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누스 푸디카

[ ] 녹 - 이파리로 가득한 숲속에서/나무는 얼굴이 어디일까 생각한다// 바람의 힘으로 사랑에서 떨어질 수 있다면//이파리들은/나무가 쥐고 있는 작은 칼/ 한 시절 사랑하다 지는 연인// 누군가 보자기가 되어/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일/ 떨어지기 위해 물방울이 시작하는 일// 두세해 전 얼었던 마음이/비로소 녹고//어디선가 ‘남쪽‘이라는 꽃이 필 것도 같은

[ ] 그의 시에서 인식의 주체는 이성이나 관념이 아니라, 기관과 감각이다. 귀가, 머리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 눈이, 볼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을 본다. 손이, 잡을 수 없거나 만질 수 없다고 여겨졌던 것을 커다란 획을 그으며 거머쥔다. 141

[ ] 박연준의 시는 이렇게 오로지 몸을 경우해서 당도할 모종의 상태, 가령 아물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 잔존하는 끔찍한 것들이나 현존하지만 돌보지 않은 슬픔, 자주 울컥하거나, 간혹 울컥하게 만드는 순간과 순간의 정념들, 다소 식어버리거나 잠시 고조되거나 조금 뻗어나가거나 이내 흩어져버리는, 그러니까 움직이는 감정과 그 감정이 길을 낸 몸과 몸이 길을 내며 남겨놓은 정신-몸의 흔적들을 기록해낸다. 141

[ ] 시인은 스며드는 존재와 다르지 않다.....그래서 형체가 없는 저 어두운 것, 아픈 것, 깊이 파인 것과 그러한 곳에 고여 있는 정념을 불러내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기 때문이다. 143

[ ] 박연준 시의 뛰어남은 시간이나 공간, 존재 등을 액체라는 유동성의 산물로 전환해내는 능력에서 자주 빚어진다. 145

[ ] ˝앓고 난 후 뒤늦게 대가리를 밀고 도착하는 감정˝은 그러니까 ‘실패하는 사랑‘이 아니라 ‘실패하는 실연‘을 말하는 데 바쳐진다. ˝버려도 돌아오는 나의 귀신들은/끝내 살아남은 것들˝(빈잔)은 사랑과의 관계에서는 차라리 역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152

[ ] 허기는, 에로티시즘의 에너지이자, ‘실연의 실패‘로 가득한 현실의 빈 잔, 현실의 구멍, 현실의 죽음이기도 할 것이다. 155

[ ] 외향적인 시선보다는 내면에서 차올라온 목소리가 한결 도드라지고, 하나의 중심으로 가지런히 수렴되는 이미지보다는 외부에서 걸어와 내면에서 폭발하면서 일시에 굳건한 자아와 통념을 붕괴시키며, 그 폐허의 자리에서 자신의 체럼과 감각을 독특한 시적 경험으로, 의미를 특수하게 조절하는 말의 찬란한 행렬과 낱말의 변주로 풀어낸다. 158

[ ] 몸이 쓴다. 기억이 쓴다. 감각이 쓴다. 몸-기억-감각이 고유한 시적 에끄리뛰르가 되어, 개인이라는 섬에서 탈출하여 또다른 타자의 섬에 발을 내딛고, 거기서 주관성의 주재자가 되어, 다시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0. 박연준 시집을 몇 권 사두고, 이 시집은 급히 취기를 담고 보았다. 말미 조재룡비평가의 글이라 주저하지 않고 보게 되었다.

1. 다시 만남이 예비되어 꼼꼼하게 보게 되지 않는 것이 실수일까? 그러면 어떻겠는가. 시와 비평이 잘 어우러져 좋다. 또 다른 시집을 꼼꼼이 볼 참이다.

2. 읽기가 서로 겹치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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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죽음 그리고 시간


[ ] 죽음이 확실함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무화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죽음과 나의 관계는 또한 타자의 죽음에 대한 앎에서 오는 감정적이거나 지적인 반향으로 만들어진다.....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예감되는 죽음과의 관계, 죽음이 우리의 삶에 자국을 남기는 방식, 우리가 살아 나가는 시간의 지속에 죽음이 가하는 충격, 시간 속으로의 죽음의 침입은 여전히 앎과 동화될 수 있는가? 21

[ ] 죽음은 죽음의 경험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의미, 타인의 죽음이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에게 관계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의미다. 22

[ ] 인간의 삶은 ‘가리는 것‘, ‘옷입는 것‘이며, 동시에 ‘벌거벗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일종의 ‘엮임‘이기 때문이다. 23

