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다른 공식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266

                                                                                                                                                                   ‘이론은 늘 회색에 가깝다. 하지만 늘 적색에 가까이 가야 한다.‘

1. 지적인 공간의 지도그리기

좌파는 전략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나와 다른 사람들이 대중적이라고 부르는 것, 즉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자기가 사는 세계를 평가하고 계산하는 논리들과 접속하기 ㅇㅟ한 어떠한 ㅅㅣ도도 하지 않았다. 좌파는 어떤 대화의 개념,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이 자신의 실수를 발견하고 그들의 가정을 변혁하는 그런 ㄷㅐ화의 개념을 저버렸다. 대신 좌파는 단지 마차 속에서 편안하게 앉아, ㅈㅏ신들이 이미 일이 돌아가는 ㅅㅏ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에 차서 ㄷㅓ 많은 일을 ㅎㅏ려고 하지 않으면서, 계속 인식론적, 정치적,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계속 엘리트적이고 전위적인 정치학을 실천하고 있었다. 502

희망의 맥락 – 나는 정말로 저기에 도달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한 걸음 내디뎌서 그 한 걸음이 세계를 좀 더 낫게 만들기를 희망한다. 500 나는 우리의 임무는 희망을 ㅈㅐ구성하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들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24

상상력을 높이는 방법은 현재를 지우고 정신이 자유롭게 방랑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현재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높이는 것입니다. 현실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더 ㅈㅗㅎ은 상상을 할 가능성의 조건이다. 상상력은 경험적인 노동과 관련된다. 503

나는 존재론적인 것과 정동적인 것, 국면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보는 것이 핵심이다. 정동을 중간에 두는 것은 칸트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들뢰즈적인 의미에서 “매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지점이다. 511

대중을 다시 생각하기-하나의 실험적인 정치로, 저항에 대한 만큼이나 스타일가 과정에 대한 것이기도 ㅎㅏ다. 단지 정치만이 아니라 살아감의 스타일과 과정이다. 512

오늘날의 매체는 지금 모욕이라는 느낌의 구조 또는 분위기라고 부르는 것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것이 대중적인 것의 절합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521

나는 항상 푸코, 들뢰즈, 가타리의 요소들과 그람시의 요소들을 한데 어우르는 방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527 나는 나의 설득의 힘이 로고스만큼이나 파토스를 통해서 나온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ㅅㅏ람들은 이성과 증거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지만, 열정 없이 그들이 지배할 수 있다거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528

당신은 어떻게 그런 관계들을 사는가 490 - 내가 정동을 만난 것은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말하는 “느낌의 구조”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리처드 호가트가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것”과 ㄱㅏㅌ은 무엇이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 ㄱㅐ념과 현존하는 ㄱㅕㅇ험 이론들이 포착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싶다..노먼 브라운과 공부하면서 프로이트를 읽었고, 이것은 라캉을 통해 배운 것보다 빌레름 ㄹㅏ이히의 해석에 훨씬 더 가깝다. 이후 프래그머티즘, 퍼스, 하이데거를 읽었고 알튀레르의 흐름 – 노골적으로 이성주의자이며, 노골적으로 재현주의적이고 “의미의 영역”이라고 부를 만한 협소한 개념에 묶여 있음을 발견했다. 이후 그람시를 중심으로 그람시 다시 읽기로 연결되었다......정동의 니체적 공간은 들뢰즈적 공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존재론적 공간이고, 정신분석학적 공간은 경험적 고ㅇ간이다.....나는 들뢰즈와 니체에게 실재의 존재론적 성질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늘 부분적 형식의 효과성(정동)dㅔ 있었다.(존재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ㅅㅏ이의 절합들 493) 이 관심은 폴 리쾨르로부터 왔다. 484-490 우리가 ㅅㅏ는 삶의 방식을 구성하고 있는 기계적 장치 혹은 담론 체제는 무엇인가? 491

정서는 정동과 이데올로기의 절합이라는 생각을 ㄱㅏ지고 있다. 저ㅇ서란 어떤 저ㅇ동의 생산물들을 이해하려는 이데올로기적인 시도이다. 496

의미 있다거나 알 만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그럼에도 살마ㄴ한 것 the livalble 사이의 간극이라는 것이 늘 존재한다는 생각이 모든 사유의 흥미로운 출발점이라 여긴다. 498 이상 로렌스 그로스버그 대담

2.

매개개념의 창조 -여기서 매개라 함은 주체/대상과 ㄱㅏㅌ은 이원성들 사이의 추정적 연결이 아니라 정동적 관계들의 “가운데 공간”을 설명하는 개념이다...주어진 경험의 ㄱㅜ체적인 상태를 ㅍㅛ현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예를들면 약물을 복용한 어떠한 몸이 아니라, 서비스 ㅇㅣ용자와 정신활성약물의 마주침을 명명하는 ㄱㅐ념을 찾고자 한다. 이보다 ㄷㅓ 중요한 ㄱㅓㅅ은 매개 ㄱㅐ념이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의 고리, 즉 현실화된 ㅈㅣ각이 변화를 ㅇㅟ해서 ‘다시 ㅈㅏㄱ용하는 ㄱㅓㅅ‘(자기실천)을 허용하는 ㅂㅏㅇ식을 가시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383-384

