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맞는 아내들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가부장제 가족제도의 효율적 작동을 위협한다.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안식처 가족의 신화, 보호자 남성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이다. 52쪽
 
   


   
  "아내 폭력"은 피해가 가시화되어야만 "진실"이 되기 때문에 문제해결은 언제나 피해 이후에 논의된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가 끔찍하고 심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정치학이다. 55쪽
 
   


   
  연구자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할 때 그들의 이야기는 "들리게 되고" 의미화된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잘 모른다. 69쪽
 
   


   
  연구의 객관성은 연구자가 자신의 위치를 고려하면서 연구 대상과 부분적으로 동일시할 때 가능하다. 부분적 동일시는 연구자가 상대방의 내적 준거 체계, 그의 구성 개념과 자기 자신의 생각 사이를 자유 자재로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의 사고 세계와 타인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융통성 있게 넘나드는 "삼투압" 능력이 필요하다. 72쪽 타인과 대립을 통해 자신의 경계를 구축하는 "독립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에게는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
 
   


   
  희생자화는 타자화와 관련된다. 타자화는 폭력당한 여성을 "일탈"집단으로 볼 때 가능하다. 연구 대상을 타자화, 희생자화한다는 것은 그들이 연구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재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77쪽
 
   


   
  "불행한 사건을 잊어라"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한 치유방법을 주문하는 것일 뿐이다. 실제적인 상처의 치유는 폭력당한 경험에서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재해석할 때 가능하며, 이때 그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생존자가 된다. 50쪽  상처의 치유는 문제를 덮어둠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춰내어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 재발견함으로써 가능하다.
 
   


뱀발 

1. 노인-아이-아내 폭력을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는가? 노인-아이는 개인의 문제로 아내는 가족과 가부장의 신화로 의식이 감싸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역시 사회적인 문제이고 그런 의식의 장벽(사회적 논리)으로 인해, 노인-아이 피해자에도 미치지 못하는 해결책들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한다.

2. 폭력은 백해무익이 아니라 백해유협한 것/몸에 붙어있는 논리-유격과 별개의 문제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3. 비정규직도 되고싶지 않은 것, 상상하기 싫은 것이지만 현실. 사회는 눈감아버리고 싶은 것,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으로 여겨 늘 수면아래 있는 것은 아닐까? 타자화하는 일상과 나는 아니라는 의식, 이런 것들이 암묵적 묵인으로 이어져 수면위로 떠오르기 조차 힘든 것은 아닐까?  일이 터진 후에 더 큰 희생을 기다리는 고통의 정치학에 올라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에 있는 문제이면서 당사자는 거론하기 싫어하는, 그렇다고 아무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역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자신의 입장으로 우리의 입장으로 재해석, 재발견해내지 못하는 반복은 아닐까?

4. 운동이, 활동이 엘리트의 시선으로 조금 더 나은, 아니 그렇지 않은 경직된 앎만으로 접근하여, 삶으로 접근못하는 시선으로 더 모르고 경직되고 한발자욱 나아가기 힘든 것은 아닐까?  희생자로 타자로 바라보기만 하는 사회적 시선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5. 인터넷의 소득별 보급율, 인터넷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이 섞이기나 하는 것일까? 소통의 주류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 노인들과 접촉점들이 있기나 한 것일까?

