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자가 없으면 자아도 없는가?

Ⅲ 인간은 왜 변화하는 나를 보지 못하나?


 

경험론과 주체성외 다수 저작.

 

합리론은 주체를 전제한다. 그것에 비해 경험론은 주체 그 자체의 발생을 묻는다. 주체를 구성된 것으로서 파악한다. 이런 의미에서 합리론이야말로 보수적이다. 그 이상으로는 의심을 진행시키지 않는 지점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 자연’, 즉 인간 본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은 자연이 아니다. 정신에는 자연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인간 본성은 관념연합의 효과로서 발생한다. 바꿔 말하면 관념연합의 방식이 바뀌면 인간본성은 변화한다. 주체도 자연도 전제하지 않고 단지 발생을 묻는 것, 동일한 것이 이성에 관해서도 기술된다. “정신은 이성이 아니다. 이성은 정신의 한 변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은 본능, 습관, 자연이라고 불릴 것이다.” 발생에 관해 묻는 것은 변화에 관해 묻는 것이고, 변화의 조건을 묻는 것이다. 들뢰즈가 훔에게서 발견하고 있는 것은 철학이 그때까지 전제로 해온 관념들의 변화 가능성을 묻는 철학이다.

 

초월론적 영역은 경험적 영역을 정초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칸트 이후의 초월론 철학은 경험적 영역을 모방하는것으로 그것을 그리고, 발생의 문제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는다. 발생을 묻는 것은 변화를 묻는 것, 그리고 변화의 조건을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발생을 묻지 않는 초월론 철학은 최종적인 곳에서 변화의 조건에 관한 질문을 봉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초월론 철학의 가능성을 계승함과 동시게 그것이 잃어버린 발생의 질문을 경험론 철학에 의해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려낼 수 있다. ‘자아개체인칭을 전제하지 않는 초월론적 영역을 그려내기 위해 의미’, ‘사건’, ‘특이성의 개념을 내세웠다.

 

무인도의 원인과 이유

미셸 투르니에와 타자가 없는 세계

 

(1) 무인도


무인상태를 철학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주체도 객체도 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무인상태는 어떻게 하면 붕괴할까? 그곳에 사람이 사는 것만으로는 그 상태가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한 번에 볼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보이는 정면 외에 방이나 복도 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보고 있지 않은 부분을 나는 동시에 타자에게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자가 야기하는 효과란 내가 지각하는 대상이나 내가 생각하는 관념에 따라 주변적인 세계를 조직하는 것이다. 타자에 의해서 야기되는 주변적인 세계의 조직화는 타자가 다른 부분을 보기 위해서 이동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다른 쪽으로 이행을 조정하는 추이의 규칙에 따라 그 대상 전체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의 그저 일부밖에 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하면, 타자가 야기하는 시간적· 공간적인 효과 속에 몸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섬에서 보지 않은 것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타자가 있지 않으므로 자아도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의식과 그 대상의 구별이 성립하지 않는다. “의식과 그 대상은 이미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무인도 위에 있는 피조물은 그 자신이 무인도이다.” “섬은 인간의 몽상에 지나지 않고, 사람은 섬의 순수의식이다.” 이와같이 우리는, 감성에 의한 직관의 형식으로서 시공간의 발생과정, 나아가서는 그 형식으로 다양한 것을 수용하는 주체 내지 자아의 발생 과정을 묘사한 이론으로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커튼 뒤에 있지 않으며 커튼 뒤에 있다고 상정한다. 이 표현은 흄이 표현한 믿음에 의한 소여의 넘어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칸트의 초월론적 통각을 너머서는 것이다. 여기서 발생을 묻고, 타자가 야기하는 효과에 주목했다. 타자는 세계 속의 여백과 추이를 보증한다. 타자는 근접과 유사의 윤활제이다.라고 못박는다. 실제로 인간은 항상 외부로부터 섬과 조우하고, 사실상 그들의 존재는 섬의 무인상태를 방해한다. 섬의 무인상태가 방해받는다는 것은 대상의 대상성, 지각의 구조, 자아, 통각이라는 것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외부로부터 오는 타자에 의해 칸트가 상정하고 있던 몇몇 개념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이 칸트를 너머서는 것이다.