정신건강에 대한 스메일의 입장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의료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리적인 괴로움은 경제적, 정치적 힘의 합류지점에서 떠오르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다. 393

노동자들을 ㄷㅏㄴ지 기업문화의 우정 시스템으로만 묶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친화성‘이라는 보편적 환경에의 자동적인 참여를 통해 기업 문화로 묶는 프로그램이다. 이 ㄱㅣ업문화는 일반적 문화의 무대이며, 일반적인 사회성과 교류, 소통의 새로운 모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친절하거나 관대하거나, 한마디로 사교적일 필요가 ㅇㅓㅂㅅ다. 우리는 단지 사용자 친화적이기만 하면 되며, 이것은 곧 ㄱㅣ업적이 된다는 것이다. 421

오늘날의 노동자들에게는 핵심적인 정당한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 칼라 직종의 “사회적 윤리”라고 부르는 가치 체계이다...중간 계급의 정신 세계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성취감있는 삶을 산다는 예전 의미는 그 매력을 일부 잃었고, 사무실 문화의 예의와 격시ㄱ은 사람들이 ㅈㅏ기 일에서 찾는 본질적 의미가 부족하다는 것을 가려주지 못한다. 수동적인 공격성과 노골적인 적의는, 이미 창의적인 일터의 승리를 선언한 ㅇㅣㄹ반적인 관리 원칙에 저항하는 경계성 경고이다. 423

상호작용의 춤 – 어머니도 ㅁㅏ찬가지로 ㅇㅏ이의 인정을 갈망하며, 아이가 놀이에서 반응하면 성취감을 얻는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ㅇㅏ이 사이의 관계가 권력의 면에서 차등이 ㅇㅣㅆ음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상대방을 인정하고 결국 자신도 인정받고자 ㅎㅏ는 욕구가 있다....파트너는 서로에게 잘 맞춰 주어서 하나로 움직이며, 정동으로 촉발된 것으로 보이는 상호 인정의 놀이를 ㅎㅏㄴ다. 437 관심이라는 ㅈㅓㅇ동적 뒷받침이 ㅇㅓㅂㅅ으면 뇌 조직이 파괴되는 만큼이나 지적 발달에 손상을 가져올 것이다. 438

감정이 인지적인 측면을 갖고 있고 오래 지속되며, 전 생애를 통해 지속적으로 촉발된다고 인식되는 반면, 정동은 일종의 신체적 현상으로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흔히 여겨진다....정동은 인지를 ㄷㅗㅂ고 ㅎㅐㅇ동을 유발하면서 의식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신체적 ㄱㅣ억으로 축적된다.(올리버섹스 음악이 ㄷㅏ리감각 회복에 ㄱㅣ여) 440

자신이 되는 것은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중적으로 사회적인 과정이다. 449


3.

습관화된 무관심을 퍼지는 기쁨으로 바꾸는 것이 ㄷㅐ안적인 삶의 윤리에 대한 실마리를 열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문제이다. 아마도 그건 것이 정도 이론의 ‘아직 아님‘의 ‘지금으로서의‘약속, 즉 그것의 습관적으로 리듬적인(또는 거의 리듬적인)일일 것이다. 말하자면 발화 공간의 뻗음이, 단지 증대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응결시켜 떨어뜨리는 상서로운 ㄱㅖ기를 발견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34

사호ㅣ이론가는 제도뿐 아니라 사랑.시.정의.단념.증오.욕망의 순간들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상생활(직장인보다도 직장으로 가는 통근자로서의 삶에서, ㄱㅡ리고 통근하는 동안 백일몽을 꾸는 자로서의 삶에서)이라는 신비롭지만 현실적인 영역 안에서 이러한 순간들이 힘 있는 동시에 무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순간들이 인식이 된다면 사회 질서의 완전히 새로운 요구들을 위한 기초를 형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직장에 통근하면서 하는 생각들은 대주ㅇ교통 ㅊㅔ계나 보상 체계에 의해 만족되는 게 아니기 ㄸㅐ문이다. 문제는 아무도 그런 순간들에 ㄷㅐ해 ㅇㅣ야기 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47

볕뉘 1. 르페브르는 일상생활의 혁명이란 책을 썼다. 그 책을 읽을 때는 이런 ㅇㅣ론적인 배경을 생각하지 못했다. 아나키스트의 흐름정도만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 이론이라면 거꾸로 거슬러오라가 그 매듭을 다시 한번 펼쳐보는 것이 좋겠다 싶다. 이런 이론 ㄱㅣ반을 가져온다면 레이먼즈 윌리엄즈를 피ㄹ히 ㅂㅜㄹ러내야한다.

