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바람

문틈 사이
스며드는 바람

여린 새순같이
열린 마음 틈사이
불어오는

풀빛 머금고
꽃내음 우물거리고

팔등에
스치는 바람

손등을
뺨을
어루만지는

아 바람 아 바람

 

 

볕뉘. 토요일 새벽, ㆍㆍㆍㆍ비 긋고 지난 자리 알맞게 여문 새벽이 참 좋다. 끝에 걸린 푸른 쪽빛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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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처럼 '복기'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한 수 한 수를 다시 두어볼 것이다. 그러다가 왜 우리는 세상을 반성케해야한다 외치지만 자신에게는 관대하기만 했던가가 얻어 걸릴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주기는 늘 4~5년, 그 선거주기만 되면 얼마나 열광했던가도 드러날 것이다. 정당운동만이 전부로 새겨졌던 이력도 드러날 것이다. 그 중심이 버린 여백들이 얼마나 비참했던가도 다행히 챙겨질 수 있을까.

박근혜정부가 문제가 아니라 왜 30 % 가 그래도 국민을 생각하는 것이 박근혜대통령밖에 없다는 포퓰리즘이 먹히는가도 드러날 것이다. 사람만 바꿔가며 만나던 사람만 만날 수밖에 없는가도 귀퉁이 한집으로 걸릴 것이다. 우리는 왜 전체를 보려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에 안절부절 조바심만 내는지가 읽힐지도 모르겠다.

제도안을 그렇게 갈구했다면 제도밖의 균형과 안배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국회의원에게 입법을 구걸하고 할 일 다했다고 여기는 비루한 수도 읽힐 것이다.

'복기' 에 대한 자각이 생길 수 있을까.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체제들과 논쟁들 사이 흘러나간 여백들의 삶과 생각을 주어모아도 절대 늦지 않는 건 아닐까.

객관이라는 것이 있다면 ' 나' 에게까지 메스를 집도해야 겨우 제자리를 설 수 있다는 사실은 아닐까. 씁쓸함이 어김없이 반복될 우려는 소수만의 노파심일까. 쪽팔림은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감내하고 잘못을 고쳐 달라지는 것말고 다른 답이 없지 않는가.

그래도 '우리가 낫다'는 의식에 물음표를 달고 끌어내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코끼리 뒷다리도 머리도 언듯 스쳐 보이는 건 아닐까. 잘못과 잘못의 여백만을 색깔을 칠하다보면 7~80년 어느지점에서 형상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 똑똑함과 잘남의 쓸모가 발견되는 건 아닐까!

복기는 결코 혼자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흠집을 인정하는 자각과 같이 한 수 한 수 함께 꼼꼼하게 ㆍㆍ그래도 결코 늦지 않을 것이다.

 


 



진보정당 당원 노릇 8년 결산···“당신들은 온실 속의 화초”
진보정당에 대한 내부 비판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노동당원이 쓴 이 글은 진보정당과 진보정당인들의 무능 사유를 조목조목 지적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251904041&code=910100
news.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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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발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이 전반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규명하려고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내 견해로는 이론적인 위기나 실제 역사, 혹은 직접적인 상황의 현실과 변화의 조건 등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의 장구한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 17

 

우리는 경제적인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당연히 단순한 현실 순응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439

 

사용이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인간의 판단 우리는 사물을 사용하는 법과 사용하는 이유, 특수한 사용이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야 한다 과 연관되지만, 소비는 조야하고도 앞일을 생각지 않는 패턴 탓에 이러한 질문을 취소해버리고, 그러한 질문을 그저 외부적이고 자율적인 시스템의 생산물에 자극을 받아 질서정연하게 흡수하는 것으로 대체해버리기 때문이다. 443

 

