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업과 신모나돌로지 (소통, 소비, 광고, 가능성의 생산,창조, 자본주의): 저 광고 메시지를 텔레비전 시청자에게 수용시키려면 그들 뇌를 활동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방송은 사람들의 뇌를 활동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다 107 기업은 모나드 (소비자와 노동자)와 세계(기업) 사이의 상응과 조합, 교착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109 통제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실효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그 조건에 다라서 가치창출을 행한다...자본주의란 생산양식이 아니라 (양식으로서의) 세계의 생산이라고, 결국 자본주의란 일종의 마니에리즘manierisme이다. 110 소비라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우선 어떤 세계에의 소속과 가맹을 의미한다....그것은 어떤 종류의 장식이고 자세이며, 식사법, 소통 방식, 사는 방식, 이동 방식, 태도 방식, 화술 등을 장려하고 요청하는 것이다. 111 오늘날 표현기계에 대한 투자액은 ‘고용‘과 ‘생활수단‘에의 투자액을 크게 상회한다. 113 비신체적 변형이 생산하고 있는 것은 (혹은 생산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각의 변화이고 가치관의 변화이다. ...광고의 표현은 세계와 우리의 실존을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중합시킨다. 다만 그 ‘가능성‘은 광고에 의해 어느 정도 유혹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는 명령인 것이다..광고는 우리 마음 안에 마치 음악의 변주 주제와 후렴처럼 반향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새 광고 음악을 흥얼거리는 것에 놀라는 것이다. 114, 115 사람들 사이에는 극단적인 두 개의 주체성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 주체성 내부에 정신과 신체의 변조가 명확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변조는 이미 우리가 말했던 논리, 즉 ‘사치스러운 주체성‘과 ‘쓰레기 같은 주체성‘이라는 두 개의 문법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다....인류의 4분의 3이 비신체적 변형에 용이하게 액세스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체적 변형에서 배제되고 있다.
[ ]현대 자본주의는 공장에 의해 넓혀지는 것이 아니다. 공장은 현대 자본주의에 종속만 되어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우선 언어와 기호, 이미지에 의해 확장된다. 그리고 오늘날 표현기게가 선도하는 것은 이제 공장이 아니라 전쟁이다. 117 현대 자본주의는 수목 모양의 여러 분기점을 수반하고 있다. 상상도 불가능한 다양한 세계가, 현실 세계와 함께 세계 안에서 주름을 펴나가듯이 전개되고 있다....존재하는 것은 차이화하는 것이다. 117 자본주의는 (단수형의) 주체도 객체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이 생산하는 것은 변조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관리되고 끊임없는 변조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복수형의) 주체와 객체이다....자본주의가 다양한 주체와 객체의 끊임없는 변용 (뇌의 변조, 즉 기억과 주의력의 포획)을 통해 그 모두를 실행하고 있다....텔레비전이 사람들을 변형시키는 것은 규율훈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델의 부여에 의해서이고,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방에 의해서라고 말이다. 텔레비전이 부여하고 있는 것은 몸짓의 몸짓이고, 가능한 행위에 관한 행위이다. 118, 119 기업에 의해 표준화된 ‘세계‘를 표현할 ‘가능성‘(상품 혹은 서비스)은 미리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세계와 노동자, 소비자는 사건에 앞서서 존재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그들은 사건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다. 120
[ ]규율훈련이 우선인 곳에서는 사건은 부정적인 것으로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예측과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노동의 표준화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기업 활동이 고객과 직접 결부되면, 그 활동은 이제 예측과 계량에 완전히 따르게 될 수 없게 된다. 121 통제란 불확실성과 변화에 관해 이해하는 것이고, 따라서 불안정성에 직면한 활동인 것이며, 모든 것을 ‘소통적‘인 몸짓으로 행하는 것이다....현재 우리는 조작operation의 시대를 지나 작용의 시대로, 집단노동의 시대를 지나 네트워크 활동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122 모든 생산은 서비스 생산이 되었다. 결국 생산은 ˝고객과 이용자와 공중이 장래 어떠한 활동의 성질과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인가를 정하는 조건˝의 생산으로 변형되었다. 그 궁극 목적은 ‘삶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123 기업은 소비자를 위한 세계만이 아니라 노동자를 위한 세계도 창조해야 한다. 