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책방*‘

[ ] 모임을 한다기보다 참여자가 오든 말든 우선 내가 하고싶은지가 중요했다. 그래야 참여자의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갈 동기를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었고, 헌신한다는 생각보다는 놀이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포항에서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은 있었지만 그것은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 는 식으로 ‘해내고‘ 싶지는 않았다. 직장인에서 자영업자로 서점 사장이 되는 것이 내게 큰 모험이었던 만큼 그것이 무엇이든 시작과 끝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고 싶었다. 146

[ ] 모임 역시 친해진 손님과 나의 공통 관심사를 반영해 새로운 모임을 만들어나갔다....저자 강연 같은 행사는 책방 모임의 흐름 속에 두려 했다. 유명한지 아닌지보다 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했던 이야기 중 좀 더 다루어졌으면 하는 주제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저자를 초청했다. 자연스럽게 모임참여자들이 강연도 신청했기 때문에 행사의 밀도를 높이고 행사참여자를 안정적으로 모집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47

[ ] 직장인에서 자영업자로 바뀐 나의 직업적 속성을 매일 새롭게 체험했다. 직장인이었을 때도 하고 싶은 일을 따라 직장을 선택했지만, 그런데도 자본주의적이거나 위계적인 시스템에 포위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선택한 첫 직장은 너무나 상업적이고 열정을 가진 이십 대를 싼값에 착취하는 곳이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들어간 비영리단체에서는 내가 문화기획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위해 감당해야하는 부수적인 업무가 너무 많았다. 출판, 기획, 공간운영 전반을 경험할 수 있었던 서점에서는 열정적으로 일했지만 지나치게 소진되었고 결국 지쳐버렸다. 마지막 직장에서는 지역 스토리텔링과 구술생애가는 흥미로운 분야를 경험했지만 일은 좋아도 그 일을 구성하는 조직의 논리가 갑갑하게 느껴지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149

[ ] 매년 한 해의 수입지출을 계산하고 받아든 성적표는 초라했다. 그것이 내 노동의 사회경제적 가치라는 것이 몹시 서글펐다. 나는 더이상 노력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하는 중인데 그에 대한 대가가 이것이구나. 차라리 적당히 했으면 ‘그래 최선을 다하면 더 나아지겠지‘하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을텐데 나는 매일 결승전을 치르는 기분으로 사는데 내가 속한 팀은 매번 지는 기분이었다. 정작 결혼을 욕망하지도 않으면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붙인 ‘꺾인 여자‘라는 낙인은 나를 위축시켰고 일마저 잃는다면 나는 그 무엇에게도 선택되지 못한 존재가 될 것 같아 두려웠다. 160

[ ] 아이들의 글을 읽고 강사 섭외할 때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바쁘신데 지방 저희 서점까지 오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같은 수사들이 부끄러워졌다. 지금 여기를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서울 중심의 한국에서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고 나는 서울에서 떨어진 만큼 스스로를 더 약자로 만든 것은 아니었는지. 하지만 그 거리감이란 사실 얼마나 상대적인 일인가. 울진에서 온 아이들에게 포항은 대도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공이란 얼마나 상대적인 일인다. 나는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성공한 사람이라니. 마치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지 못한 부자처럼 어리석게 느껴졌다....나는 내가 버는 수입의 크기가 내 야망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했다. 지난 오 년 동안 내가 이뤄낸 것들, 첫 해보다 커지고 능숙해진 일의 능력치를 스스로 격려할 필요가 있었다. 경계로 밀려났다고 느꼈지만 새로운 중심을 세우기도 했다는 것을. 175, 176

