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는 잘 지냅니다. 봄꽃 피고 지는데 아슬아슬 잘 지냅니다.

(의) 미있는 삶, 좋은 삶들이란 무엇일까 ‘곰곰궁리‘하다 ‘나의 다른 이름들‘을 헤아려봅니다.

(다) 른 풍경, 시인은 그것은 내 몸에 쌓인 중금속같은 독이자, 터널 속 창가에 비친 수십개의 내 얼굴이라 말합니다.

(른) 이란 기이한 활자가 가위누를 듯이 버티고 있습니다. 기이한 ‘른‘에 손발이 다 자랄 것 같습니다. 기이한 모습으로 기이한 풍경 속에서만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했나요.

(이) 면을 헤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속에서 자라게 하거나, 부러진 뼈 위에 피는 꽃들을 목도하거나, 다른 삶들을 느낄 수 있도록 정교한 시간을 새로 배치하거나 치밀한 환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름) 기이한 활자의 독들이 지뢰처럼 매몰되어 있습니다. 기이하지 않고서는 기이하게 접근하지 않고서는 아슬아슬 이 글짓기도 끝낼 수 없을 듯 싶습니다. 이렇게 기이하고 아름답고 무서운 그런 풍경을 거쳐서야 또 다른 나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들) 바람에 꽃이 잘 지냅니다. 목련벚꽃개나리진달래산수유봄꽃이란봄꽃은 너나할 것없이 다 잘지낼 듯합니다. 꽃의 고요를 탐할 시간입니다. ‘너의 다른 이름들‘로 들어가는 초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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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풍경이 역사를 바꾸었다 기이한 풍경이 오래 나의 정신을 점령했다 기이한 것들이 자라나 손발이 되었다 기이하고 기이한 풍경이 우리를 신비롭게 했다 거기서 우리는 문득 태어났다 (기이한 풍경들)

저렇게 많은 풍경의 독이 네 몸에 중금속처럼 쌓여 있다(풍경의 해부)
기차는 자꾸 터널을 지난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수십 개의 내 얼굴을 바라본다/창밖엔 규정되지 않은 풍경들이 줄지어 서 있다.(터널)


군말 1. 기억의 행성에서 시인은 풍경을 중금속처럼 쌓여있는 독이라든가, 터널에 비친 기이한 자신의 낯설은 모습들을 보며 풍경으로 묘사한다. 이번 시집에도 어김없이 그 연장의 사유가 이어지는 듯싶다. 그 속에는 무엇인가 스스로 탈피시키는 어떤 것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십 개의 내 얼굴...다른 풍경과 달라지는 모습으로 생각매듭이 자라는 것이다.


나의 삶을 살다가 또 다른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은 치밀한 환상이 필요한 일/내가 죽기 전에 다른 나의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일은 정교한 시간 배치가 필요한 일//오늘도 내 속에 적절히 숨어서 내가 ㅇㅏ닐 가능성을 엄밀하게 엿본다 (나의 다른 이름들)


군말 2. 몇몇 시인들에게 보이는 ‘다른 나‘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 곁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과 삶. 죽음을 가정한다는 것이 삶을 끌어내는 견인차이지만, 그렇게 이분법으로 가르게 되면, 발라낸 개인만이 존재하게 된다. 하이데거 식으로 ‘세계-안(내)-존재’이기도 하지만, 사유는 거기에 그칠 수밖에 없다. 존재로서 개인에 멈춘다는 이야기다. 정작 ‘발라낸 나‘는 말하는 존재이고 끊임없이 너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다. 나는 나로서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과 삶이라는 극단의 이분법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비교해보면 현실보다 건강한 물음을 던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형용모순이다. 좀더 생각과 사유를 확장해보자면 죽음과 삶의 휴전선을 무너뜨려야 한다. 나 속에 끊임없이 나-너가 있는 것처럼, 삶속에 죽음이 스며든 것이 좀더 현실을 냉정하고 현실감있게 보는 것이다. 시인의 말을 덧붙이자면, 풍경이 필요하고 치밀한 환상이 필요하고, 정교한 시간 ㅂㅐ치가 필요한 일이다. 풍경의 독이 스미는 것을 즐겨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침묵지대는 툰트라지대처럼 추운가/낮게 가라앉은 빛들이 들끓는가/침묵은 규정될 수 있는가(침묵지대)


