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124 (일터)  예전보다 이른 시점에 인사발표가 있었고, 이어 전근가는 친구들, 승진턱을 버무려 회식을 하였다. 희비가 교차하고, 안타까움도 있지만 친구들의 건강함에 맘 든든하다. 덕분에 많은 술과 많은 말들을 마셔버렸다.

(친구) 오후 손전화에 익숙치 않은 전화번호가 찍힌다. 030****. 캐*다에서 전화다. 네, 누구누구입니다.라고 하자 잠시 멈칫한다. 벌써 일년이상 연락이 두절되어 소식이 궁금했는데, 밝은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벌써 5-6년전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그 장인어른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객지에서 고생한 이야기부터 절절한 첫사랑이야기, 그리고 아마 돌아가시는 길목까지 그 그리움이 잔뜩 묻어있어 보였다. 집안에선 무능하였지만, 사위에 대한 애정, 옛날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절실하던 분이었는데, 나이 50중반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 일기장은 어떤 소설보다 절절하였다. 노가다판에서 외로움, 선술집 묘사, 사람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전화온 녀석은 간간이 그리워했던 첫사랑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첫사랑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날 그녀석은 홀연히 떠났다.  결혼해서 유학갔다는 소식에 어이도 없었고 절절했던 나에겐 무척이나 심한 상처였다. 어쩌면 갑이 아니라 을의 입장이었던 나도 그리고 몇년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그렇게 잘 살고 있는 나에게 날라든 쪽지와 교신은 어쩌면 지난 날을 돌이켜내는 시작이었다. 녀석은 좀 불안한 듯 보였다.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은 것 같았고, 옛날을 기억해내는 그 녀석으로 인해 혼란이 전염되는 듯했다. 나도 불안했고, 잠시 고통스러워져 갔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에 있던 첫사랑과 다른 모습을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간직해야할 기억과 현실의 모습은 삶의 나이테만큼 간극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의 나와달리 그녀석은 곧 무너질 듯 불안한 듯 보였다. 그리고 옛기억의 숨통을 열정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그 동기들의 공간으로 옮겨놓으려 했고, 나는 냉정하게 연락을 아주 끊었다.  

그 녀석은 잘 살 것으로 기대한다. 그 녀석과 결혼했어도 잘 살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렇게 내 식대로 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옛사랑의 모습은 여전히 조금은 정화되거나 순화된 상태로 여전히 맘속에 살아있을 것 같다. 간간이 삶에 자극을 주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첫사랑'의 마음으로 그럴 것 같다. 순간 사랑바이러스에 놀라기도 했지만,  여전히 겉모습의 내가 아니라 날 알아주는 그런 편안한 친구도 남길 바랬다. 어제 전화목소리로 보아 그녀석은 많이 안정된 듯 보인다. 솰라솰라 외국사람이 다되었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한다. 어휘력도 그렇구.   장인어른에 비하면 나는 그야말로 행복한 놈이다. 욕심도 없다.  친구한놈 늘은 것 같다.  그래도 명색이 교수니 잘 살 것 같고... (언젠가 편하게 일기로 남기길 바랬는데, 벌써 2년이나 걸린 것 같다. 이렇게 편하게 맘드러내 놓는 것이, 정리도 되는 것 같다.)

0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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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달동네에 살았다. 내게 1980년대의 후반부가 독재와 민주화운동과 시의 시절이었다면, 그 전반부는 원죄의식과 주사(酒邪)와 첫사랑의 시절이었다. 나는 거기 살던 내내 언젠가 탈출기(脫出記)를 완성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거기서 벗어난 지 십오년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곳이 나를 벗어나려 한다. 그곳,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일대가 재개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곳의 소로(小路)들과 사람들과 삶을 복원하고 싶었지만, 그것의 탈출기의 내용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주름ㅡ사람들의 동선(動線)이 그어놓은ㅡ을 잔뜩 품은 어떤 장소에 관해서,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되는 사람들에 관해서, 겹으로 된 삶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가 기억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권혁웅
1. 산등성이 마을의 불빛들

