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나라*에서 - 황우석신드롬 강연회에 참석하며




지난 3월말미에 대전에서 “황우석증후군”에 대한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같은날 서울에서는 한국사회포럼 2006에서 아래와 같이 ‘황우석’ 관련하여 토론회가 열렸지요.(아래 덧붙임.) 아쉽게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모든 과정은 사라져 버린 듯 합니다. 반사급부로 줄기세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하지만, 지금 남은 것은 “그래도 기회를 한번 더 주어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속마음인 것 같습니다. 본 듯, 안 본 듯한 광고가 선명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상품에 손길이 가는 것처럼 아파했던 그 과정은 기억의 골목길을 돌아서 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김교수님이 지적하였듯이 5개그룹에 속한다-그렇지 않다가 아니라 그 편집을 관통하는 것, ‘국익안의 민족’이라는 것이 모든 과정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과학만능’이라는 사고가 우리를 냉정하게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가지 인식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것을 주장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인식과 성찰의 수준에선 여전히 퇴물이 되어버리고 있는 이종장기이식이 국내에서 똑 같은 문제로 야기시킬 수 있고, ‘황신드롬’과 유사하게 사회적 싹으로 키울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맛보았던 실패를 또 다시 그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가능성 때문에 몸서리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동차일수도, 원자력일수도, 나노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발생학에 전문가들이 되었다지만, 이젠 외려 시비를 가리기 위한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않으려는 것은 아닐까요? 전 동아일보기자가 쓴 <황우석의 나라>란 책을 보셨겠지만, 전직기자인 그는 수직적인 결정구조의 문화, 언론에서 숨쉴 틈이 없었습니다. 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도 없고 지역도 없고 오로지 성과만이 있을뿐입니다. 그 속에서 양심과 왜곡된 결정, 이상하게 이것은 아닌데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의 간극이 있습니다. 알고있는 것과 표현하고 싶은 것과 현실은 그만큼 괴리감이 있었던 것이었죠. 수평적이거나 권한이 분산되지 않은 언론시스템에서 여전히 똑같은 오보나 대중조작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언론의 권력구조나 편집방향과 진실보도의 개선에는 안타깝게도 예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참터도 그렇고 우리의 요구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5개 그룹핑하여 매도하고 싶은 생각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한발자욱 더 딛기 위해, 과정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일그러진 일상 가운데 단 한가지라도 몇 달전보다 나은 상태로 보자는 것입니다. 사고를 갇힌 틀, 내가 있는 시스템 안에서만 보려하지말고, 약자나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혹 레드컴플렉스처럼  ‘국익안의 민족’우선과 ‘과학만능’이 내 몸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있지나 않은지 돌이켜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입장에 맞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위주로 해서 온갖 자료를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두고 냉정하게 무엇을 판단을 하지 못했는지를 돌이켜보고,말하는 ‘차이’가 무엇인지 열어놓고 들어보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접근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자는 것이죠. ‘반공’과 ‘빨갱이’의 세뇌속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죠. 내면화된 의식 속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 다시 ‘국익안의 민족’과 ‘과학만능’,‘성과’에 전도되어 다양한 스펙트럼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의 스펙트럼 하나하나는 모두 돌탑처럼 하나하나씩 쌓여야 될 것들인데, 모두 하나로 뭉쳐 원점에 되돌려놓는 것은 아닐까요?




일상에 지친 황우석의 나라에서 W B C - 월드컵에 기생하는 자본과 황우석, 또 다른 황우석, 하늘에서 내려올 스타에 굶주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치고 힘든 일상에 생긴 허전함을 상상임신에 기대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현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은 아닐까요. 술이 깨고난 고통은 지난 밤의 부푼 욕망의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현실에 있는 온기있는 방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마실 물만이 조금이나마 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 뿐입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지지자들은 △반미+친노 △반미+반노 △친미+반노 △반 서울대·경기고 △반기독교 등 매우 이질적인 배경과 동기를 갖고 있으며 ‘황빠’ 현상의 근본원인인 과학기술만능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환석 시민과학센터 소장(국민대 사회학과 교수)은 한국사회포럼의 한 행사로 24일 열리는 ‘한국 사회의 비이성적 집단주의, 사회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토론회에 사전배포한 발제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우선 반미+친노 성향은 미국이 꾸미는 줄기세포기술을 지배 음모가 ‘황우석 죽이기’의 핵심이라고 보며 노무현 정부는 이에 책임이 없거나 황우석을 도와주는 우군으로 간주한다. 서프라이즈나 딴지일보가 여기에 가깝다. 자주민보 등 반미+반노 성향은 미국이 ‘황우석 죽이기’의 주범이지만 노무현 정부도 이에 종속된 정권이기 때문에 결국 공범이라고 본다.