1960년대의 영국은 사회적인 필요와 개인적인 필요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 상태가 생길 뿐 아니라 증대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이 시대 영국이 상점 진열장에서 풍요의 느낌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학교, 병원, 도로, 도서관 등에서는 종종 만성적인 부족을 목격하게 된다....이 분열된 사고의 마법은 너무 강고해서 깨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444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스위치를 누르면 그냥 전기불이 들어오는 줄 아는, 그런 인간이에요.” 우리는 어느 정도 이러한 위치에 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우리의 사고방식이 실제적인 관계의 넓은 영역을 습관적으로 억눌러버린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내돈, 내 조명등을 이렇듯 소박한 관점에서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념 자체가 뿌리부터 시들어 있기 때문이. 445

 

우리가 시장이 아닌 인간적 필요에서 출발한다면, 이러한 활동 분야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경제활동 자체를 판단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노력과 자원의 분배에서 생기는 균형이라는 문제까지도 적절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희미하게나마 널리 인식된 최근의 위험은 시스템을 인간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시스템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인식이 희미하다는 것은 이러한 과오의 원인을 잘못 짚는 데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것이 없으면 굶어죽을 텐데도 산업생산을 비판한다든가,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이야말로 우리가 이룩한 성장 대부분의 실체인데도 대규모의 조직을 비판한다든가, 마지막으로 우리를 불구로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적절한 사회의식의 결여인데도 사회의 압력을 비판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447

 

노동을 거래하는 지금의 체제는 결국 다른 모든 거래와 마찬가지로 제시된 가격에 판매자가 자신의 노동을 팔기를 거부할 권리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업은 시장사회에 통합된 한 부분이다. 당신이 유리한 점을 원한다면 불리한 점도 같이 가져야 한다. 그것이 파국과 혼란으로 치달을지라도 말이다. 448

 

이 경쟁적인 영역세서 중요한 점은 이제는 조직된 시장과 소비자의 개념들이 우리의 경제적 삶과 사회의 나머지 대부분을 결정한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도전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교란되어서 어떤 원칙을 갖춘 반대도 임금에 대한 요구와 파업의 끝없는 승강이와 씁쓸함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만족하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현 상황은 우리를 계속 서로 싸우게 하고, 매우 빠르게 조야한 경제적 냉소주의의 패턴을 장려하면서도 이에 대한 뚜렷하고도 실질적인 대안은 없다. 그 명백한 미래를 사실상 실현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그것을 실체화하려는 도전에 직면해야만 할 것이다. 454

 

일에서 우리 사회 대다수의 패턴은 모든 상황에 대해서 지도자를 고정할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단호하게 추진하는 것이 그들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라고 장려하는 식의 해석을 제공한다. 결국 개가 사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개 스스로가 줄을 이끌고 가는 것이다. 455

 

잠정적 진술이라는 관습은 의견을 말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특권과 합리적으로 떼어서 볼 수 있다는 데 가치가 있다. 이는 공동의 의견에 도달하려면 결국 필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노동운동의 솔직한 화법은 모든 것을 고려해보면, 인간 관리와 비밀스러운 독재자로보터 이슈들이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위대한 성과이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주의의 작동은 공격적인 주장을 하는 습관으로 인하여 해를 입었으며, 이는 분명 민주주의의 전 단계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해 외치고 때로는 공동의 과정을 개인적인 시위로 바꿈으로써 공동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인시키는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의 언어니까 말이다. 460

 

우리 삶의 다른 광범위한 분야에서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민주주의가 전국적 수준에서는 정부를 선출하는 과정으로 제한되어 있고 다른 분야의 사회 조직이 지속적으로 비민주적인 결정 양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은 현 상태대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도의 실제 권력이란 그들이 적극적으로 특수한 감정의 방식을 가르친다는 것이며,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제도가 부족하다는 것은 단박에 분명해진다. 464

 