[ ] 직장인이었을 때는 몰랐던 삶의 모퉁이를 돌아왔고 거기서 접하는 사람과 세상의 모습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면적이라는 것을. 오늘 나의 공간에서 무례했던 누군가도 다른 곳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우리 삶에 위계가 생기는 곳, 그것이 젠트리피케이션의 모습이거나, 결혼의 유무이거나, 독립의 유무이거나, 나이의 많고 적음이거나, 돈의 많고 적음이거나, 여자이거나 남자이거나, 그런 모서리에서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과 사람도 이상하게 구부러지기도 한다는 것을. 또한 그 속에서 내가 고통을 느꼈다면 나의 아픔은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자기 분의 생의 어려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데 나의 아픔이 특별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나는 왜 이렇게 투정하는 기분일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느끼는 고통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고통으로부터 주변이 될 수 없다. 고통은 내 존재의 경계를 만들어준다. 177 무언가 나를 침범한다면 나는 고통 받을 것이고 그것은 내가 나를 돌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고통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고 많은 확률 중 단 하나의 확률인 나의 맥락에서 일어난 내 삶의 서사이다. 179

[ ] 내가 나에게 발신하는 아직 알아채지 못한 이야기의 시작이며, 그것을 수신할 수 있다면 나의 고통은 언어가 되고, 이야기가 된 고통은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경계와 경계가 만나는 곳에 사는 사람은 중심에 산다. 내가 어떤 경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나를 둘러싼 경계들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함께 작동하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179

뱀발.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는 힘. 어쩌면 멋, 맛나는 일상을 만들어내는 비법같은 것이 숨어 있는 듯하다. 가까이 지켜본 나로서는 응원하고 소문내지 않을 수가 없다. 구입은 책방에 직접 연락하셔서 택배로 받아보시거나 여섯서점을 온라인으로 찾아들어가서 주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면 더 알차게 보고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책이 모인 모서리 여섯 책방 이야기>> 달팽이책방 편에서/ 소심한책방, 손목서가, 유어마인드, 고스트북스, 동아서점, #달팽이 책방 - 달팽이Books&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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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 ] 서로 다르다는 게 중요합니다. 여러 관점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세계랄까요. 저는 그런 세계관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책을 읽는 이유도 그렇고, 그런 독서를 바탕으로 책을 쓰는 이유 역시 그렇습니다. 지적 세계의 핵심은 다양함입니다. 이런 다양하이라는 지적 세계의 본질적인 측면은, 우리의 삶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또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고요. 자유로운 개인이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충실하고, 자기다운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컫는 게 아닐까 싶어요. 각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저마다 다른 게 자연스럽지요. 81

[ ] 일본, 미국, 유럽으로 유학을 갔을 때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과 대화와 소통을 통해, 아 이들도 나처럼 참 다양한 지적 관심사를 갖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자신이 좋아하는 책들, 오랫동안 모은 책들로 차곡차곡한 서재를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한 사회가 축적한 문화의 상징, 지성의 상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린 그런 문화가 없어요. 앞으로는 그런 서재 문화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저는 그런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87, 88

[ ] 우리나라의 법률 교육이라고 하는 게 철두철미 폐쇄적이고 도그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 법률가가 되어도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하기란 대단히 힘든 법입니다. 법률가의 두뇌 구조는 보통 굉장히 경직되어 있는데, 무엇 하나를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는 점에 있어선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민주사회에서 수많은 환경과 경우에 처해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유연하게 바라보고, 인정하고, 품어낸다는 차원에선 여러모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게 사실이죠. 92 막상 로스쿨 안을 들여다보면 정말로 서울 신림동 고시학원식으로 운영된 게 사실이고, 그건 지금 로스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제도에 대해선 저도 할 말이 많고 여러 복잡한 논의의 지점들이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로스쿨은 교양 있는 법률가를 양성하는 곳이 전혀 아닙니다. 옛날 신림동 고시학원을 좀 더 고급화시킨 것과 다름없다고 봐요. 입학하는 구성원들이 굉장히 계층화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94

[ ] 자기가 속한 조직의 권력, 학문이 권위 같은 것을 향해서 철두철미 비판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텐데 ...아무튼 바깥세상에 대곤 정의와 진보를 얘기하면서 자기가 속한 학문, 대학, 가정, 학연, 지연, 혈연을 너무 존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던 것 같아요. 125 우리나라는 단행본도 무시되고, 번역도 무시되고, 오로지 논문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책도 안 쓰고 번역도 물론 하지 않고, 학계 바깥의 대중과 유리된 채 상아탑 안에 머무는 것만을 고집했던 고약한 유학파 교수들이 우리나라 학계를 지배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132 최소한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과도한 교육열을 비판한다면, 나 역시 내 자식이 교육에 대해서 한 번쯤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걸 안 하면서, 자기 자식에게는 과도한 교육열을 쏟아냈으면서 사회 일반의 교육열을 비판하다니...그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엔 너무나도 만연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165

