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책책책

 



시 기


텍스트


소모임


시대의 흐름


2005년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


 


노무현정권후반 (2004탄핵)


(민족주의,계몽주의,사민주의고찰)


 


8월 대연정제안


 


 


황우석신드롬과 황우석사태


2006상반기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고원


 


 


(근대에 대한 재인식)


 


평택 대추리 사건


2006하반기


사다리 걷어차기


 


5.31지방선거


쾌도난마한국경제


 


한미fta


남쪽으로튀어,나의아름다운정원,빼앗긴자들


 


2007상반기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


 


민주화 20주년


선진화전략/한국자유주의의 기원/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007하반기


(보수,자유주의세력의 결집)


 


이랜드/비정규직


윤수종, 소수자운동


 


디워논쟁


소금꽃나무


(사회적 독서)


아프칸사태


88만원세대


 


대선/삼성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2008상반기


위험사회


미학모임


 


파시즘/공화주의/복지국가 혁명


 


 


 


티벳


촛불,광우병


2008하반기


토지/본동에내리는비/내가춤출수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근대사산책

다이나믹핀란드


조류독감

미국서브프라임

 



 

 

2005년 - 2006년

 

탄핵국면을 이은 17대 총선의 여운이 가실 때 쯤이겠군요. 노무현정권도 후반기에 들어설 무렵, 아카데미 오비팀들은 그때 이렇게 어려운 주제의 논문들을 보고 있더군요.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사회민주주의 역사와 한국의 접근 가능성, 그리고 분단체제의 세계화 등등을 통해 앎의 문제, 사민주의의 사례, 민족주의와 평화의 문제들의 속살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도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지적한 최장집교수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초창기 지적에 대한 여러 문제점들이 가시기도 전, 세상은 황우석신드롬과 정지선을 넘어 황우석사태와 황빠의 논란까지 증폭될대로 커져 과학-경제의 논리공간을 만들고 이어집니다. 경제논리와 성장의 발목에 정신을 잃은 듯 돌아온 386과 개혁입법도 지지부진하고 빛이 바래는 시점이기도 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진행된 세미나는 한국사회의 현상과 문제점을 알아보자고 이어졌고 현재 한국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 중에서 서구의 근대 이후의 사고와 제도가 우리 사회를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서구에서도 근대를 연 생각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가 니체를 찾게 되었습니다. [니체의 천개의 눈, 천개의 고원]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세미나 하는 가운데 물론 해석의 문제나 이견이 없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텍스트 다양성과 다양한 시선, 여러 집단을 부여잡고 놓치 않는 논리들이 세미나 성원들 사이에도 새롭게 번지지는 못했습니다. 조금 다른 시점, 시각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정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서로의 사고도 근대의 방식에 꽉 묶여 쉽사리 헤어나지 못했던 기억도 함께 합니다. 그러는 와중 우리의 몸에 철두철미하게 배여있는 경제논리는 서서히 물밑을 넘어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수면위로 올라와 버리게 됩니다. 비대칭적인 힘의 관계나 규모에 대한 고민은 없고 성장의 신화와 정치 논리는 어김없이 미디어와 현실의 공간을 압도하게 됩니다. 한미 경제 고속도로를 내자는 주장이 거침없이 나오고, 비판적인 의견과 강연회는 정책적인 반대 방향으로 미치는 상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미 fta가 우리사회의 주요 쟁점이 되고 잇는 시점, fta를 포함하는 세계화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을 교재로 진행합니다.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를 통해 신자유주의와 fta가 선진국이 사다리를 통해 안정적인 위치에 다다른 후 사다리를 걷어차는 정책들에 대해 인상깊게 파악된 세미나였습니다. 세계경제에 대한 관점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된 계기였고, 장교수의 책 [국가의 역할]도 논의가 되었습니다. 딱딱하고 무거운 책들로 이어진 세미나였습니다. FTA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더 다양하게 분석이 시도되었는데 이런 고민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시국의 상황은 거듭 팍팍한 일상으로까지 침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천개의 눈, 천개의 고원. 서로 바라보고 싶은 논리들의 함정에서 조금은 탈출할 수 있었을까요? 계속이어지는 세미나는 시대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무겁고 굵직한 주제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첫 기억인데 그래도 말랑말랑한 소설을 년말에 집어들었습니다. 남쪽으로 튀고 싶기도 하고, 나의 아름다운 정원, sf 명작을 통해 진보의 생각과 삶, 언어, 지향에 대해 산책을 해보면서 한해를 마무리합니다. 따듯하고 꿈결같고, 현실의 팍팍하고 퍽퍽함은 이렇게 상쾌함이나 유쾌함으로 벗어나야 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다른 세미나보다 따듯하고 포근해서, 그 감성과 감정들이 서로 이어주고 지금까지 잔여운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2007년

