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쫓긴자], [내쫓길자], [무용한자] 당신은 어디? 자본주의의 변곡점은 지났다. 더 이상 자본주의는 더 이상의 노동력을 필요치 않는다. 기업이 성장하면서 일자리가 늘었는가? 지난 15년, 그러했는가? 성장하면 일자리가 늘어나던가? 과연 그러했는가?  

자본주의가 10억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10억명의 굶주림을 일자리로 해결할 수 있을까? 존재하지도 않는 일자리를 생존의 필수조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일자리가 없는 것과 무능한 것과 같은 것인가? 당신의 아들 딸들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면 무능한 것인가? 일자리도 없으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도 없는 것인가? 

유용하지 못한 자로 규정된(될) 자들은 신종마녀들인가?(이미 마녀취급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쟁력없고 능력이 없어 그럴 수밖에 없는 자들인가?  도대체 누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느 것이 사실에 가까운가? 나만은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사실을 대면하기 어렵겠지만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나라를 팔아먹는 정치, 없는 것이 있다하는 정치, 사회적약자를 한표로만 인지하고 무용하므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온몸으로 강변하는 그들의 허구를 꿰뚫어야 한다. 지금보다 더 이상 나빠질 것은 없다.

 
   

1.

꿈결의 말미. 생각은 아이러니와 유머에 밑줄을 긋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경쟁력은 대체 뭐일까? 경쟁력이 없는 갑자기 병든 사람이나 사고로 장애를 얻게된 사람. 장애우. 퇴직한 노인, 소년소녀가장. 사회적 약자는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사지 멀쩡한 사람들도 구조조정이 일상화된 지금. 그들이 말하는 경쟁력이 있는 사람들이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난 20년 일자리 일자리 이야기를 하는데, 고용없는 성장의 지속이었다. 누군가 사탕발림을 하거나 지속적으로 성장하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거짓말만 계속하고 있는 것이거나, 아직도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고 되먹지도 않는 현란한 말잔치만 벌이고 있을 확율이 크다. 실업자가 317만이란다. 통계수치의 함정도 함정이거니와 경제활동인구라는 영역에 벗어난 노약자를 모두 제외하는 숫자일 것이다. 게다가 주당 몇시간의 함정까지 포함하고, 구직포기자까지 보태면 얼마나?

2.

읽으면서 걸리는 말들 - 약자는 약자의 언어를 쓰고 않고 강자의 언어를 쓰고 내면화한다. 그러기에 자기존재에서 출발하는 생각이 아니라 되고 싶은 것을 강변한다. 정반대편에 있는 사유로 자기를 끊임없이 잊는다. 존재의 언어를 되찾는 것이 처음이다.  [모든 것을 빼앗긴자] [밖으로 내쫓긴자] [안에 갇힌 자] [고요함의 폭력] [쓸모없는 잉여존재] [이용당할 기회마저 상실하는 시대] [이익과 삶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못하는 시대] [박탈의 삶] [쫓겨난 자] [희생자의 무리는 대단한 속도로 증가한다] [관찰력 결여와 흥미 상실] [어떤 체제가 대중적 동의를 얻는 것은 다름 아닌 대중들의 무관심에 의해서다] [대중 속의 트로이 목마] [생략의 원리-비참한 자들의 존재와 빈곤이란 문제를 아예 생략하고 무시] [사라진 미래] [재고품 존재] [매일매일 똑같이 되풀이 되는 날 속에 갇힌 채 끝없는 변화를 소망] [똑같은 식의 항만 바꿀 것이 아니라 식을 바꾸어야 한다] [교육은 확인사살중이다] [수치감 속에 학대 당하며 사는 삶] [성장이 고용감축을 만들어낸다] [고용창출 이전에 불안감을 창출한다] [불안감 아래는 모욕감-박탈감-위기감이 연결되어 있다] [강자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약자에게 책임을 덮어 씌우는 것이 더 쉽다] [만성적 시청각장애의 시대] [0시간 노동-일할 때만 보수를 받는다] [모두를 위한 무, 무를 위한 모두] [임금이 인하된 인력과 제거된 지방질들이 성공의 주역이라는 아이러니] [인간가축][소리없는 혁명]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의 노동력이 넘쳐나고 있다]

3.

[고민의 샘물이 있는 곳],[연구-사고-농담-열정이 존재하는 곳],[직업없이도 지낼 수 있는 삶의 양식] [정말 위험한 것은 상황이 아니라 피할 수 없다고 제시된 사항이면 무조건 체념하고 맹목, 동의하려는 우리의 태도다] [우리 삶이 달려있는 문제앞에서, 마치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수동적 태도로만 머물러 있는 것은 더욱 끔찍한 일이다] [살아갈 권리를 갖기 위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한가] [수익성을 올리는 데 이용할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의 삶도 과연 유용할까] 

 4. 

