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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4-11-2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선운사 처마인가요. 저 곶감들은. 마음에 쿵 다가오는 풍경이네요.

여울 2014-11-21 15:47   좋아요 0 | URL

곶감들도

마음에 쏘옥 들어오는 가을녘이네요. 좋은 나날 되세요.
 

모서리

 

페미니즘의 도전 이후, 여성학자라는데 선입견을 잡혀 있었나보다.  책 제목도 정희진처럼 읽기라고 해서 출판사 기획이 아닌가하는 오해까지 겹쳐져서 책을 조금 멀리 떨어뜨려 놓고 있었다.  책이 앞뒤로 개인의 책이력과 성장 과정, 책을 대하는 모습들을 살펴보면서 그런 근거없는 편견은 사라졌다. 이렇게도 모르고 있다니 스스로 한심해지는 것이다. 

 

여성학자라기보다는 평화학자로 읽힌다. 그러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전천후 독서가 필수적이고 몇차례 책를 다루는 산고를 겪는 과정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책읽기는 연애다. 책은 도끼다. 하지만 이렇게 아프게 읽는 이가 있을까 싶다. 비판의 날은 늘 서있다. 그녀는 책읽기를 강을 건너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여울을 건너기 위해 발을 담그기도 해야 하고, 어쩌면 몸을 담그기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로는 몸을 맡기면서 헤엄을 쳐야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말은 참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늘 뼈아픔이 스며있다는 것이다.

 

고통스럽다. 책갈피를 붙여두는데 여기저기 붙어있다. 공감이라기 보다는 이해하지 못해 절감하지 못해 붙여두는 것이다. 나는 남자다. 그녀의 말대로 결핍을 결핍한 존재다.  포말이 일지 않아 스스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습속이 배인 남성이다. 그녀가 말한다. 제주도 민박집에가서 주인이 아침에 내놓는 밥상을 받으면서 생각한다. 하루종일 뭘해먹일까 걱정하는 여성의 삶에서 아무 생각하지도 않고 때만 되면 나오는 밥상을 누리는 권력을 왜 마다하겠는가 하고 말이다.

 

진보의 시선은 늘 비장애인, 주류의 평균적인 삶에 고정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국익을 이야기하고 경제 성장을 일차적으로 생각하는 우파와 같은 발전주의자다라고 한다. 그녀는 독후 감 사이사이 가해자와 피해자, 악의 규정 등등 권력관계에 미묘하게 생각에 쪼임새를 넣고 틈을 벌린다. 군사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생동감이 있다.  강자와 악은 그저 아무 생각없이 벌리고 했을 뿐이다.  약자와 피해자는 거기에 왜 그랬느냐고 물음표를 던지고 해석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는 순간 약자의 비극과 비참은 더 자신을 조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중적인 위계와 관계, 그 언어를 명민하게 살핀다.

 

책의 절반을 펼쳤다. 고통, 주변과 중심만을 접어두고 보면서 책속의 책을 담아둔다. 저자가 재추천하는 책들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은 많이 권했다. 사실 여성학이 아니라 읽는 내내 진보라는 관점으로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마음은 주류에 걸쳐있지 않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비주류로 중심이 내려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영원히 진보는 발전주의에 사로잡혀 민주주의로 내려오는 길도 모르리라. 저자가 말했듯이 남성이 여성만큼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이상,  이 노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인류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나는 헛똑똑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빌미 삼는다. "중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깨달아가는 삶"이라는 말에 조금 위안을 삼아본다. 

 

멋진 사람이다. 

 

 

 

 


 

독서가, 조금 '다른 책'이 나한테 확신과 자신감을 준 것은 여성학 책을 통해 획득한 위치성때문이다. 위치성은 구조(역사, 사회, 상황 ....)속에서 나를 알고 상대를 아는 방법이다. '식민지 민중'인 나는 파농의 말대로 나의 언어와 지배 언어 '2개 국어'를 구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35


여성학은 프로이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두 기둥으로 삼고 생물학, 문학, 인류학, 지리학, 역사학, 의학 등 망라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실제로 서구 여성주의자들의 전공은 신학, 핵물리학, 정신분석, 영장류 동물학, 군사학 등 다양하다.  36


고 3때 성적으로 위계화되는 이 사회, 우리는 창피해야 한다. 근대성, 합리성까진 기대하지도 않는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모태 차별 사회이고, 그것을 '실력'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학별은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신분 사회이고 인종 사회다. 38


나는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정체화하거나 특정 분야의 전공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기 탐구와 지적인 호기심이 많은, 반정공주의 입장을 지닌 시민이다. 40


 

고통


저는 그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을 피해자의 어깨에 옮겨 놓고, 불가능을 감상한다. 평화가 할 일은 그 짐을 제자리로 옮기는 고된 노력이지, 평화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45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 -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 공감, 수용받고 싶은 욕구는 생존에 필수적이다.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살하기도 하는 관계적 존재다. 소통을 위해 죽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도 잘못된 선택도 아니다. 이 책 페이지마다 나오는 말, 정신 질환을 앎으면서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 죽도록 아픈데, 아니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인데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울증은 살아 있는 죽음이다. 살아 있는 죽음을 살 것인가, 죽음으로써 살 것인가.....경쟁과 생산력 중심 사회에서 머리가 아픈? 마음이 아픈? 아니 몸이 아픈! 사람들은 '진정한' 낙오자로 간주된다. 달리기하다가 넘어진 것이다. 흔히 사회적 소수자로 나열되는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들은 '타고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물론 그렇지 않다) 관용하는 측면이 있지만 건강 약자에게는 안도감과 공포가 뒤섞인 마음에서, 선을 긋는 가혹함을 보인다. 중년 이후의 정신 질환자에게는 특히 그렇다. 51