[ ] 자신을 표현하는 어떤 이는 나와 다른 자, 나와 구분되는 자다. 그는 내게 무관하지 - 않은 존재로, 나를 지탱하는 자로 자신을 표현한다....그 어떤 이는 곧바로 생물학적 과정 너머에 있는 자이며, 어떤 이로서 나와 엮여 있는 자이다. 24

[ ] 데카르트가 조종실 속에 있는 항해사의 이미지에 반대해서 실체화한 것, 라이프니츠가 모나드로 설정한 것, 플라톤이 이데아들을 관조하는 영혼으로 놓은 것, 스피노자가 사유의 양태로 생각한 것, 이 모든 것이 현상학적으로는 얼굴로 기술된다....그래서 여기서는 존재하느냐 또는 존재하지-않느냐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가, 그러한 질문에 앞선 문제가 제기된다. 24

[ ] 타자의 죽음으로서의 죽음은 자아로서의 나의 동일성에 영향을 미친다. 타자의 죽음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동일자와 단절하는 가운데서며, 나의 자아 속의 동일자와 단절하는 가운데서다. 26

[ ] 죽음을 어떤 무규정성의 물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까? 즉 주어진 것들에서 출발하는 문제로 설정된다고 할 수 없는 그런 무규정성의 물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까? 죽음이란 되돌아오지 않는 떠남, 주어진 자료 없는 질문, 순수한 물음표인 셈이다. 28

[ ] 죽음에 의한 정감은 정감성이고 수동성이며 척도를 벗어나는 정감, 현존하지-않는 자에 의해 현존하는 자가 가지는 정감이다...죽음과 맺는 관계는 모든 경험에 앞선 것으로, 존재나 무에 대한 비전이 아니다. 지향성은 인간적인 것의 비밀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는 코나투스가 아니라 탈이해관심이며 작별 인사다. 29

[ ] 죽음의 예-외 속에서 죽음과 맺는 관계는 순수하게 감정적인 관계다. 그것은 한 감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만, 그 감정은 어떤 앞선 앎이 우리의 감성과 지성에 반향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예-외 속에서 죽음과 맺는 관계는 미지의 것 속에서의 감정이고, 운동이고, 불안정이다. 31

[ ] 시간은 존재의 제한이 아니라 무한과 맺는 존재의 관계다 죽음은 무화가 아니라 질문이다. 무한과의 관계 즉 시간이 생산되는 데 필수적인 질문이다. 34

[ ] 언어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옮겨질 수 있는 사건성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옮김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아-자신의 얽힘 또는 뒤얽힘에 속하는 것이며, 나의 고유한 지속의 선을 절단하는 것, 또는 이러한 선에 매듭을 만드는 것이다. 마치 내가 지속하는 그 시간이 어떤 길이만큼 끌리는 것처럼. 34

[ ] 자아 - 또는 나의 독특성 안의 나 -는 그 개념을 빠져나가는 누군가이다. 자아는 책임 가운데 타인에 응답함으로써만 자신의 유일성 속에서 나타난다. 이때의 책임은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것이며, 나는 그 책임으로부터 결코 면제될 수 없다. 자아는 자신의 대체 불가능성으로 이뤄지는 자기-자신의 동일성이다. 즉 자아는 모든 빚 너머의 의무이며, 그래서 어떠한 떠맡음도 그 수동성을 부인할 수 없는 인내다. 36

볕뉘.

0. 설거지, 가을꽃을 담은 2리터 생수병으로 꽃화분을 만들고, 청소한 뒤 마실이다. 동네 천장이 아주 높고, 그 높이까지 책장이 있는 카페다. 조심스레 읽다.

1. 그는 너무도 쉽게 하이데거의 존재를 넘는다. 죽음이라는 것도. 생명에 갇힌 순수지속으로서 시간에도 균열을 내버린다. 나라는 것이 너와 다른 ‘고ㅓㅅ‘에 빚지고 있음을 말한다.

2. 가까운 지인의 죽음으로 그 말없는 자의 부름에 곤혹스러웠다. 명절 만난 지인은 그 의례를 밟지 못해 아직 그 그물에서 있는 듯 싶었다. 일사와 하는 일, 하고싶은 일이 겹쳤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여실히 겪고 있는 셈인 것이다.그래서 이리로 끌려온 것인지, 생명과 삶의 충만성에 돌다리를 건너다 이렇게 덥썩 물린 것이다. 다음 징검다리로 건너 뛰어야 할지, 아니면 밟아야할지 모르겠다. 물이 흘러 잠긴 징검다리...신발이 젖든....생략하고 뛰다보면 온몸이 젖을 수도 있는 그런 디딤돌이다.

