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어떤 현실도 전적으로 합리적인 것은 아니며, 어떤 합리도 전적으로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현실에는 어느정도의 비합리가 개재됨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종교이며, 또 하나의 전체주의이다.

내가 말하는 '부조리 인간', 즉 '부조리를 의식하는 인간'은 늘 익숙하던 세계가 돌연 나의 고향, 나의 왕국이 아니라는 느낌, 이 느낌을 획득하는 자이다. 그러면 선험적 조건으로 부과된 부조리 앞에서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반항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하지만 반항은 원한과 다르다. 반항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타자로 하여금 인정케 하려는 반면, 원한은 질투와 더불어 소유하고 있지 않는 것을 탐낸다.

나라는 '존재'는 육체의 덩어리라는 '실존'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물,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부조리한 삶에 대한 있을 수 있는 대책으로는 '자살' '희망' '반항'이다. 이 가운데 자살이 해결책이 못 되는 것은 부조리의 한쪽 항인 '인간의 의식'을 삭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희망, 즉 종교가 해결책이 못되는 것은 부조리의 다른 쪽 항인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삭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과 종교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회피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장 존귀한 것은 의식의 끊임없는 유지라는 것인데, 반항이란 세계의 모순을 살아있는 의식으로 바라보며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살림 2004. <자살>, <종교>,/ <반항> . [부조리(를 인식하는)인간]은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현실을 반항하며 고쳐나가는 존재이지 않는가? 비록 다시 시작하더라도... ...연민과 아름다움과 시대정신을 뭍혀가야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란 쳇바퀴 안에 일--시장--소비의 무한증식만,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탈진한 욕망덩어리만 시체처럼 기어나오고.... .... 아~ 언제까지 그 쳇바퀴는 돌고, 언제까지 세뇌라는 뽕을 맞으며 내 몸뚱이를 굴려야 하나... 탈선하는 방법은 없는가? 쳇바퀴옆에 벗어날 궤도는 없는가?

오늘도 난 책장을 덮어버려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내가 배운 것이라곤 책속에 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책걸이해야한다는 바보같은 무의식만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051027

리처드 세넷은 현재의 불안정한 고용 환경으로 인해 인격의 타락이 불가피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장기간의 헌신이 드물어짐에 따라 신뢰관계는 방향을 잃고 느슨해졌으며, 의지와 행위가 분리되었다.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드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중략)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부 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것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영혼'을 보살피는 일조차 경쟁적인 시장에 종속된 셈이다.  교회, 사원, 회당이 직장의 요구와 경쟁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직장 안으로 이동한다. 기업들은 합병되고, 재구성되고, 재설계되고 사라진다. 경제는 롤러코스트만큼 기복이 심하다. 사회의 모든 제도들 가운데, 왜 우리는 보다 불확실한 제도를 통해 우리의 사회적, 영적,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는가?

자본주의가 우리의 물질적 복지를 개선시켰지만 "빈자와 부자를 분리하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너무나 많이 소진시키며, 항상 보다 만족스러운 세계로 이끄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 우리는 혼란을 겪고 있다. 가정은 해체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웃을 알지 못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동체 활동을 위한 시간이나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에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많은 이들의 삶은 일에서 오는 피로와 다시 일을 하기 위한 회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삶은 '새는 물항아리'와 같다. 그들은 조금씩 행복을 채워넣지만, 항아리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행복은 삶 전체이지 일련의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아렌트는 "과거에는 장인이나 활동가 누구도 '행복'을 요구하거나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단지 즐기고 싶기때문에 자신들이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러셀이 지적하듯이, 만약 삶의 의미가 오직 그 결과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 내일 잼을 만들어라. 어제 잼을 만들어라. 그러나 오늘을 잼을 만들지 말아라","당신은 자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당신의 자녀들도 그들의 자녀를 위해 마찬가지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잼을 먹지는 못한다."

주디스 윌리엄스는 <열정의 소비>에서, 시장이 우리의 열정을 소비하고, 그것이 더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장해제시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쇼핑은 가장 좋은 가격으로 최상의 물건을 구하려는 '사냥'이다.

