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먼저 써본다. 대선과 사회운동, 소멸과 탄생, 선거와 사회운동.....키워드들은 하나같이 어색하다.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 결국 제목을 쓰지 못한다. 가까운 지인의 상과 상가에서 만나는 사람들. 드문드문 정황을 듣다가 어찌하지도 못하고 속얘기들을 전하게 된다.

이번 선거에서 사회운동세력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있다면 가장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다르니 틀리다‘고 하는 부류들이 극우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그 극은 반대편과 그리 잘 연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르니 다르다‘가 아니라 ‘다르니 틀리다‘라는 것이 자칭진보세력에게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치면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헌데 그 보다 더 아무 생각없는 것은 무엇일까? '다르니 틀리다'라고 해서 밥 한끼, 식사 한번 나눈다라는 것은 황송한 일인데다가, 도통 우리모임의 자장만 안중에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삶의 동선에서 일년에 한번도 겹치지 않는, 마음의 동선에서 삼년에 한번도 나누어지지 않는 비진지함들을 곁들인다면 더욱 더 그렇지 아니한가.

 이것도 그렇다고 치자. 선거국면때나 지금 대선에서처럼 서로 인지도 못하면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제도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할 듯이 선거라고 해서 올인하는 모습들이 더 가관은 아닌가? 제도 정치가 모든 것을 소화해낼 것처럼 흠뻑 빠져서,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서로 인력이나 있는 것인지? 인지하려고 조차 하지 않은 모습은 어떻게 생각해야하는 것일까? 늘 그래왔으니 그래야 된다고, 다 정책이나 전략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정책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용이 있을까? 또 '다르니 틀리다'로 또 다시 수렴되면서 앙금을 곁들여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도정치의 신화는 이리 굳건한 것인가? 서로 서로 다른 캠프로 활동의 축이 이어지면서 수렴되는 모습들을 보면 제도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또 다시 도드라질 것이다. 이렇게 과도한 책임감과 과다한 알림욕구가 해소되지 않을 경우 어떤 책임들을 지려고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기도 하다.

중력이나 서로인력, 서로자장이 이렇게 제도정치, 선거안에만 있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한 것일까? 스스로 한 말들에 발목이 잡혀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제도 밖'을 의식하지도, 무게 중심을 옮기려고도 하지 않는 일이 가장 뼈아픈 것은 아닐까? 또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문제가 생기면 서로 인력도 중력도 잃은 채로 여기저기 난파하거나 난파당한 뒤, 여기저기 스스로 피는 수많은 주체와 운동의 꽃들로 힘을 받고 또 몰려다니다가 또 지지부진해지고, 닻을 어떻게 어디에 내려야 하는지 조차 느끼지 않으려는 것은 아닐까?

될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래서 되지 못하게 하는 감정들을 꿰어서 선동해대기가 제일 쉽다. 스스로 하고, 이것저것 가려내어 되게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하지만 그 방향은 멈출 수가 없다. 멈추는 순간, 절반의 포기가 아니라 전부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가장 뼈 아픈 것은 사회운동세력의 자장조차 만들려는 흔적이 사라진 것이 가장 아쉽다. 아니다 스스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조차 지난 겨울을 겪어내고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 더 뼈아프다. 제도정치의 환상에 올인하는 모습은 지나친 낙관만 만들어내어 만일과 만약을 수습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좌냐 우냐 어이없는 선별의 강박은 상하의 파고를 파고들면서 생각하려는 노력도, 운동을 다른 결로 이끌어가려는 배아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다. 아마 십중팔구 좌우의 방향키로는 가긴 가겠지만, 불어오고 몰아쳐오는 상하의 쓰나미를 끈질기게 예상조차 하지 않으려는 관성이 된서리를 맞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대체 어디에 스스로 있는 것인지 가늠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정신차려야 할 것은 퇴행하는 지지자분들만이 아닐 것이다. 그 손가락은 고스란히 안으로 향해야 할지도 모른다.  좌우의 좌표가 아니라 상하의 좌표와 그 물결의 결을 체득하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일게다. 그렇게 되려면 어떡해야하는 것인가?

