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환기 – 안목의 김환기편을 보다. 죽음을 예감한 후기작을 못봐 다소 놀랐다. 극찬을 아끼지 않은 유홍준비평가의 글이 참 좋다. 그러다가 다시 김환기의 색감에 마음이 갈 무렵, 매화도 피고, 매화와 항아리, 달.....그랬다. 그러다가 우연히 책방에서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라는 책을 접하고 무척 달떴다. 사진과 글, 그림들. 편집도 곱게 해서 그만 수중에 넣어버렸다. 천재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 일본에서 그의 죽음을 맞이했던 그의 부인인 변동림. 그녀는 지적갈망 못지 않게 나혜석에 버금가는 신여성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시인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나 김환기의 호였던 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몇년 뒤 삶을 함께 꾸린다. 그 가운데 몇몇 엽서들. 안좌도에서 보낸 엽서의 한 귀퉁이 목포 유달산의 모습이 선명하였다. 옛 해수욕장에서 본 모습도 그러했다. 지성과 새로움이 끌고가는 관계들로 묘사하는 그들의 사랑도 담았다.

2. 진은영과 한강 – 숱한 불면의 밤, 새벽들. 망막함 속에 칠흑처럼 어두워지는 하늘은 온통 쇠감옥이자 쇠우리다. 통유리다. 자고 일어나면 더 짙어지는 암울함. 하루하루가 우울이자 멜랑콜리. 부수어도 부수어도 그 자리인 시지프스의 삶일 수밖에 없음. 그(녀)들은 말한다. 목없는자. 숨쉬지 못하는 자, 목이 없어진자. 없어질 자에게 연민을 쏟는다. 한결같이 우리 몸이란, 우리 육체란 항아리는 슬픔, 아픔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 항아리 안의 마음의 물결은 파문을 일어 몸의 가장자리로 번지는 것이라 말한다. 죽음은 저기 먼 것이 아니라 늘 곁에 지금 현현한 것. 스스로 죽지 않고서는 스스로 필 수 없는 것. 나는 죽음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늘 사라짐과 나타남으로 감지되는 것. 그렇게 죽음을 곁에 두고 삶을 강렬하게 돋을 새김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너가 물리적인 신체로 각별하고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버무려져 있음을 눈치채는 것. 스스로 엄중해지는 것. 그런 존재라는 것.

3. 말과 활 – ‘오늘날 대중운동에서 외부란 무엇인가‘란 제목아래 현재 사회운동 시론 3편을 실었고, 21세기 공장의 불빛, 서동진의 글 세편을 넘겨보았다. 사회운동시론에는 기분도 분위기도 정동도 아무 것도 없다시피했다. 강령이 필요하고 광장안밖의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좌파재편이 필요하다란 당위만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무미건조함이 그 코드인가. 오히려 이주노동자들과 목없는자들의 생생한 ‘ 21세기 공장의 불빛‘이란 꼭지가 대신 답을 말하려는 듯하다. 서동진 그는 마음 감정, 심정성, 정서, 기분, 정동, 분위기, 불안, 강박, 경쟁, 고투, ㅍㅣ로, 탈진, 좌절, 포기, 불만, 원한, 불신, 반감, 피로, 수치심, 모멸, 단속 등의 개념으로 사회를 읽는 것에 불만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그의 이론적 접근의 발단이 정동에서 시작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일종의 과도함이나 과잉, 유행적 비평이 문제있음을 지적하려는게다. 그는 단적으로 말하면, 이런 흐름들이 하이데거의 세계내(안)존재 철학의 과잉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 아류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존재론적 좌파라고 한다. 과도하다. 이것만이 ㅇㅏ니라 체계나 구조에 대해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변증법적 비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편의상) 역사유물론적 좌파라고 칭한다.

4. 요약하자면 서동진교수는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맑스주의자였지만, 지금은 맑스주의는 사라지고 실존논의만 범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동이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끌어안고 역사정치경제의 생생함을 곁들여 변증법적 사유를 하자는 것이다.

