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을 잃어버린 세상은 가엾다.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고, 보여진 것만 본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 공간의 상상력과 보인 곳의 다시봄 같은 풍부함을 거세해버렸다. 어둠이 새벽을 잉태하는 꺽어 돌아들어가는 공간은 새로움과 풍부함을 자극한다. 구비구비 돌아가는 길엔 가는 곳까지 희비와 애증의 경험 결이 있다. 직선엔 출발과 도착이 있을 뿐, 그 시간동안 무수한 느낌의 결을 모두 잃어버린 불행이다.

직선의 공간엔 소풍이 없다. 축적된 일탈과 탕진만이 있을 뿐이다. 골목을 접어드는 접선의 공간엔 불쑥 떠나는 소풍과 놀이가 묻어있다. 듬뿍 캐어낼 풍요가 있다. 상상력도 살아있다. 궁금증이 살아있다.

오늘도 직선의 협벽으로만 내달린다. 이젠 궁금하지도 않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하다 늦은 것인지? 직선의 공간엔 투명을 빙자한 빈곤만이 기다릴 뿐, 팍팍함이 일상을 점령한 지 오래다. 사연은 구차하게 되고, 이유는 변명이 되고,  상상력은 무능함으로 전락한다.

단단히 붙은 직선의 각질을 벗겨내자.

 

슬픔은 생의 재산

- 아들에게

 

내 방에 들어온 네가 깜박 잠드는 것 보고

몰래 빠져나와 늦도록 친구가 보내온

시집 읽는다 시 속에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많구나 지상의 낮은 지붕 위에

내려와 별들 글썽, 반짝이는 것도

이별이 슬프기 때문이란다

종라이에 회초리 댄 날 아비는 옥상에 올라

네 아름을 울었다 살다보면 쇠심줄보다

더 질긴 인연도 떠나보낼 때가 있단다

그 때를 대비하여 너는 더욱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이가 들면 작은 일에도 크게

서러운 법인가 군데군데 울음 감춘 시집이

눈을 자주 젖게 하고

문지방 넘어오는 네 곤한 숨소리

햇빛 부신 날처럼 평화롭구나

나보다도 더 소중한 아들아,  너를 사항하듯

이웃들을 대하마 먼 훗날

슬프고 설운 밤이 오거든 울기 전

먼저 하늘의 가장 먼 곳,

글썽,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거라

시간이 네 생의 멱살 움켜쥐어도

가끔씩은 먼 오지 가장 잃은 소년들의 부은

발등 떠올리고 낡은 집 마루 끝에 놓인

냉수사발에 와서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이야

미처 다 같지 못하고 마을 빠져나온

이 아비 생전의 빚이라 여겨다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위대한 식사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2.

가을산

 

덩치 큰 저 사내

어깨 들썩이며 울고 있네

소리 죽여 우는 붉은 눈물

오르고 오르다가

하늘까지 번지네

누가 저 순명의 저 사내 울리고 있나

한바탕 가을을 쏟아내고는

초심으로 돌아간 저 사내

한결 가벼워진 영혼으로

마을을 보네 하늘을 보네

닭울음 소리 더욱 쾌쾌하고

계곡물 토실토실 살이 오르네

( '가을산'을 주제로 시들이 몇편 있던 기억,  시원하고 훤하게 뚫린 마음의 가을산님이 생각나, 콕)

 

3.

어떤 날 강물은

 

어떤 날 강물은 밥알 같은 별 몇 점

가슴에 동동 띄우며 흐른다

 

어떤 날 강물은 가는 달빛의 허리를 감고

가쁜 듯 가쁜 듯 뜨겁게 흐른다

 

어떤 날 강물은 못난 세상이 미워 퍼런 불길

둑 너머로 뻗어 풀잎의 머리채를 휘어감는다

 

어떤 날 강물은 초저녁 노을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출렁출렁 노래부른다

길게 누운 길들이 젖는다 마을이 젖는다

(지금 오는 비가 대못같다. 쿡쿡 민들레 뿌리처럼 박힌다. 오늘 강물은 어떻게 다가올까? 어떻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60521

