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대상이 내게 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에 의해 수립되어야만 한다. 요컨대 내가 그것을 그 총체성 속에서 수립한 경우에만 그 대상은 총체적으로 나의 것이 된다. 완전히 나에게 속해있는 유일한 현실은,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나의 행위이다. 24

사물과 나의 관계는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응결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 관계를 순간순간 재창조한다. 어떤 관계는 죽고, 어떤 관계는 생겨나며, 또 어떤 관계는 부활한다. 끊임없이 그것들은 변화한다. 매번 새롭게 지양함으로써 그 지양된 것이 나에게 주어진다. 26

순간

나와 대상을 분리시키고 있던 이 거리의 덕분으로, 나는 대상 쪽에 몸을 던질 수 있어서 운동이며 초월성일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거리를 제거하자마자 나와 대상과의 이 응결된 결합체는 벌써 하나의 사물적 양식으로만 존재하게 된다.(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르스티포스로 시작한 오늘을 즐겨라하는 쾌락주의에 대한 반론) 32

그러나 고착되어 있는 순간은 결코 새롭지 않다.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순간은 새로워진다. 바로 ㅈㅣ금 출현한 형태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배경이 뚜렷하고 분명해야만 자신의 모습도 명확하게 ㄷㅡ러난다. 나무 그늘의 시원함이 귀중한 것은 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의 길가에서이다. 휴식은 고딘 일과를 ㅁㅏ친 뒤의 편안한 긴장 이완이다. 33 향락의 한순간 속에 모든 과거가 집적되어 있다.

나는 자신의 미래를 바라본다. 모든 ㅎㅑㅇ락은 내 기획을 앞으로 투사하는 기투이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서 과거를 추월하는데, 과거란 미래의 ㅇㅣ미지가 응결된 세계에 다름아니다. 34

사라ㅁ은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유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 사르트르(존재와무)도 밝혔듯이 인간 존재는 사물처럼 응고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ㄴㅗ력한다. 이것이 바로 기투이다. 인간 존재는 기투의 형태하에서 실존하고 있지만 그 ㄱㅣ투는 죽음을 향한 기투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목표를 향한 기투이다. 82

헌신

타인의 존재를 확립해 주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고, 그 도구를 사용하여 타인은 자기 자신을 확립한다. 오로지 그 자신만이 ㄴㅐ가 준 선물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를 만든다. 102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새로운 출발점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헌신에 대한 검토가 ㅇㅜ리에게 가르쳐 ㅈ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헌신한다는 ㅈㅜ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헌신이 내세우는 목적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ㅇㅜ리는 타인을 위하여 우리의 자유를 포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ㅎㅏㄴ 사람을 위하여 행동할 수도 없고, ㅇㅏ니 그 어떤 ㅅㅏ람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08

소통

나의 존재가 타인과 소통하는 것은 오직 내 존재가 관여한 대상들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보상되는 것은 ㅇㅏ니라는 사실을 감수해야 한다.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기획이 있고 어떤 기힉들은 한순간에 끝나기도 ㅎㅏㄴ다. 그러나 그 어떤 기획도 내 존재의 총체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총체는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24 우리는 행위를 ㅎㅏ고 있는 한에서만, 다시말해 분열된 존재 속에서만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 124

소통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우선 필요하지만 누구와 소통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소통할 것인지를 아는 일도 여전히 중요하다. 남들로부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아무 동의나 마구 구하는 것은 그 역시 ㅎㅓ영에 불과하다 125

행위

어떤 순간도 영원성에 합류하지 못한다. 황홀과 고뇌는 다시 시간 속에 자리 잡는다. 그것들 자체가 기획이다. 모든 사유, 모든 감정이 기투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인생은 전진이 아니라 순환이다. 152



자유는 선택하는 자유일 뿐,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 동시에 “실존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 왜냐하면 자유란 실존의 원초적 존재 양식이므로. 168

