지이다. 거리는 더 이상 접촉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 그러나 접촉하고 있다는 것도 따로 떨어져 있는 것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접속되어 있는 것'이 '관계를 맺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 - 하지만 또한 유대를 형성하고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는 훨씬 덜 생산적이다. 156


인간적 관심과 학습 노력이 가상적 종류의 인접성에 흡수될수록 다른, 즉 비-가상적 종류의 인접성이 요구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행사하는 데 쓸 시간은 적어진다. 그러한 기술들은 이제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다. - 잊히거나 무엇보다 배우지를 않으며, 그나마 사용하는 경우도 마지못해 그렇게 할 뿐이다. 부득이 그러한 기술을 사용할 것이 요청되는 경우에도 어색하기 짝이 없고, 심지어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도전이 되고 만다. 그래서 가상적 인접성이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된다. 가속화되면서 걷잡지 못한다. 160


"네트 net의 젖을 뗀 세대가 막 테이트를 시작할 나이가 되자 인터넷 데이트도 대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최후 순이 아니다. 그것은 여가 활동이다. 오락이다." 161

 

시장과 사회

 

시장 사회에서는 온갖 경우에 돈의 주인이 바뀐다. 로우가 수집한 신랄한 사례 몇 가지만 언급해보자면, 어떤 사람이 환자가 될 때 도는 교통사고로 자동차가 수선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을 때 돈의 주인이 바뀐다. 또는 이혼 소송에 대한 변호사 수임료가 인상되었을 때도 그렇고, 수돗물이 음용 기준에 미달되어 사람들이 필터를 사서 설치하거나 생수를 구입해 마시기로 작정했을 때도 그렇다. 이 모든 또는 이와 비슷한 경우에 GNP는 증가한다.  165 그리고 이를 보고 여당 정치인들이나 그들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경제학자들은 함께 박수를 치며 기뻐한다.


시장 경제 이론가들이 '경제를 계속 굴러가게 하고', 경제 성장의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주목할 만한 유일한 인간 유형은 '경제적 인간'이다. - 즉 외롭고, 병적으로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지며, 자기중심적인 경제적 행위자로 '합리적 선택'에 의지해 최고의 거래를 추구하며, 금전적 이익으로 옮길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러한 덕성들을 공유하는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찬 생활세게 속에서 살아간다.  시장 경제의 실천가들이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하려는 유일한 인간 유형은 '소비하는 인간'이다.- 즉 좋은 물건을 싸게 사는 것을 외로움에 대한 치유책으로 선택하고 그 밖의 다른 치료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는 외롭고 병적으로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자기중심적인 쇼핑객이 그들이다.....현대 초기의 특성 없는 인간은 이제 유대 없는 인간으로 성숙했다. (또는 밀려났다.) 169


시장에 의한 정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회색지대'로 보이는 것은 그처럼 정복당한, 또는 부분적으로 정복되고 정복당한 주민들이라고 지정된 사람들에게는 공동체이고 이웃이고 친구들 집단이고 삶의 동반자들이다. 이 세계에서는 연대와 공감과 나눔과 상부상조와 상호 연민이 합리적 선택이나 사리의 추구를 정지시키거나 밀어낸다. 이 세계에서 거주자들은 경쟁자도 또 사용하고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함께 만들어나가고 함께하는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함께 노력하는 동반자들이다.  172

 

사회와 변화


사유능력과 반역능력 - 코뮤니타스는 좋든 나쁘든 모든 소시에타스라는 구름의 안감이다. - 만약 코뮤니타스가 없다면  그러한 구름은 사라질 것이다. 소시에타스는 이음매가 풀어지면서 흩어져버릴 것이다.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을 따르는 소시에타스와 무정부적인 코뮤니타스가 마지못해 그리고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함께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질서와 무질서는 구분될 수 있다.  177


코뮤니타스(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소시에타스도 마찬가지지만)의 생존과 번영은 인간의 상상력과 발명심 그리고 상투적인 일상성을 깨부시고 시도되지 않은 방법들을 시도해보려는 용기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리스크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떠안을 수 있는 인간으 능력에 의존한다. 바로 그러한 능력들이 '도덕 경제', 즉 서로 돕고 보살피며, 타자를 위해 살고, 상호 헌신의 조직을 짜내며, 인간들 간의 유대를 단단히 하고 수리하며, 권리를 의무로 해석하고 모두의 운명과 행복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 - 즉 뚫린 구멍을 막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구조화 작업이 방출한 홍수를 막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이런 것들을 지탱해준다  178


