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012 죽음, 자유 그리고 사회
검소한 풍요와 성장 그리고 우리가 간직해야할 시선

날로먹기 - 실천적 지식, 과학적 지식, 자유로운 정신들, 실천적 실험, GDP에 잡히지 않는 경제, 필요에 의한 소비, 필요의 양과 질, 생협, 레츠, 두루의 양적 표현에서 질적 표현으로 나아가는 방법, 체험으로 인한 시각의 확보만큼 나아감. 시장의 하이에크식 해석. 시장이 정보(지식)을 섞이게 하고 나눌 수 있게 한다. 시장의 기능을 소비가 아니라 정보의 소통단위로 해석하여 GLC처럼 사회주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함. 렛츠와 생협의 대전이란 지역에 집중적인 관점과 통합하려는 욕구가 문제. 동단위로 작은 시도들의 노력이 자유로운 정신과 유대의 뿌리를 내릴 수 있음. 삶의 단위로 내려가서 진행될 수 있는 한계를 다시 보는 것이 필요함.

자유로운 정신들 - 진보적인 생각, 진보적인 머리를 갖고 있으나, 세속에 너무 물들지 않아 현실적인 여건들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음. 현실과 면밀히 섞이지 않아 현실에 접목된 실험이 부족함. 따라서 현실의 연결망을 진보적인 색깔로 물들이지 못함. 이런 현실의 적응부재를 머리의 색깔로 바꾸며 이동성과 휘발성을 특징으로 함. 현실에 뿌리를 내리더라도 너무나 약함. 머리의 연대에 대해서도 이런 이유로 별다른 관심이 없음. 머리의 연대를 통해 현실에 깊게 뿌리내릴 가능성도 크게 고려하지 않음.

실천적 지식 - 머리만의 유대가 아니라 몸의 유대나 몸의 연결망, 나가 아니라 나-너의 실천적 시도를 몸에 익힌 앎. 최소한의 비자본주의적 머리와 가슴을 마음, 손발의 문제로 접목시키려는 경험이 있어야 함. 군이나 시단위의 거대기획이 아니라 동이나 모임, 소모임 발딛는 곳의 관계망을 전제로 함.

과학적 지식 - 머리의 영역권내에 머무르는 앎. 이론적 근육을 제공할 수 있음. 하지만 현실의 문제로 접목되거나 이론성이 강해 손발이나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체계나 앎의 그물. 현실과 연결성이 몇단계를 거쳐야 파악되는 앎의 체계.

조건들 - 분위기 아우라이기도 하나 실천적 지식으로 인한 관계망이 과학적 지식이나 여러 사회적 실험을 받아들을 수 있는 수준. 경제와 성장에 너무 사고가 발목에 잡혀있을 경우, 서유럽이나 북유럽, 다른 민주주의 실험을 접목시키거나 이식하기가 불가능함. 과도한 정치비평의 수준과 이런 경제우선으로 체화된 사고는 경직을 유발하며 무화시킴. 끓어넘치게 하는 방법은 없음. 그 내부에 사회적 시도나 실험, 최소한의 관계망이 생겨, 그 연결고리의 색깔을 조금씩 바꾸거나 온도를 높이는 과정이 반복되지 않으며 그 경제-성장의 체화논리에 냉각되기 일쑤임.


합 의 - 분권이나 자치의 개념, 소단위에서 사회적 시도나 실험이 필요함. 두루에 대한 접근도 자본의 지표에 잡히지 않는 비자본주의적 머리에 대한 사고가 필요함. 고르이 제기한 필요시간에 대한 개념도 넣어둘 것. 칼폴라니가 이야기한 거래의 범위에 대한 사고 필요. 현재 여러 단체의 경우 사고나 실험, 연결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함. 사고의 단위가 너무 광역단위임. 노조든, 소모임이든 두루두루 작고 단단하게 시도할 필요가 있음.

뱀발.  

