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해하려는 의지는 노력이 아니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능력으로 이해하며, 정신으로 하여금 사물을 추구하게 하거나 기피하게 하는 욕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이 능력들은 개별적인 것에서 형성되어 그것과 구분되지 않는 보편 개념이라는 것을 증명했으므로, 이제 의지 작용 자체가 사물의 관념 사물의 관념 자체 이외의 어떤 것인지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38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의 어떤 타당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경우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수동으로 이해한다. 153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정신을 결정하는 것이나 충동과 신체의 결정은 본성상 동시적이며, 또는 오히려 하나로 동일한 것이고, 이 동일한 것이 사유의 속성 아래에서 고찰되고 사유의 속성에 의하여 설명될 때 우리는 이것을 결단이라 하고, 연장의 속성 아래에서 고찰되고 운동과 정지의 법칙에서 도출될 때 우리는 그것을 결정이라 한다. 160
정신은 신체의 변용의 관념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자신을 의식하므로, 따라서 정신은 자신의 노력을 의식한다. 이 노력이 정신에만 관계될 때에는 의지라고 일컬어지지만, 그것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될 때에는 충동(욕구)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므로 충동은 자신의 유지에 유용한 것에서 생겨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도록 하는 인간의 본질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충동(욕구)과 욕망의 차이는, 욕망은 자신의 충동(욕구)를 의식하는 한 주로 인간에게 관계된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욕망이란 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욕구)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상의 모든 것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164-165 (정리 9)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고, 증오는 마찬가지로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기 때문에 이들 기쁨과 슬픔은 사랑과 증오의 일종이다. 그러나 사랑과 증오는 외부 대상에 관련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 정서를 다른 이름으로 표시할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을 명예로, 그리고 이에 반대되는 슬픔을 치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타인에게서 칭찬받거나 비난받는다고 믿으므로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경우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을 나는 자기만족이라고 하고 이에 반대되는 슬픔을 후회라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이 자기는 타인의 기쁨으로 자극한다고 표상하는 기쁨이 단지 추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각자는 자기를 기쁨으로 자극한다고 표상하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대하며 표상하고자 하므로 명예를 좇는 사람이 오만하게 되고, 또한 모든 사람에게 혐오를 받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다고 표상하는 것과 같은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185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나 증오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용납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실은 명예욕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본성상 타인을 자기들의 의향에 따라서 살기를 욕구한다는 것을 안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똑같이 욕망하므로 모든 사람은 똑같이 서로 장애가 되며, 또한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받으려고 하거나 또는 사랑받으려고 하므로 모든 사람은 서로 증오하게 된다. 186-187
인간의 본성은 대부분 불행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며 행복한 사람을 질투하고, 또한 타인이 소유한다고 그들이 표상하는 것을 그들이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더 큰 증오로써 질투하도록 되어 있다. 다음으로 우리들은 인간의 동정심을 일으키게 하는 그러한 인간본성의 성질로 인간이 질투심을 갖게 되며 또한 거기에서 명예욕에 사로잡히는 일이 생기게 됨을 안다. 187
언젠가 향락한 것을 상기하는 사람은 최초에 그것을 향락한 것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 그것을 누리고자 한다. (정리 36) 191
각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더 나쁜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이 가장 좋고 무엇이 가장 나쁜지를 자신의 정서로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따라서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산의 축적을 가장 좋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의 결핍을 가장 나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명예를 바라는 자는 무엇보다고 명예를 바라며 반대로 치욕을 무엇보다고 두려워한다. 마지막으로 질투하는 자에게는 타인의 불행보다 더 유쾌한 것이 없으며 타인의 행복보다 더 불쾌한 것이 없다. 이렇게 각자는 자신의 정서로 어떤 것이 선인지 또는 악인지를, 유용한지 또는 유용하지 않은지를 판단한다. (정리 39) 194
(정리 51) 서로 다른 인간들이 동일한 대상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자극받을 수 있으며, 또한 동일한 인간이 동일한 대상에서 서로 다른 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극받을 수 있다.