볕뉘.

0. ‘왔다‘과 ‘온다‘라는 깃발은 든 이들. ‘올 것이다‘라는 깃발을 든 이들. 나는 이들이 사회운동세력이 아닐 것이라고 본다. 미래를 가져왔고 온다고 말하는 이들을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그보다 지금 바스라지는 것, 바스라지고 있는 것, 바스라질 것에 대한 지독한 관찰력을 가진이들을 믿을 것이다. 사회활동이 이 방향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자체가 사회의 저울이 한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 나는 이 과도함에 놀란다. 그런데 스스로 몸담고 있고 담았다는 분들에게서 이 균형감각을 보기가 무척 어렵다. 제도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정확히 제 위치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 어정쩡함들을 더 보아주기가 안스럽다.

2. 촛불은 수많은 주체를 발굴해주었다. 상식과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좌우의 논리보다 형평과 안전에 대한 상하의 감수성으로 우리를 구해내었고, 앞길을 열어주었다. 좌우의 단선으로 이들을 꽃피울 수 없다. 좌우상하의 그물안에서만 서로 꽃피울 수 있다.

3. 모임은 이기적일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균열과 경계의 틈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아니 물러나 주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선거-제도만능의 우리 고정관념으로는 상하의 파고를 넘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모임들 간의 중력이나 인력이 있다면, 그 장을 인지하려는 마음들이 있다면 다시 한번 복기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4. 아끼는 선배의 마지막이 마련한 자리, 반가운 얼굴들이 스치듯이 지나갈 정도로 취했다. 청년들과 모임들 사이사이 ‘관계-내-존재‘의 말들을 듣다보니 말도 아낄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몇 분에게 조금 깊은 소회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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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


책방 같은 자리.
아편처럼 한움큼 쥐고 맡던 아카시아가
어김없이 파랑하늘 검은가지 위에 주렁주렁 걸려있다.


시를 훔쳤다. 몇 편의 시간을 훔치다가


코끝으로 몰려온 내음이 글썽거리다 눈물로 피었다.
왈칵 눈가로 꽃들이 피어 시가 어른비춘다.


파랑에 검은 활자가 얼은얼은 잠기다.나비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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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과 느낌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과 그것 아닌 것, ‘인‘ 것과 ‘아닌‘ 것의 얽힘 가운데서 ㅇㅣ루어지는 사태이다. 0074
사람이 찾는 것은 무엇인가. 믿을 만한 대상. 그의 삶에 희망과 활기를 주는 것. 0092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사건들이 혹은 의식과 환경의 ㅅㅏ태들이 서로 뒤섞여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는 클로드 시몽. 그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흐름을 실제대로 옮김으로서 소설을 쓴다고 주장한다. 0100
아무도 모든 것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누구든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과의 얽힘을 떠날 수 없다. 어떻게 얽히는가. 거기에 논리와 존재의 샘이 있다. 0107
모든 철학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광맥과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 광맥을 뚫고 흐르는 한 심장의 박동이 있다. 0155
철학과 논리가 개념의 조작과 놀이, 이유와 귀결의 그물로부터 풀려날 수 있는가. 개념의 놀이와 논리의 그물에 스며든 온갖 우연의 가지들을 버리고 거슬러올라가 의문과 상상과 추론이 시작하는 시원의 사태에 이를 수 있는가 0157
동양 사람이 서양 사람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잘라버리지 않은면 그것으로 수십 년을 가르치고 배우면서도 자신의 기질이나 호흡에서 우러나는 사상의 맥을 이룰 없는 것과 같다. 무엇을 잘라버릴까.(동아시아 사람은 그의 많은 것을 버리지 않으면 서양악기에서 자신의 몸과 일체가 되어나오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다.) 0190


