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선배후배여자스승제자남자부모자식사제지간후배선배노인자식아이부모남자여자는있지만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쪽지를 단기사병들이 생활하는 군대 후미진 화장실 벽에 붙여두곤 했다. 말년 병장일때 부사수는 전역 앨범에 슬그머니 그 말을 끼워넣어 뜨끔했다. 이 녀석이.

빛바람도 여러해 곡절을 갖고 익어 노을 닮아가는 지금에서야 더 그러해야했는데라든지 잘했다는 마음이 다져진다. 그러지 않은 인간들과 뒤엉켜살면서 이기도하고 목소리도 더 내었으면 싶다는 마음이 불쑥든다. 그런 부류의 인간은 주기적으로 늘고줄고했으나 바뀌지는 않았다. 물러섰다 가끔 대들며 물었다.

사람보다 권위나힘바라기에게는 그럴 확율이 높았다.* 농담조차 모르는 이들 말이다. 그들에게는 사람 사이 사이 가 넓고 갖고싶고 닮고 싶은 것들이 위에만 있는 듯 보였다.

웃음과 농담을 그래서 키우고 지켜야한다.

발.

1. 웃음 없는 자들의 이면을 관찰해보길 바란다. 시간을 갖고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도

2. 남이 ‘님‘이 되는 날들도 더 당길 수 있길 바라며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능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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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1. 오늘은 잠시 진도를 더 나가본다. 自作 글들을 그림에 입혀보면 어떨까 싶었다. 폰트 16에 그림판 작업. 나눔명조체 작업을 통해 역출력을 했다. 그리고 판박이처럼 붙였다 뗀다. 활자가 온전하게 붙어있지 않아도 되지만 가급적 온전한 형태로 남도록 한다.

 

2. 어떠신지 모르겠다. 이렇게 한 뒤에 낙관을 할 예정이다. 뭘 해먹지. 남은 채소와 버섯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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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1-14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울 님 버섯찌개 다 드셨나요 ㅎㅎ
그림도 글도 참 좋아요.
봄을 반기는 마음이 어느새 우리 안에 깃들어 있다는 걸 깜짝 느낍니다. 추운 겨울이지만 봄이 보이네요. ^^

여울 2022-01-14 16:38   좋아요 0 | URL
아직요. 봄찌개는 저녁에 ㅎㅎ 그래도 마음은 환한 봄이네요^^ 즐거운 주말요~~^^
 

 

 

 

 

 

 

 볕뉘.

 

 1. 전시가 끝나고 십여일이 지나서야 뫔갈피가 잡히기 시작한다. 화실에 가기 전, 작업할 분량들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그러지 못한 상태가 계속된다. 순두부 계란탕, 추어탕, 찜닭, 야채 요리, 고함량 요구르트 들로  집밥시리즈를 가동시키고 나서야 활력의 한움큼을 쥘 수 있었다.

 

2. 선물 겸 응원에 대한 감사표시로 서명 마무리를 궁리해둔다. 스티커 판박이처럼 거꾸로 출력시킨 뒤, 풀로 붙여 떼어낸다.  그리고 판 도장으로 엷게 찍는다.  장소와 만난 공간들을 새겨둔다. 몇몇은 글자가 두드러지는 것 같아 색을 입혀 조금 어른거리게 만들어 둔다.

 

3. 위의 미술사 책들은 @달팽이책방의 선구안을 볼 수 있기도 하다. 곰브리치가 여성화가들을 저작에서 거의 넣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표그림과 이력만으로도 여성들이 얼마나 경계를 섞고 무너뜨렸는지를 알 수 있다. 게이트웨이 미술사는 기존의 미술사 서술방식과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분류가 기준이 아니라 창작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내고 만들어낼 수 있는지 이론이 아니라 이론을 실제로 녹여내고 있다. 한 매체에 경도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작가이자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평론가이자 연극인이며 화가이자 판화가이며 조각가란 말이 말로만 머무를 수가 없다. 마음 속을 드러내놓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벽이 될 수 없다. 흰 벽에는 모든 것을 설치하고 걸고 그려넣을 수 있다. 심지어는 파 내려갈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는 너무 갇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도그마 속에... ...

 

4. 아크릴 도화지위에 올린 작품들은 담백하게 만들고 싶었다. 주제를 가지고 유사한 작업들을 많이 하고 싶었다. 한국화나 동양화 느낌이 들도록 말이다. 그러면서도 글과 정황이 있는 우리 그림들의 서명들이 있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이렇게 종이판박이를 해 보니 조금은 색다른 느낌과 마음을 그림에 집어넣을 수 있음이 다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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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볕뉘.

 

 1. 전시 마지막 날. 가족들이 내려와 전시 철수 일정을 조금 앞당기기로 했다. 어쩌면 막내녀석의 수고를 줄일 겸해서 식사시간도 서두르면 좋을 듯해서 이기도 하다. 예정시간보다 빠르게 시작하였지만 열풍기로 스티커 잔유물들을 제거하다보니 느리다 싶다. 시간보다 일찍온 미니는 짐들을 옮기다보니 일머리나 일요령이 장난이 아니다 싶다. 전동드라이버를 다루는 솜씨나 차량에 하나하나 채워넣는 순서에 어 이 녀석! 생각보다 잘하는데, 부르지 않았으면 어쩔 뻔. 가벽까지 순조롭게, 날카로워지는 날씨를 버티면서 마무리를 하게 된다. 퍼티(빠데)로 못 자국이나 금들을 채우고 반듯하게 해 놓았다. 깔끔해졌다. 사진 한장! 찰칵!!

