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없고 타자만 있는 것인가?


 


니체와 철학

 

발생론적 발상으로 일관된 초월론적 경험론으로부터 어떤 실천이 유도되는가?


(1) 사유의 강제:


 ‘생은 사유의 능동적 힘이고, 사유는 생의 긍정적 힘이다. 사유하는 것은 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렇다면 사유란 무엇인가?

 

프루스트와 기호들

 

진리는 앞서 존재하는 적극적 의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고 내의 폭력의 결과라는, 이 테마 이상으로 프루스트가 강조하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의 맛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과거의 기억이나 소환이 아니다. 마들렌을 통해 기호의 해독방식을 배

우고 이 기쁨의 비밀을 이해한다. 이처럼 기호를 해독하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최종적으로 어떤 종류의 진리의 계시에 도달한다. 우연적인 기호와 만남, 그 해독방식의 습득이라는 경험이 프루스트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사유의 새로운 상을 제시하기에 이 책을 이리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들렌은 나에게 비의지적·무의식적인 상기를 강요한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 ‘강제이다. 이 폭력 내지 강제의 작용에 의해서 비로소 사람은 사유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진리에 도달한다. 진리는 어쩔 수 없이 사유하게 됨의 결과로서 획득된다. 사람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하게끔 된다. 사고는 강제의 압력에 의해서만 개시되는 것이고, 그것을 강제하는 기호는 항상 우연적 만남의 대상이다.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은 사고의 발생에 대한 질문이다. 사물을 생각한다는 사태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는 그것을 폭력이나 강제우연적 만남에 의해 설명한다.

 

반복은 동일한 것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동일한 것이 계속되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반복은 매회가 교환 불가능, 치환 불가능하다. 습관은 그러한 하나하나 교환 불가능, 치환 불가능한 경험의 반복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 즉 차이를 훔쳐내는 것으로 성립한다. 그리하여 성립한 습관이 인간 행동의 규범이 된다. 사람은 반복 속에 차이를 훔쳐내는것으로 살고 있다. 반복은 매번 새롭게 차이를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새로움에 매번 직면하고 있어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이 계속되어간다는 기대 속에서 비로소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수동적 종합이라는 지복이라 부르고, 인간은 이 지복 속에 멈춰있기를 원한다. 이것을 되짚어보면 사고를 강제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란 수동적 종합이라는 지복을 방해하는 한 불법침입이고 폭력이며 이다. 철학이란 앎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출발점은 애지가 아니라 혐지다. 하이데거도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게끔 된다고 했는데 사유시키는 것이란 선물이라고 했다. 이 은유 안에는 인간이 진리를 사랑하고 사유하는 것을 추구하는 욕망과 의지가 있다는 주관적인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유하면 사유시키는 것과 사이에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다가 사유가 발생하는 현장을 놓쳐버린다. 들뢰즈는 사유를 강제하는 폭력을 기호라 부르고 있다. 기호는 선사되는 것이 아니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만남의 대상은 그대로 있는 소여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상의 변화에 관계하는 무언가를 받아들였을 때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은 변화와 단절될 수 없다.

 

(2) 사유의 습득과 방법


주체를 전제할 수 없으므로 의지도 전제할 수 없다. 어떤 위화감이나 의문을 느끼게 하는 기존 질문과 만남이야말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다. 이것은 해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건인 것이다. 이런 사유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기분을 모두 버리는 것이다. 사건만을 초월론적인 요소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조우하는 것, 그것은 발견하는 것이고, 포획하는 것이며, 훔치는 것이다. , 긴 시간에 걸쳐 준비하는 것 이외에, 발견하기 위한 방법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사유 못지 않게 습득이 중요한데, 수영처럼 흐르는 물 속에 뛰어들지 않고는 배울 수가 없다. 그것은 같은 것의 재생으로 행해지지 않고 기호에 대한 응답 및 다른 것과 만남으로 이뤄진다. 사람은 자신과 일치하지 않은 것에 대응하려해서 무언가를 배운다. 그때의 응답들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는 하이데거와 유사하지만 교사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 속에서 전개하도록 몇몇 기호를 발할 수 있는 자이다.