세상은 경제일원화의 사회에 일찌감치 진입했다. 이윤-이익, 남지 않으면 할 것이 없다. 이 유일한 진리아래 국가는 애걸한다. 제발 사람 좀 뽑아주세요. 미쳤냐? 뽑게. 자선단체냐? 그리고 선동한다. 이런 기업이 성장하도록 해야, 구조조정도 하고 경쟁력도 더 생겨야 일자리가 생긴다구 입만 열면 앞 뒤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해고자부터 저 가장자리에 차곡차곡 예비부대를 쌓는다. 산업예비군이 아니라 산업예비청춘들로 북적하다.은퇴자들로 인산인해다. 기업이 살찌면 일자리가 늘까? 그리고 그 일자리의 양과 질은 어떠할까? 

되지 않는 것은 된다고 해봐야, 고개를 넘으면 오아시스가 있습니다라는 것이 한두번이지, 그런 오아시스는 없다. 자가당착에 빠진 저 술책에, 나만이 낙타구멍을 뚫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확율보다, [내쫓길자]의 확율이 수십배 수백배 높아지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성장 = 고용증가 = 복지 = .... 자본주의는 더이상 노동력을 필요치 않는다. 노동력이 거추장스럽다. 아쉬울 것이 하나없다. 없어도 잘 굴러간다. 

신화와 환상에 벗어나는 것이, 우리들의 권리, 삶을 만들어가는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고 가능하다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따져보자.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인지 말이다. 그들의 말로 따지면 정신장애를 갖거나, 나이가 들거나, 장애를 갖거나, 병력이 있거나 하면 솔직이 안중에도 없다. 이익을 남기는데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애초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가축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이런 경제논리의 똥구멍을 핥는 것이 정부이고 모리정치꾼들이다. 우리는 이미 철저히 사회적 약자가 유배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시장자유주의라는 마약에 취해 이익과 삶을 도저히 구분하지 못하는 미친놈들에게 칼자루를 맡기고 있다. 

최소한 유용하지 않은자도 사람이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들이 살아갈 최소한의 돈이 있어야 소비라도 하지 않은가? 그래야 너희들이 좋아하는 기업이 돈을 벌잖아. 그렇게 구조조정되면서 기업의 군살을 빼서 경쟁력이 강화되었으면 그렇게 빼앗긴 자들이 성장의 일등공신이잖아. 잘 해줘야되는 것 아냐. 벌은 것을 일등공신들에게 쓰고 있는 것 맞아. 도대체 너네 말은 일리란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지 않니. 맞아 ! 틀려!  

5. 

일자리를 찾고 있는 당신은 이미 경쟁력이 있어요. 없어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눈길한번 주지 않기때문이죠. 아무리해도 노동력은 남아돈답니다. 직업없이도 지낼 수 있는 삶의 양식을 사회가 만들지 못하면, 우리는 늘 낭떨어지에 떨어질 순간을 기다려야해요. 떨어진 것이 마치 내탓인 것처럼 말입니다. 결코 주눅들지 마세요. 사회에 대한 이런 어처구니없는 곤경을 품고 서로 아파하고 알려야해요. 속지 마시고 부끄러워 마시구.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모두 다 너무 젊어서 나이가 많아서, 업종에 사람들이 몰려서라고 때문에를 옆에 붙이죠. 하지만 속지 마세요. 그렇기 때문에 함께 살아야하는 것이죠. 그 방법을 생각해내야 하는 것이죠.
 

뱀발. 어제 참*에 잠깐 들렀다 사회과학방법론에 관한 책들 외 몇권을 주섬주섬 챙겨온다. 새벽 말미에 든 생각하고 책의 생각이 많이 겹친다. 소설가인 비비안느 포레스테가 1996년에 쓴 책이다. 프랑스 비소설부문 1위, 약 27만의 독자가 읽었다고 한다. 소설가의 감수성은 사회과학개념어보다 훨씬 느끼기 쉽다. 저자는 특유의 통찰로 [소리없는 혁명]이 이미 일어났다고 여긴다. 자동화와 인터넷의 발달은 우리사회에서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난 10년 고용없는 성장이다. 실물경제로 움직이는 것이 1,2 분량이라면 금융, 투기에 투기로 움직이는 것이 나머지 98,99배인 자본주의다. 그러니 더 더욱 고용이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기업은 툭하면 정부에 대고 공갈협박이다. 그러면 다른 나라에 간다고.. 애초에 짝사랑도 필요없다. 솔직한 기업이 그나마 적확하다. 제발 뽑아주세요라는 비현실적인 소리는 하지도 말아야 한다. 경제의 권력과 규모를 냉철히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구도 속에 우리 삶이 어떤 위치를 자치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이해하려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으면, 이렇게 정신없이 뒤퉁수맞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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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01-0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림청에 이력서를 냈는데요, ㅎㅎㅎ 연령에, 전공에 두루두루 걸리더이다. 근데 하는일은 전혀 전문적인 일이 아니라는데 있죠. 주눅은 안들어요 그러기에는 굶주림에 관한 공포가 훨씬 현실적이라서 거기까지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잘 견딥시다.