그들의 직관과 경험으로 세계에 대한 자아의 폐쇄성이나 주관성을 벗어날 수 있는가...직관과 경험은 타자로 이어져 열리는 사태이다. 타자로 이어져 열림이라는 논리에 호소하지 않는 한 그들로부터 결과한 현대의 유아론이나 인본사상을 피할 수 있겠는가. 0251
타자에게 넘겨줌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자. 타자와의 얽힘에서 자아의 영토를 극소화하는 자. 극소의 생각으로 깨닫는 철학자. 극소의 힘으로 일하는 물리학자. 자아의 동일성을 버리는 자.(서양문명으로부터 던져진 생각거리) 0253
타자로부터 밀려오는 파국을 막으려는 의지의 사람은 자아를 가지고 세계를 본다. 자아의 대상으로 세계를 구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존재와 생각의 연장선 위에서 타자를 만나게 되어...더욱 큰 파국을 몰고 오는 참 타자를 결국에 만난다. 0255
사람의 역사는 자기도 이해할 수 없게시리 각기의 순수한 의도 밖에서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길을 따라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다....사물의 참 모습은 ‘이다‘로서가 아니라 ‘아니다‘로서 주어질 뿐이다. 0257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각자의 어디엔가 영혼이 있다. 영혼의 세상과 하나가 아니고 다름이다. 0290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자아는 자기 밖의 사태를 비추고 있다. 자기 밖의 사태와의 얽힘을 떠난 자아는 있을 수 없으므로 그는 그 자체로서 다만 외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참 모습을 알 수 없는 타자와의 얽힘을 떠난 자아는 세상에 없다. 0295


사람이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에 사물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한 점이다......생각이라는 것은 다만 뒤로 물러나 있는 자가 벌이는 겉치레에 말려드는 것이다. 생각은 뒤로 물러나 있는 자가 드러내보여주는 파노라마에 살 뿐이다. 생각을 끊음으로, 사람의 믿음을 거두어들임으로 오히려 파노라마 뒤로 물러나 있는 자의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0302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사태는 같음과 다름의 다름이 아닌가. 같음과 다름이 하나의 바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0303
파르메니데스와 헤겔, 데카르트와 후설이 찾아낸 존재와 사유는 드러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음을 버리지 않았는가. 드러나지 않음에서 다름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없이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0350
현실에 주어진 사물의 정체는 그 사물의 현실이 아닌, 현실 밖의 타자로서 드러나지 않겠는가 0353
파도가 파도 되게 하는 자는 파도가 아니다. 나무를 나무 되게 하는 자는 나무가 아니다. 음악을 음악되게 하는 자는 음악이 아니다...있음의 뿌리 되는 가장 높은 형상이나 어떤 다른 것에도 매달림이 없이 스스로 있는 자는 세상에 있음과의 다름으로 엃히어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0354
존재자는 오히려 존재를 존재로 한정하는 존재 아님을 존재 뒤에 지님으로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가. 무엇으로든지 드러남은 드러나지 않음과 다름으로 얽히어 이루어진다. 0355
드러난 현실에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바가 따라다녀 지울 수 없는 그림자의 바탕으로 얽히지 않는가 0394
다름으로 얽히는 사물의 모습을 찾는 것이 존재의 깊이를 앎이 아니냐.0395


흔들이는 자기 운명의 목덜미를 휘어잡은 그 자의 돌아볼 수 없는 모습과 움직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해한다는 것은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다...물러섬으로써 얻은 가설의 타당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발견되는 것이지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0403
빠져든 습관의 늪에서 자기의 몸을 일으키는 행위. 그것이 물음이다. ‘이다‘라는 게으름의 조류에서 자신을 세워서 ‘아니다‘로 거슬러오는 타자의 파도에 부딪치려고 물음을 던진다. 0406
‘그 밖에 없는가‘...이것들은 끝없이 밀려오는 타자에 부딪쳐서 떠오르는 상상의 대상이다. 0407
바꿈의 뿌리는 있음에 있는가, 없음에 있는가, 아니라면 있음과 없음은 같이 그 밑에 있는 바탕에서 다름으로 얽히어 교대하는 다만 순간의 모습들이 아닌가. 0433
말로 엮은 그물에 걸려 있지 않음을 어떻게 가리킬 수 있는가. 같음으로 엮이는 그물로부터 어떻게 있음의 뿌리로 벗어날 수 있는가. 0470
시원분석은 시작에 놓여 있는 어떤 사태를 찾음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날에서처럼 지금도 되풀이되는 보편의 바탕을 찾는다. 0473
얽힘을 찾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그 사태의 안으로 혹은 필연으로 얽혀 있는 것을 찾는 내재함축의 길과 그 사태의 밖으로 혹은 우연으로 얽혀 있는 것을 찾는 잉여추적의 길이 있다. 0495