사르트르나 보부아르의 글에서 그냥 “자유”라고 지칭된 대부분의 주어들은 자유라는 추상명사라기보다는 실존적 ‘인간‘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 본문에 “인간은 신 앞에서 자유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 “자유”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한 기획을 앞으로 투사하는 실존적 인간‘을 의미한다. 170

인간에게는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영역도 있다. 태어난 국가, 부모, 외모, 능력 등은 선택할 수 없는 강제적 조건이다. 이것을 사실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와 사실성이 합쳐진 존재이다. 그러나 이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뛰어넘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주체인 나의 선택과 자유에 달려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내 인생을 선택하거나 살아 줄 수 없다. 174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를 투사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존재하게 한다. 한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함으로써다. 그처럼 사람은 자기 이상의 것을 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초월에 비추어서만 인간은 사물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초월의 한복판, 즉 중심에 있다. 인간은 우주, 즉 인간 주체성의 우주 이상의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없다.....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떤 해방이라든가 어떤 일정한 일의 실현이라든가 그러한 목적을 자기 자신 밖에서 찾음으로써라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또 초월성과 인간이 자신 속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우주 속에 처해 있다는 의미로서 주체성과의 관계, 그것을 우리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볕뉘.

0. 낯설 수도 있겠다. 철학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리오타르가 왜 철학을 하는가에서 말했듯이 끊임없이 반추를 거듭해 새롭게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1.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 민중사회학 강좌, 한완상교수의 강의는 인기가 있었다. 대형강의실에 학생들로 가득차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혈기충천한 대학 신입생은 국정교과서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이 한마디 말로 흔들렸고, 일상에 분개했다. 즉자적 존재, 대자적 존재. 그 말이 여전히 유효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대자적 존재로서만 자신을 위치지은 것은 아닐까?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국내에 잘못 소개되었고, 아직도 그러한 듯하다. 그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3권의 저작자이며 맑시스트라는 사실도 제대로 읽히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뭔가 쓰려고 했다면 명확한 목표물이 있어야 한다. 권총의 탄환에 비유하는 그는 대자와 앙가주망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너‘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2. 시몬드 보부아르의 이 책 역시 그 결을 같이 한다. 한 세대이상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에게 묻는 너에게 되묻는 즉자-대자의 물음은 유효하지 않을까? 철학이 늘 유효한 것처럼....우리의 일상은 무궁무진하다.

3. 모든 사람은 혼자다 - 몽테스키외는 자신만의 서재에서 모든 연을 끊고 홀로 지냈다. 글렌굴드도 모든 것을 끊고 자신의 음악을 온몸으로 연주해내었다. 스스로를 되묻는 일은 우주를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도 홀로 서지 않으려는 우리의 암묵적 증상을 깨뜨려, 너로 가려는 몸부림이자 또 다른 확장이지 않을까

4. 총체성, 전체성 - 이란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다. 전체를 조망하려는 끊임없는 사유이자, 대상의 너머를 보려는, 달의 이면을 보고자하는 변증법적 사유방식이다. 단순한 종합을 말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긴장들...분석과 해석의 너머 다른 사유를 찾고자 하는 디딤돌 같은 것이다. 뒷 장에 몇가지 개념을 훑고 읽으면 좀더 나은 접근이 될 것 같다. 시인들이 자신의 시집에서 즐겨쓰는 단어들처럼...몇가지 개념어에 충실해보는 것도 좀더 나은 철학읽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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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


시한테도 미안하고, 산문한테도 미안한 미시미산을 시산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틀이라는 것이 비의식, 무의식에 가까운 것들을 배경처럼 결정하기에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시산문의 여러편에서 말하고 있다. 중간 이피의 그림과 섞여있고, 시산문을 시로도 옮겨놓아 그 작업의 행간도 읽을 수 있다. ‘않아‘라는 필명으로 게시한 카페의 글에는 시간의 공백이 있다. 다름아닌 49일의 흔적이다. 죽음을 형상화한 시이다. 그 가운데 ‘아님‘이라는 시가 겹친다. 주문같은 시. 아님이 아닌 아닌 것이 아닌 아님은.......