3. 이렇게 간편하게 코나투스의 쓸모를 버리는 것을 보라. 그의 바둑판이란 19*19칸이 아니라 곁에 하나 더 있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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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시간이라는 캔버스: 잿빛 숲, 아늑하다/잿빛 숲, 은은하다/숲은 말하지 않는다: 6개월이라는 시간, 아니면 이백일이라는 시간. 그 시공간에 한 점, 한 점, 내 작품을 건다. 글일 수도, 관계일 수도, 그림일 수도, 시일수도, 요리일 수도, 이벤트일 수도...그 여백을 챙기고, 작품을 모시고, 피어난 꽃들이 그 시간들을 서로 맞물리면서, 음을 달리할 수 있다면 그럴 듯하다고 여겨본다. 오늘 한 작가의 작품전시회 전 프롤로그책(물론 혼자만든)을 보며 이런 마음꼬리가 슬며시 잡혔다. [개인전을 열다]

[2 ]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깐 뒤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는 구절을 읽었다. 시인의 말이었다. 문득 내가 불편한 글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절벽 끝에 있는 사람을 잠깐 뒤돌아보게하는 것도 글이라고, 가만 있지 않고 춤추게 하는 것도 글이자 시라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쓴다는 것은 그리 더딘 일이지만, 더디지 않는다는 걸. 손잡아주는 이가 어디쯤있다는 걸. 그렇게 써야한다는 것을. 가을햇살이 반틈 고개를 쭉 내밀었다. -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 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소행성‘ /눈에 뵈지 않는 것들은 멀리 있고 멀리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는 너무 멀리 있고 또 너무 가까이 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내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플랫폼‘

[3 ] (˝인간은 추구하는 존재여야 한다.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추구하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 - 하찮은 것에 간절해지지 말자는 말을 하찮은 것에 간절해지는 나를 향해 주문처럼 하곤 했다. )‘정작 자신은 그리워할 다른 삶이 없었던, 그래서 자기가 붙어 있는 곳에서 자기를 떼어낼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그래서 허전하고 화나고 숨막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도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고 버둥거렸을 어머니의 삶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은 가장 모르는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

[4 ] ‘페미니즘은 내가 아버지를 잊을 수 있다고, 아버지를 거부할 수 있다고 가르쳐줫다. 아버지를 외면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외면했다. 남자들이 없는 세상, 여성과 남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 여성들이 부정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의 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페미니즘이 만든 허구다... 남성은 여성의 삶에 존재한다는 진실, 여성들에게는 남성들이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진실, 여성들에게는 남성이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여성들은 자신의 힘을 온전히 주장할 수 있다. 17 감정의 박탈: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에게는 분노라는 감정만을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에 남성들은 사랑을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한다. 여성과 아이들은 남성들에게 사랑을 갈구하거나 남성들을 두려워하거나 증오할 뿐이다.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고,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남성의 내면 깊은 곳에 고통이 자리 잡고 있다.‘ 벨 훅스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남성들이 가면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사랑을 갈망하고 거짓에서 구조되기를 바라며 진실을 그리워하지만 이를 인지하지도, 드러내지도 못한 채 가부장제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316 페미니즘 남성성의 구성요소는 상대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자주적으로 행동하며 상대와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능력을 비롯해 온전함, 자기애, 감정인식, 자기주장, 관계의 기술이다. 318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볕뉘.

0. 네비를 업그레이드한다고 했는데 포맷이 되어버렸다. 아니면 사양을 확인하지 않아 엉뚱한 버전이 되어 맞지 않는게다. 공들인 시간이 아까운 것일까? 아까울 것일까? 유사한 일이 반복된다면 수월함을 익힌 것인지도 모르겠지? 그럴까?!

1. 대학에 입학한 뒤, 대부분의 가족과 그렇듯이 불화를 겪었다. 알량한 앎이 가족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부추겼다. 어쩌면 삶들이 더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그때 생각을 더 밀고나갔더라면 하는 가정을 해보면 더 극적으로 일상의 주변이 나아졌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차이가 별반 표가 나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더 그 간극이 더 좁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집은 시인에게 추천을 받았고, 다른 책은 손에 끌려골랐다. 맛보다나니 많이 겹쳤다.

2.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 스스로도 가까운 지인도 그러하다. 애써 돌아보려 돌아보고 서성인다는 것만 말곳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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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 자기만족으로서의 자아라는 개념은 부르주아 정신과 부르주아 철학의 본질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다. 프티 부르주아의 자기만족과 같이, 자아라는 개념은, 불안하면서도 진취적인 자본주의가 지닌 뻔뻔 스러운 꿈에 자양분을 공급해 준다. 이 개념은 인간을 자기 자신과 화해시키기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시간과 사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노력, 결정권과 발견에 대한 숭배를 주재한다. 부르주아는 내적인 분열과 자기 신념의 결여에 대한 수치심을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과 미래를 염려할 뿐이다. 왜냐하면 분열과 결여는 바로 부르주아가 소유한 현재의 확정된 균형 관계를 끊어 버리도록 위협하기 때문이다. 6