<주석>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증오하며, 또 어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동일한 인간이 이전에 증오하던 것을 지금 사랑하며 이전에 두려워하던 것을 지금은 감히 행하는 것 등이다. 다음으로 각자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무엇이 더 선하고 무엇이 더 악한지를 자신의 정서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은 정서에서와 마찬가지로 판단에서도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205
우리가 이전에 다른 것과 동시에 본 대상이나 많은 것과 공통된 점만을 가진 것을 우리들이 표상하는 대상을 우리들은 어떤 특수한 점을 가진 것으로 표상하는 대상에 대해서 만큼 계속해서 고찰하지 못할 것이다.(정리 52) <주석> 정신의 이러한 변용이나 어떤 개체의 표상이 단지 정신 안에 있는 한에서 경탄이라고 한다. 만일 그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에 의하여 이야기된다면 공황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악으로서의 경탄은 인간이 그 악을 피하기 위한 다른 것을 사유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오로지 그 자신의 악을 고찰하는 포로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경탄하는 것이 어떤 인간의 총명, 근면 또는 이와 유사한 방식의 것이라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을 고찰하기 때문에 그 경탄은 존경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우리들이 인간의 분노와 질투 등을 경탄한다면 그것은 전율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만일 우리가 우리들이 사랑하는 인간의 총명과 근면 등을 경탄한다면 사랑은 바로 그것에 의하여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경탄이나 존경과 결합된 이 사랑을 우리들은 헌신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식으로 우리들은 증오와 희망과 안도 및 다른 정서를 경탄과 결합하여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들은 흔히 쓰는 어휘로 표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서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206-208
어느 누구도 자기와 동등하지 않은 자의 덕을 시기하지는 않는다.
질투는 증오 자체이거나 슬픔이다. 즉 인간의 활동 능력이나 노력을 저해하는 정서이다. 그러나 인간은 주어진 자신의 본성에서 생길 수 있는 건만을 행하고자 하며 욕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타인의 본성에 적절하고 자기의 본성에 낯선 활동 능력이나 또는, 동일한 것이지만 특별히 다른 본성에 속하는 그리고 자기 자신에겐 낯선 덕이 자신에게 부여되기를 욕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와 동등하지 않은 자 안에서 어떤 덕을 고찰하는 것으로 인하여 그의 욕망이 저해될 수 없다. 즉 그로 인하여 그 자신은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결국 그는 그 자를 질투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와 똑같은 본성을 가졌다고 전제되는 동등한 자에 대해서는 질투할 것이다. 212
어떤 개인의 각각의 정서는 마치 어떤 인간의 본질이 다른 인간의 본질과 다른 만큼 다른 사람의 정서와 다르다.(정리 57)
<주석>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비이상적인 것으로 알려진 동물의 감정(왜냐하면 우리들이 정신의 원천을 안 다음에는 짐승들이 느낀다는 것을 결코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은 마치 동물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과 다른 만큼 인간의 정서와 다르다. 물론 말과 인간은 생식에 대한 정욕에 의하여 이끌려 간다. 그러나 전자에는 말의 정욕이 그리고 후자에는 인간의 정욕이 있다. 마찬가지로 곤충과 물고기 그리고 새의 정욕과 충동은 각각 다른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리하여 비록 각 개체는 자신이 그 안에서 성립하는 본성에 만족하여 살며 본성을 즐긴다고 할지라도, 각자가 만족하고 있는 이 삶과 즐거움은 그 개체의 관념이나 영혼일 뿐이다. 215-216
(정리 59) 정신이 인식하는 한, 정신에 관계하는 정서에서 생기는 모든 활동을 나는 정신력으로 여기며 그것을 용기와 관용으로 구분한다. 나는 용기를 각자가 오로지 이성의 명령에서 자기의 유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관용을 각자가 오로지 이성의 명령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우애로 결합시키려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행위자의 이익만을 의도하는 활동을 용기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도 의도하는 활동을 관용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절제, 금주나 위험에 부딪쳤을 때 정신의 침착 등은 용기의 일종이다. 그러나 예의와 온화함 등은 관용의 일종이다.
볕뉘
1.
정신차려라. 정신만을 수습하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물벼락이 바로 코앞에 있을 듯하고, 소스라치는 놀람이 겹칠 듯하다. 넋이 나갔네, 나갔어. 란 말 역시 몸의 상태를 겹쳐보이게 한다. 프리윌. 자유의지. 영혼. 정신교육을 너무나 많이 받아와서 늘, 몸을 분리시키는 습관들. 습벽처럼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몸은 좋을 걸 찾아간다. 맞거나 좋은 것들을 쌓아올린다. 그래서 좋은 것이다.
2.
이분법. '이분二分'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왔는데, 정작 출발지점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 같다. 자연은 자기원인을 갖고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목적 따위는 없다. 연장과 사유로 나누려는 강박은 선악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둘이 나눠지기 전의 상태를 알지 못한다. 둘로 나눠 깊어질 수 있으나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인식에서 있어 패착을 가져온다. 끊임없는 유혹, 신이 인간을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물음이 남는다. 과학을 하든 철학을 하든 이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3.
선악을 같이보면 무슨 도움이 되는가? 내 몸과 지성, 앎의 필요와 삶의 갈구를 여실하게 느낄 수 있다. 죽음이 아니라 삶에만 천착할 수 있다. 죽음이 두려워지지 않는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4.
사람에 대해서 말하지만, 사람만 얘기하지 않는다. 말과 동물에서 대해서 언급하며 생명을 갖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통로, 출입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