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image.aladin.co.kr/product/61/53/coversum/8936422588_1.jpg)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서두에 놓인 '벽제 가는 길' 연작은 궁핍했던 유년기에 시인을 업고 키우며 방직공장에 다닌 누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대한 노래다. 그 길에서 시인은 무논으로 흘러드는 논물, 강바닥의 돌멩이, 뭉툭한 바위, 막사발 같은 달을 만난다. 그리고 그 속에 단단한 생의 의지와 결기가 살아숨쉬고 있음을 넌지시 들려준다.
등단 후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튼실하게 벼려온 시인의 연장은 '건강하고 부드럽다'. 돌에서 꽃으로, 그리고 길과 집으로 이어지는 기억과 응시, 상상은 서로 견고하게 얽혀 있다. 화려한 파격이나 손쉬운 초월에 기대지 않고, 경험적 충실성과 서정적 회감(回感)의 원리로 단단하고 생기 넘치는 작품들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의 시적 행보에 신뢰를 가지게 하는 이승희 시인의 첫 시집이다(책소개에서)
나무젓가락
내가 바라본 것은 푸른 하늘과 구름, 내가 들었던 것은
반달 같은 시내를 따라 흐르고 흘렀던 결 곱던 노래들.
미루나무 온몸으로 흔들리던 그 낮은 시냇가의 낮잠
딱 한 끼 밥을 위해
내가 보았던 그 모든 것들을 잃어야 했던,
나무타는 법
우선은 소곤거리듯 아주 부드러운 말로 만져주어야지,
잎들이 녹색의 알갱이를 가득 물고, 아침 햇살에 입을 다
헹구듯이 서둘지 말고 따스한 눈빛으로 눈을 맞추다 보
면 아주 조금씩 길이 열릴 거야, 그러면 그 알갱이들 사
이로 네 마음을 밀어 넣어두는 거야. 아주 느리게 잎사귀
를 둥글게 말아 쥐고 잠드는 벌레들처럼 말이야. 그러고
는 수액의 물결을 타고 때로는 격렬하게 몸을 뒤틀어 나
무 꼭대기에도 올랐다가 느리게 느리게 온 가지들 끝으
로 오므리거나 풀어져내리기도 하면서 그 나무 속, 하늘
로 흐르는 강을 흘러흘러 둥둥 떠밀리거나 떠밀어 갈 수
있지.
햇살에 잠겨 있는 어린 나무의 잎사귀를 본 적이 있지?
그 말았다가 펴는 손바닥의 따뜻한 피, 손가락 끝까지 흐
르는 생명줄. 그런 어리고 순한 나무들을 낳는 거야, 솜
털 가득한 그 눈들을 보며 그것들이 작은 숨을 쉴 때 그
숨을 나누어 마실 수 있지. 그러면 참 사는 거 같을거야.
봄에 놀다
겨울로부터 쫓겨나 것들아, 아기 잇속 같은 잎들아, 망
울진 꽃들아, 그리고 너 키 작은 토끼풀, 민들레야 모두
나와 술 한잔 하자. 나를 버린 겨울일랑 용서하자, 떠밀
려 살아온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 오늘뿐이겠느냐. 집
나온 자식들 모여 질탕하게 놀아보자
놀다가 지쳐 쓰러져 죽을 때, 그때가지만 딱 놀아보자
돌멩이를 쥐고
둥근 돌이 싫습니다. 그 둥글다는 게, 그 순딩이 같은
모습이 죽이고 싶도록 싫었습니다. 깨트려버리고서야 알
았습니다. 둥근 돌 속에 감추어진 그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을 세우고 있던 것을, 무덤 같기만 하던 그 속에 정말로
살아 있던 것은 시뻘건 불을 피워 올리고도 남을 분노라
는 것을.
둥근 것들은 다 그렇게 제 속으로만 날카로운 각을 세
우나 봅니다.
풋여름
어린 나무를 타 오르고 있어요
휘휘 초록 비늘이 튀어요
풋나무를 간질이는 빛쯤으로 여겼더니
풋나무 몸을 부둥켜안고 기어올라
풋나무 몸에 파고들어요
가슴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을까요
어린 나무를 휘갑치는 담쟁이넝쿨은?
온몸을 뒤틀며
뿌드득뿌드득 탄성을 지르며
풋 풋 힘줄 세우는 소리
용트림하는 풋나무가지
초여름 저물녘 입술 자국에
겨드랑이부터 뚝뚝
초록 진땀을 흘리고 있어요
풀물 냄새를 풍기는
순 풋나무
담쟁이 치마폭에 폭 싸여
** 풋 풋한 나날. 진달래꽃 한 묶음 바쳐 묵념할 날, 마음은 수유리 얕은 길을 가고 있다. 지난 토요일 지인의 득녀소식에 동네서점을 기웃거리다. ![](http://image.aladin.co.kr/product/51/35/coversum/8936422383_1.jpg)
<맨발>과 <초록거미의 사랑>,강은교를 고르다. 이승희시집이 제일 많이 속이 접혔고, 그다음은 문태준,<맨발> 정끝별<삼천갑자복사꽃>이 강은교 시집은 불과 두편만이 접힌다. 새벽 짙은 비로 세상은 벌써 바뀌었지만, 세상은 늘 퇴행으로 몸을 가두어두는 것 같아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