 광주 상가집을 다녀오다. 일터에서 이것저것 챙기고 있는데 연락이라 대학동기녀석 부친상이다. 같이 어울리기도 많이 어울렸고 경황없을 그 녀석을 생각해서 버스로 향하는데 제 시간에 없어,  동네서점에서 비비적 거린다.  이재무, 이시영, 이문재 시집을 보다 사구.  있던 책한권에 시집 4권을 보태니 양복차림에 볼품없어 들봉투 하나 권하여 넣었다.

가는 길, 이문재의 "제국호텔'을 요기하였다. - 그러다가 상가집에 도착하고 동기녀석들 만나고, 예전 기억들을 보듬어내고, 한 녀석은 대뜸 나에게 미안하다. 뭘,  너 시험거부할 때...같이 시험 보지 않고 거부했어야 했는데라며.. 20년이나 묵은 이야길 끄집어낸다. 뭘~ 임마. 싱겁긴.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공부를 더 할 수 없는 놈도 있었구. 정말 여한이 없이 공부하고 싶었던 녀석들도 많았던 것을 좀더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

세상에 대핸 어리숙했지만, 그나마 열정은 고스란히 남아있기에... ... 그 열정이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다 밤 1시를 지나쳤고, 서울행 녀석들과 일어났고, 하는 일 설명하기도 어줍잖아 그냥 열심히 산다라고 건넨다.  송정리역-광주역,  차편은 이미 끊겨있다.   앞 24시 편의점에서 캔맥주 하나, 오징어하나에 이시영 근작시집을 읽는다. 술도 반쯤 얼콰해 있었지만, 취한 김에 참 작가들은 답답하단 생각이 인다. 그래도 반짝하자마자 소멸하는 상품같은 작가들말고 든든히 주문하는 배후를 둔 작가들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월급쟁이 배후는 봐줄 사람들이 없으니, 동네사람들에게 잔뜩 핀잔이나 먹었으면 좋겠다. 그 든든한 배후를 꿈꾸며.

생각보다 대기시간은 길었다. 이재무 시집을 들고 여미어가기엔 체력이 부친다. 광주, 도청도 아니고 5.18 한참 지난 바람이 매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직선만 버젓하게 만들어놓아 숨쉴 곳 하나없는 광주역사가 얄밉다 생각했다.

첫차로 옮기는 아침해는 참 빨리 떠올랐다. 잠을 청하지 못할 정도로 뜨겁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울 2006-05-22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월
 

오월 어느 날

트럭 2대 가득 각목으로 무장(?)한 시위대를 만났다.

그들의 열정적인 연설을...시골고딩인 나는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유리창이 깨진 채 커튼을 휘날리며 질주하던 버스와

초록으로 일렁이는 보리밭 위를 날던 시커먼 헬리콥터가

항복을 명령하는 삐라를 까마귀떼처럼 흩뿌릴 때에도 깔깔거리며 내달리곤 했다.


며칠이 지났을까...긴장한 표정으로 소곤거리던 동네사람들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84년 무더운 여름 날 굽이굽이  황토길 걸어 망월동에...그리고

무등산에 오르던 날 광주는 내게로 왔다.


그리곤 더 이상

아무도 아무것도 돌려 세우지 못하게 했던 광주는

그런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 아니었을까?

 

트랙백(0)   덧글(0)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kskim1964/?pid=67
 
* 지인의 게시판을 들렀다. 가지고 나와야 될 것 같았다.

 

 

1.

 몇주 등한히 하는 사이,  초록은 앞 마당 야산을 전혀 다른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찔레꽃과 아카시아향, 이미  꽃잔설이 잔뜩 내려 다른 객들을 많이 받아들였음을 알려준다. 애기똥풀도 허리춤으로 컸고 듬성듬성 살을 찌운 연한신록은 이미 진해질대로 진해져있다.

2.