일상적으로 만나면 대개 유쾌한 공공 관리가 왜 그렇게 자주 사회적인 보장을 전반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유달리 해를 끼치는 공무원으로 돌변하는가? 그 사람 위에 너무 많은 공무원들이 있는 것도 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일반적으로는 리더쉽, 행정의 패턴과 어조가 여전히 민주주의의 전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고객들을 다루는 사업가는 친절한 인상을 주도록 학습한다. 일반적으로 그 수준에서는 공무원들도 그러하다. 그러나 공영주택에 입주해 사는 사람들은 원래 열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공무원도 있는데, 그들은 그런 생각에 맞게 말하고 쓴다. 물론 치유법은 그들에게 인간 관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공공 설비의 분야에서 민주적인 형식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468

 

볕뉘. 이것저것 준비해서 저녁을 챙기고 나니, 피곤이 접힌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자정인근....일본사 첫모임 뒤풀이를 하고 있던 벗이 전화가 와 통화를 한다. 가까이 가깝게 울릉도라고 같이 갈 궁리중이라고... ...같이 가자고... ...  그 뒤로 책을 건네들고 본다. 문화혁명  새삼스러운 말일까?  저자는 그동안 배움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의무같은 것일지도... .자본주의가 소비자에 머무르는 인간을 양산해 쪼그라들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것도 개같은 지도자가 사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끌고가는 형국이 될 것이라고 한다. 에릭 홉스봄과 친구이자 문화연구를 평생에 걸쳐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의 지적 경향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것에 경도되자마자 그 양동이 안에 있던 마르크스주의와 그간의 축적물이란 아이를 같이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지적자산과 저력같은 것이 느껴진다.  연구가 아니라 실천의 방편이자 무기로서 이론작업에 얼마나 천착했는지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문화 앞부분에 용어설명을 읽다. 문화, 언어, 이데올로기....역사의 맥락을 짚어준다.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자장 속에 용어가 살아움직이게끔 하는 것 같다. 전체를 보려는 노력 또한 읽힌다. 1961년 저작인데 낯설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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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시민아카데미가 펴낸 인문학 잡지 <상상> 2호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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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요?'

지난 2006년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피습직후 병상에서 깨어나 한 첫 마디다. 박 전 대표가 물은 것은 대전시장 선거 판도였다.

최근 출간된 <상상> 2호도 "대전은요?"라고 묻는다. <상상>은 대전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인문학 잡지다. 이번호 <상상>의 시선은 '2015 대전이라는 도시'다. 도시 '대전'의 탄생에서 부터 현재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분량(184쪽)에 비해 두툼한 주제의식을 품고 있다.

첫 페이지는 지역 노동 현장의 목소리다. 자동차 엔진부품을 생산하는 대한이연(대전시 대덕구) 노동자의 삶이다. 글쓴이 이정림(지속가능한 공동체 연구자)이 현장 노동자(엄연섭)를 사전 인터뷰하고 현장 탐방기를 실감나게 엮었다.

노조간부는 가장 어려운 점을 묻는 질문에 "사회분위기로 인해 조직력이 약화될 것에 대한 불안"이라고 답한다. 최장집 교수가 말한 노동의 가치를 쓸모없게 만드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염려한 것이다.

대전은 아니지만 인근 충남 청양 비봉면 강정마을에서 현재진행형인 석면폐광산에 있는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장 반대 주민의 사연은 가슴 시리다. 전진식 기자(한겨레 21)는 마을 주민인 이기태 할아버지와 같은 마을에 사는 10살 소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할아버지는 지난 2011년 석면폐증 2급 진단을 받고 세숫대야에 한가득 피를 토해오다 지난해 12월 숨졌다. 같은 마을에 사는 초등학교 3학년인 10살 소녀를 보는 마을 주민들은 폐기물처리장에서 날리는 먼지와 석면광산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전 기자는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석화 청양군수, 관련 공무원들에게 말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더구나 그들의 고통에 단 1g이라도 책임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제라도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에 나서줄 것을 희망한다"고. 독자들에게는 "희망버스 또는 마음을 보내 달라"고 제안한다.