 

질문 그 자체를 결정하고 구성하는 능력 속에 우리는 참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문제에서 출발하는데 거짓문제들로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비존재의 문제에서 쓸데없다는 허무를 상상하거나, 기대하고 있지 않은 질서가 나오면 무질서하다거나,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이랬을텐데 가정하는 것들이다. 문제는 적절한 방식으로 제기되면 스스로 해결되지만(정치경제학 비판), 중요한 것은 해결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를 발견하는 것, 문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문제로서 규정되는 조작들, 문제로서 제기하기 위해 이용되는 수단과 매개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론에서부터도 실천의 시점에서부터도 인간의 역사는 문제 구성의 역사이다. 베르그송의 거짓문제에 대한 지적과 문제의식은 비슷하지만 그는 너무 깔끔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차이와 반복4장에서 문제와 질문을 구별하고 있다. 문제란 질문이 거기서부터 행해지는 기원이다. 사고는 문제로부터 질문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칸트의 이름을 들면서 문제라는 것은 이념’(자아, 세계, )이라고 한다. 이런 문제는 해에 의해서는 소거되지 않는다. 확실히 문제는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우리는 그 해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질문이 올바른 해를 발견했다고 해서 최초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문제를 필요없다고 던져버리는 것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 해를 생각함에 있어 필요한 것은 여건이 해의 싹을 포함하도록 점진적으로 문제의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어서 이 이념 다양체라고도 기술한다.

 

이념이 다양체라면 문제에 대한 해는 그것을 규정하는 조건들에 의해 변화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이 잠재성을 억압하고 이것이 해이다라고 하여 문제를 가둬버리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는 그것에 대한 여러 해들의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문제를 덮고 있는 그 해들 속에서 소실되기는커녕 집요하게 지속한다. 문제는 풀려야할 것임과 동시에 규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앎이 아니라 배움이다. 배움에 있어서 문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통찰해야만 할 것이다.

 

(3) 물질에 부가되는 주체성:


시네마2


<유럽 1951> 영화에서 주인공인 아이린은 공장 체험을 하고 마치 수인들을 보는 듯했어요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주체성의 새로운 의미를 보려고 한다. 베르그송이 쓴 자동적 재인(소는 풀을 재인하고 그것을 먹는다)과 주의깊은 재인(그때마다 대상으로 향하고 특이성과 직면한다)이란 개념을 쓴다. 지각과 행동의 거리가 생기면 홀연 주체성이 나타난다.(1주체성) 이것은 연장 방식이 결정되어 있고, 새로운 것을 야기하지 않는다. 주의 깊은 재인은 회상에 의해 일어난다.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었는가? 이것이었는가? 회상도 또한 앞의 거리를 메우려고 한다. ’아아, 그렇다. 여기는 공장이다.., 이곳은 일해야 할 곳이다...‘ 이것에 잠재적인 것을 현동화시켜 대상이 다양한 회로를 통과하고 공장은 감옥이다라는 지각을 낳고 새로운 주체성을 발동시킨다. 주의깊은 재인은 성공했을 때보다도 실패했을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 들뢰즈는 이를 제 2의 주체성. 물질에 부가되는 주체성이라 부른다. 세계라는 물질의 요청 내지는 필연성에 합치하도록 해서 새로운 주체성이 발동하는 것이다. 주체/객체라는 도식을 갖지 않아 들뢰즈는 객체에 부가된다라고 말하지 않고 물질에 부가된다고 말한다.


3. 실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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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자가 없으면 자아도 없는가?

Ⅲ 인간은 왜 변화하는 나를 보지 못하나?


 

경험론과 주체성외 다수 저작.

 

합리론은 주체를 전제한다. 그것에 비해 경험론은 주체 그 자체의 발생을 묻는다. 주체를 구성된 것으로서 파악한다. 이런 의미에서 합리론이야말로 보수적이다. 그 이상으로는 의심을 진행시키지 않는 지점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 자연’, 즉 인간 본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은 자연이 아니다. 정신에는 자연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인간 본성은 관념연합의 효과로서 발생한다. 바꿔 말하면 관념연합의 방식이 바뀌면 인간본성은 변화한다. 주체도 자연도 전제하지 않고 단지 발생을 묻는 것, 동일한 것이 이성에 관해서도 기술된다. “정신은 이성이 아니다. 이성은 정신의 한 변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은 본능, 습관, 자연이라고 불릴 것이다.” 발생에 관해 묻는 것은 변화에 관해 묻는 것이고, 변화의 조건을 묻는 것이다. 들뢰즈가 훔에게서 발견하고 있는 것은 철학이 그때까지 전제로 해온 관념들의 변화 가능성을 묻는 철학이다.