시장의 주된 공격 대상은 생산자로서의 인간이다. 완전히 정복되고 식민지화된 곳에서는 오직 소비자로서의 인간만이 영주권을 부여 받는다. 삶의 조건을 공유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존재하는 가내공업은 쇠락하고 해체될 것이다. 삶의 형식들 그리고 그것들의 토대를 이루는 파트너십들은 오직 상품 형태로만 성립하고 존속 가능하다. 질서에 집착하는 국가는 무정부 상태(이것이 코뮤니타스의 등록상표이다.)와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고)싸웠다. 그것이 권력이 지지하는 틀에 박힌 일상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윤에 집착하는 소비 시장 역시 그러한 무정부 상태와 싸우고 있는데, 그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의 생산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부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자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79

 

 

3. '내 이웃을 사랑하기'는 왜 그렇게 어려울까?


어떤 고통의 울부짖음도 한 사람의 울부짖음보다 더 클 수 없다. 또한 어던 고통도 한 인간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클 수 없다. 지구 전체라도 한 영혼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193


인간의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이란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단 한 가지 가치를 살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상이한 교환권일 뿐이다. 다른 인간 존재 속에 들어 있는 인간성을 죽이고 생존하려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죽이고 살아남으려는 것이다. 195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러한 부정을 통해 내세우려는 어떠한 명분의 가치도 신뢰성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어린아이가 고통을 겪는 것은 수백만 명이 고통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가치의 신뢰성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불신하도록 만든다.


삶이란 살아남는 것에 관한 것이다. 강자가 살아남는다. 먼저 공격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강자인 한 약자에게 무슨 짓을 했든 처벌받지 않고 빠져나갈 것이다. 희생자의 비인간화는 희생시키는 자도 비인간화시킨다 - 도덕적으로 황폐하게 된다. - 는 사실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일로 치부된다. 즉 조용희 넘어가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중요한 것은 정상에 오르고, 정상에 머무는 것이다. 생존 - 살아남는 것 -은 분명히 생존에 몰두하는 삶의 비인간성에 의해 손상당하거나 오염되지 않는 가치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추구할 만한 것이다. - 홀로코스트의 교훈 200


이런 식으로 저지르는 잔혹 행위의 목록이 늘어나면서 희생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그것을 듣지도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점점 더 단호하게 그것을 적용할 필요도 늘어난다. 그리고 오래된 수법들은 상투적인 것이 되고, 그것들이 목표물에 심어놓은 공포가 잦아들게 되면 새롭고 훨씬 더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한 방책들을 열렬히 찾게 된다. 201


티브이 메시지는 삶이란 냉정한 사람들을 위한 냉정한 게임이라는 식으로 계속된다. 게임은 늘 맨 처음부터 시작되며, 과거의 장점들은 중요치 않으며, 마지막 싸움의 결과에 모든 게 걸려 있다. 선수들은 매 순간 철저히 혼자이며, 정상에 오르거나 일단 전진하려면, 살아남아 성공하려고 열망하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 먼저 협력해야 한다. 205..타자란 최우선적으로 경쟁자들이다.


젊은 이들은 뭔가 수긍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쿨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동과 상호작용이 이와 다른 어떤 특징을 가졌든 상호작용이 관계를 데우거나, 특히 따듯한 상태로 남아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쿨한 상태로 남아 있는 한에서만 OK이다. 또 쿨라다는 말은  OK란 의미다. 어느 순간이든 상대방이 당신이 동의하든 말든 둘 사이의 관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감정을 모두 현재의 관계에 투자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짓이다. 파트너 관계에 강력한 감정을 투자하거나 그러한 관계에 충실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떠안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당신을 상대에 종속시킨다. 209


도덕이란 선천적으로 유발되는 인간성의 발현일 뿐이다. - 그것은 어떤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으며 이익, 안락, 영광 또는 자기 지위의 향상에 대한 기대에 의해 인도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객관적으로 선한 행위들이 종종 이득에 대한 행위자의 계산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런 식의 동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적 행위로 분류될 수 없다. 214


