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해석학의 몇가지 형태

 

1. 제 3의 충동이란 다름 아니라 예술활동 일반의 근저에 자리한 유희충동으로서, 여기서는 형식과 질료를 향한 욕구들이 한꺼번에 충족된다. 이 충동의 대상인 순수가상부터가 형식인 동시에 질료이니, 질료인가 하면 형식으로 화하고 형식인가 하면 또 질료임이 드러나면서, 인간이 통일성을 획득하고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발달상의 결함과 실패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쳐야 할 일종의 훈련의 징표가 된다. 이 지점에서 자유란 (질료와 형식을 향한) 이 두가지 강력한 충동의 상호중화나 다름없다. 프로이트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긴장에서 벗어남이며, 양이 질로 대치되고 힘과 무게와 질량이 우미로 대치되거나 변하는 그런 세계에의 접근 내지 일별이다. 117
 

실러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미학적 체계이기보다는 정치적 체계이며, 또한 그에게 미의 중요성은 다가올 진정한 정치적·사회적 자유에 대한 실천적 훈련을 쌓을 가능성을 미적 경험이 제공한다는 데 있다. 예술 속에서 의식은 세계 자체의 변화에 대비하며 동시에 이런 변화를 촉진하라고 현실세계에 요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상상적인 것의 경험은, 현실 세계를 단죄하며 유토피아 이념, 즉 혁명의 청사진을 구상하는 준거가 되는 인성과 존재의 총체적 실현을 (상상적 양태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118


실러는 독일의 중산계급 혁명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의 계획 또한 앞의 성찰에서 짐작되는 것보다는 더 구체적이었다. 그 계획의 목표는 다름 아니라 우선적으로 민족극장과 민족연극을 통해 건설될 새로운 민족적 중산계급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즉 극장을 통해 독일 부르주아지에게 정치적 통일과 자율을 교육한다는 것이었다. 118


실러의 사유는 예언적이라기보다 진단적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유토피아는 고대 그리스라는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신고전주의자로, 당대 독일 중산계급의 지평에 사유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예술문제에서조차 그의 이론의 기획으로 보이는 그 소박과 감상 및 자연과 자의식의 종합은 결국 ‘시대극’과고대의 교훈에 대한 성찰에 불과해지고 만다. 122

이론이자 실천으로서 초현실주의가 전성기에 지녔던 뜨거운 현실성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하단말인가? 답은 질문 속에 들어 있다. 실천은 그렇지 않지만 이론은 여전히 현실적이다. 132


2.


탈산업주의라는 거대한 분수령의 반대편 비탈에 선 마르쿠제에게는 사태가 달리 비치는데, 가중되는 조작과 더없이 세련된 형태의 사고 통제, 날로 영락해가는 정신적,지적 삶, 삶의 타락과 비인간화 등에 수반되는 것은 오히려 늘어난 성적 자유, 더 큰 물질적 풍요와 소비, 교양에 대한 더 자유로운 접근가능성, 더 나은 주거, 더 널리 확산된 교육 수혜기회, 자동차의 이동성은 물론 사회적 이동성의 증대 등이다. 결국 우리는 행복해지면 행복해질수록 사회경제체제의 힘에 더욱 확고하게, 그것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137

마르쿠제가『억압적 관용』, 『해방론』에서 표현된 그의 전술적 입장과 갖는 공통점이란 다만 풍요한 사회인 소비사회는 모든 형태의 부정의 경험을 잃어버렸는데, 그러나 개인적 관점에서나 문화적 관점에서나 궁극적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은 부정밖에 없으며, 진정 인간적인 삶은 오직 부정의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발상이다. 138

  

이렇게 볼 때 아도르노 내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마르쿠제의 관계는 이론에 대한 실천이 관계와 같다. 아도르노는 부정적 혹은 비판적 사유의 (혹은 ‘부정변증법’) 이론을 창안하고 문학 철학 음악 등을 다룬 평론에서 부정의 약화가 상부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한 반면, 마르쿠제의 저작은 바로 이 거대한 역사적 변혁의 심리적·사회경제적 하부구조를 탐구한다고 볼 수 있다. 138