생각꼬리

1. 책을 읽다보니 여러갈래로 생각이 번진다. 비단 아내폭력과 여성운동에 대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접근방법이나 대상과 나의 경계에 대한 고민들에 시선이 머문다. 어쩌면 겨우 존재한다는 것, 열외자, 세칭 민중이란 표현들도 이렇게 구체적이고 생각의 장벽과 실험?의 반복이 없이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이 스며든다. 그리고 곧곧한 척 경계를 허물지 않는 서투른 자아에 함몰한 나도 그런면에 다른 방향에서 기존의 인식틀에만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앎이란 것이 피상에 피상을 덧붙이거나 머리앎에 머물러 그들의 경계를 들낙거리지 못하는 주춤함이란? 몸앎이란, 희생자나 타자가 아니라 함께 앎을 섞는 과정은 아닐까? 섞다가 서로 모호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붙어 다른 머리-몸-앎이 울릴 때, 그나마 보이지 않던 세계, 넘을 수 없던 세계를 넘을 작은씨앗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2. 폭력에 대한 기억. 말죽거리잔혹사처럼 황당한 중고딩 시절이 아니라도, 늘 팽팽한 긴장은 살아 꿈틀거린다. 군대 구타는 말할 것도 없이 폭력에 앞선 공포가 제일 크다. 몇년전 학운위, 그때 뵌 학부모임원 가운데 한분, 사고소식을 접하면서 기억이 가물했는데, 지난 수첩을 뒤적이다보니 얼굴이 떠올랐다.  사망사건인데 그냥저냥 쉬쉬하면서 소문은 사라져버렸다. 몇번의 만남이나 회의를 통해 안스러운 느낌이 배여나온 것이 사실이었는데, 그 이상은 눈치챌 수 없었다. 맥박없는 눈빛의 신호만이 거꾸로 거슬러올라가 기억될 뿐이다. 폭력은 말이든, 신체에 가하는 것이든 사람을 통해 그 만한 강도로 되새김되는 것이다. 백해무익할 뿐 아니라 백해하고도 늘 위협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동물이 좁은 사육장에 사육되듯, 끊임없이 폭력이란 철조망으로 강하게 자신을 두르고, 언제든지 그 긴장을 표독스럽게 푸는 동물들처럼, 때와 상황을 기다린다. 그래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으며, 늘 뺄셈으로만 기능한다. 군대에서 단 한차례도 구타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믿지를 않는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랬다고 하면 더 더구나 믿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폭력의 힘을 믿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폭력의 충동은 강하고 강열하다. 늘 그것에 몸을 기대면 불쑥불쑥 손짓한다.  언어의 폭력도 그러하다.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관계는... ...늘 기운다 수평이 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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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발.  일터 동료들에게 낚여 잔술하고 들어오는 길. 이*진샘과 함께 있는 안해와 이야기를 섞다가 증폭된다. 이*진샘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사라지고, 말 틈앗기가 이어졌다. 얼마만? 몇년만의 언쟁인지 가물가물한데, 출근길 동료에게 이 이야길하니 어색하고 미안한 마음만 가득히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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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02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비슷한 상황으로 일요일 하루가 내내 불편했었는데...

여울 2008-09-02 23:22   좋아요 0 | URL
ㅎㅎ. 여유를 갖고 가세요. 넘 동선의 속도가 빠르면, 가벼운 접촉사고도 있기 마련이지요. 조금만 더디가죠. 일방통행은 없겠죠. 서로 겹치고 감싸넘어가는 일상이 좋은 것 같아요. 조금 부탁하고 나누면서 요. ... ... 여유도 저축이 되는 것이라죠. 꿔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이라죠. 가족의 이기에서 영역을 넓혀둘 필요도 있겠죠. 경계가 말랑말랑...서로 삼투가 되면... 여유의 공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죠. 빨리 푸시는 것이, 그리고 여유도 한옹큼 마음에 넣어두시길...하하.
 




 뱀발

이틀동안 춘*대에서 아**미 웤샵이 있었다. 내내 [가벼운-가벼운]에서 [술-꽃불]의 향신료 덕에 [가벼운-무거움]으로 끝이 나다. 낭만을 뚫고 나온 상상上上, 전전날 세미나의 감춰진 좌파의 상상력에 덫붙여 본다.

맛난 음식과 구경꺼리 깊은 음식맛까지 보게 해 준 한**과 식구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시종 배꼽잡느라 고생한 운*위원분들.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지 못한 분들에게도 미안한 아쉬움을 건네야 할 듯 싶다. 며칠 잠을 설친 전작 멤버들에겐 남다른 심심감사. ㅎㅎ






080919 상상모임: 다큐멘터리북 제작팀-->다 book--> 多 북 Book 제작팀...>>.....일에 떠밀리지말고 거뜬히 해치우면서 함께 놀기. 다섯번의 놀이_말놀이잇기_즐빵...즐겁고 빵빵한 6번의만남과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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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파의 상상력에선 좌파에 대해서 개념이 규정되어야 한다. [ 돈 ]이나 [ 상품 ]이 아니라 좌파가 추구하는 것은 [가치]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 그것이 명확하면 좌파, 우파를 나누어서 판단하거나 사유하는 것, 가치와 돈의 경계에 대한 사고를 명확히 할 수 있다. 이 점이 아쉽다. :  [가치]를 돈 대신 [ 사람 ]이나[ 사회 ]적 신뢰로 환산하거나 환원, 돈의 신경망처럼 사회를 세밀하게 측정하거나 그려볼 수 있다. 모두에 나온 섹스피스톨즈,너르바나, 첨바왐바의 헷갈림이란 질문은 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2.
상상력은 거꾸로 왜 상상력이 없어지는가에 대한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상상하라고, 상상력이 없다고, 꿈꾸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들이 우리가 왜 꿈꾸지 않는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 근저에는 불안이 늘 자리잡고 있으며, 거꾸고 여유가 생기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여유]가 없으면, [불안]이 늘 자리하면 아무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출발하여 그 틈을 넓히고, 그 호흡이 자리할 수 있도록 [불안의 성]을 구체적이고 면밀하고 무너뜨리는 출발이 함께 있어야 한다.


