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전에 고등학교 때 한참 정치에 꿈이 부풀어 있을 때, 국회의원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대학 갓 들어가 예술이니 사상이니 미쳐 있을 때, 유명화가의 전시회에서 심오한 질문을 해댔다. 화가는 한참 쳐다보더니 쌩까버렸다. 다시는 글 안 쓴다고 군대에 가서는, 한참 뜨고 있는 여류시인에게 오밤중에 전화를 했다. 그녀가 정중히 전화를 끊었을 때, 그때도 참 부끄러웠다. 그러나 두고두고 창피한 것은 회사 들어가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어리석음은 박멸할 수 없는 것

 

내 청춘의 거짓된 허구한 나날 내내

햇빛 속에 잎과 꽃들을 흔들었네.

이제 진실 속으로 시들 수 있으리.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오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교수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옥수수에 기생하는 스트라이거 균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 스트라이거 균은 박멸할 수 없다. 강한 약 기운에 숨어 있다가 더 큰 내성으로 되살아나는 것. 어리석음은 박멸할 수 없다. 늙기 전부터 지혜는 어리석음과 함께 있었던 것. 지혜의 나무 무성한 잎새를 보려거든, 땅 속 어리석음의 뿌리에도 자주 물을 줄 것. 잘 자란 나무에 꽃이 피면, 진실이니 거짓이니 그런 시비는 벌이지 마라, 지혜롭지 못한 것.

   

 

 

한 번 온 적도 없었다는 듯이

 

, 우리가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왔을 때, 장미는 거기에 피어 있었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하루 만에 다 자랐다. 방 안에 들여놓은 호랑가시나무 화분에 흰 버섯 하나. 나도 아내도 눈 동그랗게 뜨고, 딸아이는 손뼉까지 쳤다. 언제 누가 오지 말란 적 없지만, 언제 누가 오라 한 것도 아니다. 잎 전체가 가시인 호랑가시나무 아래 흰 우산 받쳐들고, 오래전에 우리도 그렇게 왔을 것이다. 아내와 나 사이 딸아이가 찾아왔듯이. 언젠가 목이 메는 딸아이 앞에서 우리도 그렇게 떠날 것이다. 잎 전체가 가시인 호랑가시나무 아래 살 없는 우산을 접고, 언젠가 한 번 온 적도 없었다는 듯이.

    

 

 

고통의 경계를 표시하려는 것처럼

 

크나큰 고통이 지난 뒤엔, 형식적인 느낌이 오네 -

마치 무덤처럼, 신경들은 엄숙히 가라앉고 -

- 에밀리 디킨슨, 크나큰 고통이 지난 뒤엔

 

셀 수 없는 다리처럼 바지런한 고통이 있고, 탱크의 캐터필러처럼 뚜렷한 자국을 파는 고통이 있다. 고통 속에는 누군가 타고 앉아 핸들을 잡고 있다. 그가 힘껏 페달을 밟으며 너털 웃음 터뜨리면, 웃음소리에 맞춰 새로 해 박은 당신의 어금니가 흔들리고, 멀쩡한 다리는 석유 시추공처럼 내려 박힌다, 예정된 속도와 정확한 각도로. 이윽고 고통이 멎으면, 당신은 또 한쪽 다리를 들고 뜨거운 오줌을 찔길 것이다. 그 와중에도 오직 당신의 것인, 고통의 경계를 표시하려는 것처럼.

    

 

 

애인아, 우리 화해하자

 

나 그것을 보고 싶지 않네!

내 추억이 불타오르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뿌려진 피

 

내 미친 짓을 보고 싶지 않다고? 넌 누구냐? 네가 널 모른다면 차라리 내 얘기를 해줄까? 난 나무꾼과 선녀다. 난 장화홍련이다. 줏대 없는 네 아버지고 의심 많은 네 계모다. 차라리 네가 읽은 동화책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넌 내 동화책의 음화거나 혼성모방. 넌 나무꾼의 날개옷 훔치는 선녀이고, 계모를 독살하는 장화 홍련이다. 내가 아는 건 그뿐, 내가 막힌 배수구로 흘러드는 생활하수라면, 넌 터진 정화조에서 새어 나오는 오물의 일부, 혹은 그 반대일 뿐. 애인아, 이제 흐르면서 우리 화해하자.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가 보아온 이성복 시인의 일관된 열망 중의 하나는 삶과 화해하고자 하는, 이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운명과 화해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화해하고자 하는 그 열망의 밀도에 따라서, 뒤집어 말하면 불화의 강도에 따라서, 시의 리듬은 고통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의 분출하는 듯한 속도로 거칠어지기도 하고, 연민의 물결에 실려 천천히 흐르기도 하고, 잠언의 비극적인 침묵 속으로 가라앉기도 하였다.....시인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는가?....시인이 본 세상의 풍경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물러터지고, 균열이 가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속에 있다......문제는 결국 끊임없이 다른 뚝배기 속에 생을 다시 끓여내는 일이다....시인은 이제 의 모든 선입견과 집착을 내려놓고 마치 처음인 듯, 삶의 풍경 하나 하나, 시간의 마디 하나 하나를 있는 그대로다시 바라보고자 시도 한다....그 사유방식은 선 수행의 화두 잡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적인 세계관이기 보다는 선 수행의 방법론이랄 수 있는 철저한 부정의 정신이다...그 시들은 시의 건강을 염려하는 시인의 사유의 요가에 가깝다. 삶의 일정한 사태 앞에서 말의 뼈다귀를 박아 넣는다.....그러나 그 부정의 변증법은 결코 합에 이르지 못하는 변증법이다....“길 없음의 삶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언어.......이 시집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는 알록달록한허기들, 삶의 풍경들을 만들어나가는 허기의 정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116-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에부는바람 - 시각과 청각이 없는 장애로 태어난 한 소녀와 가족의 다큐멘터리. 감독평처럼 언어과잉과 소통부재의 세상. 그 속에 마음이 어떻게 닿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레나도 같이 읽고 느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동네목욕탕 - 시집 세 권을 골라 간다.