정치건 심리건 행동이건 성찰이건, 현대 삶의 모든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똑같은 상황이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모든 것을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 근본적 변화는 바로 가족의 붕괴, 권위적 아버지의 소멸, 즉 핵가족 단위 차원에서 억압의 소멸이다. 이 해방과 더불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초자아 자체가 대폭 약화되면서, 겉보기에 해방된 개인은 또한 예전처럼 부권에 대한 반역을 통해 진정한 심적 개별성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취할 수 없어졌다. 현대인의 자아는 “원본능과 자아와 초자아 사이의 다양한 양태의 반복의 과정들이 고전적 형태로 전개될 수 없는 지경까지 위축되었다... 그 본래의 역동성이 정태적으로 바뀌며, 자아 초자아 원본능의 상호작용은 자동반응으로 응고된다. 초자아의 체현은 자아의 체현을 수반하는데, 이는 적절한 계기와 시간에 나타나는 고정된 특징과 동작으로 드러난다. 갈수록 자율성의 부담을 떨쳐낸 의식은 개인이 전체에 조화되도록 조절하는 과제로 축소된다.” 거의 마찬가지로, 사회 차원에서는 사회적 억압이나 강요된 승화의 명시적 부담이 줄어들게 된다. ‘심적 자본의 원시적 축적’시기의 특징인 과거의 속박이 ‘억압적 탈승화’로 바뀌면서, 성적 풍요의 사회는 체제 내에서 의식적 불행을 줄이고 체제에 대한 의식적 불만을 미리 봉쇄하는 동시에, 환경의 점진적 궁핍화를 정서적 혹은 리비도적 관점에서 보상하는 수단으로 노골적이되 특수화된 성적 활동을 고무하니, 이것이 곧 우리가 앞에서 묘사한 그 현상이다. 139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약화, 계급투쟁의 소멸, 반항이 연예적 가치에 동화되는 것, 바로 이것이 산업자본주의의 풍요사회에서 부정의 소멸이 취하는 형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자의 과제는 현상에 대한 보편적 굴종에 눌려 절멸되다시피 했고 자연이나 자유 등의 개념과 함께 현실원칙에 억압당해 지하로 쫓겨들어간 부정의 관념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이 과제를 마르쿠제는 유토피아 충동의 부활이라고 표현한다. 140

3.


블로흐 주저 『희망의 원리』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처럼 상승하는형식들의 사다리라기보다는 현실의 모든 차원에서 나타나는 희망의 현현에 대한 방대하고 어지러운 탐구이다. 즉 인간적 시간에 대한 핵심적이며 결정적인 분석의 존재론적 차원으로부터 점점 확산되어 실존심리학(불안 실망 같은 현상들의 의미), 윤리학(전통적 이상과 가치로 제도화된 희망에 대한 연구), 논리학(가능태의 개념적 범주들), 다양한 국가와 사회의 조직이론 연구처럼 통상적인 유형과 혁명전략 분석처럼 맑스주의적인 성격의 것 모두를 포괄하는 정치학, 모든 유토피아 개념에 내재된 사회계획, 미래세계의 과학적 업적이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와 주변대상들의 관계를 바꾸어놓는 방법이라는 의미에서의 기술, 광고나 대중문화에서 이루어지는 소원충족을 분석하는 형태의 사회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술 신화 종교 등에 나타난 유토피아의 원형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적 문학비평 등에 접근해간다. 그러므로 책은 구상에서부터 비체계적일 수밖에 없다. 그 기본도식은 너무 길거나 너무 짧아서 서너페이지로 복창할 수도 있고 세계 자체의 무한한 현실들에 필적할 만큼 무한정 확대될 수도 있다. 151

  