서양사람들은 그들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철학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다같이 ‘이다‘나 ‘아니다‘의 분명한 선택을 강요하는 무모순의 형식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0500
이는 순수 존재라는 시원의 사태에 안으로 얽힘과 밖으로 얽힘이 짜는 두 갈래의 길이 함께 깃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0542
반성과 부정의 샘은 이성 내재와 이성 초월의 두갈래로 펼쳐지는 타자의 길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0543
얽어짬의 논리를 초월성으로 푸는 자는 없는가 0599


경험주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모든 연역적인 귀결이나 일반화에 부딪칠 반역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0630
경험은 주어진 사태인 전건으로부터 그 전건 아닌 자에 달려 있는 후건으로 나아가는 밖으로 얽어짬의 논리 위에서 벌어지는 사태이다. 0632
경험을 좌우하는 논리는 없는가...경험은 그의 확률로서 0이나 1을 빼놓는 사태이다. 경험은 확률 0과 1 사이에서 일어난다. 0636
왜 그들은 직관과 경험의 논리를 주장하는가. 새로운 진리를 찾는 길이 전제 안으로 얽혀짜이는 테두리 밖의 잉여에 주어지는 직관이나 경험에 호소하는 데 있으니까 0670
참으로 자기 밖의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 자기를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자기를 떠날 수 있는가. 어떻게 자기를 떠날 수 있는가. 어떻게 참으로 자기 아닌 타자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가. 0673
말은 참으로 있음을 드러내거나 대변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은 참으로 있음을 덮어버리거나 배반하는 것인가. 아니며, 말은 있음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상호주관의 바탕 위에 선다고 ㅎㅏ는 말은 사람들이 같이 만들어낸 하나의 그물이 아닌가. 그 말의 그물은 참으로 주어진 ㅅㅏ태를 건져내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낸 그물에 가려서 오히려 참으로 주어진 사태를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십세기 언어철학의 두 가지 큰 흐름을 일으킨 장본인인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ㅅㅏ람들이 정교하게 짜내는 말의 그물을 어떻게 돌이켜보았는가. 그들은 말의 그물이 다만 도구적으로나 실용적으로 쓰임에 그치는 것이므로 참으로 주어진 사태를 잡으려면 말의 그물과 짜임을 헤쳐보아야 함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0675
존재와 존재 ㅇㅣ전의 뿌리가 얽히는 한 줄기 추론이 흐르며 일으키는 파동이다. 그것은 추론과 상상이 흐르는 길에 부딪쳐서 나타나는 존재의, 아니 존재 이전의 뿌리가 짓는 매듭 현상이다. 0694


의문의 사태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타자로부터 덮쳐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언제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0775
어떤 사태든지 그 사태 아닌 것이 내는 조건에 마주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존재 밖에서 존재의 뿌리를 찾을 수는 없는가. 뿌리나 바탕이나 이유를 찾음에 두 갈래의 길을 피할 수 있겠는가. 0776
한결같지 않음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보편의 대상에 귀의할 것인가. ‘보편의 횡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을 것인가. 자아실현의 목적과 대상이 있는가. 아니면, ‘자아와 대상‘‘은 풀어버려야 할 매듭인가. 빠져나갈 수 없는 선택의 굴레 속에서 얽혀 이어지는 존재의 매듭을 번갈아잡으며 방황하는 ㅅㅏ람들. 철학자. 정치가. 신앙가. 0790