경험한 나, 말하는 나 -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차별을 받았을 때 우리는 갈등한다. 고통과 억울한 심정을 타인에게 말하고 싶지만(하소연이라도 실컷 해봤으면) 내 처지를 수용해줄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더욱이 상황이 개선된다는 보장도 없다. 소문만 나고 결핍된 인간으로 취급받을 위험이 더 크다. 53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다."라는 목소리는 보편적 인간 조건을 극복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한다. 슬픔에 저항하지 말고 느끼고 통과하라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다'는 우리말은 정확하다. 몸이 슬픔에 잠겨 눈을 뜰 수도 없고 숨을 쉴 수도 없는, 살아 있는 죽음의 시간을 겪는 것이다. 고통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 이것이 국가 간의 평화든 마음의 평화든, 평화를 논의하는 전주이다. 58


파이이야기 - 사람은 인연 덕분에 산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스스로 부여한 의미일 뿐 자연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최대치의 관심이라고 해봤자 '너희는 지구의 재앙이야' 문명대 자연 이런 문법은 없다. 우리는 모든 인식 대상에 그렇듯 자연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안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알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없다....그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자연은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닐까  68


생존자라뇨? - 누구의 인생도 피해 경험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동시에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나 지칭이 될 수 없다. 타자화하는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이다. 내용의 호오가 본질이 아니다. 어머니 숭배와 '창녀' 혐오는 모두 남성 사회의 판타지다.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여성을 이분하여 시민권 박탈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성은 '아버지와 남창', '곰과 여우'로 구분되지 않는다. 70


성 판매는 당연히 노동이다. 그것도 위험한 중노동이다. 그러나 나는 '성 노동'에 반대한다. 노동이되 '어떤 노동'인가, 수천 년간 왜 '여성 직종'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너무 오래된 노동을 두고 '노동이다 vs 아니다'를 논하는 이 사회의 지성이 민망하다. .............여성은 '생존자'보다 '성 노동자'라는 정의에 더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말한다. 나는 성 판매가 기존의 노동 범주에 포함되기보다는 노동 개념의 변화를 촉진하는, 새로운 문제 제기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대다수 민중에게(나에게) 노동과 폭력, 괴로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문맹을 포함해 누구의 언어도 투명하지 않다. 문제는 약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공유되고 논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역량이다. 71


손무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공상이다. 생각은 몸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안 따른다는 말은 이상하다. 머리(의식)도 몸이다. 의식은 몸의 어느부위인가? 그런 부위는 없다.(몸은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몸은 사회적 위치성과 당파성의 행위자다. 예를 들어 '산업재해 당한 몸', '노동하는 몸', '성 폭력을 겪은 몸'에서 시작하는 삶, 이것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몸과 의식은 하나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그것은 모두 몸이다. 74


벼랑에서 만나자 - 제도 (가족주의, 동창회.....)적 관계만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계층별 유유상종이 아닌 만남은 시간 낭비를 넘어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스스로 격자에 갇힌 것이다. 이해 관계든 진실한 관계든 어차피 모든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영원한 관계는 두 사람이 동시에 동작을 멈추거나 끝없는 자기 갱신의 매력이 교환될 때 가능하다. 전자는 죽는 것이고 후자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끔찍한 관계를, 제도의 천막으로 대충 가리면 산다. 외로움은 이 풍경의 상처다. 인맥 관리, '밀당', 포커페이스....몸 사리고 계산해봤자다. 남김없이 준다고 해서 바닥나는 마음은 없다. 그러니 목숨처럼 해다오.  77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 사랑한다는 것은 약점이다. 사랑이 내 몸에 거주하는 것은 축복이지만 연결되고 싶은 욕망은 지옥이다. 이 마음 자체가 '을'인데 만일 성별, 나이, 계급, 외모 같은 자원에서도 차이가 난다면..... 그 괴로움, 그 부끄러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몸에 접촉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공간에 사는 방법은? 보내지 못한 편지, 멀리서 바라봄, 생각, 생각, 생각....나는 열등하므로 통화는 위험하다. 받지 않을 신호를 계속 보내는 것만이 행복과 안전을 동시에 보장받는 길이다. 80


죽음의 공포는 고통의 공포보다 크지 않습니다 - 2014년 2월에 일어난 '송파 세 모녀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감은 그 고통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대립 대신, 고통에 대한 이해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져야 한다. 삶의 반대편에 죽음을 상정하여 '없는 죽음'이 '있는 삶'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안보이데올로기 처럼) 83


 

주변과 중심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평화 혹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얼룩진 옷'을 벗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외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잘못 알고 잇다. 행복보다 괴로움이 안전하다. 행복은 지켜야 하는, 피곤한 것이다....재해석은 상호 역사를 모두 고려하는 개입이요, 생각하는 노동이다. 88


"타자를 만지고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이 글의 제목은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89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 '사자'의 요구, 무례, 폭력, 게으름은 꿈쩍하지 않으므로, 살아남기 위해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교정한다. 그들은 작은 침대를 바꾸지 못하고 자기 발을 스스로 잘라야 하는 처지다. 가벼운 예는, 연애를 시작할 때 여성이 외모 관리를 필두로 해서 대대적인 자아 구조 조정에 들어가는 경우다. 이처럼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문제는 한없이 복잡하다. 가정 폭력처럼 사자에게 맞춰 산다고 해서 뜯어 먹히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91