 

초월론적 영역은 경험적 영역을 정초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칸트 이후의 초월론 철학은 경험적 영역을 모방하는것으로 그것을 그리고, 발생의 문제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는다. 발생을 묻는 것은 변화를 묻는 것, 그리고 변화의 조건을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발생을 묻지 않는 초월론 철학은 최종적인 곳에서 변화의 조건에 관한 질문을 봉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초월론 철학의 가능성을 계승함과 동시게 그것이 잃어버린 발생의 질문을 경험론 철학에 의해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려낼 수 있다. ‘자아개체인칭을 전제하지 않는 초월론적 영역을 그려내기 위해 의미’, ‘사건’, ‘특이성의 개념을 내세웠다.

 

무인도의 원인과 이유

미셸 투르니에와 타자가 없는 세계

 

(1) 무인도


무인상태를 철학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주체도 객체도 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무인상태는 어떻게 하면 붕괴할까? 그곳에 사람이 사는 것만으로는 그 상태가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한 번에 볼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보이는 정면 외에 방이나 복도 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보고 있지 않은 부분을 나는 동시에 타자에게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자가 야기하는 효과란 내가 지각하는 대상이나 내가 생각하는 관념에 따라 주변적인 세계를 조직하는 것이다. 타자에 의해서 야기되는 주변적인 세계의 조직화는 타자가 다른 부분을 보기 위해서 이동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다른 쪽으로 이행을 조정하는 추이의 규칙에 따라 그 대상 전체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의 그저 일부밖에 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하면, 타자가 야기하는 시간적· 공간적인 효과 속에 몸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섬에서 보지 않은 것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타자가 있지 않으므로 자아도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의식과 그 대상의 구별이 성립하지 않는다. “의식과 그 대상은 이미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무인도 위에 있는 피조물은 그 자신이 무인도이다.” “섬은 인간의 몽상에 지나지 않고, 사람은 섬의 순수의식이다.” 이와같이 우리는, 감성에 의한 직관의 형식으로서 시공간의 발생과정, 나아가서는 그 형식으로 다양한 것을 수용하는 주체 내지 자아의 발생 과정을 묘사한 이론으로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커튼 뒤에 있지 않으며 커튼 뒤에 있다고 상정한다. 이 표현은 흄이 표현한 믿음에 의한 소여의 넘어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칸트의 초월론적 통각을 너머서는 것이다. 여기서 발생을 묻고, 타자가 야기하는 효과에 주목했다. 타자는 세계 속의 여백과 추이를 보증한다. 타자는 근접과 유사의 윤활제이다.라고 못박는다. 실제로 인간은 항상 외부로부터 섬과 조우하고, 사실상 그들의 존재는 섬의 무인상태를 방해한다. 섬의 무인상태가 방해받는다는 것은 대상의 대상성, 지각의 구조, 자아, 통각이라는 것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외부로부터 오는 타자에 의해 칸트가 상정하고 있던 몇몇 개념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이 칸트를 너머서는 것이다.

 

(2) 사건


주름


들뢰즈에게 초월론적인 것이란 사건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특이성이라고도 부른다. “여러 특이성들이야말로 참된 초월론적인 사건이다.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잠재성)론의 세계란 수렴한 여러 가능한 계열들의 다발이다. 사건에 있어서 계열은 분기하는 것이다. 계열이 분기한다는 것은 거기에서 다른 개체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건에 앞서서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란 개체에 선행하고 개체를 발생시키는 발생소에 다름 아니다. 여러 개체들은 그것들이 포섭하고 있는 여러 특이성들의 주변에서 구성된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가 아슬아슬한 곳에서 현실세계에 대한 봉사로 도망친 가능세계론으로 사건의 개념을 스스로 현실세계에서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상정된 사건에서, 현상에 있어서 그 실현으로 그리고 명제에 있어서 그 표현으로 향하는 정적 발생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질문되어야 할 것은 현상에서 사건으로 직접 향하는 동적 생성이다.

