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홍 토핑 맥주' - 욕먹을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꽃소식이 궁금하여 우리나라 개화시기에 관한 연구논문을 찾아보았습니다. 또 궁금하여 개화시기와 벌과 나비의 도래와 과실 수확량과 관계에 대한 논문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꿀생산량에 미치는 영향은 없는 것인지. 꽃샘추위가 목련의 외양에 미치는 영향은 없는지, 개화시기의 집중과 꽃을 빌미로한 만남이 조직의 건강성에 기여하는 역할은 무엇일지. 대전에서는 꽃을빌미로 한 만남과 회수가 자녀에게 정서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사소함은 사소하지 않음을 어떻게 감싸는지. 오늘 하루의 밀도는 일주일과 한달의 농도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한몫에 피는 꽃잔치가 내 삶에 몇번이나 있는 것인지. 꽃같은 만남은 또한 몇번이나 만들 것인지. 문득 건네온 연산홍 모임드레싱에 이 생각들이 귀에 꽃꽂는 소리만은 아닐 것이다라고 되뇌여봅니다.

 

내 삶에 화인은 몇번이나 ᆞ너의 마음의 잔에 꽃으로 몇번이나 떨어질지 ᆞᆞᆞᆞ

부질없는 일과 관심만은 아니라는 생각의 응어리를 가져갑니다. ᆞᆞ 벌써 코끝은 짠내음이군요^^

 

 

 

 

 

 뱀발. 선배가 꽃든 잔을 건넸습니다.  지난 해 천그루의 목련에 대한 흔적들을 되뇌였습니다. 마당굿패의 한감독의 기행이 전해옵니다. 제 마음 같았습니다. 자본주의가 부러움을 무의식적으로 시스템으로 흘러넘치게 해서 일상을 조종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진보라는 단어앞에 삶을 붙여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식적으로라도 말입니다. 자본의 속도도 쫓아가지 못하거나 가는 길의 앞에 서서 기다리지도 못하니, 잘게잘게 미분해서 일상의 노선을 바꾸어내는 재미라도 맛보아야겠습니다. 치기와 치기가 쌓이다보면 어쩌면 결기라도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취기가 채 가시기 전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은 이미 데여버렸고,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서울 개화시기 논문

 

 

 

 

좀 더 찾아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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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정을 느낄 자아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가 거리를 유지하는 힘을 잃지 않은 채 관계적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인식하라는 하나의 정언 명령이 됩니다. ..낙인찍힌 개념들의 목록 중 총체성과 총체화라는 단어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65

 

사회적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느껴지게 되었다는 맑스의 용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범주이자 특히 루카치의 베버적 유산과 본격 맑스주의적 유산의 어떤 종합의 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근본적으로 전문화, 노동분업, 노동과정 자체에 깔린 사회적·심리적 파편화를 상징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용어는 또한 격자 형태로 이뤄지는 데까르뜨적 확장, 데까르뜨적 공간의 추상화를 상징합니다. 데까르뜨적 공간의 추상화에 동반되는 여러 종류의 인식적 전문화과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심리가 새롭게 분할되고, 그에 따라 육체 자체가 그 감각기관이 새롭게 분할되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개념적 추상화가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76

 

서양의 우리 경험에 따르면, 생태학적 정치는 중산계급의 정치로 되기 쉽고 하층계급의 사람들은 흔히 그것과는 상충되는 다른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생태학적인 목표도 달성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더 큰 집단적인 정치적 기획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기획이 아직 창출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140

 

미적인 것과 욕망의 영역, 심층 성격 등등을 포함하여, 종전 형태의 자본주의나 사회체제 자체의 세력권에서 어떤 의미로 벗어난 구석이 인간본성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오늘날 탈근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무의식에 대한 침투와 식민화입니다. 예술이 상품화되고 무의식 자체도 매체와 광고 등등에 의해 상품화됩니다. 141

 

근본적으로 달라진 오늘의 조건에서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의 그러한 환기를 우리가 되살릴 수 있다면, 그때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문화의 타락이라든가 인간심리의 타락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근거가 되는 어떤 가능한 인간본성의 좌표를 갖게 되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이 유토피아 및 미래의 시간과 변증법적인 관계에 서야지, 현대사회에 의해 상품화 또는 비속화되고 있는 지금 이곳의 어떤 정태적 인간본성을 연역하는 작업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144

 

사실주의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좀더 단순한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알기 쉬운 서사적 가닥과 구성들을 통해 총체성의 비전을 달성할 수 있는데, 모더니즘 시기에 오면 총체성의 재현가능성의 위기가 옵니다. 바로 여기서 현실의 각부분이 어떻게 상호 연관되는지를 보여주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제국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총체성을 재창출하려는 모더니즘의 비상한 형식적 실험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전지구적 체제 아래서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의 또다른 영역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존하는 형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어떤 정치적 비판을 한다면, 그들이 이러한 시도 자체를 포기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재현이란 불가능한 일이고 총체성이란 없는 것이라고 그들은 결정해버렸고, 그 결과 각기 다른 상황에서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양자에 공통적으로 긴장과 원대한 포부를 갖게 해주던 요소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149