소와 같은 짐승에겐 부정의 체험이 없는가. 0800
뜻밖의 사태를 언제나 상상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인가. 0801
생각이란 파도처럼 일며 깨지는 것...방향도 알 수 없는 거친 풍랑을 만나면 산산이 찢겨진 그물에 얽힌 채로 바람과 바다가 지닌 무한한 자유와 힘을 상상해야 한다. 0802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파국과 미결의 사태, 부조리와 무의미를 밀어내버릴 수 있는가. 0823
한결같이 펼쳐지는 연장선 너머에 얽혀 있는 잉여의 사태에 대한 상상으로 귀결은 내재함축을 따르는 추리의 영역 밖으로 나아가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0850
가능의 사태에서 현실의 사태로 나아감에 부딪치는 우연을 막을 수 있는가. 그 미결의 정도를 확률이나 귀납논리로 줄일 수 있는가. 0851
뜻밖의 사태를 만나거나 잡는 데에 연역적인 논리의 추리는 크게 쓸모있는 것이 아니다. 0854
깨달음이란 다름의 사다리를 딛으며 거슬러올라감이 아닌가. 0870
부정의 힘을 가진 자는 어디에 있는가..상상에 맞서는 거부이거나 거부에 맞서는 상상이다. 0878
생명은 거부하는 힘으로 태어나 거부에 둘러싸여 잠든다. 존재 아닌 자의 힘으로 나타나고 존재 아닌 자의 힘이 거두어간다. 0890


타자를 정복하거나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거나 그것은 일시적인 자유의 환상이다. 타자가 허용하지 않는 자유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0902
생각은 의문을 가진 자의 깨어날 수 없는 집념이다. 그것은 치료허거나 벗어나야 할 것이지 키우거나 잡고 있어야 할 일이 아니다. 0931
생각 자체는 언제나 이탈이며 거부이다. 0933
갓난 아기가 자기 아닌 참 대상의 소리나 참 타자의 몸짓에 마음을 여는 순간은 어떻게 일어나는 가0938
죽는다는 것은 드디어 버림으로 들어서는 자유의 길 0939
일생은 어린 아이 때 하루의 꿈같다. 부지런히 뛰는 삶은 더욱 짧다. 0970
찾음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버림으로써 보편과 일반에 이르지 않겠는가. 개념이나 경험 가운데는 사람의 관점이나 의도가 들어앉아 있으니까. 0980
이성 자신의 우연과 의존성을 시인함으로 타자에의 양도를 목표로 하는 합리성은 없는가. 0982
웃음은 말의 그물을 뚫는 것인가...웃음은 아직 버릇의 그물 가운데에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웃는 얼굴에 따귀를 부친다면 웃음이 버릇의 그물을 깨뜨리고 그참 모스ㅂ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0991


한 이란 무엇인가. ㄱㅓ절당했기 때문에 풀리지 않은 감정,실험하지 못한 ㅇㅣㄹ에 대한 사라지지 않는 우ㅓㄴ망과 집념. ‘아니다‘를 토해내는 부정으 ㅣ샘이 초월한 데에 있거나 현실에 펼쳐지는 파도의 피할 수 없는 밀림이기때문에 넘쳐오는 것./아무리 퍼올려도 끝없이 쏟ㅇㅏ지는 우물바닥처럼 깊이 가라앉은 것인가 1001
동양 사람의 논리는 애매함을 받ㅇㅏ들이는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논리는 실ㅈㅔ의 정신을 나타낸다. 1004
왜 인류구원을 향한 박애와 보편의 정신을 외치는 종교는 오히려 더 닫히거나 배타적일 수 있는가. 왜 동양 사람은 옛날부터 공과 무 혹은 중용의 대도를 지니고 자유자재의 열린생각과 논리를 펼치면서 전제정치와 획일주의의 더 오랜 흐름을 가지고 있는가. 1040

볕뉘.

-1. 고도를 기다리며의 럭키는 모자를 쓰면 생각하는 작가가 된다. 그 모자를 서로 번갈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쓴다. 서로 번갈아 쓰는 모양새를 취하다보니 어느 것이 어느 모자인줄 조차 모르게 된다. 더 이상 생각이라는 것 조차 수면 아래로 떨어진다.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

0. 안티호모에렉투스를 인상깊게 읽고 저작을 챙겨보려고 했지만 어디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괄호의 철학. 위의 저서는 30년전 저작이고, 저자가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책이기도 하다. 강신주가 박동환철학에 대한 강연을 한다고해서 끌리기도 했고, 사유가 확장되었으면 하는 바램들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다.