[ ] 존재에 대한 긍정이 지닌 잔인성은 절대적인 만족이며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7
[ ] 동일성은 사람들이 그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성격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 사실의 충만함의 표현이다. 8
[ ] 서양철학의 평화와 안전성에 대한 이상은 존재의 충만함을 전제했다. 인간의 조건이 지닌 불충분성은 심지어 ‘유한한 존재‘라는 의미를 직시한 것 외에, 단 한 번도 다른 어떤 존재의 한계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9
[ ] 탈출이라는 표현 자체만으로 현대적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한 목록 전체를 도출하기는 쉽지 않다. 그 목록은 삶의 여백 속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자각할 힘조차도 지니지 못한 세대 속에서 만들어진다. 10

[3 ] 생명의 약동이라는 창조의 철학은, 고전적인 존재의 엄격성에서는 탈출하는 반면 존재의 마력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창조의 철학은 실재 저편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활동만을 식별하기 때문이다. 13

[4 ] 근본적으로 생성은 존재의 반대가 아니다. 미래를 향하는 경향, ‘자기의 앞으로‘ 향하는 경향은 약동 속에 포함되어 있고, 하나의 과정에 운명을 바치는 존재를 표기한다. 약동은 창조적이지만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운명의 성취는 존재의 흔적이다. 모든 운명이 전부 존재의 흔적은 아니지만, 운명의 성취는 치명적이다. 우리는 갈림길에 있지만, 운명을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시작한다. 생명의 약동 속에서 우리는 낯선 것을 향하게 되지만, 우리는 어떤 부분에 불과하다. 반면에 우리는 탈출 속에서 벗어남에 관한 감화를 받게 된다. 이것은 혁신이나 창조와는 동화될 수 없는, 그 순수성 안에서 포착되어야만 하는 출구라는 범주다.이 독특한 주제는 존재로부터의 벗어남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14

[ ] 탈출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것을,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결박상태,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의 결박상태를 깨트릴 것을 요구한다.....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길 원하는 자아는 제한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한다. 15

[ ] 반대로 탈출은, 자기와의 평화라는 주장에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탈출은 자기에 대한 자아의 결박상태를 깨트리는 것을 동경하기 때문이다....탈출에 있어서 자아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거나 자아가 존재하거나 자아가 됨이라는 사실 자체에 기인해서 그 스스로 자기로부터 벗어난다. 16 이상 1장


2.

[ ] 우리가 탈출에 대한 분석이 완결될 때까지는 기원과 죽음의 문제가 적절하게 정립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이유다.....탈출은 우리에게 죽음으로의 도주나 시간 바깥의 출구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 2장

3.

[ ] 욕구는 오직 고통이 될 때 강압적인 것이 된다. 또한 욕구를 특징짓는 특정한 고통의 양상, 그것은 불안감이다. 불안감은 순수하게 수동적인 상태,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불펴하다는 사실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다. 이는 그저 그대로 있음에 대한 거부,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것의 특별한 성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 나가는 순간을 계획하는 목적, 하나의 적극적 특징으로 부각되어야 하는 목표점에 관한 무규정성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벗어나려는 시도이며, 또한 이러한 무지가 이러한 시도의 본질 자체를 규정짓는다. 23
[ ] 욕구에 관한 근본적인 편견들이 이를 통해 설명되건, 욕구 충족이 곧 불안감의 동요에 대한 응답이건 간에 모든 문제는 앎으로 나타난다. 24
[ ] 우리는 다양한 불안감의 현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다른 최상의 요구에 주목한다. 충족이 치워 버리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짐, 고도 우리 존재의 심연 속에 있는 죽음이라는 일종의 짐이 바로 그것이다......금식이라는 고행은 신에게 흡족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본 사건이라는 상황에 우리를 더욱 밀착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 근본 사건이란 바로 탈출에 대한 욕구다. 25 이상 3장

4.

[ ] 우리 존재의 실신으로, 졸도로 존재하는 자기의 진폭의 확장 속에 전적으로 존재한다. 이제 막 시작된 쾌락의 극단에서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정신을 잃고 추락하는, 우리 존재의, 보다 더 깊은 심연, 깊은 수렁과 같은 것이 열린다. 28
[ ] 우리는 쾌락 속에서 한 가지 폭, 자기 자신의 상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남, 황홀경을 확인한다. 탈출의 약속을 묘사해 주는 수많은 특성들은 쾌락의 본질 속에 포함된다. 29
[ ] 쾌락은 과정, 곧 존재를 벗어나는 과정이다. 쾌락의 정서적 본성 이러한 벗어남의 표현 내지는 기호일 뿐만 아니라 벗어남 그 자체다. 쾌락은 촉발성이다. 왜냐하면 바로 쾌락이 존재의 형태를 채택하지 않고 이 형태를 깨트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만적 탈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패한 탈출이기 때문이다. 30
[ ] 쾌락은 욕구의 요구들에 순응하지만 욕구의 요구들과 등치될 수는 없다. 또한, 반드시 승리했어야 하는 이 기만의 순간에, 그 실패의 의미가 수치심을 통해서 부각된다. 31 이상 4장

5.