우리를 막힘없는 소비와 부채, 더 긴 노동시간의 순환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 순환고리 속에 빨려들어간 사람들은 "소비가 삶의 의미와 만족까지 줄 것이라고 점점 더 기대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점차 타인 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 행동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 불어넣은 욕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낸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10대) -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십대의 학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호기심많고, 상상력 풍부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시기에 "적응된 온화함"을 심어줄 수 있다.

TV는 '일터로의 복귀'를 참을 만한 것으로 만들면서 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한다. - 사람들은 너무 피곤하거나 너무 바빠서 그러한 여가를 즐기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오락을 원한다. TV시청과 같은 오락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이 우리의 힘과 자원을 몽땅 소진시켜서 TV 시청 외에는 하고 싶은 것이 없도록 만들거나, TV 시청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으로 만든다.

051026 

1000 오늘 아침 일터 동료가 40대중반의 나이로 저세상으로 떠났다. 회의도중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는 중 숨졌다고 한다. 어제 밤, 피곤함에도 좀처럼 잠들기 힘들었다. 청정기 소리부터... 이 책으로 시작한 고민 덩어리는 선잠 끝에 정리가 되는 듯 하였는데, 일어나보니 정리된 것이 없다. 정리하여 내뱉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것으로 의식을 끌고가겠지?  일은 점점 많아지고, 일의 강도도 높아지고, 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표정관리도 해야되고...가치-의식까지 일의 덫에 놓여있는 우리의 일상은?

1651 (심근경색, 관*팀장 -- 점점 더 스트레스와 집중도는 커진다. 일요일 약간의 미통이 있었다고 하나 아침 동료와 이야기 도중 쓰러졌다한다.) 일의 부하는 늘어나고 사람은 그대로고 노는 것이 경쟁력이라 외쳐대고 너무 분열증적 증세 아닌가? 소화시켜낼 사람들이 있을까? 미친듯이 주입시키는 것은 아닐까? 업무상 과로로 인한 산재확율은 더욱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닌가? 평가의 엄밀함 - 경쟁심화 - 다면적 접근유도.......과연 종합적인 소화가 가능한 압력들인가?

1200  신은 죽었다. 하지만 연애는 탄생했다. 천민 자본을 돌려주는 한 축으로 연애란 종교는 탄생했다. 영원한 짝짓기의 신화, 그 틀에서 마음과 삶은 반복한다.  모든 열정은 성적열정으로 과도하게 집중했다. 무한궤도에 무임승차한 기분, 짜릿하고 달콤하다.  아편의 허무함처럼 일상의 그늘은 지칠줄 모르는 반복이다. 중독의 시야는 밖이 없다.

 

051027

" 사회의 현재 움직임은 건축에 어떤 운명을 마련해놓고 있는 걸까? 주위를 둘러보자...(중략) 점점 비좁아져가는 작은 실내, 나선형 계단 한쪽 구석에 마지못해 마련한 서재와 규방... 인간을 집어넣기 위한 정리함인 셈이다... 이는 감옥제도를 가족 집단에 응용한 것이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일정한 공간에 최소한의 재료를 사용해 가능한 한 많은 인간(서로 격리시킨 채)을 밀어넣는 것이 그것이다....이러한 경향, 그것은 기정사실로, 세분화의 결과이다...한마디로 각자가 스스로를 위해, 각자가 자기 집에서라는 개념이 점점 사회의 원리가 되는 반면 공공 재산은 흩어지고 낭비된다..." 파리, 1845..<아케이트 프로젝트>  400쪽

" 도심에서 일하는 수만 명의 가족이 밤에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잠을 잔다. 이러한 움직임은 조수와 비슷하다. 아침에 민중이 파리로 밀려와 저녁에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울한 모습이다.... 인류가 민중에게 이토록 낙담케 하는 모습을 조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덧붙이고 싶다" 랑보, [사회를 앞에 둔 노동자], 파리, 1868, 63쪽, <아케이드 프로젝트> 395쪽