볕뉘.

0. 따로 생각해보건데, 우리는 멀리떨어져서 숲의 조망권을 확보해보는 것이 아니라 숲길 하나하나 나무사이사이 활력들과 분위기와 정서, 감정을 곁들여서도 사유를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또 한편으로 일과 노동과 경제적 살림살이와 계급의 틀로도 제대로 사유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일천하여 숨통트이는 논의조차 없던 것은 아닐까. 핵심을 명료하게 하여 실전의 느낌이 나는 논쟁들의 불꽃이 일었으면 좋겠다.

1. 진은영은 문학의 아토포스에서 비인칭이라는 ㄱㅐ념을 쓴다. 하이데거의 죽음을 말하면서 발라낸 개인을 말하는데 그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비인칭의 죽음. 정체성은 없다가 새로운 사유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아방가르드, 시도, 실험, 논의의 확장, 논쟁의 계절이 다시 유행처럼 왔으면 싶다. 더 이상 손해볼 것도 없다. 더 나빠지기야 하겠냐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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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

정신의 투쟁 역시 여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하다. 라고 한 랭보의 말이 적확하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는 냉혹한 말의 의미도 간파하게 되었다. 37

그들의 사고를 통찰하는 데 그들 각자의 나이를 아는 게 필수 조건임을 깨달은 건 처음이었다. 51

나의 생각을 언제나 더 크고 새로운 감탄으로 차오르게 하는 두가지가 있다...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는 도덕률이다..../ 여름밤의 떨리는 미광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고 달의 형태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우정, 영원으로 형성된 고도의 가ㅁ각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71

사랑은 지고의 율법이며, 이런 사랑은 연민이다. 76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86

멋진 책을 펼쳐들면, 제대 앞에 선 신부의 부케처럼 책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88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104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적을 두기 마련이다. 128

어린아이가 쓴 듯한 큼직한 글씨가 쓰여 있다. 일론카. 그렇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132

볕뉘.

0. 메모지에 글을 쓴다. 글은 씌여지되 낯설은 느낌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글이 미끄러져 나가는 느낌. 내 글이되 내 글이 아닌 것 같아 무척 낯설다.

1. 책으로 사유하지 않을 수 있을까. 책 속의 책들이 대기하고 있지 않을 수 있을까. 글 속에는 만차라는 여성을 등장시킨다. 사랑들이 그 모든 것을 변화시켜 집 한채를 거뜬히 지었다고 쓴다. 돌로 된 날개도 퍼덕이며 비상한다고 말이다. 어느 한 편은 돈오돈수요 또 한편은 돈오점수란 말인가.

2. 보들레르는 여배우였던 혼혈여인을 사랑했다. 지성과는 거리가 먼 그녀는 보들레를를 그리 깊이 아끼지는 않았던 듯 싶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지나 반편불수가 된 그녀를 보들레르는 극진히 보살핀다. 삶을 예술의 자양분으로 썼던 그는 사랑을 믿었던 것인가.

3.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에는 연민이 있다. 사랑에 다가서는 그 무엇이 있다. 책 속에도 현실에도 있다. 어느 문을 열더라도 그리로 통할 것이다. 삶을 놓치려하지 않는 안간힘들. 안타까움들. 그런 것들을 사랑이라 불러도 될까.

4. 간간이 나오는 짚시의 삶. 몰아서 폐기시키는 삶이 아니라, 자족과 명랑의 삶, 그리고 그 시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또 다시 그려져야 할 것. 이름도 묻지 않고 학교도 묻지 않고, 직업도 묻지 않고 만남의 질로만 서로를 평가하는 관계들.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것들을 만들어가는 재미.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나이와 관계없는 양식. 책의 즙을 짜내는 일을 하는 주인공을 통해서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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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들은 노래

봄빛과
번지는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볕뉘.