 

(2) 사건


주름


들뢰즈에게 초월론적인 것이란 사건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특이성이라고도 부른다. “여러 특이성들이야말로 참된 초월론적인 사건이다.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잠재성)론의 세계란 수렴한 여러 가능한 계열들의 다발이다. 사건에 있어서 계열은 분기하는 것이다. 계열이 분기한다는 것은 거기에서 다른 개체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건에 앞서서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란 개체에 선행하고 개체를 발생시키는 발생소에 다름 아니다. 여러 개체들은 그것들이 포섭하고 있는 여러 특이성들의 주변에서 구성된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가 아슬아슬한 곳에서 현실세계에 대한 봉사로 도망친 가능세계론으로 사건의 개념을 스스로 현실세계에서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상정된 사건에서, 현상에 있어서 그 실현으로 그리고 명제에 있어서 그 표현으로 향하는 정적 발생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질문되어야 할 것은 현상에서 사건으로 직접 향하는 동적 생성이다.

 

들뢰즈의 잠재성이란 개념은 필시 이 과제로부터 요청된 것이다. 그 지향하는 바는 가능성개념의 탈구축이다. 가능세계는 가능성이라는 양상하에 있는 것이지만, 들뢰즈는 이것을 실재성과 쌍으로 파악한 다음, 그것에 대립하는 다른 쌍으로서 잠재성과 현동성이라는 쌍을 제시한다.가능성이란 늘 어떤 사항이 실현된 뒤에 오는 것이고 가능성-실재성으로 생각되고 있는 발생은 참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소극적으로 발견된 발생을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이 되려면 잠재성-현동성의 축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특이성-사건이 바로 분자적인 것이 몰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다. 미세지각은 그 자체가 특이성의 입자이고 차이적=미분적이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구별하기는 불가능한 이상 아직 이화=분화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미세지각(특이성-사건)이 응축되어 어떤 역치를 넘으면 이화=분화작용이 일어난다. 잠재적인 영역에 있던 미세지각(특이성-사건)은 현동화하고 통각(의식)이 발행한다.

 

(3) 초월론적 원리

 

자아라는 통각도, 시간·공간이라는 형식도, 이성 등의 능력도 기성의 것으로 전제하기는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발생한다. 이렇게 매듭을 지은 들뢰즈는 이 도구들을 가지고 정신분석으로 향한다. 정신분석이란 일반적으로 사건에 관한 과학이다.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힌트를 얻으면서 사건의 개념을 구상하고 거기서부터 정신분석의 검토로 향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재검토하는 것으로 칸트가 초월론적 주체를 발견하고, 그 초월론적 주체에 발생의 관점에서 재검토를 더한 것이 프로이트다. 칸트는 자아를 상정하고 있었지만, 프로이트는 자아의 발생을 그린다. 또한 자아의 발생에 다소 뒤늦게 초자아라 불리는 심급도 등장한다. 자아는 자신이 현실세계 속에서 매우 약한 존재라는 것, 자신은 절대로 대적할 수 없는 외부의 권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배워간다. 자아가 그 권위를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초자아이다. 초자아는 자아를 감시한다. 아마 이것을 칸트가 양심이라 부를텐데, 그것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자아는 초자아에게 감시받으면서 에스를 길들이며 스스로 욕망의 달성을 지향한다.

 

들뢰즈는 이 발상에 이끌리는데 에스와 자아를 이렇게 비튼다. “에스에는 여러 국소적인 자아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 국소적인 자아들은 각자가 부분대상에 의해 구동되고 있다. 부분대상이란 유방, 손가락, 입술, 항문 등 인물의 형태로 통합되어 있지 않은 욕망의 원초적인 대상이다. 부분대상은 미세지각의 요소이다. 무의식은 차이적=미분적인 것으로, 미세지각의 무의식이고, 바로 그 때문에 무의식은 의식과 본성상 다른 것이다. 특이성-사건이 바로 자아를 생성한다.

 

쾌락원리의 저편프로이트.