군말 3. 삶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충만은 즐겁게도 고독으로 채워진다 한다. 몽테뉴와 방향을 달리한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란 마지막 저서에서 그 기쁨을 노래한다. 식물에 대한 관심이 옅어지는 노년, 그는 자신의 늙음을 한탄한다. 그러나 더 나이가 들면서 열정이 불꽃처럼 다시 샘솟는 것을 느껴 식물에 대한 모든 것에 빠져지내게 된다. 의무감에서 해방되어 오로지 그 자체에 집중할 때, 그 고요에서 오는 충일감을 찬양한다. 그 지대를 거닐어 보지 못한 자 고독을 논하지 말자랄까. 시인의 건강에서 연유한 산사 생활이든, 개인의 여건에서 상황은 각기 다를지라도 꽃의 고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마 고독을 잃어버린 사람이자, 고독이 드리운 사랑의 그림자도 ㅇㅏ직 밟아보지 못해 낯선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토록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스스로를 조금 속일 필요가 있었던 것, 그는 노란 색을 완전히 장악했던 걸까 노란색의 심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압생트가 ㅇㅏ니라 고독과 광기와 셈세함과 난폭함이 고루 필요했다. (압생트)

늘 걷던 길이 햇빛 때문에 달라 보이는 시간, 봄볕에 발을 헛디딥니다 햇빛 때문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달라지다니요 꽃과 나무와 마음을 변화시키는 봄볕에 하릴없이 연편누독만 더합니다(봄의 묵서)

그저 감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곳의 멈추었다 미끄러지는 모든 시간들을/순간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순간이 아무것도 아닌, 기이하고 아름답고 무서운 그런 풍경을(풍경의 귀환)

흰 꽃과 분홍을 마주 피워 올리며 나의 봄을 엿보려는 저 천리향의 미열은 봄눈에 좀 가라앉으려는지(천리향을 엿보다)

오늘 나는 와편의 좋은 습득자, 말라 검게 타 버린 묵은 매화 보고 돌아온 갈라진 마음을 수습하였다/습득으로 뜻하지 않게 수습까지 하게 된 참 장한 사연을 이러하다/오늘 수습된 마음을 습득하였다.(습득자)

군말 4. 시인의 오감이 느껴지는가, 소리를 음각하거나 양각하여 저기에 걸어놓는 모습이 보이는가 , 그리고 나의 다른 이름을 가진 풍경들...


다른 악기도 아니 루트를 연주하고 있나요//누군가에게 루트, 라고 말해/그의 심장을 터뜨리기 위해 (그 악기의 이름은)
물이 문을 막고 있다/물을 꺾어 버리려면 문을 확 열어야 한다/물을 물리치려면 물을 들여놓아야 한다/지붕의 붉은 색이 더 깊어졌다.(물에 갇힌 사람)
당신은 잘 지냅니다/복사꽃이 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봄날이 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아슬아슬 잘 지냅니다(봄, 양화소록)
당신의 소식이 더 이상 오지 않는 봄이 온다 해도 내게는 오래 간직한 낡은 마음이 있소 그것으로 족하오 낡은 마음은 봄에 다시 새로운 마음이 되오(구름의 서쪽)

부러진 뼈에 붉은 꽃이 얹혀 있다//붉은 꽃은 부러진 뼈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부러진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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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희망이란, 약속되거나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희망은 행동을 요구하고 행동은 희망 없이는 불가능하다/블로흐는 “이 정서의 작동은 변화하고 있는 것 속으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던지는 사람들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변화하고 있는 것에 속한다.” 17