여울 2009-01-04 11:15   좋아요 0 | URL
좋은 소식 날아들기를 (학수)고대할께요. ㅎㅎ. 잘 견딥시다 ㅎㅎ
 
모임셋-책도셋-생각도셋

참새들이 30여마리 몰려왔다. 잣나무 아래 덤불 사이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부리를 쪼아대고 있다. 잠시 후 인기척이 있으면 어느 녀석의 추임새로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무가지로 포로롱 자리를 잡는다. 잠시 뒤 기척이 잠잠해지면 어느 녀석의 깃발때문이지 모르겠지만, 쏜살처럼 덤불사이로 축지법을 쓴 것처럼 머리가 반쯤 파묻히는거다.  이 녀석들은 제법 부푼 햇살로 입가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해의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만 역시 성가시다는 듯 햇살 두모금 먹고 넉넉한 날개짓으로 포로롱 포로롱 꽁지를 뺀다.

1.

함박눈을 한웅큼 먹은 12월 31일은 마르고 시원한 공기와 하늘이다.  모임의 성찬일까? 모임의 별빛일까? 어제 몹시 곱던 초승달과 별만큼이나 모임의 향기를 안고 한해를 갈무리해본다.[날림]의 청순함과 [신박]의 중후함, 그리고 그 공간을 늘 따스함으로 부풀리는 추임새와 더늠의 공간은 뭉클했다. 책소개의 따스한 시선들도 어찌 마음을 짜고서는 낼 수 없을 정도로 색깔이 녹녹치 않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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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고 마을이야기 한 점. 촛불도 강행군으로 지칠 무렵, 더 이상 열정이 몸을 담보하지 못할 무렵. 마을에서 만난 사람. 엊그제 송년모임을 했고 아픔과 상처, 다시는 보지 않으려했다는 말.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기다려주지 않고 보여주지 않는 서늘한 판단이 얼마나 그를 상처입게 했는지 말이다. 나란 인간이 다짐하던 말과 온기가 얼마나 비수처럼 되돌아갈 수 있는지. 애타는 마음들을 나의 잣대로 외면했던 일이 그와 나의 접점에서 얼마나 일그러질 것인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를 매만지고 매우는 일. 더디지만 그렇게 표시를 내는 것. 아직도 만날 수 있고 시간이 열려있다는 점이 고마울 뿐이다. 서늘한 스스로 경계와 버릇에 대해서도 곰곰 짚어 보련다. 그렇게 쉽게 관계를 매우는 버릇이 주위에 얼정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이겠지~.  하나 더 넣는다.

3.

가족송년회. 처가 처동생들이 모든 상차림을 준비하고, 송년케익까지 준비하였다. 기특함을 넘어서 설겆이까지 해내는 모습을 보며 늘 대접만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식구들과 접점도 마음도 일상을 섞여내고 있지 못한 부재를 발견한다. 애쓰고 나누고 싶어하는 것들에 다가서지 못하고, 스스로 시선으로만 경계를 쳐서 몸의 다가섬 금지령을 내린 듯 멀리했던 것은 아닌지하고 말이다. 아이들은 청년으로, 애기들은 수다쟁이로 벌써 다르게 줄달음질치고 있는데 아무 것도 달리 접점은 없다.  엉거주춤 문턱을 들어서는 자세가 말이 아니다. 생각질만 한가마니다.

4.

올해의 책세권. [나와너]-[서로주체성의 이념]-[동무론]. 세번 숨이 막히다. 하나를 더 보태면 [분자혁명]일텐데 이 책은 묶음이라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서문이 정리가 잘되어 있다) 나만 이야기하는 서양사나 학문은 늘 미심쩍었다. 아닌가 싶은데 아닌 것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빨려들어가다보면 그래서 그 완결적인 구조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라는 물음이 묻어 나왔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여 외도를 하며 찾은 책들이거나 다가선 책들이다. 쭉쭉 이어가다보니 나르시즘의 대한 의도하며, 이어지는 흐름이 너무도 유사하여 놀랐다.  

 



5.

진선미가 아니라 슬픔을 이야기하고, 생각이 아니라 상처와 아픔, 고민과 방향성에 대한 생각이 겹쳐있다. 나를 멈추고 그것에서 너로 이은 생각들이 의외로 가지치듯 이어진다. 뜨문뜨문 읽은 책들을 올해가 가기전에 마무리하여야겠다고 했는데, 너와 나, 그 울타리를 넓히고 섞이는 일에 고민이 꿈결을 채어가기도 한다. 그래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 하는데, 네가 고민과 상처와 아픔을 이야기한다면, 그 고민에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대체 무엇인데라구 되물으면 막히는 것이다.