친미+반노 성향은 미국은 이번 사태와 무관하거나 오히려 황우석팀과 협력하는 존재로 주장하고 황우석의 연구를 정권의 친북적 목적에 이용하려 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있다고 본다. 인터넷 독립신문이 이에 가깝다. 반서울대·경기고는 서울의대 카르텔(대표 문신용)이 음모를 꾸몄고 경기고·서울대 인맥이 이를 뒷받침하는 세력이라고 간주한다. e-조은뉴스와 ‘정치웹진 판’이 이에 가까운 입장이다. 반기독교성향은 법보신문이 대표적이며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이 황우석 죽이기를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이질성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황우석 지지대중 사이에는 마치 아무런 견해 차이나 갈등이 없는 것처럼 눈먼 애국주의와 개인숭배가 황우석 지지자들의 판단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할까. 김 교수는 “이질성을 가로질러 이 모든 집단이 공유하는 뿌리깊은 이데올로기가 있다”며 “그것은 바로 과학기술 발전이야말로 최고의 애국이고 정당한 수단은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과학기술만능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했다.

과학정책, 민족주의냐 민주주의냐

황우석 사태가 한국의 정치와 사회운동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인가. 김 교수는 주저없이 “그동안 한국의 제도정치권은 물론이고 민주화운동과 진보세력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였던 전통적 과학기술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라고 단언한다. “과학기술은 이제 미래의 발전을 지속하는 데 핵심적인 의제로 부상했으며 더 이상 과학기술자나 과학기술이 몰정치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정치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한국 정치와 사회운동의 핵심을 이루는 주요 과제이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이미 과학기술사회가 된 한국사회에서 진보운동권도 누구와 무엇을 위한 과학기술 발전에 찬성하는지를 시민대중에게 제시하지 않고는 진정한 사회운동으로 존립하기 어렵게 됐다”고 주장한다.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 "민족주의적 과학정책과 민주주의적 과학정책"이 그것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황우석에 열광하는 애국주의 과학은 민족주의 과학정책 모델과 부합한다. 민족주의적 과학정책이 선진국을 목표로 삼고 발전중심전략을 지칭한다면 민주주의적 과학정책은 “환경친화적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삼고 균형적 과학발전을 추구하며 시민참여를 허용하는 열린 과학공동체를 지향”한다. 논쟁과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김 교수는 과학기술정책을 둘러싼 더 많은 사회적 논쟁을 주문한다


* 황우석 나라 - 전직 동아일보기자가 쓴 책 <황우석의 나라>에서 옮김. 2006. 3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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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수 좋은 날

꽃이라 해서 늘 아름답지는 않지
모든 꽃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딱 한 순간이라네
그 순간은 너무도 짧아
아무나 쉽게 눈치 채지 못하지
꽃 스스로도 마찬가진 것 같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눈치 채지 못하는
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늘 나는 운수가 좋았다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막 맞고 있는 꽃을 보았거든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지
그 순간에 부끄러워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거나
짐짓 먼 산을 보고 있었더라면
너무 억울해할 뻔했어

길을 갈 때
꽃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지
나는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네
아무에게나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니거든
나는 그때 꽃에게 쫓아가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네:
당신은 지금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게 낫겠네
혼자만 기억하기로 하겠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으니
아름다움은 꽃의 것도 아닌 모양이네
세상이 꽃으로 해서 잠깐 환해졌다 해도 마찬가지지
아름다움은 누구 것도 아닌 것 같아
내 손이 닿기도 전에 꽃잎에 맺힌 이슬이
몸을 던져 땅으로 투신하고 마는 것을 보면

2.