1. 일터일이 겹치고, 책들을 어디에 둔 것인지 몰라 늦게 발견?해서 말미를 챙기지 못하다. 마지막 발제를 마칠 무렵, 이야기를 나눈다. 날로먹는 것이 그런데 책에 의지하지 않고 분위기에 의지해서 남긴다. 그러니 위의 얘기는 전적으로 내 식대로 간본 내용이다. 아무래도 의사소통을 위한 공용어가 필요하겠다. 머리속의 말들만 난무할 것이 아니라 정리도 되어야겠다. 발끝에서 머리까지 한번 더 생각을 확인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2. 아래 폴라니의 경제적인 요소에 대한 내용을 덧붙인다. 인간을 발라낸 경제요소 3에 모임이나 단체들은 인간적인 필요나 노고를 가미할 것을 요구한다. 경제에 인간을 심을 경우에만, 그 요소들로 사고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이런 진짜경제가 삶과 만날 수 있고 모임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임의 경제적인 끈이 무엇인지? 그것이 필요라는 것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길을 가다보면 그렇게 동떨어진 경제라는 놈도 이쪽으로 빌붙으려할 것인지 모른다. 참고하시길. 어렵기는 하지만서두. 외적인 상품의 거래가 아니라 필요욕구와 노고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심화가 생협이나 렛츠의 고민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3. 머리에서 발끝까지 핫이슈라는 노래를 들은 듯하다. 핫이슈가 되는 것은 요원하겠지만...조금이라도 마음품에 넣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어본다. 

4. 폴라니가 지난 한차례 유행처럼 다녀가시고, 사람들은 그가 왜? 어떻게 하려는가에 대한 관심은 잊어버린채, 한 것에만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닌가? 어디에도, 누구도 지금 가져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 할말은 없겠으나 우리의 유행병은 진보,보수를 떠나 심하다 싶다. 그것이 섬사람이어서인지? 경제인의 사고를 그대로 보여주는 징표인지 모르겠으나, 소통도 연대도, 반성도 성찰도..어김없이 좋은 말은 다 유행처럼 소화해주시는 광경은 놀랍다. 그렇게 빨리 잊어버리고, 또 새것인 것처럼 환영하는 것을 좋아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어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현실이 반복되어 곤혹스럽다. 폴라니님은 어디서 방황하시는지? 내친 김에 다시 한번 불러주심은 어떠신지???


 

 

 

--필요와 경제적인 요소----------------------------- ---------------------------------

 5. 100723 일터회식이 잡혀 들어가는 길 아***를 들르다. 불교강좌에 참석하지 못한 미안함과 참석하신 분들이 적으면 어떨까하는 안달이 있기도 한 연유다. 사무실이 불이 켜있길래 늦은 시간까지 열강?을 하는지 알았다. 키*님이 있어 이런저런 근황들과 건강권이 주제인 디 플로를 뒤적이다. 헬쓱해지고 푸석해진 *바님을 뒤로하고 돌아오다. 큰녀석에게 불편한 책들을 건네주었는데, 나쁜피를 본 모양이다. 소감이 남다르고 가족에 대한 물음이 있던 것 같다. 그리고 런던코뮌의 접힌 부분을 본다. 책에 의존하지 않고 발제에 의존하며 흔적남긴 편이 낫다는 느낌이 든다. 크게 저자와 발제자의 의도를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한 꼭지만 더 넣는다

