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훈련일지에 몇 가지 사항을 기록하여 자신의 신체가 여러 가지 훈련이나 생활 요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파악하면 과도한 훈련이나 부상을 막을 수 있다. 아래의 정보를 이용해서 훈련 프로그램이나 생활의 여러 부분을 잘 조절한다면 몸의 회복과 러닝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1.기상 후 심장 박동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심박수가 평소보다 분당 5회 이상 높다면 훈련 때문에 몸이 피로한 것이다. 이 경우 며칠간 고강도 훈련을 피하는 것이 좋다. 일주일 동안 매일 기상 후 심박수를 체크하여 자신의 ‘정상’ 심박수를 알아내도록 한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면 분당 10회 정도 빨라지므로, 눈뜨자마자 재도록 한다. 가능하다면 알람시계 없이 일어나서 재는 것이 좋다.

2.수면의 양과 질: 수면 패턴을 체크하기 위해, 매일 밤 수면의 질을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평가하고 수면 시간을 기록한다. 수면의 질이 떨어지면 러닝 성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쉽다.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과도한 훈련 때문일 수도 있지만 러닝과 관련 없는 생활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다. 하루 정도 수면 시간이 줄어든 것은 크게 상관없지만, 며칠간 계속 수면이 충분하지 못하다면 회복에 영향을 미치고 훈련에 대한 적응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3.체중: 매주 3∼4회 같은 시간에 체중을 잰다. 2∼3일간 몸무게가 줄었다면 수분 부족 때문일 수 있다. 몇 주 동안 계속 몸무게가 줄었다면 열량 섭취가 충분하지 않거나, 훈련이 과도하거나 몸이 아픈 것이다.

4.식사의 질: 에너지 부족은 음식 문제 때문인 경우가 많다. 특히 1∼2일간 탄수화물 섭취가 부족하면 훈련을 할 때 기운이 없게 느껴진다. 매일 전반적인 식사의 질을 1∼10으로 평가하고, 훈련에 방해가 되었다고 생각한 음식을 기록한다. 이렇게 하면 매일 적절한 음식을 고르도록 신경 쓰게 된다.

5.수분: 수분 부족은 러닝 성적이나 훈련 후 회복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 매일 체중을 재면 수분 상태를 알기 쉽다. 수분 상태를 매일 1∼10으로 기록하고 수분 부족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요소를 적도록 한다(예를 들어 내가 코치한 마라토너는 ‘와인과 담배 과잉섭취’라고 기록했는데 적절한 원인 지적이었던 것 같다).

6.에너지: 에너지 레벨을 체크하는 것은 몸의 회복 상태를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매일 에너지 레벨을 1∼10으로 평가하도록 한다. 에너지 레벨이 낮은 원인 중 가장 흔한 것은 연이은 과도한 훈련, 질병, 수분 부족, 탄수화물 섭취 부족, 철분 부족, 수면 부족 등이다. 훈련일지를 체크하면 원인을 찾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7.근육통: 러너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근육통을 늘상 느끼게 마련이다. 특정 근육의 통증은 부상 때문일 수 있으며, 전반적인 근육통은 훈련에 적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매일 전반적인 근육통을 1∼10으로 평가한다. 이 숫자가 며칠간 계속 증가한다면 몸이 아프거나 훈련이 과도한 것이다. 경기 후 또는 고강도 훈련 후 2∼3일간의 근육통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특히 내리막길에서 달린 후에는 4일 정도까지 통증을 느낄 수도 있다.

8.특정 페이스에서의 심박수: 기상 후 심박수처럼, 러닝시 일정한 페이스에서 심박수를 측정하면 회복 상태를 체크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트랙에서 편안히 훈련할 때 심박수를 재도록 한다. 평소보다 분당 5회 이상 빠르면 회복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 심박수는 매일매일 조금씩 다를 수 있으며 수분 부족, 덥고 습한 날씨, 맞바람 등에 영향을 받으므로 이러한 요소를 모두 고려하도록 한다.