[ 1] 수치심은 우리가 겪는 고통을 확인하면서 우리 자신을 그 위신이 땅에 떨어진 존재로 형상화하는 표상이다...수치심이 우리의 유한함에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자아라는 존재에 보다 밀착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수치심은 우리 자신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 강제성을 부과하는 우리 존재의 연대책임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수치심은 우리의 벌거벗음을 망각하는 데 이르지 못할 때마다 나타난다. 수치심은 우리가 숨기고 싶어 하지만 묻어 버릴 수는 업는 모든 것과 관계한다.....가난은 악이 아니다. 하지만 가난은 걸인의 누더기 옷과 같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32, 33 수치스런 벌거벗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타자로부터 감추고 싶어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수치심의 이러한 양상은 자주 무시된다. 우리는 수치심 속에서 그 사회적 양상을 본다. 34 우리의 수치스런 내밀함, 다시 말해 수치스러운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현전이다. 그것은 우리의 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존의 전체성을 드러낸다. 벌거벗음은 그 현존을 변호하고자 하는 욕구다. 결국 수치심은 스스로 변명을 모색하는 현존이다. 수치심이 발견하는 것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다. 36 이상 5장

6.

[ ] 구역질, 구토: 우리는 ‘속이 너무 울렁거린다‘ 39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존재 불가능성인 구역질 속에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고정하게 되며, 숨 막히는 협소한 순환 속에 가두게 된다. 우리는 그저 거기에 있으며, 있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다.......즉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 자체다. 40
[2 ] 구역질이 고독 속에서 경험될 때, 그것의 해로운 특징은, 자기 자신을 말살하는 것과 거리가 먼 그 구역질의 근원성 속에서 나타난다. ‘중병을 앓고‘ 있으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구토를 하는 외로운 병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걸림돌이 된다‘. 특정한 차원에서는, 심지어 타인의 현전을 소망한다. 왜냐하면 타인의 현전은 ‘질병‘의 구역질이라는 걸림돌을 질병의 수준으로 내려가게 해 주고, 사회적으로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정상 상태라는 사시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객관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위에서 논의된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자기의 수치라는 현상은 구역질과 같은 것이다. 42
[ ] 우리는 구역질이 존재의 현전을 그러한 현전으로 구성하는 그 모든 무능함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모든 벌거벗음 속에서의 순수 존재의 무능함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구역질은 ‘예외적인‘ 의식의 사실로도 나타난다. 43 이상 6장

7.

[ ] 욕구는 한정된 존재의 완전한 성취와 만족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지 모사며, 단지 해방과 탈출로 인도해 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를 가지지 않는 무한한 존재에 관한 가정은 형용모순이다. 이와 같은 존재의 현전, 존재의 순수한 현존이 드러나는 경험은, 존재의 무능함의 경험이며, 모든 욕구의 원천이다. 45
[ ]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불가피성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불가피성이란 이미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로의 진입은 의지와 대립하지 않는다. 46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가? 존재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무에서 유래하는 문제가 아니라 충족 혹은 불충족의 문제다. 이 문제는 존재 정립의 역설을 통해서 진술된다. 더 나아가 존재의 역설은 시간에 관하여 우리 스스로가 자유로워지고 우리 자신이 영원성을 부여할 때 완전하게 되는 것으로 남게 된다. 48,49 이상 7장

8.

[6 ] 존재론은 오직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것만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초보적이면서도 단순한 편견의 감옥에 갇혀 있게된다. 비모순의 원리보다 더 오만한 원리는, 무 자체인데, 사유가 무를 마주하게 되는 차원에서, 이것은 존재의 덮개를 두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에 대항해서 어떤 제한도 없이 비존재가 있음을 진술해야만 한다. 50

[7 ] 더 나아가 관조적 사유와 이론은 존재의 흔적을 운반하는 자의 행동 토대가 된다. 이론은 본질적으로 존재자에 굴복하고, 이론이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을 때조차도 존재를 기대한다. 이러한 기정사실 앞에 무력함이 있다. 인식은 정확히 모든 것이 완성되었을 때 실행되는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51

[8 ] 관념론의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고서 관념론의 적법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서 존재의 무거운 짐과 보편성을 측량하는 데서 나올 수 있다. 이 길은 존재의 성취 속에서 그 자체로 존재를 깨트리는 사건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유가 안고 있는 어리석음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러한 실천과 사유, 탈출의 근원성이 우리에게서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통감각과 격언이 가장 자명하다고 여기는 관념을 전복하는 위험한 시도를 무릅쓰는 가운데, 새로운 길을 통해서 존재를 벗어나는 일에 관한 문제다. 53,54

볕뉘.