내가 자주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희망은 세계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보다 마음의 상태라고 나는 이해한다. 우리 내부에 희망을 지니고 있거나 지니고 있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세계에 관한 어떤 특정한 관측이나 상황 평가에 기대지 않는다. 희망은 예언이 아니다. 27

의미있는 혁명은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혁명이며 많은 종류의 변화가 뒤이어 발생하는데, 어떤 변화는 점진적이고 미묘한가 하면 또 어떤 변화는 극적이고 갈등 투성이다. 다시 말해 혁명은 반드시 혁명같아 보일 필요는 없다./생각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결과는 추적하기 어렵다. 이것은 정치가 생각의 확산과 상상의 형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상징적 문화적 행위가 실제적인 정치적 힘을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행동으로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51

국내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이 여전히 시민권운동과 싸우면서 그것을 무력화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시민권운동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또 다른 증거다 104

1.

운동가들의 작전 지역은 상징의 영역, 정치적 담론, 집단적 상상력 등, 대개 비물질적이다/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까닭에 모든 행위는 신념에 기초한 행위다. 그저 희망을 품은 채 목표를 이루는 데 가장 힘이 될 만한 지혜와 경험을 동원할 따름인 것이다. 107

생각이 행동으로 실천되는 것이 순리가 되고 있긴 하지만, 그런 길이 직선으로 나 있는 것은 아니다. 109

“가려진 것,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 시장에 내놓을 수 없는 것, 경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지역적인 것, 시적인 것, 상궤에서 벗어난 것 등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기업 주도의 지구화에 ㅈㅓ항하는 목적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그런 것들을, 지금, 실천하고 ㅇㅖ찬하고 연구할 필욛 있는 거지” 112

“오늘날 우리가 발표하는 데 성공하는 글 한 줄 한 줄은 – 우리가 그 글을 내맡기는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 암흑의 힘으로부터 쟁취한 승리다.” 115

대체 역사의 천사는 우리의 행위가 중요하다고, 일어나는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는 일로써 우리가 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우리의 노력이 세상이 더 나빠지는 것을 막기도 했다./승리는 종종 아무것도 없어보인다. /세계에는 은총의 상태도 없고 타락도 없으며 창조는 지속된다. -도덕적 순수성과 경직된 정의 따위가 그리 하는 것이 없다. 118, 119, 121

2.

완벽은 가능성을 두들겨 패는 막대기다. 완벽주의자들은 그 어떤 것에도 흠을 잡는 능력이 있고, 이런 면에서라면 좌파보다도 더 높은 기준을 지닌 이들은 없다/즐거움과 축제를 받아들일 줄 아는 이 새로운 운동과 저 고리타분한 명망가들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우리는 모든 참화를 영원히 막을 수는 없지만 참화를 줄이고 불법화하고 그 원천과 기초를 막고 허물 수는 있다. 이런 것들이 승리다.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나 완벽한 세상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유토피아는 지평선에 걸려있다. 내가 두 걸음 다가가면 유토피아는 두 걸음 물러난다. 내가 열 걸음 다가가면 그것이 열 걸음 더 멀어진다. 유토피아가 오ㅐ 있는가? 이것, 즉 걷기를 위해 있다. 126, 127, 128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체현한다면 우리는 이미 성공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나타내려고 “예표의 정치 politics of prefiguration라는 용어가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변화가 강압에 의해서뿐만 ㅇㅏ니라 영감과 촉매에 의해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인식하는 행동가들에게 ㅇㅣ것은 중요한 믿음이 되어왔다./계급투쟁에서 영적 ㄷㅐ상들은 그들의 투쟁에서 용기, ㅎㅐ학, 능란함, 인내 등으로 나타난다./진보의 나선운동 ㅂㅏ깥과 그 너머에 운동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132, 133

우리 영혼의 보석을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세계를 갈라놓아 불필요한 갈등에 빠지게 하는 백색의 이분법을 거부해야 한다/우리는 모든 사람이 필요하고 우리의 모든 것이 필요하다 135

3.

