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들은 각자의 지도력, 지위와 권력, 정직성, 감정, 성격, 성별, 나이, 사회적 계층, 격식을 차리는 정도, 조직 내의 서열관계등에 따라서 기능어를 다르게 사용한다. 결국 이렇게 사소하고 숨어 있는 단어들이 우리의 정체성, 성격, 사고방식, 심리 상태, 타인과의 관계, 상대적 지위 등을 훨씬 더 많이 드러낸다. 우리 뇌는 이런 단어들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 <미묘한 힘>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10

단어 분석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심리학책이다. 언어학자들은 주로 언어 자체에 관심을 보이는 반면, 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그들의 심리 상태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에 관심이 있다. 이때 단어는 사람들의 생각, 감정, 동기, 사회적 관계 등을 알아내는 강력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11

여자들은 <따뜻한 우리>를, 남자들은 <거리감이 느껴지게 하는 우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재미있는 단어인 이유는, 이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절반이고 말하는 사람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데 쓰이는 경우가 절반이기 때문이다. 13

권력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명사 그룹에 속하는 단어들을 더 많이 사용하고 권력과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대명사와 동사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 따라서 우리는 대명사의 사용을 통해 동료들 사이에서 자기가 제일 서열이 높다고 혼자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도 있다. 13

진실을 말한 사람은 거짓을 말한 사람에 비해 더 많은 단어, 더 어려운 단어, 더 길고 복잡한 문장을 구사하고 더 적은 감정 단어를 사용한다. 또 <나>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많이 언급한다. 특히 무죄로 밝혀진 사람들은 1인칭 단수 대명사를 훨씬 많이 사용했다. 15

억제된 권력 동기를 발견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이 부정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16

대입 논술에 구상명사와 어려운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현재형 동사와 대명사를 적게 사용하면 이후 대학생이 되어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이는 더 똑똑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교육 체계가 사물과 사건을 범주화하여 생각하는 ㅅㅏ람에게 ㄷㅓ 유리하기 때문이다. 17

사람들은 긍정적 경험에 대해 쓸 때 <우리>라는 단어를 특히 많이 사용한다. 행복할 때는 구체적 명사를, 슬픔과 분노에 차 있을 때는 인지적 단어를 많이 쓴다. 18

나의 접근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 중에는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인지 과학자 스티븐 핀커, 사회 언어학자 데보라 태넌, 인류학자 애나 비어즈비스카 등이 있다. 19

기능어 사용은 기본적인 사회적 기술을 갖추었다는 표시다. 이와 반대로 명사와 동사에 대해 말하려면 어떤 문화에서 공유하는 범주와 단어의 정의를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62

1.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나>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2. <우리>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는 남녀가 같다.
3. 긍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의 사용 빈도는 남녀가 같다.
4.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인지적 단어를 ㄷㅓ많이 사용한다.
5.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사회적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246-249

남ㅈㅏ들은 자기가 마주치는 사물의 수를 세고, 이름을 붙이고, 체계화함으로써 자기 세계를 여러 범주로 나눈다. 반면 여자들은 주제를 ㄱㅐ인적 문제로 바꿔 생각할 뿐만 아니라 주제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더 역동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따라서 변화에 대해 말하려면 동사가 ㄷㅓ 많이 필요하다. 250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감정이 삶에서 더 중요한 부분이 된다고 본다.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 상태에 ㅈㅓㅁ점 더 많은 관심을 쏟음으로써 감정을 더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결국 부정적인 감정을 덜 느끼고 더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70세가 넘으면 친구가 ㄷㅓ 적어지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 관계망은 더 튼튼해진다. 265

2.

 

 

우에노 지스코의 느낌을 팝니다.와 중년은 처음이라는 책을 욕실에 두고 조금씩 본다. : 앞의 책은 별반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 없어 중동에 그만두었는데 인상깊게 읽었다는 일인으로 인해 관심을 조금 넓혀본다. 두 번째 책 역시 생활과 삶에서 그 주제 역시 남녀차이가 크가 나지 않는 것 같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노익장을 발휘하는 철학자나 올리버색스의 전기들만 살펴봐도, 말년이 때론 세련미와 숙련미에서 남다르다. 그런 혜안 역시 중년을 중년답게 보내는 기술들의 축적이기도 하겠다. 중년이 되자마자 조로하여 어른이로 가득찬 지금여기가 숨막히기도 하지만, 그런 ㅇㅓ른이들은 강박처럼 젊음만을 쫓으려한 연유때문인 것 같다. 마음의 젊음은 잊고 포르말린에 잠긴 젊음과 건강만을 추구하기에 벌써 ㅁㅏ음은 파뿌리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예의를 차리자란 ˝매너를 지켜주시겠습니까˝란 책자 가운데 ㅎㅏ나가 자주가는 상점에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발견했을 ㄸㅐ 껄덕대지 않는 기술이라고 굳이 적어둔 기억이 난다. 늙어가는 것. 늙어간다는 것. 압축근대화의 물결에 정신들도 차리기에 버겁지만, 그 결들을 발견하는 풍요를 누리는 법도 일찍 알아두면 나쁠 것도 없을 것 같다. 일본와 우리 사이는 10-15년이란 삶의 격차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 같다. 말년의 양식이 아니라 중년의 양식이라는 것 삶문화로 틀지어지는 것. 한번 생각해봄직 하지 않을까? 아직도 많이 남은 말년을 위해서라면... ...

3.

늙어가는 것을 너무 경멸하는 것은 아닐까? 정신없는 청춘이 그림자의 여운처럼 기억의 뒤편에서 꽃피듯이, 젊음도 하나둘 늘어나는 희끗희끗하는 흰 머리결 속에서 찬란해지기도 하는 법은 아닐까? 지금 여기 여성 남성 단어의 결이 아니라 빼앗긴자들의 행성에서 나뉘는 ㄸㅏ뜻한 <우리>의 단어를 많이 나누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쓰는 단어의 3할이라도 바뀌는 삶들을 꿈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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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나니
읽다가 보지 못한
시인의 동선과 호흡이 콕콕 박힌다

사월을 노래하기가 쉽지 않고
노래하는 김사월의 음색은 쿡쿡 박히고
이렇게 절창의 사월로 채우기는 더 쉽지 않고

메워진 틈은 더 벌어지는 에이,프럴

시가 어렵다는 사람에게
시집을 선물하며 꼭 쓰는 말이있다는
지방의 등단하지 않는 한 시인은

‘삶은 더 어렵다‘고...더 어려운데
‘시가 뭐가 어렵냐?‘
고 쓴다.
그말을 들은 나는 그 말을 꼭 써먹어야지 한다.
시는 이리 손 쓴 것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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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3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삶을 고요하게 흥분시키는 것들 중 하나는 너 자신에게서 잠시 떨어져 서서 너 자신이 아름다운 어떤 것의 창조자가 되는 것을 차분하게 살펴보는 일이다. 그것이 단지 흩날리는 재일지라도 말이다.”

더욱이, 댄디즘은 정치적이지도 현상학적이지도 않은 예술의 개념을 사용한다. 댄디들에게 예술은 아름다움, 외양 그리고 치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학적인 삶은 아름다움을 보여 줄 수 있는 지표가 된다. 그러므로 댄디즘은 예술로서의 삶으로 유혹하는 그러나 오도하는– 매력적인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의 미학적인 이상은 참여에 대한 모든 욕구를 단념하는 것이다. 그 참여가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그 외의 것이든 간에 말이다.

니체는 신을 믿을 수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꾸며낸 존재로 이해하는 신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자기는 확고한 데카르트적 주체가 아니라 생산되고 형성되며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는, 실러에게서처럼, 우리가 완전한 도덕과 시민성을 끝까지 함양할 수 있도록 만드는 미학적인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중반의 댄디들의 경우와 같이, 우리는 예술작품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확고한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기는 항상 우리의 개성과 예술작품의 동일성이 잘해야 규제적인 이상이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되는 과정 중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들 또는 자아에 대한 이전의 우리의 확신을 상실하고, 자기는 창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아래에서 보게 될 것처럼, 자기 창조를 위한 목적뿐 아니라 수단 또한 대부분 예술과 미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며, 또한 시인이면서 배우이고 관객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적인 예술가는 그의 작품과 하나가 된다. 비극배우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작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근원적 연합이라는 최상의 환희를 위하여 모든 자연의 예술적 힘은 이 격렬한 도취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예술가는 잠깐이긴 하지만 예술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능력을 소유한다. –예술가는 예술을 위한 매개일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예술이 될 수도 있다.

철학자와 예술가의 우아한 춤과 비슷할 것이다. 학문과 예술, 냉엄한 진리와 가상은 변증법적으로나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3의 상태”, 대립되는 영역들 사이를 종합하는 예술을 통해서 합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의 예술이 철학이다……-우리에게 우리 자신인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빛과 불꽃으로 변화시키는 이 삶은 또한 우리와 만나는 모든 것, 그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특정한 생리적 선결 조건이 필수 불가결하다:도취……도취의 본질은 힘이 상승하는 느낌과 충만함의 느낌이다. 이런 느낌에서 우리는 사물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물들에게 받기를 강요하며, 사물들을 파괴한다–우리는 이 과정을 이상화라고 부른다.

보다 암시적이고 구체적인 어조로, 니체는 명백하게 삶의 기술이 존재의 사소한 것들”, 우리의 식습관, 즐거움을 주는 것들, 가치들, 실수들, 목적들 그리고 우연한 사건들을 선취하는 것임을 증명한다. 삶의 기술은 이런 다양한 존재의 차원들을 예술과 학문의 이중적인 힘으로 지배적인 새로운 이상에 맞춰 변경하는 것이다. 자기 실험과 자기 생산을 위한 근본적인 요소는 삶 그 자체의 사소한 것이다. 오직 일상의 삶의 다양한 양상들을 지배하고 변형시킴으로써 우리는 완성가능성과 특별한 이상을 지향하는 삶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니체의 학문 개념에서 비판개념으로 그리고 가상으로서의 예술에서 혁명으로서의 예술로의 변형을 드러낸다. 예술로서의 삶에서 저항의 계시는 예술 그 자체 안에서 발견되는 부정성에 의해 고양되고 주체와 파괴된 객체의 관계를 다시 구상하는 사유의 부정적인 형식들을 위한 가능성에 달려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창조적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것들을 강제하는 사유방식과 존재방식을 극복해야 한다. 주체와 인식된 객체의 잘못된 동일성에 반대하는 사유는 우리가 억압적이고 정의롭지 않은 사유방식과 존재방식의 해체를 시작하는 수단이 된다.

부정 변증법이 사유의 자기 반성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사유가 참이려면, 어쨌든, 오늘날에도 사유가 참이려면, 사유는 또한 그 자체에 반대하는 사유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함의한다. 만일 사유가 극단적으로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그것은 친위대가 희생자의 비명을 들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 즐겨 사용한 음악과도 같다.