돌아가는 숲길목마다 깊은 여운에 끌려 들어간다. 하늘도 아주 간혹 보일 뿐, 이미 숲은 다른 세상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돌아가는 S자 숲은 끊임없는 상상력을 자극해낸다. 이별을 고하기도 하고, 불쑥 무엇인가 나타날 것만 같은, 접선의 무한대지점, 아쉬움과 기대감이 기묘하게 섞인 공간들

3.

그렇게 걷다 달리다 녹음과 상상에 취해 숲을 빠져나온다. 

4.

여름은 숲을 잔뜩 열어놓았다. 몸도 마ㅡㅇㅡㅁ도:   060520   6K   5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06-05-2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도 공주 마곡사에 다녀왔는데, 위에 말씀하신 눈과 코를 찔레꽃, 아카시아향, 애기똥풀 로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여울마당님은 어느 숲엘 다녀오셨는지요.

여울 2006-05-22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네 숲으로도 넉넉하더군요. ㅎㅎ(멀린 못 갔어요. 어제 광주 상가집은 다녀왔지만요.). 마곡사 정말 멋진 곳이지요. 가보고 싶군요. 갑자기 금빛 물고기들이 보고 싶네요.
 

 

  1.

책은 저자 이름을 빌어주지 않는다.(아닌가?) 책을 많이 팔아준다고 해서 그 사람 이름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다. 다음에 도움받을 것이라고 해서 공저자 이름에 넣지 않는다.  번역한 책이라고 해서, 번역한 사람을 데놓고 역자에 이름을 넣지 않는다. 감사의 글에 자그맣게 노고가 들어갈 뿐이다.(아닌가? 번역은 다 시켜놓고 편집해서 자기이름만 들어가는가?)

 

 2.

논문 이름빌어가기, 빌어주기를 보면서 참 이상하다. 보스 한명을 중심으로 해서 중간보스, 거래선까지 이름을 빌려주다보니 아무 거리낌없어진 것은 아닐까? 실로 이 보스의 힘-꼭지점의 힘은 무한대인 듯 보인다. 지도대국 한번 해 준 셈인가? 정점은 무한증식할 수 있는 파워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

3.

연구비를 받고, 평가잣대로 논문인용 회수, 돈을 얻기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하나 그렇게 자조하기엔 얼굴 화끈거리지 않을까? 관행이라고? 그 윤리에 대해 사회적 공론장에서 논의 한번 한 적이나 있는 사회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이상하다라고 느꼈겠지만 돌아서선, 밥벌이의 그늘에서 아니다. 나는 아니라는 몸의 강변에 묻어 지나가는 것은 아닐까?

 

4.

책의 공저자 관계는 거래가 있다라고 하더라도 이름을 서로 넣어주진 않는다. 이런 면에서 논문 이름 넣어주기엔 중앙집권적 발상과 실질적인 연구자 사이의 간극도 있고, 궁극적으론 논문의 가치도 서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적주의나 평가의 왜곡으로, 규모의 경제란 논리를 고스란히 들여와 추잡하게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5.

거래가 아니라 책임질 수 있는 선이면 되지 않을까? 그래야 일인집중체제가 아니라 다중분산체제로 이어져 더 양질의 논문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평가시스템의 변화, 과도한 실적주의, 보다 중요한 것은 양심과 감수성의 회복은 아닐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울 2006-05-19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정한 과학을 몰락시켜야..."
[시론] 진정한 가치는 "다른 사람을 돕는 자유"

▲ 91년 노벨 화학상 수장자인 리처드 언스트 박사  ⓒ
MRI개발로 노벨상(91년 화학분야)을 수상한 리차드 언스트(R. Ernst) 교수는 최근 국내 뇌과학연구소 개원식 기념 세미나에서 21세기의 사회상과 과학자의 모습을 ‘무한정(unlimited)’이란 단어를 사용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21세기 사회상을 요약하면...
▲ 개인의 자유를 ‘무한정’으로 요구하는 시대,
▲ 자유시장경제에 대해 ‘무한정’으로 신뢰를 표명하고 있는 시대,
▲ 부자와 가난한 사람과의 격차가 ‘무한정’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회,
▲ 협력은 사라지고, ‘무한정’으로 경쟁만 존재하는 사회,
▲ ‘무한정으로’ 윤리적인 토대가 무너져가는 사회라는 것.