일제강점기 때 찍은 옛 '소제호'(대전시 동구 소제동) 사진을 통해 들여다 본 '대전의 탄생'(고윤수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은 대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소제호 주변에 살았던 우암 송시열과 일제강점기 때 소제호 입구에 만들어진 신사, 일본풍으로 변한 소제 공원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 '대전'의 탄생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는 자연스럽게 '도시 재생'을 벌이고 있는 현재와 이어진다. 이상희(대전근대아카이브즈포럼 연구원)는 대전역 광장에서부터 옛 충남도청사까지 원도심의 역사를 속도감 있게 훑어 낸다. 그는 176억 여원이 투여된 '목척교 리모델링' 공사와 으능정이에 165억 원을 들여 만든 '스카이로드'를 께름하게 평한다.

이용원(월간 토마토 편집국장)은 한술 더 떠 '목척교'와 스카이로드를 대전시가 만들어낸 '도시 괴물'로 규정한다. 그는 "경관을 재구성해야 한다"면서도 "자본주의적 상상력이 아닌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경관을 바로 보는 시작을 교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상희는 "원도심을 역사와 문화, 개발이 서로 공존하는 문화중심 공간으로 재생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대전시 도시재생본부에 대해서도 "도시재생이 부동산 개발의 또 다른 어휘로 사용되지 않길 바란다"고 충고하고 있다.

금홍섭(혁신자치포럼 운영위원장)의 '대전시의 무분별한 민자, 외자유치로 인한 사업 실패' 사례도 챙겨 볼만 하다. 갑천고속화도로 외자유치사업, 롯데테마파크 유치사업, 보문산 아쿠아월드 민간투자사업, 성북동 종합관광단지 외자유치사업 등을 사례로 혈세가 허투로 쓰고 있는 시정을 꼬집고 있다. 

송덕호(시민참여연구센터 과학문화위원)의 '과학 문화의 한계들'과 윤석진(충남대 국문과교수)의 '인문학과 과학기술, 그리고 문화산업'은 과학이 지역민을 위한 삶의 문화로 뿌리내리기 위한 조건과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데 필요한 화두를 제공한다.

지상대담 '경제문제 해결, 왜 어려운가'(조복현,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의 글은 실업과 소득불평등, 경제불안정이라는 화두에 대한 서로 다른 경제학자들의 입장을 비교적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조 교수는 "경제이론이 교묘히 기득권층의 이익을 우선하도록 수립되고 집행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글로 맺음하고 있다.  

이 밖에 '대전 시티즌 널 위해 노래해'(김준태 축구여행가), '대전지역 학생인권을 이야기하다'(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스페이스 씨(얼마 전 문 닫은 대안 공간)를 통해 본 지역대안공간의 방향성'(김경량 대안문화공간 운영자)의 글은 행복한 대전 만들기를 위한 구체적 고민을 안겨준다.    

'위화소설을 통해 본 중국이 현대'(신의연 서남대 중국학과 교수), '동아시아라는 화두의 여정'(윤여일 사회학자)의 글은 중국과 동아시아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알맞다.  

신명식 발행인은 " 조금은 가난하고 조금은 넉넉한 사람들이 한발짝 씩 다가가서 어깨를 기대고 살아가는 꿈을 담고 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대전시민아카데미가 연 2회 발간되는 <상상>은 지역을 기반한 인문잡지를 표방하며 향후 계간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잡지신청 및 문의/042-489-2130, tjca@hanmail.net)

태그:상상, 대전시민아카데미, 2호, 인문학잡지, 대전의 탄생

 

 

볕뉘.

 

1. 마을마다 잡지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깊이'와 '넓이' 그리고 '마음'을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렵더라도 꾸준히 해 볼 일이다. 상상구독 요청이 더 많이 들어오면 좋겠지만... ...년 2만원의 착한 가격으로 어줍잖은 글은 냉정히 편집해버리는 상상편집위원들과 편집장의 역할을 기대해보면 상상 3호는 정말 폐부를 깊숙히 찌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오마이뉴스의 허락을 얻어 전문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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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기회주의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삶이란 영원한 투쟁의 삶, 특히 자신과 투쟁하는 삶이라 생각한다...행복하게 지낼 양이면 쪼다로 살면 된다.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이다. 15