하지만 이런 탐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가능조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즉 ‘희망’, 유토피아를 향한 만물의 감지하기 힘든 이끌림, 광대한 우주의 아무리 작은 세포 속에서도 문득그러나 미세하게 작동하는 미래 등의 이런 형상들이 내부 및 외부 세계에서 흔적, 즉 자취, 발자취, 표지, 기호 “내가 여기서 읽어낼 모든 것의 조짐들”로서 우리에게 감지되는 과정 자체에 대해 먼저 숙고해보아야 한다. 블로흐에게 흔적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심적인지는 벤야민아니 데리다에 견주어 보면 알 수 있는데, 벤야민의 사본과 우의적 단편의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호만이 잊혀진 재앙의 표지로 남아 있게 되며, 데리다의 ‘흔적’이론에서는 대상이나 문자 속에 자리잡은 의미작용 자체의 순수한 시간적 운동만이, 그 운동의 방향이나 의미에 대한 어떤 궁극적 감각도 결여된 채 홀로 남아 있다. 이에 반해 블로흐의 흔적은 외적 대상인 동시에 직접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굳이 의식적인 지적 해석을 가하지 않더라도 그것의 본래성(진정성)은, 뭔가 긴박하면서도 철저히 개인적인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한 이 강렬한 징표들 앞에서 우리가 순간 멈칫 놀라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확증된다. 여기서 철학은 우리가 세계 자체 앞에서 느끼는 놀라움의 구체적 개진인 철학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마치 우리를 놀라움 자체 속에서 더 본원적인 사고의 갱신으로 거듭 돌려보내려는 듯 종종 선가의 화두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이 소묘들이 더 공식적인 철학적 탐구와 번갈아 규칙적으로 나타난다. 152-153

블로흐식 놀라움의 경험이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의 한층 제의적인 신비와 구별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블로흐는 하이데거가 정식화한 식의 ‘형이상학적 물음’을 거부하는데, 블로흐에게 존재란 바로 아직은 통째로 거기 현존하지는 못하는, 미완이자 진행 중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놀라운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거기 작동하는 생겨남의 잠재성이며, 미래 존재의 조짐과 전조 들이다. 154


블로흐가 등한시된 주된 이유는 희망과 존재론적 예기의 가르침인 그의 체계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기이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보편적 문화와 보편적 해석학의 제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의 체계는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처럼 거대하고 수수께끼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내부의 특이한 온기와 힘을 방사하는, 철자와 그 철자의 열쇠들부터가 결국 해독될 순간을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는, 신비로운 상형문자로 뒤덮인 채. 그 사이 그의 저작은 마르쿠제와 벤야민의 저작처럼 우리의 문화라는 책 속에 보존되어 있는 상충하는 텍스트들에 참된 정치적 차원을 복원하는 작업에서 맑스주의 해석학이 사용할 수 있는 몇가지 방법에 대해 하나의 실물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원작업은 어떤 안이한 상징적 우의적 해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텍스트 자체의 내용과 형식충동이 (심적 완전성의 형상이건, 자유의 형상이건, 유토피아적 변형을 향한 추동의 형상이건) 억누를 수 없는 혁명적 소망의 형상임을 읽어냄으로써 수행된다. 193

 

볕뉘. 

 

1. 연관된 도서는 읽지 못했다. 사유의 풍성함으로 인도한다는 사실만 확인해둔다. 

 

2. 모바일로 제목을 수정하다가 강조톤이 날라가 버렸다. 그 느낌이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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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일터 선배를 보다. 스치듯이 지나간 2년의 기억 외에 다른 것들이 없는데, 그를 기억해내는 이들은 다르다. 그리고 다른 인물들이 비쳤던 모습들도 선명하게 들어온다. 삶의 자장에서,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것이나, 단조로운 톤의 농담이나 표현방법이 막내외삼촌에 대한 선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단편만 삼키고 편리로 취했던 나날이 붉혀지기도 하였다.

 

 

2. 너무도 가까이에서는 나도 볼 수 없다. 적정한 깊이감과 질감은 거리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조금 떨어지거나 실루엣을 잡는 위치가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오월을 제대로 맞으려면 불쑥 다가서는 유월을 경계할 일이기도 하다. 3월같은 그늘에 서지 않도록 유념할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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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해석학의 몇가지 형태

 

(1) 발터 벤야민, 혹은 향수

 