욕망의 ㄷㅐ상을 한 다발의 약속들이란 말로 바꿔 생각하면 우리의 애착들 속에 있는 비일관적이거나 불가사의한 측면들을 우리의 비합리성의 표시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대상 속에 머문다‘라고 느기는 ㄱㅓㅅ에 ㄷㅐ한 설명으로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대상에 근접함이 그 대상이 약속하는 한 ㄷㅏ발의 일들, 그 중 어떤 것은 우리에게 선명히 다가오고 어떤 것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은그 일들에 근접함을 의미한다는 ㅈㅓㅁ에서 말이다.161

잔혹한 낙관주의는 시레로 체험되는 ㅇㅟ급함의 양식을 가리키는 ㄱㅐ념이다. 그것은 ㅇㅙ ㅅㅏ람들이 멜빌의 바틀비가 ㅇㅏ니지, 왜 사람들은 갖가지 ㅂㅣ참한 처지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ㅇㅏㄴㅎ으며 대신 그들에게 익숙한 애착 체계를 영위하면서 이와 함께 삶을 축소하는 쪽을 선택하는지, 달리 말해 딱히 패배하고는 ㅎㅏㄹ 수 어ㅂㅅ는 ㅅㅏㅇ호성이나 화합, 단념의 ㄱㅘㄴ계를 고수하기를 선택하는지 등에 ㄷㅐ한 이유를 생각하면서부터 자라나는 ㄱㅐ념이다. 170

‘신ㄱㅣ루로 경계선을 발라놓았네/빛으로 그리고 빛이 지닌 끝없는 수줍음으로’(투명문양) 172

오웰의 글에서는 에토스가 끔찍한 원수인 것처럼, 그 안에 머물 순 있지만 빠져나올 수는 ㅇㅓㅂㅅ는 감옥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오웰의 주장의 근거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제 ㅅㅏㄹㅁ과 작업은 다르게 이야기한다. 바로 삶 속에서의 실험을 통한 에토스의 ㅈㅓㄴ환이다. 여기서 ㅈㅓㅇ치는 겨ㅇ험에 의한 교육의 한 ㅎㅕㅇ태이며, 당신의 에토스 ㅇㅏㄴ에 불편하게 자리하고 ㅇㅣㅆ는새로운 감각의 세계에 끊임없이 당신의 감각중추를 굴복시키는 ㄱㅓㅅ이다. 여기에 ㅎㅢ망이 있다. 사회미학은 에토스와 아비투스가 보수적인 성격뿐 ㅇㅏ니라 변동 ㄱㅏ능성 및 역동성 또한 ㄱㅏ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ㅇㅣㅆ다.....우리가 ㄱㅏ진 ‘정동의 ㅂㅓㅁ위‘가 뿌리 ㄱㅣㅍ은 교육의 겨ㄹ과라면, ㅈㅓㅇ동의 ㅈㅓㅇ치가 ㄱㅗㅇ동체의 ㅁㅣ학의 ㅇㅕㅇ역을 확장하기 위해선 대하ㅇ적인 정도 교육을 옹호해야 할 ㄱㅓㅅ이라는 저ㅁ이다. 234-235

리토르넬로 ritournelle. 교향곡에서의 반복구를 말한다. 반복되면서 변화를 ㄱㅏ져온다. 가타리는 리토르넬로를 실존적 정동들을 결정화하는 반복적인 연속체라고 하였다. 이 반복구는 소리차원, 감정 ㅊㅏ원, 얼굴 차원 등을 ㅈㅣ니고 있으며, 끊임없이 서로 침윤해 간다. 시간의 결정들을 퍼뜨리는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 237 리토르넬로는 정동적인 것을 ‘실존적 ㅇㅕㅇ토‘로 구조화한다. 만약 정동이 강도라면, 리토르넬로는 “순환하여 되돌아온” 정도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237

볕뉘 2. 감정차원, 얼굴차원이 있다는 소리가 마음을 끈다. 어찌하다보니 또 다시 가타리로 돌아온다.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난 것들이 많은가 보다.

리토르넬로가 ㅈㅓㅇ동적 힘을 재편성하는 데는 기호 체계와 표현의 ㄱㅣ존 범위, “이미 분류된” 것들을 “분자적으로 파괴”할 것을 요구한다....이러한 정동적 강도는 변형과 ㅅㅐ로운 삶의 방식을 위해 담론의 질서를 송두리째 엎어 버릴 수 있다....공격은 말 그대로, 영토와 함께 온다. 그러나 ㅁㅓㄴ저 ㅇㅕㅇ토, ㅈㅡㄱ 영토의 표현적인 기반이 형성되어야 ㅎㅏㄴ다. 형성된 후에도, 영토들은 항상 허물어진다....느낌은 감정을 ㄱㅏ로지르며 재배치하는 ㅅㅐㅇ각들이 복잡하게 꼬인 시ㄹ 뭉치이다.....정동은 ㄷㅏ시금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ㅎㅏ나의 상태라기보다는 계속해서 “한 ㅅㅏㅇ태에서 다른 ㅅㅏㅇ태로 가는 과정”이다. 이것이 거시 정치와 ㅁㅣ시 ㅈㅓㅇ치를 바ㄷ치는 ㅈㅣ렛대이다....가타리에게 정동이 전부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로의 미학적인 접근이 대두하는데, 이는 곧 ㄱㅏ타리가 감각작용과 창조 ㅁㅗ두를 가장 중요한 거ㅅ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주체성의 다수성을 가능하게 ㅎㅐ준다...가타리가 ㅅㅏ회적 실천 속에서 정동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실천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이다.가타리는 “윤리-미학적 패러다임”dㅡ로 정동을 받아들인다.. 238-241