0. [레비나스 철학의 맥락들]의 버틀러편(정치윤리학)을 읽고, 잠을 청하기 전 읽다. 도입부가 강력해서 내친 김에 보아삼켰다. 레비나스 사상은 전기,중기,후기로 나뉘는데 이 책은 전기 이전에 쓰인 것이다. 1981에야 이 글을 출판해도 좋다는 허락을 한 글이다.

1.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아는 제한된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다‘: 발버둥은 어디에 걸쳐있을까 싶다. 결국 못벗어난다고 하니 말이다. 죽음을 전제로 사유하는 존재론은 자아에 갇혀 버릴 수밖에 없다. 너란 없다. 탄생에서 출발하는 존재론. 아렌트로부터 베르그송의 생명의 도약에 대해서도 말미 토를 단다. 존재의 엄격성에서는 탈출하나, 새로움을 창조하는 활동만 식별하기에 존재의 마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못을 박는다.(1.3)

2. 그는 쾌락이 존재로부터 탈출한다고 말한다.하지만 벗어남 그 자체이기에 존재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고 역시 마무리한다. 그는 수치심을 꺼내든다. 그리고 구역질, 구토하는 존재를 살피하고 말한다. 존재의 영점, 영도는 여기에 있다고 말이다. 충만함이 아니라 짐과 무게를 느낄 때만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5.1, 6.2)

3. 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충족과 불충족의 선상에서 존재는 시작하는 것이라고 되묻는다. 존재론과 관념론, 관조적 사유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는다.(8.6 8.7 8.8)

0.1 다른 사유가 들어오면, 기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각말들이 덜컥덜컥 들뜬다. 밀리고 밀려 말을 바꾸어야 되는지도 모른다. 반음 뒤틀어지거나, 또 다른 말때문에 전부 말의 위치를 바꾸어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덜컥거린다. 지난 말들을 부여잡는다. 그래도 울렁거린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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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레비나스 / 타인의 얼굴

1.

[ ] 아듀 - 신에게 맡긴다 233 데리다는 ˝아듀˝가 한정된 우리의 삶과 생각을 그 테두리를 넘어서는 무한으로, 잉여의 의미로 데려가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235

[ ]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은 동일자와 대비되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타자는 곧 무한과 연결된다. 요컨대, 레비나스에게 무한은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테두리 너머를, 우리의 지배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타자는 우리의 지배 범위를 넘어서는 자이고, 그런 의미에서 무한한 자인 것이다. 236

[ 3 ] 레비나스는 죽음 자체나 죽음 저편을 주체적으로 탐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문제를 기각한다. 죽음 다음의 사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고, 따라서 관심을 가져봐야 소용이 없다......레비나스의 출발점은 삶의 향유이고 반응이다. 삶이란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그 삶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타자의 죽음이고 거기서 오는 의미이다.....응답-없음이란 타자의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습이다. 타자는 이런 무-응답의 상태를 피하기 위해 우리에게 호소한다. 우리는 그런 타자에게 응답해야 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238 죽음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노출되어 있는 타자에게 내가 응답해야 함을, 내가 응답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강하게 일깨우는 표현 239

[ ] 데리다가 초점으로 삼는 주제들을 보면 분명히 약자나 핍박받는 자들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룬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반권력적이고 반지배적인 해체적 보편성을 내세운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레비나스는 이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잇다. 지배 너머의 지평을, 정치 너머의 윤리를 앞세우니까요. 여기에 비해 데리다는 정치의 차원을 중요하게 다룬다. 레비나스 철학에서 정치는 윤리를 통해 극복해야 할 영역으로 취급된다. 또는 정의 문제와 관련해 부수적으로 다루어질 뿐이다. 242

[ 4 ] 제삼자의 출현은 양자관계가 아닌 삼자관계가, 따라서 비교와 계산의 관계가 성립함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치의 성립을 뜻한다....사실 삼자성이란 이렇게 대면관계가 보편적으로 확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244 이상 아듀 레비나스

2.