[ ] 혼자서 사고하고 혼자서 행동하고,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힘을 갖는 게 고독입니다. 그런데 사회와 국가는 그런 개인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기본적으로 흡수하고 동화하려는 경향을 띠게 마련이죠. 그래서 저는 고독을 기본적으로 저항이라고 생각해요. 저항을 위해서 고독하는 것이지, 저항의 의미없이 그냥 고립된 삶을 산다는 것은 다소 무의미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195 <가버나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환 <로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 이 세 영화가 공통적인 것은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아닌 사람들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201 나와 가치관이 같거나, 나와 생각이 같아서 맺는 관계는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세 영화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혈연도 아니고, 어쩌다가 맺어지는 관계, 그런 관계를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삶. 모두 자신과 전혀 관계없던 사람들의 관계맺기에 관한 이야기인데, 참으로 중요한 메시지였다고 저는 생각해요. 202

[ ] 저는 패거리 문화를 끔찍하게 생각하는데, 지금 유행하는 이 기술 문명이 또 다른 패거리를 만드는 건 알까, 우려되는 지점이 있지요. 지연과 학연, 혈연이 물러간 자리에 ‘sns연‘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는 건 아닐까? 205 체면문화, 체면 차림에서 과시욕이 생겨난다고 봐요. 제가 보기엔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시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지나친 자기 존대랄까요. 자기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내세우는 그런 문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건 우리가 너무 업신여김을 당하고 자기 존재의 가치를 무시당하는 사회에 살았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나를 안 높이면 안 된다는 의식이 있는지도 모르지만....어떻게든 출세하겠다. 윗사람이 되겠다. 남을 딛고 일어서겠다....학교에서부터 사회조직에 이르기까지 그런 식의 폐쇄적인 경쟁 체제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 ] 결국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더욱더 철저하게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돼요. 사람은 백이면, 성격도 다르고 느낌이 다르니까요. 또 지성도 다르고 감성도 다르니까요. 그게 중요하죠. 그게 없으면 내가 존재할 가치가 없는 거라고 봐요. 우린 다 무리과 집단 속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느낌과 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닌가요? 왜 그 사실을 그토록 경시하는지, 남들과 똑같아지려고 애를 쓰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227 제가 저보다 뒤에 따라오는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해라.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바로 이 말입니다. 주위 사람들에 휩쓸려서 무작정 시험 준비에 뛰어들지 말아달라고요. 무언가를 죽지 못해 하는 것처럼은 하지 말라고요.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다고요. 238 지금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선택을 탓하려는 게 아니라, 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이겨야만 한다고 믿고, 이겨야만 어떤 ‘안정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믿고, 그렇게 자신을 압박하는 삶만이 인간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회적 신념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뀌어나가는 것이 맞겠죠. 274 그저 평범하게 보통사람으로, 자기 삶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이 많을수록 건강한 사회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뿐이죠. 276

[ ] 사회 현실에 전혀 무감각하게 고시 공부만 오랫동안 한 사람들이 판검사가 된 후 정계에 떠돌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지방 곳곳에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썼던 사람들의 열정이 제대로 반영되고, 그들도 기본적으로 어떤 소시민으로서의 자기 생존을 더 따뜻학 보장받을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그런 사람들에게 이 사회가 참 냉정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289

[ ] 진정 좋은 정치는 결국 자신이 문제를 자기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그런 개인들이 만들어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요. 즉, 모든 문제를 자기 문제로 여겨 자기 문제화가 될 수 있어야지 그것이 더욱 근본적인 정치 문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자기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권력과 정치 문제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자성의 계기와 자기의 문제로 소화하지 못하는 지점도 매우 많다고 생각합니다. 308 우리가 적폐, 적페 하는데, 우리의 생활상의 적폐가 어쩌면 더 심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저는 미세먼지 같은 경우에도 시민 각자의 문제일 수가 있다고 봐요...노후화된 산업시설에도 시민들이 자발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자기 삼을 조금 조금씩 바꿔가려는 노력 없이 외부 탓, 정치 탓만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310 언제나 출발은 개인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아주 구체적인 관계여야 한다. 319