 

들뢰즈의 잠재성이란 개념은 필시 이 과제로부터 요청된 것이다. 그 지향하는 바는 가능성개념의 탈구축이다. 가능세계는 가능성이라는 양상하에 있는 것이지만, 들뢰즈는 이것을 실재성과 쌍으로 파악한 다음, 그것에 대립하는 다른 쌍으로서 잠재성과 현동성이라는 쌍을 제시한다.가능성이란 늘 어떤 사항이 실현된 뒤에 오는 것이고 가능성-실재성으로 생각되고 있는 발생은 참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소극적으로 발견된 발생을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이 되려면 잠재성-현동성의 축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특이성-사건이 바로 분자적인 것이 몰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다. 미세지각은 그 자체가 특이성의 입자이고 차이적=미분적이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구별하기는 불가능한 이상 아직 이화=분화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미세지각(특이성-사건)이 응축되어 어떤 역치를 넘으면 이화=분화작용이 일어난다. 잠재적인 영역에 있던 미세지각(특이성-사건)은 현동화하고 통각(의식)이 발행한다.

 

(3) 초월론적 원리

 

자아라는 통각도, 시간·공간이라는 형식도, 이성 등의 능력도 기성의 것으로 전제하기는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발생한다. 이렇게 매듭을 지은 들뢰즈는 이 도구들을 가지고 정신분석으로 향한다. 정신분석이란 일반적으로 사건에 관한 과학이다.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힌트를 얻으면서 사건의 개념을 구상하고 거기서부터 정신분석의 검토로 향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재검토하는 것으로 칸트가 초월론적 주체를 발견하고, 그 초월론적 주체에 발생의 관점에서 재검토를 더한 것이 프로이트다. 칸트는 자아를 상정하고 있었지만, 프로이트는 자아의 발생을 그린다. 또한 자아의 발생에 다소 뒤늦게 초자아라 불리는 심급도 등장한다. 자아는 자신이 현실세계 속에서 매우 약한 존재라는 것, 자신은 절대로 대적할 수 없는 외부의 권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배워간다. 자아가 그 권위를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초자아이다. 초자아는 자아를 감시한다. 아마 이것을 칸트가 양심이라 부를텐데, 그것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자아는 초자아에게 감시받으면서 에스를 길들이며 스스로 욕망의 달성을 지향한다.

 

들뢰즈는 이 발상에 이끌리는데 에스와 자아를 이렇게 비튼다. “에스에는 여러 국소적인 자아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 국소적인 자아들은 각자가 부분대상에 의해 구동되고 있다. 부분대상이란 유방, 손가락, 입술, 항문 등 인물의 형태로 통합되어 있지 않은 욕망의 원초적인 대상이다. 부분대상은 미세지각의 요소이다. 무의식은 차이적=미분적인 것으로, 미세지각의 무의식이고, 바로 그 때문에 무의식은 의식과 본성상 다른 것이다. 특이성-사건이 바로 자아를 생성한다.

 

쾌락원리의 저편프로이트.

 

전쟁 신경증, 외상성 신경증에서 보이는 반복강박. 쾌락원리가 미치지 않는 저편이 있다. 외적 쇼크에 대해 자극보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불안은 심적장치의 하나이다. 외적인 쇼크는 이곳에 유입되는 과잉에너지로 이미지화할 수 있다. 적당하면 감당할 수 있지만, 한 곳에 집중되어 생기는 것이 불안이다. 불안이란 마음이 스스로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이자 자극보호이다. 하지만 재해나 전쟁 등 돌발 사태에서는 불안 역시 준비가 갖춰지지 못한다. 이럴 때 강력한 쇼크가 생긴다. 이 경우 심적 장치는 유입하는 에너지를 구속할 수 없다. 그 에너지가 너무 많으면 자극보호의 기능 그 자체가 허물어져 버린다. 이것이 외상성 신경증이다. 심적장치는 또 불안을 증폭시켜 대처한다는 것이 재현을 반복하게 되고 만다. 꿈 속에서조차.

 

프로이트가 사변이라 부르고, 들뢰즈가 초월론적이라 형용한 작업은 여기부터 시작된다. 아시다시피 모든 생물의 목적은 죽임이다.라는 것이다. 삶의 본능은 죽음 본능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죽음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기체는 단지 자신의 방식으로만 죽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전력을 다해 배격한다. , 자기 자신의 죽음을 지향하고 있는 삶의 긴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삶의 본능은 죽음 본능의 부분을 근시안적으로 보았을 때 발견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프로이트는 여기서 탐구를 멈춰버렸다. 죽음본능이라는 초월론적 원리 그 자체의 발생은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타나토스, 중성에너지란 자아에 역류해서 생기는데 그 앞에 죽음 본능이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가?