1. 앞의 철학책들과 이어 읽으면 편할 듯 싶다. 이어진 저작들 사이 다른 결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서 읽고 싶다. 있다라고 하는 순간 없어진다. 나와 너에 또 다시 집착하는 순간 그 사이는 다시 안보이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무엇일까. 백지상태로 만들어놓고 덧셈의 가지를 하나하나 그려보는 것도 몸에 맞는 철학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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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넷이 다 거기 한자리에 있었다니까. 그런데 그 중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나머지 세 사람 얘기는 제쳐놓고 그 사람말만 믿는지 모르겠다니까.
블:: 누구나 다 그렇게 믿고 있잖아? 그 사람의 해석밖에 모르고 있다니까. 17

에: 디디, 넌 그렇게도 인정머리가 없냐? 내 악몽 얘기를 너한테 못한다면 누구한테 하란 말이야?
블: 너 혼자서 삭여야지. 내가 그런 얘긴 질색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21

포조: 난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기쁘단 말이오.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도 만나면 다 배울 점이 있고 마음이 넉넉해지고 더 많은 행복을 맛보게 되거든 45
포조: 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 웃음도 마찬가지지요. 51

블: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 둘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133 블: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따져보는 거란 말이다.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134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짖거리를 다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다. 뭐랄까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ㅅㅏ실은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135

베케트는 삶을 지배하는 것은 고통이라고 말한다. 나는 고통받고 있으므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ㅌㅏ인의 고통, 즉 인간의 고통을 말한다. 169 베케트는 인간의 존재를 극히 가늘고 작은 것으로 축소시켜 시간이 지나면서 먼지가 앉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와 같은 실험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축소시킬 수 없음을, 그 ㅇㅓ떤 허약한 인간도 완전히 침묵시킬 수 없음을 증명하려 한다. 171


볕뉘

0. 책들 사이 자주 언급이 된다. 시모임에서 일장 연설을 들은 샤무엘 베케트. 연극을 하고 싶다는, 연극을 해야한다는....여러 이야기들이 앙금처럼 남아 책이 손에 왔다.

1. 어제 한차례 밀린 책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러다가 밤이 이슥해져서야 어찌된 일인지 이 책이 손에 들려 읽었다. 실존주의의 냄새가 강하게 진동한다. 세상은 정지하면서도 움직인다. 움직이면서도 변화한다. 샤무엘 베케트가 있다면 전혀 다른 톤의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쓰지 않을까 싶다.약동이 곳곳에 스며있거나 움츠리고 피동의 존재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다른 장치를 두지는 않을까 싶다.

2. 세기에 필요한 문학의 총량이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이 더 필요한 때이지는 않을까....수없이 개화선을 넘는 꽃들처럼...........사실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무너뜨릴 묘수들이 존재를 관통한다면.....내장 깊숙히...

3. 비단 꿈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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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4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4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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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이 선호되기 시작한 것은(색에 대한 선호도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세기에 청색은 신학적으로 중요시되었고 예술적으로도 그 가치가 상승했으며, 13세기에는 염색업자들이 아름다운 청색 염료를 만들어 냄으로써 청색의 인기 상승에 공헌했다. 그리고 14세기 중반부터는 문장학적으로 중요한 색깔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2 세기 후인 16세기에는 종교개혁에 발맞춰 도덕적 차원에서 경건한 색이 되었다. 그러나 청색이 결정적으로 승리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다. 199

중세 신학에서 빛은 감각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시적이면서도 비물질적인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시계”인 빛은 그 자체로서 신의 현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ㅇㅣ런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색이 빛이라면 색 역시 비물질적인 것인가?아니면 사물에 덧입힌 단순한 물질에 불과한 것인가? 교회의 입장에서는 ㅇㅕ기에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었다. 만약 색이 빛이라면 색은 본디 신성한 성질을 띠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특히 교회 내에 색을 확산시키는 일은 빛, 즉 신을 위해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색과 빛의 추구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로 색이 단순한 껍질이자 구체적인 물질이라면 신성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신의 창조물에다 인간이 신에게 이르는 ‘통로‘을 가로막는 부도덕하고 해로운 것으로 마땅히 거부하고 억제해야 하며 교회에서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68