 

전쟁 신경증, 외상성 신경증에서 보이는 반복강박. 쾌락원리가 미치지 않는 저편이 있다. 외적 쇼크에 대해 자극보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불안은 심적장치의 하나이다. 외적인 쇼크는 이곳에 유입되는 과잉에너지로 이미지화할 수 있다. 적당하면 감당할 수 있지만, 한 곳에 집중되어 생기는 것이 불안이다. 불안이란 마음이 스스로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이자 자극보호이다. 하지만 재해나 전쟁 등 돌발 사태에서는 불안 역시 준비가 갖춰지지 못한다. 이럴 때 강력한 쇼크가 생긴다. 이 경우 심적 장치는 유입하는 에너지를 구속할 수 없다. 그 에너지가 너무 많으면 자극보호의 기능 그 자체가 허물어져 버린다. 이것이 외상성 신경증이다. 심적장치는 또 불안을 증폭시켜 대처한다는 것이 재현을 반복하게 되고 만다. 꿈 속에서조차.

 

프로이트가 사변이라 부르고, 들뢰즈가 초월론적이라 형용한 작업은 여기부터 시작된다. 아시다시피 모든 생물의 목적은 죽임이다.라는 것이다. 삶의 본능은 죽음 본능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죽음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기체는 단지 자신의 방식으로만 죽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전력을 다해 배격한다. , 자기 자신의 죽음을 지향하고 있는 삶의 긴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삶의 본능은 죽음 본능의 부분을 근시안적으로 보았을 때 발견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프로이트는 여기서 탐구를 멈춰버렸다. 죽음본능이라는 초월론적 원리 그 자체의 발생은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타나토스, 중성에너지란 자아에 역류해서 생기는데 그 앞에 죽음 본능이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가?

 

우울증이란 어떤 대상의 상실에 의해 일어나는 전신증상이다. 우울증 환자는 잃어버린 대상을 자아 속에 재현함으로써 그 대상 상실을 뛰어넘으려 한다. 즉 잃어버린 대상으로 향해져 있던 리비도를자기 안에서 대상재현에 사용하여 상실을 보상한다. 이 과정은 대상집중의 방기와 대상과의 동일화라는 말로 설명된다. 대상집중은 성애적 경향을 욕구로 느끼는 에스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자아는 성장함에 따라 대상집중의 존재를 이해함과 함께 그것을 저지하고 에스의 관심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려고 시도한다. 그를 위해 자아가 행하는 것이 대상과 동일화이다. 에스는 다른 대상을 선택하여 자아는 이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이렇게 자아의 성격은 이 침전에 의해 구성된다. 들뢰즈는 이렇게 죽음 본능이 탈성화된 에너지에 앞서 존재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타나토스는 에로스의 탈성화와, 즉 프로이트가 말하고 있는 그러한 중성적이고 이동성을 갖는 에너지의 형성과 완전히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에너지는 타나토스에 대한 봉사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타나토스를 구성하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에스가 느끼는 욕구는 성애적 경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즉 에로스에 다름 아니다. 자아가 동일화에 의해 리비도를 찬탈하는 시도란, 요컨대 에로스에 대한 투쟁이다. 에로스는 생에 소란을 야기한다. 거기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긴장을 피한다는 쾌락원리에 따라 에로스를 탈성화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리고 두 종류의 본능 사이에서 자아는 불편부당하게는 있을 수 없다. 그 동일화의 작업과 승화작업에 의해 자아는 에스속의 죽음 본능에 가담하여 리비도를 정복하려고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것이 에스 속의 죽음 본능에 대한 봉사이다. 거꾸로 들뢰즈에겐 죽음 본능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탈성화된 중성 에너지야말로 이것을 구성하고 탈성화된 에로스적 에너지야말로 타나토스를 구성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질문한다. 그는 타나토스의 발생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쾌락원리는 경험적 영역을 지배하는 원리이고, 타나토스, 즉 죽음 본능은 그 지배를 정초한다는 의미에서 초월론적 원리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보아왔듯이 초월론적 원리는 경험적 원리와 불가분한 형태로, 그것과 나란히 생성된다. 따라서 초월론적 원리는 경험적 원리의 기초이기는 하지만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그만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2. 원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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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둘로만 나누는 습관은 몰지각한 것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흄의 질문이란 정신은 어떻게 하나의 주체로 생성하는가?라는 것이다. 흄에 의하면 정신이란 서로 관계를 갖지 않는 흩어진 관념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은 그 상태로는 어떠한 인식도 갖지 않는다. 정신이 어떤 의식을 갖는 것은 그러한 흩어진 관념들을 관계짓고 연합시킬 때이다. 말하자면 관념들의 단순한 집합이 하나의 체계가 될 때 인식이 발생한다. 천 번 태양이 떠오른다고 해도 내일도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느 때에 우리가 그렇게 믿는다는 사태가 일어난다. 인식이란 그렇게 해서 우리가 본 적도 없는 것, 접한 적도 없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인식은 소여의 경험을 넘어서 있다. 관념들이 연합됨에 의해 이러한 믿음이 발생하고 소여의 경험을 넘어섬으로써 우리의 인식이 성립한다. 이것이 흩어진 관념의 단순한 집합이 하나의 체계로 생성함에, 요컨대 정신이 하나의 주체로 생성함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관념연합이라는 이론은 확실히 저것보다는 오히려 이것이를 설명할 수 없다. ”왜 하나의 특수한 의식 속에서, 이러이러한 순간에, 이 지각이, 다른 관념보다도 오히려 이 이러이러한 관념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 다른 관념보다도 오히려 이 관념이 환기된다는 것은 관념연합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두 관념들이 상상 속에서 자의적으로 접합될 때조차도, 두 관념을 비교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그 특수한 정황. 이 정황이라는 개념은 흄 철학 속에서 항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러면 흄은 잘 알고 있지 못한 채 정황을 개념화하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흄의 연합설이라는 철학적 이론은 지각, 관념, 경험, 믿음, 넘어섬, 그리고 정황이라는 요소에 의해 구성된 복잡한 것이 된다.