 

우울증이란 어떤 대상의 상실에 의해 일어나는 전신증상이다. 우울증 환자는 잃어버린 대상을 자아 속에 재현함으로써 그 대상 상실을 뛰어넘으려 한다. 즉 잃어버린 대상으로 향해져 있던 리비도를자기 안에서 대상재현에 사용하여 상실을 보상한다. 이 과정은 대상집중의 방기와 대상과의 동일화라는 말로 설명된다. 대상집중은 성애적 경향을 욕구로 느끼는 에스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자아는 성장함에 따라 대상집중의 존재를 이해함과 함께 그것을 저지하고 에스의 관심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려고 시도한다. 그를 위해 자아가 행하는 것이 대상과 동일화이다. 에스는 다른 대상을 선택하여 자아는 이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이렇게 자아의 성격은 이 침전에 의해 구성된다. 들뢰즈는 이렇게 죽음 본능이 탈성화된 에너지에 앞서 존재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타나토스는 에로스의 탈성화와, 즉 프로이트가 말하고 있는 그러한 중성적이고 이동성을 갖는 에너지의 형성과 완전히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에너지는 타나토스에 대한 봉사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타나토스를 구성하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에스가 느끼는 욕구는 성애적 경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즉 에로스에 다름 아니다. 자아가 동일화에 의해 리비도를 찬탈하는 시도란, 요컨대 에로스에 대한 투쟁이다. 에로스는 생에 소란을 야기한다. 거기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긴장을 피한다는 쾌락원리에 따라 에로스를 탈성화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리고 두 종류의 본능 사이에서 자아는 불편부당하게는 있을 수 없다. 그 동일화의 작업과 승화작업에 의해 자아는 에스속의 죽음 본능에 가담하여 리비도를 정복하려고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것이 에스 속의 죽음 본능에 대한 봉사이다. 거꾸로 들뢰즈에겐 죽음 본능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탈성화된 중성 에너지야말로 이것을 구성하고 탈성화된 에로스적 에너지야말로 타나토스를 구성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질문한다. 그는 타나토스의 발생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쾌락원리는 경험적 영역을 지배하는 원리이고, 타나토스, 즉 죽음 본능은 그 지배를 정초한다는 의미에서 초월론적 원리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보아왔듯이 초월론적 원리는 경험적 원리와 불가분한 형태로, 그것과 나란히 생성된다. 따라서 초월론적 원리는 경험적 원리의 기초이기는 하지만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그만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2. 원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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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둘로만 나누는 습관은 몰지각한 것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흄의 질문이란 정신은 어떻게 하나의 주체로 생성하는가?라는 것이다. 흄에 의하면 정신이란 서로 관계를 갖지 않는 흩어진 관념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은 그 상태로는 어떠한 인식도 갖지 않는다. 정신이 어떤 의식을 갖는 것은 그러한 흩어진 관념들을 관계짓고 연합시킬 때이다. 말하자면 관념들의 단순한 집합이 하나의 체계가 될 때 인식이 발생한다. 천 번 태양이 떠오른다고 해도 내일도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느 때에 우리가 그렇게 믿는다는 사태가 일어난다. 인식이란 그렇게 해서 우리가 본 적도 없는 것, 접한 적도 없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인식은 소여의 경험을 넘어서 있다. 관념들이 연합됨에 의해 이러한 믿음이 발생하고 소여의 경험을 넘어섬으로써 우리의 인식이 성립한다. 이것이 흩어진 관념의 단순한 집합이 하나의 체계로 생성함에, 요컨대 정신이 하나의 주체로 생성함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관념연합이라는 이론은 확실히 저것보다는 오히려 이것이를 설명할 수 없다. ”왜 하나의 특수한 의식 속에서, 이러이러한 순간에, 이 지각이, 다른 관념보다도 오히려 이 이러이러한 관념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 다른 관념보다도 오히려 이 관념이 환기된다는 것은 관념연합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두 관념들이 상상 속에서 자의적으로 접합될 때조차도, 두 관념을 비교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그 특수한 정황. 이 정황이라는 개념은 흄 철학 속에서 항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러면 흄은 잘 알고 있지 못한 채 정황을 개념화하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흄의 연합설이라는 철학적 이론은 지각, 관념, 경험, 믿음, 넘어섬, 그리고 정황이라는 요소에 의해 구성된 복잡한 것이 된다.