 

노무현정권 집권후반, “놈현때문에“라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기득권세력은 연일 꼬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재벌은 물론이고 언론과 교육 모두 개선되는 가시적인 효과는 없게 됩니다. 우파는 물론이고 진보진영도 민주정부가 생겨 일정정도 개혁을 한다고 했는데, 개혁정치가 사회적으로도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어 암담해지는 시기였습니다.

 

그런 문제의식과 함께 경제위기 이어 fta 공방, 노무현정부의 실패는 진보진영 전체의 실패라는 인식, 87년체제, 97년체제 등 노무현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인식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87년이후 20년, 경향신문사에서 나온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이란 책으로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진보진영에 대한 전반적이 문제의식과 점검, 생활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것, 진보가 보지 못하고 간과했던 점들이 자성과 함께 세미나 속에서 뒤풀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습니다. 머리는 좌파인데 생활은 우파라든가 참진보는 무엇인가? 기업의 논리에 대해 무원칙으로 대응했던 것이 아닌가? 조금씩 의견이 개진되었지만 뒤편으로 밀린 흔적들과 진보세력의 정치적 진출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물꼬가 트이게 된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요? 진보세력의 소통과 연대에 대한 화두도 조금씩 지역의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현실은 점점 노무현 정권에 대한 피로감과 함께 뉴라이트와 보수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우파 사회단체도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 인식의 소화가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왜 지금의 자유주의가 문제가 되는지? 어떻게 보수 또는 자유주의 세력이 결집되고 활동하는지에 대한 이해와 대응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심화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 사회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한국자유주의 기원], 좋은 것은 다 묶어놓은 듯한 박세일의 [선진화 전략],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이영희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세미나가 이어집니다. 아쉽게도 안타까운 점들은 서구와 달리 보수주의의 맥락도, 자유주의의 맥락도 깊지 못한 우리의 현실이 더욱 답답해지는 과정이었던 기억입니다. 일제의 식민지 경험과 미국의 개입이 조선의 흐름과 근대의 공백을 갖게한 것은 아닌지 동시에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던 피상적인 자유와 정책에 대한 반성도 이어지는 계기가 된 세미나였습니다.

 

대기업의 논리와 자본의 요구는 그와중에 더욱 드세지고, 권력에 힘을 얻어 보이지 않는비정규직의 삶까지 위태롭게 합니다. 이랜드, 기륭전자로 파열음을 내고, 경제성장의 논리는 황빠에 이어 심형래의 디워논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극단의 상황을 목도하게 되는데, 이런 일들이 너무도 당연한 듯이 우리의 일상을 점거하게 됩니다. 자신의 경제논리와 자신의 삶을 섞어보는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닐까요? 부자되세요란 덕담이 자신을 부자로 일체화시키는 모습은 저기 일그러진 식민근대의 황국신민과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내면화가 어느새 부메랑처럼 돌아와 세계화된 자본의 생리는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무너지는 우리의 다른 모습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정신없이 살아왔지만 엄연히 세대간의 장벽을 만들어 놓은 현실, 좀더 조밀하게 우리의 삶을 넘보게 되어야하는 자각이 생기는 지점이지 않나싶습니다.

 

세미나팀도 소수자에 대한 관심, 아프칸 사태를 통한 이주노동자와 문화에 대한 관심, 비정규직에 대한 아픔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일부 사회적 독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함께 책을 읽는 흐름들이 지역에도 이어지게 됩니다. 윤수종교수 초청강연, 우석훈의 [88만원 세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등 년말 삼성공화국의 비리가 터지는 시점에서 시대상황은 여기저기 발생하는 문제들의 서로 연관성을 갈구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좀더 입체적으로 총괄적으로 세상을 보는 힘을 요구하는 듯 싶었습니다.