필요와 욕망 그리고 진리 -  욕망과 필요, 필요와 욕망, 경제의 요소에 욕망만 있다. 욕망과 희소가치로 올인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맹점이란 것이다. 그러니 그 욕망에는 필요와 노고가 들어가 있지 않다. 하지만 필요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모으거나 채우는 과정을 수반한다. 욕망이란 말의 전제는 홀로있는 개인을 전제로 한다. 욕망이란 단어의 기본적인 철학은 원자화된 개인이 있고 사고의 출발이 거기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욕망이란 말에서 서양철학이 갈때까지 간 극명함을 보여준다. 역시 그로인해 핀 악의꽃이나 문제꽃을 근본적으로 개인으로 돌려버린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했다. 기본적인 필요를 넘어서 인간적인 필요를 요구하는 함께사는 존재이다. 필요에 의해 진리는 생겨난다. 진리는 저기 달님이 아니라 여기 살아간다. 필요에 의해 진리는 아우라를 만들고 분위기는 진리의 영역을 넓히며 살아가게 된다. 욕망은 마치 지금 여기 있는 듯하지만 늘 저기에 있다. 욕망이란 뜬구름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라는 현실로 지금을 살아가면 진리는 생긴다. 필요는 기본적으로 유적존재이자 함께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발라내어 내 편의 대로 사고를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너를 찾는다. 그래서 늘 궁금한 철학이다. 필요는 진리를 지금에 있게하고 같이 산다. 욕망은 진리가 마치 저기에 있는 듯 찾아야 할 것으로 만든다.

--머리아프시겠네요. 왠만하면 건너뛰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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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맘과 맘을 섞다. 모임과 모임도 욕망을 섞어야 하는가
    from 木筆 2010-08-07 10:15 
             #1.  세번째, 서울-욕망의 도시로 이야기를 나누다.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삶의 기억이라 그리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20대에겐 또 다른 문제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겠다. 재테크나 돈의 축적과정에서부터 어떻게 그렇게 결론으로 욕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적논리가 궁금한 것이다. 그렇게 점점 풍선을 불리다 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화 속의 캐릭터
  2. [런던코뮌] 삶을 바꾸려 한 영국 신좌파의 교훈_서영표저자강연
    from 木筆 2010-08-26 16:48 
                화*모임에서 몇차례 세미나와 토론을 하였습니다. 생각보다 관심이 시큰둥?한 것 같아 한번도 소개흔적을 남깁니다. 서영표님의 문제의식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무척 방대하고 진도를 깊숙히 굳굳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론에 대해서도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느낌이었는데...여러 인물들이 겹칩니다. 칼 폴라니에 관심이 많았던 분들, 지방자치의 현실에 관심이 많은
 
 
 
이끼처럼 살 수 있을까?

영지의 역할이 없다싶고 마지막으로 갈수록 밋밋하다. 드디어 끝나는가 싶더니 물음표와 느낌표가 있는 반전이다. 화면을 가득채우는 해국과 영지의 눈빛. 원작과 다른 결말인데 더 더욱 원제에 충실하다. 이끼. 붙어살다.

긴장감-완성도-연기-...등등 나무랄 곳이 없다 싶다. 이상의 탑과 현실의 탑의 문제는 무엇일까? 신과 권력은 모두 손아귀나 마음아귀에 집어넣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틀어쥔다는 점에서 구원이든 힘이든, 살아가는 이는 하나이지 않을까? 나머지는 살아지는 것이고 마음을 다짐받던 힘과 현실을 위탁받고 결재받던지 말이다.

현실을 깊숙히 들어가다보면 비루함의 덩어리들이 계보학처럼 끌려나온다. 현실의 비루함과 몸으로 체화되는 것은 갱생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라야 되는 것인지? 어디서부터 연유된 것인지? 더욱 모호하고 인과관계가 없는 듯 연결된 것은 암덩어리처럼 자라는 속도가 무섭다.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고, 현실의 타액은 점점 나를 끌고들어가  뭍힌다.

생각은 그 사이를 오가고, 뜨끔거린다. 현실에 멱살 잡힐 때, 비릿함이 척척 달라붙어 서로를 먹여살리는 것도 그러하다. 원작에서 집요할 정도로 파헤치지 않으면 되지 않는 성미의 소유자 해국을 만날때도 거꾸로 그러하다. 마을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희망과 절망 사이에 들어서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천연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절절한 연기엔 서슬퍼런 무엇이 달려든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수면아래 현실이 어김없이 돌아다니고 있다.