우리 조상들에게는 멀리 떨어져서도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가 별로 없었다 - 또 손에 쥐고 있는 도구로는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이 고통당하는 장면에 노출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우리 조상들이 직면했던 도덕적 선택 전체는 직접성, 즉 얼굴과 얼굴을 맞댄 만남과 상호작용이라는 좁은 공간에 거의 완전히 갇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은 - 그러한 것에 부딪힐 때마다 - '삶의 주권적 표현'에 의해 고무되고, 영향받고, 원리상으로는 심지어 통제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윤리적 명령의 침묵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숨이 막힐 듯하다. 220


새로운 글로벌 엘리트가 과거에는 이런저런 일로 얽혔던 지역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고, 그렇게 분리된 사람들의 주거 공간과 체험 공간 그리고 뒤에 남겨진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는 것, 익서이 아마 분명히 현대가 '부동적' 단계에서 '유동적' 단계로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 가장 획기적인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벗어남의 출발점일 것이다. 225


오늘날 글로벌화하는 세계에서 정치는 점점 더, 열렬히, 자기 의식적으로 지역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쫓겨나자 또는 접근이 막히자 정치는 뒤로 몰러나 지역 문제나 이웃과의 관계처럼 '손에 닿는' 문제로 되돌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러한 문제들만이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고', 영향력을 미치고, 고치고, 개선하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쟁점들처럼 보인다. 오직 지역적인 문제들에서만 우리의 행동이나 비-행동은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반면 다른, 소위 초지역적 문제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다. 그리하여 결국 유감스럽게도 동원할 수 있는 수단과 자원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또는 아무리 합리적으로 무엇을 하든 또는 아무리 합리적으로 무엇을 할지를 심사숙고해도 세상일은 원래 그대로 흘러갈 것이라고 의심하게 된다. 229


도시는 글로벌하게 배태된 문제들을 쏟아 붓는 쓰레기 매립장이 되었다. 도시의 거주민들이나 그들의 선출된 대표들은 점점 더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도저히 풀 수 없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글로벌한 모순들에 대한 해결책을 지역에서 찾는 일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카스텔스가 지적한 역설이, 즉 "점점 더 글로벌한 과정들에 의해 구조화되는 세계 속에서 정치는 점점 더 지역적인 것"이 되는 역설이 나타난다. "과거에는 의미와 정체성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즉 내 이웃, 내 공동체, 내 도시, 내 학교, 내 나무, 내강, 내 해변, 내 교회, 내 평화, 내 환경." "전 지구적인 회오리에 속수무책인 사람들은 자신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점점 더 자신에게 집착할수록 전 지구적인 회오리에 점점 더 속수무책으로 되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적인 - 표면상으로 자기 자신 - 의미와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서도 그만큼 더 무기력해진다는 점을 지적하기로 하자 - 글로벌한 조작자들은 너무나 기쁘게도 말이다. 그들이 속수무책인 사람들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을테니 말이다. 230


제이콥스는 도시의 특징인 부산함의 기본적인 원인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순수한 밀도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도시 거주자들이 반드시 다른 인간들보다 영리한 것은 아니다. = 그러나 공간 점유의 밀도는 욕망의 집중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다른 곳에서 제기되어본 적이 없는 질문들이 도시에서는 제기되고, 다른 조건에서는 처리해볼 기회조차 없던 문제들이 나타난다. 문제에 직면하고 질문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며, 인간의 창의성을 전례 없는 길이까지 늘인다. 237


이방인과 가까이 사는 것은 운명으로, 그러한 동거가 마음에 들고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실험되고 시도되고 검증되고,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필요는 '주어진 것'으로, 협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도시 거주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착수할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은 매일 행해진다.-일부로든 아니면 깜박해서든, 고의로든 약속의 불이행에 의해서든 말이다. 241


'미끈거리는 공간'은 "접근로를 일그러뜨리거나 길게 늘이거나 아예 없애버려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다. '꺼끌꺼끌한 공간'은 "벽에 설치한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배회하는 사람을 몰아내고, 않지 못하게 튀어나온 바위 등으로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쉽게 엉덩이를 붙일 수 없게 만든 공간"을 말한다. '조마조마한 공간'은 "사방을 돌아다니는 순찰과 또는 보안관제소의 원격 기술로 적극 모니터링하기때문에 감시당하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다. 이와 그 밖의 다른 종류의 '금제 공간'들은 복합적이지만 그 목적은 오직하나이다.....지역에 기반해 모두가 공유하는 공동체적 삶의 해체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었다. 247