 

인민이여 안녕, 민주주의여 안녕

 

우리는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전연 겹쳐질 수 없는 이질적인 주체이면서 생뚱맞게 자신은 하나라고 자처하는 풍경을 마주한 바 있다. 그 때 거리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며 헌법1조가를 불렸다. 자신을 해방의 주체로 내세우는 보편적인 인민이라는 외양을 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회적 집단의 묶음에 불과했다. 실은 그 시위대를 조직하고 이끈 것은 16백여 개가 넘는 각각의 사회적 욕구와 이해에 따라 결집한 시민사회단체들이었다. 그리고 이 인상적인 장면은 이른바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상대함에 있어 좌파정치가 얼마나 무력하였는지를 보여주었다. 43-44 (촛불은 왜 무력한가? 무엇을 바꾸었나?)

 

1990년대 이후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들의 모임과 같은 형태를 띤 사회운동이 범람하는 것을 목격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운동에서 사회를 총체화하는 정치적 결정을 스스로 떠맡는 주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순간 사회운동은 국회를 쳐다볼 뿐이다....우리는 어느 새인가 청문회와 감사의 전문가 및 스타가 되어 맹활약을 떨치지만 사회운동을 조직하고 그것을 정치적 결정의 주체로 구성하는 일에는 무력하기만 한 진보정당의 패주를 이미 지난 십 년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파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적 대의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애쓰는 야릇한 시대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44 ( 왜 사회운동은 대의제만 강화시키는가?)

 

달아나는 사회, 그리고 사회-주의 이후의 정치

 

사회적인 것을 사회로 변환시킬 수 있도록 했던 주요 조건들(조직화된 노동자운동의 등장과 테일러주의, 포드주의에 기반을 둔 경영자본주의의 정착, 국민국가의 일반화, 현실사회주의의 존재 등)이 소멸한 지금, 과연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합리성의 원리를 발견했던 정치가 소생하거나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65 이제 더 이상 국민이란 이름으로 제공되는 집합적인 연대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안전에 따라 시장이 제공하는 사이비 연대를 구입하는 산산이 흩어진 개인들의 연대이다. ....시민연대는 국민연대의 추상적이고 얼굴 없는 익명성을 대체한다고 자처한다. 숱한 협동조합, 대부조합, 생활공동체, 화폐공동체 같은 것이 유행하고 장려되고 있다...이것이 연대의 해체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연대의 조직인지 단정하기 어렵다....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시민연대가 신속하게 시장에 의해 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66-67(대안공동체, 대안 모색은 왜 삶과 진정한 변혁을 어렵게 하는가? 바꾸는 것은 무엇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 변화의 지점을 고민하고 있는가?)

 

우리가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 퍼뜩 떠오르는 것은 그들의 법률적 고용 조건보다 흔히 한국에서 ‘4대보험이라고 불리는 사회보장의 바깥에 있다는, 불안한 처지이다. 사회국가가 만들어 놓은 사회의 이미지, 즉 국민연대의 체계로서의 사회는 그 연대를 사회보장을 통해 물질화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사회보장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회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과의 연대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고, 연대에의 가입과 소속은 사회에의 가입과 소속이란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87 ( 왜 비정규직과 실업자는 국민이 아닌가? 국민일 수 없는가? 왜 시민일 수 없는가? 왜 인간이 아닌가? )

 

프랑스대혁명은 일체의 봉건적인 특권을 폐지함으로서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뜻에 따라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에 의해 비참한 삶으로 몰리게 된 자들이 요구하는 끊임없는 변화로부터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위협을 겪도록 예정되었다. 프랑스대혁명이 선언한 인권과 시민권은, 언제나 변화란 가능하며 그를 위해 누구나 행동할 수 있음을 적어도 이념적으로 약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나아가 시민이라면 나 또는 우리에게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권리 없는 정치란 말은 정치가 없다는 것과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치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가능성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조직하는 행위로서의 정치, 그리고 그것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의 권리 즉 주권은 처음부터 자신의 이율배반,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77-78 ( 혁명의 관성은 어떻게 150년을 견딜 수 있었는가? 그 조건은 무엇이었나? )