작당

벚꽃나무 아래 놓인 평상에서 /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작당했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 / 소주오 안주를 가운데 놓고 / 동그랗게 모여 앉아 / 아침 댓바람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 마침 남의 집 담 안에 핀 꽃이 / 아무 대가도 묻지 않고 담 밖으로 / 손을 활짝 내밀고 있다 해도 / 평상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던 평상인데 /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 불행하면 불행한 대로 / 저들을 저렇게 한날한시에 / 같은 자리에 동그랗게 모아놓은 힘은 무엇인가 / 지구의 중심이라도 들여다보겠다는 듯 / 저들을 집중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 술의 힘인가 / 꽃의 힘인가 / 평상의 힘인가, / 작당이 파한 뒤 돌아서서 / 혼자 감당해야 할 쓸쓸함은 누구의 것인가 / 그 때는 술의 죄인가 / 꽃의 죄인가 / 평상의 죄인가,/ 꽃은 가장 아름다운 한 순간을 향해 치닫고 / 술판은 한창 한 고비를 넘어가고 있다./

벚꽃 흐드러진 봄날 / 작당을 유혹하는 아침 / 골목 어귀 행복슈퍼마켓 옆 / 평상의 다리가 위태하다.

3.

독상

시장바닥에서 어머니 / 독상을 받으셨다. / 이천 원짜리 밥을 시켜 / 빈 사과궤짝 위에 올려놓고 / 식사를 하신다. / 뒤란 텃밭에서 뜯은 / 몇 줌 푸성귀가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 온전히 남이 차려주는 밥상으로 / 식사를 하시는 어머니 / 식구들을 위한 밥상을 준비하러 온 / 사람들의 머릿속의 / 이런저런 밥상 속에서 / 어는 제국의 황후가 부럽지 않은 / 오직 당신만을 위한 어머니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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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4-01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좋습니다. 퍼가요^^

여울 2006-04-0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깜짝 입니다. 휴우 만우절~. 대표이사 라아....알고있는 대표라기엔 뭔가 날라갈 듯한 펄럭임이 보였는데. 정말 감쪽같이 속았네요. ...
 

 

 

<봄은 전쟁처럼,별하나>

 

1. 신화 ---> 사람은 얼마나 취약한가? 열광하고 분위기 맞고,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면, (허위-진실)에 관계없이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기-맘속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는다. 적절한 단계만 거치면 어느새 자기 것이 되어 이질적인 요소를 되받아들이기가 지극히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집단적 열광은 자기 몸안에 성찰의 싹을 키우지 않으면 후유증처럼, 레드컴플렉스처럼 지극히 삶을 혼돈스럽고 일그러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2. 아이러브황우석 회원 11만인지? 12만인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취약한 이미지 조작의 시대에 살고 있어, 언제 어떻게 용도 전용될지 모르는 것은 아닐까?  광고에 마음뺏겨 삶의 스타일마저 버리듯-드라마를 일상으로 가져와 제것과 남의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은 아닐까?

3. 1장에 기자들의 생활이 나온다. 수직적위계계열이 유난히 강한 조선-동아-, 상대적으로 수평적이거나 권한의 분산의 시스템이 조금있는 한국과 중앙이 상대적으로 나았다고... 퍽퍽한 일상과 IMF를 겪고,늘어난 지면에 더더 경쟁에 시달리는 일터구성원이 너-나 다름없다. 사익만 추구하는 언론시스템 역시 말단기자-중견기자의 서러움이 베여있지만 집단의 사고는 최소한의 윤리의식도 없는 파괴적 노동자로 자멸하고 있는 듯하다. 열심히 일하는 평기자들의 노력보단,  유연하지고 들으려고하지도 않는 시스템을 보면 안스럽기 그지 없다.  공해문제로 시달린 것도, 원재료를 속여 시달린 것도 없으니 오죽할까하지만,  시달리기만 하는 대중이 늘어나는 이상, 불감증은 여전히 커질 듯하다.

