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非體들이란 부제를 가진 책이다. 저자가 악셀 호네트의 인정이론과 페미니즘을 접합시킨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책날개에 적혀 있다. 읽는 내내 여성이론에 국한 시키기보다는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것들‘의 말로 만든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다. 버틀러, 누스바움,알튀세르, 메리필드, 루이스 멈퍼드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론들을 횡단하여 잡힐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호평하고 싶다. 동네 건우아빠(건우법 발의)를 가끔 만나면서 나누는 이야기, 아니 전해듣는 이야기가 감정의 결이다. 동감이 아니라 공감이라는 것이다. 동감은 시혜를 전제로 한다. 좀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책에서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감이 아니라 공감을 머리에 세운다. 나는 다르다가 아니라 서로 인정하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고, 변하는 너로 수시로 변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차이를 발견하는 감정의 시선이 공감이라고 한다. 이땅위에는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로 요란하다. 그 소리를 말로 바꾸고, 바뀐 말들을 새로운 담론으로 만들 때 변화의 자장은 길고 오래갈 수 밖에 없다. 주변 학문이라는 것이 없겠지만 이론의 날카로움은 장애이론이나 여성학에서 먼저 구체성 있게 전개된다. 주)에 담겨있는 책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읽고 공부해나간다면 함께 공부할 맛이 나겠다 싶다. 흥미로운 텍스트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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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2-13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담아갑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할수록 읽고 싶은, 읽어야할 책이 더 많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마음이 분주합니다.

여울 2016-12-13 08:29   좋아요 0 | URL
한 번 쉬어간다 생각하고 읽어보시면, 분주한 마음도 가시지 않을까 싶어요. 감사요^^
 


몇권의 책이 집혀들렸다. 사유의 거래와 텍스트의 포도밭이다. 어젯밤엔 1970, 박정희 모더니즘이다.

1. ‘사유‘의 거래라? 매혹하는 말이다. 회계장부라는 것도 약속된 허구이다. 나는 생각을 거래하고 싶다. 무형의 굿윌도 계정을 만들어 거래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허구다. 세상을 바꾼다면 물론 또 다른 허구를 치밀하게 밀어부쳐야 한다. 느낌을 팝니다란 우에노 지즈코의 책제목이 선정성이 있지만, 얼마든지 팔 수 있다. 허구가 현실이라고, 허구를 감이 잡히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란 책은 서점에 대한 얇은 책이다. 삽화로 책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긴 하지만, 조재룡교수의 해제가 더 돋보이기도 한다. 서점주인을 정령으로 표현한다고 전하니, 유럽스타일이라고 대꾸한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낭독과 더불어 그 책을 외우는 과정과 촛불에 비친 삽화의 우아함이 스며드는 과정 말이다. 책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과정이자 그 지혜를 꼭 안게 되는 과정이다. 포도밭의 포도즙이나 발효액까지 온몸으로 번지는 순간들로 읽는다. 이런 시기로 12세기, 인쇄혁명이 일어나기 3세기이전의 시간의 그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거꾸로 책을 보는 것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었을까?

2. 책꽂이에 박정희 모더니즘이 손에 잡혀 읽고 있다. 경향신문 특집을 간추린 것인데, 좋은 기획인 것 같다. 지금 읽기에는....저자들은 산업-민주의 이분법 구도로 읽지 말 것을 당부한다.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제목과 같이 대중에게 시선을 맞춘다. 틀에 박히지 않고, 고정관념에 벗어나는 대중의 열망이 늘 숨쉬고 다음을 예비하여 왔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점을 돌이켜보는 것도 신선하다. 1978년 전경련주최로 하이에크를 초청하여 강연을 하였고, 정부주도보다 민간주도의 경제의 씨앗이 그때부터 퍼졌다는 것이다. 지식인들도 오히려 강력한 자유주의에 전염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르쳐야 하고 묶어두어야 할 청소년은 별밤으로.....텔레비젼으로 규격화하면 라디오로....끊임없이 대중은 자신들의 시공간을 만들면서 확장시켜왔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2008년 촛불과 지금까지 대중의 시선으로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을 다시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마수미의 집합적 비등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무수한 혁명들이 널려있는 것인지도...구체성있게 응집시키고 거꾸로 제도를 그 흐름에 맞게 새롭게 경화시켜야 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의 시선은 산업화와 민주화에 경화되어 있다. 그 변증법을 유추하지 않는다. 또 다른 현실이 새롭게 맞딱뜨리고 있다. 인물에 과잉투사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영웅은 필요없는지도 모른다. 대중의 숨결을 제대로 읽는 일, 틈을 비집고 나오는 열망을 읽으려는 이들. 현실은 그만큼만, 그 시공간의 자장에서 변화되는지도 모른다. 젊은 벗들이 이 시대를 함께 읽기에는 생활문화사 4권도 함께 읽으면 괜찮을 듯 싶다.