마수미는 정동이 “세계를 결합시키는 보이지 않는, 횡단 ㅅㅏㅇ황적인 접착제”라고 말한다. 가타리에 의하면, “정동은 ㅈㅜ체성에 달라붙는다. 그것은 접착 물질이다” 정동은 ‘듣는 자‘에게 만큼이나 ‘말하는자‘에게도 ‘달라붙으며‘, 공감 속에, 욕망 속에, ㅇㅣㄹ반적인 ‘ㅈㅓㅇ동의 전이적 특성‘안에 박혀 있다. 이로 이ㄴ해, 복합적이며 개방된 정동적 지식이 “다극성의 정동적 구성”속에서 ㄸㅓ오른다. 265

생동권력 혹은 생체 권력이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정동의 전송, 운동, 균열, 반향이다. 이러한 권력 형태들은 정동의 ㅎㅣㅁ을 저지하거나 지시하는 게 아니라, ㅈㅓㅇ동의 힘과 결합하여 작용하면서, ㅅㅣㄴ체가 ㄱㅜ성체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물질적-정동적 과정을 강화하고, 다수화하고, 스며들게 한다. 270

인간을 개별 유기체로 보는 관념에 드러난 유한한 총체성이나 본질로 생각되기보다는, 가능성들을 감싸고 있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비주관적 힘으로 출현한다. 이것은 또 브라이언 마수미가 정동을 활력적인 차원 내지 ‘능력‘으로 정의하는 반면, ㅈㅓㅇ서란 ㄱㅏ능태의 ‘잠재적 공존‘으로부터 ㄱㅣ억,경험,사고, 습관에 ㄱㅣ반하여 정동을 선택적으로 활성화하거나 표현한 것으로 정의했던 관점이기도 ㅎㅏ다. 307

비록 정동을 이해하는 이러한 두 가지의 광범위한 방식이 매우 ㄷㅏ른 철학적 전제에서 시작된 것이긴 ㅎㅏ지만, 서구 합리성 비판의 궤적에 따라 인간을 다시 생각하는 지적인 프로젝트의 ㅈㅜㅇ심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다 중요해보인다. 308

정동을 타고난 것으로 볼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볼지, 정동과 인지, 정서, 감정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ㅎㅏㄹ지, 이러한 결정이 이론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어떤 함의를 ㄱㅏ지는지에 ㄷㅐ해 일치된 바가 거의 없다...이는 ㅈㅓㅇ동이론에 ㄷㅐ한 사고의 총체와 ㄱㅕ루어야 ㅎㅏ기 때문이고, 또한 분과학문들 사이나 심지어 그 내부에서도 공통분모 없는 불일치와 겨루어야 ㅎㅏ기 ㄸㅐ문이다. 309

볕뉘 3. 어쨌든 서구 합리성 비판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ㅅㅏ유의 비교를 통해 실사구시하는 입장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 또 하나하나의 분석하는 사고는 전체를 볼 수 없게 만들기에 거꾸로 거스르는 ㅅㅏ고는 결과물에 대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결국 구조와 내용에 도달하겠지만, 다른 ㅅㅏ유가 낳은 결과물을 보면서 다시 한번 드러나는 ㅎㅓ점을 되짚어봐야 할 것 ㄱㅏㅌ다.


담론적 실천에 의해 제공된 주체의 입장들에 대한 분석이, 결국엔 원래 포착하려고 의도했던 바로 그 역동성을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주체성을 기호의 장 안에서 다소 명백히 ㄱㅠ정된 입장으로 이해하게 되면, 모든 흐름과 변신이 사라지게 된다. 신체 또한 ‘안으로부터‘ 이해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담론이 새겨지는 표면으로 보이게 된다. “입장”이라는 개념은 그림에서 운동을 제거함으로써 생긴다. 371


정동적 탈출의 지속성이 언어로 옮겨질 때, 그것은 긍정적 함축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활력을 지각하는 것, 살아 있음의 감각, 변화 가능성을 지각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380 마수미가 신경학적 “0.5초의 차이”에 대한 논의에서 언급하듯, 이것은 우리가 적절히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뛰어넘어 “느낄”수 있음을 의미한다. 380

볕뉘 4. 초중반 번역의 문제인지 논문의 수준 문제인지 다소 버겁거나 지루한 감이 많았다. 과연 다 읽어내야 하는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처음에 갈무리한 원로와 대담으로부터 먼저 읽기를 시작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저자 별로 기복이 크다. 중간 교육학 비고츠키에 대한 언급도 많고 교사와 학생 상호인정하는 과정으로서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이 개념에 가까이 갈 수 있을 듯하다. 라이히, 그람시, 가타리 등을 다시 불러내고, 들뢰즈 역시 근대성을 추구하는 철학자로 읽는 면이 새롭다. 여기에서도 전체성에 대한 이해와 노력을 중시한다. 정동만으로 보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맥락을 먼저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스피노자로부터 시작하는 흐름들을 다시 읽어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물질과 기억의 베르그송을 이해하는 길이 거꾸로 여기에 있기도 한 것 같다.