권력 관계가 지배자의 성찰로 뒤바뀌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모든 권력 관계에 해당한다. 인간은 요구나 투쟁이 아니라 상대방이 기존과는 다른 반작용(re/action)을 행사할 때 변화한다...구조에 편승한 이들의 변화는 약자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이 기대하는 익숙한 패턴을 파괴하는 것이다 91


시집을 뒤적이다. [사랑법 첫째]라는 시에 연필을 꽂아  둔다. 관계, 즉 권력의 본질을 아는 순정한 사람은 사랑에도 통달하는 법이다. 시의 전문. '그대를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아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하여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놓습니다." 92


"내게 설명해줘!" -  상대에게 떠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실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사실 진짜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오하지 않다. '피해자'에게 관심도 없다.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 약자가 될 뿐이다. 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트라우마는 '가해자'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같은 것은 필요 없다. 95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왜?"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됨'의 진정한 의미, 불행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당하는 것을 넘어 사로잡히는 것이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사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101


성의 변증법 - 부모 사랑 금기는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 동성애 혐오를 낳았다. 파이어스톤은 이 세 가지 억압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기본 장치이며 가족 폐지를 통한 근친상간 금기의 종식은 성, 계급, 차아 개념을 바꾸는 인류의 혁명을 가져올 것으로 보았다. 현재 가족은 계급 우월과 인생 성패의 기준으로 절대시되고 있다. 가족 제도가 만악의 근원이라거나 인간이 발명한 가장 폭력적인 행위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필요한 것은 가족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장 인위적인 제도라는 인식이다. 104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 - 정체성의 정치란 이런 것이다. 강자가 자기 사람 챙기는 것은 도리요 의리고, 약자의 그것은 비리다. 약자의 단결, 동료애를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강자의 일이란 '경제성장' '정치 개혁' 따위의 거창한 말과 달리 간단하다. 약자가 열등감, 자기 혐오, 자기 검열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여야 성공이다. 106


공포는 존재하였기 '때문에' 지금 존재한다 - 공포는 반응이지 현실이 아니다. 공포는 겁을 먹은 자에게만 효과가 있다. 공포는 가장 강력한 인간의 행위 동기여서 오랫동안 편리한 통치 수단으로 쓰였다...."세계화를 겪는 훈련이 아니라 '세계화로부터 빠져나오는' 훈련을 함으로써 세계화에 부응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지금 이 체제에 시너를 부을 것인가? 폭탄을 설치할 것인가? 자폭할 것인가? 필요한 것은 앎이다. '무능한 잉여'의 유일한 자원은 생각하는 능력뿐이다. 110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 사랑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는 게 사랑인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하라고 해서 하게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공부 모두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양도 불가능한' 한 사람, 개체의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마음의 욕망이다. 현실이 아니다. 사람은 희망 없이 못산다고 하지만 착각 없이, 이데올로기 없이, 통념없이 못 살 뿐이다. 희망보다는 신앙을 갖는 게 낫다. 희망은 관념론이고 신앙은 유물론이다. 113


진보운동과 성평등, 함께 갈 수 있을까 -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 개념은 근대화 시각에서 발전주의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 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북'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가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122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다 - 전선을 구획하는 자가 이긴다. 누가 먼저 어떤 선을 긋느냐. 누가 먼저 생각하는 방법을 창조하느냐. 기존 전선에 걸려 넘어질 것인가. 내가 룰을 만들 것인가. "다르게 생각하라" 강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양극화를 만들고, 약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세상을 이롭게 한다. 기존의 틀에서는 아무리 좋은 전력도 필패다. '쉽고 익숙한' 망을 경계하는 이유다. 126


이 남자들의 공통점 - 인류, 특히 핵가족 출현 이후 역사는 주인공 남성을 보조하는 여성 혹은 백설 공주(비장애인)를 돕는 일곱 난장이(장애인)가 '짝'이 되어 유지되어 왔다. 성별 관계에서 이 착취와 보상(에 대한 기대)은 아내다움, 내조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계급, 인종, 성별, 비장애인 중심주의는 모두 신분 제도로서 '돕다'라는 표현은 틀린 말이다. 133


사회 구성 원리로서 성별 분석이자 관계의 윤리에 관한 질문이다. 문제는, 그래도 되는 사회와 남자다.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134


고물이 보물 -  되려면 사람의 마음과 일이 필수적이다. 내게 별로 득이 되지 않으면서 '주고 욕먹을' 가능성이 많은 일이다. 그게 귀찮아서 다들 그냥 버리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에겐 물건을 새로 사는 게 재활용보다 편하다. 자원을 아끼고 나누는 데는, 노동이 요구된다. 나는 이 노동이 자본주의를 구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이 이미 체제다. 변화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이다. 137


마음 솟는대로 지껄이는 - 언젠가 친구가 "너는 죽어도 내 고통을 모를 것"이라 했을 때 상처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깨달아 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남성는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140


남성이 여성만큼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 한, 그 노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인류의 모든 민주주의는 실패한다. 143


 

 

 

 

 

 

 

 

 

 

 


 

 

볕뉘. 신발끈을 고쳐매고 있는데 참 성큼성큼 멀리도 가있다. 고맙다. 가는 길 사이사이 잡풀이나 숲이 길을 가리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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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삶과 죽음의 대립 대신, 고통에 대한 이해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져야 한다 (1)
    from 木筆 2014-11-24 17:37 
    권력 징병제-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여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문제가 공유되고 약자의 고통이 가시화, 공감, 분담되는 '시끄러운' 상황이 평화다. 지원병제는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조용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징병제보다 무서운 것이 그것이다. 185팍스코리아나 - 어떤 가치도 온 누리에 골고루 퍼지지 않는다. 미국 밖에서 전쟁이 없다면 미국 군수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뻔뻔한 이의 마음의 평화는 억울한 사람이 겪는 마음의 고통의 대가다.
 