 

2. 주인장님이 선물을 건넨다. 달콤하고 맛나는 비싼 홍차 세트.  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란 엽서. 그리고 곱게 써내려간 감사의 글.

 

3. 303호. 바닷가에 자리잡은 스위트 룸이다. 네 분이 머무를 수 있고 간이 테이블이 있어 전시기간 내내 인기를 끌었던 방이다. 송도 사진전을 여는 곳이기도 하고 파도 소리의 긴 여운이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맥주집이나 횟집 건너편으로 손님들의 환영이벤트를 하기에도 적당한 곳이기도 하다.  3-4년전에 내부 보수를 한 곳인데 이렇게 창호지를 바르고, 그 사이에 단풍잎들이 맛갈스럽게 들어있기도 하다.

 

4.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가난하고 외롭고 노옾고 쓸쓸하니라면서 싯구를 외워본다. 가난하고 외 롭고 쓸쓸하니 입 속으로 메아리를 지어본다. 이렇게 2021년을 보내었다 싶다.

 

 

 5. 황석영 단편 <입석부근>의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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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임과 만남 사이. 엽서를 품고 가서 전달하거나 식사만남에서 기다리는 사이. 그 사이를 짬을 채우는 용도로 쓰다가 오늘 환해지는 아침에서야 펼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겨울이지 겨울을 펼쳐볼까. 펼쳐야겠지. 눈이라니.

 

 

 

 

 

 

 

 

눈내린 아침

홀로 마른 연어포를

겨우 씹었다

 

 

 

노 젓는 소리

파도를 가르고 창자 얼어붙는

밤이여 눈물

 

 두어 작품을 읽고 그만 마음은 차가워진다. 간사한 마음은 바로 봄으로 향한다.

 

꽃에 들뜬 세상

술은 허옇고

밥은 꺼멓다

 

 

까망 보리밥. 간난은 이렇게 마른 버짐처럼 붙어있다. 가난에 시가 읽히고 시가 씌여질까.

 

그리하지 못할 것 같다.  삶의 벼랑처럼 느껴져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2. 탈성장에 관한 좀 간략한 책들이 없을까 싶어서 몇 권 골라 읽고 있다.

 

일을 하면 돈을 준다.  가까운 일가친척이나 지인을 돌보면 돈을 써야 한다.  돌보지 않고서는 기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일을 하는 시간이나 돌보는 시간이 조사에 따르면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성장이나 GDP에 잡히지 않는 노동의 시간이 절반이나 되는 셈이다.  돌보는 시간을 지디피나 성장으로 잡기 위해 난리다. 잠재 시장이라고 말이다. 가사노동이나 약자들을 보살피는데 뭐 제대로 한 일도 없으면서, 새로운 시장이라고 못볼 것을 본 것 마냥 법석을 떤다.   숨을 쉬고 있는 한 먹고 자고 싸고 입고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물건 살 돈이 없으므로 돈을 줘야한다고 한다. 기본이라는 둥, 안심이라는 둥. 빚을 내고 빚으로 집을 사고, 기를 쓰고 번 돈으로 또 빚을 갚고, 이렇게 반복된 일상의 숲은 미로처럼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마치 세상이 그러한 것처럼 주장한다.

 

선언을 만들고 테제를 만드는 이들.  상식의 댐은 무너졌을까? 무너지고 있을까? 무너져야만 하는가? 선언하는 방법이나 테제를 만들고 전달하려는 방식은 문제가 없는가? 앎의 폭탄을 던져 미수에 그친 숱한 족적들.  왜 폭탄은 터지지 않았으며 터진 폭탄에도 그곳만 도려내어져 삶들은 눈꼽만큼도 변하지 않고 있은 것일까? 나는 못살고 있으며 더 떼돈을 벌어야 하고, 남들 더 잘사는 꼴은 보지 못하겠고...그렇게 또 일상의 늪으로 함몰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조금 덜 벌고, 조금 덜 일하고, 조금 더 가까운 이들과 함께 살자는데, 그렇게 살자고 하는데 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일까? 혼자 독식하지 말고 같이 나눠먹자는데 왜 당신 상념은 성장중독에 걸려 다 같이 죽을 듯이 눈을 부라리는 것일까? 그런 당신을 위해 디그로쓰, 니디졌쓰로 이름을 바꿔야만 하는가?

 

중산층의 삶의 방식자체가 문제라는 것. 삶들이 뒤흔들리지 않는 것이 더 문제는 아닐까? 포스트코로나는 정작 바뀌지 않는 그룹들에게는 또 남의 얘길 뿐은 아닌가? 가난한 이들만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이 세상이 또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가난하다는 자체가 높기까지 하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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