만일 예술이 잘못된 객체성 또는 주체성에 빠진다면, 예술은 선전이나 나르시시즘이 될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실재에 너무 많이 의존하거나 너무 조금 의존하는 일 없이 사회적인 비판을 유지하는 능력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전의 부정적인 사유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본질적으로 저항이다.

예술작품은 그 자신을 넘어섬으로써, 즉 그것의 고유한 주체와 객체의 매개를 넘어섬으로써, 초월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술작품이 그것의 실현되지 않은 부재, 모순 그리고 가능성들을 해명하는 허구 또는 가상을 통해야만 하더라도 말이다.

예술이 완전하게 경험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분석을 통해서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만일 그것이 완전하게 경험되는 것이라면, 사유를 필요로 하므로 다른 것이 아닌 모든 제한을 거부하는 사유인 철학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 자율적인 반성의 가장 유용한 수단인 예술작품은 그것의 실천적인 중요성을 이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한층 더 비판적인 사유를 요구한다.

예술작품(그리고 그것에 의해 미학적 이성)은 역사, 사회 그리고 주체성에 대한 편전을 통하여 부재를 변증법적으로 확인함으로써 객체들에 대한 잠재적인 변형과 객체를 그것의 충만함에서 보도록 만드는 실재에 대한 개혁을 시사한다. 애도의 행위와 그것의 긍정적인 전환은 예술에서 이 치유적인 운동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일련의 개념들을 확장시킴으로써 아도르노의 중심개념인 형이상학과 동일시된다. 왜냐하면 아도르노의 형이상학이 현재의 부정성과 긍정성을 고려하고 그것들을 넘어서 사태의 다른 측면들을 보여 주는 사유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형이상학이 숙고해야 하는 것은 개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로 자기 자신 너머를 볼 수 있는가이다.” 요컨대 형이상학은 소망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를 초월하는 능력은 결국 아도르노의 형이상학개념이 되는 미학적 추론의 특징이다. 예술작품에 의해 조성되고 미학에 의해 소생되는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은 변화되고 희망적으로 회복된 미래를 설정하기 위해 현재하는 실재에서의 부재를 입증한다. 이런 점에서 형이상학은 미학적 이성의 필연적이고 실천적인 결과물이다.

아도르노에 의해 제시된 형이상학은 구체적이지도 실천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상상력의 작업으로 계속해서 무산된다. 이런 의미에서, 아도르노의 많은 작업과 같이, 형이상학은 대체로 실전적인 충족을 필요로 하는 초-이성적 개념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기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마르쿠제는 암암리에 아도르노의 미학과 규범적인 인식론의 많은 부분을 제 것으로 삼아, 저항적이면서 즐겁고 정의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그리고 마르쿠제는 그렇게 하면서 미학이라는 개념을 그것과 부정 변증법과의 순수한 결합에서 그 개념의 그리스적 근원인 아이스테시스, 즉 감각성과 느낌이라는 방향으로 수정한다. 마르쿠제는 미학에 대한 이 두 번째 정의를 통해서 현재의 현실들과 단절한 진보된 사회를 위해 더 큰 평등과 기쁨 그리고 고통과 부정의의 축소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가라는 새로운 명령을 전개한다. 이 개념은 결국 산업주의와 과학기술의 방편들을 폭력과 압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희망을 위해 사용하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라는 마르쿠제의 개념이 된다.

마르쿠제의 맑스 독해에 따르면, “올바른 이론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실천에 대한 의식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러한 변화된 세계라는 목적은 부르주아적인 산업주의에 의해 창조된 물질적인 잉여를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위한 양질의 삶이 무엇인지 긍정적으로 다시 구상하도록 만드는 것이 된다.

인간의 행복에 관한 관심과 개인의 해방을 획득하는 데에 필요한 구체적인 물질적 조건들에 대한 이해, 이 모두는 마르쿠제의 사유에 가득하다. 이와 유사하게, 더욱 확장된 맑스와의 만남 이후에,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작업을 그의 기획에 긍정적으로 전유하려는 시도에 착수한다. 예를 들어,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현실 원칙이라는 개념을 진보된 산업사회에서 수행 원칙으로 재해석한다. 그리고 억압적인 합리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강조는 보존하되 그것을 생산성의 현대적 기준에서 고려한다.

관건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을 소비하고 무엇이 그들의 걱정거리와 의욕을 차지하는가이다. 마르쿠제는, 이를 위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형태들을 개선하고 그것들을 다른 삶의 방식, 스스로 선택하고 즐거움을 주며 정의로운 삶의 방식들로 대체하는 야심찬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꿈은 인간의 조건들을 상상하는 것이기보다는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어야 한다. 꿈은 정치적인 힘이 되어야 한다.” 또는 더욱 명시적인 언어로 말하면, “예술작품은 현실의 지배적인 질서를 변형시킨다.” 마르쿠제는 명백하게 예술을 정치적인 행동에 필요한 비판적 의식의 발전에서 주요한 요소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혁명적인 기획의 부분으로 이해한다. 아도르노가 미학과 부정 변증법이 형이상학으로 끝나는 데 만족했던 반면에, 마르쿠제는 정치적인 차원을 미학의 핵심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이 마르쿠제의 공식적인 설명에서, 감각적인 사태는 또한 예술작품에서 단순하게 표상되는 것이 아닌 해방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성은 예술작품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에 정치적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은 세계에 대한 표상과 감각의 해방 사이의 주름을 가로지른다. 후자의 의미에서 예술은 인간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끼고 볼 수 있도록 만든다. 마르쿠제의 예술의 두 번째 차원에 대한 이 독해는 그리스 전통에서의 아이스테시스의 개념들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예술과 미학의 자율성을 윤리적 요구와 연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추가적인 이로움을 가지고 있다. 미학을 감각성을 포함하도록 확장하는 것은 정치적인 혁명에 대한 요구가 미학적 부정성과 그것의 형이상학적 차원에 놓여 있는 이론적인 기초와 연결되는 마르쿠제의 사유에서의 중요한 변화를 나타낸다. 이런 방식에서 이해된 미학은 감각의 해방에 대한 요구를 포함해야 한다.

그는 이 슬픔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래서 새로운 과학기술적인 일-세계는 노동 계급의 부정적인 태도를 강제로 약화시킨다. 후자는 더 이상 확립된 사회의 삶의 모순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만일 노동 계급이 더는 확립된 질서를 부정할 수 없다면, 미래에 대한 미학적 충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필요에 대한 만족에 근거하는 마르쿠제의 미학적 사회라는 개념은 실현되지 않는다는 심각한 위험에 처한다. 만일 미학적 의식의 임계량을 창조하기 위한 가능성이 억압된다면, 미학적 삶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그러나 마르쿠제가 사회 개혁을 위한 토대를 진보된 산업사회의 부와 수단적인 합리성에 대한 거절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았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오직 문화, 물질주의 그리고 정치의 복잡한 관계를 해체함으로써만, 우리는 사회 그 자체의 물질적인 토대들을 바꾸는 체계적 변화를 정초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미학적 추론과 그것의 일상적인 대상의 가치 그리고 가능한 구원– 에 대한 관심을 통해 시작해야 한다.

비판이론이 예술로서의 삶에 해방과 정의를 위한 추동력을 제공한 반면, 현상학은 세계에 관한 생생하고도 신성한 체험의 가능성을 엿본다.

그리고 수많은 서구의 사상이 지배와 억압으로 형성되었다면, 시도 잃어버린 것을 복원하는 능력을 가진 비판적 사유와 동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판적 사유가 저항으로 얻어진 것인 반면, 시는 복원과 긍정으로 돌아간다. 시는 그것이 치유적이고 소통적인 것인 한, 시는 복원과 긍정으로 돌아간다. 시는 그것이 치유적이고 소통적인 것인 한, 엔드레제의 산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부름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고 근원적 대상으로 통합된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데 필연적인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각 장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통 가까운 것에 더 관심을 가질지라도이러한 부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안식과 운동의 측면에 있는 대지라는 존재의 존재방식을 다시 배워야 한다. 이것은 그로부터 모든 안식과 운동이 분리된 토대인 존재이며, 신체를 구실로 삼지 않는 존재, 그것들로부터의 분할을 통해 도출된 원천으로서의 존재, ‘장소를 가지지 못하는 원천으로서의 존재이자 모든 장소를 에워싼 존재, 노아의 방주가 홍수로부터 살아 있는 피조물을 지켜 주었던 것처럼, 무를 넘어 모든 존재자를 지켜 주는 그런 존재이다.

인간이 그 눈과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인간은 성찰하고 애쓰고 건축하고 노동하며, 간청하고 감사하는 일에 자신을 넘겨주고, 그는 그러한 자신을 이미 탈은폐로 데려온 모든 장소에서 발견한다.” 성찰적 사유는 존재자와 세계가 부름을 받고, 심지어는 간청하며, 나타나는 과정이며, 곧 열림과 복종으로 받아들여진다. 성찰적 사유의 행함은 세계 앞에서의 간청과 굴복에 속하는 것이다.

사건은 분명해진 공간 안에 인간과 더불어 일어나는 존재자를 통해 존재를 허용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공간, 시간적 의미에서의 발생도 아니다. 오히려 사건은 비이성적이고 공간적이거나 시간적이지 않은 장소를 나타낸다. 이 장소에서 존재와 인간은 주어진 근거이자 사유하는 존재자로서의 그 본성 자체에 있어 서로에 대한 상호의존성 안에서 마주한다. 우리는 사건을 통해서만 사유할 수 있고, 이와 유사하게 존재는 사건을 통해서만 나타남 안에서 자신을 내어 준다. 이 경우 시와 사유는 사유와 나타남의 가능성을 모두 보호한다.

그것은 바로 체화된 시적 사유 안에 전조된 열림이 우리 주위세계를 압도해 버리는 어떤 경험을 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마리옹이 드러남과 같은 경험을 벼리어 내는 것과 관련해서, 나는 그러한 특정 경험이 개념화와 관련하는 우리의 능력을 압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점일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러한 논증의 노선은 메를로-퐁티와 하이데거의 노선을 유지하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주장이 특정 경험이 변혁적이면서도 경이로운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예술로서의 삶이 내재성에 대한 긍정을 확고하게 견지하긴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경외와 자기 초원의 가능성에 대한 여지를 열어 준다.

체화된 시적 사유가 내용을 특성화하지 않고, 현상의 잠재적 지평이 나타남에 관한 신체적 부름과 보호를 통해 밝혀지는 한, 그것은 포화 곧 계시의 경험에 개방적인 것으로 남겨진다. 체화된 시적 사유는 평범한 또는 비범한– 현상의 본질만큼이나 불가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술 작품과 계시의 유비적이고 기능적인 관계 때문에, 본질상 예술적인사유형식은 계시를 사유하는 가시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작품이 포화에서 자신을 개방하는 한, 예술작품 내에 있는 긍정적 요소를 그 자체로 모형화하는 사유방식 또한 일어난다. 왜냐하면 마리옹에게서 계시는 언제나 현상 내에 기재된 것이기 때문에 계시는 체화된 시적 사유 내에 있는 항구적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체화된 시적 사유는 특별히 선-반성적 감각 경험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다. 마리옹에 의하면, 모든 계시는 경험이 그 본질상 선-반성적인 방식으로 개념적 범주들을 압도하는 감각적 직관에 대해 잠재적이다.