언스트 박사가 바라보고 있는 이 21세기 사회상은 곧바로 과학자의 환경과 연결된다. 즉...
▲ 21세기 사회는 과학에 대해 ‘무한정’의 신뢰를 보내고 있으며,
▲ 많은 부자들은 과학에 대해 ‘무한정’의 지원을 하고 있고,
▲ 과학자들끼리의 격차가 ‘무한정’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 간에 협력이 사라지고,
▲‘무한정’으로 경쟁만 존재하는 상황이 ‘무한정’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 과학자 대부분이 너무 힘에 겨운 부담을 안고 ‘무한정’ 경쟁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

언스트 박사는 “세계 과학계가 지금 ‘무한정’의 속도싸움을 하고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리고 속도싸움을 하는 가운데 많은 과학자들이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거짓말이나 부정행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매우 우려되는 ‘부정한 과학(unjust science)’을 양산하고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언스트 박사는 속도경쟁이 아니라 이 ‘부정한 과학’을 세계에서 몰락시키는 일이 “21세기 과학자들에게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부정한 과학’을 몰락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 언스트 박사는 대학의 책임을 거듭 강조했다. “대학교는 살아 있는 인류의 문화센터로서 경쟁을 하는 곳이 아니라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것. 대학을 통해 학문과 장르를 뛰어넘어 인류 공영을 위한 대화가 이루어지면서 경쟁구도 속에 있는 ‘부정한 과학’ 풍토가 어느 정도 근절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언스트 박사는 이어 대학교수들로 하여금 경쟁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줄 것을 촉구했다. “교수와 연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며 대학교수가 경쟁구도 때문에 ‘부정한 과학’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마지막으로 언스트 박사는 “과학자들이여, 세계를 이해하라!”고 촉구했다. 박사는 지금 세계의 모습을 “미국이 저녁을 짓고 있는 가운데 EU(유럽연합)가 접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로 풍자했다. “나머지 세계의 주장을 미국이 싫어한다는 것.”

언스트 박사는 그러나 과학자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가치는 “다른 사람을 돕는 자유”라고 강조하고, 아인슈타인과 프로이드의 사례를 들어 다른 사람을 돕는 자유로서의 “이 세계에 대한 과학자의 책임”을 역설했다.

이날 강연에서 주목을 끈 것은 황우석 박사에 대한 언스트 박사의 견해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지만 황 박사와 같은 사건이 “너무도 경쟁을 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발생했다는 것. 지금 세계 과학계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한국에서 곪아터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언스트 박사는 그러나 2003년 MRI(자기공명단층촬영장치)를 개발한 미국의 로터버(P. C. Lauterbur)와 영국인 맨스필드(P. Mansfield) 박사를 ‘성인(saint)으로 표현했다. 성인이란 동양적 의미로는 군자를, 서양적 의미로는 천사 또는 천국에 간 사람을 의미한다.

박사는 자신이 알고 있던 로터버와 맨스필드 박사의 인격을 힘 있게 ‘성인’이라 표현하면서 두 사람의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박애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날 언스트 박사의 강연을 듣는 한국 청중들의 마음이 매우 착잡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사회로부터 ‘성인’이란 찬사를 들으면서, 노벨상을 수상하는 인물이 과연 나올 수 없는 것인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부정한 과학’ 풍토 속에서는 과학은 물론, 노벨상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윤리적인 문제는 과학자 개인을 포함해 국민 전체의 몫이라는 것이다. 과학의 풍토를 ‘부정한 과학’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과학풍토로 전환했을 때 한국에 자랑스러운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강봉 편집위원  


2006.04.26 ⓒScience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