혼재공포증의 뿌리들은 평범하다. - 어디 있는지 찾기가 어려운 것도 전혀 아니다. 용인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해하기는 쉽다. 세넷이 말하는 대로 "끼리끼리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는 '우리'라는 느끼은 서로를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성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 이것은 어던 정신적 위안을 준다. 즉 함께 어울려, 차이와 함께 살 때 요구되는 이해하고, 협상하고, 타협하는 노력을 없애버림으로써 함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훨씬 더 견디기 쉽게 해줄 수 있다.  249


세넷은 혼재공포증의 유해한 결과가 왜 그런지, 아니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도시들은 인종별로 지역이 상대적으로 동질화되는 방식으로 성장해왔다. 그리하여 이러한 인종별 공동체들이 서로 격리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단일한 환경 속에 - 아무렇게나, 있는 그대로 즉 오해라는 위험을 초래할 필요없이 그리고 안전하게 구분되는 의미의 세계들 사이를 번역하느라 귀찮게 애쓸 필요없이 '사귈 수' 있는, '우리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무리를 이루어 - 오래 머물러 있을수록 공유하는 의미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협상하는 기술을 그만큼 더 '배우지 않게 '되는 것 같다. 250


혼재애착증은 혼재공포증과 마찬가지로 자가 추진적이고, 자가 선전적이며, 자가 활력적인 것처럼 보인다. 두 가지 모두 도시 재건이나 도시 공간의 재건축과정에서 소진되거나 활력을 잃을 것 같지는 않다. 혼재공포증과 혼재애착증은 모든 도시에 공존하며 모든 도시 거주자 내부에도 공존한다. 잘 알려진 대로 그것은 불편한, 소음과 분노로 가득한 공존이다. (도시의 스펙터클에 흡입) 253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지적해 유명해진 대로 상호이해란 '지평들', 즉 인식 지평들의 '융합'으로 촉발된다. - 이 지평은 삶의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확장된다. 상호이해가 요구하는 '융합'은 공유된 경험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공간의 공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가다머의 가설에 대해 마치 다량의 경험적 증거를 제공하기라도 하듯 사업상 여행을 자주하는 사람들이나 지금 막 등장 중인 전 세계를 누리는 엘리트 또는 '글로벌 지배 계급'들이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 또는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같은 바에서 한잔 하는 것처럼  단순히 공간을 함께 이용하거나, '어울리거나', '함께 지내거나' 하기 위해 만약 그러한 공간들이 아니라면 이들은 서로 갈라졌을 것이며, '우리는 하나'라는 정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256


도시에만 국한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적 모순들과 기능 부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지금까지 우리는 어디서고 통제해야 할 힘들의 규모와 잠재력에 걸맞은 민주적 통제 수단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고사하고 고안해내는 것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지역적 훈련이후 상호 적대성도 더 이상 얼핏 보기보다는 그리 다루기 힘든 문제로 여겨지지 않으며, 무력 충돌만이 상호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가다머의 '지평들의 융합'이 만약 도시의 거리들에서 추구된다면 한층 더 현실주즤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새로운 글로벌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특히 여기에 효과적으로 맞서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 인간의 조건이 실로 심대하고 분수령 같은 변형을 겪을 때는 항상 그랬듯이 말이다.....드라마는 두 개의 공간에서 무대에 올려지고 플롯이 짜일 것이다. - 글로벌한 장면과 로컬한 장면이 그서이다. 두 무대의 작품의 대단원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고, 또한 성공 여부는 각 작품의 대본 집필자와 배우들이 그러한 연계성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능숙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다른 작품의 성공에 기여하느냐에 긴밀하게 달려 있다.261-263

 

 

 

 

 

 

 

 

 

볕뉘

 

표지와 뒷표지를 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궁금했는데 부제 "현대의 우울과 고통의 원천"에 가깝다. 리차드 세넷의 도시의 삶의 시각을 넓혀주면서 가다머의 지평들의 융합이라는 해석학적 실천론까지 결합시키고 있다. 삶은 점점 비참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지만 21세기는 저자의 말대로 휴머니즘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노장은 사랑과 섹스, 도덕, 네트워크, 경제, 인간, 삶에 대한 암시를 무척 다양하고 풍부하게 준다.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라도... ... 꼼꼼히 읽어보시면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정작 중요한 어떤 기술을 놓치고 있는지 살피게 될 것 같다. 두서없이 정리해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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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 황해문화 편집장의 이야기를 듣다. 한마당 열소리부터 글쓴이들의 발굴과 관리,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을 건네듣는다. 편집위원, 편집주간, 기획위원 관리 등 이야기를 들을수록 일의 밀도와 정해진 원칙,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기위한 흔적, 글쓴이와 밀당 과정이 생생해져 보기 좋다.  학술지와 저널의 사이를 목표로 해온 일들을 평가하면서 다른 것을 보는 찌르는 창이기보다는 여러가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자평도 듣다.