오히려, 나는 계시와 같은 어떤 것이 일어난다면, 이 경우 체화된 시적 사유는 그 수용을 위해 필연적인 선행조건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싶다. 이처럼 체화된 시적 사유는 계시와 같은 어떤 것의 가능성으로의 단호한 개방성이다.

반향이 파괴로 나타날 때, 그것은 비논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간 조건의 통일성을 요구하는 것은 삶의 힘이지 죽음의 힘이 아니다. 그것의 가장 심오한 논리는 파괴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논리다. 본래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반항의 운동은 그것이 존속하고 있는 모순의 항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허무주의적 해석이 반항 속에 고립되는 아니오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담고 있는 예에 충실해야 한다. 반항의 논리는 인간의 조건의 불의함에 포함되지 않는 정의를 뒷받침하려는 것이면서, 보편적인 오류를 증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밋밋한 언어를 내세우는 것, 그리고 인간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위해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다.

혁명의 정신은, 만일 그것이 살아 있는 것으로 남아 있으려면, 반항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가고 그 기원에 충실한 유일한 사유의 체계에서 그 영감을 도출해야만 한다. 그것은 한계를 인정하는 사유다.” “한계를 인정하는 사유는 카뮈의 초기 저작에서 요청되는 투명한 사유다. 그런데 부조리의 경우처럼 한계에 대한 인정은 이제 역사 구조와 혁명의 정치 내에서 관찰된다. 우리의 한계는 더 이상 인간의 열망에 대한 추상적 부정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억압이다.

사유처럼, 예술은 중간 길을 확고하게 지지함으로써 그 자체로 유지된다. 비판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역사를 부정하거나 넘어서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부터 역사를 변형시키고 역사 내에 머무름으로써 자율적인 것으로 남겨지게 된다.

모든 반항 속에는 통일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요구에서 통일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불가능성과 대체적 우주의 구성이 발견된다. 이런 관점에서, 반항은 우주의 구성자다. 이것이 또한 예술을 정의한다. 반항에 대한 요구는 실질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미학적인 요구다.

우리는 만인 공통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예술가로서의 존재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힘이 닿는 한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순간에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입을 열어야 합니다.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국가나 당파가 과거나 미래에 있어서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술가에게는 가해자가 특권화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니체, 비판이론가들, 그리고 현상학자들이 모두 예술에 대한 미학을 지지한 반면, 카뮈는 헌신과 저항의 논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윤리적 미학을 제시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술작품에서 자율성과 연대성 간의 긴장을 강조함으로써, 카뮈는 미학적 수용과 생산의 윤리적 차원을 효과적으로 문제화한다.

카뮈는 이렇게 진술한다. “다만 실질적으로 헌신된 작가란 전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최소한 정규군에는 가입하지 않은 채 용병으로 머무르는 자입니다. 그가 아름다움 속에서 발견하는 교훈은, 이를 공정하게 이끌어 내자면, 이기성이 아니라 어려운 형제애라는 교훈입니다.” 물론 카뮈가 덧붙인 것처럼, ‘용병에게서조차, 우리는 억압에 대한 구체적 투쟁 속에서 발견되는 형제애를 경험할 수 있다. 실제로, 카뮈가 후기에 인정한 것처럼, 예술가를 통해 요구된 자율성은 박애 및 형제애로 이끄는 직접적 개임의 형식에서 발견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부딪히는 벽이 아닌 다른 문을, 출구를 찾지 맙시다. 대신에 전투가 한창일 때 한 번쯤 숨을 돌리도록 합시다.”

맞습니다, 맞고요라고 말했다. “당신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리유는 애써 웃었다. “인간의 구원은 나에게 너무 거창한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없습니다. 나는 인간의 건강에 관심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건강이 최우선의 문제입니다.”

아내는 결국 고독하거나 연대하거나라는 말이 적힌, 삭막한 흰 캔버스를 발견한다. 그 말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조나스의 작은 그림에는 조나스와 카뮈의 상이한 이상적 유형에 살아 숨 쉬는 비판적 긴장이 압축되어 있다. 우정과 고립 사이의 항구적 긴장 속에 만들어진 예술을 목표로 삼은 조나스, 그의 자기 의식적 표현과 소박함은 예술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와 자신과의 모순적 관계를 요약한다. 조나스가 보여 준 것처럼, 이러한 모순감은 양식화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절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예술가는 창조적∙고립적∙연대적∙저항적 실천에 착수하고 아스케시스[고행]과 연계된 자신의 반항의 한계와 위험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러한 실천들을 자기 안에 통합한다. 이 작업은 쾌락의 강화 내지 예술적 생산의 기획을 통해 해명된다. 요컨대, -예술가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실천한다. 카뮈에게, 이는 삶의 기술로 추출될 수 있다. “아마도 우리는 파악하기 어려운 다양한 부조리에 대한 느낌이 지성의, 삶의 기술의, 또는 예술 자체이 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활기차게 사는 것이 투쟁 속에서 기쁨을 갖게 한다. 투쟁 자체에서 과도한 부담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인간성을 즐겨야지 정치적 행동주의가 인간성을 탈인간화해서는 안 된다. 열정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동안 조금 떨어져 있어야 한다.” 열정적 분리와 기쁨의 저항이라는 동기는 동시다발적인 것이면서도 분리되는 것으로, 이것들에 관해 시바의 행동주의가 언급하는 바는 잠재적으로 예술로서의 삶을 위해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시바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저항과 긍정, 공동체와 자율성, 이와 동시에 부정성과 구성주의의 이중적이 미학적 의무를 이해한다. 그녀 이전의 디덜러스와 다른 이들처럼, 시바의 노동과 삶은 일견 대립적인 의무 사이에 있는 지점에 놓인다.

시바는 저항과 구성에 대한 기획을 작동시키고, 조나스와 조네프 그랑은 겸손한 이타주의의 삶과 소박한 예술적 추구를 양식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각각의 형태는 자율성, 연대, 그리고 창조성이라는 미학적 주제를 매일의 삶의 구조 속에서 엮어 내는 삶의 양식을 성취한다. 푸코가 주장한 것처럼, 주어진 자기가 부재하는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창조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행하는 작업은 발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효과적으로 형성해 내는 창조적 활동의 형식에 속한다.

푸코의 작업이 예술로서의 삶에 부여하는 바는 미학적 이성과 체화된 시적 사유를 위한 요구를 통합할 수 있는 더 넓은 미학 개념이다. 이는 일상적 삶의 다양한 구성요소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 요소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사∙성욕∙타자와의 관계∙노동은 자기 규제, 실험, 그리고 창조의 장소로 나타난다.

관계적인 권력을 형성해 냄으로써, 푸코는 권력을 일방향적 억압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서의 권력에서 행위자들이 서로와의 항구적인 투쟁 안에 존재하는 다차원적이고 다계층적인 전략적 지형에 속하는 것으로 그 작동 영역을 변경시켰다. 권력을 소유하는 군주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운 지점은 없다.” 권력은 권력과 관계가 이 안에서 획득되는 한 편재한다.

권력관계는 세포의 작동처럼, 느슨하게 조정되고 그 파생형식과 배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다양한 망의 집합을 통해 작동한다. 권력관계의 작동은 자연과 다양한 차원의 망을 기반으로 삼아 작동하는 여러 요소의 다중적인 망으로 제일 잘 묘사된다. 푸코의 권력관계 이론은 권력이 도입한 다양한 행위자와 전략 및 기예들 간의 복잡하면서도 이원론적이지 않은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삼는다. 우리 모두가 이 기반을 통해 행위를 하게 되는 다양한 가변적전략적 지형이 형성된다.

권력은 더 이상 직접적 개입을 통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별적으로 그것을 퍼뜨리는식으로 작동하며, 미묘한 강압, 메커니즘 자체–운동∙몸짓∙태도∙신속함–의 차원에서 존속되어 획득되는 것으로 작동한다. 즉 능동적 신체에 대한 무한한 권력이 바로 그것이다.” 신체는 가족, 우리의 일상, 수축 등을 통해서 열리는 권력의 다양한 작용을 위한 장소다. 권력은 우리의 습관, 몸짓, 말의 미묘한 강요를 통해서 작동한다. 실제로 권력은 우리가 살아가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소유하는 데 이르는 다양한 가능한 수단들을 통과하는 무한정한 관통의 노선을 인정한다.

권력관계는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자극하는 규범성의 생산적이고 발생적인 형식이다. 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차적 수단은 쾌락과 희열의 형식과 짝을 이룸으로써 존재한다. 권력은 규범화된다. 왜냐하면 권력이 생산하는 규범성의 형식이 쾌락을 일으키거나 흥미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용어로 권력에 대해 말하는 비판이론적인 성향에 반하는 권력관계는 권력과 쾌락의 영속적인 나선을 통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는 희열-처벌의 에워쌈을 통해 작용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권력관례는 주체들을 규범화할 수 있다. 왜냐하면 권력관계가 만들어 내는 규범성과 주체성의 형식이 우리에게 쾌락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진리를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권력체계와의 순환관계 속에 연결되고, 진리를 유발시키고 확장하는 권력의 효과들과 연결된다. 이것이 진리의 체계.” 진리가 권력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권력은 진리를 생산한다. 권력은 사회적 신체 내에 참된 담론들을 만들어 내고 담론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작동한다. 여기서 담론들이 포착되고 표현되며 다른 참된 담론의 주체가 형성된다.

저항한다는 것은 단순히 부정이 아닌 창조적 과정이다. 상황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것,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실제로 그 과정의 능동적 일원이 된다는 것인가?” 이에 푸코는 답한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내가 제시한 방식이다.” 저항은 창조적이다. 왜냐하면 권력이 개인들과 행동들의 생산을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테크네[기예]는 이제 자신의 욕망, 쾌락, 그리고 행동 방식에 대한 윤리적 주체의 작업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자기에의 배려는 실질적 만족의 삶을 생산할 수 있는 자연적 경제를 산출하는 고유한 행동, 곧 깎기, 정제, 그리고 조각의 은유를 요청하는 관념, 기술-제작이다.

그리스-로마 윤리는 결혼, 우정, 그리고 친척 관계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더 넓게 문제화하려고 한다. 우리는 자기를 드러내는 일로 타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이르러야 하고 그렇게 해서 잠재적 변형과 자기 양식화에도 이른다. 푸코는 이 새로운 실존의 양식자기로의 퇴거가 아니라 아내, 타자, 사건,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활동–그리고 쾌락의 주체로 자신을 간주하는 다양한 방식–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기술한다.