" 지배자들은 피(경찰), 술수(패션), 마술(화려함)로 지위를 고수하려고 한다." 389쪽

" 모든 돌에는 전제권력의 표시가 남아있고, 온갖 허식은 주변의 공기를 말 그대로 무겁고 답답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어떤 이들은 이처럼 새로운 현란함 속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또 어떤 이들은 숨 막혀 하고, 어떤 이들은 불안하게 숨을 헐떡인다. 몇 세기에 걸쳐 해야 할 일을 불과 10년 안에 압축해서 해치워야 하는 열띤 성급함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다." 1861년 하반기 3호, <아케이드 프로젝트> 373쪽

 

 

 

 

051031 사무원 -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라벡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害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 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 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가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에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 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1542

051031 <내마음속의 그림> 62-63쪽

신석기 문명이래 농경사회는 아버지가 가족의 중심으로서 늘 다른 구성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의 일터는 자신만으 일터가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땀 흘리는 대동의 장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들어서 아버지는 아침이면 집을 떠나 해질녘이 돼서야 돌아오는 '반외부인'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서서히 남녀가 같은 선으로 나아가지만)... 이런 오늘의 상황을 다른 시대와 견주어본다면 아마도 구석기 시대가 제일 적절한 비교무대가 될 것이다. 아버지는 사냥이나 채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돌보던 시절....아버지의 역할이 혹성을 맴도는 인공위성처럼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는 점과 사나운 짐승을 잡다가 죽거나 다치는 생존투쟁이 극렬했다는 점도 생존 경쟁이 치열한 현대사회와 비교된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유전자 속에 입력된 아련한 기억으로부터 구석기 시대의 '야성의 울부짖음'을 공포스런 현실로 다시 '부팅'해내곤 하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들은 구석기시대의 말막한 고독, 그 태초의 고독 속으로 다시 빠벼들고 있는 거시다.





프랜시스 베이컨 작 1963, 1971

 

051102 자본주의가 만든 집단무의식 -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해서 안되는 것. 보아도 되는 것과 읽어서는 안되는 것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구분하게끔 길들여진다. - 유무형의 이데올로기적 금기...??!!

 

 

 

 

<자본의 시대>, 에릭홉스봄

부르조아들이 결코 지배자로서 등장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질서가 점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확대로 나아갔던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단 말인가?

1. 1848년의 혁명 - 본격적으로 진행된 경제활황은 오직 발전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모든 사회제도들의 방향을 돌려놓았다. 그는 산업혁명이 정치혁명을 삼켜버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2. 산업혁명 이후 축적된 자본의 이윤율 저하가 만들어낸 압력은 두 가지 방식을 통해 해소되었는데, 하나는 전 세계적인 철도사업의 활황과 이를 통한 자본의 이윤율 확대 추구였으며, 또 하나는 지구 전체의 자본주의화, 즉 하나의 자본주의적 세계의 창출이었다고 지적한다. 19세기 중반에 나타났던 급속한 경기활황이 세계시장의 확장에서 비롯되었다.

3. 기존의 유망사업이었던 섬유부문은 퇴조하고 대신 석탄과 철도와 같은 중공업이 새로운 성장 분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중공업은 여전히 기술적으로 혁명적인 발전에 힘입은 것이라기보다는 규모의 경제에 힘입은 바가 컸다. 탐험의 뒤를 종교가, 그리고 종교의 뒤를 상품들이 그리고 그 뒤를 함대가 이음으로써 세계의 통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4. 대호황이 미친 정치적 영향은 대부분의 정치적 지배자들로 하여금 숨쉴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으며 반대로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패배를 제공했다.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을 압도함으로써 나타난 상대적인 안정은 바로 그것 때문에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했다.