시효가 지나버린 또 하나의 이항대립은 우파와 좌파다. 136

우리가 우파나 좌파가 아니라 진정한 풀뿌리를 자신의 입장으로 삼을 수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지역의 힘을 어떻게 누가 빨아먹고 있으며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한 다른 ㅎㅐ석을 우리가 그들에게 내놓을 수 있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그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넓은 기반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근래 좌파들이 말을 건네고 대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스타일이 필요하다. 138

“급진적 중심은 보통 하는 방식을 버리는 것이고, 일을 하기 위해 어디 출신이며 무슨 종류의 모자를 썼는지 묻지 않고, 그 사람이 기꺼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어딘가, 상호이익이 되는 문제에 건설적으로 매달릴 뜻이 있는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무엇을 ㅊㅏ려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차려내느냐가 중요하지요...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면 그들에게 낯익은 어떤 관점에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쟁점들을 서로 연결지을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편들을 연결짓는다는 점이다. 144,145

재즈 자유투사 – 음악예술 형식의 용어라기보다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현실에 대해 변화무쌍하고 유동적이며 탄력적인 태도를 보이고, ‘이다/아니다‘ 식 관점을 불신하는 즉흥적 양식이다/세번 째 물결은 1960년대식 운동과 파편화된 정체성의 정치와 달리 기본적으로 반교의적이다. 이것은 엄청난 다양성을, 그리고 그들의 여러 쟁점과 관점을 수용할 필요를 반영한다./이전 운동의 물결들이 순수주의적이거나 청교주의적 경향을 지녔다고 한다면, 이것은 넉넉하고 기쁨에 찬 비순수성을 띠는데, 이 비순수성은 사물들을 뒤섞고 유통시키고 ㅁㅏ구 휘젖는 데서 온ㄷㅏ/과정의 ㅈㅓㅇ치를 건설하력 노력중인데, 이 정치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올바른 때 올바른 곳에서 올바르다고 느끼는 것을 행하는 것이지요. 146, 147, 149

4.

과거의 대다수 정치운동이 걸었던 매우 곧고 좁은 길의 끝에 있는 목표는 권력장악이었다./놓아버리는 것(권력을 두고 떠나 자유를 찾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믿는 운동을 우리는 건설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창조적 주체성을 되돌려주고 세계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그들의 잠재력을 재가동하는 것이 그 과정의 핵심이다./혁명의 성격에 혁명을 일으키자는 것이다./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창조의 시간에 사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암시한다./혁명의 순간들은 개인의 삶이 갱생된 사회와 자신이 하나가 도ㅣ는 것을 찬ㅁㅣ하는 사육제다. 150, 151, 152


볕뉘

0. 리베카 솔닛 책 사이, 다른 책을 보다가 이 책에 대한 언급이 많아 찾아보게 되었다. 마침 동네 책방에 있어 번거로움도 없앨 수 있었다.

1. 민주주의는 원래 최적이나 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쁘게 되지 않게, 최악을 가정한 제도라 한다. 그러니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을 찾거나 권력을 얻기위해 쓰는 것은 용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선의가 있는데 권력을 잡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가정을 하고 그 목표를 위해 매진하는 것이다. 편의상 더 위의 것으로 향하는 것을 뺄셈방향성이라고 하자. 또 다른 하나는 더 나빠지지 않게 하는 보일락 말락하거나 사라지는 것들을 향한 시선, 이를 향하는 활동과 마음, 상상력을 덧셈방향성이라고 해보자.

2. 뺄셈방향성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역사상에 성공한 적이 없다. 미래를 얻기위해 지금을 소진시키거나 소진해야한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다. 시선을 좁혀 가까운 곳도 그러할 수밖에 없다.