아스케시스[훈련], 더 나아가 사유를 통해 정의된 투쟁의 일부로, “이를 통해서 우리가 행위의 지속적인 원리로 진리를 변형하고, 흡수하고, 획득할 수 있는 일련의 실천이다. 알레테이아[진리]는 에토스[윤리]가 된다.” 아스케시스[훈련]은 우리의 활동성, 사유, 그리고 욕망에 주의 깊은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작동한다. 또한, 이 경우 훈련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변형해 낸다. 금욕의 윤리는 우리가 특수한 이념을 따라 자기 자신을 주조할 수 있는 방식을 향해 일관적으로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따라서 매순간, 절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하나의 색체, 형식과 강도를 부과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삶의 기술이다. 삶의 기술은 심리학을 제거하는 것이면서, 자기 자신 및 타자와 더불어, 개별성, 존재자, 관계들, 명명할 수 없는 성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나의 실존은 완전하고 숭고한 작품일 수 있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대상들에만 연관되고 개인이나 삶에 연관되지 않는 어떤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예술은 예술가인 전문가들을 통해 특수화되거나 시행된 어떤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삶이 하나의 예술작품일 수는 없을까? 등잔이나 집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왜 우리의 삶은 예술의 대상이 되면 안되는가?

현대의 미학 윤리는 저항에 추가적인 차원을 더한다. 그런데 그것은 아도르노, 마르쿠제, 카뮈, 심지어는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망각될 수 없는 것이고, 선견지명을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배의 최소화이다.

이러한 구속의 어조에 더해지는 것은 예술로서의 삶의 시간에 대한 재평가이다. 여기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긍정적인 가치와 무게를 가지게 된다. 세계를 향한 잃어버린 방향설정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함에 있어, 현상학은 본래적으로 현대에 무게중심을 두기 위해 과거의 생생함을 평가한다. 다른 한편으로, 비판이론은 현재 속 의미를 투사하는 것을 허용하기 위해 형이상학적으로 개혁된 미래를 전망한다. 또한, 미학적 윤리는, 그것의 모든 것에 선재하는 기능에 있어서, 자기를 미래 속에서 창조되는 것으로 보는 반면, 과거를 권력과 부조리의 관계를 분석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세 가지 계기들의 누진적 효과가 시간을 선사해 준다.

예술로서의 삶에서, 자기는 자기 자신과 세계를 체화된 사유방식과 실천을 통해서 형성해 내는 합리적 신체-주체다. 이 자기는 그 자체로 미학적 명령에서 모형화되어 감각화된, 계시적이고 전략적인 행동방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따라서 니체의 이상적 유형이 전조되어 있는 예술로서의 삶은 자기 창조와 변형의 실험적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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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격동 : 2 연민

감정이 윤리()에 어던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처럼 아무리 부분적이더라도 모두 에로틱한 사랑의 애증병존성과 과도함을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에로틱한 사랑의 제거가 과연 연민과 다른 감정을 그대로 놔둘지 의심할 수 있는 이유가 실제로 존재한다. 친구 사이의 사랑은 모두 실제로는 은폐된 에로틱한 사랑이라는 프루스트의 주장은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두 감정이 너무 긴밀하게 서로 뒤얽혀 있어 만약 에로틱한 사랑을 도덕()에 대한 위협으로 제거한다면 시혜적인 연민의 에너지를 계속 유지하기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고 본 것은 아마 맞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심지어 신스토아학파적 설명이라는 관점에서도 사랑에 대한 내러티브적 설명들에 특히 민감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감정 사이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또한 감정들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사랑의 다른 요소인 행위 및 상호작용과 관련시킴으로써 감정적 측면을 조명해줄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이미 성적 욕망 자체는 어떤 특수한 육체적 드러남이라기보다는 생각과 환상의 문제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그것은 에로틱한 사랑을 어떤 특수한 육체적 드러남에 의존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신스토아학파적 견해를 근본적인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에로틱한 사랑은 육체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도망치지만 용감한 병사(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이렇게 묘사할 것이다)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두렵지만 도망치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DJEJS 것이 사랑에 대해서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사랑은 종종 소유 및 통제 기획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도우려는 보다 호의적인 기획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비록 사랑에 대한 몇몇 유명한 설명은 그러한 기획을 사랑에 대한 규정의 일부로 삼지만– 아마 그 대신 말해야 할 것은 사랑은 가장 경이롭고 가장 중요하며 자아에 의해 절실하게 요구되는 대상에 대한 특수한 종류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도하게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고, 복수심에 불타거나 편파적이지 않도록 그리고 일반적인 사회적 연민, 상호성, 개별성에 대한 존중을 지지하도록 하려면 사랑은 어떻게 자신을 갱신할 수 있을까?

불멸의 대상을 사랑하는 그녀는 세속적 재화에의 의존을 포기하고, 어떤 필멸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불멸의 자신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이 이행은 그녀가 일반적인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하고 원하는지, 어떻게 고통 받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중요한지를 보는 데는 그리 능숙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연민을 가혹하게 거절하고 비극 시인을 공격한 것은 플라톤의 등정 이야기와 동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의 방향 수정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등정을 마친 연인에게 굶주린 자들, 사별당한 사람들, 병약자들, 박해 받고 박해로 고통 받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었어야 할 때 외적인 것들에 아연실색한바보들처럼 보이며, 실제로 바보들이다. 임종의 자리에 누운 소크라테스는 동정을 꾸짖는다. 크산티페와 아폴로도로스 모두 방에서 나가야 했다. 눈물이 아니라 냉철한 논증이 세속적 고통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재앙을 넘어서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것을 우쭐대는 성향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적 연인은 그와 반대로 사랑의 대상을 소중한 속성의 처소로, 따라서 창조에 적합한 매개체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 자신의 주체성과 선택을 무시한다. –이 점은 오래 전에 블라스토스에 의해 크게 강조된 바 있는데, 그는 이것을 플라톤 이론의 핵심적인 결함으로 그리고 기독교도들이 진보를 이루어낸 핵심적인 영역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적 사다리에 오르는 순간부터 AM이 하거나 선택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찬양하는 명상의 대상이지 그의 독립을 그녀가 원하고 조장하는 의지가 아니다. 그녀의 명상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과학적 체계 또는 세계 전체의 미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궁극적으로 아무 차이도 없다. 이것이 정확한 이기심인 것은 아닌데, 플라톤적 창조성은 세계 전체에 아낌없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망한 태도이며, 따라서 공적 영역의 다른 시민들에 대한 태도의 무망한 토대이다. 시민들은 행위와 존재를 위한 노력들에서의 협력만큼 다른 시민들의 명상을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블라스토스의 견해를 들어보자.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의 처소로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 개인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포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개인들의 별개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후 아름다운 것의 모든 특수한 초소는 그저 텅 빈 용기처럼 보일 것이며, 거의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것의 모든 차원은 아름다움의 큰 바다의 방울들처럼 보일 것이다. 각각의 개인은 각자에 고유한 별개의 삶을 산다는 생각은 이 분석에서는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질적 변별성의 경우 플라톤의 등정은 훌륭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은 무시하며, 따라서 사랑에서 제외한다. –결함과 결점들, 중립적인 특이성들, 신체의 내력 등이 그것이다. 아주 철저하게 차이라는 사실 자체를 포용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오직 이상적으로 좋은 것과 같은 종류의 것만 좋아한다. 다른 부분들 너무나 인간적인 부분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은 포용하기를 거부한다. 이 거부가 비자유주의적인 완벽주의 정치, 외적으로 강요한 도덕적 표시와 함께 나타날 때만 시민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정치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등정은 또한 개인적 삶에서의 실제적인 인간 존재를 사랑하는 방법으로도 유망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소중하게 간직했을 속성을 네가 존중하는 한에서만 너를 사랑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는 자비를 위한 여지가, 불완전하고 취약한 삶에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감싸는 무조건적 사랑을 위한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치유법과 등정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플라톤주의 전통에 크게 빚지고 있다. 하지만 사랑의 질병에 대한 진단의 깊이에서, 따라서 이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치료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플라톤을 넘어선다.

스피노자에게 두려움, 슬픔, 분노, 즐거움, 사랑 같은 감정은 항상 자신의 안녕과 관련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 감정은 단순히 갑작스런 충동이나 욕구가 아니라 고도로 선별적인 유형의 비전과 해석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느낄 때 나는 단순히 몸을 떨지만 않는다. 나는 나 자신 그리고 나의 안녕과 관련해 세상의 상황을 평가하며, 나의 안녕이 상황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는 스토아학파의 견해 중 소중한 통찰로 간주되는 것을 통합해 들이며, 감정의 인지적 내용과 지향성을 강조한다.

스피노자는 감정[정서]은 외적 사물과 이처럼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라고, 따라서 실제로는 이러한 외적 사물들 앞에서의 좋든 나쁘든우리의 궁핍함과 수동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감정을 갖는 것은 속박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감정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4부 서문).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살며 외적 원인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동요되어 결코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5부 정리 42 증명).

따라서 속박 문제는 무엇인가를 덜 필요로 하고, 우리 바깥의 사물을 우리의 안녕에 필수적인 것으로 덜 보는 것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스토아주의로부터 이 생각을 끌어오며, 감정의 멸절이라는 그의 프로그램은 직접적으로 스토아학파의 생각을 모델로 하고 있다.

M에 대한 A의 사랑은 수동성에서 태어난 일종의 속박이다. 잘살려고 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러한 속박을 증오하며, 그것을 초래한 원인을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스피노자는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간직하고 보존하려 한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하는 것을 없애고 파괴하려고 한다(3부 정리 13 증명). 하지만 증오와 복수하려는 욕망에 휘둘린 삶을 사는 것은 훌륭한 삶일 수 없다(4부 정리 44). “자신이 당한 불법을 미움으로 복수하려고 하는 사람은 확실히 비참하게 생활한다”(4부 정리 46 증명).

그리스와 로마의 스토아주의자들처럼 스피노자는 크게 보아 공적 삶에서 분노와 증오에 의해 초래되는 손해에 대한 자신의 견해 때문에 감정을 해부해볼 생각을 품게 되었다. 종교적 관용에 대한 그의 옹호 그리고 애증병존적인 감정들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에게서는 동일한 기획의 일부이며, 그의 철저한 반-감정 프로그램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러한 질문들과 제대로 씨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인간은 각각 우리에 의해 어떤 신성과 결합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경우 그러한 인간은 그와 같은 신성의 단편적인 반영이며 그러한 신성의 가장 낮은 품계에 불과할 뿐이고 그러한 신성을 관념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당한 그러한 괴로움 대신 당장 기쁨을 얻는다. 살아 나가는 온갖 기술, 그것은 우리를 괴롭힌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로 하여금 성스러운 형태에 이르게 하는 계단의 발판으로만 이용하면서 그들 신성에 의해 우리의 생활을 하루하루 풍요롭게 만드는 데 있다(『되찾은 시간』, 209~210).