 
 

 

삶의 겹침과 공유공간, 그리고 그 자장

 

 

공유, 공동체 다 지나간 말이다. 그것이 가능이나 하겠는가 말이다. 사무실도 구하기 힘들고 전전하는데 그것도 공유공간을 갖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다 쓸데없는 소리다. 공동도 아니고, 공동과 체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붙여서 공동체라? 지금 이 시기에 말이 되는가? 될 수 있나 말이다. 공동체라고 한다면 따로 농사짓고 외따로 떨어져서 활동하자는 소작활동을 말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가? 농촌이라구? 아니다. 도시다. 도시여야 한다.

 

 

1. 도시여야 하지만 도시가 문제다. - 도시의 삶은 섞이지 않는다. 늘 보던 사람들, 늘 정해진 일상의 패턴으로만 간다. 장애인과 노인, 청년과 주부,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삶이 겹치지 않는다. 절실하지 못하고 애틋하지 못하다. 애환을 기저에 담아두지 못한다. 만남은 얇고 일회성이다. 대학이 직업학교가 되어서 과와 과가 단과대학과 단과대학이 만나지 못하듯, 일상과 삶의 아주 작은 부분도 섞을 수 없다. 모임과 모임도 삶을 우려낼 수 없다. 밥이라도 먹고 시간이라도 낼 수 있어야 아주 조금 삶을 모임과 단체에 건넬 수 있다. 바쁘고, 지친 아픔, 그 강도와 농도의 깃발을 흔들 수 없다. 흔들어도 알아줄 수 없다. 다른 삶을 살아본 적도 없으므로 그렇게 삶은 서로 스친다. 맞닿지 않는다.


도시의 삶은 섞이지 않아야 한다. 공간은 모두 열릴 필요가 없다. 숟가락 숫자까지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공간, 탐색의 공간, 사색의 시공간 도시여야만 보장받는다. 밀도높은 과도한 시선에서 나를 유지하면서 너로 다가설 수 있다. 만나지 않고 만날 수 없고 끼리끼리만의 담만 쌓인 일상은 부질없다. 뒤섞기고 섞여 아픔까지 맞닿아 쓸린 상처가 아파야 아마 만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위와 가치를 논하는 사귐보다 처절한 고통을 끄집어내는 것, 아니 그 체념을 내놓고 기댈 수 있을 때야만 만남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우리는 알되 서로 너무 모른다.

 

 

2. 민중의 집 하자는 거야. 그래 민중의집이라도 해야 한다. - 일상이 겹치지 않으면 생각도 겹치지 않는다. 겹치고 다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념과 가치, 신념은 독자생활을 해왔다. 가치와 신념의 자장은 숙연하게는 하지만 그 이상을 넘을 수 없다. 생각과 생각이 만나는 접점은 설득에서 만나지 못한다. 논쟁의 뒤안길이나 그 자장이 옅어질 때 은은하게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와 너가 가까이 있을수록 생각과 생각은 만나지 못한다.  또 다른 너로 매개되거나, 나에게서 바래 멀어진 생각들이어야 조금 이견에 섞일 수 있다. 나만, 너만은 너무도 오래 써먹었던 자긍이자 자만이다. 기획은 싫어도 만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숙성된 생각의 씨앗들이 발화되는 시점은 늘 만남이란 양분과 삶과 격정의 근력을 갖게 된 이후의 일이다. 같은 시공간을 다르게 점유하고 살아내지 못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지금이 허망한 것처럼 앞으로도 허황되다. 다른 시간과 생각을 삭혀내지 못하고 모아내지 못한다. 역사와 맥락은 담기지도 못한다. 그래서 집착한다. 밥이라도 먹어야하고 차라도 마셔야하고 같이 강좌도 듣고 논쟁도 아프게 해내야 한다. 삶의 선술집이 필요한거다. 싸우면 싸울 수록 아옹다옹하는 사이일수록 말이다.  일상의 점유지대가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다 낫다.

 

 

3. 뭘 하자는거야. 많이 해보지 않았는가? 서로 얼굴 한번 쳐다보지 않는데 뭘 하자고 말인가? - 유행에 쫓기지 말자. 유행은 만드는 편이 낫다. 책을 읽어내고, 또 같은 책을 읽고, 또 다른 토론을 해보자고 한다. 진도도 나가지 않는 텍스트를 보고 또 봐야한다고 한다. 그짓을 또 다시 말인가. 그럴 일은 없어야 한다. 이념도 가치도 연연해하지 말자. 가치도 이념도 연연한 꼴이 지금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았는가. 또 설득시켜야 하는 것이 남았는가. 설득당할 사람들과 설득당한 삶들은 없는데.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그것만 비우면 멋진 사람아닌가.  내것과 나의가족에만 머문 적이 없는 사람아닌가. 멋과 맛. 만날 사람들은 내것과 나의가족만 챙기려는 분들이다. 그들의 삶을 탐하면 안되겠는가. 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충분히 멋진데... ...