[ ] 5장 책임과 대속적 주체: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현재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에서 ˝내가 누구에게, 무엇에 책임이 있으며 어떤 상호 작용의 공동체 안에서 내가 내 자신인가?를 고려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처한 상황과 대상, 일, 공동체, 도덕적 주체가 중요하다. 165 나의 책임과 존재 모험: 세계에 대한 의존성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나의 독립성, 나의 자유를 확보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나는 오직 내 안에서 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169

[ ] 존재 유지 노력과 타인과의 관계: 히틀러와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만행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타인을 제거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존재 경향의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레비나스는 본다. 170 전쟁은 존재 속에 지속하고자 하는 경향의 연장이라고 보고 있다. 171 계약에 의한 평화는 타인에 대한 존경이나 도덕법칙에 대한 순종에 근거하기보다 상대방에 대한 공포에 근거하고 있다. ...개인간의 평화이든 정치적 질서에 의한 평화이든 평화를 이성적인 계산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보는 입장을 레비나스는 전형적인 서구적 평화의 핵심으로 생각한다....다양한 것, 많은 것들을 그보다 상위 단계에 있는 일 또는 일자에 환원할 때 평화가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 사상이 평화문제에 접근하는 기본 모형이었다. 173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사회 모형에 근거한 정치는 ‘윤리가 결여된 정치‘라고 단언한다....자아 중심적 사회 모형은 ‘사회 주변부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자리를 허락해주지 않는다. 개개인이 확보할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 타인에 대해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낸다면 힘없는 자, 가지지 못한 자, 신체적으로 능력을 잃은 자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175 영원한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인간과 세계, 나와 타인, 진리와 정의,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바르게 설정해야 한다. 176

[ 2 ] 타인의 얼굴: 나의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삶을 타인에 대해 책임지며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 가능성을 레비나스는 나의 존재 유지, 나의 내면성에서 찾지 않고 나의 바깥, 나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차원, 다시 말해 나와 타인 사이에 일어나는 ‘윤리적 사건‘을 통해 찾아낸다.176 타인은 한마디로 유일하며 독특하다. 177 ˝맥락 없는 의미화요˝ ˝전체성의 깨뜨림˝이다. 타인은 단적으로 나에게 ˝낯선 이˝이다. 177 사물을 벗겨냄으로, 지평 안에서, 어떤 맥락 안에서, 일정한 형식을 갖춘 가운데 드러난다. 하지만 그 자체로, 스스로 자신을 보여주는 의미, 어떤 무엇과의 지시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스스로 지시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의미, 자기 자신 외에 어떤 다른 것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미, 자기 자신 외에 어떤 다른 것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미, 자기 자신에 의존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의미, 나의 주도권과 나의 권력과는 완전히 독립해 있는 의미, 어떠한 형식에도, 어떠한 맥락에도, 어떠한 ˝의미부여˝에도 앞선 ‘지평‘없는 의미를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에서 찾는다. 178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 우리의 세계 안에서는 어떠한 지시체도 찾을 수 없는 ‘외재적 존재의 현시‘를 레비나스는 한마디로 ‘얼굴‘이라고 부른다. 179 언제나 ‘처음 온 사람‘이다. 179 얼굴의 시선과 마주칠 때 나는 회피할 수 없는 얼굴을 경험한다. 시선은 나를 ‘놀라게‘ 하며 나에게 ‘상처‘를 준다. 180 나는 이 ‘계시‘에 직면해서 그것을 수용하는 자로, 순종하는 자로 설 뿐 스스로 기획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나의 기대와 예측을 벗어난 가르침을 주는 스승과 주인으로 타인은 나에게 말 건네 옴을 통해 다가온다....그것은 ˝너는 살인하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이다. 181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이다. ..그 자체의 존재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비참이다.˝...비천함에 처한 타인이 나에게 간청으로 호소해올 대, 그 호소로 인해 나의 자유가 문제시될 때, 이때 비로소 윤리적 관계가 등장한다. 181 ˝윤리는 자유가 자기를 정당화하는 대신 스스로 자신이 자의적이며 폭력적임을 느낄 때 시작한다.˝...레비나스는 타인이 나를 정죄하고 사로잡음을 ˝끝까지‘ ‘따라와‘ 괴롭힌다는 뜻으로 ‘핍박‘이라고 부른다....응답을 요구하는 타인의 부름에 내가 ‘응답할 때,‘ 나를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세울 때 나는 비로소 ‘응답하는 자‘로서 ‘책임적 존재‘ 또는 윤리적 주체로 탄생한다. 182 ˝여기 내가 있습니다˝는 레비나스에 따르면 모든 객관적인 서술에 앞서, 내용과 정보를 지닌 어떤 소통이라도 그 이전에 전제하는 ‘첫 언어‘이다. 183 저는 뒤에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언어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184