근대 삶의 모든 국면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소외와 비인간화 등에 대해 많은 근대의 철학자들이 한마디씩 했지만, 이런 사상가들과 달리 벤야민은 자신의 삶 또한 구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독특하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글의 독특한 매력이 나오니, 그것은 변증법적 예지나 표현된 시적 감수성에서뿐만 아니라 아마도 무엇보다도 그 정신의 자서전적 부분이 객관 형태로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관념의 형상에서 상징적 만족을 얻는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87 “기억은 세대에서 세대로 사건들을 계승해 넘겨주는 전통의 고리를 주조해낸다“ ”유물론이란 자신의 주관성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의 주관성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기능이란 외부환경의 충격에 대해 유기체를 방어하는 것이라 본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적 외상, 신경증적 반복, 꿈 등은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충격이 의식을 뚫고 나와 결국 진정되는 방식이다. 이런 발상은 벤야민의 손에서 역사기술의 도구가 되며, 현대사회에서는 (이는 아마 유기체에 가해지는 온갖 충격의 수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일텐데) 이런 방어기제들이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법이 된다. 즉 방어기제의 갖가지 기계적 대체물들이 의식과 그 대상 사이에 끼어드는데, 이것은 우리를 보호해주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난 것에 동화되거나 우리의 감각을 진정한 개인적 경험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앗아간다. 88-89

 

상징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상징의 의미를 전혀 못보는 것 사이의 불모의 대립을 넘어선 데 벤야민이 독창성이 있다......우리는 상징적인 대상들을 두 제곱으로 읽어내야, 다시 말해서 이 대상들에서 직접 일대일의 의미를 풀어내기보다는 상징법이라는 사실 자체가 징후로서 가리키고 있는 그것을 감지해내야 하는 것이다. 93

 

벤야민의 감수성은 인간이 사물의 힘에 굴해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그런 순간들 쪽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바로끄 비극의 낯익은 내용은 서서히 형식의 문제로, 대상의 문제로, 말하자면 우의 자체의 문제로 바뀌어 간다. 우의란 어떤 이유에서건 사물이 의미, 정신, 진정한 인간실존과 완전히 분리되어버린 그런 세계의 지배적 표현양식이기 때문이다. 97

 

언어보다는 사본, 말의 속뜻보다는 문자, 이것들은 바로끄 세계가 분쇄되어 생긴 파편들이고, 지나친 호기심에 사로잡힌 마음을 괴롭히는 야릇하게 읽히는 기호와 징표들이며, 불가사의한 의미를 담고 천천히 무대 위로 지나가는 행렬이다. 이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나는 우의가 우리의 시대에 다시 복원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순전히 역사적 관심거리인 고딕풍 괴물로나 루이스의 경우처럼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정신의 중세적 건강을 나타내는 기호가 아니라, 현대세계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 병리학적 현상으로 말이다. 99

 

상징은 찰나적인 것, 서정적인 것, 즉 시간적으로 말하면 단 한순간이다...이와 반대로 우의는 현대인이 시간을 살아가는 가장 주도적인 양식으로서, 순간순간 서툴게나마 의미를 해독해내는 것이며, 이질적이며 불연속적인 순간들에 연속성을 회복하려는 힘겨운 시도다. “상징은 스러지는 가운데 구원의 빛을 띤 자연의 얼굴을 보이는 반면, 우의의 경우 보는 사람의 눈앞에 얼어붙은 풍경처럼 펼쳐지는 것은 역사의 사상 死相이다. 그 얼굴, 아니 그 해골 속에서는 시의에 맞지 않고 고통스럽고 무위로 돌아간 온갖 것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역사를 세계가 수난을 겪는 이야기로 보는 바로끄적이며 현세적인 설명이야말로 바로 우의적 지각의 정수다. 역사는 고통과 쇠락의 정거장에서만 의미를 띤다. 의미의 양은 죽음의 존재와 쇠락의 힘에 정확히 정비례한다. 죽음이란 자연과 의미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9세기에 우의는 외부세계를 버리고 떠나는데, 내면세계를 식민화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100

 

