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저자, 강연자, 연구자 그리고 대중 사이

 

책을 내지만 사람들은 책을 보지 않는다.  저자는 강연을 하되,  대중은 책의 깊이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많되 소통하거나 연구실적을 나눌 길이 없다. 학회는 있되 학회에서 듣는 사람은 전문? 연구자들만 있다. 학회지는 많지만 학회지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있더라도 관련분야 밖의 독자들은 없다. 나눌꺼리는 많지만 사이 사이 층은 얇고 모두 떨어져 있어 연결되지 않는다. 말하게 하는 법, 알고 있는 것 밖의 것을 연결하는 법, 책 속의 것을 질문하는 법, 아는 이를 끌어내는 법, 얇고 얇은 벽 사이를 관통하는 일들. 그런 시도나 실험, 기획. 진짜 삶문제를 잘 추스려내는 일. 맥락에 있는 분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일. 모여 같이 기대는 것이 더 낫다는 확신을 불어넣는 일. 한두번의 시공간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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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질문'은 나눠야 하면서  '거래'되어야 하는가?

 

 

'나'가 나눌 수 있는 접점은 대면하면서부터이다.  대부분 의도를 갖고 있다. 그 접점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별일수도 꽃일수도 나무일수도 곤충일수도 연인일수도 있다. 책일수도 모임일수도 고민일수도 생각일수도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자본이 수신할 수 있고, 축전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은 협동이라고도 하고 공유라고도 하며 거칠게 자본이라고도 한다. 맞다. 자본도 필요하고, 협동도 필요하고, 착한 것도 필요하다.  보이는 손. 아직 모른다. 무엇인지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든단 말인가?


그렇다면 급한대로 빌리자. 무례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느낌을 나누는 방법도 깨달음을 전수하는 비법도 모른다. 느낌이라는 것이 벼락같은 것이라 언감생심 주어져도 왜, 어떻게 주어졌는지 맥락이 궁금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앎은 지천이어서 홀로 찾아도 관계없는 것이라고 하자. 그 앎을 삼켜 가슴에 머무르면서 뜨거워지는 것을 질문이라고 하자. 그래서 생각의 지축이나 마음을 흔드는 것을 질문이라 하자. 책을 통과하면서 들어가고 나설 때 느끼는 마음의 온도차이를 질문이라고 하자. 사람을 만나고 고민을 섞고 나누다 따듯해지거나 싸늘해진 마음의 농도차이를 질문이라고 하자. 모임 속에 들어가기전 마음들 속에 섞이다가 불쑥불쑥 다가서는 느낌같은 것들을 질문의 결정이라고 하자.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는 아니더라도 자본가가  한푼 한푼이라도 근검절약하면서 돈을 세는 그림을 떠올려보자. 옆에는 하루 하루 땀과 노동, 하느님께 다가가는 소명을 기록하는 회계장부에 눈을 돌려보자.  차변과 대변을 나누고, 빈틈없이 하나하나를 맞추고, 계산하는 치밀함이 있지도 않은 토지를, 물을 공기마저 모든 사물을 삼켰다. 영혼마저 삼키고 있다. 마법의 장부이다. 마법의 세계다. 세상의 모든 일을 거래로 만들어 돈으로 낳는 황금장부이다. 그들은 Present 선물, Good will 영업권, 프리미엄, 특허권, 지적재산권을 계정에 넣고 넣었고 넣으며 두둑한 배를 불리고 있다. 어떠한 정신도 팔 수 있는 듯이 돈을 낳는 장부로 그것을 우겨 넣고 있다. 그래 4백년이 걸린 일이다.


인문이라는 것이 있는가? 삶이라는 것이 있는가? 영양제만큼 한알 쏘옥 넣으면 정신 한점 맑게 하고 사라지는 인문이라는 것이 있는가? 가슴이 뿌듯해지는가? 인문은 정신의 화장술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너'로 번지지 않는다. 나의 삶의 울타리에 바람만큼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쇠락한 정신에 주님을 믿사와 일주일간의 죄를 세탁하듯이 그저 꿀꺽 삼키고 마는 일이다.