 

철학연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철학자에게 사유를 강요한 어떠한 질문, 그 철학자 본인에게조차 명석하게 의식되고 있지 않은 그 질문을 그려내는 것, 때로는 그 철학자 본인이 의식해서 개념화한 것도 아닌 개념마저 사용해서, 때로는 그 대상을 논하기에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를 뛰어넘는 것조차 꺼리지 않고 그 질문을 그려내는 것, 들뢰즈는 그것이야말로 철학연구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철학자의 의식을 넘는 것으로서의 사유, 즉 말해진 것과는 다르게 파악될 수 있는, 말해진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말해진 것 이전에 위치하는 것으로서의 사유. 들뢰즈는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파악하여 사유의 이미지라 부르고 있다.

 

(1) 데카르트는 모든 전제를 제거하고 자신의 철학을 개시한 것일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제 1의 진리이기 위해서는 사람은 자아(), 사고(생각한다), 존재(있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나는 사고한다의 순수자아가 개시와 같은 외관을 드러내고 있어도 그것은 그 순수자아가 자신의 전제들을 이미 경험적 자아 속으로 되돌려보낸 결과일 뿐이다. 사유의 이미지는 이렇게 철학자가 스스로 사유한 것을 말로 분석해낼 때 암묵적인 전제를 폭로하기 위한 도구이다.


(2) 금이간 코기토: ‘생각하는 나가 나의 존재를 규정한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이것만으로 나의 존재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또한 어떠한 형식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나타나는지 알 수 없다. 나의 존재는 어떠한 형식에 있어서 규정되는 것인가? 바로 시간이라는 형식에 있어서라고 칸트는 대답한다. 시간 속에서 비로소 생각하는 나의 존재가 규정된다. 그 때 사고하는 나(능동적 자아)와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수동적 자아)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따라서 나는 한 수동적 자아로서 규정되는 것이지만, 그 자아에게는 사고하는 다른것이다. 이것을 랭보는 나란 한 사람의 타자이다.”라고 한다. 칸트는 자아 속의 균열을 발견한 것이다.

 

데카르트가 다루고 있던 질문을 비판하는 것에 의해 행해지는 새로운 질문의 발견과 개념의 창조. 이것이야말로 질문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식이고, 개념을 창조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철학에서조차 인간은 잘 이해되고 있지 않다. 혹은 잘못 설정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문제와 관련시켜서만 개념을 창조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와 시뮬라크르

 

철학은 어디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만드는 것,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신화와 영혼의 동요를 필요로 하는 모든 자를 고발하는 것, 그저 그뿐.

 

루크레티우스는 가능한 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극히 적은 것으로 족하다.....그러나 영혼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기법이 필요해진다고 기술하고 있다. 들뢰즈는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자연의 관념이다. 이것은 구별을 가르치는 관념이다. , 인간의 삶 속에서 무엇이 자연에 속하고 무엇이 자연에 속하지 않는지, 그것을 자연의 관념은 가르친다. 자연스러운 관습도 있고, 그런 규약도 있고, 자연권이라는 것도 있기에 발명과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 발명이란 자연 그 자체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은 신화와는 대립한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의 습관이나 규약이나 발명이나 산업이 원인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 뒤섞이는 신화와, 신화에 의해 인간의 감정과 작업 속에 야기되는 거짓된 무한의 결과인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는 자연주의자다. 그는 신들에 관해 말하는 대신 자연에 관해 말한다.