0. 아껴둔 한강 작가를 이제 읽기 시작한다. 시집엔 참 많이 들어 있다. 마음의 편린들이 아파 피는 봄, 저녁, 그리고 새벽들. 늘 피로 잠겨있는 눈. 슬픔들. 파문을 일으키는 슬픔의 항아리란 육체.

1. 푸른 새벽도, 새벽도 아닌 새벽에 들은 노래라. 불면의 밤은 얼마나 깊었을까. 꿈속의 꿈들은 얼마나 허망하였을까. 그런 시인이 정작 노래하는 것은 저녁이라. 저녁입사귀. 저녁의 어둠인 줄 알았는데 새벽이라고. . .

2. 피눈. 피 눈. 피눈물. 피 눈물. 거울 속의 겨울. 그녀의 아파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아파하는 투정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가. 그림자 짓만 한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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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늘 길을 묻고는 했지만, 마지못해 그렇게 했을 뿐이다. 물어물어 길을 가는 것, 언제나 내 취향에 거슬렸으니! 그래서 나 차라리 직접 그 길에게 물어 가며 길을 가려 시도해 보았던 것이다/이제는 이것이 나의 길이다. 너희의 길은 어디있지? 나는 내게 ‘길‘을 묻는 ㅈㅏ들에게 이렇게 대꾸해 왔다. 그런 길은 존재하지도 않으니!/예술가는 개인성의 지평에서 개별적 역량의 최고치를 독립적로 수행하는 ㅈㅏ로 간주될 것이다. 230


2.

모럴이란 선과 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감각적 분배를 만들어 내는 정치적 활동을 의미한다. 134

문학의 정치란 작가의 현실참여나 참여문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문학은 문학적 실험으로서 감각적 분배 방식을 파열시켰고, 또 그 파열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습속으로서의 윤리를 넘어선 문학의 모럴을 실현한다. 그러나 이 모럴이 습속의 윤리로 환원되지 않기 위해서 문학은 다만 문학으로만 남아 있어야 ㅎㅏ고, 문학이 아닌 것, 즉 일상적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문학적 실험은 문학이 문학 아닌 것이 되기 직전에, 즉 문학의 고유성이 흐려지기 직전에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135

랑시에르는 문학과 예술의 역량에 대한 강력한 긍정 속에서 문학의 ‘삶에 저항하기(미학적 자율성)와 문학의 삶-되기(미학적 타율성)가 모두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가 보기에 숭고의 미학은 문학의 삶-되기라는 예술적 벡터를 무시한 것이다. 문학은 고발과 저항의 역량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도래할 삶의 물질적 틀들과 감각적 형태의 발명”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삶의 형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137

랑시에르는 투표하는 것 이상으로 정치적일 것을, 정치적 어젠다로 확정된 것 이상으로 불일치를 수행하는 정치적 활동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139

시인 자신 안에 숨어 있는 ‘기성‘의 스타일에 대한 금지이다. 이런 제한 조건을 엄수할 때만 시인은 익숙함과 구별되는 자유로움으로 나아가게 된다. 142

비밀결사 입문자 – 청년 말라르메의 편지는, 노동의 낮과 사유의 밤을 계속해서 유지시켜야 한다는 급박한 사태에 빠져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썼던 편지들을 모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밤 시간은 침입의 시간이다. 145

시인은 언어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 언어를 탐구하는 자가 아니라 ‘기존의 정치경제와 분리된 공동체의 상징적 경제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기성 경제에 침입함으로써 새로운 상징 경제를 실혀ㄴ하려는 신화학자이다/세계의 사물을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적인 기화를 일으킨다.146

말라르케는 “가장 단단한 삶에 대한 열망과, 어떤 종류의 반항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극렬한 비순응의 투지”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147

새로운 미학적 활동이란 침입의 모럴에 입각한 것이다/말라르메의 순수시와 프랑스 노동자들의 글쓰기 속에서 동일하게 미학적 혁명의 기획, 혹은 문학의 정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149/노동자 ㅅㅣ인이 노동자 계급의 방언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른 삶에 침입하는 ㅅㅣ간을 자기 삶 속에 실제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는 말라르메를 읽고, 말라르메가 읽었던 보들레르를 읽는 시간을 삶 속에 기입해야 한다./작품들에 ㄷㅐ한 몰입은 자본주의에 적합한 ‘유순한 신체‘로의 훈육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150