" C H A N G E " '변화'는 거래될 수 있는가? 나의 의문이 너에게도 다가설 수 있는가? 나의 불온이 '저기'에서 꿈꾸어질 수 있는가? 저기의 불손이 '여기'의 삶 속에 요동칠 수 있는가? 한번이라도... ....


가치와 앎은 여기저기 세상도처에 널려있다. 다소, 많고적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삶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식히려는, 삶의 열망을 조금이라도 덮히려는,  삶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이들로 세상은 넘친다.  그들에게 인문을 주입하지 마라. 앎을 삼키게 하지 마라.  첫째도, 둘째도, 세째도 질문하라. 질문이 마음의 잔상처럼 남지 않으면, 질문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문맹이라면, 불쑥 커져버린 느낌의 맥락도 짚지 못하는 아둔함이라면 그 인문은 늘 그랬던 것처럼 싸늘한 주검으로 뒤늦게 발견될 것이다.

 

 

질문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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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 다'  연구(所) 스케치

 

 

"환원주의의 맹점들을 드러내며, 서로 경계를 트고 이을수록 나아지는 점을 실사구시로 증명해낸다. 일상에 있어서도 그 벽을 허무는 작업이 얼마나 유용한가? 시간에 강한가를 분석해낸다. '없다'비평은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시간이 함유되는 연관된 틀로 생생하고 종합적인 분석을 해낸다. 창의적이고 창발적인 시도, 접근, 시험을 존중하며, 그 결과들과 과정이 사람의 틀과 격을 통해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연구해낸다.  주류보다는 비주류, 정상보다는 정상외의 삶과 권리도 평균적인 삶, 상식의 삶과 동일하다고 여기며 끊임없이 경계를 살펴, 주류 주도의 문제점을 제기해낸다. 지금여기의 고통, 그 아픔의 최소화를 지향하여 온몸으로 존재이전을 통해, 아픔의 고갱이를 얻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이 비평과 연구의 잣대로 쓰이도록 한다. 늘 다른 관점, 다른 시점의 비평과 분석을 요구한다. 비평이 고정화되어 있지 않으며, 아픔의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열어둔다. 비평과 연구는 다시 만들어지고 수정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볕뉘.  꽃대공은 올라오고 꽃이 필 때가 마음의 겹눈에 들어오는데, 꽃의 그림자는 벌써 보이기 시작한다. 꽃밭에서 챙길 일들이 눈에 들어온다. 너무 뫔을 오랜동안 주어서, 너무 오래 마음을 써서 마음도 몸도 닳아버린 듯하다. 머무르지 않는 곳, 또 다른 시선들을 잇는 일들이 점선에서 점점 짙어진다. '있다'라고 여겼던 것이 애증만큼 짙은 듯싶다. '있다'의 뒷면 '없다'가 훨씬 빠른 지름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도 긴 시공간동안 '있다'에 목이 매였다. '뚝',  꽃을 꺾다!. 마음을 꺾다! 시듦을 예방하러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가끔 존재의 단절은 더 많은 것을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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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두루' 보고 느끼려는 것이  어떤 관점의 차이를 가져오는가

 

 

 

1. 전체사, 전체성, 전체를 보려하는 것


- 경제로만 판단하는 것은 정치, 사회, 문화의 관계 속에 판단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경제의 전일적인 과학으로 판단하게되면 자본주의는 여러 관계 속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전일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 루이스 멈퍼드가 경계한 것은 기술과 과학으로만 보게 되면 신석기 시대와 중세 등 일련의 과정이 기술발달에 국한되게 되어, 실로 수많은 과정과 작은 혁명들을 눈여겨보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종자개량이나 가축, 대중목욕탕, 공원 등 일상과 연관된 무수한 과정의 혁신이 묻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삶과 연결된 문양과 예술, 관계도 뭍히게 되는 것이다.


- 전지구적인 것은 전지역적인 것이 되어 지역에 전지구적인 것의 정치적 과제가 흘러넘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의 정치인은 해결해야할 과제를 점점 더 많이 떠안게 되지만 점점 더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적어질 수밖에 없다고 누구는 경고한다.