내레이션은 마치 진창에 빠지듯 너무 감정에 깊이 빠져 자유의 전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스피노자와 달리 프루스트는 내레이션은 유일하게 참된 자유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데, 그의 주장은 상당히 그럴 듯하게 들린다. 오직 내레이션을 통해서만 온갖 인과적 관계를 맺는 우리 사랑의 보편적 형태에 숙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렇게 숙달되는 과정을 독자에게 선물로 주면서 말이다. 따라서 다른 삶들을 사다리의 단으로 이용해 자신의 삶을 문학작품으로 바꾸는 것이 등정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제는 창조보다는 해독의 노동을 요구하는데, “실제가 우리에게 받아쓰게 강요한 유일한 책이자 실재 자체가 우리 마음속에 인상을 낳게 한유일한”(『되찾은 시간』, 190) 텍스트를 위해 자신의 과거를 탐색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원료는 삶 자체에 의해 심중에 남은 상념들이다(190). 하지만 이 과제는 따라서 실제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등지고 살아가는”(207) 일상생활의 통상적인 운용과는 정반대 작업이어야 한다. 일상생활은 사람들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습관과 질투심들과 허영심을 덮어, 그것들의 중요성을 감추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처럼 거짓으로 덮어 가리고 있는 것을 타파하고 삶의 참된 소재를 드러낸다. “완전히 살아온삶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일상생활이 아니라 오직 예술작품뿐인 것은 이 때문이다(206, 207). “나는 현실에서 나 자신의 심층에 있는 것에 도달하기가 불가능함을 이제까지 너무도 많이 경험해왔다.”

단 한 동의 성당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많은 성당을 보아두어야 하듯이, 양감, 밀도, 보편성, 문학적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작가는 화가보다도 더 단 하나의 감정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되찾은 시간』, 218)

자아인식과 예술적 표현의 소재는 고통이다. 하지만 이 고통을 보편적인 소통의 힘과 형식미를 가진 예술을 위한 소재로 사용하는 것은 심오한 기쁨(209)과 위안을 준다.

한 지점에서 화자는 심지어 고통당하는 것에 대한 연민이 사랑의 즐거움보다 강하다고 진술하기까지 한다(『사라진 알베르틴』, 16).

따라서 등정은 오직 실제 사람들 위로 너무나 높이 올라가 그들의 인간적 실존의 특수성이 보이지 않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우리의 세 사상가는 모두 오직 이런 식으로만 사랑의 무시무시한 과도함과 애증병존성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A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만약 세 사람 진단에 동의하지만 결론에는 여전히 불만이라면 우리는, 특히 사회적 삶이 관련되는 한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증오를 극복할 수 있는 아무런 희망도 없거나 아니면 극복하더라도 그것은 여민, 상호성, 그리고 특수성을 완전히 제거해버릴 것이다. 철학자와 신 또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명상적 관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명상적 연인은 모든 연인이 유한하고 필멸일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유아기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발한 도구를 발견한다. –인간의 유아의 최초의 기질에서 너무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탄과 호기심을 상당히 효율적으로 동원해서 말이다. 이 연인은 보다 적절한 인간적 바람을 위해 총체성에 대한 바람을 포기하는 대신 계속해서 유아기의 전지전능함에서 동기를 부여받아 왔으며, 바로 이 때문에 유아의 바람들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프루스트도 인정하듯이 다른 사람의 특수성을 진정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보려면 이 다른 특수자를 통합시키거나 집어삼키려 하지 않는 자세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수하려는 자아에 외적인 행위 주체들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절대적으로 맞았다. 알베르틴을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알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의 잘못인 것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그녀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서 자신이 설정한 특수한 목표 그리고 그가 받아들인 사랑에 대한 설명 이것은 그처럼 기저에 깔린 목표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세속적 사랑과 천상의 사랑 사이에는 심원한 심리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선한 기독교적 삶은 플라톤적 전통에서 바라는 사랑보다 더 변덕스럽고 에로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요한다. 두 사람은 기독교적 전통 내부의 상이한 관점을 대변하는데, 나는 둘이 공유하는 생각뿐만 아니라 차이도 탐구할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든 단테든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 전체를 공평하게 다루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텐데, 두 사람 모두 내적으로 아주 복잡한 내력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기독교도로서 순수하고 적극적인 지성이 아니라 민감한 감수성을 갖고 사랑으로 가득 한 복잡한 심리를 통해 등정하게 된 A는 두 가지 방식으로 심오하게 우연성의 처분에 맡겨진다. 등정을 위해 그녀는 자신의 자제가 아니라 그녀의 인격 중 본인이 지배하지도 또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측면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인격 속에 들어 있는 이처럼 민감한 요소는 역으로 행복한 활성화를 위해서는 하느님이 부르는 신비한 방식에 의존해야 한다.

『고백론』에서 감동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훌륭함, 자기이해, 지식에 대한 추구는 이 책 내내 자신은 연속적인 시간적 존재라는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의 인식을 전제한다. 이 시간적 역사는 그의 영혼의 비-필연적 속성일 수도 있다. 그것은 여전히 그의 구원에 핵심적이다. 자기이해는 그가 이것을 성취하는 한 고백의, 즉 핵심적으로 기억을 통해 과거를 끌어내는 활동의 열매라고 말해진다. 그는 분명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하느님에 대한 추구는 널따란 평원을 지나 기억이라는 큰 전각에 이르며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갖가지 사물의 무수한 영상이 간직되는 보고이다”(10 8). 기억은 변덕스러운 능력이다. 그것은 항상 의지에 복종하는 것도 또 그것의 내용이 신중한 검토에 항상 맡겨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 따른 어려움과 어둠 없이는 열매를 거둘 수 없다. 플라톤주의적 등정이 주장하는 대로 그것을 잘라내는 것은 자아에 대한 인식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며, 따라서 갈망하고 사랑하기를 그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기억과 책임 사이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세계에 속하는 과정에서 내가 만든 자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과 동일하게 나는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만나는 내 이웃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그 속에 있는 어떤 것, 즉 그에게 속하지만 그가 아닌 바로 그것을 사랑한다. ‘너는 그의 속에 있는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의 그가 아니라 네가 그였으면 하고 바라는 그것을 사랑한다.’ 이는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조차도 단지 그들 소에 있는 신을 사랑하는 한에서만 걱정하는 연인을 계속 고립되도록 만든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이웃의 입장에서도 사랑은 단지 고립으로 불러들이는 초대이자 신의 현전 속으로 들어오라는 소환장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 죽음은 이러한 사랑에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사랑받는 모든 이는 오직 신을 사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간 속에 있는 동일한 원천이 사랑받는다. 어떤 개인도 이 동일한 원천과 비교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다.[169~170]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히 감정을 훌륭한 삶에서 명예로운 위치로 복원시켰다. –그리고 이 감정과 함께 우리 인간성의 궁핍하고 불완전한 측면을. 그는 플라톤주의적 전통으로 하여금 모든 불완전성과 인간적인 것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비난하도록 만든 교만을 비난했다. 하지만 에덴동산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우리를 추방한 죄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사랑의 등정에 대한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에 고유한 방식으로 원초적 수치심에 기반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의지의 불복종 그리고 그것의 징후인 정욕이 우리를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존재로,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생식기를 원예 도구처럼 이용해 만든 로봇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만든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많다. 즉 우리 인간성의 기본 요소, 즉 독립성, 의지함, 성적도덕적 예견 불가능성을 여전히 플라톤주의자들처럼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심원한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선을 다해 행동하는 대신 몸을 가리고, 슬퍼하고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은 것이다.

즉 개인의 가장 진실 되고 가장 적절한 사랑을, 개인을 모든 유별남과 독특함 속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고 사랑하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적 구원의 맥락에서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단테는 이교도적 전통을 통째 기각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헌신적 추종자로서 그는 주체성의 존엄성과 특수성의 지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에 충실하며, 이교적 전통과 기독교적 전통의 최고의 것을 융합시키려고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이 세상에서의 분토는 새로운 존엄성을 얻으며, 심지어 천국도 미덕을 안다.

우리가 갖게 되는 느낌은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개()성과 주체성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에 대한 충분한 존경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삶을 주체성이나 숙고를 포함한 것으로 전혀 간주하지 않는다. 열정의 힘들에 내맡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테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다. –심지어 플라톤도 아니다. 지성의 자기-추진적인 운동을 보다 에로틱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단테에게 던지는 첫마디는 궁정풍 연애시에서는 편안한 사랑의 말들이다.

상호성 및 행위 주체로서의 동료 시민에 대한 존중과 관련해 우리는 플라톤적 전통과 아우구스티스적 전통 모두를 넘어 정말 결정적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단테의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일반적인 윤리적 태도는 타자의 주체성과 자유에 대한 아주 강력한 존중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훌륭한 인간적 사랑의, 따라서 함축적으로는 사회적정치적 제도들의 핵심적 성분이다.

예를 들어 사회계약론은 시민들을 단지 행위 주체로만, 롤즈의 의미심장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완벽한 삶에 대해 완전히 협력하는 사회의 성원들로서만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인간 존재도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심각하게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종속의 시기를 갖기 때문이다. –가장 분명하게는 유아기와 노년에. 하지만 돌봄에 대한 필요와 요구는 우리 삶의 직물로 직조된다. 돌봄에 대한 이 필요는 충족되어야 하며, 사회는 그것이 잘 충족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또 돌봄을 베푸는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고 말이다.

실제로 무감각은 인간의 특성이 아니다. …… 그러니 만약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즐거운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아무 차이가 없다면 그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는 정의와 인간의 안녕에 대한 세속적 추구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임을 아주 분명하게 한다. 그런 만큼 천상의 연민을 포함해 연민은 계속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 굶주린 자들을 먹이는 일, 박해받는 자들을 보호하는 일,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인 프란치스쿠스의 자발적 빈곤과 고통 받는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은 그를 『천국』(11)의 중심적 주인공중의 하나로 만든다.

하지만 그들의 천국은 에드거 린튼의 정적인 천국이 아니라 이승적 열정의 활기찬 영역으로, 거기서는 자연과 육체를 사랑하는 영혼의 본질 자체가 된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에서의 자유로운 주체성과 특수한 지각에 대한 기독교적 연인들의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관심은 더 이상 관습적인 종교적 권위의 체계 내부에는 수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주체성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방향을 찾아야 하며, 관습적인 기독교도에게 이들이 걷는 길은 지옥에 이르는 길처럼 보일 것이다.

요약해보자. 낭만주의적 연인은 기독교적 세계에 이 세계가 잃어버린 에너지와 헌신의 깊이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적 동정심을 박탈당해 우리를 동물로 만들지 않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 린튼 가의 세계에서는 일종의 지옥을 만들어 진짜 열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린튼의 죽은 감정들은 사회적 도덕()과 연결되며, 이 둘은 모두 자기방어적 자체 및 타산과 연결된다. 그와 반대로 완전 무방비 상태인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좀 더 깊은 종류의 관대함 및 좀 더 진정한 이타주의의 뿌리와 연결된다. 이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진심으로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캐릭터는 히스클리프뿐이며, 진정한, 즉 비타협적인 이타주의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 번째로, 관습적인 기독교는 모든 움직임과 분투가 멈추는 정적인 천국을 고대할 것을 가르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하여 움직임과 분투를 폄하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품이 넓은 미덕이 아니라 쩨쩨한 린튼적 미덕을 함양할 것을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기독교적 세계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 중의 하나, 즉 상상력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기독교적 캐릭터들 중 생생한 공감과 함께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서 말한 대로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사랑은 자아를 타자의 손길과 눈길에 완전히 드러낸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위험을 자초하는데, 너무나 전적인 그것은 죽음에 가까워진다. 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방어막도 존재할 수 없다. 다자는 자신 속에 있고 자신과 한 몸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경계들이 투과적인 것이 되도록 허용하려면 과거의 자신이거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모습대로의 자신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실로 그렇게 하려면 낯선 이, 집시가 되어 이 모든 캐릭터들이 자신을 보호해온 자족성이라는 단단한 껍질을 포기해야 한다.