3. 시민이 사회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리 쉽지 않다. 깨달음에 근사하는 자각과 주변 사람들을 통해 겨우 일의 꼬리가 희미하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덧셈이 그리 어렵고, 방향을 자유롭게 잡지 못하는 것은 진보라고 자칭하는 이들의 보다낫다는 엘리트 의식, 목적지향성,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끊임없는 이분법의 늪때문일 것이다.

4. 철갑 외투를 벗지 않으면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도 나아지지도 않는다. 그런면에서 십여년이 넘은 이 책은 좋은 참고지침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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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열망이다/이야기하는 이는 물 긷는 장치에 묶인 낙타처럼 계속 원을 그리고 돌면서 부지런하게 비극을 길어 올리고, 매번 다시 이야기할 때마다 그 때의 감정도 되살아난다. 서사가 없었더라면 희미해졌을 감정이 생생하게 유지되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지금과는 더욱더 관련이 없는 감정이 서사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밑줄은 감정의 생성때문에 긋다. 이야기가 감정을 되살리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말이다. 새로운 서사는 그렇게 새로운 감정을 융기하게 하고 번지게 하는 것이다. 더구나 통찰과 맞닿아 있다면 시간과 속도를 그리 걱정할 일이 못될 것 같다.) 39

자아라는 것 역시 만들어지는 것, 당신의 삶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자,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술가가 되게 하는 어떤 작업이다. 늘 무언가 되어 가는 이 끝없는 과정은 당신이 종말을 맞이할 때 비로소 끝나며, 심지어 그 후에도 그 과정의 결과는 계속 살아남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라는 작은 우주와 그 자아가 반향을 일으키는 더 큰 세계의 작은 신이 된다. (몽테뉴는 ‘내 과제는 내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직업이며 유일한 소명이다‘라고 하였다. 예술에서도 최고의 예술은 자기 보존의 예술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85

작가의 재능이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또한 다른 삶의 머릿 속에서, ㅁㅐ우 친밀하지만, 지극히 외롭기도 한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한 시인은 ‘고독이 발바닥 굳은 살처럼 ㄷㅏ져졌다/아프지 않게 생의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외로움이 밖으로 향하고 있다면 고독은 안으로 아래로 향한다. 중심과 관련된 행위인 것이다. 외로움은 끊임없이 부여잡고자 하는 구심성을 ㄱㅏ진 욕망이지만 고독은 가득차오르는 순간 밖으로 향하는 원심성으로 번진다.) 96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능력보다 침묵하는 능력을 가졌으면 삶이 훨씬 더 윤택해졌을 것이라고 한다. 침묵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로 글쓰기는 권장할 만하다. 결과가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않는 나의 사유의 근육을 키우는 일만으로도 고독은 빛이 ㄴㅏ는 일이고, 글쓰기라는 행위자체가 현실을 거스르는 의미있는 일이다.) 100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들은 아주 희미하고, 예측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탄생한다. ( 약한연결의 일본작가는 SNS의 성격이 같은 부류의 같은 사람들만의 깊이를 추구하는 강한연결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관점과 다른 생각을 갖게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자신을 ㅂㅏ꾸는 것은 사소하고 다른 시공간을 통한 약한 연결들이 자신을 침식하고 돌아보게 만든다고 한다. 삶이라는 것이 ㄱㅖ획적이고 목적지향일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자유이겠지만, 스스로를 작품으로 만들기에는 너무도 협소한 고정관념일 것이다. 우연한 일들로 우리는 바뀌어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106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나병과 고통)/ 당사자를 당신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통을 당신의 몸이나 가슴, 혹은 머리에 새기고, 그다음엔 ㅁㅏ치 그 고통이 자신의 것인 양 반응한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이러한 동일시는 ㅇㅐ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51, 158 ( 한센병에 대한 통찰이 이 책 가운데 가장 끌리기도 하였는데, 혼자 궁금해하던 것 가운데 사람들이 정치적 참여를 하는 과정은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인식이 전제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들이 숙성된 뒤에서나 있을 수 있다는 진단때문에 이 대목을 더 ㅅㅐ기게 된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의 맹점을 인식하되, 자신을 벗어나거나 구조를 의문시하지 않는 경우도 ㄷㅐ부분이다. 인식은 나아가지 못하고 맴돈다. 그런 ㅅㅏ람들이 안타깝게도 대부분이다. 문제를 인식하기에 성숙하다고 보아야 ㅎㅏ지만, 이면을 살피려고 ㅎㅏ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 전체로 확장하려하지 않고 보고싶은 것만 보게되는 이분법의 아류에 머무는 인식은 ㅇㅣ렇게 따끔한 사유 속에 성숙으로 나아갔으면 싶다.)