9.환경 조건: 극도로 덥고 습한 환경에서 달린다면 신체는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기온과 습도를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몸이 그러한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한다. 특정한 환경에서 자꾸 몸이 힘들다면, 그런 환경에서는 하루 정도 쉬거나 실내 트레이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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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진리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번역) 483
레나토 로살도 지음, 권숙인 옮김 / 아카넷 / 2000년 6월
평점 :
절판


 

사회분석의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부제)


1. 학문이라는 것이 어쩌면 방관자의 입장에서 중립적인 입장에서 나름의 논리를 세우고, 바라본다고 하지만, 그러한 관점이 제대로 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현실이라는 '움직이는 모래톱'이 과거를 반추하여 만든 틀로 분석하여 현실을 멈추게 된다. 그러면 움직이는 모래톱은 우수수 모래 알갱이로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계급분석을 규정짓고 분석하는 이상, 제대로된 계급분석도 되지 않고, 현실에 있어 의미도 잃어버린다. 분석이라는 잣대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냐고 한다. 필리핀의 일롱고트부족의 머리사냥하는 문화를 논리틀에 들이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한다. 14년간의 연구에서도 얻지 못했던 것을, 아내를 잃은 슬픔을 통해서 그나마 조금은 머리사냥을 할 수밖에 없는 분노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해체주의가 목욕통에 있는 물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실천이라는 것이 이런 학문의 방관자적 입장과 해체주의의 경계에서 실천을 매개로한 본질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2. 경제전체주의에서 다양성과 공적영역의 접근성을 되살리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도 소중한 노력이다. 해방을 위한 거대기획의 실패?처럼 정치는 생활인의 공적영역의 접근, 기획만큼 생활정치에 천착하고 일상에서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정치,경제적 접근 보다, 예술적, 미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접근이 더욱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현수막에 걸려있는 과학이 '경쟁력'입니다라는 표현은 과학은 '문화'입니다라는 표현으로 녹아들지 않는 이상 '경쟁력'이란 구호는 경쟁력이 없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자본과 경쟁력의 들러리를 선 과학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상에 밥먹듯 즐기거나 부닥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 되지 않는 이상, 도구로서의 분과학문이 되는 이상 지금을 변화시키기에, 질적변화를 체험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3. 저자의 문화라는 개념은 기존 틀과 다른 것 같다.기존 분석틀이나 객관성, 공평무사를 학문의 바탕이라고 여긴다면 문화는 유형으로 구성되고 자기충족적인 총체이어야 한다. 타자의 문화를 알려면 내 기준으로 차이를 전제로 분석가능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문화라는 것이 그런 완결형태가 아니라 구멍이 숭숭뚫린 교차로들의 집합체로 표현한다. 사회를 지나간 것으로 또는 미래를 위한 한낱 도구에 불과한, 관찰자의 입장은 별의미가 없다고 한다. 사회분석은 지금의 움직임을 나타내줄 수 있는 절망, 입장교환, 서사, 위트 등이 빠진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고 전지적 렌즈를 들이대는 이상, 그 분석이란 것이 별 볼일 없다고 한다.

 

4. 그는 문화적 시민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민자를 비롯한 소수자들이 법적 시민권만으로 부족하며 문화적 유산과 정체성에 대해 자신을 가질 수 있는 문화적 시민권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구조보다는 과정을 나타내는 변화가 공간보다는 시간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며 학문과 글쓰기의 새로운 시도와 방법으로 일상적 실천을 말하고 있다.  (문외한이라 글을 쫓아가기도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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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노동계급의 형성 -상
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창비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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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톰슨의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은 노동 계급이 무지하고 난폭하다는 자본가들의 루머에 대한 강력한 문제 제기이며 노동자가 지닌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역능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이 책 앞에 달린 수많은 수식어와 그 역사적 의의를 논하기 이전에 이 책은 어느 영웅담 못지않게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책이라는 점을 먼저 말하고 싶다. 이 책은 1790년대 초의 런던 교신 협회의 활동부터 1832년의 차티스트 운동까지 영국 노동 계급의 완성에 이르는, 억압 속에서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단결하고 자신의 삶과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는 영국노동자들의 서사시 같은 장대한 투쟁의 기록이다.

우선, 톰슨이 사용하는 계급이라는 개념이 그 톰슨 이전의 계급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톰슨 이전에는 계급이라는 것을 현상파악을 위한 사회 과학적 개념, 범주, 혹은 맑스에 따라서 경제적인 생산관계에 따라서 결정되는 물체 혹은 구조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톰슨에 의하면 계급이라는 것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톰슨은 계급이라는 것을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하나의 의식이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이러한 계급에 대한 정의에 따라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에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생겨나는데 우선, 계급 형성이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라 할 때 프랑스 혁명과 같은 외부의 사건보다는 당시 노동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문화적 전통이 노동 형성에 중요한 특징으로 떠오르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계급은 경제 구조에 의해 단순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활동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즉 여기서부터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톰슨에 의하면 당시 노동 계급의 형성은 노동자들의 삶이 피폐화되는 데에 대한 수동적인 반작용이 아니었다. 기존의 노동사 연구를 통해 비춰진 노동자들의 모습은 새로운 진보에 적응하지 못하고, 난폭하고 음주를 즐기는 무절제한 집단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톰슨은 노동자들을 절제하고 스스로 만든 규칙을 지키며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집단으로 묘사한다. 일례로 러다이트 운동이 단순히 기계 문명에 대한 거부라는 반동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도덕경제'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음이 톰슨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거부했던 것은 산업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산업혁명을 둘러싸고 있던 여러 정치적 억압들, 노동자에게 저임금과 고된 노동을 강요하는 자본가와 국가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들이다. 그러므로 톰슨에 의하면 노동 계급의 형성에 이르기까지의 영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절망에 의한 폭동도, 유토피아적 향수에 의한 반동적 운동도 아닌, 산업혁명 후의 사회를 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한 헌신적인 투쟁이다.

