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안에는 새 것과 쓰던 것이 있다. 늘 애용하는 쓰던 것의 라벨이 떨어지자 새 것을 사용해본다. 그런데 정이 가지 않는다. 손톱의 부분이 잘리거나 날라가기에 불안하다. 낡은 것은 적절한 힘으로 또각또각 온전한 손톱모양을 유지하며 잘린다. 자르고 난 뒤 한번만 다듬기로 굴려주면 맵시도 있고 완벽하다. 모아 버리기도 수월하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여러 경로 가운데 알맞은 길을 찾으려고 노력중이다.  그림 카드를 만들고, 전시홀별로 자석식 도면도 만들어 둔다. 캔버스별로 라벨을 달고, 투명상자도 구입해 따로따로 넣어둔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것들을 또 다시 확인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흐뜨러뜨리고 다시 기억을 살리는 작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관계들도 그러할 것이다. 경도된 결과에 어처구니없이 버려진 과정들. 여러 경우의 수의 과정들이 있던 것이다. 왜 그 관계가 어그러졌을까. 미리 예비하는 징조들이 있었을텐데, 왜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일까. 지난 과거의 기억들을 흐트러트린다. 


지난 번에 읽은 책이 로르동이다. 분명 여성분이구나 했는데, 새 책을 보니 남성이다. 지난 번 느낌적 느낌이라는 단어를 새기면서 다시보게 되는 책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느낌의 위상학이라는 책을 건네들기도 했다. 


과정이 실재다


이상사회라는 것은 없다. 그렇게 결과에 집착되는 세계는 없다.

영원한 과정만 있을 뿐이다.
















볕뉘


잘 짤리지 않는 손톱깎이를 사랑한다. 온전한 과정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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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 질문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도 그 가운데 한 부류이기도 하다. 비판도 그러하다. 자신을 도드라지게 하려고 비판의 대상을 아래에 두려는 것이다. 


선민의식. 남보다 낫다. 무엇이 문제일까. 관계는 서툴고, 사과는 어렵다. 사람들은 겹치지 않고 피해간다. 


여러 사연들이 들린다. 뒷얘기가 없을 수 없겠지만, 서로 간 아니 형제나 식구들도 오해가 아니라 절연의 과정들로 회복될 수 없는 지경.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가. 그 또한 높은 확율이 아니었음에도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니 말이다.


말은 날카롭다.


읽지 않고 타인의 작업을 폄훼하는 자신감들은 어디서 발생하는걸까. 말을 걷잡을 수 없이 뱉게되고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전력을 다한, 혼신을 다 바치는 일들을 비평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위험한 일이다. 어떤 잣대로 비난이 아니라 비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대의 삶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다.


모르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알게 된 이상, 예전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정정. 실수를 용인하는 삶. 이 사회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진심이 어려있지 않다면 사과하는 만큼도 못한 것이 현실이다.


왜 사람들이 빙빙 겉돌기만 하는지. 어렴풋이 잡히는 그물망들 그 당시에 알았다면 중재할 수 있었을까. 그 또한 모르는 편이 나았을까?


무수한 사연들. 


자신이 요리할 수 있을 때, 대표라는 이유로, 책임자라는 이유로 사적으로 전유하고 평가하기는 그 또한 얼마나 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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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인근에 다가서자 흐린 하늘이 짙어지더니 비가 내린다. 행사시간에 지나가면 좋으련만 챙긴 우산이 비바람에 뒤집어 질 정도다. 쌀쌀한 날. 토닥토닥 천막에 국화빵을 만드는 냄새가 향기롭다. 하나를 베어문다.


열 번째이다.  첫 해에도 비가 왔고, 그 마라톤 소식은 <꽃피는 봄이오면>이란  동화책으로도 접할 수 있기도 하다. 표지화, 삽화, 그림책을 그리면서 몇 번씩 울컥할 때가 많기도 했다.  감정이 이입될 수록 난감한 현실 앞에 먼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예산이 잡히면 어김없이 취소되기를 반복하는 현실도 매몰차다.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인과 함께 달린다. 자원활동을 하는 응원단들이 이백여미터 마다 빼곡하다. 화이팅이 넘치고 힘을 외치고 주고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대회를 위해 처음으로 마라톤 준비를 했다는 강선생님은 천천히 자기 페이스대로 잘 달려나간다. 헛, 시인님은 아이들을 챙긴다더니 치고 나가신다. 어딜 그렇게 쏜살처럼 달려나가는 폼이 초교 육상선수 출신이 맞다싶다.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몸이 배여있는 갑천변, 늘푸른축구장이 있던 곳의 반환점을 돌아, 조금 빠르게 달려준다. 어라 저기 건우동생 선우, 그림책의 우산공주님이 열심히 달려나간다.  이름을 불러주자 정말 대단하세요란 멘트를 날려준다.


