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스튜어트와 질리언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스튜어트에게는 어릴 때부터 절친하게 지낸 올리버라는 친구가 있다. 스튜어트와 올리브는 생김새도, 성격도 완전 딴판이지만 그들은 그럭저럭 그들의 우정을 지속적이고 깊이있게 유지해간다. (속으로는 비록 서로를 헐뜯을 지라도) 이 세 명의 남녀는 쿨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올리버는 스튜어트가 결혼하던 날 질리언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일은 꼬여버린다. 형식과 규범, 그리고 질서에 얽매여서 살고 있고 다소 재미는 없는 스튜어트, 좀 괴팍해보이고, 제대로 된 일자리도 가지지 못하지만, 위트가 넘치는 올리버. 질리언은 결국 스튜어트와 안녕을 고하고 올리버와 새로운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 블라블라. (펌, 이매지리뷰에서)

1. 그들 중 아무도 인생의 변화를 겪는 시기에 소통하지 않았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삶의 과정 가운데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독백을 늘어놓지만 변화의 시기에 소통되지 않았다. 최소한의 소통마저 차단되었다. '돈'을 잡으려하지만 잡히지 않듯이, 가져도 실체가 없듯이 '사랑'도 가졌다고 하는 순간 포말처럼 스러지는 비유를 담고있다.  

2. 끊임없이 '사랑'과 '돈'이란 우상 속에 사로잡혀, 진짜 필요한 소통능력은 퇴화되거나, 자멸해버려 아무것도 아닌 자신만의 공간에 침잠해버리는 우리의 일상의 삶의 틀.

3.  그냥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치부하다 맘을 고쳐 먹기로 했다. 제목이 말하는 바를 따라가기로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 상에 일어난 생태적인 재앙으로 인하여 일부만이 살아 남은 21세기 중반. 자신들을 지구 종말의 생존자라 믿고 있는 링컨 6-에코(이완 맥그리거)와 조던 2-델타(스칼렛 요한슨)는 수백 명의 주민들과 함께 부족한 것이 없는 유토피아에서 빈틈없는 통제를 받으며 살고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몸 상태를 점검 받고, 먹는 음식과 인간관계까지 격리된 환경 속에서 사는 이들은 모두 지구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희망의 땅 ‘아일랜드’에 추첨이 되어 뽑혀 가기를 바라고 있다.

최근 들어 매일 같이 똑 같은 악몽에 시달리던 링컨은 제한되고 규격화된 이 곳 생활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고 곧,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기를 포함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스폰서(인간)에게 장기와 신체부위를 제공할 복제인간이라는 것! 결국 ‘아일랜드’로 뽑혀 간다는 것은 신체부위를 제공하기 위해 무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제품이 돌아다닌다' ---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장기를 팔고, 목숨을 담보잡아 근근히 생을 이어가는 매매가 이뤄지고 있겠다. 인간이 비인간화된 것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하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상품만 돌아다니는 현실- 좀더 탐닉하고 싶은 욕망, 사용기간이 갈수록 짧아지는 제품들, 이미 세상은 이 도식에 절어있다. 마치 아니라고 아니라고 외치지만, 그 늪에 빠져버린 것은 어찌하랴~

황*석은 이 영화를 보았을까? 아니 보면서 더 깊숙하고 철저한 요새의 밑그림을 그려내려했던 것은 아닐까?까맣게 타 버린 양심들은 복제가 가능할까? 돈이 안되니 그 양심들은 이미 폐기처분되었겠지? 방폐장에 핵폐기물처리하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의 축적과 동시에, 비참한 현실의 축적도 이루어진다. 한쪽에서 부가 축적되면, 그와 다른 반대쪽에서는 정신적 피폐함을 포함한 빈곤의 축적이 진행되고 마는 것이다." 이 말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한 구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자본을 축적해가는 성장의 이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꿰뚫어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에서 시장이란 바로 이런 두 가지 모순된 축적의 과정이 벌어지는 현장인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평등한 거래가 실현됩니다.
  