6.

사실 놀라운 것은, 학습도 선행이 있나? 고민도 선행이 있겠지. 생각결을 다가서다보면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동무론]을 마져보고, 어제도 잔여분량을 강독하다보니, 주섬주섬 스쳐지난 책들과 사상가들을 이리저리 맛깔나고 선명하게 엮은 것에 놀랍다고 느낀다.(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이미 나와너가 아니라 서로주체성만이 아니라 저기 저만큼 성큼성큼 두고있다. 인문의 그물망을 이렇게 넓고 촘촘히 엮은 능력에 대해 고개가 절래절래 흔들린다.(오버하는지 모르겠지만)

7.

버릇, 몸을 끄-을-면-서, 고민과 방향의 결, 숙성과 사례, 자본의 나르시즘과 거울을 뚫고 넘어가는 세세함에 대해서는 더욱 풍부한 시선과 삶, 일상, 다름이 더욱 실감나게 하겠지만 역시, 지난 생각흔적을 엮기에는 짜투리처럼 중동날 수밖에 없던 생각조각들을 잇고 보수하기엔 마음을 주고 교재로 삼아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오늘 이곳에서는 송년촛불이 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남는 사람들은 뫔속에서 아끼기로 하고 광고(데마고그가 아니라 진심을 알리는 일이니 낚였다 생각마시고 몸을 던지시면 본전뽑는다. 나-너-너-나의 그물망은 늘 나를 앞선다.) 남기며 한해 꽁지를 뺀다. 포로롱..으능정이촛불에서 고개를 반쯤 담을 것이다. 포로롱~~~ 건강하시고 어려움을 같이 타넘는 내년 한해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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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뒤 걸러지는 말들 - 돈 호세,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 8세, 多여행,시인친구들.게로니카,세잔,마티스,아프리카,오묘한감각전달,장곡토,시,희곡,올가,박물관,콜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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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림-신박연대 공연도 있던 송년회 소묘

따뜻하고 포근한 모임, 풀어내는 올해 책들의 시선 한올한올은 마치 짜 맞춘 듯하다. 소외,열외 이땅에 눈길한번 제대로 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목소리로 향하고, 그 울림을 찾는 책들로 가득하다. 예수를 다시 불러내고, 나르시즘에 빠진 철학을 되묻는 철학자를 맞고...생활에, 삶에 녹힐 것을 이야기한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엘지넌에게 꽃을/엄마와나/위험사회/공장이여잘있거라/철학삶을만나다/술취한코끼리 길들이는법/예수없는예수교회/천둥치는밤/무탄트메시지/사찰그속에깃든의미/지금이대로괜찮아/서로주체성의 이념
 

 

  

 

 

  

 

 

 

 

 

 

  

 

 

 

 

[함께라면 우린 지는 법이 없다]란 현수막 가운데 [함께]에 내내 마음이 걸린다.

 

2. 올해 마무리 책읽기

호의와 호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백과 소문도 믿을 것이 별반 없다고 한다. 연정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나로 되먹임되고 증폭되는 이상, 나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이 상처나 슬픔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면, 이 상처나 슬픔은 나로 증폭되는 것이 아니라 너로 가는 길이므로 나 이상의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마음의 최소주의를 이야기한다. 사랑은 애초에 거품이 잔뜩 끼거나 안개이거나.


   
  월하정인 " 달은 기울어 밤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 그러나 삼경이든 오경이든, 두 사람의 마음을 두 사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하는 법.
 
   

 


   
 

고백과 소문의 사이는 좁아보인다. 그 좁은 틈을 열어 다른 삶의 지평을 불러내는 방식은 삶의 극진함 외에는 없다. 고백보다 깊고 소문보다 빠른 생활의 조직을 재구성하는 '극진함'에서 人紋의 미래는 재가동할 것이다. 254

고진은 고백조차 권력의지의 발현이라고 본다. "왜 항상 패배자만 고백하며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 의지이기 때문이다. 고백은 약자의 언설양식을 취하는 듯하지만, 그 양식은 이른바 소통행위의 순수성, 진정성, 충일성을 전유하려는 피학대-가학적 권력의지의 도착을 숨긴다.247

나는 이해를 오히려 상처와 결부시킨다. 이해를 감정이입과 추체험, 실존범주, 그리고 은총의 장 속으로 수렴하는 태도에는 각기 그 나름의 일리가 있겠지만, 근년의 내 해석학적 고민은 무엇보다도 '상처'를 둘러싸고 회전한다. 라캉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상처에 대해 무지한 한, 인식과 이해는 영원히 그 스스로를 놓칠 수밖에 없는 숨바꼭질의 상태에 빠질 것이기 대문이다. 빛에 의해서 감각되는 모습은 그 그림자와 더불어 완결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227