1. 방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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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다. 치과의사가 나오고 전직 대통령이 겹쳐온다. 날기보다는 떠 있다. 가파른 경사 위에 자연스럽게 떴다 안착하는 법을 배운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런데 왜 불안한가. 꿈을 접으며 그래 그래도 된다. 안심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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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속에 꿈. 그렇게 몇 번 거듭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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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실이 썰렁하다.  작업을 하다가 늦은 점심하러 간다. 맞파람에는 제법 버거운 느낌이 드는데, 오늘은 벨로가 괜찮다 싶다. 식사를 하고 식당 난로가 마음에 들어 묻는다. 오방히터 어디서 산 거예요. 하니 저기 다리 근처 티마트에도 있단다. 2년 썼는데 하나 더 살려고 한다고....그래서 달린다. 더 작은 용량의 히터가 있어 미니벨로 짐받이에 싣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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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이 손에 잡힐 줄 싶었는데, 마음은 싱숭하여 자리잡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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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꼭지가 가로등이다.  빛과어둠.은 선악처럼 우리의 일상의 절망과 희망을 담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늘 거창했던 것이다.  그 커다란 대문자가 작게 드리워지면 어떨까. 터널을 빠져나오듯, 터널로 빨려들어가듯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 빛나지 않더라도 그 가로등만 보면 따듯한 집에 다가서는 느낌이나 안심이 자리잡기도 할 것이다.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빛이라니, 눈이 폭폭 내리는 소리까지 들려주는 주황빛이라니....인기척을 닮기라도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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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드러선 대문자들을 조금씩 균열내어 봐야겠다. 그러다보면 나의 입말들도 작아지며 옹알옹알거릴 것이다. 그러다가 졸졸 흐르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물살을 막는 척하는 작은 돌알갱이도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아진 말들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알려건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큰말들에 자갈을 물리고 싶다. 더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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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작아지는 적어지는 단어와 언어와 말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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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2인분이상에 끌려 다가서면/ 3인분부터 주문을 할 수 있다/숯불.가스우삼겹 오뎅탕 계란찜 라면 여름이라면 빙수까지. 열한가지/6인분을 소화하지 못하면 나올 수 없다. 나갈 수 없지./어쩌지 못하는 쯔양. 어쩌지 못하는 포장.라면먹고 갈래 그냥갈래/젊은 부부는 오늘도 어쩌지 못해 빈 테이블. 아무 것도 못해 빈 겨울./시계추같이 왔다갔다 어쩌지 못하는 봄. 어쩌지 못할 밤./'서울의 봄' 아아-여기는 바다의 밤.겨울바다.바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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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차다. 숙제를 풀려고 끙끙대다 연락하길 수 차례 드디어 통화는 되고, 어이없다시피 문제가 풀린다. (을들은 편한 길만 생각하지 자신의 힘을 가늠할지 잘 몰라 정들에겐. 정들은 병들에게 점점 좁혀들이 밀지 드러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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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문학에 멀어진다. 아니 멀어졌다. 더 더구나 이슈가 되거나 많은 관객들이 몰리는 영화는 더욱 더. 집안 이십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봐야되나 싶기도 일터 삼십대와 이야기를 나누다 작품성이 좋다는 말에 이끌려 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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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문학밖을 거닐거나 영화가 영화밖을 거닐 수가 있을까.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주인공이란 인물과 대위의 레퍼토리란 벽에 갇혀 그 안을 맴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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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란, 픽션이란, 단체관람이란, 언론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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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들 사이를 번갈아 오가고 있다. 진도가 좀처럼 나가지 않아 걱정이다. 무척 잘 읽히는 책임에도 홀로 주춤거리는 마음때문에 그런 듯싶다. 새벽에 일어나 읽기를 이어간다.


2


이 책의 공유-물음은 기술이 인간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꾸는가이다. 내가 얼마나 바뀔 수밖에 없는가이다. 예전보다 얼마나 바뀌고 있는가이다.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들. 확신이라고 여기는 것들. 그 뿌리가 얼마나 부실한지 알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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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을 마지막쯤 미친듯이 좋아하며 쉬-를 누는 전두광의 장면, 광주 오적을 되뇌이며 데모하던 장면, 화장실로 향한다. 마저 볼 수가 없다. 파티장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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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은 자신의 말들을 믿지 않는 세상을 나무라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을 펼치기를 바라고 연구에연구를 거듭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 유사한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 내고 싶어 하는 책들이 나와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 부분들을 중동내고 또 열심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다른 눈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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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라는 X가 무엇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일상을 어떻게 엮고 있는지, 생생히 볼 수 있다. 날렵한 대국처럼 그 한수 한 수가 놀랍도록 밀도가 높다. 이렇게 다가서주어 고맙다. 늘 늦은 것은 없다. 지금이 가장 빠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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