 

철학연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철학자에게 사유를 강요한 어떠한 질문, 그 철학자 본인에게조차 명석하게 의식되고 있지 않은 그 질문을 그려내는 것, 때로는 그 철학자 본인이 의식해서 개념화한 것도 아닌 개념마저 사용해서, 때로는 그 대상을 논하기에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를 뛰어넘는 것조차 꺼리지 않고 그 질문을 그려내는 것, 들뢰즈는 그것이야말로 철학연구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철학자의 의식을 넘는 것으로서의 사유, 즉 말해진 것과는 다르게 파악될 수 있는, 말해진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말해진 것 이전에 위치하는 것으로서의 사유. 들뢰즈는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파악하여 사유의 이미지라 부르고 있다.

 

(1) 데카르트는 모든 전제를 제거하고 자신의 철학을 개시한 것일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제 1의 진리이기 위해서는 사람은 자아(), 사고(생각한다), 존재(있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나는 사고한다의 순수자아가 개시와 같은 외관을 드러내고 있어도 그것은 그 순수자아가 자신의 전제들을 이미 경험적 자아 속으로 되돌려보낸 결과일 뿐이다. 사유의 이미지는 이렇게 철학자가 스스로 사유한 것을 말로 분석해낼 때 암묵적인 전제를 폭로하기 위한 도구이다.


(2) 금이간 코기토: ‘생각하는 나가 나의 존재를 규정한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이것만으로 나의 존재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또한 어떠한 형식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나타나는지 알 수 없다. 나의 존재는 어떠한 형식에 있어서 규정되는 것인가? 바로 시간이라는 형식에 있어서라고 칸트는 대답한다. 시간 속에서 비로소 생각하는 나의 존재가 규정된다. 그 때 사고하는 나(능동적 자아)와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수동적 자아)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따라서 나는 한 수동적 자아로서 규정되는 것이지만, 그 자아에게는 사고하는 다른것이다. 이것을 랭보는 나란 한 사람의 타자이다.”라고 한다. 칸트는 자아 속의 균열을 발견한 것이다.