사랑을 현상학적으로 환원시켜 그 순수한 본질을 얻겠다는 발상이란 현실의 수사를 그저 비현실적으로 도착시킨 것에 지나지 않아보인다. 본질이란 그저 매개 이전을 희구하는 유토피아적 박제물일 뿐이다. 인간사의 무수한 열정처럼 사랑은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꼬이고 얽히고 비틀이고 갈라지고 증식하고 불붙어 타고, 혹은 잿뱇의 폐허를 만드는 '환원불가능한'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219

 
   


 

 

 

 

 

 

 

동무론

   
 

무엇보다도 상처는 삶을 미로로 만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처받은 자는 주행로/이동로가 아닌 미로의 삶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미로를 걷는 것으로서의 산책은 상처가 덧나는 원천인 의도와의 싸움에 다름 아니다. 산책은 상처입은 미로의 삶이 그 기억, 혹은 의도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외출이며, 그 오연한 의도의 체계, 앓을 수밖에 없는 기억의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려는 생활정치다. 329

우리네 일상의 세속이 속절없는 우연이라는 사실에 대한 역설적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 우연이 제도와 관습과 체제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깊이 은폐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우연의 바깥이 없다는 사실이 거꾸로 그 우연을 필연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겸허하고 예리한 배움이다.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사원, 그리고 기업과 국가는 모두 한갓 역사의 우연일 뿐이다. 실은 누구나 알기 때문에 곧 그 사실은 우리의 체질과 공동체의 공기 속에서 깨끗하게 잊혀진다. 322

공원이든 무엇이든, 어떤 공간 속에 참여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각자의 삶이 일상의 속력과 방향을 재조정하면서 자그마한 결절을 맺으며 미래를 재조명할 수 있다면, 公園공원, 혹은 空圓으로서의 그 사회적 가치는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321

정신분석의 지혜가 반복해서 일러두듯이, 필경 삶은 앎이 아니라 견딤의 물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파우스트적 욕망이란 단지 앎에의 의지가 아니라 앎을 견딤으로써 개시되는 새로운 삶의 욕망이다. 진선미의 이데올로기야말로 삶의 진실에서 가장 멀리 놓인 박제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악의 명상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315 [해바라기 콤플렉스]

그 모든 신화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처럼 삶의 시작은 곧 위반이며 상처다. 해바라기 콤플렉스란 삶을 체계적으로 되-풀이하게 만드는 그 원초적 오염과 흠결, 위반과 상처를 외면한 채 반 초월론적으로 가꾸는 거울방 속의 광학적 행복을 가르키는 것이다. 314 [해바라기 콤플렉스]

상식적인 얘기지만, 우선 나르시시즘의 생산성을 긍정하되, 그것을 내내 응연히 지목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메타적 비판의 층위가 생활양식의 구체성 속에 안착, 유지되어야 한다. 가령(약간 더 따끔한) 아이러니나 (약간 덜 따끔한) 유머는 곧 그러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안이한 비판은 관념론으로 흐른다. 혹은 심하게는 신비주의적 수행도에 빠져 또 다른 형식의 나르시시즘을 반복할 뿐이다.304  [나르시시즘과 함께, 나르시시즘을 넘어가는 새로운 사이길] 304

이성적 지식은 존재자의 고독을 완성할 뿐, 타자를 만나는 실천적 매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성은 스스로의 의도 속에 보편을 품은 채 그 자체로 오만한 고독 속에 머문다. 레비나스의 선택은 공간보다는 시간, 남성보다는 여성, 앎보다는 사귐, 그리고 자아보다는 타자로 실그러진다. 그에게 "사귐이란 앎을 통하지 않고 있음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며,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일면 그것은 시간과의 사귐이 지닌 어떤 맥리를 살핀 것이라고 볼 수 도 있다. "그 자체로 모든 자기정립을 거부하는 시간"은 이로써, 이론적 자기차이화의 변증법적, 상징적 일상 속에 구금된 지식인들의 뺨을 때리며 변함없는 실재로서 침범한다. 292 [타자]

타자의 개입이 없는 자아만의 공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겹의 진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로써 다만 언어가 발설되고 유통되는 조건과 담론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근거를 물었을 뿐인 블랑쇼처럼, 나와 타자가 만나고 헤어지거나 섞이고 해소되는 지점과 방식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생각이 앎을 죽이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실천적 노력인 셈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아직 앎이 아니다. 앎은 의심이라는 교차/교통의 마찰에서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생성적 한계와 조건을 통해 재구성, 재서술된 것임을 보임으로써 거꾸로 타자를 주제화하는 계기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동무로서의 연인, 연인으로서의 동무도 이러한 역설적 타자의 지평을 느리게, 몸을 끄-을-면-서, 그리고 이드거니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서 조형된다. 290-1 [타자]