볕뉘 5. 다소 장황하지만 학교 왕따의 문제를 갈기갈기 분리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모욕의 재생산으로 다시 보려는 노력과 사유의 연습이 또 다른 관점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조금 쉽게 생각해보자. 모든 것을 알고 꿰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현실을 낫게 알고 느끼고,그 느낌에 연동된 총체에 대한 관심이 또 다른 상상력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1980년대 중반으로 이론의 흐름, 연원은 거슬러 올라간다. 스친 앎들을 또 색다르게 엮을 필요성을 느낀다. 한해가 저물었다. 삶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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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31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가 공격하는 보수만큼 좌파들도 엘리트성에 갇히는 아이러니는 구소련의 관료주의가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붕괴의 요인이 되고... 개인의 영달과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 심리 때문에 보수화-엘리트성은 같은 카테고리에 묶이는 듯.

상상력에 대한 표현 정말 동감.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하지 않은 채 그 속에서만 동력을 구하려 하면 자체 붕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이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예술적 힘을 저도 좋아하지만 스스로를 가두는 한계는 있었다 생각합니다.

읽고 싶던 책이었는데 자세한 소개 감사합니다^^

여울님, 올한해 많이 힘드셨던 거 같은데, 2017년엔 한결 맘이 풍요로워지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건강하시고요^^

2016-12-31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나의 대상이 내게 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에 의해 수립되어야만 한다. 요컨대 내가 그것을 그 총체성 속에서 수립한 경우에만 그 대상은 총체적으로 나의 것이 된다. 완전히 나에게 속해있는 유일한 현실은,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나의 행위이다. 24

사물과 나의 관계는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응결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 관계를 순간순간 재창조한다. 어떤 관계는 죽고, 어떤 관계는 생겨나며, 또 어떤 관계는 부활한다. 끊임없이 그것들은 변화한다. 매번 새롭게 지양함으로써 그 지양된 것이 나에게 주어진다. 26

순간

나와 대상을 분리시키고 있던 이 거리의 덕분으로, 나는 대상 쪽에 몸을 던질 수 있어서 운동이며 초월성일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거리를 제거하자마자 나와 대상과의 이 응결된 결합체는 벌써 하나의 사물적 양식으로만 존재하게 된다.(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르스티포스로 시작한 오늘을 즐겨라하는 쾌락주의에 대한 반론) 32

그러나 고착되어 있는 순간은 결코 새롭지 않다.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순간은 새로워진다. 바로 ㅈㅣ금 출현한 형태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배경이 뚜렷하고 분명해야만 자신의 모습도 명확하게 ㄷㅡ러난다. 나무 그늘의 시원함이 귀중한 것은 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의 길가에서이다. 휴식은 고딘 일과를 ㅁㅏ친 뒤의 편안한 긴장 이완이다. 33 향락의 한순간 속에 모든 과거가 집적되어 있다.

나는 자신의 미래를 바라본다. 모든 ㅎㅑㅇ락은 내 기획을 앞으로 투사하는 기투이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서 과거를 추월하는데, 과거란 미래의 ㅇㅣ미지가 응결된 세계에 다름아니다. 34

사라ㅁ은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유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 사르트르(존재와무)도 밝혔듯이 인간 존재는 사물처럼 응고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ㄴㅗ력한다. 이것이 바로 기투이다. 인간 존재는 기투의 형태하에서 실존하고 있지만 그 ㄱㅣ투는 죽음을 향한 기투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목표를 향한 기투이다. 82

헌신

타인의 존재를 확립해 주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고, 그 도구를 사용하여 타인은 자기 자신을 확립한다. 오로지 그 자신만이 ㄴㅐ가 준 선물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를 만든다. 102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새로운 출발점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헌신에 대한 검토가 ㅇㅜ리에게 가르쳐 ㅈ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헌신한다는 ㅈㅜ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헌신이 내세우는 목적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ㅇㅜ리는 타인을 위하여 우리의 자유를 포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ㅎㅏㄴ 사람을 위하여 행동할 수도 없고, ㅇㅏ니 그 어떤 ㅅㅏ람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08

소통

나의 존재가 타인과 소통하는 것은 오직 내 존재가 관여한 대상들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보상되는 것은 ㅇㅏ니라는 사실을 감수해야 한다.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기획이 있고 어떤 기힉들은 한순간에 끝나기도 ㅎㅏㄴ다. 그러나 그 어떤 기획도 내 존재의 총체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총체는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24 우리는 행위를 ㅎㅏ고 있는 한에서만, 다시말해 분열된 존재 속에서만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 124

소통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우선 필요하지만 누구와 소통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소통할 것인지를 아는 일도 여전히 중요하다. 남들로부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아무 동의나 마구 구하는 것은 그 역시 ㅎㅓ영에 불과하다 125

행위

어떤 순간도 영원성에 합류하지 못한다. 황홀과 고뇌는 다시 시간 속에 자리 잡는다. 그것들 자체가 기획이다. 모든 사유, 모든 감정이 기투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인생은 전진이 아니라 순환이다. 152