 

-

 

 

2. 전체를 보면 다시 보이게 되는 부분


- 시장경제는 교환가치의 실현으로 문턱을 넘게 된다. 자급자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삶의 방편인 것이다. 시장경제의 큰 흐름에 독점과 권력의 특이한 형태가 자본주의가 되는 것이다. 전일적이고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역사의 맥락에서 뒤늦게 자리를 차지하는 밤의 손님, 특이한 형태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삶에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급자족, 호혜,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모든 것은 그대로 의미를 갖고 관계를 유지하고 삶을 이어나간다는 점이다. 

 

- 자본주의가 딛고 서있는 자리에 숱한 빈 공간이 여전히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고 처리하고, 비만과 병치료, 재해로 인한 추가 교환의 그물에 거래의 그물에 잡혀야만  자본이 말하는 성장의 안테나에 잡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활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세계화되고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삶을 이어나가는 다양한 방법과 그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서 만들 세계는 상상력과 고정된 생각밖의 시도만큼이나 많을 수 있는 것이다.

 

- 칼폴라니의 embeded의 개념


- 기술은 본래 삶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일상과 삶 속에서 세대라는 시간을 갖고 삶 속에서 개발된, 삶과 붙어있는 기술이 본래 더 많았던 것이다. 예술도 그런 삶과 사람의 켜를 바탕으로 자라고 밑바탕의 근육을 키워나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삶으로 되먹임된 것이다.


- 노동은 없다. 사람이 기술과 자동화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신화화되었고 기술의 고삐를 사람이 쥐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험도 그러하다. 기술과 과학을 사람의 프리즘으로 통과하려는 기술과 노력은 어디에도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과 과학은 발전하고 신장했는지 모르지만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풍요로워지는 방향으로 조련하는 기술과 과학은 존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정상과 주류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주류와 비주류가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감지하려고 하지 않으며, 여전히 정상성에 사로잡혀 무한반복을 외친다.

 

 

3. 왜 없다고 안된다고 해야 하는가


- 희망, 노력 모두가 좋은 말이다.

 

- 전태일이 있다보다 전태일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노동과 노동사이를 올바로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일자리, 노동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일자리는 없다.

 

- 노동은 없다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팽개쳐지는 삶, 쫓겨나는 삶, 비루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을 그래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고 온몸으로 거부한다고 하는 것보다 신자유주의는 없다, 신자유주의라고 뭉뚱그리는 순간 얼마나 많은 고통도 하나로 버무려져 해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이 되는가를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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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의 가정에 따라 사유하게 되면 어떤 시야가 생기는가

 

- 쓸데없는 희망처럼 사람들에게 곤혹스러운 것이 없다. 현실은 물밀듯이 쓸려오는데 그래도 아니라고 다짐에 목숨을 내놓는 것.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다시 생각하지 못하는 것.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 막을 수 있는 방편이 아니라, 삶의 다른 길도 갈 수도 있다는, 그래서 결국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열명에 한명은 살아간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가지지 않은 것보다 낫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삶의 저주의 나락만이 아니라 그래서 좌절과 약물과 고통만이 아니라 패배자가 아니라는 인식만 얻는 것이 아닌 것보다 낫다. 밀려오는 분노와 악다구니를 모두 남에게 퍼부어버린 결과와 원인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나만이 이 고통에 처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헛된 희망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지금 여기'를 다시 살피는 일, 지난 사유의 헛점을 되짚는 일. ...

 

 

볕뉘. 시간이 되면 살을 덧붙여야겠지만, 겨울 바람이 쓰라리다. 아이러니의 시대다. 소통할수록 소통할 수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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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에 보이지 않는 과학기술의 곁들

 

1. 양치기 소년과 늑대라는 이솝우화에서 양치기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외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자 키득키득 웃는다. 또 양치기 소년은 거듭되는 따분함을 녹이려고 늑대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마을사람들이 늑대를 쫓아내기 위해 모여든다. 여전히 재미있어한다. 결국 늑대는 나타났고 양치기 소년의 외침에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었고 양들을 모조리 잃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거짓과 거짓, 거짓의 다음은 진실도 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뇌과학, 신경과학의 발달의 진전과 성과는 활발하고 빠르다. 행동경제학을 비롯해 많은 응용분야를 낳고 있다. 경제학은 사람들이 합리적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합리적이라면 수십종류가 되는 상품을 고르려면 하루종일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충동적이고 쾌락적이기도 하다. 감성과 직관을 바탕으로 선택하고 움직이는 측면이 많다고 한다. 대중의 직관을 쓴 저자 존 L. 캐스티는 말한다. 역사상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을 분류하고 분석하면서 사회적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미래에 일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주장한다. “사건이 대중심리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사회적 분위기가 사건을 조종한다.” 곧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이 사건을 만든다는 것이다.