멀리서 보면 그 마을의 불빛들은
저들끼리 일가를 이루어
바람에 깜박이곤 했습니다
별자리가 별을 낳듯
조그만 길들이 가등(街燈)을 낳고 담벼락을 낳고
시멘트 기와지붕을 낳았습니다
그 빛더미 어디선가 나 역시
4등성처럼 희미하게 빛났을 것입니다
옆집 사는 그녀가 앉았던 자리는 치마 자리,
삼선교회가 만든 자리는 아브라함 좌(座)였을 테지만,
우리 집이 만든 성좌는 겨우
술자리였습니다 나는
낮은 처마 아래서 성문종합영어를 펴들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든다
침묵은 금이다 같은
뜻 모를 구절을 암기하기도 했습니다만
돌아봐도 그곳은 여전히 캄캄하고
불빛들만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참다못한 별 하나,
가출하면서 성냥을 긋듯
슥, 타오르기도 했습니다만

 2. 수면

작은 돌 하나로 잠든 그의 수심을 짐작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름치마처럼 구겨졌으나 금세 제 표정을 다

림질했다 팔매질 한 번에 수십 번 나이테가 그려졌으니

그에게도 여러 세상이 지나갔던 거다


1.

윤중호의 <본동에 내리는 비>가 생각이 났다.  윤중호가 살아 꿈틀거리고 그 골목골목에 시선이 삶과 섞여 있다면 권혁웅은 일관되게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시 한편 한편을 그 계보속에 착실하게 넣어둔다. 그리고 낱개의 시 한편들은 '산등성이 마을의 불빛들'처럼 모여 빛을 발한다. 그리고 가슴이 아리다.

2.

지난 일들이 생각났다. 셋방-건넌방-친구집-이웃 골목길 구멍가게-좁디좁은 골목, 기억 속에 묻혀있던 편린들이 그 계보학을 통해 제법 복원되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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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스튜어트와 질리언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스튜어트에게는 어릴 때부터 절친하게 지낸 올리버라는 친구가 있다. 스튜어트와 올리브는 생김새도, 성격도 완전 딴판이지만 그들은 그럭저럭 그들의 우정을 지속적이고 깊이있게 유지해간다. (속으로는 비록 서로를 헐뜯을 지라도) 이 세 명의 남녀는 쿨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올리버는 스튜어트가 결혼하던 날 질리언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일은 꼬여버린다. 형식과 규범, 그리고 질서에 얽매여서 살고 있고 다소 재미는 없는 스튜어트, 좀 괴팍해보이고, 제대로 된 일자리도 가지지 못하지만, 위트가 넘치는 올리버. 질리언은 결국 스튜어트와 안녕을 고하고 올리버와 새로운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 블라블라. (펌, 이매지리뷰에서)

1. 그들 중 아무도 인생의 변화를 겪는 시기에 소통하지 않았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삶의 과정 가운데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독백을 늘어놓지만 변화의 시기에 소통되지 않았다. 최소한의 소통마저 차단되었다. '돈'을 잡으려하지만 잡히지 않듯이, 가져도 실체가 없듯이 '사랑'도 가졌다고 하는 순간 포말처럼 스러지는 비유를 담고있다.  

2. 끊임없이 '사랑'과 '돈'이란 우상 속에 사로잡혀, 진짜 필요한 소통능력은 퇴화되거나, 자멸해버려 아무것도 아닌 자신만의 공간에 침잠해버리는 우리의 일상의 삶의 틀.

3.  그냥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치부하다 맘을 고쳐 먹기로 했다. 제목이 말하는 바를 따라가기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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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상에 일어난 생태적인 재앙으로 인하여 일부만이 살아 남은 21세기 중반. 자신들을 지구 종말의 생존자라 믿고 있는 링컨 6-에코(이완 맥그리거)와 조던 2-델타(스칼렛 요한슨)는 수백 명의 주민들과 함께 부족한 것이 없는 유토피아에서 빈틈없는 통제를 받으며 살고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몸 상태를 점검 받고, 먹는 음식과 인간관계까지 격리된 환경 속에서 사는 이들은 모두 지구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희망의 땅 ‘아일랜드’에 추첨이 되어 뽑혀 가기를 바라고 있다.