안락은 고립을 낳는다. 동시에 안락은 그것을 누리려는 자를 물리적 메커니즘의 힘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19세기 중엽에 성냥이 발명된 이후로 갖가지 새 물품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복잡한 일련의 조작을 한번의 손동작으로 대치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발전은 서로 다른 많은 분야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벤야민은 노동자와 노동자와 공장 기계의 작동에 심리적으로 종속됨을 기술함으로써 이 목록을 완결한다....이 평론은 상대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은 심리상태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새로운 언어상황과 저널리즘의 타락에, 또한 대도시 주민으로서 도시의 일상생활의 나날이 심해지는 충격과 지각마비 등에 맞딱드린 시인에서 출발한다....기계와 일련의 발명품이 바로 이 이미지다. 독자들도 분명히 알게 되겠지만, 앞의 인용이 겉보기에는 역사적 분석 같지만 실제로는 우의적 성찰의 연습, 즉 벤야민의 제재인 그 독특하고 불안한 현대적 심리상태를 포착할 수 있는 어떤 징표를 찾아내는 연습이라고 생각한다. ...아우라나 카리스마는 사라지는 순간 감지하기가 더 용이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소멸의 원인은 전반적인 기술적 발명, 곧 지각의 대체물이자 그 기계적 확대인 기계에 의해 인간의 지각이 대치되는 현상이다. 103

 

연극배우들이 복제 가능한 예술작품이라는 기술적 진보에 맞부딪친 것처럼, 이야기 tale도 현대의 의사소통체계, 특히 신문에 맞부딪치게 된다. 신문은 신기함의 충격을 흡수하고, 유기체를 충격에 둔감하게 만들어 충격의 강도를 둔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신기한 것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이야기는 반대로 충격의 힘을 보존하도록 되어 있다. 기계적 형태의 의사소통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새로운 자료들을 소진하는 반면, 구전을 통한 더 오래된 의사소통을 용이하게 하는 근본적 특징을 지닌다. 이야기의 복제가능성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의 자연스러운 기능이다. 사실, 줄거리를 기억할 수 있게 만들고 또 기억할 만한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이 줄거리를 듣는 사람의 개인적 경험에 동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105

 

옛날의 이야기는 개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단발의 선택과 기회가 주어지며, 모든 것을 한번의 주사위에 걸어야 하고, 따라서 자연히 개인의 삶이 운명 내지 숙명의 모습, 즉 이야기될 수 있는 이야깃거리의 모습을 띠게 된 사회적 삶을 표현했다. 반면 현대세계(서구와 미국의 세계)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나 기회란 전무할 정도의 경제적 번영이 이루어졌다. 자유의 철학도, 싸르트르가 그 이론가인 모더니즘의 의식의 문학도 다 여기서 나온 것이며, 플롯의 쇠퇴 또한 여기서 비롯한 것인데,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사라질 때(벤야민의 의미에서 죽음이 부재할 때) 이야깃거리 역시 사라지고, 다만 아무렇게나 순서를 뒤집을 수 있는 동등한 무게를 지닌 일련의 경험들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107

 

이야기란 과거와 관계를 맺고 과거를 추억하는 심리적 양식만이 아니다. 벤야민에게 이야기란 또한 사라진 사회적·역사적 삶의 형식과 접촉하는 양식이다. 바로 이처럼 이야기행위와 역사적으로 특정한 생산양식의 구체적 형식을 서로 연관짓는 점에서 벤야민은 가장 계시적인 맑스주의 문학비평의 모델이 될 수 있다.....이야기는 장인문화의 산물이며, 도자기나 구두장이가 만든 구두처럼 수제품이다. 그리고 이런 수제품과 마찬가지로 도공의 손자취가 유약을 바른 표면에 남는 것처럼 이야기에는 이야기꾼의 손길이 남아 있다.” 108

 

 