비루한 삶과 현실의 극단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가능성들은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 너무나 초광속으로 흘러가는 현실의 속도를 줄일 수는 없을까? 쓰릴러물의 속도를 따라가다보면 송곳처럼 불쑥 뚫고 나오는 불편함들이 관람에서 현실의 자양분으로는 변할 수 없는 것일까?  무비란 낯익은 장르가 낳는 혼자만의 지나친 독백보다는 뭔가 다른 각도로 회자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 현실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벌어지고, 벌어질 사건의 파열을 예비하고 있고, 여전히 현실같지 않은 영화속의 현실을 담고있다.

원작의 후기를 보니 마지막 장면이 광화문과 세종로거리다. 정치는 삶이고 현실이다. 가치중립이란 얼마나 정치적인가? 정치적인 놈이 정치적 권리를 더 확보하려 다른 사람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용어가 아닌가?  거꾸로 현실의 치열함이 정치이고 삶이다. 치열함과 현실을 더 그들만의 정치에 뭍혀 탈색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뱀발.   

1. 어제는 지난주 선약을 잡으려던 날이다. 지난주 다짐도 해두었던터인데 이렇게 스며 들어와 함께 보고 읽다. (나무에겐 미리 전화를 주지 못했는데 저녁 문자가 와 미안함을 미지근하게 전해버린다.

2. 영화 리터러시라는 말을 최근에서야 지인을 통해 알게되는데, 늘 내겐 현실을 피해가거나 오락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렇게 읽고 의도를 다시 생각하는 일들도 귀찮기도 하다.  작가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현실의 수용자들과 너무도 많은 차이가 난다 싶다. 좁힐 수 없는 거리, 그리고 있는 듯한 구름같은 비평은 더욱 멀리 멀리 밀친다. 돈맥을 짚고, 돈을 벌려고 아우성치고, 집한채에 인생을 거는 우리들의 삶이 천용덕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그저 한여름밤의 쓰릴러물로 더위를 식히면 될 뿐, 일상에서 반추되지 않는다. 그런점에서 영화는 따지고 보면 별반 하는 일이 없다. 문학의 종언처럼 너무 탑위에 올라가 있는 것은 아닌지? 종사자들도 그러하며... .. 

 3. 이동 중에 보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자아에 대해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제 감정자본주의를 본 뒤라 치료의 개념이 버무려져 곤혹스럽다. 미국이란 사회의 표피와 잘 된 책이라는 것의 한계가 보이는데...더 미국스런 우리나라라 잘 먹히는가보다. 정의란 무엇인가?도 그러한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제일 미국스런나라... ...미국스런 가치관... ... 

 4. 약간의 습기가 있는 곳에서 이끼처럼 바짝 붙어 있는 듯 없는 듯 현실을 음미하며 타 넘는 것도 현실의 견디는 한 방법일까? 현실을 이겨내는 것이라면 죽지 않고 살아내는 방법이라면 구원도 얻고 현실을 접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의 방법이라면.......무엇일까? 정의와 무소불위의 권력은 무고한가? 현실을 얕게 붙어사는 이들만이 현실을 이겨갈 수 있는 것인가?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은? 이끼의 얕은 연대....날카로움은 모두 꼬리를 내리는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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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7-23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마당님 반가워요.^^ 처음 찾아뵙네요. 전 영화로만 보았는데 원작 만화도 보고 싶네요. 좋은 글 감사드려요.^^

여울 2010-07-23 17:4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서재 표현이 서툴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생각 이어나갈 기회가 많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rosa님 이벤트 당첨 축하드려요. ㅎㅎ
 