말러도 교향곡의 결론을 위한 원천으로 기성의 모든 문학을 거부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나는 이 텍스트가 1악장의 정서적 궤적에 대한 해석을 위해 뭔가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것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러 본인의 프로그램들이 분명히 훨씬 더 큰 통찰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관습적인 종교적 도덕과 말러의 예술의 지정한 영성사이의 대조가 또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러의 삶은 많은 측면에서 격동으로 가득 차고, 관습적인 기준으로 볼 때 죄로 가득한것이었다.

휘트먼에게 민주주의적 비전은 자체가 시적 비전이며, 시민이란 모든 봉건적 절차들과 시를 버리고 민주주의 시와 절차를 받아들인 사람”(BO 185)을 말한다.

휘트먼은 다소 말러적 우리는 그가 성경을 포함한 모든 세계문학을 통해 구원의 말을 찾았지만 사랑의 말들은 단지 자신의 상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철학적종교적 체계들에 의해 창조된 우주론들에 맞서기 위해 휘트먼이 제공하는 새로운 우주론이 있다. 즉 유한하고 필멸이며 개인적이며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며 동등한 민주적 시민인 우리는 슬기로운 상상력과 연민어린 사랑 덕분에 자신 안에 세계를 담고 있다. “나는 공감을 입증하는 사람”(LG 22. 461)이라고 시인은 선언한다. 따라서 공감하지 않으며 길을 걷는 자는 누구든지 수의를 걸치고 자신의 장례식으로 걸어가는 것이다”(SM 48. 1272). 그리고 이승적 사랑의 결함들은 어떤 기성의 신념 체계가 아니라 시인은 종파나 학파는 접어두자고 말하기 때문이다(SM 1. 10) –동등한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도록 공감의 원환들을 외부로 확대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

지금이라는 것보다 더 나은 완벽이란 없을 것이고/지금이라는 것보다 더 나은 천국이나 지옥도 없을 것이다”(SM 3. 42~43). 단지 삶만이 있을 뿐. 그것은 부단히 자신을 갱신한다.

그것이 노예경매의 범죄이다. 모든 육체는 동등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육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자신에게 똑같이 궁핍하며, 유한하고 필멸인 존재로, 또한 똑같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드러낸다. 우리는 동등한 지원뿐만 아니라 동등한 존중과 사랑의 토대를 발견한다. 그러면 일부 육체는 단순한 살덩어리로 다루고 다른 육체는 영혼으로 다루는 태도의 추함과 비합리성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노예건 자유민이건, 노동자건 관리자건, 이주민이건, 원주민이건, 부유하건 가난한던 각자는 모두 행렬에 자기 위치를 갖고”(BE 6. 88) 있음을 볼 수 있다. 『에밀』에서의 루소와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6장을 참조하라) 휘트먼은 공통의 육체적 인간성과 취약성에 대한 지각을 고도로 비판적이며 도덕적으로 공격적인 공감의 발생과 연결시킨다. 우리의 인간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일부 집단을 예속시켜 단순한 사물로 다루는 권력의 위계들은 인위적이며 옹호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휘트먼에 의한 섹스의 복권은 그의 비판자들이 종종 주장하듯이 섹스에 대한 가볍고 난잡한 접근인 자유연애에 대한 승인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와 정반대로 산문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그는 근엄한 모럴리스트로 성적 문란과 성의 상품화, 특히 사람들을 포르노의 대상으로 삼는 것 그는 이것을 민주적 목표와 과정을 심하게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한다을 통렬히 비난한다. 하지만 로런스와 흡사하게 그는 포르노에서 표현되는 섹스에 대한 호색적인 태도, 그리고 섹스 산업으로 대변되는 성의 상업화를 에로틱한 욕망의 불가피한 양상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에 대한 청교도주의적 거부의 양상들로, 진정 에로틱한 시선에 대한 아메리카의 공포와 동류의 양상을 간주한다. 휘트먼은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형태의 잘못된 관계를 아메리카의 다른 왜곡된 형태들과, 특히 자연에 대한 착취적 태도 자연은 자신의 필멸성을 거부하는 사람에 의해서는 생사를 넘어 연속되는 외경스러운 존재로 바라보여질 수 없다와 끈질기게 결부시킨다.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을 성적 여성의 인간성에 대한 인정과 연관시키면서 휘트먼은 1860년에 아래 시구를 흔히 볼 수 있는 창녀에게 바치고 있다. “태양이 그대를 내쫓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내쫓지 않소/물길이 그대 위해 반짝이길 마다하고 나무 잎사귀가 그대 위해 살랑거리길 마다하지 않는 한/내 말은 그대 위해 반짝이며 살랑댈 것이오.”

이 목표들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휘트먼은 말러와 아주 흡사하게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민의 힘을 강조하며, 또한 사랑의 성공적 갱신에서 민주적 평등과 호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말러처럼 그는 이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랑은 에로틱해야 하며, 자신의 이승적 분투를 목적 그 자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 모두 비록 각자에 고유한 방식으로 종교적이지만 관습적인 종교를 거부하고 예술가의 상상력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는 보다 개인적인 영성을 선호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한 모든 설명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모두 일상적 삶을 거부한다.

이 모든 작품은 이처럼 각각의 작품이 구성하는 독자와 현실적 삶 속의 독자 사이에 넓은 간극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저 위를 주목하도록 사람들을 몰고 가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우리가 여전히 우리임을 발견했을 때 분노와 혐오감을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윤리적, 종교적, 민족주의적 쇼비니즘은 사랑, 따라서 삶과 정반대되는 모욕 그리고 증오의 주요한 원천이다. 결국 블룸은 이렇게 말한다어쨌든 같은 지역 안에 살고 있는 같은 백성”(602)이 아니라면 민족이란 무엇인가? –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을 전혀 만족시키지 못할 김빠진 규정이다. 블룸은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어떠한 형태나 형식이든 폭력이나 편협성을 불쾌하게 여기네.” “모퉁이 근처에 살면서 다른 국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들을 증오한다는 것은 확실히 불합리한 짓이지, 말하자면 옆집에 말이야”(1089)

조이스는 이상주의적이든 아니면 결함이 있는, 헌신적이든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든 사람들이 온전히 나아가 되는 것을 허용할 분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러한 ’ –조이스는 이렇게 암시한다가 건전한 정치적 삶, 즉 민주적이고 보편주의적이며 따라서 자유주의적인 삶의 핵심적 토대로, 거기서 인간의 자유는 copriright의 법칙에 의해 보호받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등정적 전통은 자기증오와 타자들에 대한 증오의 공범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대상이 된다.

창조적 개인의 몸과 영혼의 분투에 대한 말러의 의기양양한 긍정은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이 딜레마를 가로지른다. 우리의 분투는 자체가 하나의 목적임을 간파함으로써, 우리가 이 세상에서 헌신하는 일들의 고결함을 믿고 앞으로 나감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려는 의지 자체에 의해 증오심을 물리친다. 등정에 대한 이 견해는 여러모로 이상으로는 내가 가장 완벽한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사랑이 어떻게 증오를 이길지 하는 질문과 관련해 최고의 대답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혐오감에서 나온 이 비명은 말러의 작품이 보여주는 대로 자체가 이상에 대한 모든 지속적 헌신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따라서 또한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도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는 관념론이 요구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사랑하는 개인들은 다져서 양념한 통조림 고기를 먹고 요강을 사용하는 등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원대한 낭만적 갈망과 영혼에 대한 진지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하는 정의에 대한 헌신이. 우리가 연속적으로 살펴본 것 중에서는 오직 폴디와 몰리만이 둘 사이의 사랑의 아주 코믹한 단편성 속에서 영혼을 포함해 사랑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직 이 텍스트만이 현실 속의 삶을 사는 독자의 사랑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다 관념론적인 등정론들이 현실적인 것을 용납하지 못함으로써 자체 속으로 붕괴되어 들어가지 않도록 필요한 것을 보충해주는 방식으로.

『율리시스』의 거꾸로 뒤집힌 사다리는 불완전함은 우리의 인간적 이상과 사람들에 대해 당연히 예상해야 할 것임을 상기시킨 바 있다. 그것은 사다리를 올라갈 것을 요구하지만 종종 그것을 뒤집어 침대 속이나 요강에 앉은 현실의 사람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오직 그런 식으로만 이상으로부터 최고의 것을 얻을 수 있다. 오직 그런 식으로만 모든 이상 속에 내재해있는 유혹, 즉 그저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경멸하려는 유혹을 극복 할 수 있다.

등정의 정신을 인정하는 동시에 부드럽게 조롱하는 폴디와 몰리로 논의를 끝마치는 것을 통해 나는 심지어 현실 생활의 불완전한 형태에서, 실로 특히 인간적 삶의 불완전함과 놀라움이 증오되기보다는 받아들여지는 그처럼 불완전한 형태에서 여러 감정(연민, 슬픔) 중 사랑과 이 사랑의 동맹자들은 우리 텍스트들이 식별해낸 다양한 형태의 증오를 낳기보다는 다른 집단과 민족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정치의 토대를 이루는 사회 정의로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안내를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해왔다. 우리는 폴디가 돌연 스피노자를 저버리는 것에서, 몰리의 변덕스런 욕망에서, 놀라움과 수동성이 텍스트의 움직임 속에서 포용되는 방식에서 우리의 보다 지고한 다른 비전들과 결합시킬 필요가 있는 자비와 공평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의문의 여지없이 어떤 것에 관심을 보이고 욕망하는 것이 한결같지 않게 간헐성을 띠는 것 이것은 우리 자신의 상상 속에 내재해 있다을 우리 자신이 관용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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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격동 : 1 인정과 욕망