자유는 선택하는 자유일 뿐,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 동시에 “실존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 왜냐하면 자유란 실존의 원초적 존재 양식이므로. 168

사르트르나 보부아르의 글에서 그냥 “자유”라고 지칭된 대부분의 주어들은 자유라는 추상명사라기보다는 실존적 ‘인간‘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 본문에 “인간은 신 앞에서 자유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 “자유”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한 기획을 앞으로 투사하는 실존적 인간‘을 의미한다. 170

인간에게는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영역도 있다. 태어난 국가, 부모, 외모, 능력 등은 선택할 수 없는 강제적 조건이다. 이것을 사실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와 사실성이 합쳐진 존재이다. 그러나 이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뛰어넘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주체인 나의 선택과 자유에 달려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내 인생을 선택하거나 살아 줄 수 없다. 174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를 투사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존재하게 한다. 한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함으로써다. 그처럼 사람은 자기 이상의 것을 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초월에 비추어서만 인간은 사물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초월의 한복판, 즉 중심에 있다. 인간은 우주, 즉 인간 주체성의 우주 이상의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없다.....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떤 해방이라든가 어떤 일정한 일의 실현이라든가 그러한 목적을 자기 자신 밖에서 찾음으로써라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또 초월성과 인간이 자신 속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우주 속에 처해 있다는 의미로서 주체성과의 관계, 그것을 우리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볕뉘.

0. 낯설 수도 있겠다. 철학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리오타르가 왜 철학을 하는가에서 말했듯이 끊임없이 반추를 거듭해 새롭게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1.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 민중사회학 강좌, 한완상교수의 강의는 인기가 있었다. 대형강의실에 학생들로 가득차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혈기충천한 대학 신입생은 국정교과서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이 한마디 말로 흔들렸고, 일상에 분개했다. 즉자적 존재, 대자적 존재. 그 말이 여전히 유효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대자적 존재로서만 자신을 위치지은 것은 아닐까?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국내에 잘못 소개되었고, 아직도 그러한 듯하다. 그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3권의 저작자이며 맑시스트라는 사실도 제대로 읽히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뭔가 쓰려고 했다면 명확한 목표물이 있어야 한다. 권총의 탄환에 비유하는 그는 대자와 앙가주망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너‘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2. 시몬드 보부아르의 이 책 역시 그 결을 같이 한다. 한 세대이상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에게 묻는 너에게 되묻는 즉자-대자의 물음은 유효하지 않을까? 철학이 늘 유효한 것처럼....우리의 일상은 무궁무진하다.

3. 모든 사람은 혼자다 - 몽테스키외는 자신만의 서재에서 모든 연을 끊고 홀로 지냈다. 글렌굴드도 모든 것을 끊고 자신의 음악을 온몸으로 연주해내었다. 스스로를 되묻는 일은 우주를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도 홀로 서지 않으려는 우리의 암묵적 증상을 깨뜨려, 너로 가려는 몸부림이자 또 다른 확장이지 않을까

4. 총체성, 전체성 - 이란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다. 전체를 조망하려는 끊임없는 사유이자, 대상의 너머를 보려는, 달의 이면을 보고자하는 변증법적 사유방식이다. 단순한 종합을 말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긴장들...분석과 해석의 너머 다른 사유를 찾고자 하는 디딤돌 같은 것이다. 뒷 장에 몇가지 개념을 훑고 읽으면 좀더 나은 접근이 될 것 같다. 시인들이 자신의 시집에서 즐겨쓰는 단어들처럼...몇가지 개념어에 충실해보는 것도 좀더 나은 철학읽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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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


시한테도 미안하고, 산문한테도 미안한 미시미산을 시산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틀이라는 것이 비의식, 무의식에 가까운 것들을 배경처럼 결정하기에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시산문의 여러편에서 말하고 있다. 중간 이피의 그림과 섞여있고, 시산문을 시로도 옮겨놓아 그 작업의 행간도 읽을 수 있다. ‘않아‘라는 필명으로 게시한 카페의 글에는 시간의 공백이 있다. 다름아닌 49일의 흔적이다. 죽음을 형상화한 시이다. 그 가운데 ‘아님‘이라는 시가 겹친다. 주문같은 시. 아님이 아닌 아닌 것이 아닌 아님은.......


시산문에는 유독 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누구 알아주고 규정하든 하지 말든 상관없이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하는 찰나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그녀의 시였다고 고백한다. 아닌 것은 아닌 것과 연결된다. 웅웅거리는 소리도 없는 것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들의 소리를 찾아내고 말로 다듬는 일. 말들을 조탁하여 언어를 만드는 일. 언어를 거르고 걸러 증류하듯 한방울 똑 똑 떨어지는 일이 시라고 말이다.


형상화되자마자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 늘 ㄷㅏ시 읽어도 다르게 읽히는 시들. 그것이 시라고 말한다.


그래서, 선입견을 버리기로 한다. 않아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어떤 직업을 가지든 시산문에서 말한 것들을 그대로 안기로 한다.


볕뉘.