현대 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속한다는 것, 즉 그 욕망과 믿음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124 샐러리맨은 자유로이 고무줄을 늘일 수 있다. 이제 그는 갇혀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좋을 대로, 자신의 기량에 따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 돌아다니며 일하고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무줄이 그를 끌어당긴다. 그를 정기적으로 되돌리는 힘이 발동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야 한다....일정표와 마감의 압력이 예전의 타임 테이블에 의한 단순 노동 관리를 대신한다...샐러리맨은 그 통제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 결국 그 통제는 밤낮으로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 127 우리가 여론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단 한 종류의 여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항상 적어도 두 종류 이상의 여론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거기에는 항상 복수의 힘이, 복수의 모나드가 존재하고 있다. 131 시장은 공중과 고객을 포섭하는 장, 또는 구성하는 장이라고 생각해도 지장이 없다. 132
[ ] 모든 활동은 그 일부에 발명을 포함하며 또한 재생산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활동이라는 개념이다. 어떠한 활동도 이제 도구적 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건의 논리에 따르게 되었다. 139 프리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내는 협동의 힘은 그 ‘협력자들‘의 활동에 수반한 인지적 성질보다도 발명의 시공간을 여는 능력에 더 관련된다. 141 기업은 무엇보다 사회로부터 착취를 행한다. 그것을 위해 사회를 위계화하고 공중과 고객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만들어 내고 창조와 실현을 행하는 가능성의 힘을 사회로부터 탈취하려고 한다. 142 다양한 주체성의 협동에 관하여 우리가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비물질적‘인 성질이 아니라 그 활동의 윤리적 정치적 형식이고 그 조직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가 여기서 지적하는 사실은, 포스트사회주의 운동에서 단순히 아니야라고 답해서 끝나는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그 사실들은 우리가 (제도와 경제, 소통에 관계하는) 발명의 공간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공간은 인지적이며 비물질적인 노동에 의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145 상황의 특수성에서 출발할 때, 실험은 다양한 권력관계로부터 이루어진 전체를 횡단하여 질문하고 그 외부로 열리는 행위가 된다...(제약산업)..노동운동의 논리가 이미 실효성을 잃은 것은, 그 운동이 고전적인 조합정치와 그 코드화된 관계들로부터 탈주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 ......맑스의 관점이라면 부의 새로운 기반으로서 ‘노동 그 자체‘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발전과 테크놀로지의 진보, ‘사회적인 협동과 유통‘의 발전, 요컨데 ‘사회적인 개인의 발전‘을 생각해야만 한다. 요컨대 ˝교환가치에 기반한 생산은 붕괴했다˝는 것이다. 148
[ ]서로 협동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여러 사물과 사건에 관해 함께 느끼고 서로 ‘영향 받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정, 친애의 정, 슬픔은 전부 공감 관계의 표현이다. 뇌의 협동의 구성과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관계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 대립의 논리의 경우와는 반대로 이질적인 힘을 결합하고 공통으로 생산하고 공통으로 적합하게 만드는 능력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다양한 힘이 공통으로 새로운 관계의 변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내재성의 새로운 평면을 형성하여 ‘서로 이용 가능하기 위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길‘을 발견하는 것에 의해서다. 150, 151 반복에 의한 발명은, 경제학자와 맑스주의자들이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기쁨은 슬픔과 구별되어야 한다..그것은 규격화되는 반복의 비참으로부터 탈주하고, 발명의 기쁨을 증대시켜 노동의 필요성을 줄이며, 협동의 자유를 증대시키기 위해 새로운 길을 탐색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와 같은 발명과 반복의 존재론, 또는 기쁨과 슬픔의 존재론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뇌의 협동은 스미스적인 또는 맑스적인 공장에서의 협동과는 달리, 공통재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공통재란 인식과 언어, 과학, 예술, 서비스, 정보 등을 말한다..예술작품은 그 반은 예술가의 활동의 결과이지만 다른 반은 공중(감상자, 독자, 청중)의 활동의 결과이다. 153