혼합하는 것, 뒤섞는 것, 합병하는 것, 화합시키는 것 등은 창조주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질서와 자연 상태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곧잘 악마가 하는 짓으로 여겨졌다. 직업상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염색공, 대장장이, 연금술사, 약제사 들은 물질을 ㄱㅏ지고 속임수를 쓴다는 느낌 때문에 일종의 두려움이나 의혹을 품고 있었다. 어떤 작업은 직접 하기를 꺼렸는데, 예를 들어 염색 작업실에서는 세 번째 색을 내기 위해 두 가지 색을 섞는 일을 기피했다. 색을 배열하거나 겹쳐 놓는 경우는 있어도 혼합하는 일은 없었다. 15세기 이전까지 염색에서건 회화에서건 색 제조법을 설명하는 책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초록을 만들려면 파랑과 노랑을 섞어야 한다는 설명이 전부였다. 116

14세기 중반 염색업자들은 검은색을 염색해낼 수 있었는데, 주된 원동력은 염색 분야의 화학적 발견이나 그때까지 유럽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염료의 도입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새로운 수요인 듯하다. 당시 사회는 양질의 검은색 천과 옷들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고, 염색업자들은 빠른 속도로 이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그러므로 여기서도 이데올로기적 요인과 사회적 수요가 화학적, 기술적 진보를 이끌고 촉진시킨 것이지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니었다. 137

서양에서는 색에 대한 여러 가지 윤리가 아주 오랫동안 큰 줄기를 이루며 지속되어 왔닥 볼 수 있다. 12세기 ㅅㅣ토파의 예술에서부터 14-5세기 그리자유 기법의 세밀화와 종교 개혁 초기의 색 파괴 물결을 ㄱㅓ쳐, 17세기의 엄격한 칼뱅파나 얀센파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단절도 없이 오히려 일관성있는 논리를 지닌 채 이어져 왔다. 바로 색은 겉치레, ㅅㅏ치, 인위적인 것, 환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색이란 물질일 뿐이므로 헛된 것이고, 진실과 선을 왜곡하므로 위험한 것이며, 유혹하고 속이려 하므로 책망받아 마땅하며, 형태와 윤곽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게 하므로 거슬리는 것이다. 173

16세기 말부터는 청색이 완전히 ‘정중한‘색깔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177 종교 개혁은 교회 장식이나 전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의상에서도 ㄷㅏ색 배합을 강력하게 거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중세의 색에 관한 윤리는 색조만이 아니라 색의 농도도 규제했다. 말하자면 고상하더라도 지나치게 진한 색깔의 천을 만들어 내는 화려하고 짙은 색을 내는 염료는 금지되었다. 반면에 종교 개혁이나 근대의 의상 규정들은 색의 농도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단지 색깔만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청교도주의나 경건주의 교파들은 세상의 허영심에 ㄷㅐ한 혐오에 ㄸㅏ라 개신교파 의상의 엄격함과 획일성을 강화했다./유채색들 중에서 청색을 유일하게 올바른 기독교인에게 어울리는 ‘정중한‘ 색으로 만들었다. 178, 179

나는 일상생활의 대량 생산품에서 색채가 상당히 제한되었던 까닭은 신교도 윤리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마치 ㄱㅣ술적으로는 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나 사회윤리가 이를 거부한 듯하다. 182

18세기에 들어서 새로운 안료가 점점 많이 생겨나, 작업장에서 색소를 선택하여 빻고 혼합시키고 칠하는 오래된 방법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대체되면서 경쟁하거나 혼란에 빠졌다. 이 새로운 제조 방법은 작업장마다 달랐고 심지어 화가마다 다른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17세기 말에 있었던 뉴턴의 발견과 스펙트럼의 부각은 점차 색의 질서를 바꾸어 놓았다....그리고 원색과 보색의 개념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으며,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 같은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개념도 생겨났다. 18세기 말의 색상 ㅊㅔ계는 18세기 초와 완전히 달라졌다. 185