달력 뒷장을 오려 못에 꾹 눌러 싸인펜으로 쓴 시나 글귀에 대한 보답인 셈이다. ˝세 출판사 모두 시집 까다롭게 감수하는데네요˝하신다.

돌아오는 길 ˝문태준 안도현 도종환 세 분 모두 생각많으신 분들이죠˝라고 ˝잘 보시겠다˝ 한다.

발. 생각의 격차가 많이 섞였으면 한다. 삶의 처지가 달라도, 작은 모임 성원들 사이도 ㆍㆍㆍ선물하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공명 - 두 역, 아니 세 역. 강남, 구의 그리고 곡성. 두 제단. 아니 공무원 그림자와 공무원의 안타까운 죽음. 그냥 스쳐가는 줄 알았다. 늦밤 떠지는 눈. 혹 우리가 놓치다 가는 건 아닐까.


강남.

하얀 가면들. 눈치채지 않으려던 우리 속의 그 사회적 가면의 경계를 문지르고 있는 건은 아닐까. 서구라는 쫒아가는 서양의 공모자와 같이 몸에 배인 남자라는 근거없는 정체성을 `사회적 공명`이란 약자의 울림으로 그 지문이 지워지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게 하얀 가면을 부수는 지표로 흰 그림자를 드리워 사회의 아우성을 깃발처럼 날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다른 제단에 바쳐지는 국화꽃들.

구의.

정규직이라는 지문을 지우고 사회적 형평을 찾아가는 민주주의를 찾아가는 공명의 흔적이자 또 다른 흰 그림자는 아닐까.

곡성.

그리고 또 다를 절규. 곡성에 울부짖음. 산자와 사자가 한몸이란 걸. 살 자와사자가 한 몸이란 걸. 또 다른 제단에 꽃을 바친다.

신문 사회면, 한줄기사의 안타까운 비운에도 공명하던 한 세대 전, 반세기 전의 일상들. 곡성이 일상인 퇴행의 시대.

`사회적 공명`이 또 다른 형태로 귀환하는 것이자 여명처럼 오는 것이라고. 우리는 너무 멀리 온 것이라고. 결코 가벼운 , 사소한 죽음은 없는 것이란 그림자.

곡성의 비극. 그 죽음에 흰꽃을 바치며 삼가고인들의 명복을빕니다. 눈물의 그림자를 올립니다.

발. `오보에를 위한 협주곡` 외 몇곡 더 연주회에 다녀오다. 너무 안스럽기도 했다. 붉게 부푸러오르는 얼굴. 호흡과 연주 사이의 간극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연주와 표정의 안온함이 같이 어울린 건 단 한차례. 어느 귀족이 자신의 악 취미를 위해 작곡시킨 건 아닐테지. 나라면 우리라면 저 작곡은 시키고 즐기고 싶진 않아. 그러고 싶었다. 삼삼오오 연주자와 식구들과 지인들과 뒤풀이. 즈문동이 아이들의 맘과 삶이 걸려온다. 밤바람도 좋은 날. 문득 생각이 사선으로 불어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비 - 늦밤 막내에게 공부한지 2백일이 되어가냐고 건넨다. 과외한지 백일은 되어가는지 하고 말이다. `아직`이라고 한다. 힘들거라고, 좋아하는 농구처럼 재미가 붙으면 좀 낫거나 하고싶을 거라고 그 고개쯤 와 있을거라고 한다.

발. 부쩍 힘들어해서 여러 변화를 엄마와 나누어 보고 헤아려본다. 형의 판단도 저간의 상황도 겹쳐본다. 불쑥불쑥 지난 관성이 스며나오는 지점이다. 돌아보지 못한 것이 있는지 다시 한번 새겨볼 시점이다. 나에게도. 막내에게 챙겨온 책 두권을 전했다. 파인만과 이안스튜어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