 

동즐로 같은 이는 주권의 모순이 어떻게 사회를 발생시켰는지 추적한다. 그는 권리와 필요를 중재하는 대상으로서 사회란 것이 출현하였음을 밝혀준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부정적 효과를 제어하려 억압했던 주권의 모순이 거듭해서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그건 사고의 방향에서 그는 68혁명의 반란을 사회국가가 만들어낸 사회가 한계에 봉착하면서 마침내 다시 되돌아온 주권적인 개인의 반란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바라본다. 그렇지만 그러한 주권적 개인의 반란은 새로운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전략으로 흡수되어버리고 만다. 지금 그러한 주권적 개인의 모습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사회 없는 개인의 연대, ‘기업가적 개인의 연대 아닌 연대로 대체되어버린다. 83-84

 

제거할 수 없는 정치의 불변항, 노동

 

정리해고, 비정규직, 더욱 팍팍해진 노동강도, 재병영화된 일터의 문화, 실질임금의 감소 등은 그냥 사회적 현상일 뿐이다. 사람들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노동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박탈당해 있으며 불안정하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사회주의자도 그렇게 말하고 자유주의자도 그렇게 말하며, 노동조합운동가도 그렇게 말하고 자선기관이나 인도주의기관의 활동가도 그렇게 말하고, 마침내 바티칸의 교황도 그렇게 말한다. 모두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악에 대하여 말한다. 실업과 빈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비참한 삶에 관하여 모두 개탄한다. 노동 그리고 노동하는 자의 사회적 삶은 언제나 우리를 화나게 하고 눈물짓게 하고 또 미치게 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94 가나의 시학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정치의 연료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자본은 영속적인 실업과 빈곤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자본이 존속하려면 그러한 노동권은 제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이 적용된 이차적이거나 하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시민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의 권리에 구체적인 낯을 부여한다. 노동의 자기 영유,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통해 형성된 인간-시민이야말로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시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의 하위 집합이 아니라 거꾸로 인권과 시민권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노동권을 제거하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인간도 제거하는 것이 된다. 109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이뤄지는 유동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자유·평등·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자유, 평등, 소유라는 천부인권의 신조가 기만일 뿐이며, 그것은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즤적 관념을 은폐하는 관념이라는 것이 아니다. 외려 벤담을 추가함으로서 소급적으로 앞의 자유, 평등, 소유라는 세 가지 낱말이 전연 다른 의미로 채색된다는 점을 말한다. 물론 벤담이 추가될 수 있는 조건은 그것이 바로 상품교환의 세계, 노동이 상품이 되어버린 세계일 때이다. 따라서 덧붙여진벤담은, 결국 사후적으로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어내면서 자유, 평등, 소유라는 개념들을 새로운 사슬로 묶어낸다. 114

 

우리는 게토나 방리유, 파벨라 대신에 자신의 얼굴을 숨긴 채 세계를 향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원한을 드러내는 개인을 볼 뿐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에겐 게토나 방리유가 없는 것일까 물어보아야 마땅하다. 120

 

어쨌든 사회문제라고 명명된 문제, 무엇보다 실업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나선다. 그리고 나아가 국가는 실업과 결부된 사회문제들, 폭력, 범죄, 알코올중독,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병리현상 따위를 해결하도록 종용받는다. 이 과정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답을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정치세력(대개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집단)이 부상한다. 그들은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워 사회문제의 해결을 내세운다.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은 알다시피 실업의 위험에 직면한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끔찍한 풍경에 겁을 집어먹은 중산층들이다. 극우 국수주의 정치집단이나 포퓰리즘 정치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이를 문화적인 문제 혹은 사회병리적인 문제로 가늠하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에 고유한 실업문제이기 때문이다. 121

 