#1. 나뭇잎 도감 - 나무는 덩굴나무 5미터 안쪽의 가지가 많은 떨기나무, 줄기가 있는 키나무는 10미터이상의 큰키나무무 5-10미터의 작은키나무로 나뉜다. 그리고 나뉜 기준이 쉽고 좋다. 홑잎, 겹잎, 갈래잎, 안갈래잎으로 나뉘다보면 그렇게 나뭇잎과 나무를 한품에 안을 수 있다 한다. 나뭇잎도 잎겨드랑이, 턱잎, 잎자로, 잎몸 마음닿는 글말과 입말들이 고맙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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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밀화를 보다

 

 

 

#2.
- 감정이 심리단위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감정은 문화단위이자 사회단위다.
- 감정이 네너지를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덕분이다. 감정이 반성이전 상태, 때로 반의식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 감정에 문화와 사회가 충분하다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다.
- 남녀의 구분도 감정문화들을 통해 재생산된다.
- 남녀의 구분으로 감정의 위계가 만들어진다.
- 경제와 감정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감정의 자제는 남성적 실천이자 남성적 모데리었다.
- 정신분석학이 감정생활을 재구성했다.
- 자아와 자신 간의 관계, 자아와 타인들 간의 관계를 재정식화했다.
- 빅토리아 시대 감정문화는 남자와 여자를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으로 분할했지만 20세기에는 경계와 공사의 영역을 약화시킨다.
- 평범하고 일상적인 자아가 신비롭고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자아가 재구성된다.
- 사유양식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엇비슷한 입장에서 비롯되는 전형적인 상황들 앞에서 지속적으로 취하게 되는 일체의 반응을 뜻한다.
- 평등과 공조라는 문화모티브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과 정서성을 엔지니어링했다.
- 소통모델; 바람직한 경영자와 유능한 사원에 요구되는 감정적, 언어적, 나아가 인성적 특질을 가르핀다.(자기관리 테크놀로지로서 대이적 내부적 감정 조율)
- 능동적 청자 테크닠, 자아의 테크닉이 이상적 기업의 특징이 된다. 공조의 마음기술. 경제영역은 정서로 가득한 영역
- 가치합리화, 감정의 존재론/ 통약- 질적차이를 양적차이로 바꾼다. 언어는 중립적 언로로 텍스트에 고정되고 감정은 고정된 대상으로 포착된다.
- 관계가 사물이 된다.....그렇게 되면 상품의 운명에 처할 수도 있다.
- 인정이란 자기 상실의 통찰에서 시작된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상대속에서 나를 잃는다는 것, 나 자신이다. 나자신이 아닌 어떤 타자속에서 그리고 그 타자에 의해서 전유된다는 것이다.
- 언어 이데올로기; 언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우리의 사회 환경과 감정환경을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뱀발. 일터일을 매듭짓고 조금 일찍 퇴근길 도**엘 들르다. 간단한 저녁식사가 졸음을 만든다. 졸음이 가실 무렵, 신간에서 고른 감정자본주의가 마음을 끈다. 악셀호네트의 프랑크프루트의 연구원으로 아도르노 강의를 준비했다고 했는데 관점도 신선하고 빨려들게 하는 호흡도 가파르다. 1장과 말미를 보다 시간이 넘어 매듭을 짓지 못하고 메모 흔적만 남겨둔다.  

* 돌아와 먼너의 햇살을 부드럽게 비추는 달님을 만나다 돌아와 연*샘과 한잔 수다다. 3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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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벌다, 삶에 말걸다. 삶에 말을 섞다.