톰슨의 책은 '우리는 이 시대의 영웅적 문화를 꽃피운 그들에게 감사할 만하다'라는 감동적인 말로 끝난다. 그러나 이후에 나온 실증연구에 의하면 영국의 노동 계급들이 제국주의에 전혀 적대적이기 않았고 오히려 제국주의가 노동자들로부터 올라오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동 계급 역시 백인 남성이라는 자기 계급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 계급 역시 그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서 당시 노동자들의 운동을 폄하할 수 있을까? 영국 노동계급들이 당시에 보여줬던 영웅적인 기록들은 당시의 시대적 맥락 안에서 평가 받아야할 것이다. 따라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 단순히 이 책이 가져온 인문사회과학의 방법론적 혁신으로만 평가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오히려 폭압에 대항하며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는 노동자, 보통 사람들의 역능을 생생히 증언하는 그 내용이 더욱 소중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끝으로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한 작품의 번역에 쏟은 역자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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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5-01-2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지인 술자리로 향하던 중, 건축일하는 친구이야길 한다. 일거리도 없고 아이들 먹여살리기가 힘들다고 '죽음'을 생각해보았느냐구 해서 '멍청한 생각'하질 말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둘이서 대작을 주거니 받거니하면서 폭음을 하였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자꾸 시선이 간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노동계급의 코드가 베여 있는 절망을 반복한 시선은 어떨까? 삶과 죽음은 늘 같은 시선으로 반복될 것이고, 그 경계에 대한 심각한 절망도 고독도 옅어지는 것은 아닐까? 너무 가진것?이 많아 소자본가의 코드로 인해 죽음에 대해 담을 쌓아두고 이해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면... 솔직함과 건강함이 노동계급의 미덕이라고, 내일 하루 품팔려면 지나친 음주, 사치스러우면 그만큼 고통이 따르기에 사치스러울 수도 없는...

당신들로부터 그런 습관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살림살이도,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건강한.... 나의 얄팍한 삶의 태도에 대해 주저스럽다.

톰슨 책을 보고 싶다. 계급은 그 구성원들이 유형화된 관계, 제도, 관념들을 정립함으로써 가시적으로 만들때만 비로소 가시적인 것이 된다는, 계급 형성은 정적 형성이 아니라 능동적 과정이라는 톰슨의 책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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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박정애 옮김 / 큰나(시와시학사)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결혼해서 철든 아줌마들의 푸념식 일상 얘기, 아니면 지극히 학술적인 수준을 넘지 못하는 많은 한국 페미니즘, 아니면 주체를 모호하게 해서 현상만 분석, 지적하고 끝내는 서적에 싫증을 느껴가면서 오히려 열심히 쏟아지는 번역판 서양페미니즘 서적에 거부감이 들었다. 왠지 악을 쓰듯 최후의 발악을 하는 듯한 한국 여자들이 쓴 책과 여유있고, 깊은 성찰에서 나오는 훨씬 성숙해 보이는 그네들의 깊은 맛이 느껴지는 책이 묘한 대조가 되어서 허탈한 마음에 눈물을 짜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책에서 그 허탈함의 실체가 잡혔다. 바로, "그저 자기가 희생되는 것에 대한 울분과 적의를 풀어놓는" 이 부분. 많은 한국 페미니즘 서적을 읽으며 내가 불편했던 감정이 바로 이 한줄에서 정리가 되었다. 자기 남편과 시부모 앞에서는 풀어내지 못하던 감정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그렇게 풀어낸 책들이 불편했던 거다. 물론 결혼한 여자들끼리야 맞아맞아 나도 그래 하면서 맞장구 칠 내용들이겠지만 나로선 감당하기 짜증나는 책들이었다. 물론 그런 책에서도 부분부분 얻을 내용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코드는 울분과 분노와 적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데에 실망을 하게 되는 거였다. 처음엔 별 개념이 없었지만 언젠가부터 손에 잡히는 여성학관련책에 대한 인상이 이렇게 굳어져 가고 있다.