시산문에는 유독 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누구 알아주고 규정하든 하지 말든 상관없이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하는 찰나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그녀의 시였다고 고백한다. 아닌 것은 아닌 것과 연결된다. 웅웅거리는 소리도 없는 것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들의 소리를 찾아내고 말로 다듬는 일. 말들을 조탁하여 언어를 만드는 일. 언어를 거르고 걸러 증류하듯 한방울 똑 똑 떨어지는 일이 시라고 말이다.


형상화되자마자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 늘 ㄷㅏ시 읽어도 다르게 읽히는 시들. 그것이 시라고 말한다.


그래서, 선입견을 버리기로 한다. 않아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어떤 직업을 가지든 시산문에서 말한 것들을 그대로 안기로 한다.


볕뉘.

청문회를 본다. 대선주자들을 본다. 국회의원을 본다. 사회활동가들을 본다. 페이스북 친구들을 본다. 마누라를 본다. 아이들을 본다. 일터 동료들을 본다. 나를 본다. 내 안을 들여다본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닌데..이것은 아닌데.....작품은 시의 집 안에 웅크리고 있어 시 밖으로 나오지를 못한다. 시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은 소리에 묻히고..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저편으로 사라진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시 밖으로 나오려는 언어의 산문은 확성기같은 정책의 소리에 묻혀 모기 소리만큼 앵앵거린다.


이렇게 맘마라는 소리도 못내는 이건아닌데 이건아닌데는 웅웅거리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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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사람이다 - 후장사실주의자의 소설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었다. 그러다가 시집을 한권 읽었고, 절반 정도 남은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를 마저 빠른 속도로 읽었다. 신경건축학란 새로운 학문이 다가온 것처럼 서문과 책날개는 설레발을 치고 있어 혹시나 했다. 성당, 도박장, 놀이동산, 할인매장 등등....빅데이터를 구하기 쉬워졌고, 뇌과학을 접목시킬 수 있어 이전에 감으로 느끼던 것이 명확해졌다. 이런 기술과 가상현실이 접목되면 놀라운 효율성을 가져오는데,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인간, 뇌의 가소성으로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조심스러운 우려가 있다. 하지만 과학과 건축 사이 여전히 사람이 있다. 흘러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이를 구별하게 만드는 사람말이다.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다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과정을 겪어내는 사람.

2. 관계 맺기 - 자아계발서인지 심리학서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자아계발서로 하면 더 많이 판매될 수 있다고 한 것일까. 컨셉은 온통 이 분위기이다. '발라낸 자아'는 더 없이 위태로운가. 서두에 은밀한 동반자로 11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내부에 이런 마음속 동반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유형을 파악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서기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한다.

 

3장은 그래도 보아줄 만 할 것 같다. ‘자아의 근원은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온다‘, ‘다른 사람없이 나도 없다‘ ‘다른 사회적 존재들이 없이는 자아는 감정도 형성할 수 없다‘라고 하며 '발라낸 자아'는 있을 수 없다라고 한다. 갓난아이가 부모와 관계로부터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적인 자의식은 저절로 생겨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자의식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매번 변한다. 자아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라던 철학자 토마스 매칭거의 말은 지극히 일리가 있다. 196‘  