볕뉘. 발터 벤야민의 독해는 다양한 것 같다. 읽어내는 사람마다 그 방향이 조금씩 어긋나 애초의 의도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 이야기는 다시 그곳을 응시해야지만 연결된 것이 다시 살아오른다라는 눈치이겠다.  저자의 시각을 쫓아가다보면 이렇게 근거가 확실하면서 뿌리깊다. 출발점을 분명하고 남을 수 있도록, 읽고나면 저자인지 벤야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못을 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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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매체나 특히 냉전의 개시이후 어마어마하게 확대되어온 광고·선전이 구사하는 은폐기술을 통해 계급구조를 점점 더 심하게 은폐해왔다. 실존주의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곧 우리의 경험이 이제 전체성을 상실했다는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풍요사회의 벽과 한계 안에서 나름의 논리에 따라 영위되는 개인적 삶의 관심사와, 신식민주의·억압·반혁명전쟁 등의 형태로 바깥세계에 투사된 이 체제의 구조적 결과물들 사이의 연관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서비스경제로서 우리 사회는 이제 세계에서 행해지는 생산과 노동의 현실에서 너무나 멀어졌고, 그 결과 인공적인 자극과 TV로 전송되는 경험들로 이루어진 꿈속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중대한 형이상학적 관심사들, 즉 존재라든가 삶의 의미같은 근본적 문제들이 이처럼 전혀 상관없는 무의미한 이야기처럼 여겨진 경우는 과거의 그 어떤 문명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15

 

시가전의 전사나 도시게릴라가 현대국가의 무기나 테크놀로지와 싸워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초국가에서 거리 street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경영과 자동생산의 물샐틈없는 망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국가에 구식 거리라는 게 과연 아직도 존재하는지, 오늘날 맑스주의의 이론적 문제는 바로 이런 것들이다. 16

 

T. W. 아도르노, 혹은 역사적 비유들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사회적인 것을 거부하는 정도만큼 사회를 반영하며 역사적이다. 또한 예술작품은 개인적 주관성이 그것을 분쇄하려 드는 역사적 힘들을 피하는 마지막 피난처를 나타낸다. 아도르노의 가장 빛나는 평론의 하나인 서정시와 사회에 관한 강연이 취하는 입장도 바로 이것이다. 이처럼 사회경제적인 것이 작품 속에 새겨져 있되, 그것은 볼록면에 대한 오목면, 양화에 대한 음화로서 새겨지는 것이다. 불안 없는 삶, 이것이야말로 아도르노가 보기에 음악의 가장 깊고도 가장 기본적인 약속이며, 음악은 가장 퇴행적인 경우에도 그 핵심에는 이런 약속이 담겨 있다. 57

 

변증법적 사유란 두제곱된 사고, 즉 사유 자체에 대한 사고로서, 정신은 대상이 되는 자료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고과정도 다뤄야 하며, 관련된 특정 내용과 그에 부합하는 사유양식 모두가 동시에 정신 속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수학문제를 변증법적으로 사유한다 함은 문제를 그 자체의 견지에서 인식함과 더불어, 정신이 수학적 처리를 행하면서 느끼는 방식과 그와 전혀 다른 과학적·비과학적 조작을 할 때 갖는 느낌을 암암리에 비교하는 작업도 동시에 수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변증법적 사고는 그 구조 자체에서,심지어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종류의 대상을 사유할 때에도, 근본적으로 비교하는 작업이다. 68

 

아도르노는 오늘날 우리가 반물질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헤겔의 텍스트는 반텍스트다라고 말한다. 이런 구조는 전체에 비추어야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단편들로밖에 읽을 수 없는 한 철학자가 제기하는 독특한 어려움을 설명해준다. 71

 

아도르노는 독일에서 에세이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다음에서 찾았다. 즉 독일 문필가들은 에세이의 전제가 되는 거의 변덕스럽고 비논리적이기까지 한 자유를 감수하거나, 덧없고 단편적인 것들의 와중에서 지적 생활의 힘든 수련을 쌓거나, 걸작이나 기념비적 저작이 주는 존재론적 위안에 저항하면서 바로 역사 자체의 강물 속에 서서 자신의 잠정적 구성물들을 사상이 시간 속에서 겪게 마련인 끊임없는 변신에 내맡기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73

 

변증법적 문필가의 근본적인 형식적 문제는 바로 연속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 자체의 거대한 연속성을 절감하는 사람은 마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육체적인 지각에 압도당할 때처럼, 바로 그 인식에 의해 마비되고 만다. 역사의 모든 차원이 공시적 형태로 응집될 때, 과거 역사가들처럼 단순명료한 순차적 이야기를 하기란 불가능해진다. 이제 다름 아닌 통시성과 연속성이 문제성을 띠며 단순한 작업가설이 되어버린다. 74