롤즈는 칸트가 훌륭한 윤리적 행위 주체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로부터 연민을 갖도록 하는 감정을 빼뜨린 것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그러한 결합이 실제로 쇼펜하우어가 칸트적 합리성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의 모델을 제공해준다고 말한다. 롤즈는 자기이익과 무지의 결합을 연민과 정보의 결합보다 선호하는데, 자신의 전략이 더 많은 확실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두 전략이 아주 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상력의 운동은 몇 가지 방식으로 차단될 수 있다. 루소의 주장에 따르면 한 가지 장애물은 계급과 신분(그리고 우리는 쉽게 종교, 인종, 민족, 남녀라는 구별짓기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에 따른 사회적 구별짓기에 의해 제공된다. 이러한 구별짓기는 첨예한 사회적 형태가 주어질 때 연민을 방해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은 사람을 범주별로 분류해 서로 분리시키는 모든 사회적 체계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루소 말대로 위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히 첨예하게 드러난다. 이 상황에서는 특권 집단이 자신의 전망을 열등한 집단보다 훨씬 더 우월한 것으로 규정하며, 심지어 자신을 끄떡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무엇인가를 갖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강렬한 질투심을 느낀다. 상실감과 슬픔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좌절을 원한으로 전환시킨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세상을 맘대로 하는 것을 위협한다. 어떤 경쟁자도 세상을 맘대로 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감정이입뿐만 아니라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 모두를 거부한다. 그러한 사람이 연민 같은 것을 가질리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따라서 폭넓고 바람직한 연민을 가르치길 바라는 사회에게 주어지는 핵심적인 도전은 수치심과 혐오감의 이러한 이상비대성 버전들 이면에 놓인 메커니즘과 싸우며 자신의 인간성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도저히 쉬울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술을 통해 연민을 발전시키기 위해 당연히 우리가 의지하게 될 내러티브는 비극적 곤경의 내러티브로, 특히 현저하게 고전의 비극 드라마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필록테스 이야기가 그것으로, 그는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끔찍한 고통을 당한다. 우리는 쉽게 그러한 예술작품들은 연민뿐만 아니라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불러옴으로써 청중에게 연민을 촉진함을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스토아학파적 무관심의 가장 충격적인 측면 심지어 제 자식을 포함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 말라는 명령은 스토아학파의 평등주의적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인간 존재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우리는 기본적으로 가족이나 도시국가의 성원이 아니라 kosmoploitai, 세계의 도시국가의 성원이다. 이것은 우리가 만인에 대해 동일한 관심을 가져야 하며, 동일한 관심은 친족에 대한 특수한 애착과는 양립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가족의 성원이나 동료 시민에게 편중된 양의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삶이 우리를 놓아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도움이 되려고 시도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기 가족에게 얼마나 특수한 가치나 양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조직적 쟁점이 편중된 투자를 정단화해준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이보다 더 멀리 나가 가족의 존재 자체가 본래적인 의미의 관심 자체를 위태롭게 하며 질투심과 적대감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이들은 공동으로 양육되어야 한다.

이 두 비전은 각각 자체에 고유한 방식으로 평등뿐만 아니라 자유를 추구한다. 전자는 기본적 욕구에 대한 동등한 지원을 겨냥하며, 그것을 통해 자유로운 선택과 자기실현을 위한 동등한 기회를 촉진시키길 바란다. 후자는 내적 자유라는 사실 어떠한 불행도 제거할 수 없는 사실로부터 시작하며, 이 사실 속에서 정치적 평등의 원천을 발견한다. 전자는 선택의 자유를 완전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해줄 세속적 배치들을 통해 사람들을 위해 쌓아올려져야 할 어떤 것으로 바라본다. 후자는 자유를 양도 불가능한 소여, 모든 물직적 배치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간주한다. 전자는 고통에 대한 상상과 관심의 점진적 확대를 통해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정념을 물리치는 것을 겨냥한다. 후자는 그러한 정념을 완전히 제거하고, 앙갚음을 자제와 자비로 극복하는 것을 겨냥한다. 전자는 인정 많음을 통해 자선을 베풀려고 시도한다. 후자는 칸트와 함께 그러한 인정 많음은 인간 존재들 사이에서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는 인간의 허약성이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유약함은 공통체에 대한 장애물이며, 오직 진정 자족적인 인간만이 진정한 친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연민의 지지자와 적 사이의 논쟁은 공적 삶에서의 선택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사유 과정의 유형이나 능력의 유형과 관련된 단순한 형식적 논쟁이 결코 아님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성의 열렬한 옹호자와 어떤 무심하고 비인지적인 힘의 열렬한 옹호자 사이의 논쟁도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 가치에 관한 실질적 논쟁이다. 이제 우리는 이 논쟁에 대한 판정을 내려야 한다.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연민을 갖는 것과 그러한 사람의 위엄에 대해 존경심을 갖는 것 사이에 왜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선택을 강요받아야 할까? 그렇게 구분한 다음 운명이 초래한 잘못과 관련해 연민을 갖는 동시에 훌륭한 사람이 그러한 재난을 힘껏 견뎌내는 방식에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질 수는 없을까? 인간성을 볼 때 그것을 존중하려면 그의 도덕적 인간성이 상실을 상쇄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탁월함을 스토아학파가 바라는 대로 존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을 미덕을 위해 이용하는 것으로 인간이 훌륭한 삶을 사는 데 충분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상실은 심각한 상실이 아니었다는 스토아학파적 입장을 택한다면 실제로 이 경우 우리가 어떤 것을 존중하게 될지를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사건을 위엄 있게 견뎌내는 불굴의 용기는 어디 있어야 할까? 비극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아이들의 죽음, 강간, 전쟁, 물질적 박탈에 의해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처럼 끔찍한 일들이 그러한 인격의 핵심 자체를 어떻게 찌르는지를 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경탄을 끌어낸다.

다른 한편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과 결합해 나타나는 한 연민 자체는 공통의 인간성이라는 생각을 포함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이런 식으로 그것은 존중의 적이 아니라 동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타인들의 동등한 인간성에 대해 우리가 가진 존중은 그들의 물질적 행복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강력한 관심으로 이어져야 할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개인이 인간적 능력의 담지자라는 사실은 그에게 물질적 관심을 요구할 권리를 부여하는데, 그리하여 그러한 능력은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원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어려움은 인간 존재에게서 훌륭한 삶을 박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러한 능력을 제대로 존중할 수 없다.

그러한 구분을 위해 연민은 기본적인 인간적 재화에 대한 적절한 이론과 결합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처럼 형편없는 이론을 갖게 될 것이라고 추정할 이유는 없다.

연민 속에 구현되어 있는 가치평가를 좋은 것으로 승인하지 못하는 칸트의 실패는 정념을 비인지적인 것으로 보는 그의 일반적 관점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또 다른 원천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본성상 보다 인지적이다. 칸트는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뭔가 모욕적인 것이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존중과 자기존중은 너무 많은 사랑의 관심이 아니라 거리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실천적 사랑이라는 원리는 가까움과 주의 깊은 관심을 명한다. 칸트는 이 두 가지 도덕적 힘은 균형을 이룰 수 있지만 훌륭한 도덕적 주체를 어느 정도는 모순적인 방향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만약 우리 능력이 육체적 능력이라면 육체적으로 필수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수미일관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니체는 당시의 민주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루소에 의해 발전된 친-연민적 전통은 외적 재화에 대한 연민의 생각을 민주주의적-평등주의적 사유의 현대적 발전을 위한 토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지체는 기본적인 생각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루소가 하려고 했던 것을 보지 못한다.

이의제기는 연민의 소중한 감정으로, 핵심적 사례에서는 진정한 믿음에 기반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의 판단 각각이 정확한 윤리적 이론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각함에 대한 판단은 외적 재화의 가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부당성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정확한 이론을 필요로 한다. 행복주의적 판단은 본연의 관심에 대한 정확한 이론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단순히 사회가 종종 이 영역에서 잘못된 이론을 가르친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이 연민을 버리고 보다 추상적인 규칙의 체계로 옮겨가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규칙 또한 오류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 존재가 전형적으로 연민 공감 및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에 이르도록 해주는 심리학적 메커니즘이 전형적으로 그것을 원리상 협소하고 불평등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감과 상상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발달에 대한 설명이 그래도 타당성이 있다면 사람들은 유아기의 강렬한 특수한 애착을 통한 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죄책감과 감사함을 통해 서서히 그러한 애착을 확대하지는 않고는, 연민의 특징을 이루는 상상을 통해 관심사를 확장하지 않고는 이타주의에 이르지 못한다. 연민은 타인에게 좋은 것을 우리의 상상들의 근본적으로 (이기적이 아닌) 행복주의적인 구조와 우리의 가장 강력한 관심과 결합시키기 위한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방식이다. 타인들에게 좋다는 말은 추상적으로는 또는 그렇게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매우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그거이 우리가 이미 부모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함께, 편안함과 안전에 대한 열정적 요구와 함께이해하고 있는 것과 관계를 맺게 될 때이다. 인간적(반드시 신성한 것은 아니지만) 연민에서 중요한 메커니즘인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상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중요한 도덕적 작업을 수행한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오직 다른 사람에게 좋고 나쁨을 상상할 수 있을 때만 도덕적 관심을 타인들에게까지 완전히 확대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우리 각자가 일군의 동심원 속에서 산다고 상상해 보자고 말한다. –가장 가까운 존재는 자신의 육체이며, 가장 먼 존재는 인간 존재들이라는 우주 전체이다. 도덕적 발단의 과제는 이 원들을 점점 더 중심에 가깝게 움직여나가며, 그리하여 부모는 자신처럼, 다른 친인척은 부모처럼, 이방인은 친인척 등처럼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동등한 관심을 또는 규범적으로 올바른 다른 어떤 유형의 적절히 순위가 매겨진 관심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어떤 인간 정신도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 자신이 이해하는 바의 의미들에 기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절박함이 없는 평등만 남게 된다.

그와 반대로 상상력과 연민이 떠올려주는 이 연관성들의 손길이라고는 닿지 않은 추상적인 도덕 이론은 쉽게 사악한 목적에 전용될 수 있는데, 그것의 인간적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연민의 특징을 이루는 판단은 완벽한 성인의 합리성의 건강함을 위해 핵심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민 자체는 우리가 타인에게 좋고 나쁨을, 그리고 그것의 완전한 의미를 보는 눈이라는 결혼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계산적인 지성의 추상적 시선은 가치에 맹목적이게 된다.

우리는 대담하게 스토아학파에게 분노는 종종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올바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불의와 심각한 잘못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실로 분노를 멸절시키면 사회정의와 억눌린 자들을 옹호하기 위한 주요한 힘을 멸절시키게 될 것이다. 만약 분노가 부적절한 대상에게까지 넘쳐 흐를까봐 걱정이라면 그러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분노를 완전히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연민은 오직 기본재의 가치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갖출 때만, 오직 행위 주체와 잘못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갖출 때만, 그리고 오직 가까운 사람뿐만 아니라 먼 사람까지 포함해 행위 주체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알맞게 포괄적인 이론을 갖출 때만 귀중한 사회적 동기가 될 것이다. 이 판단들은 훌륭한 발달 과정을 통해 생성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연민은 핵심적인 삶 그리고 도덕()과의 연관성을 제공하는데, 이것들이 없다면 연민은 위험할 정도로 공허하고 뿌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제대로 재현되는 핵심적 사례에서 연민은 정확한 가치평가를 구현하며, 우리의 관심을 우리와 공동의 인간성을 공유하는 사람을 향하도록 한다. 유아기의 관계들에서 배우는 이 연관성들은 도덕()을 둔감할 것보다는 분별력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서 중요하다. 따라서 연민은 존중에 대해 반드시 필요한 보완물로, 그것이 없다면 칸트의 주장대로 선행은 에너지를 결여할 가능성이 크다(칸트가 제시하는 것보다는 휠씬 더 인지적인 이유에서). 우리는 오직 연민이라는 동기만을 통해 좋은 사회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되는데, 연민이 별나고 신뢰 불가능하기보다는 가치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은 말하자면 이성의 한계 내에서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런 식으로 제한된다면 그것은 아이의 협소하고 자기 참조적인 관심사에 훨씬 더 넓은 도덕적 세계로 이어주는 극히 중요한 다리를 마련해줄 것이다.