며칠 전 페이퍼에 언급한 생산주의 자아와 소비주의 자아가 겹치기도 한다. 자본주의 초기의 가치나 개선을 해나가려는 생산주의 자아가 이제는 ‘소비주의 자아‘로 산개해서, 뿔뿔히 흩어지고 통일성조차 찾기 어려워졌다고 말이다. 테리이글턴이 그런 자아로는 지성적 진화주체로 설 수 조차 없다라고 했다. 현재의 무한 반복이라고 말이다. 자아는 갈 곳을 잃어 더 이상 존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일의 늪, 성과의 늪과 자학적인 채근의 반복. 결국 돌아오는 것은 유사번아웃증상들이다. 곁의 관계는 사라지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나로 고립되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집요하게 자아를 사물로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고정된 무엇으로 사회성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발라낸 자아'와 개인의 신화나 이데올로기로 모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주제의 3장과 다음 장은 갈등, 그리고 이별로 책을 구성하고 덮는다. 이 책 역시 교육학, 사회학, 심리학, 행동연구, 신경학 등등 다른 학문들의 흐름들을 차용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복잡한 표현들을 쓰기는 하지만 아들러의 저작에서 자신을 보는 관점, 사람들 사이 차이점, 관계를 맺는 법 등에 대한 설명보다 기본적인 사항들을 훨씬 모호하고 어렵게 설명하고 있다. 결론은 독립된 자아를 잘 간수하는 것으로 끝내는 그냥 자기계발서인 것 같다. 너에게 향하는 방점이 희미하기에 말이다. 그래 만국의 삶이나 살아가기가 비슷한 걸로 결론내자. 이 하늘 아래서는. 잠정적으로 자아에 대한 가치 전도가 필요한 것으로...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없다고 말이다. 사회 관계도 말이다. 잠정 결론이다.

3. '이틀' - 양말공장 상무(50대후반)의 의도치 않는 이틀동안의 땡땡이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목련이 나온다. 이삼십년을 연립주택에 살면서 한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목련나무를 보면서 아이에게도, 할머니에게도 묻는다. 정말 여기에 있었느냐고 말이다. 젊은 작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짧은 단편에 싣고자 했다. 그래서 그 이틀은 호흡이 가쁘다. 땡땡이 치고 싶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아마 50대 중반쯤이 되어서야 느낄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연민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디테일은 연민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볕뉘. 후장사실주의자. 도대체 뭔말일까 궁금했다. 후장사실주의자들이 있다는 서점주인의 말에 갸우뚱했다. 후장이란 내장 마지막부분..음 그러니까 막장같은 것인가 보다...사실주의? 리얼리즘....1920년대 초현실주의가 판을 치던 때, 이 흐름에 맞서 잡지 한권을 낸다. 이백여부를 만들었지만 팔린 것은 이십여권..그것도 주거나 강매한 것들....정작 보게하려는 농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들 불쏘시개로 쓰이는 그 잡지가 유일하게 한권 남아...한 비평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후장사실주의....그러니까 초현실주의에 맞서는 뱃 속 저 막장이 찌릿해져오는 리얼리즘. 허구이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같은 기록문화를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나름 해석했다. 이 역시 잠정적이지만...그 작품이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단편이다. 새서울백지화계획도 나오고 영친황의 손자 이구도

나온다. 무수한 참고도서도 나오고, 이 저자를 인터뷰하다 후장사실주의자가된 평론가도 나온다......건축, 공간......사람.....환대.......우리는 어쩌면 시공간도 이론도 관계도....모두 낭떠러지같은 위기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디쯤에 있는지조차도.....뱃 속 저릿한 생각들이나 일들은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여기 저기, 저기 여기일까.....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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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원에 커피 오지, 막걸리 오지, 안주 오지. 이쁜 아가씨까지 와서 술도 따라주고 놀아주지...2시간 남짓 앉아 있으면 2만원 정도 더 주지만...텅빈 들판에 오토바이 소리 나면서 들판 어른들 다 신났지 뭐.”

논두렁 밭두렁에서 ㄷㅏ방을 이용하는 주 고객은 70-80세 노인들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과도 다 떨어져 살고 있는 노인들은 몸이 허락하는 한계 안에서 근근이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꾸리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로 표현하는 관계의 단절, 혼자 ㅅㅏㄹ다 죽는 ‘무연사회‘가 먼 일본의 일만은 아니다.

사회보험을 통해 사회와 공동체가 수발을 부담하자는 취지로 2008년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만 할 수 있는 제도적 한계는 농촌의 변화무쌍한 삶의 리듬을 따라잡지 못해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통적으로 노인수발을 담당해온 가족과 여성을 대신해 다방 아가씨들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것을 신속하게 제공해주는 ‘효율 성적‘ 측면에서는 다방을 따라잡을 만한 제도가 없다. 단골을 만들려고 하는 서비스겠지만 집을 청소해주고 반찬도 만들어주고, 지나가면 꼭 인사하고 가는 이들이 매일 노인들 사이를 오간다.