[ ] 우리가 죄를 지었으면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왜 남에게 대신 책임을 지라고 해? 이게 대속 사상의 거부잖아요. 말 그대로 신의 나라는 어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에 있다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대속 사상의 문제는 종교를 자율적으로 볼 것이냐 타율적으로 볼 것이냐, 자기 구제로 볼 것이냐 신의 구제로 볼 것이냐는 점을 우리에게 묻고 있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죠.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정교의 사도이자 러시아 군국주의자였고 차르주의자였습니다. 362

[ ] 포옹이든, 키스든, 프렌치 키스든, 혹은 성적인 관계든 상관없어요. 이런 접촉을 한다는 것은 언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더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페미니즘의 흐름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지만, 페미니즘 운동이 이런 이성 간의 자연스러운 접촉의 욕망 자체를 너무 과도하게 억압한다든지, 위험사회와 위협사회의 공포 같은 걸 불필요하게 조장한다든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399

[ ] 낙태 문제와 관련해서...태아의 존업성 같은 것은 물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덕목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태아를 품고 있는 여성의 권리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여성의 인격과 권리는 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체성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410

볕뉘

읽다보니 후쿠오카 도서관도 가고 싶고, 군대에서 한번도 구타나 체벌을 못한 것이 잘했다 싶고, 아이들에게 공부하란 소리 대신 친구들 많이 사귀어라라고 하길 잘했다 싶다. 지역과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저자 책들로 많이 배운터라 차분히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너나 사회만이 아니라 그 만큼 내안으로도 커지고 깊어졌으면 하는데, 현실은 늘 요지부동이거나 거꾸로 가는 것이 안타깝다. 인터뷰어도 깊이가 있어 참으로 많이 준비했겠다 싶다. 노고에 감사드리고 싶어진다. 지식의 흐름과 사상의 지도를 독서를 통해 감지하시는 박교수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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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적 감정

 

 

  믿고 찾는 저자의 책이 나왔다. 급속한 행보에 놀라기도 했는데 말미, 일련의 지적 흐름를 조율하던 출판기획자의 죽음이 있었던 셈이다. 감정의 격동 3부작, 칸트가 선험성을 기반으로 이성의 역작을 만들었다면, 저자는 감정의 코드로 재구축하고 싶어했고 천여쪽이 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 이후에도 분노, 혐오, 수치심 관련 저작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책의 모두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 시작한다. 남성-이성-적대의 틀로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감정-배려의 연주로 풀어나가는 전형의 시도로 모차르트의 작품을 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텍스트에 가까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민종교, 인간종교. 공적감정을 갖는 시민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꼼꼼이 짚어내고 있다. 그리고 남성-이성의 학문이 놓쳤던 여러 틀을 수선해내고 감정의 새끈으로 보수해서 튼튼한 동아줄을 만들고 있다. 

 

그녀는 이러한 이론적 검토로 인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감정도 유아적인 발상에 다름아님을 동물과 인간의 감정의 대유에서 찾아내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펀홈, 당신엄마 맞아의 저자가 유아기의 애착과 과정을 다룬 도널드 위니캇의 연구에 많은 근거를 대고 있기도 하다. 시적 정의에서 시가 갖는 힘이 어떠한 것인지 미적 결정이 얼마나 다양한 시각을 확보하며 조화롭게 만들 수 있는지 말한다. 이 책에서도 비극과 희극, 그것이 공적감정을 위해 얼마나 절실할 것인지 잘 밝혀내고 있기도 하다.

 

 

 

 

 

 

 

 

 

 

 

2. 잡초 생태학

 

 

  저자의 책들을 동시에 보고 있다. 겹치기도 하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약자들의 모습들이 감탄스럽게도 하다. 가늘고 길게, 추울 때 더 열심히... ...주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간간히 농담삼아 하는 이야기들. 그 방편의 진실의 방편이자 삶의 지혜라는 것. 새삼스럽지만 묶어서 분류하고 나누는 것이 때로는 좋지 않은 습관이란 것을, 세세히 살펴보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하는 것이 훨씬 풍요롭게 볼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을 풀들은 하나하나 말하고 있다.