 

 

2008년

 

2007년 대선에서 여러 의혹에도 압도적인 표차이로 이명박정부가 탄생합니다. 과학이라는 것도, 기술이라는 것도, 인문이라는 것도 경제와 자본을 위한 치장정도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은 점점 더 암울이 색깔이 더 진해집니다. 잠깐 잠깐 제도 안은 인문의 위기를 들먹였지만 본질적인 인문의 부활이 아니라 자체 기능적인 수혈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근본적인 노력이 없습니다. 경제와 성장에 매몰된 정부는 작은 일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계의 아픔, 그리고 아픔이 불쑥불쑥 터지는 파열음은 주변에 있는 작은 이들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습니다. 대자본은 점점 더 치밀하게 중소상인의 영역까지 보란 듯이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년초 세미나를 한 뒤 우리나라에 방문한 울리히 벡은 별반 흥행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가 [위험사회]를 통해 제기한 문제는 별반 다뤄지지 않고, 서구의 유명한 학자로서 대접할 뿐이었습니다. 지적한 위험과 점점 가속페달을 밟아 위험을 예측하기 어려워지는 상황과 위험이 합쳐져 어떻게 되돌아오는지에 대해 우리사회 어느 곳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회자되지 못합니다.

 

어렵고 딱딱한 책만큼이나 현실은 더 단단한 껍질을 씌우는 듯 싶습니다. 아픔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지구 저편의 아픔을 지금여기로 가져오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함께 읽고 나눕니다. 그 기아의 문제는 서로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지구안에서 일입니다. 같이 숨쉬고 호흡하기에 그 아픔의 공기는 정화될 수 없습니다. 나라 안에 갇힌 부는 저 반대편의 굶주림을 유발하며, 지금 당장의 편리는 후 세대에게 불편으로 대물림됩니다. 과학만, 인문만, 예술만으로 갇힌 학문은 이 현실을 이겨내기에 도움이 별반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연결됩니다. 아픔의 강도만큼이나 우리는 잘 느낄 수 없습니다. 과학-기술-법-인문-예술-철학--- 모두 문제이며 서로 장벽을 쌓을수록 이해하기 힘든 세상은 서로 물꼬를 내고 함께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합니다. 단단하고 날이선 세미나 틈 사이로 좀더 현실을 다른 각도로 느낄 수 있는 미학모임이나 티벳현실에 대한 접근과 근대사 모임을 통해 좀더 천천히 몸에 스미게 하는 다른 시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연결시키려 하지 않았던가요. 좀더 아픔을 예민하게 만들고 멀리 전달될 수 있도록 서로 마음의 촉수를 가다듬었던 때입니다. 이명박정권은 세월을 돌려놓으려는듯, 복고의 상상력 수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휘되어 압박되었던 지점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봄은 지나고 의도된대로 제도권을 착착 권력의 수중에 넣는 와중에 여중학생들로 촉발된 광우병 집회로 새롭게 발화됩니다.

 

세미나팀은 [파시즘], [공화주의]를 통해 여러 논리와 현실사이를 비집고 나가게 됩니다. 50년전, 200년전, 300년전으로 문제의 본질과 해결점의 고리와 열쇠는 없는 것일까하는 의문과 고민의 시도를 전환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파시즘]의 문제는 이명박정권의 탄생, 일상의 문제, 해외의 사례 등등 너무 과도하게 보거나 소심하게 보는 것을 경계하며 좀더 현실의 문제로 예민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공화주의]란 책으로 시작한 세미나는 수차례 논쟁이 심화되기도 했는데 애초의 의도는 1980-90년의 버전이 아니라 좀더 대중들과 고민하고 주장해야할 이론이나 이념이 없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에 대해, 그리고 공화주의에 대한 공부는 지금 국가와 정부의 정체성에 대해, 그리고 법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논의를 통해 얼마나 밀도가 높았던 것인지 그 폭과 깊이에 대해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은 대한민국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정체에 관한 촛불의 생각으로까지 번지는 우연도 맞게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촛불정국은 많은 고민과 현실적인 한계를 동시에 고민하게 합니다. 좀더 현실적인 사례, 다르게 사는 국가의 모습들은 어떨까? 똑같은 삶을 고민하고 있지만 왜 나라마다 다 다른 것인가? 왜 같은 사람인데 허술하고 문제있는 기준을 감수하라고 하는 것인가? 말로는 경제논리를 들이지만, 우리의 경제가 아니라 저기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아이러니, 그 괴리감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인가? 위정자의 논리는 되짚어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세미나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례를 공부하게 됩니다. [다이나믹 핀란드], [복지국가 혁명] 북유럽의 사례들과 삶에 깊숙이 마음을 열게 됩니다.