[ ] ‘타인에 의한, 타인에 대한 책임‘과 대속의 의미: 윤리적 불면...‘타인에 의한, 타인에 대한 책임‘이라 이름 짓는다.....타인은 나에게 문자 그대로 ˝혼을 불어넣어주며˝ 나에게 ˝영을 집어넣어˝준다. 타인은 나의 호흡이며, 나의 혼이며 나의 영이다...타자가 내 안에 ‘혼을 불어넣음‘은 타자가 내 몸으로 육화되어 타인의 고통을 위해 나를 내어줄 수 있도록 노출시킨다. 185 대속은 타자에 의해 책임적 존재로 지정받은 내가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지는 모습이다...대속은 문자 그대로 ‘자리 바꿔 세움 받음‘이다. 186

[ ] 대속적 책임의 실현과 비움의 주체: 응답, 환대 또는 책임은 ‘줌‘이고 ‘자신을 희생함‘이다. ˝주는 것, 즉 타자를 위한 존재란 자신의 입에서 빵을 꺼내어 자기는 굶주리면서 타인의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다.˝ 189 나의 집과 나의 소유, 나의 지식을 타인을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이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호소하는 윤리적 요구이다. 궁핍 가운데 있는 이웃을 그저 공감이나 연민으로, 나의 소유를 내어놓지 않고 빈손으로 대하는 것은 공허하다. 191

[ ] 제삼자와 책임: 정의와 국가 제도 : 정치의 드라마....지속적 혁명..틀의 파괴가 필요하다. ..체제와 영역 바깥에서 체제의 경직성을 경고하고 인간 개개인의 인격의 독특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정치와 윤리의 결합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195 개인의 양심만이 이성 자체의 올바른 기능에서 유래한 폭력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자아만이 위계질서와 행정 체제의 순작동으로 생긴 타인의 ‘숨은 눈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공무원) 196

[1 ] 응답으로서의 윤리학: ˝윤리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물음은 윤리는 언제나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윤리에서 ‘존재‘를 강조한다고 해도 행위와 무관한 존재는 윤리에 관한 철학적 논의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런데 행위는 언제나 행위를 실행하는 행위자의 행위이다. 197 응답자로서의 인간 198 니버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현재는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곧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나에게 반응을 요구하고 사회적 연대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설 것인가하는 것이 니버 윤리학의 관심임을 말해준다. 199 이상 레비나스의 철학 타인의 얼굴 5장에서

볕뉘

0.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그의 저작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숙하는 이의 글이나 해설들을 살펴본다. 가벼운 뉘앙스의 차이가 해석의 차이로 이어진다. 그 사실을 유념하고 있다. 베르그손의 시간, 직관의 의미가 받아들여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처럼, 개념을 한 몫에 깨닫게 해주는 언어가 없다. 아니 우리의 상식들이 그 단어의 다른 의미에 갇혀있어 벗어나기가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조심스럽다. 그래서 더 서성인다. 책들 사이 편린들을 들추어보고 있다. 여기저기.

1. 다음에 읽어줄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책앓는 이가 되어버린 자의 슬픔을 책친구와 나누어본다. 굳이 슬픔이라고 하지말고 기쁨은 없는가하고 말머리를 돌려보자고 했다.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죽을 때쯤 겪는 왜 사는가의 질문지를 일찍 받아 괴롭기도 하다. 그 답답증의 출구를 모색해보기로 했다.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요즘 그런 질문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극히 희소하다. 거의 없다. 그러니 안으로의 나를 채우는 것에도 무심하며, 밖으로 향해 있는 나의 상황과 넓은 정황에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손에 잡히는 것밖에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래 미처 해주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책 앓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여러 농도가 차곡차곡 진해져 가는 것이라고, 어떠한 용도로 쓰일지는 모르지만, 목적이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 만남처럼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해두자고 ...일단은...

2. 밑줄이 많이 처 둔 부분은 그 만큼 낯이 설다는 것 같다. 옮겨 적으며 어제 육근종암에 걸려 다리를 절단한 청년의 삶을 끝까지 본 어제 상황이 생각났다. 아파 너무 아파 아픔을 끝내고 싶은 것, 아픔과 싸울 여력이 없어져 스러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 맛을 본 청년의 고통이 어른거렸다. 거기에서 시작하는 그의 삶. 얼마나 많은 슬픔이 다가설까..그래서 그 질긴 아픔과 비교해낼 것이겠지. 그저 마음씀이라는 것밖에 할 수 없음.

3. 얼마나 깊이 얼마나 다르게 얼마나 멀리 레비나스를 읽을지 모르겠다. 서성이다가 그를 읽는 것이겠지. 읽다가 슬프다가 힘을내다가 하는 것이겠지. 괴로움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이겠지...두 손에 쥔 것을 놓겠지...그리고 아마 다른 것을 잡게 되겠지.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앓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위안 받을 친구가 있으면 됐지. 그냥 가보는 것이라고....위험한 독서란 이런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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