'과학은 무엇인가' '기술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과학기술에 드리운 그림자를 응시하기를 주저한다. 과학기술이 몇세기동안 누렸던 호사와 혜택에 경도되어 여전히 지난 추억처럼 기억하고 떠받든다. 대중은 이성적이지 않다. 황우석사태를 비롯해, 온갖 과학기술의 악몽이 드리워져도 자본과 과학기술의 세기를 살아남은 대중은 여전히 과학기술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먹을거리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위험은 멱급수로 커져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어도 낙관을 버리지 못한다.

아프리카와 북한 등 세계 곳곳의 인류가 굶어죽고, 삼림이 황폐해져도 그것은 남의 일이고 지금여기의 문제가 아니다. 대중은 여전히 과학기술을 쉽게 알리고 이해하는 대중화에 관심이 있지, 반대편에 튀어나오는 검은 그림자를 살피지 못한다. 어쩌면 한 세기를 넘어 어두운 사건이 지근거리에서 직접 피해를 입는 지옥을 몇차례 접하고 나서야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유전자는 조금 변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쿠시마의 원자력 재앙에도 대중은 놀라서 대오 각성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건들은 오히려 점점 더 교묘하게 묻히고 덮힌다. 합리적인 이성과 환원론에 집착하는 과학의 도식은 우리 문화를 잠식한지 오래다. 그 문화와 습속에 배여온 지금 여기의 대중은 합리적일 수 없다. 과학은 합리적이성과 객관적인 사실을 기초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싶어한다.

 

2. 양치기 소년과 늑대의 우화를 보는 시각을 달리해보자. 양치기 소년의 역할이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위험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은 첫번째 거짓말에 속고, 두번째 거짓말에도 속았다면 소년을 혼내고 돌아갈 일이 아니었다. 모여서 양의 안전에 대해 논의하고 대비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다가올 위험을 막아내기 위해 사회에서 바꾸고, 고치고, 대안을 마련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 결국 늑대에 의해 양들은 희생당하고 만다.

리차드 세넷은 68혁명이후 절대성과 확신이 세상을 별반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지금의 거대도시가 지나치게 계획적이라는 것에 문제삼는다. 상업지구, 주택지역, 녹지지구를 통해 모둠별로 모아놓아 도시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나 다른 삶과 섞이지 않는다. 사회의 위험이나 고충에 대해서도 더 이상 피부로 와 닿는 것이 없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무질서와 고통스러운 어긋남을 겪어내지 못해 청소년의 정체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적 차이를 겪어내면서 성인의 복잡다단함을 얻어내지 못하는현대도시의 자발적 노예의 삶을 그리고 있다.

14세기 역사학를 학문으로 정립한 이븐할둔은 전야(田野)생활과 도회 생활을 비교한다. 도시 시민은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짓고 바꾸어나가는 용기와 저항정신이 전야생활의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법률과 규정에 의해 움직이도록 체계가 만들어지고 도시 시민의 영혼에 무력함과 나태함생겨 약하디 약한 인간으로 퇴화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인간은 대부분을 제도에 일임했기에 더 이상 문제와 시스템과 싸울 능력마저 잃어버린다고 밝히고 있다.

참사라는 끔직한 재앙으로 이어지는 현실 속의 세상 사람들은 계급과 계층에 상관없이 유사한 위험의 공기로 호흡하고 있다. 기존의 자본에 수혈을 하던 과학기술, 제도와 시스템은 다른 국가의 선진 사례를 이땅에 적용하기를 몸소 거부한다. 거대도시를 꿈꾸던 자본의 관성은 더욱더 시스템을 꼭 움켜쥐려 버티는 것이다. 제도와 제도, 규정과 규정 사이 지뢰처럼 걸려있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용기도 없다.