 

 

 

 

 

 

 

 

 

 

 

 

 

 

 

3. 미셸 투르니에

  이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116개의 닮음과 다름의 상상력. 상하 위아래 존재 비존재 신무신의 고립된 반대개념이 아니라 여기서 언급하는 반대 개념은 상반된 대립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그는 신과 악마, 존재와 무, 선험과 경험, 포크와 스푼, 황소와 말, 시와 산문 등등 그는 산문의 묘미를 그가 이루지 못한 철학교수의 꿈이 곳곳에 스며있기도 하다. 벽으로 가득차 어쩌지 못하는 지금의 산과 같은 대립을 곁에 다른 개념들을 슬며시 집어넣으면서 풍부해지고 오묘해진다. 읽다보면 어느새 설득당하고 마는 마술의 힘과 같은 책이다. 어쩌면 우리의 사고습관과 행태가 극도로 단순해져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철학을 알아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접근하기보다 삶의 여러 결을 느끼는 척도로 고민해보고 싶다면 어김없이 추천해주고 싶기도 하다. 

 

돈후안과 카사노바. 그는 이 짧은 산문에서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 대본 작성시 돈후안이 아니라 카사노바의 창작을 염두에 두었다고 흘린다.

 

 

 

 

 

 

 

 

 

 

 

 

 

4. 화영시경, 돈후안

 

 

 

 화영시경, 시와 그림글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독특한 장르의 책이다. 수필가인 저자는 시각이 불편한 분들을 함께 주석까지 읽는 음성도서 작업을 오랫동안 해오시고 영화도 같이 보기도 한다. 투르니에에서 점자책의 관능미대목이 나와 실제도 그런가 되물어봤다. 하지만 그것은 상상에 가까운 현실에 근거하지 않는 묘사라고 했다.

 

 서남유럽사에서는 돈후안이 자주 언급된다. 선을 넘나드는 그의 삶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지금여기를 너머서는 장치로서 드나들기도 한다. 그것은 지금여기의 삶이 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기 때문일 것이다. 까뮈도 그의 작품에서 돈후안이란 인물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의 삶은 외줄을 타려고도 하지 않고 올라서지도 않으려한다. 하물며 떨어지면 또 올라갈 수 있는 안전망을 확보해보려는 상상력 조차도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맴맴 도는 이상 예술가들이 그러한 것처럼 작가들은 여전히 변주하려 들 것이다. 삶과 사회가 바뀌는 것과 크게 상관?없이 그럴 지도 모른다. 우리는 작품 속에서 무엇을 찾는가? 찾아낸 것들은 어떻게 섞이는가? 섞인 것은 우리 일상의 온도를 올릴 수 있는가? 더구나 우리의 삶의 농도는 스미며 다르게 필 수 있을까?

 

 

 

 

 

 

 

 

 

 

 

 

5. 이원재, 존 러스킨

  임금이라는 것은 일을해야 받는다는 생각이 적절한가? 드로잉과 건축, 사회 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경제에서 훌륭한 저작을 남겨놓았다. 제목처럼 일을 종료한 시점부근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일당을 주는 주인에게 하인들은 되묻는다. 합당하지 않다고...당신들에게 합당한 일당을 주었으므로 이것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억울해 할 일도 아니라고 말이다. 그는 일터를 빗대어 말하면 부자가 이익만 남기려고 하면, 이익을 남길 수 없는 것이 상식이라고 되짚는다.  사람들의 감정과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으면 그 조직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고 한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도 지금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며 경제를 위해서도 기본소득 개념을 말하고 있다한다. 의성의 한 곳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역이 일인당 천만원이상의 예산이 지출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면에서 지금상황을 여러가지 각도로 되짚어볼 필요가 절실하다. 좋은 텍스트로 추천할 만하다. 나-우리의 평균적인 삶의 경제는 최소한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상위 20%가 1%를 탓하며 자신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입자의 비율이 7.*% 남짓하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토지와 인간을 발라낸 경제, 그 악마의 맷돌을 말하는 칼 폴라니, 러스킨을 적극 번역하여 알린 간디, 미국의 현실을 위의 취지에서 말하고 있는 20 대 80의 사회를 참조할 만하다.