 

변증법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곧 변증법적인 문장을 쓰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예술작품 자체를 지배하는 것과 유사한 일종의 문체적 복종 같은 것인데, 예술작품에서 소재의 선택을 결정짓는 것은 모든 의식적 성찰을 넘어서는, 문장 자체의 생김새다. 따라서 이 경우데도 사상의 질은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의 유형에 의해 판단된다. 변증법적 사유란 사고에 대한 사고, 두제곱된 사고, 즉 대상에 대한 구체적 사고인 동시에 사유행위 자체 속에서 자신의 지적 작동을 의식하는 사고인 만큼, 이런 자의식이 문장 자체 속에 새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76

 

부정변증법의 핵심적 주장이자 아도르노의 궁극적인 철학적 입장은 이전의 미학 에세이와 평론 들에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작동한 바 있는 그 방법론의 이론적 명료화이다. 이 글들에서 우리는 예술작품의 내용이 궁극적으로 그 형식에 의해 판단되는다는 것과, 예술작품을 낳은 특정한 사회적 계기의 핵심적 가능성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확실한 열쇠는 바로 작품의 구현된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 방법론적 발견이 이제 철학적 사고의 영역에서도 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부정변증법의 실천은 어떤 관념의 공식적 내용, 예컨대 사물 자체로서 자유 및 사회의 진정한성격 등에서 물러나서 그 관념이 취해온 다양한 규정적이고 모순적인 형식들 쪽으로 나아가는 지속적인 운동을 수반한다. 이 형식들의 개념적 한계와 부적합성이야 말로 구체적인 사회상황 자체의 한계에 대해 직접적인 비유 내지 징후구실을 하는 것이다. 78

 

부정변증법은 궁극적 종합 앞에 제시되는 모든 구체적 사례에서 그 종합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부정하면서도, 또 한편 종합이라는 관념과 가치는 긍정할 도리밖에 없다. 79

 

사후 출판된 미학이론역시 예술적 실천세계의 역사적 사실들과 이 실천을 반영하는 것이자 인지하는 매개물인 추상적인 개념적 범주들 사이를 끊임없이 옮겨다니면서 미학의 전통적 기반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이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부정변증법이란 철학 자체를, 혹은 철학함의 이념 자체를 시간적 물신화, 즉 항상성과 영구성의 환각으로부터 구해내려는 시도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구체적인 연구들은 역시 변증법적 과정의 빼어난 모범이며, 특별한 계기에 의해 씌여진 것이면서도 체계적인 에세이들로서, 특정 계기와 의식이 결합해 역사의 이해가능성에 대한 순간적이나마 가장 빛나는 형상 내지 비유를 형성하는 글들이다. “앎은 그 대상과 마찬가지로 규정적 모순에 속박된다.” 82

 

볕뉘.  글이 쉽지 않다. 강연의 마무리말을 듣지 않으면 그 이전의 방향이나 설명들이 정리되지 않듯이, 마지막 한마디로 강연의 전체적인 의미가 선명히 다가오기도 한다. 저자가 반복하는 용어나 틀은 이렇게 작가들의 분석과 해석에 녹아있다. 아도르노 편에서는 두 제곱의 사유, 변증법적 사유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함께, 형식을 왜 주목해야 되는지 재삼재사 강조하고 있다. 언제나 역사화하라는 것은 보는 눈의 개수를 늘리므로 맥락과 전체성에 다가서는 것일 것이다. 특히 형식, 그리고 사회경제적 시선을 놓치지 말고, 생산과 노동에 분리된 그 지점들을... ... 책의 끝장을 덮으면서 충격적인...느낌들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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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출렁거림을 잴 수 없는 이론은 검정색이자 경색이다

오랜만의 한가한 새벽은
차가운 새소리가 옅다.
강연의 마지막 멘트처럼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끝획에 온힘을 기울인
붓의 낙점에
접힌
느낌들을 한점도 전할 수 없다.


만지작거리다
욕심같아
애꿎은 흔적만
최루액처럼 남긴다.


목련잎과
목필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와 있다.


푸르다
푸르르다
아이처럼아이들처럼 오늘은 ᆞ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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