안전이 사라진 세계에서 번창하는 불안의 분위기는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전염된다. 우리 역시 덩달아 노령화 시대, 백 세 시대에 온갖 질병과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이냐고 위협하는 보험업자들과 금융업자들의 공갈에 벌벌 떤다....자본이 노동을 () 생산할 수 없을 때, 국가는 그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본을 위한 것도 자본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123

 

노동의 편에 설 때에 비로소 실업은 자신을 재현할 수 있으며 아울러 자신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실업이 노동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여겨질 때, 그것은 그저 비참한 삶의 상태에 불과할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자신을 대표할 어떤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은 지리멸렬한 사회적 사실에 머물고 말 것이다. 이럴 때 실업문제란 환경 문제, 고령화 문제, 가정폭력 문제 같은 수많은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그렇지만 그에 연루된 사람들이 조금 많다는 이유로 조금 더 중요해진 문제일 뿐이게 된다. 127

 

한 낱말이 정서적으로 쇠락한다는 것은 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김지하의 신 새벽 뒷골목에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시구에 나오는 민주주의란 낱말은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평범한 용어가 아니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말을 뇌면서 떨거나 전율했던 이들에게,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사물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128

 

노동의 새벽에서 노동은 그저 세상사의 한 부분, 즉 객관적인 사태가 아니라 세상에 관한 시점의 차이를 낳는 대상으로 주관화된다. 노동은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삶의 사태가 아니라 갑자기 내가 세상을 응시하는 입장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주관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노동에 관한시가 아니라 노동이란 대상을 통해 촉발된 새로운 주체의 시점을 표상하는 시가된다. 그러나 지금 노동이란 말은 시체말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아무 감응을 주지 않는다. 130

 

인간-시민이란 범주의 등뒤에는 항시 노동이라는 유령이 붙어 다닌다. 그것은 결코 제거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우리는 오직 정치적 공동체와 권리의 주체만이 있는 정치학을 요구하며 노동 없는 해방의 정치를 강변하는 주장이 부쩍 관심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들 역시 평등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평등이란 착취와 그를 대신할 평등이 아니라 시민 됨의 자격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평등이다. 특히나 사회국가에서처럼 포용하면서도 불평등을 생산하는 세계가 아니라 배제가 문제되는 세계에서 평등을 더욱 그런 평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자신의 지위에서 영영 벗어날 길이 없어 보여 마치 특수한 정체성을 가진 자연스런 인구학적 집단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결국 이들에서 배제란 현실은 노동의 정치에 앞서 시민권의 정치가 우선시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132

 

무엇이든 권리의 가면을 쓰고 등장할 수 있는 권리의 낙원이 나타났을 때, 전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부르주아적 권리이다. 우리는 분명 권리의 낙원에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공교육을 거부하고 무력화할 수 있는 학습자-소비자의 권리, 파업이라는 노동자의 단결권을 제어하는 희대의 권리로 등장한 손해배상청구권 등만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정체성의 정치를 비롯한 소수자 권리와 같은 것은 인권-시민권은 실체가 없는 순수한 형식일 뿐이라는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보인다. 135

 

노동을 통해 매개된 민주주의의 전환, 인권-시민권의 제도화야말로 진정으로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란 이름에 부합하는 것이 될 수 잇다.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민주화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시민권을 합당하게 규정하고 현실화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는커녕 민주주의의 탈민주화라고 부를만한 사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그 어떤 정치적 민주화도 그들이 말하는 경제의 민주화, 탈국가화, 규제완화 등의 이름에 의해 손쉽게 무효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137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상품 소유자의 사적 소유를 언제나 우위에 둔다. 그리고 노동 역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그런 세계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불평등과 착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사라지고 있는 사회국가가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연대의 다른 이름인 사회를 통해 고용된 노동자는 물론 실업자, 여성, 아동, 노년, 질병에 걸리거나 재해를 입은 자 등의 삶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오직 시장에 입장할 수 있을 때, 즉 고용될 수 있을 때에만 그런 보호와 안전을 제공받는다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권리의 토대는 오직 시장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인권과 시민권을 쇠퇴시키고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업은 사회문제도 아니고 노동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다시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민주주의로서의 정치가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141