 질문과 응답:

3.
[저항문화] 지배문화와 저항문화로 나누는 것이 오히려 문화를 생동감있게 느끼고 상상의 발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리상자에 넣어 박제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규정짓는 것이 오히려 스스로 발전 동력을 퇴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해석에 머물러 지금의 일상성이 힘을 갇게 하거나, 형식을 닫히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저항문화라는 것이 우상화되거나 상품화된 것은 아닌가? 좌파 상상력을 오히려 옥죄는 것이 아닌가? 일상과 구조의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4.
[촛불규정] 과잉규정성이나 환원하여 규정하는 문제가 있다. 삶의 결정, 소통, 형식의 무정형성 정도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반성의 지점이 형식인가 내용인지 궁금하다. 과잉정치화는 아닌가? 신자유주의를 안다고 하는데, 여러운동을 연결하여 보려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닌가? 서열화시키는 습속이 은연중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너무 작게보아서도 안되고 너무 크게 보아서도 안되는 것은 아닌가? 정작 20대는 놀라거나 대단해 하지 않는다. 거리에 나선 10대와 전자공간에 갇혀있는 10대가 질적으로 차이나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학생회는 형식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5.
- 관따나메라, pete Seeger 미국 민중가수 [우리승리하리라], [라쿠카라차-바퀴벌레]
- 사르트르와 까뮤 논쟁과 삶: 꺄뮤 [반항인], 피티독재와 소련에 대한 입장
- 생물학, 물리학의 좌우논쟁, 도킨스와 굴드, 빅뱅이론 등 천문학의 좌우논쟁을 다루고 싶었다. [민주노총]
- 2권:[여성운동](헬렌켈러의 삶과 사상- 의료시스템과 자본의 불평등), [긴호흡의 운동]-레닌 [혁명의 뿌리], 차베스 우리가 선택했다.
- 촛불: [집단적 피드백 의사결정구조] -[이머전스],[링크],[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뱀 발
- [ 촛불과 광장 ]에 대한 이야기
[집단 합리점]의 출현,  [집단 사고연결점]의 생성이라고 하면 어떨까?  비합리, 몰상식의 영역에서 합리와 상식의 작은 씨앗이 안개처럼 떠다니는 것이라 보면 어떨까? "집단 지성"?

- 논리보다 느낌의 공유, 새로운 감수성은 가벼움을 키워드로, 이슈의 결합, "가벼운 무거움"
희생과 인내보다 권리와 표현이 필요.

- 상상 -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다닌다. 이슈의 발아제를 가지고...

1. 작은 강연 가운데 긴장되는 몇 대목을 남긴다. 논의가 더 이어져도 손해볼 것 없는 이야기들. 뒤풀이 자리에서도 낚아챈 것도 있다. 2. 같은 년배의 친구들이 흔들림이 큰 것일까? 아무튼 흥미있고, 좌파교양?으로도 괜찮았다 싶다. 거꾸로 지금 좌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우려의 목소리 아니 현실의 수준에 대한 코멘트도 있었다. 3. 책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책에 나타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책만 보신 분들은 많이 아쉬울 것 같다. 4.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듯 싶다. 그때는 많이 들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자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된 점이 나름 깊은 재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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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2008-09-0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듯 싶다."에 바람(강풍)가득 실어 보냅니다. 그 때는 버스놓치고 후회하는 일 없어야 할텐데...많이 아쉬워요. 그나마 요렇게 후기 올려주시니 감사할따름임다.