[ ]공통재는 다양한 주체성의 협동에 의한 공통적 창조와 공통적 실현의 결과이다. 그것은 ˝무상임과 동시에 끝없이 분할 불가능한 것˝이다...(희소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로 확산되고 공유되면서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153, 154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에 관해 생각할 때, 그들은 신앙을 소비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유명한 예술작품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술작품을 소비하고 있는 것인가? 모든 공통재의 소비는 그대로 새로운 지식과 예술작품의 창조와 연결된다. 이러한 소비는 파괴적인 행위가 아니라 별도의 새로운 지식과 예술작품을 산출하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155 프리 소프트웨어에서 무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 보다도 원코드의 입수, 수정, 배포와 소프트웨어의 개작의 자유를 가져오는 여러 가능성이 중요하다... 프리 소프트웨어의 창조와 배치, 협동은 고객이라는 틀을 파괴하고 활발한 조직생성을 위한 조건의 창조를 커뮤니티에 가져온다.(이것은 뇌의 협동에 의한 논리다) 그와 같은 방식은 의존적이며 수동적인 고객을 구축하려는 기업의 전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별개의 전략을 만들어 낸다...부가 무료라는 것은 그 부에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의 측정과 분배의 원칙이 경제학적인 것일 수 없다는 (결국 희소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58 공통재(문화, 교육, 연구)의 창조와 실현의 본질과 그 창조와 실현에 참여하고 있는 공중(학생, 관객, 환자, 소비자 등)의 협동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문제 삼았다. 결국 그 투쟁들은 (공통적인) 부의 창조와 분배, 그 융자, 새로운 협동에 여러 주체성이 참여하는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그것에 필요한 제도적 테크놀로지적 장치를 문제시했던 것이다 162 활동은 발명과 재생산, 창조자와 이용자,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 지적 소유권이라는 제도가 만들어 낸 벽을 파괴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서 뇌의 협동을 확대하고, 거기에 참가한 다양한 주체를 새로운 민주주의 개념 안으로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새로운 민주주의는 고객과 이용자, 실업자라는 기존의 틀을 비국가적인 새로운 공공영역에서의 정치적 활동자라는 틀로 변형해야 할 것이다. 164
[ ]기억은 이제 습관도 아니고 무의식의 자동운동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 기억이며, 이질적인 것을 모으고 발명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로부터 타르드는 ˝노동과 발명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67 기억으로부터 생겨난 행위가 노동과 구별되는 이유는, 전자가 감각에 관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간에 관계된 힘으로서의 차이의 활동(발명)과 반복, 재생산활동(모방)을 혼합하면서 배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기억에 의한 행위는 새로운 것(이미지, 감각, 관념)을 창조할 능력과 함께 그것을 무한하게 반복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그것은 ˝이미지와 감각, 관념의 한없는 연쇄이다˝) 168 자본주의는 일종의 반-생산의 힘이며, 뇌의 협동과 그것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들 - 생물학적 조건도 포함한다-을 파괴하는 힘이 명확해진다. 무엇보다도 우선, 개인적 집단적 특이성을 만들어 내는 재생산의 역능을 파괴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에 의한 차이와 반복이 구성 과정을 계속 측정하기 때문이다...그 상태들은 집단화한 뇌의 협동을 파괴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 수단은 주체성의 조건인 차이와 반복의 사회적 과정을 공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172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욕망과 믿음의 방식을 자본가의 가치관이 명하는 주체화 형식에 따르도록 하여 사람들의 주체성을 빈약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74
볕뉘.
0. 한 밤의 내장을 뒤흔드는 지진의 여파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행여 면이나 리단위의 지진여파가 궁금하여 검색하다가 다행이다 싶었는데, 여진이 잘개부서져 오지 않고 뜸하다고 했더니, 굵은 여진이 퉁퉁 내장을 두드리고 간다. 구술 녹취를 푸느라 바빴고, 미진한 몸을 가누느라 힘든 여정을 보내다나니 무척 뜸했다 싶다. 읽어놓고 늦게 남기게 된다. 1, 2장은 다음에...이 책의 3장이다.
1. 자본-노동의 관계에 국한시키지 않으면서, 자본주의와 기업의 역동성에 주목한다. 그러면서도 그 한계를 잘 설명해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한계를 짚으면서 창조의 사회적 개인의 발랄함을 얘기하는 것이 압축되면서도 고루하지 않다. 다른 노트와 함께 보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