그렇게 빗속을 달린다. 장애나 어려움들은 다 또다른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사회를 또 다른 시선으로 보게하기도 한다. 5.3k 32:19


볕뉘


행사장의 메인무대 주로 안내팝업 모두 여울 그림으로 채워서 남다른 느낌이기도, 무언가 기여를 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한 대회장이다.  지인들과 올라간 김에 파면뒤풀이를 즐기다오다.


함하세 700인분의 짜장을 준비해주시다. 사회민주당봉사팀 멋지다. 대장님 인사를 건네지 못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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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상처나 난다. 흉터가 생긴다. 누구나 갖고 있다. 아픈 기억과 나와 다른 환경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충격들은 나와 섞이지 못하고 동거한다. 불쑥불쑥. 트라우마다. 한가롭고 싶지만, 정작 한가한 시간들이 주어지면 못참는다. 지루한 것이다. 인간은 그렇다. 좋다가도 말고, 나쁘다가도 좋아진다. 생명은 그렇다. 그렇게 자신을 지워내며 남을 이겨내며 면역이 생기며 살아가는 존재다. 


능동태와 수동태.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존재들은 이렇게 언어에 의해서도 갇혀있다. 그들에게는 나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줘야 한다. 주어와 가끔 명사만 반짝거리고 그렇게 반짝여야 한다. 대명사의 사소한 그것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 지금을 살아내는 존재는 그래서 경계가 없다. 심문의 언어, 자책의 언어만이 있어, 정작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 볼 수 없는 환경이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교과서에나 있다. 역사와 기억을 가진 존재는 말과 환경이라는 폭력에 끊임없이 자가교정을 하는 존재다. 그러니 교과서 밖에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만성통증이라는 것은 신경에도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지만 기억이 끊임없이 지금의 나를 다스리는 것이기도 하다. 


윤과 국힘 정권의 삼년은 이런 배제와 이분의 늪과 같은 과정이었다. 끊임없이 혐오와 수치심과 자극으로 한편을 적으로 몰라내고 폐기시키려는 것이 본질이었다. 한 번도 품으로 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언론과 미디어의 지난 십년의 수사를 보라. 심문과 자책의 단어, 그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 늪에서 누군들 온전하겠는가. 지금 우리는 어쩌면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트라우마다.


당사자연구라는 것이 이 책들 사이 여러 번 나온다. 정신병, 우울. 나의 서사를 타인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내 병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섞여나가면서 알아지며 달라지는 관계, 그러면서 정작 갇힌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쯤에서야 달라지고 낫는다 한다. 


숫한 비평과 날선 정치인들에겐 책임의 언어가 부재하다. 비난과 비판만 있지 회복적 비평이 없는 세상이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의 일상의 미세한 틈의 말들도 바꾸ㅕ야 조금씩 바꿀 수 있고, 타자의 반면도 나라는 사실을 알아채가는 과정이 있어야 바뀐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도 험하게 몰아부쳤다. 


헌법수호의 날. 민주회복의 날에 지금을 너머서는 우리를 상상해본다.


볕뉘


정정. 실수, 실패. 우리는 무수한 환경과 면역을 이루어내는 존재다. 순간순간 실수, 실패가 우리를 이겨내는 전부다. 인정한다는 전제아래. 이 암울이 비처럼 내리는 세상에는 질투가 힘이 아니라 실수을 정정해내는 힘. 실패를 인정하는 분위기. 자신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힘들이 우리를 겨우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회복해야 한다. 말할 기회를 변론할 기회를 인정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 타인과 그릇된 자신을 함께 비추거나 봐 줄 광장도 필요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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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쉬운 근력운동 방법을 검색하고 보다 걸려든 것이 타바타이다.  몇 번을 보고 일터 사무실 앞 뒤에 순서를 걸어둔 것이 한 달이 넘은 듯하다. 어쩌냐. 너의 무관심은


고강도 인터벌 트레이닝이라는 것이 한 두동작 따라하면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느낀다. 그러다 다쳐 다친다구.


날개도 온전치 못하면서 어떻게 날겠다고 하는 것인지 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리하지마.라고 나의 한편은 속삭인다. 


러닝의 준비운동에도 요즘 대세는 동적 스트레칭이구나 한다. 국민체조 방송이 옆의 제일연마 점심시간 끝날 무렵 들려오고, 신세계체조까지 연식을 가능하는 나는 정적 스트레칭밖에 할 줄 모른다. 그나마 스무 해 전 러닝은 그렇게 끌어주는 러너가 멋져보였다.  


영상으로는 쉽지만 막상 따라하려면 멋적고 힘들다. 그래 맞다. 그래서 아직도 밍그적거리고 있는거야. 바보처럼.


그래서 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더 길게 걸어주고, 더 많이 각도를 주면서 몸을 까닥까닥해보면 빈 몸공간들의 흔적이 느껴진다.


팔을 벌리고 앞으로 손을 뻗어 8번씩 3세트 돌리고 흔들고, 손을 귀밑으로 올려서도 돌리고 흔들고....그래그래 짬짬이 빈틈을 채우는거야. 이렇게 저렇게 하다보며....타바타까지 가볼거야. 해보자.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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