이것 말고도 내가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이 책에서 의문이 많이 풀렸다.

저자는 어쩌면 그렇게 예리한 지 읽는 내내 가슴에 와닿는, 말그대로 ‘행복한 페미니즘’이었다. 인종문제를 뺀다면 이 책에서 말한 내용들은 한국 페미니즘에서도 역시 고민해야할 문제들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계급의 차이’가 미국에서는 ‘인종차별’로, 한국에서는 빈부의 계층 문제로 나타난 것뿐, 넓은 의미에서 보면 ‘계급의 차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한국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 전반적인 구조적 문제를 보지 못하고, ‘여성’이라는 코드만을 읽어내는 우마저 보인다. 여성 자신을 자각하지 않은 채 언제나 남성, 사회, 가부장제 탓이라고만 외쳐대는 페미니즘이 회의가 든다. 여성 자신이 아닌 남성 때문이라는 그 ‘때문에 페미니즘’만 난무하고, ‘(~에도)불구하고 페미니즘’ 즉, 반기를 들지 않았던 여성의 모습을 반성하지 않는 모습에서 한국페미니즘에 별 희망이 없어 보인다. 여성은 피해자이기만 할까? 남성은 가해자이기만 할까?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사랑은 이성이 있어야 이루어지듯 모든 현상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한국사회가 남자만의 잘못으로 가부장제가 되었다면 도대체 여성은 그동안 어디에 숨어있었단 얘긴가! 스스로 일상에서 성차별과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적응해가는 여자들이 오히려 가부장체제를 오히려 더 공고히 했던 건 아닐까? 이 부분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점에서 난 한국여성운동에 관심이 식어버렸다. 여성을 '피해자'로, 남성을 '가해자'로 설정하고 출발하는 페미니즘에선 여성 스스로 가부장적 사고를 체화하고 살아가는 여자야말로 마초에 버금가는 가부장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존재라는 점은 고찰 대상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성차별적 사고와 행동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여자야말로 위협적인 존재라는 점은 남자를 적으로, 가해자로 설정하는 페미니즘에서는 고찰대상이 아닌 것이다. 내가 이런 걸 지적할 때마다 굉장히 불편해 하는 여자들을 많이 보았다. 심지어 남자에게서 들었던 욕보다 더 심한 욕까지 얻어먹은 적도 있다.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는 여자의 입에서 나온 “입닥쳐!”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정의내리지 못하고 있다.


주목해 볼 사항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내 관심을 끈 내용은 바로 이 부분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쳐 주는, 대중적 기반의 교육 운동을 창출해 내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주류의 가부장제적 매스미디어로 하여금 우리 이웃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하여 부정적인 것 일색으로 학습시키도록 방조한 셈이 되었다. 벨 훅스 가 미국 페미니즘을 이렇게 염려했다시피, 모든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아닌 페미니스트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버린 한국 페미니즘 역시 이 점에 고민이 필요하다.

벨 훅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남자들이 페미니즘의 기치를 들고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이다. 지구에서의 삶이 안전성과 지속성을 가지려면 남자들이 페미니즘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 남자들은 페미니즘이 자신들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할까? 이 물음이 남자에게만 던져져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을 자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성이 일상에서 반기를 들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적응해 갈 게 아니라 여성 각자가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 여성은 깨어나지 못하면서 남성을 깨우려는, 남성이 깨어나기를 바라는 건 박자가 맞지 않는 일이니까. 여성의 일상에서 ‘때문에’라는 언어를 거두어내면 여성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벨 훅스도 진정한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면 자기의 내면화된 성차별주의와 우선적으로 맞닥뜨려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에 대한 인지와 관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사랑은 인정과 돌봄과 책임과 헌신과 지식을 결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정의가 없는 곳에 사랑이 있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한 이해를 통하여,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지배에 반대할 힘을 준다는 사실 또한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선택하는 것은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진짜 사랑을 실천하는 남녀라면 페미니즘을 빼놓고 사랑을 얘기할 수 없다. 나는 여자든 남자든 페미니즘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진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여러번 다룬 ‘페미니즘 이론: 주변에서 중심까지’라는 책이 검색되지 않는 게 좀 아쉽다. 최근에 나온 ‘사랑의 모든 것’이란 책을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이 책도 당장 주문해야겠다. 원서로 소장하고 싶은데 원서를 구하지 못해 아쉽다. 이 좋은 책을 도서관에서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다 이제야 손에 잡은 게 후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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