 2008년 말미 미국의 서브프라임으로 세계가 휘청합니다. 자본의 열망이 다다르는 지점을 명백히 보여주는 듯합니다. 본동에 비가 내리고, 박경리선생님의 흔적을 찾고, 나와너의 춤출 수 있는 혁명 사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 사이를 채우는 일, 나만의 삶이 아리라 나-너의 삶으로 이어지는 길. 우린 어떻게 그 사이길을 나누고 보듬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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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 가는 길목, 저녁에 숲으로 향합니다. 장대비가 언제 내렸냐는 듯이 숲은 비의 여운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촉촉하고 포근하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다감하고 다정해보이고 친숙합니다. 기대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숲을 거닐다 생각이 걸려 문자를 보냅니다. 때를 지나면 너무 멀리 사람사이가 벌어질까봐 조바심입니다. 생각을 걸고 나누면 어떨까, 놓친 것들이 있지나 않은가하는 염려도 섞입니다.

약속을 하고, 막걸리 한잔을 놓고 모임과 나-너를 안주감으로 올려놓습니다. 모임이 무엇일까?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단체란 무엇일까? 단체의 색깔이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예전처럼 그 구분을 짓는 것이 유효한가? 아***는 무엇일까? 색깔없는 것이 색깔인가? 모임은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 맞는가? 아*** 무엇무엇이다. 자유다라고 규정짓는 순간 보듬지 못하는 무엇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누지 않던 고민을 시인에게 들이밉니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란 주체가 정말 있는 것인가? 나를 너무 강하게 규정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너의 마음의 거울을 통해 반사되거나, 다른 너에게 비추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먼나를 만나야 되는 것은 아닌가? 기껏 관계라는 것이 나-너만 있는 것은 아닌가? 너에게 되비추는 나만 있어 나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나란 생각도 너로부터 출발하거나 자라고, 나라는 것도 너를 통해 비추는 조각 조각 먼나를 만나야 되는 것이라면 모임을 통한 관계라는 것도 먼나에 대한 관심이나 너를 비켜서는 아픔에 대한 것은 아닌가? 강한 나에 집착한 우리에게 관계는 있기나 한 것인가? 모임이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구 규정하는 순간 모임은 기계처럼 딱딱해지는 것은 아닌가? 모임이 자라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나-너-나....모임이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인류가 한번도 결사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보지 못했다고 하면 어떨까? 인류가 기껏 가진 사유의 출발인 철학이 이 강한 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망가졌다고 하면 어떨까? 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만 가려고 했지 그 사이 민주주의를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라면 어떨까? 이렇게 뻥을 내지르며 막걸리를 건넨다. 나의 고민은 늘 거기에 멈춰서있으며 모임마다 자라는 속도가 다르며, 그 차이의 한가지가 강한 나에 대한 집착과 환원된 사유로 인한다고 말한다. 너에 대한 나의 중력이 너무나 크기에 그렇게 무중력처럼 떠있는 먼나와 너를 느끼지 못함으로 생긴다고 주장한다면 말입니다.



뱀발.  

1. 그렇게 생각을 이어나가다보니 혹시 나는 너의 마음에 갇혀 다른 너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먼나, 먼너는 어디에 있는가? 너로 몰빵하는 것은 아닌가? 너에 올인해 되비추이는 먼나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모임 속에 먼나는 있는가? 나는 그렇게 너의 마음의 거울을 통해 되비추이는가? 

2.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들킨 것인지 번개문자에 지인들이 뿔뿔이 번개를 맞고 있더군요. 아쉬움이 밀려들지만 생각을 더 지르거나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이야기만 되새김질 합니다. 유아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야할까요? 관계의 미숙으로 모임은 늘 자라지 못하거나 폐기되는 악순환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요? 관계론이 머리 속에만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가슴으로 마음으로 손과 발로 내려오지 못하는 관계는 현실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3. 유아의 미숙함은 강한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모두가 어른이라고 하지만 모임과 관계에서 어른은 없습니다. 미숙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른이임을 눈치채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모임이 주어지는 것도 나라는 것도 불쑥 생기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먼나를 먼너로 관계하고 사고하자. 그렇게 생각을 밀고나가니 어색하군요. 구호같기도 하구. 또 다른 환원?이기도 하구 말입니다.  