방언성에서 ㅅㅣ작한 문학은 다시 방언성을 넘어서 어떤 공동성의 삶을 창안해야 ㅎㅏ고 또다시 이 공동성의 삶 속에서 표준어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방언성을 발견하면서 또 다른 공동성의 삶의 형태를 창안하는 방식으로 미학적 두 극 사이의 진자운동을 지속해야만 한다. 152

노트 위에 쓰여진 시에는 테크닉과 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어떤 잉여적인 것이 존재한다./시가 쓰이는 순간이 세계의 인과뿐만 아니라 필기구를 쥔 시인의 모든 논리적 감각적 인과조차도 파열시키며 솟아오르는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154

모럴을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결과로부터, 승패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성공적 결과만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미학적 아방가르드 시인은 계속되는 실패와 곤경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참여적 실험과 실험적 참여를 수행하며 경계를 넘어서고 그 탈경계의 활동 속에서 감각적 재분배를 가져오려는 시적 모럴을 참을성 있게 견지한다. 157

지금 삶의 구성은 확신보다는 훨씬 더 사실들의 권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거의 ㅎㅏㄴ 번도, 단 한 번도 확신의 토대가 되어 보지 못한 사실들에 의해,/문학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행동과 글쓰기가 엄격하게 교대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려면/언뜻 싸구려처럼 보이는 형식들, 즉 전단지, 팸플릿, 신문기사와 플래카드 등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처럼 기민한 ㅇㅓㄴ어만이 순간순간을 능동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발터벤야민, 주유소에서 158

문학의 토포스는 세계의 다양한 장소들 중 특수한 방식으로 점유된 하나의 장소를 의미한다. 그것은 상업적인 화폐의 공간과 우파와 좌파 모두의 도덕주의적 정치 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하나의 ㅅㅐ로운 장소이다. 163

미학적 벨레로폰주의 - 악ㅁㅏ적 우편 ‘제도‘는 새로운 우편 미학과 우편 정치학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악마적 우편물을 통해 우리는 제도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는 공간 사실들의 권역에서 우편배달부의 죽음과 수취인의 실종을 알리며 새로이 열리는 그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171

우리 ㅅㅣ대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 채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 더미 사이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다/어떤 사건을 거대한 무관심으로부터 환기시키고 그 사건의 공간을 채우는 정서들을 ㅇㅕ러 겹으로 만들어 그 겹겹이 쌓인 공간들, 정서의 미로들 속에서 더 많은 이들이 오래 놀고 헤매고 사유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175

염장성이 강한 문학적인 반복 순환(등단..계간지 발표..시집 출간..계간지 발표..시집 출간으로 되풀이되는 문학적 선분들로 구획된)의 토포스에 거주하는 ㅎㅏㄴ ‘대체로‘ 문학의 천사는 추락하거나 타락하지 않으며 우편배달부는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르는 위험사회로부터 거리를 두고 안전해진다. 178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고 한 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 버리는 일, 그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성을 또 다른 사회적-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이다. /그 일에 매혹될 때 우리는 그들을 공간의 연인이라 부른다. 180

공동체와 삶 전체에 근본적인 파열을 가져오는 숭고의 예술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구획들, 경계들을 파열시키면서 동시에 그 파열을 그저 동공으로 남겨 두지 않고 생활의 지리멸렬한 감각을 만들어 내며 삶의 다른 생활양식을 발명하는 예술 활동 역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숭고한 ㅇㅖ술은 공동체의 파열에, 관계적 ㅇㅖ술은 공동체의 유지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199

리오타르는 조화와 총체성을 추구하는 칸트 미학의 이상을 비판하고 20세기 역사를 얼룩지게 한 파시즘적 재앙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207


3.