 

황해문화가 자리잡는 과정은 오히려 새얼문화재단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자연스럽게 일을 주고받는 과정이나 행사진행과 후원자를 챙기는 과정, 나름대로 틀이 잡힌 모습이 조금씩 잡힌다 싶다. 전날의 취기로 몹시 힘든 하루이기도 했지만 바람구두로서 알라딘서재의 활동이나 풍소헌의 친구로 있던 고선생님 덕분에 또 다른 인연을 나누게 된다.

 

시민운동은 죽었다. 사회운동은 명멸했다. 새정련이 사회운동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당보다 정치인의 앞가림을 위해 자기 살길에만 급급한 현실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확인시키는 것이 도리일까? 아니면 고양이 목에 방울다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인가?

 

여기는 섬이다. 고립되어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아카데미에서도 많이 회자되던 이야기를 그가 다시 짚는다.  섬사람들이나 반도에 있는 사람들의 잔혹한, 잔인한, 끝까지 밟고 살아나야만 산 것으로 치는 현실 말이다.

 

황해란 황해도의 황해가 아니라 지중해와 같은 개념이라한다. 서울도 지역의 하나일 뿐이다. 여기저기 모두 지역이란 개념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블로그 수준의 글들을 또 다시 잡지로 만든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인가. 이북이나 다른 형태로 가고 있기도 한데 광고수주나 운영에 걸려 오프지를 추구하는 것이 합당한가. 한번 만든다면 사람들을 바짝 긴장시킬 또 다른 형태의 펑크, 위압을 담아버리는 잡지정도여야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피력한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원칙에 따라 어제 먹으나 오늘 먹으나 나중에 먹으로 유사한 품질을 보유하는 능력과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히 질 또한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관리할 수 있는 순간에 권력이 생기는 것이며 상대는 의식하게 된다. 문화권력의 출현과 시작은 되었다. 하지만 양과 질을 담보하기에는 이것저것 보듬을 일들이 많은 것 같다. 참고지점을 이렇게 둔다. 어떻게 다른 분들은 받아들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덧붙임 

 

만부정도 발행부수, 계간지로는 창비 다음으로 부수가 많다. 회원 3천부 플러스 천부정도 소화하고 판매가 9천원으로 재단 회원가입을 유도하는 편이다. 년 2억정도 예산이 들고 있으며  4천여명되는 회원구조, 광고수입등으로 부족하지만 충당하고 있다.  회비의 구조는 파레토법칙과 마찬가지로 회비8:2가 2:8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에 걸맞게 음악회, 역사기행 등은 행사에 VIP 회원은 별도로 관리를 한다.

 

편집 마감일은 꼭 지키는 편이고, 편집방향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원고료는 지불하고 싣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편집은 편집장과 편집부장 2인이 하고 있다. 사무국과 관계는 회사 홍부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도와주면서 거꾸로 황해문화의 실무적인 일을 도와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편집위원과 편집주간, 별도의 기획의 경우 상대적으로 월정액, 플러스 알파를 주면서 도움을 받고 있다. 편집주간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현 현 주간은 무림학림 학생운동 출신으로 방향과 운영측면에서 잘 맞는 편인 것 같다. 원고료는 원고지 한매당 8천원, 정해진 매수를 넘길 경우 한계를 두고 정하고 있다. 각주도 가급적 달지 않고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편집원칙을 두고 있다.

 

매월 조찬강연도 역사기행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시각에 시작하며 자리를 잡아 년초에는 시장이 하는 것으로 관례화되어 있다.(강연책자 참고) 지역 유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선을 긋고 만나지는 않는다. 행사의 내빈 소개는 사무국에서 일일이 꿰고 있을 정도로 잘하는 측면이 많다. 역사기행도 기장, 시관계자와 자연스런 자리를 마련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서비스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공연의 경우도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 신경쓰고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공유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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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같이 일하면서 - 늘 우리는 주변에 있음을 느낀다. 어둠과 밝음, 차거움과 뜨거움의 경계. 부잣집에서 아무 문제없이 착하게 큰 아이들이기보다는 변두리에서 삐둘어지기 직전의 기질이 남아있는, 보기좋게 야생성이라 불러주자. 제대로된 일터에서 부대끼면서 근무한 경험도 없다. 후줄근한 틀이 잡히지 않는 일상과 습속의 경계에서 막 사회로 복귀한 사람들처럼. 순간 무너지거나 불안을 안으면서, 예의도 없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지지리 못난 양아치 비슷한 구리구리한 것들이 풍기기도 한다.