어제 온 카페에 또 들렀다. 여전히 책은 두 보따리다. 그림그리기 좋은 날 두권과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든 비체들. 어쩌면 틀에 넣을 수 없는 남녀, 계급으로 구분지을 수 없는 다른 주체를 있는 그대로 보려하는 것이 현실을 더 생생하게 포착해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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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6-12-13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 님 질문 있습니다.
그동안 평점에 박하시다고 생각했었는데,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별을 가득 채워주셨길래, 일단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쭙는데,
쟤네들 ‘그림그리기 좋은 날‘ 어떤가요?^^

여울 2016-12-13 18:24   좋아요 0 | URL
별점 둘입니다. 영혼을 흔들지 않으면 셋이상 안줍니다.
 

1. 방황을 하다가 다시 서재일상으로 돌아옵니다. 따로 방을 꾸릴까하다 번거롭게 하기도 하고, 티내는 것 같기도 하여, 지난흔적들은 한 켠으로 몰아두고 이렇게 시작하렵니다.


2. 소통 - 소통에 대해 마음에 새겨보았습니다. 이해를 구하거나 기대거나 찾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매듭에 이르렀습니다. 소통은 애초에 없는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이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을 반복하면 말했다지만, 그것 역시 어렵지 않나 합니다. 책들을 보고 이해하고, 이 저자는 통한다고 여기지만, 어김없이 그 책을 보는 이들은 다른 시선을 찾아냅니다. 알고 있다. 느낀다는 것 역시 불안한 우연과 마주침과 가까운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방황을 하다가 임시로 걸어둔 방편이 ‘소통은 없다‘ 입니다. 혹시 만의 하나 삶의 태도가 우연을 만들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부지간이든 아주 가까운 벗들. 모임의 시공간이 겹치는 이들 . 마음이 맞는 좋은 사람들.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역시 운이 좋은 마주침과 만남일 뿐입니다. 그래요. 삶의 태도가 배경처럼 잔잔하게 깔린다면 좀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멋진 사상가들을 만나 잔잔하게 일상을 뒤적거려보고, 간이 배이도록 해보는 일들 속에 우리는 책이 단순한 앎의 방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나가기도 합니다. 소통은 더욱 외로워지는 일들이 아닌가 합니다. 내 안의 숱한 만남을 확장시키는 일이기도 하고, 그 만남이 작게 꽃피울 수 있다면.....너에게 얻고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서야한다는 삶의 태도가 아주 작은 지지대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너를 알 수 없습니다. 너의 삶의 태도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마주침이 소통이 아니듯, 요동치는 당신의 삶의 시선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누적은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겠지요. 또 다른 한 켠의 지지대. 소통이 없다라고 할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선물이 우르르 쏟아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공명처럼 번진다면 말입니다. 그래요. 그렇게 또 다르게 ‘우연의 숲‘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전보다는 다르게 당신의 삶의 방편을 기웃거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 끝에 걸리다

이파리하나/어쩌지 못해/바람도 없이/ 거미줄에 바르르 떤다
맞딱뜨리고 싶지 않아/먼 발치 발소리에/이슬처럼 파르르 떤다
낚시바늘에/몸부림치다/아가미 살점 하나 떨어뜨린채/첨벙 살아가는 것들도 있다
미워미워/갈라져 살아도/미처 다 나오지 못한/신물같은 사랑이 남다