'어제 물끄러미 바라본 티브이엔 한 용역 청소미화원이 소개되었다. 미화원도 아니고 앞에 용역이 붙었다. 난이도 높고 중량물이 있는 마을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또 다시 외주를 준 셈이다. 당연히 급료도 백오십만원이라고 했다. 그는 방을 하나 얻었고, 옷 갈아입을 곳도  환경미화라는 이유로 콘테이너박스가 철거되어 사람 눈을 피해 입고 일을 한다. 저녁여섯시부터 새벽세시. 식사는 기껏해야 김치에 김이다. 투잡을 계속했는데 하루 세네시간 자는 것이 힘들어 다른 일은 그만두었다고 한다. 사연인즉 친구 연대보증으로 이천만원을 날렸고,  두딸과 아내를 멀리두고 이렇게 서울외지에서 밤낮없이 일한다. 잠깐 보고싶은 딸들과 아내가 서울로 오고 표정에서 읽히는 큰딸의 반외면과 부쩍 커버린 둘째딸과 겸연쩍은 거리, 그리고 아내의 거리감이 한눈에 느껴진다. 몇년 돈을 벌어 새롭게 시작하자는 삶에 대한 다짐과 이산... ..무엇..'.

초복 일터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산책을 나서는 길 생각이 맞선다. 그 삶은 온전할까? 그와 아내의 관계는 괜찮을까? 그와 큰딸의 거리감은 줄어들 수 있을까? 그와 작은딸, 그와 아내와 딸들과 관계, 그리고 그는 돈을 벌어 빚을 갑고......그 프로그램이, 기자가 피디가 의도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말미 이런저런 느낌이 들어온다.

삶이 그렇게 돈을 벌듯이 벌리는 것일까? 돈을 벌으면 삶이 그렇게 생각대로 되는 것인가? 삶은 그렇게 독립채산제이고 관조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게 가족이 알아서 할 일일까? 삶에 말을 걸 수는 없을까? 삶이 서열지워지고 좋은 삶, 부자 삶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든 가난한 이든 똑같이 한표라면, 삶이 공평하게 말을 걸거나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삶이 뿔뿔이 길을 갈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말을 섞고, 말을 나눌 수 있는 것이라면? 삶을 불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삶이 평등한 것이라면 지금까지 삶을 서로 공평하게 나눌 수 있고, 섞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무수한 이들이 가면서 아니라는 길을 굳이 가는 것이 아니라면, 삶을 섞어 그래도 보살핌도 없고 상처만 생기는 삶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 그래도 살만하다면?  말을 걸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면? 개인의 복지가 아니라 삶의 복지라면? 외로운 노인들에게 수당 한푼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말걸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외로운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열고 섞을 수 있는 것은 뜬구름일까?

외려 별반 사회문화적 기준도 확연치 않는 개인보다는 삶의 이력이나 삶의 흔적이 더 구체적인 것은 아닌가? 삶에 말걸 수 있는 사회라면? 삶은 독립채산제가 될 수 없는 것이라면? 네 삶이 동등하게 한표이므로 네 삶의 가슴과 아픔에 내 삶을 번지게 할 수 있다면? 삶의 길에 말걸고 그것은 아니다 싶다면? 삶의 영역이 그렇게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담보에 처리되는 것이 정녕 아니라면, 삶을 놓아두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가족에 대한 인권이라면?

삶은 서로 품고 나뉘고 섞여 자랄 수 있는 것이라면?... ... 

뱀발. 저녁 자리, 일터 일로 이야기를 나눈다. 가슴으로 토해내는 말들은 눈에 가려진 것들을 모두 뱉어내려는 듯하다. 몇차례 말의 갈피를 잡지만 감정을 먹은 말들은 연신 그릇을 넘친다. 그의 삶은 위태롭다. 하지만 일터는 삶이 있기나 한 듯 외면한다. 행여 삶을 기획하거나 돈의 줄기에 보탠다면 이 사회에서 좀더 나을까? 생각은 일터로 들어서기도 하고, 지금 마음 나누는 이들에게도 향하고 저기 어둠에 친숙한 별들과, 소나기를 맞은 습기에도 향한다. 어떻게 살아라가 아니라 산 것이나 살아진 것, 살아온 것이 이 묽은 습기에도 눅눅해지거나 겹치는 한지가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삶과 삶 사이를 관통하는 것은 없는 것일까? 삶을 살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을 도모하거나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그저 좋고 아름다운 삶에 점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허망한 삶에 말을 걸고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서 덜 아프고 덜 쓰리도록 예방할 수는 없을까? 홀로 홀로 원자로 뿔뿔이 생각하는 미련한 사회의 망각을 되짚을 수는 없는 것일까?  