최근 들어 매일 같이 똑 같은 악몽에 시달리던 링컨은 제한되고 규격화된 이 곳 생활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고 곧,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기를 포함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스폰서(인간)에게 장기와 신체부위를 제공할 복제인간이라는 것! 결국 ‘아일랜드’로 뽑혀 간다는 것은 신체부위를 제공하기 위해 무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제품이 돌아다닌다' ---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장기를 팔고, 목숨을 담보잡아 근근히 생을 이어가는 매매가 이뤄지고 있겠다. 인간이 비인간화된 것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하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상품만 돌아다니는 현실- 좀더 탐닉하고 싶은 욕망, 사용기간이 갈수록 짧아지는 제품들, 이미 세상은 이 도식에 절어있다. 마치 아니라고 아니라고 외치지만, 그 늪에 빠져버린 것은 어찌하랴~

황*석은 이 영화를 보았을까? 아니 보면서 더 깊숙하고 철저한 요새의 밑그림을 그려내려했던 것은 아닐까?까맣게 타 버린 양심들은 복제가 가능할까? 돈이 안되니 그 양심들은 이미 폐기처분되었겠지? 방폐장에 핵폐기물처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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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의 축적과 동시에, 비참한 현실의 축적도 이루어진다. 한쪽에서 부가 축적되면, 그와 다른 반대쪽에서는 정신적 피폐함을 포함한 빈곤의 축적이 진행되고 마는 것이다." 이 말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한 구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자본을 축적해가는 성장의 이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꿰뚫어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에서 시장이란 바로 이런 두 가지 모순된 축적의 과정이 벌어지는 현장인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평등한 거래가 실현됩니다.
  
  시장에 민주주의란 없습니다. 자본의 발언권이 모든 것을 압도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본의 관심은 노동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노동력을 가진 사람의 행복에 있지 않습니다. 그걸 흔히들 "시장논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모순은 일어납니다. 다른 생산수단과는 달리, 노동의 주체는 인간이고 인간은 기계와는 구별되는 감정과 의지,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행복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자본의 출현은 극히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자본주의 시장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그 성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습니다. 자본의 탐욕을 채우는 시장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저항의 과정에서 발견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부와 빈곤의 동시적 진행이라는 사회적 양극화는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성장의 전제라는 점이었습니다.
  
  즉, 부의 집중이 성장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상대적 빈곤을 전제로 한 부의 독점이 가능해질 때 자본주의 시장의 성장은 실현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신자유주의 체제란, "승자 독식 논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본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방식은 자본이 없는 이들에게는 절망의 구렁텅이가 되고 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승자의 대열에 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회적 양극화는 이러한 현실에서 필연적입니다. 자본의 발언권은 권력화 되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발언권은 묵살되고 있으면서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해보겠다면 그런 모순이 따로 없습니다.
  
  이를 제대로 해결하자면 갖지 못한 이들의 입장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 자본과 동맹 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 민주주의적 양극화 해소는 진정한 답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정부의 정책과 자본에게 묻지 않고 노조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빈곤의 위협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 골프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고 요구하거나 또는 대안이 없으면 비판도 하지 말라는 식의 논리는 우격다짐이 될 뿐입니다. 대안이 없어도 비판은 언제나 가능한 것입니다. 비판 자체가 대안논의의 시작입니다.
  
  정녕 대안 있는 비판 외에는 거부한다면,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문제를 해결할 책임과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마땅한 도리가 될 것입니다.
  
  사회적 양극화의 요인 가운데 하나가 무분별한 개방인데 특권층의 수요에 부응할 따름인 교육과 의료시장의 개방까지도 주장하게 된다면, 애초의 서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사회적 양극화 해소의 입지 자체가 무너지고 맙니다.
  
  또한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 문제를 푸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처방입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누구의 세금을 더 많이 걷겠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만일 기업의 동력저하를 우려하여 법인세는 낮추고 봉급자들의 유리지갑만 열겠다면, 조세저항만 키우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본원적으로 해결하자면, 시장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사회 철학적 변화가 가장 절박합니다.


  이것 없이 내세워지는 정책은 헛발질이 되기 쉬울 겁니다.

   
 
  김민웅/프레시안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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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1-2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일터로 돌아오는 길, 신탄진에서 갑천변을 접어들 무렵, 차분한 음성은 천변, 반사된 겨울햇살들과 함께 따라 들어 온다. 자유주의의 힘의 자장은 아무런 한 일없이, 재벌 2,3세가 권력의 반열에 오르듯이 쉽고, 크다. 왕의 세습처럼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 프리미엄은 엄청나다. 세상은 어쩌다 이런 사생아를 낳게 되었을까? 갈수록 그 힘에 기대어 안위를 얻거나, 그 독에 취해... 그 힘의 체감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크다. 처음 샘물줄기야 아무런 힘의 자장도 없는 듯하지만, 내려오면 올수록 거대한 힘은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잔인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