 

 

 

볕뉘.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가 - 어젯밤 방바닥에 놓인 책들을 추리다가 책이 들어왔다. 어스름도 더 짙은 새벽 책을 들추인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 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라고 서두와 말미에 정희진은 말한다. 

 

독후 감의 한쪽을 펼쳤다.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 '~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나는 누구라는 정체성과 그것을 추동시키는 무엇이 있다는 발상이다. '좌파'를 삶의 부분적 노선이 아니라 존재 증명서(정체성)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더러있다. 이 질문은 처음부터 우문이다. 우답을 불러오는 노동없는 고민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묻는다.

 

"'답'은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다. 의미는 기존에 주어진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찾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도 중단없이 찾아 헤매야 한다. " 이어서 말한다.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라고 한다.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지가 궁금한가? 무지로 산다. 이는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다. 거듭 말하지만,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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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기억의 대안물로 활용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을 텅비게 한다.

 

 

모서리.

 

기술은 설계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기술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대부분 설계자들의 의도를 넘어선다.  왜냐고 묻지만, 답은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설계자의 의도를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 긍정적인 영향만 의도적으로 부풀릴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 기술에는 사람들의 인식이나 문화, 심리적인 요인들이 복합되어 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술에 과도한 혜택을 받은 연유로 기술만 도드라져 보일 뿐 기술의 뒷그림자로 사라지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아 보인다. 기술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영화비평, 문학비평은 있어도 기술비평은 부족하거나 없는 시대의 흐름이 어쩌면 이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싶다. 기술이 목적인데, 그것에 동의하는데 어떻게 비평을 할 수 있겠는가?  자동화가 행위자가 아니라 관찰자에 머무르게 한다. 2차원에서 3차원이 되는 접점. 원근법의 발명처럼 사람과 대면은 없다. 자동화기술은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안심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기술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기술과 사람의 인터페이스, 계면에 대한 긴장을 늦추게 만든다. 긴장을 없애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통찰력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전문가의 위세에 눌려, 누적된 지식의 양에 압박되어서 통째로 보려는 사고나 습관이 바랬는지도 모른다. 삶은 늘 통으로 있다. 삶이 하나하나 분해되고 찢겨나간다면 그것이 어떻게 삶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은 통으로 존재한다. 하늘을 품고 우주를 품고, 우주를 발견하는 만큼 사람은 같은 속도로 커진다. 통합적인 시선을 놓쳐버린 지금, 사람들은 묻지 않는다.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전문가의 의견을 빌린다. 기술을 너무 놓아준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비대해지고 커져 인간의 손목에 매였있던 끈을 풀고 포효하는지도 모른다.

 

기술이 문화와 사회, 사람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지점을 천천히, 확대경으로 미시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쩌면 더 인문의 접점일지도 모른다. 피부에 닿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불쑥 발라져 나간 기술이 어떻게 문화를 흔들고, 사회를 덜거덕거리게 하는지, 사람을 어떻게 멸시하거나 뒤트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컴퓨터는 우리의 신실한 벗이자 친근한 친절한 도우미가 되고 있지만,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의 정체성을 정확히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를 보다 면밀히 검토하는 게 현명해보인다. 13


니콜라스 카가 자동화 테크놀로지에 대해 비판적인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만족감, 그리고 몰입감을 빼앗아 갈 수 있어서다.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과 만족은 실제로 세상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직접할 때 벌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중의 집중이 온통 스크린과 스마트폰 액정에 향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과 동떨어진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행복과도 멀어지는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반복된 일상이 주는 안정감, 땀 흘린 노동이 주는 즐거움, 훈련과 연습이 주는 몰입감, 애써 노력한 결과가 주는 보람, 몸을 움직이고 열심히 무언가를 나르는 삶이 주는 행복감을 우리는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을 디지털 문명이 주는 공허함으로 채우게 될지 모른다고 니콜라스 카는 경고한다. 9


현명하게만 사용한다면 자동화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힘들고 단조로운 일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보다 도전적이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에 매진하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자동화에 대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 혹은 '이제는 잠시만 멈춰'라고 말해야 할 시기를 모른다는 데 있다.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자동화의 장점에만 흠뻑 빠져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9


화이트헤드처럼 우리는 대부분 자동화가 인간에게 무해하며, 우리가 더 고차원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수준을 높여주지만 인간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바꿔놓지는 못할 거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잘못된 가정이다. 그 가정은 자동화를 연구한 학자들이 내세우는 '대체 신화'에 불과하다. 노동력을 줄여주는 기계는 일만을 대체해주는 역할만 하고 끝나지 않는다. 일을 하는 사람들의 역할, 태도, 기술을 포함해서 전체적인 일의 성격을 바꿔놓는다. 자동화는 인간이 하는 활동을 대신해주기만 하기보다는 기계의 설계자들의 의도하지 않고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활동을 바꿔준다. 자동화는 일과 노동자를 모두 바꿔놓는다. 108-109


전문가들은 소프트웨어에 의존할 때 특정 암들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더 크다. 아울러 컴퓨터의 결정 지원 기능들로 인해 생긴 미묘한 편향들은 단서와 경고에 대응하기 위한 인간이 가진 인지 기능의 일부일지 모른다. 이런 지원 기능들은 인간의 초점을 조정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을 왜곡한다. 114