즉 타인의 고통에 슬퍼하라는 요청이 그를 도우려는 행동이 아니라 방종과 자축적인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연민을 경험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훌륭한 일을 했다고 너무 쉽게 느낀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어떤 조치이것은 이들을 진짜 어려움과 희생 속에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도 취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회에 적절한 연민을 고취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연민에 기반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연민은 공적 도덕성에 윤리적 시각 이것 없이는 모든 공적 문화는 위험할 정도로 뿌리를 잃고 공허하게 될 것이다에 핵심적인 요소를 제공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충분한 만큼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제도와 관련해 연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 체제는 인간적이며, 오직 인간적 방식으로 살아 있는 한에서만 좋은 것이다.

루소와 토크빌 공히 보여주듯이 공감 및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제도가 사람들을 서로 관련을 맺도록 하는 방식에 의해 심오한 영향을 받는다.

비극은 엄청난 불행이 인간적 행위의 심장부를 강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재앙은 단지 피상적인 불편만 초래하지 않으며 이동성, 계획, 시민권, 궁극적으로 삶 자체를 방해한다. 다른 한편 이 재앙이 인간적 주체를 강타할 때 우리가 비극적 연민의 감정을 갖는 것은 바로 그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성이 허비되는 것을, 또는 심지어 매정하게 처분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아주 복잡한 상황에서 제대로 평가하기가 어려운 점을 고려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이 실수들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심지어 기본적으로 훌륭한 사람도 잘못을 한다. 용서하는 태도가 전반적 유약함과 인간이 내리는 판단의 취약성에 적절할 것이다. 어떤 사람의 비난받을 만한 실수를 용서하는 정신에 따라 판단함으로써 우리는 아무리 최선의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우리 자신이 판단에서 완벽하지 않음을 밝히는 셈이다.

비거 같은 범죄자에 대해 그가 범죄에 대해 완전히 책임이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과, 동시에 그가 어떤 아이도 견뎌서는 안 되는 불행을 겪었음을 연민어린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은 완전히 일관된다. 오직 이 점을 인정할 때만 사회적 위계와 경제적 박탈에 따른 비용을 온전히 추정할 수 있다. 스타인벡은 정말 부자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불평등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불행뿐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불평등이 인격 자체 속에까지 깊이 뿌리 내려 분노와 원한, 나쁜 성격의 뿌리를 낳는다는 걸 이해한다면 모든 아이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요구하는 물질적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참여할 훨씬 더 깊은 동기를 갖게 될 것이다. 연민을 가진 사회는 소포클레스적 비극이 암시하는 의미에서 내 행위와는 무관하게 시민에게 닥칠 수 있는 피해를 충분히 가늠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연민은 인간의 존엄성을 뒷받침하고 보호하는 기본적 지원을 모든 사람에게 확보해주려는 동기를 마련해준다.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사회는 기초적인 복지 후생을 일련의 특히 중요한 영역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일군의 역량이나 기회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으로 입증될 인간의 삶의 몇몇 핵심영역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일군의 기본적인 기회를 모든 시민에게 보장해야 한다(다원주의 기회와 역량을 제공하는 것에 의해, 따라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갖게 되는 기회에 맞추어 기능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풍부한 여지를 허용함으로써 존중된다).

핵심적인 인간 역량

1.    생명. 정상 수명이 끝날 때까지 살 것.

2.    신체적 건강. 재생산적 건강을 포함해 신체가 양호할 것.

3.    신체적 통합성. 자유롭게 장소를 이동할 수 있을 것.

4.    감각, 상상, 사유. 감각을 사용하고, 상상하고, 사유하고, 추론 할 수 있을 것.

5.    감정. 외부의 사물과 인간들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을 것.

6.    실천이상.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고 자기 삶을 계획하는 것에 관한 비판적 성찰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이것은 양심과 종교 의식의 자유에 대한 보호를 포함한다).

7.    귀속. A. 타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은 향해 살고,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을 인식하고 보여주고,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있을 것. B. 자기존중 및 모욕당하지 않을 사회적 토대를 가질 것.

8.    다른 종. 동물, 식물, 그리고 자연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리고 그것과 관련을 맺고 살 수 있을 것.

9.    놀이. 웃고, 놀고,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즐길 수 있을 것.

10.  자신의 환경에 대한 통제. A. 정치적인 것. B. 물질적인 것.

사람들을 서로 가까이 놓음으로써 이 체제는 타자의 곤경 속에서 자신의 곤경을 보는 것을 더 쉽게 만들어준다.

국경 바깥에 있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극히 불균등하고 신뢰할 만하지 않은 연민은 대부분 우리의 극히 불균등하고 신뢰할 만하지 않은 연민은 대부분 우리를 함께 삶의 공통 형태속에 놓아줄 수 있는 모든 효율적인 제도적 구조가 부재한 데서 원인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의 비극적 곤경 속에서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가능성을 아주 충분히 인식할 수 있고 또 종종 실제로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과 연민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치들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가 알다시피 그러한 연민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법적 구조에 의해 형성된다.

사회가 만약 시간, 나이, 유악함, 질병의 온갖 부침에 종속된 인간적 몸을 가진 건 하등 부끄러울 게 없다는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면 공적 삶에 미치는 원초적 수치심을 감소시킬 가능성이 가장 커진다. 젊은이들에게는 (또래 또는 연장자의) 그러한 몸을 경멸감과 공격성 이것은 너무나 자주 자신도 그렇게 될 가능성에 대한 원초적 수치심을 동반한다이 아니라 존경심과 우정을 갖고 바라보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육제적이고/또는 정신적으로 극단적으로 의존적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주요한 사회적 선으로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문화는 더 이상 시민이 모두 독립적인 합리적 성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인 사회 계약론이 조종 그렇게 주장하는 바와 달리 말이다. 이 사회는 모든 사람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함을,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극단적인 의존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며 많은 사람은 그러한 상태에서 삶을 마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정신박약아와 신체장애우의 존엄성을 지원하기 위한 최근의 노력([장애 아동과 특수 아동의] 특별[차별] 교육 철폐, 적절한 교육에 대한 지원)도 그와 비슷하게 유약함과 연약함을 수치심이나 혐오감 없이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공감 및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 이것은 관심의 확대를 지지한다 이것 중 많은 것은 사적으로, 가족 내부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민 됨 그리고 훌륭한 시민적 판단의 이상을 수용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실제로 연민에 대한 교육을 지지하는 몇몇 구체적인 실천 전략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들 없이는 둔감하고 감정이 죽은 시민들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며, 그들은 타자의 이미지에 무감각한 내면 세계를 너무나 자주 동반하는 공격적 바람의 먹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예술을 교과 과정에서 제외하는 것은 병리적 나르시시즘을 낳는, 어떤 사안이 인간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을 해당되는 다른 사람과 연관시키는 데 어려움을 가진 시민을 낳는 처방일 뿐이다.

그리고 단지 이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성인들은 항상 경험을 확대하고, 핵심적인 윤리적 진리에 대한 파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미래의 젊은 시민에게 비극은 특수한 중요성을 가진다. 그러한 관객은 이 과정에서 연민을 배우기 때문이다.

특수한 사회적 장애물을 넘어 공감을 촉진시키려면 그러한 장애물과 그것의 의미를 아주 구체적이 방식으로 제시하는 예술작품에 의지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계급, 인종, 국적, 자신과는 다른 성적 지향에 대한 사실을 배워야 한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이 삶 속으로 끌려들어가야 하며 그러한 투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미디어는 숙고적 도구이다.

게다가 모든 것에서 다산에 가득 찼던 아 어머니여, 얼마나 오랫동안 불임에 불임을 거듭했던가?

이 이유로 경제학자 센은 복지와 개발의 초점은 마치 자체로 어떤 가치를 갖기라도 한 듯 자원 자체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역량이 중요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지원하는 데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두어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는 모든 시민에게 헌법의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역량이라는 접근법을 사용해왔다. 그동안 이와 동일한 접근법은 국제기구들의 복지 측정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UNDP가 고인이 된 울 하크의 후원 하에 1990년부터 속간해온 『인간 개발 보고서』 시리즈는 복수형으로 복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경제적 척도들이 몇몇 핵심적인 영역에서 기능할 수 있는 시민 역량에 대해 가진 인간적 의미를 강조해왔다. 거기에는 개발은 인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경제를 자체에 고유한 생명을 가진 엔진으로 다루기보다는 상이한 종류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들의 상이한 종류의 삶의 영역에서 경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의 오류 가능성이 모든 믿음을 빼버리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되듯이 연민의 오류 가능성이 법적 숙고로부터 그것을 완전히 빼버리도록 유도해서는 안 된다.

법의 인간적 의미와 영향을 이해해 보려고는 하지 않은 채 동등한 보호라는 쟁점에 외적이고 형식적으로 접근한다면 그러한 법률들은 평등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쉬우며 동등한 보호를 위해서는 형식적 중립성으로 충분한 것으로 간주하며 시민들에게 법의 보호라는 진정 동등한 가치를 부정하는 데서 인종과 젠더라는 위계체계가 하는 역할을 놓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내러티브가 더 많다고 해서 항상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서 나타나는 특수한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이유에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내러티브를 도입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혐오감은 정확한 공적 선택, 합리적 공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 경우 그것은 또한 합리적인 자기비판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반면 얼마든지 나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은 건강한 자기비판을 촉진한다.

혐오감과 원초적 수치심은 공적 숙고에 아무런 소중한 것도 제공하지 못하며, 심지 이간을 고급과 저급이라는 두 부류로 나눔으로써 그것을 훼손한다. 모든 감정은 동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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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정의 격동 : 3 사랑의 등정
    from 木筆 2017-01-22 12:00 
    감정이 윤리(학)에 어던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처럼 아무리 부분적이더라도 모두 에로틱한 사랑의 애증병존성과 과도함을 다루어야 한다.하지만 에로틱한 사랑의 제거가 과연 연민과 다른 감정을 그대로 놔둘지 의심할 수 있는 이유가 실제로 존재한다. 친구 사이의 사랑은 모두 실제로는 은폐된 에로틱한 사랑이라는 프루스트의 주장은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두 감정이 너무 긴밀하게 서로 뒤얽혀 있어 만약 에로틱한 사랑을 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