 

데카르트가 다루고 있던 질문을 비판하는 것에 의해 행해지는 새로운 질문의 발견과 개념의 창조. 이것이야말로 질문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식이고, 개념을 창조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철학에서조차 인간은 잘 이해되고 있지 않다. 혹은 잘못 설정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문제와 관련시켜서만 개념을 창조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와 시뮬라크르

 

철학은 어디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만드는 것,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신화와 영혼의 동요를 필요로 하는 모든 자를 고발하는 것, 그저 그뿐.

 

루크레티우스는 가능한 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극히 적은 것으로 족하다.....그러나 영혼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기법이 필요해진다고 기술하고 있다. 들뢰즈는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자연의 관념이다. 이것은 구별을 가르치는 관념이다. , 인간의 삶 속에서 무엇이 자연에 속하고 무엇이 자연에 속하지 않는지, 그것을 자연의 관념은 가르친다. 자연스러운 관습도 있고, 그런 규약도 있고, 자연권이라는 것도 있기에 발명과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 발명이란 자연 그 자체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은 신화와는 대립한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의 습관이나 규약이나 발명이나 산업이 원인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 뒤섞이는 신화와, 신화에 의해 인간의 감정과 작업 속에 야기되는 거짓된 무한의 결과인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는 자연주의자다. 그는 신들에 관해 말하는 대신 자연에 관해 말한다.


1. 방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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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꿈을 꾼다. 치과의사가 나오고 전직 대통령이 겹쳐온다. 날기보다는 떠 있다. 가파른 경사 위에 자연스럽게 떴다 안착하는 법을 배운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런데 왜 불안한가. 꿈을 접으며 그래 그래도 된다. 안심하면 돼.


-4


꿈 속에 꿈. 그렇게 몇 번 거듭 다짐을 한다. 


 -3


 작업실이 썰렁하다.  작업을 하다가 늦은 점심하러 간다. 맞파람에는 제법 버거운 느낌이 드는데, 오늘은 벨로가 괜찮다 싶다. 식사를 하고 식당 난로가 마음에 들어 묻는다. 오방히터 어디서 산 거예요. 하니 저기 다리 근처 티마트에도 있단다. 2년 썼는데 하나 더 살려고 한다고....그래서 달린다. 더 작은 용량의 히터가 있어 미니벨로 짐받이에 싣고 간다.


-2


책들이 손에 잡힐 줄 싶었는데, 마음은 싱숭하여 자리잡지 못한다. 


-1


첫 꼭지가 가로등이다.  빛과어둠.은 선악처럼 우리의 일상의 절망과 희망을 담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늘 거창했던 것이다.  그 커다란 대문자가 작게 드리워지면 어떨까. 터널을 빠져나오듯, 터널로 빨려들어가듯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 빛나지 않더라도 그 가로등만 보면 따듯한 집에 다가서는 느낌이나 안심이 자리잡기도 할 것이다.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빛이라니, 눈이 폭폭 내리는 소리까지 들려주는 주황빛이라니....인기척을 닮기라도 하듯...


0


내 안에 드러선 대문자들을 조금씩 균열내어 봐야겠다. 그러다보면 나의 입말들도 작아지며 옹알옹알거릴 것이다. 그러다가 졸졸 흐르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물살을 막는 척하는 작은 돌알갱이도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아진 말들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알려건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큰말들에 자갈을 물리고 싶다. 더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1


점점 작아지는 적어지는 단어와 언어와 말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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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본> 2인분이상에 끌려 다가서면/ 3인분부터 주문을 할 수 있다/숯불.가스우삼겹 오뎅탕 계란찜 라면 여름이라면 빙수까지. 열한가지/6인분을 소화하지 못하면 나올 수 없다. 나갈 수 없지./어쩌지 못하는 쯔양. 어쩌지 못하는 포장.라면먹고 갈래 그냥갈래/젊은 부부는 오늘도 어쩌지 못해 빈 테이블. 아무 것도 못해 빈 겨울./시계추같이 왔다갔다 어쩌지 못하는 봄. 어쩌지 못할 밤./'서울의 봄' 아아-여기는 바다의 밤.겨울바다.바다봄


-3


날이 차다. 숙제를 풀려고 끙끙대다 연락하길 수 차례 드디어 통화는 되고, 어이없다시피 문제가 풀린다. (을들은 편한 길만 생각하지 자신의 힘을 가늠할지 잘 몰라 정들에겐. 정들은 병들에게 점점 좁혀들이 밀지 드러나도록.)