피고날리는 것들은/비바람처럼 피며날리는 것들은/ 미련도 없이/마른 눈물처럼 날리다
한방울씩/쓰디쓰게/달디달게/꿀 꺽 꿀 꺽 떨어진다

4. 날이 추워집니다. 마음들 덜 상하도록 건강 살피소서........ 여울은 가고 마당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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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판 - 좋지 않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생계가 걸려있는 문제. 판단이 쉽지 않은 일이다. 설령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먹고사는 일에 멈춰서서 생각을 몇번 더 해보아야 하는 일. 일에 선을 긋고, 쥐꼬리만한 작은 권한을 가지고 곁의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일. 다른 이의 일상을 요동치게하는 일. 저녁 한 대원이 다급하게 건의사항이 있다고 올라오셨다. 말을 만들고, 도박을 취미삼아, 다른 사람을 폄훼하는 말씨를 만드는 사람들. 어떻게 할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최대한 사실관계나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혹시나 하여 사실관계들을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하여 두었다. 절차를 밟아두었다. 다른 곳으로 발령내고, 좀더 다른 관계들로 이어나갔으면 좋겠다. 한사람의 힘이 너무나 크다. 분위기와 정서를 감안한다면 말이다. 그 불감이 낳는 불편들.

 

2. 관계 - 서재나 sns, 텔레비젼 등 매체가 이끌어가는 의식의 확장을 호평하여 마수미는 '집합적 비등'이라는 표현을 쓴다. 꼬리에 꼬리를 물거나 물리면서 사회는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초기의 SNS의 한계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어 그런 측면도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자신의 소유하지 못하고 댓글이나 비난들에서 생겨나는 감정들에 끌려다니는 이상 온전한 공간들이 아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많은 감성과 감정들이 꿈틀거리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내몫과 네몫의 경계에 흔들리면 쉽지 않다.

 

 

 

 

 

 

 

 

3. 안달 -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부부사이도 가까운 친구사이도 마음을 알 길이 없기도 하다. 설령 맞는다고 하더라도 잠시일뿐이다. 기대지않고 묵묵히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 최선이다. 삶에 말걸고 싶다는 것은 그저 레토릭일뿐, 진지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맞을 것이다. 최적화된 소통의 방편이 있다는 것도 욕심일 것이다. 속내를 털어놓고, 털어놓을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통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찾는 일, 벗을 만나는 일이 그래서 더 소중한지도 모른다. 갈수록 더 모르는 것이 삶이겠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안달하는 것이 살아있다는 표시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모르는 것 투성인 것이 세상이지만.... ...

 

4. '마당' - 이 공간을 닫고 또 다른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낯설다가 낯익어가는 이 먼 시공간에서 또 다르게 의미를 찾고 싶은 것일 것이다. 여기서 읽는 책들이 투명종이에 겹치듯 서로 지난 과거를 거슬러오르면서 만났으면 싶다.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 더 알아갔으면 싶다. 사랑도 삶도 그렇게 겹치는 것이라고 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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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희망은 내 책들이 쓰인 다음에 참이 되는 것이다...쓰기 전이 아니라 420

“활기차게 사는 것이 투쟁 속에서 기쁨을 갖게 한다. 투쟁 자체에서 과도한 부담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인간성을 즐겨야지 정치적 행동주의가 인간성을 탈인간화해서는 안 된다. 열정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동안 조금 떨어져 있어야 한다.” 392

권력을 선으로 만드는 것, 그러한 권력을 수용하게 하는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힘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을 가로지르고 생산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쾌락을 유발하고, 지식을 형성하며, 담론을 만들어낸다.” 405

권력관계는 자기 구성의 특정 관계에만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다.(권력관계가 작동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으로 삶, 봄, 그리고 사유의 규범화된 형식으로 개인들을 부추기는 수단의 역할을 한다. 권력관계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신체가 강제력과 생산형식과의 제휴를 야기하는 방식 및 신체와 사회 간의 복잡한 조화라는 쟁점을 문제화한다. 406


진리는 진리를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권력체계와의 순환관계 속에 연결되고, 진리를 유발시키고 확장하는 권력의 효과들과 연결된다. 이것이 진리의 ‘체제‘다. 진리가 권력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권력은 진리를 생산한다. 권력은 사회적 신체 내에 참된 담론들을 만들어내고 담론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작동한다. 여기서 담론들이 포착되고 표현되며 ㄷㅏ른 참된 담론의 주체가 형성된다.” 407