청문회를 본다. 대선주자들을 본다. 국회의원을 본다. 사회활동가들을 본다. 페이스북 친구들을 본다. 마누라를 본다. 아이들을 본다. 일터 동료들을 본다. 나를 본다. 내 안을 들여다본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닌데..이것은 아닌데.....작품은 시의 집 안에 웅크리고 있어 시 밖으로 나오지를 못한다. 시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은 소리에 묻히고..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저편으로 사라진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시 밖으로 나오려는 언어의 산문은 확성기같은 정책의 소리에 묻혀 모기 소리만큼 앵앵거린다.


이렇게 맘마라는 소리도 못내는 이건아닌데 이건아닌데는 웅웅거리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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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사람이다 - 후장사실주의자의 소설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었다. 그러다가 시집을 한권 읽었고, 절반 정도 남은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를 마저 빠른 속도로 읽었다. 신경건축학란 새로운 학문이 다가온 것처럼 서문과 책날개는 설레발을 치고 있어 혹시나 했다. 성당, 도박장, 놀이동산, 할인매장 등등....빅데이터를 구하기 쉬워졌고, 뇌과학을 접목시킬 수 있어 이전에 감으로 느끼던 것이 명확해졌다. 이런 기술과 가상현실이 접목되면 놀라운 효율성을 가져오는데,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인간, 뇌의 가소성으로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조심스러운 우려가 있다. 하지만 과학과 건축 사이 여전히 사람이 있다. 흘러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이를 구별하게 만드는 사람말이다.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다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과정을 겪어내는 사람.

2. 관계 맺기 - 자아계발서인지 심리학서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자아계발서로 하면 더 많이 판매될 수 있다고 한 것일까. 컨셉은 온통 이 분위기이다. '발라낸 자아'는 더 없이 위태로운가. 서두에 은밀한 동반자로 11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내부에 이런 마음속 동반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유형을 파악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서기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한다.

 

3장은 그래도 보아줄 만 할 것 같다. ‘자아의 근원은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온다‘, ‘다른 사람없이 나도 없다‘ ‘다른 사회적 존재들이 없이는 자아는 감정도 형성할 수 없다‘라고 하며 '발라낸 자아'는 있을 수 없다라고 한다. 갓난아이가 부모와 관계로부터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적인 자의식은 저절로 생겨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자의식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매번 변한다. 자아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라던 철학자 토마스 매칭거의 말은 지극히 일리가 있다. 196‘  

며칠 전 페이퍼에 언급한 생산주의 자아와 소비주의 자아가 겹치기도 한다. 자본주의 초기의 가치나 개선을 해나가려는 생산주의 자아가 이제는 ‘소비주의 자아‘로 산개해서, 뿔뿔히 흩어지고 통일성조차 찾기 어려워졌다고 말이다. 테리이글턴이 그런 자아로는 지성적 진화주체로 설 수 조차 없다라고 했다. 현재의 무한 반복이라고 말이다. 자아는 갈 곳을 잃어 더 이상 존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일의 늪, 성과의 늪과 자학적인 채근의 반복. 결국 돌아오는 것은 유사번아웃증상들이다. 곁의 관계는 사라지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나로 고립되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집요하게 자아를 사물로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고정된 무엇으로 사회성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발라낸 자아'와 개인의 신화나 이데올로기로 모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주제의 3장과 다음 장은 갈등, 그리고 이별로 책을 구성하고 덮는다. 이 책 역시 교육학, 사회학, 심리학, 행동연구, 신경학 등등 다른 학문들의 흐름들을 차용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복잡한 표현들을 쓰기는 하지만 아들러의 저작에서 자신을 보는 관점, 사람들 사이 차이점, 관계를 맺는 법 등에 대한 설명보다 기본적인 사항들을 훨씬 모호하고 어렵게 설명하고 있다. 결론은 독립된 자아를 잘 간수하는 것으로 끝내는 그냥 자기계발서인 것 같다. 너에게 향하는 방점이 희미하기에 말이다. 그래 만국의 삶이나 살아가기가 비슷한 걸로 결론내자. 이 하늘 아래서는. 잠정적으로 자아에 대한 가치 전도가 필요한 것으로...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없다고 말이다. 사회 관계도 말이다. 잠정 결론이다.

3. '이틀' - 양말공장 상무(50대후반)의 의도치 않는 이틀동안의 땡땡이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목련이 나온다. 이삼십년을 연립주택에 살면서 한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목련나무를 보면서 아이에게도, 할머니에게도 묻는다. 정말 여기에 있었느냐고 말이다. 젊은 작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짧은 단편에 싣고자 했다. 그래서 그 이틀은 호흡이 가쁘다. 땡땡이 치고 싶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아마 50대 중반쯤이 되어서야 느낄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연민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디테일은 연민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볕뉘. 후장사실주의자. 도대체 뭔말일까 궁금했다. 후장사실주의자들이 있다는 서점주인의 말에 갸우뚱했다. 후장이란 내장 마지막부분..음 그러니까 막장같은 것인가 보다...사실주의? 리얼리즘....1920년대 초현실주의가 판을 치던 때, 이 흐름에 맞서 잡지 한권을 낸다. 이백여부를 만들었지만 팔린 것은 이십여권..그것도 주거나 강매한 것들....정작 보게하려는 농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들 불쏘시개로 쓰이는 그 잡지가 유일하게 한권 남아...한 비평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후장사실주의....그러니까 초현실주의에 맞서는 뱃 속 저 막장이 찌릿해져오는 리얼리즘. 허구이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같은 기록문화를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나름 해석했다. 이 역시 잠정적이지만...그 작품이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단편이다. 새서울백지화계획도 나오고 영친황의 손자 이구도