정신의 무감각 – 스스로 냉담해짐으로써 살아남으려는 전략. 이것은 “비인간화”의 한 측면이자 실패한 복구과정이다. 이런 무감각은 자아의 경계를 수축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감정이입은 그 경계를 확장한다. 161 (얼마나 많은 냉담이 지금여기 공존하는가. 끊임없이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벌레취급하는 그들의 정신승리를 목도하는 것은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시간에 무감각하며 자신만 옳다는 반지성주의의 표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조차 과분한 일인지도 모른다.)

10-20년 전부터 화가들의 관심은 대상에서 과정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당연한 결과로 빛의 예술, 동작의 예술, 체제에 ㄷㅐ한 간섭의 예술, 행동과 지각을 자극하는 예술이 등장했다. 나의 친구 루시는 이 변화를 ‘미술 대상의 비실물화‘라고 칭했다. 283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으로 타인의 현실적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 감정이입을 탄생시키는 상상적 도약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들어가 느끼다 286 ( 한 장소에 지나치게 머무르면 자신 조차 제대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관성을 갖고 보고싶은 것만 보게 만든다. 그래서 늘 여기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시공간의 이동이 그러하며 일박의 공간이동은 미처 보지 못했던 관계들을 헤아리게 만든다. ‘관성의 착각‘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고정관계에 우리는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외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을 밀어내는 연습들이 필요하다. 주기를 갖고...)

우리는 정상적인 것과 미친 것, 좋은 것과 파괴적인 것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그 사이에 마치 뚜렷한 경계가 있다는 듯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수천 가지 방식으로 서로를 취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 덕분에 즐거움을 얻고, 누군가는 범죄를 저지르고 악몽을 꾼다. 302 (이분법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이래로 버리지 않는 인식법이다. 여전히 그 방법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지식체계를 구성해나간다. 하지만 2의 N승만큼 봐야하는 것들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이다. 전체의 절반의 절반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사유를 ㄱㅓ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전체를 향해서....또 ㅎㅏ나는 총체를 가정하면서 ㄴㅐ려와야할 것이다. 여전히 흑백이 횡행하는 세상이기에 말이다.)

볕뉘.

0. 고독에 대한 시리즈 가운데 한권을 주말에 읽다. 맨스플레인에 대한 선입견때문이었을까, 선입견과 달리 수려한 글쓰기와 깊이에 매료되어 몰입하였다. 돌아오는 길, [어둠 속의 희망]도 구해 읽었는데, 십여년의 시차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하고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작품으로 풀어내는 모습이 놀랍다.