개인들의 죽음과 함께 일어날 와해를 극복하기 위한 곳인 공동체가 파괴됨으로써 삶의 의미가 개인의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고 무의미함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고 사람들이 느낀다는 점이다. 그는 공동체를 거론하는 자리에서 그것의 붕괴로 인한 삶과 죽음의 무의미화를 언급한다.-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212

그리스인들은 무엇인가 지속적이고 기억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다면 그것이 작업이든 행위든 언어든 전부 ‘작품 erga’이라고 불렀다/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이 산출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된 것이 독특한 주관성의 영역이 아니라 그 반대의 영역인 폴리스였다는 것이다/행위하는 ㅈㅏ들은 시인의 도움없이도 세상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좋은 행위나 나쁜 행위의 영원한 기념비를 세울 수 있으며 현재와 미래에 찬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216,217

선ㄹㅑㅇ한 사람 고약한 ㅅㅏ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독배를 들어 죽어가는 곳을 국가라 부른다. 선량한 사람 고약한 사람 가리지 않고 모두가 ㅈㅏ기 자신을 상실하게 되는 곳을 ㄴㅏ는 국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ㅁㅗ두가 ㅅㅓ서히 자신의 목숨을 끊어 가면서 “생”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국가라는 것이 무너지는 곳, 거기에서 잉여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삶이 시작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22
하이데거의 죽음 –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우리는 죽음이라는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들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으로 먼저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 앞에서 자기의 본래적 ㅈㅏ아로 살아가기를 결단해야 한다. 죽음으로의 선구라고 불리는 이 실존적 결단은 개개인에게 고유한 개별성을 보장해 준다. 224

와쓰지 데쓰로 – 인간은 사이에 있는 존재로서 아이다가라(관계성)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인간은 무엇보다고 풍토적이고 공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돌아가야 할 절대적 전체성은 주체의 공간성에 바탕한 전체성이다. /죽음은 연대와 우애에 대한 상상의 표현으로 변용되었으며 고유한 죽음을 향한 결단성은 전체성과의 동일화를 향한 결단성으로 번역된다. 226,228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아무런 가상에 의존함 없이 죽음과 관계를 맺고 생성의 매순간에 직면해야 한다는 점에서 얼음과 같은 냉정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깨침의 얼음이란 것으로 그는 우리까지 추위에 떨게 만든다”/그는 ㅈㅏ신이 겪고 있는 “겨울과 그 겨울의 한파를 숨기지 않는” 것이 “내 영혼의 지혜로운 방자함이자 호의”라고 대응한다. 229

중성적이고 ㅂㅣ인칭적인 죽음 - 낭시가 말하는 단독성은 “개인의 본성도, 개인성의 구조도 결코 갖지 않는” 것으로서 일종의 탈자태extase와 연관된다. 단독성이란 개별자가 홀로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타자와 외부를 향해 자기를 벗어나는 탈자태다./개별성은 탈자태적 단독성을 무시하면서, 완전히 닫힌 채 세계와 ㅇㅏ무 관계가 없는 “분리된-유일한” 절대적인 주체를 상정하며, 이로써 공동체에 ㄷㅐ한 물음을 완전히 삭제해 버린다/어떤 외부와도 관계 맺지 않는 내밀한 개인, 그리고 그 내밀성의 표현으로서의 ㅇㅖ술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러한 ㅅㅏ유는 나의 죽음이 나 자신과만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를 회의함으로써만 ㅅㅣ작될 수 있다./블랑쇼는 비인칭적이고 중성적인 죽음에 대해 선명한 관점들을 제시함으로써 하이데거의 죽음론에 전면적으로 반대한다. 이런 ㅊㅏ이에도 불구하고 낭시의 ‘단독적인 죽음‘과 블랑쇼의 ‘비인칭적이고 중성적인 죽음‘은 유사한 함의를 갖는다/낭시는 ㅌㅏ자의 죽음과 접촉하는 순간 내가 변화한다는 ㅅㅏ실을 강조한다. 타자의 죽음이란 그 ㅇㅓ떤 것이든지 그것을 목격하는 나를 소멸시키며 새로운 ‘나들‘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에 ㅅㅏ실상 ㄴㅏ의 죽음을 의미한다/타인의 죽음은 나의 벼ㄴ모를 가져오므로 타인의 죽음이야말로 곧 나의 죽음이다./죽음의 사건을 토ㅇ해 나와 타자가 만나는 순간, 나는 그 누구가 되어 죽고 ㅌㅏ자 역시 그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ㅂㅕㄴ모하기 때문에 명료한 방식으로는 이름을 부ㅌ이거나 밝힐 수 없는 하나의 공간이 열린다는 의미일 뿐이다. 231, 232,235