  시장에 민주주의란 없습니다. 자본의 발언권이 모든 것을 압도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본의 관심은 노동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노동력을 가진 사람의 행복에 있지 않습니다. 그걸 흔히들 "시장논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모순은 일어납니다. 다른 생산수단과는 달리, 노동의 주체는 인간이고 인간은 기계와는 구별되는 감정과 의지,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행복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자본의 출현은 극히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자본주의 시장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그 성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습니다. 자본의 탐욕을 채우는 시장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저항의 과정에서 발견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부와 빈곤의 동시적 진행이라는 사회적 양극화는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성장의 전제라는 점이었습니다.
  
  즉, 부의 집중이 성장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상대적 빈곤을 전제로 한 부의 독점이 가능해질 때 자본주의 시장의 성장은 실현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신자유주의 체제란, "승자 독식 논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본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방식은 자본이 없는 이들에게는 절망의 구렁텅이가 되고 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승자의 대열에 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회적 양극화는 이러한 현실에서 필연적입니다. 자본의 발언권은 권력화 되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발언권은 묵살되고 있으면서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해보겠다면 그런 모순이 따로 없습니다.
  
  이를 제대로 해결하자면 갖지 못한 이들의 입장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 자본과 동맹 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 민주주의적 양극화 해소는 진정한 답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정부의 정책과 자본에게 묻지 않고 노조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빈곤의 위협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 골프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고 요구하거나 또는 대안이 없으면 비판도 하지 말라는 식의 논리는 우격다짐이 될 뿐입니다. 대안이 없어도 비판은 언제나 가능한 것입니다. 비판 자체가 대안논의의 시작입니다.
  
  정녕 대안 있는 비판 외에는 거부한다면,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문제를 해결할 책임과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마땅한 도리가 될 것입니다.
  
  사회적 양극화의 요인 가운데 하나가 무분별한 개방인데 특권층의 수요에 부응할 따름인 교육과 의료시장의 개방까지도 주장하게 된다면, 애초의 서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사회적 양극화 해소의 입지 자체가 무너지고 맙니다.
  
  또한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 문제를 푸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처방입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누구의 세금을 더 많이 걷겠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만일 기업의 동력저하를 우려하여 법인세는 낮추고 봉급자들의 유리지갑만 열겠다면, 조세저항만 키우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본원적으로 해결하자면, 시장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사회 철학적 변화가 가장 절박합니다.


  이것 없이 내세워지는 정책은 헛발질이 되기 쉬울 겁니다.

   
 
  김민웅/프레시안 기획위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울 2006-01-2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일터로 돌아오는 길, 신탄진에서 갑천변을 접어들 무렵, 차분한 음성은 천변, 반사된 겨울햇살들과 함께 따라 들어 온다. 자유주의의 힘의 자장은 아무런 한 일없이, 재벌 2,3세가 권력의 반열에 오르듯이 쉽고, 크다. 왕의 세습처럼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 프리미엄은 엄청나다. 세상은 어쩌다 이런 사생아를 낳게 되었을까? 갈수록 그 힘에 기대어 안위를 얻거나, 그 독에 취해... 그 힘의 체감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크다. 처음 샘물줄기야 아무런 힘의 자장도 없는 듯하지만, 내려오면 올수록 거대한 힘은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잔인하다.

2.
 

 

  060120  여물지 않은 생각씨들

 - 민주주의 이행기 한국 여성운동의 변화와 정치학의 재구성:지역,국가,지구적 수준의 분석(허성우,여성학박사 University of Sussex) 발제/토론/뒷야기를 들으며