자동화는 우리를 행위자에서 관찰자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조종사가 조종간을 조작하지 않고 스크린만을 응시하게 되는 식이다. 그런 변화로 우리는 전보다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전문지식을 배우고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은 손상될 수도 있다. 우리의 일 처리 능력을 높여주는지 낮추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자동화는 장기적으로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기술력을 약화시키거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게 방해할지 모른다. 116


정신적인 생성 활동은 교육학자인 브릿 호건 챙의 말대로 "개념적 추론과 심도 깊은 인지적 처리 능력"이 수반되는 활동 수행 능력을 개선시킨다. 쳉은 "머릿속에서 생성한 재료가 복잡할수록 생성 효과가 더 커지는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118


우리는 혼자 어떤 과제나 업무를 수행할 때 컴퓨터의 도움을 받을 때와는 다른 정신적 과정을 밟는 것 같다. 소프트웨어로 인해 일에 대한 참여도가 낮아지고, 특히 소프트웨어 때문에 관찰자나 감시자 같은 보다 수동적인 역할을 맡게 됐을 때 우리는 생성 효과의 핵심인 깊은 인지적 과정에서 벗어난다. 결과적으로 노하우를 얻는 풍부하고 실용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된다. 생성 효과를 내려면 자동화가 줄여주기 위해서 애쓰는 '힘든 수고' 가 필요하다. 119


문제풀이 같은 인지 과제를 자동화할 경우 정보를 지식으로, 그리고 지식을 노하우로 전환시킬 수 있는 우리의 지적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실제 세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회계감사관의 전문회계프로그램 등) 122


우리는 검색엔진과 다른 온라인 자원들을 갖고서 과거 전례가 없던 수준으로 정보 저장과 검색을 자동화했다. 우리가 본래 타고난 것 같은, 기억하는 작업을 떠넘기려거나 '외재화'하려는 경향은 어떤 면에서 우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빠져나간 사실들을 빨리 상기시킬 수 있다. 하지만 정신노동의 자동화로 인해서 기억하고 이해하는 일을 쉽게 피할 수 있게 되면 이런 외재화하려는 경향은 병적으로 변할 수 있다. 127


우리가 생성 작업을 하기 위해서 애써 머리를 쓸 가능성은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배우고 알게 되는 게 줄어들고, 우리의 능력 또한 감퇴할 것이다....인터페이스가 인간의 능력을 더 많이 대체할수록 새로운 상황에 대한 사용자의 적응력은 그만큼 더 떨어지게 된다. 컴퓨터 자동화는 우리에게 생성효과와 반대되는 '퇴화 효과' 를 일으킨다. 128

 

인간의 마음이 통하는 기술

 

모든 도구들이 인간과 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도구들은 우리가 숙련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자동화라는 디지털 기술들은 우리를 세상으로 초대하고, 우리가 지각 범위를 확대하고, 우리가 가진 가능성들을 늘리는 새로운 재능들을 개발할 수 있게 권장해주기보다는 종종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 도구들은 우리의 참여를 막을 목적으로 설계됐다. 그 도구들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어낸다. 이것은 다른 어떤 관심보다도 편안함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지배적인 기술 중심의 디자인 관행들이 빚어낸 결과다.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우리의 관심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게 공들여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런 결과를 반영한다. 321


수공구를 사용할 때 우리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우리가 수공구들을 우리 몸의 연장, 우리 자신의 일부로 느끼기 때문에 그들이 야기하는 윤리적 선택들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긴 낫은 꽃다발을 자를지, 자르지 않을지 선택하지 않는다. 제초 작업자가 선택한다. 우리가 도구를 사용하는데 전문가가 될수록 자연스럽게 우리의 책임감도 강해진다. 초보 제초 작업자의 경우 손에 쥔 낫이 이질적인 물체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전문 제초 작업자의 경우에는 손과 낫이 하나가 된다. 326


기술이 자애롭고, 자기 치유력이 있는 자율적인 힘이라는 믿음은 유혹적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느끼고, 미래에 대한 책임감에서도 벗어난다. 이런 믿음은 특히 자동 시스템들과 그들을 통제하는 컴퓨터들로 인해 생긴 노동 절약적이고 이윤 추구적인 활동을 통해서 더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한다. 333


역사가 상기시켜주듯이 근로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며 떠드는 거창한 말 뒤에는 노동에 대한 경멸감이 감춰져 있다. 일자리를 잃은 다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자아실현을 위해 여가시간에 쓸 돈을 지원해주기 위한 광범위한 부의 재분재 계획 등에 동의하는, 자유주의자적 기질을 갖고 있으면서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조바심을 내는 기술 분야 거물들이 오늘날 등장하리라곤 상상하기 아주 힘들 것 같다. 334


현재 시점에서 기술이 노동의 고역과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인류의 일관된 바람을 이뤄준다는 시각은 왜곡됐다. 기술은 우리를 여러 가지 문제들로 가득한 지옥 속으로 더 깊숙이 던져버릴 것이다. 아렌트는 "자동화로 인해 우리는 노동, 즉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일도 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가득한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에 직면하게 됐다. 분명 그보다 더 나쁜 사회는 없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유토피아적 이념을 갈구한다고 했다. 334


"컴퓨터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사용하기도 아주 편리하다. 하지만 컴퓨터의 편의성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부주의하고 무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컴퓨터는 다른 보다 중요한 고려 사항들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컴퓨터의 조작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더 깊숙이 파고들어 연구해야 한다." 337