 4. 도 아니면 모인 일터분위기, 죽도록 일하거나 잘리거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상층-협박논리는 결국 돈도 안되고, 평기자도 모두 힘들게 한다는 것을 제대로 느껴져야 할텐데. 우리사회는 한번도 그 협박으로 달리는 상층에 대해 사회적 제어를 하지 않는다. 그 지질이 불쌍한 간부와 일터성원과, 사회에 대한 사투로만 내몰리는 분위기가 서로 좋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도 묵시록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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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근대적 화폐구성체의 요소, 즉 근대 화폐의 발생과정에 관여한 네 가지 요소로 근대의 시장, 국가, 사회, 과학에 주목한다. 이 네가지 요소를 저자는 각각 화폐거래네트워크, 화폐주권, 화폐공동체, 화폐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화폐는 이 네 가지 요소가 빚어낸 '마법의 사중주'를 통해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말한다.(by 책소개)


우리 차를 찬양한 책으로 유명한 것은 1839년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보다 1000여년 앞선 760년 육우가 '다경'이란 다서를 펴냈다. 일종의 차 입문서이자 종합서다. 태어난 곳이 알려지지 않은 육우는 오랫동안 중국 남쪽 차 산지를 돌면서 차나무의 생김새와 차의 종류, 차를 만드는 방법, 다구, 차의 내력 등에 대한 현장조사를 거쳐 책을 펴냈다.

그는 차를 마심으로써 정신과 도덕에 미치는 효과를 강조하고, 다구를 갖추어서 차를 달여 마시는 의식 등 모든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오죽했으면 '육우의 다경이 있고서야 진정한 의미의 차문화가 생겼다'는 말이 나왔을까. 번역은 김봉건 동의대 대학원 철학과 다도전공 지도교수가 맡았다(by 수암님)

1. 291쪽 " 우리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두 개의 중요한 장벽이 허물어지고, 매끄러운 하나의 평면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두 장벽 중 하나는 공동체의 안과 밖을 가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공적영역과 사적 영역을 가르고 있었다. 두 영역이 혼동되고 뒤섞이면서 하나의 균질적인 평면이 드러났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화폐공동체'라 부른 근대 '사회'이다.

근대 '사회'의 탄생은 한편으로 공동체 외부에서 발달한 질서가 "공동체 내부로 침투해서 공동체에 해체적인 영향을 미치는"과정이고, 다른 한편으로 사적 가계의 활동이 "가정의 어두운 내부로부터 공론 영역의 밝은 곳으로 이전되는"과정이다. 우리는 근대적 화폐구성체의 성립과정에서 '외적인 것의 내부로의 침투'와 '사적인 것의 공적 진출'이라는 두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뱀발 01.  무심코 살아있는 나뭇가지에 올려놓은 가벼운 돌멩이때문에 그 나무는 시간의 흐름에 그 돌멩이를 피해 안간힘을 쓰며 에둘러 자란다. 별 것 아닌 것이 공동체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횟대질하거나 인간관계를 왜곡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나 있는 것은 아닐까? 지역통화나 분권은 사라진 관계들을 조금은 회복시킬 수 있을까? 공동체나 공적영역과 관계의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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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위에 떨다>,<직선을 버린다>,<부드러운 직선>

 

 

 

 

1. (뱀발) 일터일로 금강을 넌지시 보며 다녀오는 길, 뜬금없는 생각질이다. (ㄱ)에서 (ㄹ)로 이어 품어본다.

2.  (기역)  수평선에 (극좌)----(좌)---(중도)---(우)--(극우)를 넣어보았다. 아무래도  인텔리 냄새가 많이 풍긴다. 

직선의 바탕에      ------------------------------------------------

                                           (머리의 그늘)이라 넣고 싶다.

 

2. (니은)  (기역)의 수평선을 세워보았다.   수직선 옆에 물살을 넣었다.

              !                                             

              !!

              !!!

              !!!!!

             !!! !!!
            !!!    !!!!

         !!(좌-진보)!!

    !!(보수)(보수)(보 수)!!

!!(극좌((우)(우)(우)(극좌)!!

   !(수구)(극우)(수구)(좌)!

      !(극우)(수구)(극우)!

           !(수구)(꼴통)!  