1. 이야기의 힘, 고독, 글쓰기의 힘, 그리고 연대에 대한 부제도 잘 어울린다. 정작 사이글을 읽을 때는 딴 생각이 난다. 그래서 붙잡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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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말들 : 안과밖, 구심성과 원심성, 욕구-욕망과 사랑, 기쁨-슬픔-욕망, 보이지 않는 것(숨은 것)을 다루는 이야기와 노출시키고 보여주는 이야기, 침묵할 수 있는 능력과 말할 수 있는 능력, 네트워크-접속(연결)과 관계, 굳건함과 관대함, 능동과 수동, 자유와 예속

1. ‘현대의 우울‘을 말한 바우만은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염두에 둔다. 유행이나 패션, 화장 등등 자본주의가 발빠른 외양을 띠게 되는 19세기 중반, 몸을 극한까지 밀어부쳐, 시대를 안은 그는 우울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고독을 쓸 수 있는 자였다. 그리고 그 자양분을 오로지 예술로 완성하고자 하였다.(보들레르 파리의 우울에서) 세기반이 지난 지금, 파리의 모습은 여전히 재림하여 날카로운 쾌락과 고통을 변주중이다. 살림살이는 여전히 반복되며, 닫힌 시스템은 삶과 사람들의 일상을 위태롭게 복제해낸다. 우리는 외줄을 타고 간다. 두 번 살 수 없어 이리 가야한다.

2. B 가 말한 타인이 없다를 느끼는 ‘외로움‘과 혼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고독‘. 서로 다른 곳을 손짓하는 손끝. 소비만 있고 사유는 찾아보기 힘든 곳. 살아지기만 할 뿐 살아가기는 어려운 곳. 그 곳에서 외로움은 끊임없이 무엇을 끌어당겨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구심성이다. 욕망과 닮아있다. 반면고독은 제법 멀리가고자 한다. 사랑과 닮아간다. 사랑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사랑하는 ‘나‘는 조금씩 세상에 옮겨 심어진다. 욕망은 끊임없이 소비를 원한다면 사랑은 소유를 원한다. 욕망의 충족은 대상의 소멸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랑은 대상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커지고, 오래 지속될수록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욕망이 자기 파괴적이라면 사랑은 자기 영속적이다.(바우만의 리퀴드러브에서) 외로움이 초조와 불안에 가깝다면, 고독은 굳건함, 그리고 사랑과 섞이는 점이지대는 관대함과 너그러움이라는 정서가 배여있는 것은 아닐까. 외로움이 소비와 짝이라면 고독이나 사랑은 만들어 나아가기와 단짝은 아닐까.

3. S가 말한 ‘고독은 어떤 색깔일까. 갈색이어야만 할까.‘ 연민과 사랑을 슬며시 끼워넣는다면 어쩌면 슬픔에서 기쁨으로가는 중은 아닐까. 기쁨으로 인한 욕망이 슬픔으로 연한 욕망보다 강하고 짜릿하다면, 고독은 연갈색에서 노랑으로 그리고 분홍사이 쯤 어디를 거닐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조용미 기억의 행성에서)

4. 우리는 D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울림을 얻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거나 심지어 그 이야기의 후예자나 후계자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읽은 이야기의 혈류가 그 누군가가 살아온 이야기의 혈류와 만나는 것 같지 않은가, 같이 읽은 책은 우리의 공통 조상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고독의 먼사촌이 사랑의 먼사촌으로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존버거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D가 말한 ‘불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 소극적 능력‘만이 아니라 작은 시간들을 그러모아 손에서 손으로,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은밀하게 전해지는 희망의 불씨같은 것은 아닐까

5. ‘함께 글쓰기‘는 저항행위라고 한다.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순간을 지키기위해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른 것들과 함께 그 순간은 지나가겠지만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이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이 ‘사소한‘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고독의 시간은 이렇게 사랑의 그림자로 다가와 불확실성을 줄여준다는 사실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족. 데카르트는 영혼과 몸을 격리시키고, 학문을 원심분리하여, 분리된 몸과 영혼, 꿈 사이 최종소비의 즙으로 ‘나‘를 가득채우시도다. ‘악마의 맷돌(시장이 아니라 사유)‘ 창시자인 데카르트에게 온전한 사유의 구할을 빼앗겼다. 우리 사유의 구제를 위해 신체로부터 정서, 영혼, 신을 이어붙여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거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시작이다. *벤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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