-2


영화나 문학에 멀어진다. 아니 멀어졌다. 더 더구나 이슈가 되거나 많은 관객들이 몰리는 영화는 더욱 더. 집안 이십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봐야되나 싶기도 일터 삼십대와 이야기를 나누다 작품성이 좋다는 말에 이끌려 혹하기도 한다.


-1


문학이 문학밖을 거닐거나 영화가 영화밖을 거닐 수가 있을까.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주인공이란 인물과 대위의 레퍼토리란 벽에 갇혀 그 안을 맴맴돈다. 


0


표현의 자유란, 픽션이란, 단체관람이란, 언론이란.....
















1


두 책들 사이를 번갈아 오가고 있다. 진도가 좀처럼 나가지 않아 걱정이다. 무척 잘 읽히는 책임에도 홀로 주춤거리는 마음때문에 그런 듯싶다. 새벽에 일어나 읽기를 이어간다.


2


이 책의 공유-물음은 기술이 인간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꾸는가이다. 내가 얼마나 바뀔 수밖에 없는가이다. 예전보다 얼마나 바뀌고 있는가이다.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들. 확신이라고 여기는 것들. 그 뿌리가 얼마나 부실한지 알아보는 것이다.


3


<서울의 봄>을 마지막쯤 미친듯이 좋아하며 쉬-를 누는 전두광의 장면, 광주 오적을 되뇌이며 데모하던 장면, 화장실로 향한다. 마저 볼 수가 없다. 파티장면을...


4


자끄 엘륄은 자신의 말들을 믿지 않는 세상을 나무라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을 펼치기를 바라고 연구에연구를 거듭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 유사한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 내고 싶어 하는 책들이 나와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 부분들을 중동내고 또 열심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다른 눈을 만들어낸다. 


5


기술이라는 X가 무엇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일상을 어떻게 엮고 있는지, 생생히 볼 수 있다. 날렵한 대국처럼 그 한수 한 수가 놀랍도록 밀도가 높다. 이렇게 다가서주어 고맙다. 늘 늦은 것은 없다. 지금이 가장 빠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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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자컴퓨터, 양자 역학 영상들을 다시본다. 삼프로 초청강연이라든지 교수 초청강연이라든지. 하지만 막히는 부분, 적절한 비유일까. 한 번 그 비유들이 박히면 다른 방법들이나 길들을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식상하지 않은 다른 접근사례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3


최근 신상의 변화는 없지만 어떤 제안에 대해 궁리중이다. 아니 궁리당하고 있다싶다. 제안자의 막다른 맥락과 고려해 좋고 나쁨의 결들을 다양하게 맞추고 있다. 극단의 불리와 다른 끝의 유리까지. 놀이같은 방법이 나올 수 있을까. 감정도 관계도 다치지 않는 그런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통화문자를 넣었지만 연락이 오지 않는 며칠 째 날이다. 주변을 탐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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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밥집 사장님 식당이름이 '안다미로'다. 인심이 넘쳐난다 싶지만  주요 관찰 지점이기도 하다. 동네 사람들의 편린을 읽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몸에 냄새가 나서 아무 식당에서 받아주지 않는데 늘 반갑게 맞아주는 광경도 목격한다. 사장님에겐 손님들의 사연이 박혀있다. 좋은 일 나쁜 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생각들도.....채널에이와 조선티브이와 막장연속극이 루틴이긴 하지만 따듯한 밥, 따듯한 말, 간간이 어려움을 품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방앗간같은 곳이기도 하다. 