 

 

 

 

 

 

 

 

 

 

 

 

 

 

6. 시민의 물리학 외(유상균, 야마모토 이시타가)

 

 

 

 

 

 

 

 

 

 

 

 

제도밖의 연구, 공부란 무엇일까. 편안하고 쉬운 자리를 탐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분야와 그 외부, 사회와 관계를 이어내는 작업. 본연의 물리학을 도외시 않으면서 삶을 접붙혀 나가는 노력들이 읽힌다. 과학의 탄생은 일본 전공투 의장을 하셨던 분이 연구소를 나와 학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십여년만에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서 발표한 작업 결과물이다. 뉴튼의 만유인력, 중력이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연금술, 마술...본원적으로는 자력에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7. 삶이 있는 도시디자인

 

 

 

 

 

 

 

 

 

 

 

 

 

 건축과 풍화의 저자 조성룡건축가의 작품인 어린이대공원 꿈마루를 보고 왔다. 여기에 있는 이 책들도 저자 강연에서 언질을 받은 책이다. 건축과 사회사를 읽고, 이어서 이렇게 읽고 보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사람을 이어주고 활기차게 만들 수 있을까? 만들어지는 도시는 대표적인 것이 중세의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하고 보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기획의 요점들이 너무도 단순하고 쉽지만, 어느 새 우리 건축은 정작 중요한 것은 다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말미 책은 우리만의 독특함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한데 미술비평가의 우리 미에 대한 탐구들이 인상깊다 싶다. 좀더 세독을 해야 할 듯싶다.

 

 

8. 유라시아 견문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세계테마기행과 함께 보고 있다. 역사의 여러 지층들을 겹쳐놓아 흥미진진해진다. 더구나 막히는 부분은 그 방면의 권위자와 대담이 섞여있어 흥미롭다. 실크로드와 면화길... ...중국 신장과 위구르까지 찾고 보고 느끼는 맛이 새록새록 재미있다. 물론 이렇게 영상 리터러시는 대전아트시네마 주인장의 코멘트를 들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상을 담당하는 이들은 가보지 않고도 훤히 아는 놀라움이 중복되었기도 하다.

 

 

 

9.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박홍규)

 

 

 

 

 

 

 

 

 

 

 

 

 

 

 

 

 

 

 

 

 

 

 

 

** 이 달의 베스트

 

 

 

 

 

 

 

 

 

 

 

 

 

 

  모임 가운데 베스트인 책

  <<어머니의 나라>>는 모계사회인 중국 모소족의 이야기이기기도 하고,  돈주앙이 어김없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책읽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OBS 취재 영상이 나와있기도 하다. 루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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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 2020-01-09 19:31   좋아요 0 | URL
아, 감사요. 수정할께요^^
 



마음의 생태학 위기

1.

[ ] ‘다른 사람에게 선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미미하고 상세한 일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 일반적인 선은 깡패, 위선자, 아첨꾼들의 변명이다.‘ 일반적인 선이란 자라는 세대에겐 위선의 냄새를 풍긴다. 712

[ ] 인식론의 병리:

[ ] 우리 마음은 시차가 심도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수학적 계산을 하도록 훈련되어 있거나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훈련을 위한 많은 근거들이 존재한다. 마음은 결단이나 여러분의 의식 없이 이런 묘기를 수행한다. 여러분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이 예를 내가 말하려는 오류의 패러다임으로 사용학 싶다. 그리고 이것은 인식론적 오류의 만질 수 없는 성결과 인식론적 습관을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예증한다. 721 일상적인 사고 속에 나는 여러분을 본다.....정신이상은 이를 너머서는 정신 요법이나 어떤 커다란 새로운 경험으로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721