예술은 “인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바깥으로 그리고 가능성의 모든 형태 바깥으로 던져지는 그곳, 인간의 내밀성도 한계도 없는 바깥에의 소속을 긍정하는 탈자태적인 것이다. 235

블랑쇼는 책의 소유와 작품의 소유를 구별한다. 작가는 책을 소유할 수 있지만 작품을 소유할 수 없다. 작품은 독서라는 사건을 통해 작가의 내밀성, 또는 이미 결정된 본질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독서는 작품을 작품 자체로, 그 익명의 현전으로, 있는 그대로의 격렬한 비인칭의 긍정으로 돌려주기 위해 작가를 무효화시키는 놀이이다./비인칭의 삶을 창조하라/그것은 어떤 작품, 어떤 사물, 어떤 타자와 접촉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분유되는 소통의 삶이다. 236 주권성은 ㅈㅏ기 아닌 비인칭적 ‘그 누구‘로 변모함으로써 내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능력, 자신을 초과하며 존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237 우리는 항상 우리 ㅈㅏ신을 ㄴㅓㅁ어서는 어떤 것과 마주하며 그것을 견뎌내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우ㅣ해”그 너머로 어떤 것을 겨냥하지도 않”아야, 즉 초월적 세계나 가상적 구제와 같은 것을 상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넘어섬이 바로 극복이다. 238

아름ㄷㅏ움이란 것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의지를 다 기울여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있다. 하나의 형상이 단지 하나의 형상에 그치는 일이 없도록 내가 ㅅㅏ랑하고 몰락하고자 하는 그런 곳 말이다/매 순간 수행되는 나의 기꺼운 죽음은 인간의 위대함을 ‘ㅎㅏ나의 과정‘이자 ‘몰락‘으로 보는 관점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ㄸㅐ문이다. 과정이자 몰락인 활동만이 단독성을 형성할 수 있다/그가 말하는 과정은 자기보존의 포기이며 ㅈㅏ아의 몰락, 탈자태적 활동이다.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ㅅㅐ로운 공동성의 운동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나는 ㅅㅏ랑하노라. 오ㅐ 몰락해야 ㅎㅏ며 제물이 되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먼저 별들 뒤편에서 찾는 ㄷㅐ신 언젠가 이 대지가 위버멘쉬의 것이 되도록 이 ㄷㅐ지에 헌신하는 자를 241, 242,243

언어를 수단처럼 다루어서는 결코 안 되며, 언어를 ㅊㅔ험하고 언어에 시달려야만 해요. 언어는 영원한 애인이죠/예술은 시계처럼 가끔 앞서가는 거울/예술가가 듣는 미래의 소리는 “그 자체로 욕망,기계,언표인 새로운 배치의 소문, 낡은 배치 속으로 침투하거나 그것과 절연하는 새로운 배치의 소문으로서 집합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253,257,258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아요. 오직 끊임없이 인내하며 헌신하는 모험만이 유효할 뿐이죠. 진리에 도달하는 특별 처방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굴복이고 불신인 동시에 오류의 시작이에요. 우리는 모든 것을 인내하며 불안에 떨지 않으면서 수용해야 해요. 264