타인의 고통은 감정이입의 자동성에 의해 삼투되는 것이 아니라 힘겹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혹은 수잔 손택의 지적처럼,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 독아론에서 벗어나는 길은, "유물론적 마주침의 외상'을 겪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 기질과 버릇을 털어내면서, 내 몸을 끄-을-고 너를 향해 끈질기게 나아가는 지난한 마찰의 반복을 통해서 조금씩 극복된다. 심리적 동일시의 환상을 벗어나 무한하게 개방된 '현실'로 나아가려는 태도다. 무한으로 열린, 무한이란 부재를 향해 몸을 질질 끄-을-며 자신의 외부를 향해서 쉼없이 걸어나가려는 태도를 말한다. 288-90 [타자]

비평이 가능해지는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교통공간은 사막이나 바다나 도시처럼 사방이 툭 트인 공간이다. 나와 너의 사이,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 규칙과 규칙의 사이, 현재와 미래의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창발적 외상의 효과를 말한다. 비평은 이 사이를 창의적으로 견디는 일이며, 그 사이에서 얻는 효과의 생산성에 체계적으로 기대는 일이다. 결국 비평은 사회성이라는 사이공간을 뚫어 타자의 자리를 얻으려는 일련의 언술적 실천이다. 위기이면서 기회인 사이공간의 교통-생산성을 노리는 사유와 실천. 286-7 [비평]

신뢰는 타자를 향해 자신의 몸을 끄-을-며 나아가는 사회적 비약의 이치다. 요컨대 그것은 나와 너 사이의 심연을 사회적 실천의 새로운 버릇으로써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건축이다. 신뢰는 마음과 함께, 마음을 넘어가려는 실천적 관계의 재구성에 대한 문제다. 마음을 짐작하거나 유추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적으로 제어하려는 근기와 슬기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뢰는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을 공대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조금 더 물러나서 말하자면, 그것을 나의 현재와 너의 미래 사이에 놓인 원초적 심연을 근기 있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실천방식이다.  283-4 [신뢰]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연역한 사랑, 혹은 마음에 의해 정당화된 사랑은 나르시시즘일 뿐이며, 프로이트처럼 냉정하게 말하자면 결국 수음의 심리적 상관물이다. 사랑의 발생과 기동이 특별히 마음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음은 워낙 실없는 인과와 자기중심적 필연성을 제멋대로 짜맞추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랑이라고 불러줄 만한 움직임이나 흔적이 기동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 속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사이', 내 계교지심의 레이다를 솔개처럼 벗어나는 타자들과의 '관계'다. 당연히 대안적 모색의 지점으로 숙고해야 할 것은 '마음의 최소주의'다. 심리적인 동물인 인간이 남의 마음을 넘보는 일을 마냥 피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려는 결기이며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버릇이다. 아울러, 연정에 관한 한, 마음은 주려고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것은 마음이라는 사이비 사랑밭을 폐기한 채, 그리고 거꾸로, 말과 살을 적실히 아는 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 동일시의 어휘를 모르는 체, 삶의 방식과 문화로서의 연정을 이드거니 계발하라는 것이다. 280-281 [연정]

타자로서의 연인이란 무엇보다도 '진리를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관계의 양식이다. 그것은 쉼없는 재서술의 진리가 아닌 일리들로써 생활의 무늬를 조금씩 겹치며 변화해가는 방식이다. 278 [연정]

슬기롭지 못한 호의는 오해와 아집의 늪 속에서 소금뿌린 지렁이처럼 뒹군다. 그리고 타자의 물성에 이르지 못한 '생각'은 따개비의 천국이다. 호감이나 호의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닌 듯이 응대하는 실천적 결기를 얻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273 - 인간관계의 새로운 실천을 통해 확립된 그 체질만이 호감과 호의의 풍경을 넘어 그 계보학적 넓이와 무의식적 깊이를 통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272 -호감과 호의는 그 자체로 아직 사회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결국 개인의 나르시스적 구심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중성적 에너지에 지나지 않는다.(그 심리상태는 아침 안개처럼 허망하게 악감과 악의로 돌변할 수 있는 유동적 나르시시즘의 변형태에 불과하다.) - 호의과 신뢰를 구별하는 것은 현명한 인간관계를 건사하기 위해 극히 요긴한 실천적 지혜다. 새로운 버릇을 들이고, 그 버릇을 이드거니 건사할 수 있을 때라야 그 뻔하고 듣기 좋은 말, '일상의 진보'와 '새로운 주체'는 그 내실을 얻는다. 그 누구의 말처럼 '지키는 것은 비록 적으나 얻는 것은 많다. 271 [호감/호의,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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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올해 [081231]이 나에게 남기는 말
    from 木筆 2008-12-31 11:48 
    참새들이 30여마리 몰려왔다. 잣나무 및 덤불 사이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부리를 쪼아대고 있다. 잠시 후 인기척이 있으면 어느 녀석의 추임새로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무가지로 포로롱 자리를 잡는다. 잠시 뒤 기척이 잠잠해지면 어느 녀석의 깃발때문이지 모르겠지만, 손살처럼 덤불사이로 축지법을 쓴 것처럼 머리가 반쯤 파묻히는거다.  이 녀석들은 제법 부푼 햇살로 입가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해의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2 o o 8 년에 대한 작은 돌아봄 (3)