페르메이르의 노란색, 흰색, 파란색 터치 위로는 특유의 음악성이 흐른다. 바로 이 음악성이 우리를 ㅁㅐ혹시키고 그를 자기 시대뿐 아니라 아마도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화가이게 하는 것이다. 189

예전의 대가들은 화가가 어떤 경지까지 올랐는지 알아보는 기준으로 살갗의 묘사를 삼았다. 데생보다 채색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결정적인 논거로 내세운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즉 색깔만이 살을 가진 인간에게 생명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색깔이 곧 회화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살아 있는 생물에게서만 회화가 나오기 때문이다. 195

괴테의 색채론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이 책 내용을 보충하였는데 가장 고유한 장은 ‘생리학적인‘ 색을 다룬 부분일 터다. 여기서 작가는 색 인식의 주관성과 문화적인 성격을 힘주어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거의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226

일본인들의 감성에는 파랑인지 빨강인지, 또 다른 색인지 보다는 그 색이 광택을 지니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일본어에서 흰색을 가리키는 말을 예로 들자면, 가장 불투명한 흰색부터 가장 번쩍거리는 흰색까지 단계적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이름을 지닌다./대부분의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빨간색 계통을 갈색 혹은 노랑, 나아가 초록이나 파랑으로부터 구분하는 데에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면 어떤 주어진 색이 있으면 그것이 건조한 색인지 축축한 색인지, 그리고 부드러운 색인지 거친 색인지, ㅁㅐ끄러운 색인지, 꺼칠꺼칠한 색인지, 즐거운 색인지 슬픈 색인지를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색은 다른 감각 요소와 짝을 이루어 ㅇㅣ해되므로 빛깔이나 색조 따위는 핵심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291

이러한 ㅅㅏ회 간의 차이는 사실 근본적인 것이다 이것은 색인식의 문화적 성격이나 거기서 비롯하는 색에 대한 명명현상등을 강조해 줄 뿐 아니라, 여러 다른 감각과 관련한 복합적 지각 현상과 공감각 역할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또한 이 차이점들은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나타나는 감수성을 비교 연구할 때 신중해야 함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293

오히려 파랑이 다른 색, 특히 빨강, 초록, 하양, 검정보다 상징성이 ‘덜 강한‘색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인지도 모른다/파랑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점, 조용하고 평화적이며 아득한 느낌과 함께 거의 중립적인 색이라는 점이다. 물론 파란색은 꿈꾸게 ㅎㅏ는 색이지만 이 멜랑콜리한 꿈은 약간 마취제 같은 일면을 가진다.300

파란색과 물의 관계, 그리고 특히 파란색과 차가움의 관계다. 이에 대해 길게 언급하기에는 이 책의 지면이 모자랐지만, 이것은 파랑색을 살필 때 아주 중요한 문제다. 특히 근대와 현대에서 그러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따뜻한 색이나 차가운 색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순전히 관습적인 문제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는 ㅍㅏ란색이 따뜻한 색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17세기에 ㅇㅣ르러서야 파란색은 점차적으로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비로소 ㅍㅏ랑은 차가운 색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물이 ㅍㅏ란색으로 인식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과거의 그림들을 보면 물은 모든 색으로 표현이 가능했지만 상징적으로는 초록이 물의 색으로 꼽히곤 햇다. 15세기에 와서야 ㅇㅣ 초록이 ㅈㅓㅁ차 파랑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302

볕뉘.

0. 책방에서 책을 확인하고서야 구입했다. 상징사를 전공으로 문장,인장,이미지들을 연구한 거장이라고 한다. 개인적인 관심은 문양, 상징, 색 등이 있었는데 안성맞춤이지 않을까 했다.

1. 명불허전이라고 할까. 매끄럽고 깔끔한 기술이 마음에 든다. 미셸 파스투로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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