“다방 아가씨들의 잔소리에 자주 씻고, 면도하고, 옷도 깔끔하니 입고 다니는 노인들을 보면 다방 많은 것을 동네 흉으로 볼수만은 없다.” 기계다방 골목을 걸으며 The U&I 잡지에서


볕뉘.

0. 버스 기계정류소에 내리면 500미터 사이에 다방이 20여개나 있다한다. 이 에세이와 이어지는 꽁트를 읽고 잔상이 남아 이렇게 옮긴다.

1. 어떤 생각이 드는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농촌마다 가을추수? 농작물 수확기마다 다방이 곳곳에 생기면서 푼돈을 훑고 지나간다는 이야기.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늘어간다. 어떻게 여기시는가?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2. 생기와 감정 -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제도가 이런 것들을 문서화할 수도, 흐름도 만들 수 없겠지. 살아간다는 것,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이렇게 또 한해가 지나가듯이 흘러가는 것이라면...이성과 냉정의 공무원 스타일 일처리로는 감당하더라도, 감당하고자하는 공무원은 왕따이거나 과로로 쓰러질 것이다. 스러지는 삶들은 애정을 갈구한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삶의 건기를, 건조한 하루를 어떻게 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3. 구매자는 남성이 대부분일 것이다. 낙원다방, 새끼쳐서 다른 다방을 차린다해도 근근히 풀칠하는 정도일 것이다. 인생에서 갈 때까지 간 사람들일까. 궁금하다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 감정서비스와 감정노동...그야말로 창조경제인가...그 시장을 찾아냈기에 상이라도 주어야 하나...

4. 인생에 유치한 것은 없다. 냉정한 행정이 읽지 못하는 곳. 순환되는 감정의 흐름을 읽을 수는 있을까. 그렇게 하면 해석이 달라지나. 감정과 활력...우리는 그런 것을 쫓기나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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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6-12-21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르신들이 환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라,
할말이 아주 많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말줄임표로 대신합니다......
생기는 들고남이 있어야 하고, 반대로 감정은 차오르고 넘쳐야 흐를 수 있는거겠죠.
생이 아닌것을 사, 진짜가 아니것을 가짜라고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얘기되어질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아픈 생각거리를 던져주셨습니다..

여울 2016-12-22 08:13   좋아요 1 | URL
그쵸. 쉽지 않은 문제죠. 이성이라는 것은 사후약방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떠나가거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나 그림자같은 것은 아닐까. 감성이라는 것이나 활력이라는 것이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다면 떠오르거나 떠오르는 것들을 예비하는 것은 아닌가. 그림자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차오는 것에 눈여겨보면 어떨까. 다가오는 것들의 정경이 서서히 선명해지고 뚜렷해지는 것은 아닌가. 사후의 지적질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닥치는 것, 다가오는 것에 대한 감수성은 자랄 수 없는 것일까....안개같은 얘기만 자꾸 하게 되네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말줄임도 못하고 가네요.
 

1. 사회적 시야 - 함께 깊이 볼 수 있는 표현력. 점증하는 구체. 능력의 산개.- 개인적 자유의 자장 안에 움직인 진보는 외롭다. 늘 혼자임을 감수해야 하고, 혼자 해결해야하는 절명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 함께하는 자유. 공화주의의 자유에 우리는 낯설다. 경험이 일천하다. 사회적 자유는 기본적으로 말하는 상대가 있는 자유. 정치행위를 하는 자유, 유적 존재인 것이다. 불편해도 함께 사는 존재. 그 관계를 전제로 한다. 끼리끼리의 낮은 관계로는 해결해나갈 수 없다. 이질적인 삶. 이질적인 일상의 다원성으로부터 배워나가는 것이 많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일상에 붙어있는 말, 언어들로 확인해봐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얼마나 갇혀있는지. 얼마나 관계를 만들고 있지 못하는지. 그것을 지시하는 말들, 언어들이 희귀한지도 말이다.