여기저기 생각뿌리를 두다보면 그것들이 한데 엉겨붙지 않는다. 이미 세상은 혼자 어쩌지 못하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는 사회다. 흐름이 생겨 몰려다니기엔 서로 정보도 많고, 갈 길의 갈래도 많다. 씨앗들이나 마음들이나 고민들이나 고생들이 몸에 붙지 않을 때, 혼자 감당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고민도 연애하듯 종자돈처럼 뭉치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다는 것에 절감한 해이다.

아마 경험이 많치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생각 또한 깊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그런 부분은 경험을 쌓으면서 후에 되돌아볼 나머지를 둔다. 좁은 사고와 행동밖에 할 수 없는 지금에 비춰 돌아볼 뿐이다. 상상력이라는 것도 그것을 별반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동안 마음을 줄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거울면처럼 반사되기 일쑤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마음이 전달될 수 있거나 온기처럼 따듯해지는 것이라고 호수 수면의 동심원처럼 퍼져나갈 수 있다는 느낌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겉돌던 마음이나 생각들이 더 늘 수 있다는 가능성때문인지도 모른다. 현실은 늘 가능성보다 작게 되는 것은 알지만, 아마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해 이렇게 추스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머리의 의욕이나 기억이나 지식보다 몸과 가슴이 훨씬 더 적확하다. 하고자 하는 것으로 뭉치면 1년, 2년을 넘기기 힘들고, 가슴만의 연대는 무엇을 할지몰라 불만 태우다가 말 뿐이며, 몸의 연대는 진하고 오래가기는 하지만, 가슴과 머리를 만나지 못하면 외롭기 그지없고 울림없는 삶으로 지칠 수 있는 것 같다.

몸도 가슴도 머리도 서툴다. 몸이 더 서투르고 그래서 늘 마음주는 공부라도 해야할 듯싶다. 마음을 받아 챙기는 것도 서투르다. 지나간 뒤 한참에서야 그 마음들을 눈치채기도 하는 것처럼 느리다. 나란 울타리도 너무 좁게두어 영토확장을 잘하지 못한다. 어불성설이기도 하지만 너를 이야기한다는 것. 나의 울타리를 희미하게 한다는 말은, 지금 나를 넘어서는 일인지도 모른다. 머리에 머무는 것을 선언하고 마는 것일 수 있다. 아마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 자신을 알아가는 나이긴 하지만.

일터에도 마음도 몸도, 마음을 섞기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본다. 아마 거울면을 뚫거나 조금은 뜨듯하게 덮혀졌는지 모르겠다. 아주 조금 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속도보다 점점 커지는 외로움이나 각박함의 속도는 더 크다. 그 각박함보다 그 안의 따듯함에 마음을 섞는다는 일이 훨씬 위험하기 때문에 주저하는지도 모른다. 그 따듯함으로 각박함을 감싸 너머설 수 있다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기에, 자칫 기우뚱하다가는 스스로 망칠 수 있는 일이기에 그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듯한 온기에 한눈파는 순간 저멀리 또 다른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수지타산이 더 익숙해서 일 수도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작다. 하지만 덜 각박해지거나 최소한 미지근하는데 도움은 주었을지도, 저 넓은 대양에 물한방울 보탰는지도 모르겠다.

그 많은 따듯함의 연대에 몰염치했던 나이기에 아마 보지도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터에 녹아있기보다는 외도의 마음들이 비치었기에 다가서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스스로 서툰지도 모른다. 그 양쪽 사이에 아마 내가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자신을 위로하는 해석이자 소회일 수 있다.

대학생 친구 한명만 있으면....청년 전태일의 한마디다. 세상을 뚫고 간다는 일. 혼자 해내야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혼자 하는 일도 아니다.  마음을 담은 [몸-가슴-머리]의 연대가 불씨가 되지 않는 이상. 단 한사람의 마음도 녹일 수 없다. 그렇게 마음들이 응겨붙지 않으면, 가슴과 몸의 눈길을 느낄 수 없다면, 모임의 고독감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따듯하지 못한 이유를 여전히 이들의 연대가 아니라 이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상, 따듯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온기에 목마른 시절, 또 다른 찬바람이 불지 않기 바래본다.