[ ] 마음이란: 1. 시스템은 차이들을 가지고, 차이들을 근거로 작동할 것이다. 2. 시스템은 차이나 차이의 변형이 전달되는 통로의 닫힌 고리 또는 네트워크로 구성될 것이다.(뉴런에 전달되는 것은 충동이 아니라 차이에 관한 소식이다.) 3. 시스템 내의 많은 사건들은 방아쇠를 당기는 부분의 충격보다는 반응하는 부분에 의해 활성화될 것이다. 4. 시스템은 항상성을 향하거나 폭주하는 방향으로 자기-교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자기-교정은 시행착오를 내포한다. 724

[ ] 이제 컴퓨터가 생각을 하느냐는 문제를 잠시 살펴보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시행착오‘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 더하기 컴퓨터 더하기 환경이다. 그리고 인간과 컴퓨터와 환경 사이의 선은 순전히 인위적인 가상의 선이다. 그 선은 사고하는 시스템의 경계가 아니다. 생각하는 것은 시행착오에 참여하는 전체 시스템이며, 그것은 인간 더하기 환경이다. 723

[ ] 이제 우리는 서구 문명의 인식론적 오류들의 일부를 보기 시작한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일반적인 사고 풍토에 따라 다윈은 자연선택과 진화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 이론에서 생존 단위는 가계, 종, 하부 종, 또는 그와 비슷한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실제 생물학적 세계에서의 생존 단위가 아니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생존 단위는 유기체 더하기 환경이다. 우리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만약 이제 우리가 다윈의 생존 단위를 수정해서 환경과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면, 아주 이상하고 놀라운 동일성이 출현할 것이다. 진화의 생존 단위는 마음의 단위와 동일한 것으로 드러난다. 725

[ ] 오늘날 육체와 분리되고, 사회와 분리되고, 자연과도 분리되어 있는 총체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미신‘이라고 말할 사람들을 위해, 나는 그런 미신과 함께하는 사고 습관과 사고방식이 아직도 그들의 머릿속에 있으며 아직도 그들의 사고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을 즉시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한다. 여러분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런데도 여러분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관념은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728

[ ] 권력은 타락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것은 난센스다. 사실은 권력에 대한 관념이 타락하는 것이다. 권력은 권력을 믿는 사람을 가장 빨리 타락시키며, 권력을 가장 원하는 것도 이런 자들이다. 분명 우리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권력을 갈망하는 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으며, 권력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피할 모든 기회를 제공한다. 만약 권력을 믿고 원하는 자들을 타락시킨다면, 그것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제도이다. 아마 일방적인 권력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권력의 신화는 물론 매우 막강한 신화이며, 아마 이 세상 모든사람들이 많든 적든 그 신화를 믿을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그만큼 신화는 자기-정당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인식론적으로 정신이상이며, 필연적으로 여러 종류의 재앙으로 나아간다. 729, 730


2.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


[ ]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재의 많은 위협들은 모두 세 가지 근본 원인에 기인한다. 1. 기술의 진보 2. 인구 증가 3. 서구 문화의 사고방식과 태도에서의 어떤 오류들, 우리의 ‘가치들‘이 잘못되어 있다. 736 우리는 이 세 가지 근본 요소 모두가 우리의 세계를 파괴하는 필요조건들이라고 믿는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그중 하나를 교정하면 우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믿고 있다. 736

[ ]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형태로 우리의 문명을 지배하는 생각들은 산업 혁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환경에 적대적인 우리 2. 다른 사람과 적대적인 우리 3.문제는 개인 또는 개별회사나 개별국가다. 4. 우리는 환경을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그 통제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5. 우리는 무핞히 팽차하는 ‘개척지‘ 속에 살고 있다. 6. 경제 결정론은 상식이다. 7. 기술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지난 150년 동안의 우리 과학 기술의 위대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파괴적인 위업에 의해 잘못된 것임이 입증되었다. 게다가 이런 생각들은 현대 생태학 이론하에서도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환경과 싸워서 승리하는 피조물은 자신을 파괴한다. 739


3.