 

종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

 

경제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경제가 정치의 궁극적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치는 사고된경제, ‘반영된경제가 아니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한 번만 제곱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제곱해야 한다. 경제는 직접 정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외려 정치가 스스로의 대상을 갖도록 함으로서 정치를 결정한다. 따라서 정치의 비밀은 정치 자체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자신의 비밀을 갖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정치 자체의 차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른 곳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정치란 순전한 형식에 속하고 그것의 실질적 내용은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식의 아둔한 경제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경제에 의한 결정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한 것을 떠올리자면 경제와 정치를 종합할 수 있는 제3의 자리를 찾고자 애쓰지 않으면서, 즉 두 사이의 불가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양자의 전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길, 그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159-160

 

알튀세르는 전체와 총체를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헤겔이 총체를 주장했다면 바로 그것을 전체란 범주로 전환한 것이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말한다. 실은 이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그의 평생의 목표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최종심급, 구조화된 전체, 과잉결정, 모순을 불균등성같은 명제들은 실은 바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것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총체와 전체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를 우리는 총체란 중심과 기원을 갖는 반면 전체란 탈중심성과 불균등성 그리고 원인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자본의 한계는 자기 자신인 것처럼, 자신을 총체화할 수 없는 자본의 한계를 전체라는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제는 정치를 결정한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경제는 근본적으로 모순에 의해 시달리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총체로서 완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정치로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177-178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결정하는 경제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시에 흔히 현실경제, 경제현상이라고 부르는 경제도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제는 두 가지 대립적인 규정의 결합이다. 지젝은 이런 대립적 규정 사이의 차이, 두 가지 경제 사이의 간극이 정치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지젝은 전부는 아닌다시 말해 그것을 완결적인 총체로 닫아버리지 못하게 하는 적대, 모순(=경제+으로 인해 정치가 등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179

 

박근혜 정권이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표하기는커녕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권은 과도한 특권을 누리는 나머지 집단에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보통 국민을 대립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은 순순히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현정권을 비판하는 사회운동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 반응은 야박하게 말하자면 짜증스럽고 성가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포퓰리즘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자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두를 대표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우리는 성실하게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착한 국민과 조금도 특권을 내려놓지 않으려고발버둥 치며 우리에게 기생하는 사회의 공적이라는 대립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인기를 누리는 정치권력과 마주하고 있다....포퓰리즘은 바로 그런 두 제곱된 사고가 불가능할 때 불투명하게 보이기만 하는 정치를 그리기 위해 만들어낸 무력한 표상일 뿐이다. 184-186

 

 

 

 

볕뉘. 어젯밤 치통이 파도처럼 밀려와 애를 먹는 와중, 다시 한번 완독한다. 저자 스스로 비망록으로 쓰고 보여주기 부끄럽지만 애써 읽어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몇달 책 속의 책과 고민을 섞어본다. 서재 속 변증법의 낮잠을 강독한 분들이 함께 들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눈다는 것은 책만이 아니다. 경험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또 다른 사유의 방법을 문득 가져가는 것이기도 하다. 책 읽는 이들에게 골방은 그런대로 봐줄 만도 하지만 이렇게 외유를 하는 것도 더 좋은 방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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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5-06-24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개인적으로 서동진 님 좋아해요.
어려운 철학적 얘기를 쉽게 풀어가려고 애쓰신달까?
아쉽네요, 좋은 강좌가, 그것도 평일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곳에서 있군요~!

여울 2015-06-25 08:53   좋아요 0 | URL
그쵸 비교적 쉽게?
하지만 어렵게 어렵게 배워야 철학은 남는 거 아닌가요? ㅎㅎ

독자로서 질문과
저자로서 견해가
서로 섞여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겠어요.

이상적인 만남이긴 하지만요....저에게도 멀리 떨어진 곳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