 

중심이 되어보지 못한, 피해의식은 한바가지씩 갖고 있고, 그래도 중심이 되지 않으면 불안한 인간들. 발굴한 것인지 발굴당한 것인지. 그 틈바구니에 밀리고 부딪치고 뒤돌아서면 또 원점들인 그런 감정들의 숲과 일사이를 거닐었던 것 같다.

 

아웃사이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높게 값을 불러주는 것이고, 지지리 궁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값을 낮게 부르는 것이어서 참 적절하게 부른다는 것이 어렵다. 왜 그들에게는 성인기가 사라져버린 것일까? 표현의 총합이 모임이나 조직에 늘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관두거나 네가 나가거나 극단의 표현과 무시가 감정의 온도가 끓으면 되풀이 되는 것일까? 왕년의 한자리가 기억과 몸을 정신 못차리게 해버린 것일까? 너무도 자주 쉽게 우울과 습자지 같은 현실의 벽에 닿는다. 비가 오면 쉽게 습기를 머금는다. 우울이 배인다. 도모하기보다 도모의 선순환으로 다가서기보다 일일 날품팔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진폭이 크다.


모르겠다. 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답인지. 또 누가 드나들다 지쳐버리는 것인지. 애초 각이 잡히고 폼이나고 든든함을 바탕으로 좀더 길고 멀게보면서 가는 일은 또 다른 이의 몫이었는지. 몫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감정의 기울기와 진폭, 모임의 하늘에 구름들이 자주 배회해서 편치 못하다. 그래도 해내고, 해왔고, 포복으로 기기도 하고, 기게하고 그런 것이지만 배가 부르니 눕고 싶다. 피해자 의식은 너무도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우라가 다른 일상이나 일의 경험이 없어 그러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끼리끼리, 모둠의 틀에서 깨어나지 못해 그것에 오랜 기간동안 갇혀 있었다는 것을 벗어난 뒤에서야 알았으니 그리 탓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참 여운이 많다. 지금까지. 관계도 일도, 여러 매듭도, 관계의 유지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


3. 숙부 납골함을 조부모 산소에 이장하다. 숙모가 몸을 많이 회복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오랜만에 사촌동생들 식구를 본다. 이런저런 소소한 일로 인해 부부싸움도 하시고 어르신들이 언쟁도 벌이신다. 도토리로 다듬고 방앗간에 빻고 나르고 잘 맞지 않아 내년에도 이러면 이혼장을 쓰겠다는 팔순 부친. 그래도 좋아 보인다. 마음 놓고 내려오는 길 내내 달빛이 따라다닌다. 밤도 익어 경주 가로의 단풍도 출렁거려 좋다.

 

 

볕뉘. 87년체제, 97체제, 2013년체제. 어쩌면 다 소용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류하고 모으고 이름을 부르고, 그런데 그것이 담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왜소해 보인다. 여전히 또 다른 모습으로 이름은 불리우지 않았지만 체제로 존재하고 흐른다. 어쩌면 앎과 이념의 하위자로 상정하는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활동하는 사람들의 일상이나 삶이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목적, 해야할 일에 먼저 방점이 찍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운동은 조직의 명분과 일이 먼저였지 삶을 놓고 삶으로 더 다가가려 구체적으로 노력한 적도 없다. 조직의 심장은 언제부턴가 뛰지 않았다. 관성대로 그저 갈뿐, 심장이 뛰지 않는 이유에 대해 되묻지 않았다.  들숨만 있을뿐 아주 작은 날숨의 소리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존재의 위치가 정해졌다는 사실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우고 때론 목소리를 강하게 높인다. 숙부 유골함속의 뼈가루가 습기를 머금고 있다. 소나무로 서서히 스며들 것이다. 누군가, 나도 어느 순간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장담할 수 없다. 삶은 계속되어 왔던 것처럼 또 누군가 삶을 이어갈 것이지만, 아무도 삶을 건드리지 않는다. 아무도 삶을 건네지 못한다. 아무도 삶을 건네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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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17: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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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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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1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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