도시 문명의 생태학과 융통성


[ ] 생태학자의 목표는 융통성을 증진시키는 것이며, 이런 범위 내에서 그는 대부분의 복지 계획 입안자들(법적 통제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보다 덜 전제 군주적인 반면에, 그는 또한 이미 존재하거나 창출될 수 있는 융통성을 보호하기 위한 권위도 행사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점(대체할 수 없는 자연 자원의 문제)에서, 그의 권고는 전제 군주적이어야 한다. 사회적 융통성은 석유나 티타늄만큼 귀중한 자원이며, 적절한 방식으로 예산이 짜여야 하며, 필요한 변화를 위해 쓰여야(지방처럼) 한다. 대체로 융통성을 ‘소비‘하는 것은 문명 내의 하부 시스템의 재생(즉 증대) 때문이므로, 결국 이 하부 시스템들이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융통성은 구속받지 않은 변화의 잠재성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 ] 우리는 적극적인 요구보다는 금지를 선호하는 문명 속에서 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침해하는 변수들에 대항하는 법률(예컨대 독점금지법)을 제정하려고 노력하며, 침해하는 권위에 대해 법률적으로 이름뿐인 처벌을 함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지키려 한다. 우리는 어떤 침해를 금지하려고 하지만, 자유와 융통성에 대해 알고, 그 자유와 융통성을 좀더 자루 행사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우리 문명에서는, 육체의 변수들을 극한값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육체의 변수들에 많은 융통성을 보유하는 것이 원래 기능인 생리적 육체의 운동조차 ‘관객의 스포츠‘가 되었으며, 사회 규범의 융통성도 똑같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대신하는 경험을 하려고 영화관이나 법정에 간다. 또는 신문을 읽는다. 754

[ ] 성서에서 가장 확실한 말은 바오로가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며, 이 말은 인간과 그의 생태계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공해와 착취라는 독특한 죄악이 그저 사소한 것이었을 뿐이라거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거나, 최선의 목표를 가지고 저질러진 것이었다고 변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또는 ‘만약 내가 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했을 것이다‘라는 변명도 마찬가지다. 생태학의 과정은 조롱당하지 않는다. 산중의 사자가 사슴을 죽이는 것은 풀이 과도하게 뜯기는 것으로부터 풀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떻게 우리의 생태학적 추론들을 생태학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방향으로 우리가 영향을 주려는 사람에게 전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자체로 생태학적인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는 생태계 밖에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생태계의 일부다. 755

볕뉘.

0. 정독할 요량이었지만 메타 이야기를 읽고, 두꺼워 호흡을 조절하다가 그래도 마지막 6장이 하고자할 마음들을 잘 파악할 듯 싶어 읽다.

1. 이 이야기들은 1966 - 1970년에 발표한 글들이다. 하지만 무척이나 간결하면서도 놓치고 있는 우리들의 관점을 예리하게 헤집고 있다. 물론 저자는 그때 그때 느낀 점들 정리한 것들이 향하는 방향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집필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그 관점에서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집약하려고 한 듯싶다.

2. 마음, 기계, 기술에 대한 이야기도 좋은 참조가 되지만, 3절 융통성이란 부분에 대한 그의 강조는 되새겨볼 만하다. 행정이나 법제화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금지를 위주로 하기때문에 사회가 더욱 경직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짚고 있다. 그러면서 그 해결책으로 실험예산, 외줄타기의 심정으로 새로운 실험으로서 행정이 반드시 요소요소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줄타기 밑의 안전망, 실패해도 떨어져도 다시 시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한다.

3. 그는 시민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문제를 개선시키려는 행정이나 법제화를 실험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의 관객처럼, 영화나 신문을 소비하면서 해소한다는 점을 뼈아프게 짚고있다. 운동은 관람하면서 좋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문제는 영화를 관전하면서 풀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야기하듯이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을, 풀이 없어지는 것을 막기위해서 합리화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아닌가 되묻고 있다.

4. 관계는 나 이전에 있다는 말, 유기체는 환경으로 더해져 있다는 말. 그 차이가 마음이고 거꾸로 우리의 생태를 흔들고 있는 그물이 무엇이냐고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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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01-0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님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여울 2020-01-09 15:57   좋아요 0 | URL
늘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실거예요^^
 

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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