              !(꼴통)!
----------------------------------------

      ( 몸 의   그  늘 )

제일 앞에 물살을 가르는 거슬러 올라가는 진보를 넣어보았다. 세상은 그나마 보수도 없는 듯하다. 좋았던 것이나 좋은 것은 지켜야할 것은 아닌가? 어쩌면 지키는 방법도 지켜야될 의지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 탓하며 진보의 그늘에서 숨쉬려하는 것은 아닐까? 앞선 물살을 먼저 만나 온몸으로 부딪는 덕에 보수의 영역은 더욱 더 커지는지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나마 지키려는 사람은 없고 물살에 떠밀려가는 (우) 들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진보와 보수)에 영원한 덕을 보고 있는 (수구)와 (꼴통)들이 세상흘러가는 것과 상관없이 물살에 대한 감마저도 없지 제 짓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디귿)  (니은)을 옆에서 보았다. 그리고 오른쪽 좌표를 시간축으로 하고 사선의 아랫여백을 자본주의라 넣어보았다.   자본주의란 경사는 시간이 갈수록 급해지는 것은 아닐까? 바지런히 움직여도 자본주의의 경사도는 심해 (진보)와 (진보-상식)의 물살은 그만큼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

그리고 밑엔 [(몸)과 (몸-마음)의 그늘]이라고 가두어 두었다.

4. (리을)  (디귿)이 너무도 퍽퍽하고 맛이 없어  시간의 좌표에  시이소오의 받침대를 두어봤다. [(몸)과 (몸-마음)의 그늘]로 (좌-진보)와(진보-보수),(진보-상식)의 무게중심이 더 더욱 커지면 [(자본주의)의 그늘]이 와르르 사그러들 것 같은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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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3-2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과 들엔 봄풀이 파릇하고
나뭇가지엔 연초록의 새순이 앙증맞게 움트고 있다.
무딘 가슴에도 봄바람이 스며든다.
가끔씩 오르는 산, 그 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풍경이 조금은 낯설다.
사람들은 봄 철쭉, 가을 단풍을 좋아하지만,
난 겨울 산이 좋다.
드러난 계곡의 장엄함과
벌거벗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오묘한 자태의 나무들의 아름다운 굴곡을 보노라면
왜 사람들이 겨울 산을 개골산(皆骨山)이라 했는지 알 것 같다.
산의 깊이를 맛보려면 겨울 산행이 적격이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글귀를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산을 오르려고만 하기 때문에 “등산(登山)”한다고 한다.
그러나 산을 찾는 참맛을 알려면 “입산(入山)”의 겸허함이 필요하단다.
그래서 아마도 중이 되려는 사람들은 “입산한다”고 하나보다.

문자메시지와 인터넷게시판이 어지러운 것을 보니
또 선거철이 되었나 보다.
평소에는 없는 듯 지내던 사람들이 공직에 출마한다고
깍듯이 머리 숙여 겸손한 어투로 장문의 출마의 변을 늘어놓는 꼴이란.
변죽만 울리는 그러한 행태들이 제법 기성정치인 티가 난다.
이빨도 많이 늘었고, 썰도 제법 그럴듯하게 푼다.
자주와 평등은 NL과 PD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전진'은 '노동자의 힘'을 결집하지 못한다.
누구의 말처럼, 운동이 관찰-판단-실천-성찰의 연결고리를 잃은 지 오래다.
자신이 만든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실수에 기댄 투쟁을 전개하는 방식에서 우리는 미래를 찾을 수 없다.
자칭 “좌파”라는 집단은 뛰어난 대갈빡과 쌈박한 문건 만드는 재주를 소유했지만,
번번이 선거에서 패배함으로써, 조직의 쓴맛을 톡톡히 보고 있다.
오만과 편견의 결과는 아닌지, 한 번쯤은 냉철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나 같은 주변인과 심적 동조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좌파는 운동을 너무 머리로만 하려고 한다.
속칭, 짱구를 많이 굴린다는 말이다.
그들이 객체화하고,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은 그저 따스한 가슴을 소유한 사람일 뿐이다.
거창한 이론(담론)이 아니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더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그릇으로 자유롭게 흐르는 물을 가두려 하지 말라.
그러면 물은 분명히 그것을 거부한다.
역류(逆流)하는 물은 사나와진다.
반드시 새로운 물꼬를 트고야 만다.
평등사회를 지향하며 전진하는 활동가들이여,
진정 그대들이 전진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펌 fron 날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