4. 진리를 살아가는 것은 반진리를 느끼고 아는 것을 전제합니다. 진리를 살아가는 것은 허투루 편할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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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반진리 그리고 삶

말의 DNA, 논리의 DNA - 방사선조사식품에 관련하여 작은 강연을 이어듣는다. 피곤의 누적이다.들으면서 기술-경제논리가 결합하여 말을 만든다는 느낌이 든다. 안도현의 연탄재가 아니라 연탄이론이, 탄음식이론 등으로 기존 관념을 전도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싶다. 그런데 그 말의 DNA는 경제의 매듭만 있고, 모든 다른 논리를 숨겨버려, 다른 논리를 복속시키고 있다. 기술을 먹어치우고, 과학을 자양분으로 해서 만든 논리는 다른 담론의 DNA를 괴멸시켜 증식을 시킨다. 이렇게 다른 것을 거세한 논리를 만든 이들은 전도사가 되어 생태-사회-문화-입장들의 가치를 곁가지에서 잘라버린다. 몇차례 말이 섞이면서 아-아를 반복하다보면 프리젠테이션의 이면이 가리고 있는 배후는 오간데가 없다.

과학과 기술에 경제란 포인트만 둔 논리의 횡행 속에, 또 다른 논리가 모두 서열화되거나 작용을 하지못하게 한다. 삶은 진리다. 이런 반진리가 사실과 위험성을 숨기고 삶으로 넘어오고 있다. 이런 말의 디엔에이에 대한 대응과 면역은 어디에서 생길까? 삶의 관점으로 다양한 입장과 관점으로 다른 디엔이를 접붙이는 방법으로 가능할까? 경제만의 논리를 배제하고 그곳에 소비자와 주부와 생산자와 이해관계자의 이해를 접붙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접붙이는 것이 그 기술과 과학을 지금을 살아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과 기술의 괴물에 잡혀먹히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을 삶의 사람의 수중에 넣는 일은 더디지만 그 결들에 다양한 입장을 예민하게 결합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뱀발. 정리를 하다보니 지난 글이 생각난다. 다시 말미를 보니, 진리가 살아갈수록 진리의 씨앗이 만들어질 때, 좀더 반진리가 거동할 수 없도록 혼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이다. 삶에는 환원논리가 작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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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협, 이래야 오래간다
    from 木筆 2011-11-22 14:42 
    방사선조사식품- 당신이 좋아하는 라면스프엔?과학의 기역도 모르는 이들이 모였다. 특정 기술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사전지식없이 이틀동안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고한다. 질문를 던지고 받는다. 찬성과 반대의 앎이 쌓이는 동안 어느새 많은 이들은 문외한에서 문안에 서성거리고 있다. 그 무렵 전문가는 왜그리 어려운 용어를 들이대고 주부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하대하는 것인지? 기자는 방사선조사가 아니라 상온처리, 우주식품 등 말을 만들고 바꾸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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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7-16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날로 먹는거 아니라 정말 시원한 그림이어요. 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요? 저는 마음에 드네요 ^^

여울 2010-07-17 13:55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날로 먹게 해주셔서. ㅎㅎ. 비가 너무 많이 오는군요. 비피해들 없었으면 좋겠어요.
 

요즘 나는, [    ]에 꽂혀 있다. 아직 벽癖까지는 생기지는 않았으나, [  ]에 끌려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물끄러미 보기도 하고, 뒷태에도 관심이 많아 작은 선 하나하나도 놓치려 하지 않는다. 관심을 늘이다보니 마음은 그 선의 강을 따라 나선다. 작은 냇가도 들어서고 마을도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다 그 강줄기는 본류로 합류되기도 하구, 이웃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따로 따로 있지만 따로 있지 않다. 작은 듯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저 평원은 끝이 없다. 마음이 그렇게 한참을 노닐다보면, 어느 새 다른 [    ]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리로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골목길도 논도 밭도 거기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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