5. 자본주의적 발전이 초래한 호황의 결과로 국내 정치가 안정된 데 반해 국제정치는 전쟁에 휩쓸려 들어갔다고 지적하면서, 홉스봄은 1848년 이후의 국제정치는 혁명보다 전쟁이 지배한 시대였다. 전쟁이 초래된 것은 자본주의의 팽창과정 바로 그자체였다. 자본주의 팽창을 가속화시키려는 중심부의 야심이 계속 커져감에 따라, 비서구세계에서도 그들간의 그리고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긴장도가 점차 높아졌다.

6. 민족주의는 정치권력에 의해 조작되거나 창조된 신화에 불과했다. 네이션(nation)이란 인공적인 가공의 산물이었다. 때문에 이를 지속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제도의 중요성은 매우컸다. 결정적인 것은 국가였는데, 국가적 교육,병역 등이 그러한 제도들이다. 초등교육은 네이션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범주였다.

051112

공부는 자기가 좋아하거나 잘하거나 하고픈  십수여가지 가운데 하나,  섹스나 연애라는 것도 세상살며 열정을 바쳐야할, 바치고 있는 십수여가지 가운데 하나임에도 미친듯 모두 전부로 몰아간다.  어설픈 우리 현실은

060119

 31쪽  도정일 - 인문학적 소양이란 어떤 것인가? 두터운 세계를 위한 윤리학. - 타인을 이해한다. 타자를 이해한다. 우리말로 하면 역지사지, 바꿔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건데, 기본적으로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것은 내가 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열어서 타인을 받아들이거나 내가 나를 버리고 타인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자본주의 문화는 자아의 문화, 나르시시즘 문화죠. 문을 꼭 걸어 잠그로 이해만 따지고, 절대로 문을 열지 않고, 접촉은 이해관계가 통할 때만 하고. 그런 문화 속에서 자아라고 불리는 단단한 문의 폐쇄화가 끊임없이 일어나죠. 이럴 때일수록 껍질을 깨주는 상상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나는 예술이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인문학적 경험은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인문학적 삶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첫번째로 발하고 싶은 것은 '가슴을 여는 사회'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으 울타리를 걷어치울 줄도 알아야 하죠. 그래야 타자가 들어오거나 자기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아니에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10-21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 2005-10-22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잘알겠습니다. 즐거운 주말되시구요.
 

 

 051020

번개모임 기다리는 동안 동화읽는*** 모임 이야기를 듣다. 내부조직개편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데, 이 역시 절차민주주의나 운영위 틀내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분파중심으로 감정적 확산이 되고 있다한다. 사실 여성중심 조직이고 활동중심이어서 그럴 수 있을까 의아했는데, 적잖이 심각하고, 여러 사회단체의 흐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구조적이구나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어쩌면 나도 우리도 내 틀 안에서 다양성을 이야기할 뿐이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틀을 넘어서 오는 부분이 있다면 똑 같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 삶에 민주주의라는 것이 형식적인 것만 자리잡아 절차민주주의 마저 무시하는 천박함이 그대로 베여 있는 것일까? 자중심주의는 놀랄만큼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자조직, 그렇다고 이념이나 정책에 심각한 괴리가 있어서라면 좋을텐데. 인맥의 선을 벗어나지도 못하는 것 같다.

세상은 내것, 내 마음틀안에서 놀지 않으면 다 낯선 것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고, 음모가 있는 것이고,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이란 과도한 자신감이나 확신은 아닐까? 내가 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라고 하는 성찰이나 여유자체는 전혀 없는 것일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는 돌고 있는 하나일 뿐... ...

나는 열받고 제어할 수 없는 나, 다른 남들을 그래도 인정할 수 있을까? 그래 지동설론자인지 천동설론자인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숙의민주주의등 운영방식의 질적개선도 필요하지만 현재 피상적인 부분을 건드려보면?

전체적인 모임이나 회의에서 최대한 의견개진을 하지만 결정난 것을 따른다. 무엇인가 조직에 문제가 있다면 공식적인 자리에 의제를 던진다. 실세와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결론난 사항에 재논의를 하지 않는다.