가로등에 비친 목련잎과 잎들 사이 그늘이 탐스럽다. 삶들도 그렇게 빛에 겹치면 탐스러울 수는 없는 것일까? 홀로 살기보다 겹쳐사는 법은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5k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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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일을 훔치러가는 틈새, 하늘은 노을의 기운이 번지고 드넓은 평야는 고요하고 어스름이 다가 선다. 어느 틈인지 하늘 귀퉁이를 들어선 달님은 눈물을 머금다.  잘못 본 것은 아닌지? 행여 놓친 것은 아닌지? 일들이 가파르게 언덕을 오를 즈음, 마음은 가슴으로 오르고 등줄기로 눈시울로 향한다. 일의 봉우리로 올라갈 즈음, 몸으로 밀고가는 일들은 마음과 가슴에 이슬을 채운다. 그렇게 채우다가 채우다가 일산비탈의 막바지를 다다를 무렵, 몸은 생각지도 않은 눈물을 토해내고 싶을 때가 있다.   

밝은 곳에서 보이지 않던 님은 어두움에 스며들수록 찬찬히 비춘다. 그림자가 조금조금 선명해지는 것도 그러하며, 별빛도 그렁그렁해지는 것도 그러하다.  어둠을 찾고 어둠의 품으로 찾아들고 싶은 것은 그런 님이 그립기때문이다. 님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별의 눈물이 초롱해질 때 눈물도 일도 가파는 산비탈의 끝자락을 향하고 있고,  그 봉우리에서 난 그렇게 몸으로 차오른 눈물을 토해내고 맑아진 일의 평상에 누워 좀 쉬어야겠다. 그리고 다른 봉우리로 발걸음을 옮겨야 겠다. 

오늘 달에, 그렁그렁한 별빛에 취하고, 갑천에 비친 아파트의 눈물에 취한다. 일의 매듭이 어디에서 접힐지는 모르겠지만  일숲의 마지막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음도 몸도 가슴을 섞는 일들은 뭉클하다. 뭉클뭉클한 것은 안개이며 액체이며 고인다. 녀석들이 어떻게 몸과 가슴, 마음으로 난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몸으로 밀어가는 일들은 이슬을 만들고 이슬을 토해낸 뒤에야 다음 어떻게 다가설지 모르는 일들 앞에 선다.  



뱀발.  

오랫만에 얼핏본 달님이 그리워 산책길로 나선다. 조명빛이 다한 후에야 어둠속 달무리에 비친 반달이 환하고 반갑다. 별빛도 여기저기, 강가에 불빛마저 다정하다. 다정이 병인냥 하다. 돌아오는 길 기술영향평가가 아니라 활동영향평가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숙고민주주의는 어떨까? 활동도 병인냥하여 잘 되는 방법은 없을까? 밤새도록 나눌 수는 없을까? 7k 60' 

허 전 

어느 순간 부르지도 않던 허전이 끼어든다. 일과 마음의 간극, 미묘한 틈새를 비집고 녀석은 자꾸 제대로 자리잡으려 엉덩이를 튼다. 마음이 들썩이며 한귀퉁이를 내주는 듯, 그 틈이 시리고 허하다. 마음도 그 아귀맞지 않는 틈으로 들썩거린다. 녀석이 그렇게 자리하여 구멍이라도 생길 듯 위험천만이다. 일도 마음도 들쑤실 듯 넘실거리는 녀석때문에 좌불안석이다. 몸과 마음, 그리고 일의 미세한 어긋남이 덜컥 들어서버렸다. 며칠 앓을 듯하다. 치통처럼 부은 기가 가라앉을 시간동안 말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그나마 삐걱거리는 틈의 아귀를 맞춰줄 것이다.

 


-1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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