하고싶은 것, 해야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잠재되어 있는 혼자의 옆좌석에 같이나 함께를 태우고 이렇게 구분해볼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회자되는 2 o o, q(Q)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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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운영, moim 3.0 그리고 우석훈, 소통 (酌)
    from 木筆 2009-02-16 16:54 
    1. 090214-15   +: 삶과 지금 고민의 연결, 방향성 있는 고민의 숙성. +: 평범한 주부를 대상으로 하며 기획의 결과가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자체 세미나로 삶의 결에 대한 고민, 방향의 결을 모을 수 있는 것일까?(초기 운영단위에서 목적의식은 공유되었는가? 강사와 대상과 이야기한 논제에 대해 공감하였는가? 대상의 의도와 추진주체의 의도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나? 활동가 프로그램으로 접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고민하는 일의 풍요로움

 

 대전 근대사산책이 있던 날, 일요일 늦잠을 자구 버스를 기다리는데 도통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젊은 친구가 건네온다. 먼저 기다리던 여학생은 서울 모대를 수시입학하고, 뒤늦게 온 뚱뚱한 편인 친구는 재수를 결심한 모양이다. 이리저리 나누는 이야기들에 엄연한 현실의 존재감은 둘을 가른다. 쌀쌀한 날씨 두둠하게 내의까지 챙긴 차림, 목도리에 비해 갸날픈 여학생의 모습은 너무 추워보인다. 서빙으로 80만원을 벌었다는 현실. 친구와 영화보러가는 길. 버스에 오르자마자 영화를 보기로한 그 여학생친구. 뚱뚱한 편인 친구는 섞이지 못하고 다른 곳에 앉는다. 늘 이 사회가 그렇듯이 친구의 경계는 선명한 듯하다. 

그렇게 기형도의 시집을 넘기며 만*동 중학교 근처에 버스가 지나자 30대의 아가씨 목소리인 듯한데, 뒤에서도 다 들리도록  어디를 가느냐라구 묻는 소리같은데 곧 관심을 벗어난다. 시대의 우울이 배인 시집 이곳저곳을 들춘다. 그런데 상기된 억양과 톤의 목소리를 계속 이어진다. 아마 화답하는 사람도 없는 듯 싶다. 뚜렷한 대화의 흔적은 없는데 일정한 색깔의 목소리는 짙어지고 마주치는 시선은 없다. 곧 화면에 들어온 30대초중반의 아가씨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지만 모자에 분홍색 하이힐을 신고 깔끔한 차림으로 여전히 공중에 대화를 하고 있다. 버스가 서고 차문이 열리고 주공 3단지 앞 주차장에 내리자 마자 버스에 대고 밝은 목소리로 "즐거운 하루"를 외치고 사라진다. 

그녀를 오늘 다시 기억에서 불러내어 [즐거운하루]님으로 이름을 붙이기로 한다. [즐거운하루]님은 약간 들떠있고  "솔"에 약간 못미치는 음을 낸 것 같다. 그 기억은 쌀쌀해진 대전역, 한켠에 모이고 약간 늦은 다른 분을 기다리는 장면과 겹친다. 대합실 전경을 넣으려고 사진을 찍은 일행의 후레쉬에 날카롭거나 아니면 심심하던, 아니면 일과 가운데 하나로 이을 요량인 노숙하는 아저씨의 실갱이로 이어진다.  초상권을 침해하였다는 것인지 그것을 빌미삼아 뭐를 하자는 것인지. 촛불의 심심치 않은 행동대원 아저씨들이 그날도 어김없었다. 

정신장애인에 대해 서툴다. 편견도 시각도, 더구나 몸으로 겪은 적이 거의 없기에 더구나 더 그러하다. 그저 활자화된 지식으로 지금의 사회가 받아내지 못하거나 격리되거나 폐쇄병동으로, 가끔씩 선생님들의 협박용으로...너희들 그러다가 저기로 간다거나...영화의 잔상으로 남아있는 정도이다. 먼댓글의 [지금도 이대로도 괜찮아]를 읽다가 생각이 겹쳐들어 흔적을 남긴다. 

기형도는 어릴적 기억을 불러낸다. 부친의 사업실패와 병마, 어려운 생활이 그대로 그의 온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정신장애를 갖는 사람들이 일련의 수세대 수십년에 걸친 악순환의 구조뿐만 아니라, 각박한 현실이 제조해낼 수도 있다는 징후에 무척 아프다. 성실한 학생, 회사원, 주부를 가리지 않는다. 정신병을 갖고 있는 경우 더욱 더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강박이 더 어렵게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솔직한 물음을 던지는 것 같다. 아무런 소통방법도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 잘모르겠지만 

자기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너를 마음에 두지 못하고, 관계에 단절된 모습은 우울한 현실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 반대편을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즐거운 하루]님은 안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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