“저항한다는 것은 단순히 부정이 아닌 창조의 과정이다. 상황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것,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실제로 그 과정의 능동적 일원이 된다는 것인가?” 이에 푸코는 답한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내가 제시한 방식이다.” 저항은 창조적이다. 왜냐하면 권력이 ㄱㅐ인들과 행동들의 생산을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411

진리는 미래의 특수한 동일성을 현실화하는 일을 뒷받침하는 데 주어진 도구적 가치이다. 419..”구성된 이론은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권력관계를 둘러싼 투쟁이자 권력관계의 특성의 도구, 논리이다.(그에게 도구는 미래를 위해 현재에 개입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용한다.)” 419

진리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발견해 내기 위해 권력관계 속에 우리를 연관지은 더 큰 실험적 과정의 일부이다.(윤리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특정한 권력관계에 대해 우리의 관계를 문제화하는 일과 동시에 권력_지식의 기능을 대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허구나 가상을 만들어 내는 일 사이의 이중적 운동을 함축한다.) 니체의 ‘위험하게 살기‘라는 개념과 더불어, ㅅㅏ유는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통해서 살아가는 다수의 ㅎㅓ구나 ‘진리들‘이 절대 현실화될 수 없다는 인식 및 위험과 함께 각인된 모험이다. 420

“자기 자신에게 관여한다는 것은 삶을 위한 순간적인 예비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형식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는 우리 삶의 다양한 힘들과 우리의 주체성을 변형하는 방식들을 주시하고, 여기에 관여하기 위한 일관적인 윤리적 요구가 된다. 428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표상, 사유를 조심스럽게 점검하는 환전상, 금속.무게.모형을 재는 환정상이 되어야만 한다.” 자기 점검은 자기 폭로 및 솔직함의 행위를 통한 자기의 생산을 향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희망찬 저항적) 주체성의 생산에 기여하고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실천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점검함으로써 자기가 될 수 있고, 삶의 기술을 실천할 수 있다. 438

초기 그리스 윤리가 타자와 나의 관계의 장소로서 성인 남자와 소년의 관계 및 폴리스에 초점을 맞춘 반면, 그리스_로마 윤리는 결혼, 우정, 그리고 친척 관계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더 넓게 문제화하려고 한다. 우리는 자기를 드러내는 일로 타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이르러야 하고 그렇게 해서 잠재적 변형과 자기 양식화에도 이른다. 푸코는 이 “새로운 실존의 양식”을 “자기로의 퇴거”가 아니라 “아내, 타자, 사건,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활동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기술한다. 441

따라서 매순간, 절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하나의 색채, 형식과 강도를 부과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삶의 기술이다. 삶의 기술은 심리학을 제거하는 것이면서, 자기 자신 및 타자와 더불어, 개별성, 존재자, 관계들, 명명할 수 없는 성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하나의 실존은 완전하고 숭고한 작품일 수 있다. 449



현대 미학 윤리는 저항에 추가적인 차원을 더한다. 그런데 그것은 아도르노, 마르쿠제, 카뮈, 심지어는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망각될 수 없는 것이고, 선견지명을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배의 최소화이다. 456

볕뉘.

1. 지난 주 어느날 새벽에 일어나 이 장을 마저 읽다. 어쩌면 푸코에게서 늘 헛갈리던 부분이거나 미흡하던 것들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2. 첫번째 관건은 전통적인 권력개념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진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도구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세번째는 성의 역사 2,3권에서 말한 자기에로의 배려나 활동을 고정적인 시점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술, 삶의 예술을 지향하지 않고서는 서로 꽃을 피울 수도 없다는 점이다. 물론 세번째에 방점이 찍혀 있겠다.

3. 우리는 살아가지 않는다. 살아진다. 화폐, 자본의 이미지. 허구가 사실로 자리잡아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항진리는 허구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만들어져야 한다.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몸에 맞는 진리조차 없다. 쓰레기통에 쳐넣어야 할 죽은 이론과 납빛의 진리만이 횡행한다. 김광규시인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시집에서 ‘우리는 부딪쳤을 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라고 했다.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 낯선 사람들이 너무 적구나‘라고 말이다. 삶은 무수히 반복되지만 우리 안에 삶을 심고 나누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의 진리가 만들어질 수 없다. 우리의 사유를 확장시켜나갈 수 없다. 그 사유 속에서만 현실에서 거꾸로 살아지게 된 분기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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