예술이 삶의 양식으로 되어 ㄱㅏ는 예술의 타율적 운동 속에서 다시 기지의 삶을 넘어서는 예술적인 어떤 것으로 솟아오르기, 이렇게 이해된 예술의 두 극인 타율성과 자율성의 이중운동은 소수적 정치학의 두 운동과 유사하다. 269

앞서가는 시계로서의 예술은 시대착오를 일으키는 정치와 실천의 거울이다/스스로를 반시대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가장 격렬한 동시대성을 획득한다.
평등한 소통에 대한 인문학적 담론은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엄격한 구분을 통해 먹는 입의 흔적을 지우려고 ㅎㅏ기보다는 인간이 먹는 입으로 말하기도 할 뿐 아니라 말하는 입으로 먹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먹는 입들에 대해 말하기, 식탁에 초대받지 않은 자들에 대해 말하기, 식탁을 차렸지만 정작 식탁에 앉지 못하는 자들의 식사에 ㄷㅐ해 다시 말하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보편주의적 소통이며 정치이다. 302 타자와 나의 소통은 고정된 정체성들 사이의 소통이라기보다는 만남을 ㄱㅖ기로 기존의 정체성으로부터 탈주함으로써 각자가 가닿을 수 없는 자아와 공동체들을 발명하는 사건이다. 305


볕뉘

0. 시집으로 시작해(사전 2003) 우리는 매일매일(16쇄본, 어떻게 이렇게 많이 판매되었을까?싶다 2007)을 읽다가 난해하여, 읽다가 중동난 문학의 아토포스(2014)를 다시 읽었다. 해설이 없는 훔쳐가는 노래(2012)는 오히려 쉽다.

1. 알랭바디우는 존재의 사고를 서양 중산층 중심사고에서 세계안 존재로 넓힐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바디우의 실험적 사유를 궁금해하는 저자는 랑시에르를 바탕으로 죽음과 삶에 대한 재사유, 윤리와 모럴의 차이, 공동체, 소통의 재사유를 통해 아방가르드 색채를 풍기면서 문학과 정치를 붙잡아둔다. 그 와중에 니체, 아렌트, 하이데거, 낭시, 블랑쇼, 카프카를 불러낸다. 사상가와 철학자에 따라 다양하게 복기를 해볼 수 있는 편이기에, 그리 많은 인물의 출현은 아니다. 저자가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충분히 전달되는 듯싶다.

2. 서울중심의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도들을 이런 관점에서 언급을 한다. 하지만 무척 낯설다. 인내심과 삶의 실천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라 더욱 길고, 삶의 길을 감내하면서 만들어야 하는 것들일 것이다. 더 작은 곳, 낮은 곳, 넓은 주제로 녹아내리거나 스며들어야 한다. 여러 시인들이 자신의 시언어를 내려놓고 다른 시어로 사유하거나, 이동들을 통해 방언의 망가짐을 통해 새롭게 사유하는 방법들은 충분히 공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발명은 이렇게 몸의 겹침 속에서 겨우 싹이 돋는 것인지도 모른다.

3. 문학과 시와 예술이 이런 사유의 실험을 바탕으로 좀더 넓어지고 깊어지면 좋겠다. 전위적인 시도 역시 묻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인의 거침없는 죽음과 시간에 대한 사유, 유리조각의 별의 이미지가 뜻하는 바는 이 해설서로 조금 더 이해는 간다. 비단 문학과 예술만의 문제는 아니겠다. 과학기술이든 사회학이든....삶의 문제이자 새로운 삶의 결에 대한 문제이므로 반지성주의를 너머, 좀더 핵심을 싶게 공유할 수 있도록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공부하며 서로 깨뜨려나갔으면 좋겠다. 길은 저기에 있는 것도 저 사람이 간 길을 따라 걷는 것도, 우르르 몰려간다고 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안밖으로 사유의 깊이와 날카로운 비수의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길도 아니고 새로운 삶들도 아니다.