한편 모든 산업과 관계들의 탄탄한 배경역할을 하는 자동화 기술 또한 숨겨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편리성의 이면에는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가진 재능, 그리고 우리의 삶에 커다란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도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동장치가 긴급한 위험시 오히려 가속시킬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목적지에는 도착하게 해주지만 왜 그런지 상상하는 수고로움조차 잊게 만들어 기본적인 능력조차 감퇴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토마 피케티는 기술의 역할을 살핀다. 기술은 경제 속에 함침되어 팽창과 신축의 탄력성을 부여했다고 한다. 그 진보가 민주적이고 능력주의적인 합리성을 향한 진보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공익에 기초한 더욱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구축하려면, 이렇게 변덕스러운 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정치적인 힘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비코는 사회가 인간에 의해 창조됐으므로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보다 인간사회의 원리를 찾지 않는 것을 개탄한다. 당대의 인물인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유명한 명제에 출발한 원리는 수학과 자연학 이외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데카르트가 제외한 역사나 실천적인 지혜, 수사, 시학 등은 도리어 인간에 의해 가장 잘 인식될 수 있는 영역이기에 인간사회의 원리는 그렇게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진리는 만들어진 것으로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인간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코는 오직 추상적 진리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지적으로 뛰어나도 '합리적 미치광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의 승리처럼 보였던 지난 몇세기는 오히려 과학과 경제를 앞세우고 힘없는 인간과 자연을 지운 역사였다. 자본주의를 치켜세운 경제의 쌍두마차인 과학은 인간의 역사에서 튕겨 나와 오히려 사람과 삶을 거꾸로 짓이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사회의 원리와 자연계의 원리를 분기한 시점인 그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비코의 문제의식과 새로운 학문의 성과를 되살필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은 왜곡된 현실에서 더 이상 경제의 해결사로만 자리매김을 해서는 안된다. 경제에 사로잡히면 잡힐수록 애초의 인간을 위한 과학기술과 멀어지게 된다. 정치와 사회와 문화, 예술을 함유하면서 공명하는 과학기술의 시선이 필요하다. 사회문제의 중심에서 여러 맥락들이 살아움직일 수 있도록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거대과학기술이 응축해놓은 문제의 그늘을 살펴야 한다. 국가의 신민이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에서 살아움직이는 과학기술로 몸을 한껏 낮추면서 내려와야 한다. 분야의 우물만 독립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얇은 과학이 아니라 두루 살피고 그 그늘의 영향이 겹쳐 어떻게 위험을 낳을지 미리 살피는 제도적 혜안, 정치적 혜안도 미리 감안해야 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국경이 없어야 한다. 3세계의 기아라는 국경선을 넘으며 해결하는 적정기술을 통해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생태를 보살피고 선순환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권계급, 특권국가의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노동을 요구하는 과학기술의 결과물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자본만의 융통을 바라는 시간에 약한 기술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내구성에 강한기술이 자리잡게 해야 한다. 또한 사회문제, 지구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와 문화에 관여하여야 한다. 그 해결책으로 지역과 함께 공존하는 중간기술, 적정기술, 강한기술들이 생동감있게 어울려야 한다. 이런 조화로 인해 지역과 문화, 삶에 자리매김하는 역할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과학만이 살아남을 수 없다. 미래세대의 몫을 빼앗아 불꽃처럼 써버리는 축제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과학기술은 물신화하여 숭배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야생동물을 길들이듯이 고삐를 쥐고 조련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손을 벌리고 또 다른 손을 마주잡아야 한다.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 문화, 사회, 인문의 결로 삶 속에서 호흡하여야 한다. 결과물이 아름답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예술적인 감각도 가져야 한다.

 

 

 

 

 

 

 

 볕뉘. 참터 10주년 기념 문집이다. 곧 10주년 행사다. 멀리서 가지 못하지만 마음도, 문집에 게재한 글도 남겨 적적한 마음을 달래본다. 앞으로 10년 잘 되길 바래본다.

참터 창립10주년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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