조직은 늘 우리의 예지력이나 선견력을 뒷받침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늘 핍박받는 소수파이기에 정세파악부터 정세를 뚫고 가기위해 온몸을 바쳐야 한다. 우리는 다수파이지만 최대한 세를 넓히기위해 조직을 장악해야 한다.   정말, 그 악순환의 고리는 무엇일까? 숨막힐 듯한 침잠-반복, 기본적인 무의식적 정서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051021

어제 사회*동 세미나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히려 그는 합리와 비합리의 문제로 보는 듯하다. 한번 비교해본다. 너무 많은 변화 - 곳곳이 무엇이 원칙이고 어떻게 해야되는지?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조차 사안사안, 이것저것 무척이나 헛갈리는 듯하다.  코스모스도 카오스에서 나온 것이고, 합리도 비합리에서 나온 것이니, 이 혼돈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까? 남들은 200-300년 피로 얻은 것을 속성재배해서 큰 혼돈에 빠지고 갈피를 못잡는 것일까? 상식-비상식이 온통 버무려져 한 사람 한사람에게 도저히 이해 못하는 양끝사고/행동이 무차별적으로 표출되는 것일까?  일터에서 지난 7-8개월의 노력도 바보같은 몇몇 친구들에 의해 도로아미타불 지경으로, 원점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해야되는지? 자문도 되지 않고 자답도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혼돈-비상식 흐릿한 동선...참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서구주의가 우리의 흐릿한 흔적으로 햇살처럼 들어오지만 다시 되반사되는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이 버무려진다.

051027

교육관련 세미나를 하면서 또 한번 같은 주제 논의가 이어진다. 양면성 - 내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는 별개의 것.  - 다면 연기자로서 야수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가? 한덩어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세상 살아가기도 벅차서, 습관적으로 몸에 붙게 되는 것인가? 압축근대화의 변화가 이렇게 분열성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가? 너무 당연한 상식이나 고리들을 애써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이면우

 어제 중국차 모임이 있었다. 어쩌면 학교일의 가닥이 잡혀 번개삼아 모였는데 공식적 자축연이 되어버렸다. 차로 부족한지 모두 소주 한잔 더 해야한다고 조개구이 포장마차를 갔다.시간을 쪼개 달림을 하니 과자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운 셈, 옳거니 하구 국물로 속을 달래며 조개가 익기를 기다리다 시집 책갈피한 곳이 우연히 들어온다. 2-3초간의 응시...

<바다와 뻘>

밤게 짱망둥어 갯지렁이가 목숨을 괴발새발 뻘 위에 쓴다

온몸 밀며 끌며 쓴다 그러면 바다가 밀려와 말끔히 지운다

왜 하루 두 번 바다가 뻘을 지워버리는지

나이 쉰에 겨우 알았다 새로 살아라

목숨 흔적 열심히 남겨라

그러면, 그러면 또 지워주겠다아아 외치며 바다

막무가내 밀고 들어왔다

......................................................................................................... 그래 마음이 머문 그 시, 낯설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속에 책 2005-10-21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할 거리가 많은 시네요....추천 올리고 갑니다~

파란여우 2005-10-2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넣어요. 나 아무래도 가을 타나봐...흑

여울 2005-10-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aydreamer님, <그 저녁은 두번 오지 않는다> 제목도 그렇죠. 대전분이신데 서울에서 더 유명한 듯하더라구요. 괜찮습니다. 즐독하시구요.
파란여우님, 저두 타는데...ㅎㅎ 가을 탈 땐, 역시 시집?!이 최고죠!!
 



from 진서(참터)

051016  051017 051020  가을을 즐기다.  방전모드는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힘을 남겨두며 달린다. 속주 완주를 즐기다.  어제도 파트렉(500m 1'38"), 아 이젠 산을 내달려줘야 되는데, 단풍 속을... 가을이 아깝다. 방전시키지말자.  만 3년 이제서야 달리기 맛을 조금 느끼는 것 같다. 아주 조금 몸에 남들을 넣고 달리는 것을, 단풍도 가을 소리도, 붉은 카펫, 푸른 이끼를 맘 속에 넣고 달리는 방법을 조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