저항은 결코 부질없는 짓이 아니다. 우리의 활력원인 "활동적인 영혼"이라면, 우리의 고귀한 의무는 제도적, 상업적, 기술적 힘 중에 우리의 영혼을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어떤 힘에라도 저항하는 것이다. 340

 


볕뉘. 새벽 책장을 넘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와 달리 이 책에서는 저자를 사상가를 꼬리를 달아두었다. 인터넷에서 좀더 확장하여 자동화 기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전체를 염두에 둔다면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다. 어느 하나로 인해 전체는 흔들리고 변한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나머지가 움직여야 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은 너무도 강하다. 사회단체 활동을 한다고 의식의 저변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철벽같은 대중의 인식에 균열을 내는 일은 너무도 힘들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환상은 지금여기가 아니라 달나라 예산에 목을 매이게 만든다. 미친 짓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짤랐던가? 사무자동화, 공장자동화  하지만 누가 말했던가? 말하더라도 들은 척이라도 하는가? 대중의 직관만큼 세상의 걸음마를 한다. 기술만 발라낼 수 없다. 기술만 발라지는 것이 아니다. 전체라는 시각과 인간이라는 무게중심을 놓치지 않고 사유하는 기술비평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책이 아주 작은 밑거름이나 기술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었으면 좋겠다.

 

연구윤리, 생명윤리 못지 않게 과학자와 기술자에게 필요한 것은 통합력과 통찰력이다. 인문사회학자들 또한 기술과 과학이 접근하지 못할 영역이 아니라 삶과 사회와 문화와 호흡하는 사이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문외한이라 이름붙이는 순간 정말 문외 한이 된다. 과학과 기술을 품을수록 좋은 비평이 좋은 글이 나올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너무 멀리와 있다.  돌아가야 한다. 지금이라도 ... ...

 

인간의 마음이 통하는 기술, 우리의 영혼을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하는 제도적, 상업적, 기술적인 어떤 힘이라도 저항해야 한다는 말이 다시 남는다. 그렇게 다시 돌이켜봐야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경제, 상업, 기술 등 모든 것에 대해서 인간의 뫔으로 다시 짚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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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요철과 굴곡, 그리고 횡단

 

 

횡단이라는 말을 참 쓰고 싶지 않은 말이다. 요철과 굴곡도 편한 말이 아닌데 삶의 요철과 굴곡을 쓰고 가로지르면서 아니라고 관통해야 한다. 결국 답이 아닌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삶의 겹침이라고 쓸까?


운동(활동)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것은 질문이 되지 않는다. 활동(운동)은 왜 앞으로 더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가 약간 나은 질문이 되겠다. 질문에서 시작하는 답을 과거에서 찾을 수 없다. 뒤지고 살펴본다고 해도 화려한 영광의 흔적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더 안될 수밖에 없는 미래에서 찾아야 한다니 너무 서글프지 않는가?  우울하고 눈물이 뚝뚝 떨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로 지역을 들 수 있다. 지역에서 중앙의 소비자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같은 말로 지역에서 중앙으로 머무르고자 하는 관성이다.

 

서울에 중심에 나를 끼워맞춘다는 일은 참 곤혹스럽다. 정해진 룰과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다수결도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별 생각이 없으니 몸빵이라도 해야 중간이라도 가지 않겠느냐고 말하면 할 말이 없다. 그렇게 해왔고 하는 수밖에 없다. 지역만의 문제 지역의 문제를 발굴하고 보이도록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항변할 수 있다.

 

중앙의 시각과 시선, 입장에 또 다른 눈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아니면 늘 소외되어 발언권조차 얻지 못했던 소수단체의 기죽은 소수의견들을 기억해내고 살려낼 수 있다면 조금은 발화의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앎이 횡행하고, 정세가 횡행하고, 선거가 자라던 일들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상황에서 버티기만 해도 큰 역할이라고 자부하는 것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비자가 생산자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중앙의 의제를 빌려쓰고 빌려서 움직이고 빌려서 살았다. 구차하게 얘기하자. 얼마나 중앙이 되고 싶어 안달했던가를 얘기해보자. 단체가 만들어지고 단체의 가치와 색깔이 생기고 모든 다른 단체는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주기를 바라왔던가.

 

통일, 노동, 교육, 문화, 자치, 참여, 환경, 녹색, 생태, 민주, 양심, 여성, 과학, 선거...이루 셀 수 없는 가치는 자신을 의심할 수 없다. 한번도 의심해내지 못했다. 복음의 전도사이다. 어깨걸고 합심해서 지금까지 헤쳐나왔다. 그런데 너무한 것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럼 다시 묻자. 그 가치만으로 지금 여기를 설득시킬 수 있으며, 앞으로를 설득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느냐고 묻자. 모든 단체가 당신이 추구하는 색깔로 번지면 살만하냐고 묻자. 스스로 상처를 내지도 아파 피고름을 흘리지도 못했고 아문 상처로 걸음도 걷지 못했다. 아픔이 번지지도 않고 번질 수도 없고, 같이 아파하지 않는다.