4. 아직 신형철의 발문은 읽지 않았다. 나머지 시의 집을 다 보고, 그 시어들과 생각의 응어리를 추려본 뒤 보려한다. 주례사인지 비평인지, 문학동네의 나름의 처신인지 헤아려보려 한다. 다행이다. 아무런 사적인 연이 없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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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리굴젓을 집어, 김이 모락거리는 공기밥에 넣고 꼼꼼하게 비빈다. 윤기나는 계란말이 반을 잘라 그 위에 보기 좋게 으깬다. 그리고 수저에 안다미로 채워 한 입 크게 넣는다.

2. 혓바닥 칫솔질. 맹물로 입을 행구다. 참다래를 알맞게 잘라 입안에 오물오물거려 입안에 가득 퍼지게 만든다. 과즙이 흥건해지면 다시 꼭꼭 씹는다. 검은씨가 터지며 나오는 신맛에 입안이 새그러워지며 눈물이 찔끔 감돈다.

3. 찻잔에 피운 매화에 물멍이 들었다. 꽃술은 힘을 잃어가며, 꽃잎은 색이 바래간다. 청매화는 꽃몽오리가 부풀어 오른다. 매화초옥 그림을 보내 온 벗을 통해, 그래도 헛짓이 아니구나하고 안심한다.

4. 출근길 장바구니를 챙기다. 며칠 빨리 피는 재미에 끌려, 미리 봐둔 조팝나무 새순이 마음에 걸려 흔들거렸다. 한 정거장 이전에 하차 벨을 누르고 내렸다. 에코백 안에 장바구니 자크를 열었다. 걸음은 앞선다. 잎이 난 것, 나지 않은 것, 가지가 풍성한 것을 나누어 담았다. 뭐하시냐고 검문을 받을 것 같은 눈치다. 그리고 막 가지치기를 해 둔 벚꽃 잔가지 몇 개, 버드나무 순 몇 개, 개나리 복잡한 놈 몇 개를 덤으로 챙겼다.

5. 손님이 와서 이른 저녁 겸 술 한잔. 서로 헤어지고 에둘러 돌아돌아 작은 책방에서 두근거리는 책들을 놓고, 홍차 한 잔에 ‘한 책‘하고 싶었다. 낮에 모신 책에 대한 갈증이 심해졌다. 아불싸. 헤어진 손님들과 이슥한 다리 한 귀퉁이에서 조우했다. 한 잔 콜. 그래. 마늘 듬뿍, 발라낸 통닭과 야채을 조물조물 섞고, 갖은 양념에 소주 한 잔 콜. 그렇게 거사가 무너져내렸다.

6. ‘ㄷㅏ르니 틀리다‘ 정신에 충만한 이들이 태극기 집회를 다녀왔다고 떠들고 다닌다는 노망에 가까운 소리를 들었다. 챙피하다. 그 놈의 ‘다르니틀리다‘ 정신은 빨갱이에서 종북 종북에서 또 무엇을 찾아다닐까. 그 끈질긴 생명력. ‘다르니 다르다‘로 가보지도 못하는 불퇴진의 정신. 사회적 유아. 다름을 경험해보려고 조차 않는 수구. 그렇게 누리고도 뭘 더 누리겠다고

7. ‘이재명‘을 다시 탐구하는 손님이 6.을 이야기한다. 강남에 사는 그는 자식들이 저녁이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고, 토지보유세로 재원을 만들어 기본소득을 취하는 정책이 실현가능성 높은 신뉴딜정책이라고 한다. 한번은 크게 바뀌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자식들의 삶이 안쓰러워 못보겠다고 한다.

8. 보들레르의 삶을 읽었다. 문학의 아토포스를 다 읽어간다. 정유라의 이인화교수의 답안지 가운데 하나로 적힌 이포토스?를 정답이라고 동그라미 친 그 단어. 토포스는 장소, a는 결여나 없는 이라고 설명하는 jtbc 부장 아나운서. 그를 보고 부장님은 도대체 모르는 게 뭡니까라고 농을 건네는 둥근 안경을 쓴 기자. 비장소, 비시간, 비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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