 

정치적·경제적 위기 자체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 없이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예술가가 이 총체상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럴 이유나 동기가 없어져버리니까요.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이런 형태의 인식의 지도 작성은 심미적 동기에 조금도 못지않게 정치적 동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

 

그들이 포크너와 마르께스에게서 발견한 것은, 작가로 하여금 사회의 표면을 기록함과 더불어 그 좀더 심층적인 역사의 이러한 지속적인 영향도 마치 지진계처럼 동시에 감지하게 해주는 새로운 서사적 장치였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물론 그보다도 더욱 파국적이고 충격적이었을 터인데, 루카치적 명제의 실현을 바로 그런 데서 봅니다. 즉 루카치는 18세기 영국 소설이 사회의 표면을 인지하다가 스콧과 발자끄에 이르러 좀더 심층적인 역사를 발견하고 이를 수용하는 과정을 서술합니다...어쨌든 더 많은 것을 포함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생각건대 더 복잡해지고 더 흥미로워지리라는 것입니다. 153

 

포스트모더니즘 전반, 지금 이 시대 전체가 공간의 새로운 중요성으로 특징지어진다는 점입니다. 모더니즘 시기에 시간 또는 시간성이 중요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최근에 대두한 맑스주의의 가장 흥미있는 새 형태 가운데 하나는 급진적 지리학자들의 작업인데 도회적인 것과 지리학·지정학 등등을 동시에 분석하는 것으로, 공간적 맑스주의라 부름직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식의 공간 분석을 더 발전시킬 수 있고,..당신이 한국의 상황을 그려내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이런 새로운 의미에서 공간적 변증법이니까요. 162

 

탈근대 시기에 국제주의와 지역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변증법이 성립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그것은 대단히 풍부한 정치적 가능성을 담은 새로운 종류의 연결이자 대립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전이 역사적 시기들에는 많은 경우 지역에 대한 집착이 퇴행적인 정치를 낳았는데 오늘날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고, 전체 굮제적 현실과 밀접히 연결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새로운 공간적 사고의 이점을 찾아내는 열쇠가 이런 데 있다는 생각입니다. 163

 

정치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정치행위가 다중적이라는 사실을 늘상 기억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정치에 참여하고 있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어떤 만족스러운 단답형 해답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한가지 차원에서는 새로운 전지구적 상황에 합당한 어떤 사회주의 개념을 재창조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제주의라는 차원에서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식으로 지식인들간의 새로운 연결망, 지식인들의 전세계적 연결망을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167

 

볕뉘. 인터뷰집이다. 1982년부터 인터뷰한 것을 모아서 발간하였다. 인터뷰 사이사이 연결한 글들의 겹쳐지고 큰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다. 읽다가 1989년 백낙청교수와 대담한 것이 끌렸다. 알튀세르가 스탈린의 몰락에서 맑스를 다시 읽었다면, 소련이 몰락하는 지점에서 제임슨은 사고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백낙청교수는 민족문제와 통일, 삼사중의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되묻고 있다. 몇가지 특징적인 대담사이에 밑줄을 그어둔다. 역사라는 바다에는 역사의 물고기를 낚는 집어등이라도 있어야된다는 말인가? 흘러가고 놓친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총체정, 전체성의 그물에 걸릴 수 있을까...흥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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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사가 인간의 심성과 감성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커지는 특유의 소외, 고통, 착취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과거의 언어, 관습, 제도는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의 배아형태, 즉 진짜 조상이라는 것이다. 역사에 관한 ‘중앙집권주의자’의 시각에 맞설 필요가 있다.“ – 이반 일리히

 

 

 

2.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직접 마주하고,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전수된 환경에서 역사를 창조한다.”,“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한다. 하지만 꼭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 칼 맑스

 

 

 

 

3.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된다. 이 말은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의 매 순간순간이 인용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 발터 벤야민

 

 

 

 

4.“언제나 역사화하라! 모든 변증법적 사고의 ‘상호역사적’ 혹은 심지어 절대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의무인 이러한 슬로건은, 또한 정치적 무의식의 윤리이기도 하다.” - 프레드릭 제임슨

 

 

 

현 시대상황에서 역사인식과 역사정신이 왜 필요한가요? 어떤 역사정신이 필요한가요? 그 세밀한 결들을 살펴 '지금 여기'에 다른 시선을 스미게 할 수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볕뉘. 책마실을 하다가 걸린 대목들이다. 일리히는 독일의 이혼소송사건을 다루면서 역사가 그 미세한 변화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한다. 발라내서 대문입구에 걸린 역사의식이 아니라 미세한 숨결같은 것을 다뤄야 한다고, 사건들과 현상 이면에 붙어있는 것들을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임슨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표상되는 징후로는 총체적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이면에 드러나는 정치적, 지정학적 무의식을 보려면 실제 Real을 들여다보는 목적과 수단으로 언제나 역사화해야 한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과거를 편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용도에 맞게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정신, 역사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역사인식과 역사정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지금, 지금여기에서 역사의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조금씩 질문을 크게하면서 찾아나가는 수밖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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