여울 2008-09-02 11:27   좋아요 0 | URL
알콩달콩 듣기에는 아깝고 아쉬운 강연이었어요. 녹취한 것이 있으니 그 후기를 보시면 더 좋을 듯 싶습니다. 다음날 점심도 함께했네요. ㅎㅎ

파란여우 2008-09-0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런 글 읽으면 촌구석에서 다 때려치고 당장 도시로 돌아가야 할 듯~~
그러나 촌구석의 그 많은 보물단지들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말임다.ㅎㅎ

여울 2008-09-02 11:28   좋아요 0 | URL
여우님 나오게하려면 이런 수를 써야되는군요. 헛점을 보이셨습니다. 하하. 촌의 보물이 더욱 그리워지긴 합니다만...

여울 2008-09-02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보태본다. 이런 관점은 어떤가? 좌-우파의 도식이 아니라 좌표축 몇개 더, 일리히의 관점이다.

<그림자노동>, 이반일리히 - 그가 사망했다는 것을 이책을 접어들고서야 알게 된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 앞의 책만 몇권보았으니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많이 섭섭하다. 이면만 들여다보게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인 것 같다. 감명깊게 읽었던 폴라니의 논리를 확장, 전개시키고 또 한편 단순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발전이라는 관념에 묻혀 버린 공리를 찾기 위한 그의 노력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입체적이고 단순하다. 지켜내고 확장시켜낼 것도 명쾌한 느낌이다.

좌익-우익으로 단순화된 일차원적 정치모델이 아니라, 3차원 모델을 적용시킨다. X축에 좌익--우익, Y축에 소프트와 하드(큰 기술-작은 기술, 원자력,상품,서비스 등등), 그리고 Z축에 경제인(HAVING) 과 예술-생활인(DOING,BEING)을 둔다.( 소유에서 만족을 구하기에 적합한 사회조직과 행위로부터 만족을 구하기에 적합한 사회조직을 배치함.)

이 모델로만 하더라도 진보는 좌파지향만이 아니라 기술의 영역으로 인한 사회구조와 직접 삶에 맞닿아있는 행위의 영역까지 지향과 출발이 들어있는 셈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 개념의 유포와 발전사라는 것이다. 060625

 
방방방 뜨자(作)



주체의 감수성


[아는만큼만 보인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자. [만]이란 토씨를 빼니 아는만큼 보인다라고 하니 조금 나은 듯 싶다. 모임이란 무엇일까? 하나가 아닌 둘, 셋의 연결망이라고 한다면, 모임이 움직이는 경계는 어디쯤일까? 앞의 말을 조금 틀어서 [느끼는 만큼 움직인다]라고 하면 어떨까? 모임주체?라고 하자. 그 주체가 느끼는 것.(반복하지만 혼자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느끼는 것? 때로 혼자느낀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고 함께느끼고 아파할 줄 아는 것이다.) 그 경계의 안에서 사고하고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는 모임주체(혼자가 아니다. 연결된 분산능력, 방향에 대한 독자적 사고능력의 다양성)의 감수성과 관련이 짙다.

감수성(혼자 뛰어난 역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뛰어난 감수성이 아니다. 모임에서 품어진, 숙성된 자각 시스템을 이야기한다.)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을 수 있다.  제한된 시선이나 동선때문에 몇년 뒤에 눈치를 채는 경우도 있고, 느끼는 시선이 부족하여 모임을 향해 눈짓, 발짓, 몸짓이 아무런 느낌없이 통과해버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모임의 감수성을 높인다는 일은 분산과 분권, 참여의 회로를 다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일상적인 기능적인 일들이 아니라, 지금과 달라지거나 다르게 보는 시선들을 모을 것을 요구한다. 그것들을 모으고, 모으고, 모아 발효의 씨앗을 넣고 숙성시킬 것을 요구한다. 사적인 시선이 아니라, 그저 회원들의 숨은 욕망을 대행하는 보험업자가 아니라, 좀더 나은 것을, 다른 시선을 모아...스스로 회원들에게 스며들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가서는 길

모임의 감수성, 그 능력을 높이기 위한 일들을 나누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회원들은 서로 색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라는 것과  숙성을 위한 시스템을 단지 모여서 논의한다. 정례회의를 한다라는 정도로 사고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결정력이 소수로 집중된 조직이나 모임, 반복되는 사업위주의 모임이나 조직은 대부분 결정이나 집행의 패턴이 소수의 감수성 영역 내에 제한될 우려가 있다. 자각증상이 있거나 감수성을 자라게 하여 달리보는 기술들이 늘어나지 않는 한, 늘 같은 동선내에서 결정되거나 집행될 확율이 크다. 말로만 참여가 아니라 말로도 참여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방향이나 다른 시도에 대한 제언이나 움직임에 대해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3개월치만 따로 차곡차곡 쌓아두어도 많은 분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처리하거나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과정과 연결망으로 숙성시켜야 한다. 늘 그나물에 그밥이 아니라, 늘 같은 기획의도를 갖는 같은 색깔이 아니다. 지적성숙이 아니라, 열정이나 행동이나, 문화적 능력이나, 다른 색깔의 톤을 섞는 일이다.