-1


대면한 적 없는 인연이지만, 사람과 삶의 터전에 대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아요'를 누르다가 친구가 되었네요란 엽서와 선물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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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섬세하고 또박한지 글 과 선물에서도 느껴진다. 허투루 쓰지 않는 단어와 말이 정갈하다. 백 번도 더 다녀왔다는 시작말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1


우리들은 과정과 방법에 천착하지 못한다.  짧게 소비되는 것은 비단 상품만이 아니다. 방법들과 과정들의 잔뿌리에는 수많은 답이 달려있다. 다만 우리시대가 보지못하는 인간들로 넘쳐나기 때문에 안보이는 척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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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주류의 시인, 중년 시인이 한 말이 생각난다. 수십번이 아니라 수백번 등단을 위해 두드렸다한다. 될 때까지. 그 간절함들이 이 책에서도 읽힌다.


3


잘 되던 식당이 옮기면 안된다. 정말 유명한 과메기집에 들렀는데 이사를 갔다. 그런데 맞은 편 횟집의 과메기가 특수를 맞는다. 무슨 일일까. 아 지도를 찾아보니 다른 곳에 있었다는 걸 느낀다. 하지만 이 맞은 편 과메기집에서 청어과메기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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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편리도 그렇게 시작했다.  친해지기 위해서 걷고 달리고 타고 먹고 마시고 자고 놀고 손님들을 들이고...이사하고 이사하고 사고 배치하고 또 사고 옮기고 몇 번의 계절이 익고나서야 몸에 배인다.


5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름길을 알고 있다. 닿는 곳이 어디란 것도...또 다른 방법과 과정을 찾아야 한다.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어떤 내력이 있는지, 지역이 어떻게 변해왔는지...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요. 우리가 하는 일은 단지 그들이 가진 지혜가 드러나게 해주고, 그것이 잘 쓰이게 하는 것뿐이에요./주민참여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다. - P22

지역관리기업의 문제의식이 확산되어 주민 중심, 관계 중심, 정주 목적, 생태적인 목적의 도시정책이 논의되고 제안되어 실행되기를 바란다. - P27

사회적경제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인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걸음 더 나아가 관계를 맺고 협력하고 연대하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다중이해당사자 구조/ - P58

설립 전 전문가 진단과정 1-2년; 이 과정에서 현재의 주체는 물론 잠재적인 주체들과 머리를 맞대고 서로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 이야기하게 된다. 현재와 미래의 주체들이 각자 사업 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고, 각자 어느 정도 참여할 것인지 서로 가늠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방앗간,정미소) - P63

무엇을 협동할 것인지, 어떻게 협동할 것인지, 어떻게 구성원들이 각자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도록 할 것인지 그러한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지 않고 시간에 쫓기고 상황에 서둘러 설립하다보니 나중에 문제가 터지는 경우가 많다. / 자신이 처한 현장에서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협동하는 자세를 기르는 것. - P65

신임 상임이사는 6개월간 이미 설립된 지역관리기업의 상임이사를 따라다니며 연수를 받는다. 일종의 도제방식이다. (현장성과 관계성의 확보) - P76

자체인증제도: 무엇보다고 그 조직의 주체들의 의식과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 과정의 근거가 되는 문서는 헌장과 메니페스토이다. - P86

지역관리기업의 경제활동은 "근린서비스와 사회적 요구, 노동권의 조화"를 이루며 "정의와 권리의 가치", "환경과 연대의 가치"를 지키면서 "더욱 인간적인 목적을 가지는 도시화"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역관리기업은 이익 추구하는 단일 논리가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를 개발하는 경제적 목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통합하고 사회관계를 재창조하는 사회적 목적, 주민들과 공공 부문 당사자들의 실질적인 참여를 도모하는 정치적 목적을 동시에 가지는 복합적인 논리에 바탕을 둔다. - P98

정치도 못하는 것들을 지역관리기업이 한다: 궁극적인 목적은 서로 돕는 관계를 만들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 즉 ‘인간의 발전‘에 있었기에 장사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과 같은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들이 서로 돕는 지역사회를 만들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구상이다. - P119

지역관리기업이 칸막이식 행정을 통합할 수 있다: 사회관계를 우선 고려하여 거래한다. 공공질서를 다룰 때도 주거 정책, 교육 정책, 사회 불평등과 같은 다양한 측면을 고려한다."/ 사람만 사회에 통합해서 될 것이 아니라 지역도 사회에 통합되어야 제대로 된 통합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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