 1.  허박사는 논문에서 지역-국가-지구적 수준간의 연결과 긴장이란 틀로 분석작업에 골몰한 것 같다. 그렇게 분석되어진 여성운동은 그 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해체된 듯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잠시 몰골이 해체된 여성운동은 그 마디마디를 다시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지역속에 여성, 여러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다시 볼 것을, 계층-계급적 차이의 눈으로 되새겨볼 것을, 스스로 돌진해온 여성운동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되는냐는 되질문에 묘한 심연을 느끼게 한다. 달려온 나, 달려오게 만든 나,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나를 다시보게 하는 마력이 있다. 돌아보고, 깊이깊이 속내로 가져가 품을 것을 요구한다. 비단 여성운동에 국한된 분석이었지만 여성운동만의 틀로 보여지지는 않는다.  계몽의 신화, 결국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하는 이성의 맹점처럼, 사회를 지켜보고 분석해논 잣대에 다시 의심할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2. 하지만 허박사님의 논문은 '가족은 어디있느냐'는 질문에 멈칫한다. '포용적 연대의 정치학'을 말하지만 어머니-나-딸로서 중첩성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권교수님은 되묻는다. 가족이 해체되어버린 영국을 비롯한 남의 이야기는 아닌가하고 말이다. 서구의 '개인'과 우리의 '개인'을 동일선상에 놓아도 되는가?하는 되물음인 것 같다. 우리의 '자아'와 서구의 '자아'가 같냐?는 말에 숨이 마저 막힌다.

<내 말 좀 들어봐>, 영국 -- 그들 삶속에 가족은 형식적인 관계일 뿐, 관여의 그늘은 없는 듯하다.

 

3. 그래도 황우석여운은 묘하게 활동가의 그룹에도 스며들어와 있다.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내문제가 아니면 신경쓰지 않는 해체되어 너덜거리지만 투명한 서구의 '자아'와 우리의 분화를 강요받지 않은 '자아'(지칠줄 모르는 통합욕, 우리문제로 승화시키려는 처절?한 노력)로 의심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드는 또다른 의구심이다.

4. 여성운동을 제도화의 문제나 문화의 문제로 분리시켜 보려는 시각이 많은 것은 아닐까?(제도화에 방점이 찍히면서 말이다.)  혹 여성운동이란 하나의 시선으로 온갖 부문운동을 시선아래 두려고하는 것은 아닐까? 무지개처럼 알알이 색깔을 내며 무지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란 운동 지휘부에 소속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라는 의식이 생명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5. 평등부부 -

6. 가부장제/군대문화 -

060201

(돌아오는 길) 엊그제 꿈자리이야기가 떠올라 메모

자본주의에 중독된 인간유형 특징

1. 나르시시즘

2. 일/돈중독

3. 사랑의 물화 및 종교화

4. 불감증_1-2-3의 순환고리

우리의 분화과정은 스스로 인지할 정도로 빠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짜문제와 가짜문제

 

1.

성찰이 우리 일상의 안주거리라면 이것이 논제가 될 수 있게지만,

세상이 너무 각박해 혼자만 처신하기에 급급하다면,

믿을 놈이 없어 내 친한 놈만 친구한다면,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어 난감해 할 것이다.

 

좋은 세상 바라는 것이야, 좀 더 낫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니

물길을 돌리거나, 물길을 만들어보거나, 한번 헛튼짓이든 해보는 것도 미덕이 되지만,

별것도 아닌 '나'란 실존에 허덕여 결국 나마저 모르는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하는데

 

암튼 혼자생각이겠지.  가끔 알*딘 흔적을 지나치다보면

'나'란 내면의 놈을 찾으려면 

남을 찾거나

'나'아닌 것을 하다보면 스스로 알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나'란 블루오션이나 실존은 마치 있는 것처럼

파면 금덩어리처럼 나올 것 처럼

하는 흔적이 보여  ... ...

 

2.

31쪽  도정일 -

 인문학적 소양이란 어떤 것인가? 두터운 세계를 위한 윤리학. - 타인을 이해한다. 타자를 이해한다. 우리말로 하면 역지사지, 바꿔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건데, 기본적으로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것은 내가 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열어서 타인을 받아들이거나 내가 나를 버리고 타인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자본주의 문화는 자아의 문화, 나르시시즘 문화죠. 문을 꼭 걸어 잠그로 이해만 따지고, 절대로 문을 열지 않고, 접촉은 이해관계가 통할 때만 하고. 그런 문화 속에서 자아라고 불리는 단단한 문의 폐쇄화가 끊임없이 일어나죠. 이럴 때일수록 껍질을 깨주는 상상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나는 예술이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인문학적 경험은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인문학적 삶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첫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가슴을 여는 사회'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울타리를 걷어치울 줄도 알아야 하죠. 그래야 타자가 들어오거나 자기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아니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