5. 오다와 피다, 그리고 그 사이
- 오다나 와라. 이해도 그렇고 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와라가 아니었는가 어쩌면 피다나 피라고 한 적은 있던가. 피다 피다가 아니라 자장안으로 와라. 일단 와라가 아니었던가 설익은 계몽이 낳은 것이라곤 이질감이다. 그래 잘났다. 감정의 상처를 재생산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오다와 피다 .

4. 당당함과 침잠하는 우울사이- 뫼비우의 띠는 안과 밖이 열려있다. 이 땅위에 이론들은 하지말아야 하는 것들이 천지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 가난도 피해를 주지말기 위해...하지말것을 정교화해내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홀로 감당해내는 삶이 진보는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 아귀가 맞지 않는 이론이다. 밖도 우주이고 내 안도 그러하다. 심연을 확장한다는 일은 서로 만나는 일이다. 자신에로의 배려는 더 밖으로 관계를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삶의 진보는 몇백년의 삶들이 누적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삶이라는 것이, 일상이라는 것이 떳떳하고 당당하지 않다면 무슨 재미이겠는가. 삶의 냉기만 후대에 전달한다면 무슨 맛이겠는가. 자발적 가난, 채식, 자유인의 삶....모두 인정하고 존중되어야 할 삶이지만 전부는 아닌 것이다.

2. 이질적 삶의 겹침이 바뀌어내는 정치관
- 사람들의 정치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생활의 반경, 그 틀안의 사람들에 얽매여 있으면 변화라는 것이 요원하다. 가족 관계도 그러하며, 친구들 사이의 관계도 그러하다. 다른 삶이 부딪치지 않으면, 그 감정의 격동이 또 다른 시야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변치 않는다.

3. 박정희모더니즘과 개인적 자유주의. 그 자장안의 진보/사회적자유의 자장 - 이 책을 보며 느낀 것은 산업-민주화의 이분구도도 그렇지만, 우리가 가져온 진보의 대부분은 개인적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진보라 불리는 것들이 여전히 그 논리안에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한켠에는 농촌공동체나 도시변두리공동체 정서를 한 축으로 하면서도 지극히 이질적인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갈라서 있다는 것이다. 한 축은 귀소본능처럼 움직이는 공동체의 정서와 진보가 전유해온 지식인, 엘리트의 무늬. 그것도 대부분 서민과 대중의 정서가 뱉어내어 스스로 소외당하고 있는 이미지이겠지만, (소외된 민중의 삶이 만들어낸)엘리트의식과 지식인 정서는 개인적 자유를 차용해서 일정정도의 진보를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 세대, 반 세기에 이어지는 왜곡된 구조는 지속될 수 없다. 이로서 더 이상 진보와 개인적 자유가 공존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서민과 대중 스스로 위축되어 엘리트 의식을 만들어내고 지배받기를 원했던 것 역시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아야 할 것같다. 선민의식이나 대자적 존재, 사회활동하는 이들 역시, 보다 낫다는 엘리트 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대중과 서민의 흐름을 읽을 수도 없고, 새로운 흐름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끌어내야할 대상이 아니라 감성과 감정의 결, 그 면면히 흘러온 흐름들을 몸으로 체감하고, 삶의 공유를 전제로 하는 벗. 그 바닥의 느낌을 건져올릴 능력이 없다면, 새로운 느낌들을 만들어갈 수 없다면,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저 퇴보하는 엘리트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멍하니 시간에 바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볕뉘. 진보하지 못하는 진부한 생각들이다. 서로 물릴지 서로 물고갈지 모르겠지만 흔적이라도 남겨둔다. 사회적 자유라는 표현도 좋고, 불편해도 함께하는 관계도 좋고, 단지 현안을 해결해야하는 생각들이 아니라 삶의 자장 안에서 서로 품는 생각들을 해보고 싶은 것 같다. 일반화될 수 없는 지금여기만의 독특한 무엇. 그 일상들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묻고 싶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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