버려진 무수한 시선들, 나뉭구는 무수한 시선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다. 성원의 동선에 눈길에도 버려진 아주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렇게함으로써 숙성시키는 방법과 과정을 익히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야 한다. 아마 제 몫으로 가져가고 싶어 한다면 모임주체들의 신경망들, 마음 씀씀이의 회로로 연결시켜야 한다. 새로 생긴 눈으로 과연 우리는 다시 느낄 수 있는지? 아파하는 정도가 달라졌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숙성하고 토론한다는 일]은 저기를 여기에서 예행연습하는 일이다.

일은 색깔에 따라 나눠볼 수 있다. 고정된 리듬으로 반복되어 행해지는 일과 좀더 다르게라는 레떼르가 있다면, 이 일의 분류에 익숙해져야 한다. 모임의 영역을 키우는 일인지, 모임의 지적역량을 높이는 일인지, 모임의 일들이 지금과 다르게 성원들 마음 속으로 스며드는 일들인지 구분되어야 한다.  구분된다면 자신의 입장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시선으로 그 방향에 대해 360도 다르게 품어보아야 한다. 90도 다르게 논쟁에 붙여보아야 한다. 180도 다르게 토론해보아야 한다. 이 과정이 귀찮다거나 결과만 챙기는데 익숙해져 잠재워야 한다면, [왜 잠재워야 되는가]로  토론내용과 발언자를 달리보는 전제하의 논쟁토론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차원이 달라진다면, 모임은 틀림없이 자라고 있는 것일 것이다. 소소수에서 소수로 소다수에서 다수로 진화의 단초는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달리 보는 하나하나의 지혜를 모임의 진행에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숙성과정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확인해보고 싶다면, 왜 같은 일을 똑같이 처리만 하고 있었는지 복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고 남이 말하게 하는 일. 아픔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참여의 질을 달리하기때문에 좋다. 모임과 성원의 일체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저는 도와만 줄께요와 삶과 연결시키는 또 다른 한쪽으로 자리잡는다는 일은 양과질 모두에서 차이나는 일이다.



따로 또 같이

집권의 향수와, 독재의 향수는 짙다. 분권의 즐거움이 온 몸을 감싸안기 전에도 느끼지 못할만큼 불감증은 짙다. 집중의 독배를 마셔 스스로 죽지않는 이상 영원히 분권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나의 열정이, 나의 앎이, 나의 동선이, 나의 감수성들이 [나-너]를 위해,  모임이라는 저장소에 숙성되고 서로의 것이 될 때. 아주 작은 공적 소유?물이 될 때에서야 이제 아픔과 감수성과 연결된 분권이란 새싹이 돋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서로 마음씀씀이들이 모이고, 꼭지 꼭지 감수성 능력을 높일때, 꼭지꼭지 상상력을 높일 때, 의탁하지 말고 자신의 톤과 삶을 만들어갈 때가 되서야, 대행이란 낡은 문패를 가슴에서 떼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나홀로가고 나홀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습관에서 서로 뿌리내리고, 다른 저기를 향해 아픔도 느낌도 즐거움도 커지는 방향으로 걸음마를 하지 못하면 우리는 늘, 여전히, 늘 쳇바퀴돌았던 봄여름가을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늘 쳇바퀴돌았던 봄여름가을겨울 사람을 만나 늘 봄여름가을겨울만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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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민이 너로 번지지 못하고 참여를 찾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잡생각(酌)
    from 木筆 2009-08-28 18:23 
    >> 접힌 부분 펼치기 >> *두네가 이곳에 다녀간다. 유달산과 갓바위 인근을 돌아다니다 미진했던 곳, 한번 더 보고 싶던 곳에 갈 수 있었다. 사설 성옥기념관엘 들렀다. 진품들을 몇점 볼 수 있어 좋다. 고암의 추상묵화, 윤두서의 그림을 비롯해 추사글씨. 백자. 마음에 점이 박히도록 남는 그림들이 생긴다. 연두부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할아버지 큐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