 

회원과 조합원은 열정과 아픔을 갖고 있지 않다. 여기저기 회원일뿐 애틋한 소속감도 없다. 조합원은, 당원은 여기저기 보험을 든 객체로 대행을 바랄 뿐이다. 회원은 자신의 아픔 한바가지 단체에 부어넣을 마음도 삶도 없다. 냉정하게 살펴보자 우리는 하고싶은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회원의 후원으로 대행하면서 스스로 빛나기를 원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다른가치도 다른 색깔도 다른목적도 원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족하다. 됐다. 회원은 풍족하다 조직은 다른 가치를 탐색하고 시도할 수 없다. 더이상도 더이하도 없다. 닫혔다.


 

2. 또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도 삶을 살피지 않았다. 삶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삶을 걸려고 삶을 섞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삶이 아니라 대상으로 삼는 저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삶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다.  

 

가교 역할을 하는 활동가들은 안심할 수 없다. 헌신을 넘어 고난과 역경을 무릅쓰고 청춘을 뭍었다. 알아주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열악함을 베개삼아 하루를 버텨내고 싸워낸다. 안부를 물을 수 없다. 왜 물어야 하는가? 내 삶도 아닌데 말이다. 보따리를 싼다. 애정과 열정을 담아 조직을 자라게 만든다. 피와 땀이 배여 있는 곳이다. 힘들다. 관성화되는 조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어볼 곳이 없다. 하고싶은 것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조직에 갇혀있다는 느낌이다. 슬그머니 관성이 생긴다. 이용하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뒤를 봐줄 수 없다. 너의 길이다. 

 

조폭이냐 뒤를 봐주게. 거꾸로 물어보자 조폭은 뒤라도 봐준다. 이게 쿨한 것인가. 삶과 일이 만나고 풍부해지는 것이 이 시공간이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보험처럼 대행하고 대리하게 한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언제까지 자원해서 해야 하는 것인가 되물어 보았는가. 단체가 다르면 정파가 다르면 입장이 다르면 활동을 할 수 없을까? 단체와 단체 사이와 틈을 벌리거나 풍요롭게 하는 역할은 없을까 정녕 보장이 되지 않는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쓸 재원도 한정되는데 활동가의 삶의 일정부분까지 책임져야 한다니 이건 오버가 아닌가?

 

10년치 활동가 월급을 계산해보자. 10년동안 쓰고 생활했던 스스로 돌아보자.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은 온도차이만큼 달라야 하는가? 쓸모에 따라 여기저기 움직일 수밖에 없는 부품인가? 삶을 봐주는게 조직과 단체에 그렇게 부담되는가 부담될 수밖에 없는가? 왜 활동가는 일에 질질 끌려다녀야만 하는가? 이것의 우리의 수준이고 능력이라고 생각은 못해봤는가? 왜 활동가는 멋지고 부럽고 생산자이자 창조자이가 예술가이기를 바라면 안되는가? 사실 이런 면을 보자고 외치던 사람은 우리였지 않은가? 그래야만 활동이 운동이 발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합원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던가? 당원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던가? 어떤 마음인지? 그(녀)의 일상이 어디로 닿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고 사귀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왜 조합원이 과학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생태에 눈을 뜰 수밖에 없으며, 기대고 나눌 사람들을 소개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가? 사람안에 우주가 들어있다던때는 언제고 입장이 사뭇 다르다고 냉정하게 팽겨칠 수 있단 말인가? 단체를 뒤돌아보기도 싫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엔엘이고 피디고 어떤 라인이고 어떤 사람들과 친해서 모든 것이 넘사벽이다. 꼬리표처럼 붙어있는 주홍글씨때문에 일상은 만나지지 않는다. 고민은 섞어지지 않는다. 다른 이견은 들리지 않는다. 만나고 만나고 싫어도 만나고 나누고 나누고 싫어도 나누고 해야할 판이지만 모두 다 소에 닭이다.  이런 원심의 효과가 어떤지 10년전과 지금을 본다면, 역시 지금과 10년뒤를 비교할 수 있으리다. 대면할 수 없다. 물과 기름처럼 갈라진 기억만 선명하다. 그래서 10년뒤가 더 암울하다. 가치가 아니라면 이견으로 이견이 아니라면 일상으로, 일상에 마음을 얹고 이견을 듣고 일을 나누고 안달이 나지 않는다면, 보고싶어 안달이 나지 않는다면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렇게 다가가고 싶은 회원과 조합원과 당원에게 나눠줄 앎고 삶도 지혜도, 실천도 없을 것이다. 백이면 아흔아홉.

 

 

3. 뭔가 아름답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 뭔가 빠졌다는 느낌, 뭔가 찜찜한 무엇. 왜 산뜻함을 느끼지 못할까. 어떤 일을 하던 뒷끝이 남는 것은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운동의 그림자, 활동의 그림자는 가야할 방향을 정확하게 지시한다.


엘리트 의식은 문화로 볼 때 단순하다.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게 몸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새누리당보다 낫다고 여기는 새정치연합, 민주당보다 낫다고 여기는 진보정당, 일반인보다 낫다고 여기는 친환경구매자, 시민보다 낫다고 여기는 시민단체 구성원은 낫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가치는 부여잡는다. 노동이 통일보다 낫고, 통일보다 평화가 낫고, 환경이 낫고, 교육이 낫고, 복지가 낫고, 낫고 낫고... ....


사람들은 그래도 안다. 자세히는 몰라도 뭐가 잘못되지 않았을까하고 말이다. 뭔가 안심하지 못하겠다고 느낀다. 뭔가 잘 안맞는 것 같은데 하고 말이다. 답은 설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아름다울 때까지... ...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정말 구차하지 않은가? 구차하고 싶다면 할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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