나온다. 무수한 참고도서도 나오고, 이 저자를 인터뷰하다 후장사실주의자가된 평론가도 나온다......건축, 공간......사람.....환대.......우리는 어쩌면 시공간도 이론도 관계도....모두 낭떠러지같은 위기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디쯤에 있는지조차도.....뱃 속 저릿한 생각들이나 일들은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여기 저기, 저기 여기일까.....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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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원에 커피 오지, 막걸리 오지, 안주 오지. 이쁜 아가씨까지 와서 술도 따라주고 놀아주지...2시간 남짓 앉아 있으면 2만원 정도 더 주지만...텅빈 들판에 오토바이 소리 나면서 들판 어른들 다 신났지 뭐.”

논두렁 밭두렁에서 ㄷㅏ방을 이용하는 주 고객은 70-80세 노인들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과도 다 떨어져 살고 있는 노인들은 몸이 허락하는 한계 안에서 근근이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꾸리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로 표현하는 관계의 단절, 혼자 ㅅㅏㄹ다 죽는 ‘무연사회‘가 먼 일본의 일만은 아니다.

사회보험을 통해 사회와 공동체가 수발을 부담하자는 취지로 2008년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만 할 수 있는 제도적 한계는 농촌의 변화무쌍한 삶의 리듬을 따라잡지 못해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통적으로 노인수발을 담당해온 가족과 여성을 대신해 다방 아가씨들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것을 신속하게 제공해주는 ‘효율 성적‘ 측면에서는 다방을 따라잡을 만한 제도가 없다. 단골을 만들려고 하는 서비스겠지만 집을 청소해주고 반찬도 만들어주고, 지나가면 꼭 인사하고 가는 이들이 매일 노인들 사이를 오간다.

“다방 아가씨들의 잔소리에 자주 씻고, 면도하고, 옷도 깔끔하니 입고 다니는 노인들을 보면 다방 많은 것을 동네 흉으로 볼수만은 없다.” 기계다방 골목을 걸으며 The U&I 잡지에서


볕뉘.

0. 버스 기계정류소에 내리면 500미터 사이에 다방이 20여개나 있다한다. 이 에세이와 이어지는 꽁트를 읽고 잔상이 남아 이렇게 옮긴다.

1. 어떤 생각이 드는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농촌마다 가을추수? 농작물 수확기마다 다방이 곳곳에 생기면서 푼돈을 훑고 지나간다는 이야기.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늘어간다. 어떻게 여기시는가?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2. 생기와 감정 -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제도가 이런 것들을 문서화할 수도, 흐름도 만들 수 없겠지. 살아간다는 것,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이렇게 또 한해가 지나가듯이 흘러가는 것이라면...이성과 냉정의 공무원 스타일 일처리로는 감당하더라도, 감당하고자하는 공무원은 왕따이거나 과로로 쓰러질 것이다. 스러지는 삶들은 애정을 갈구한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삶의 건기를, 건조한 하루를 어떻게 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3. 구매자는 남성이 대부분일 것이다. 낙원다방, 새끼쳐서 다른 다방을 차린다해도 근근히 풀칠하는 정도일 것이다. 인생에서 갈 때까지 간 사람들일까. 궁금하다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 감정서비스와 감정노동...그야말로 창조경제인가...그 시장을 찾아냈기에 상이라도 주어야 하나...

4. 인생에 유치한 것은 없다. 냉정한 행정이 읽지 못하는 곳. 순환되는 감정의 흐름을 읽을 수는 있을까. 그렇게 하면 해석이 달라지나. 감정과 활력...우리는 그런 것을 쫓기나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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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6-12-21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르신들이 환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라,
할말이 아주 많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말줄임표로 대신합니다......
생기는 들고남이 있어야 하고, 반대로 감정은 차오르고 넘쳐야 흐를 수 있는거겠죠.
생이 아닌것을 사, 진짜가 아니것을 가짜라고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얘기되어질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아픈 생각거리를 던져주셨습니다..

여울 2016-12-22 08:13   좋아요 1 | URL
그쵸. 쉽지 않은 문제죠. 이성이라는 것은 사후약방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떠나가거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나 그림자같은 것은 아닐까. 감성이라는 것이나 활력이라는 것이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다면 떠오르거나 떠오르는 것들을 예비하는 것은 아닌가. 그림자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차오는 것에 눈여겨보면 어떨까. 다가오는 것들의 정경이 서서히 선명해지고 뚜렷해지는 것은 아닌가. 사후의 지적질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닥치는 것, 다가오는 것에 대한 감수성은 자랄 수 없는 것일까....안개같은 얘기만 자꾸 하게 되네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말줄임도 못하고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