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기울고

 너-나-나-너-

 구시야끼호에 바닷물은 들고, 섬은 가깝고

 달은 휘영청 밝다.

 

 너-나-나-너-

 오늘은 노랑시간을 낚아올려 먹다보니

 너-나-나-너-의 온몸은 노랑이다.

 

 술이 익고 말이 익고

 너-나-너,

 출항은 예비되고,

 무제란 깃발은  바람에 나부껴 펄럭인다.

 

 오월 장미 꽃그늘

 너-나-너의 목선은

 시간의 바다로 향하고 꽃한점을 낚는다

 빨강으로 만선이다.

 

 밤이 무르익고

 나-너-

 오늘은 부산갈매기호를 탄다.

 초록 시간을 낚아올려 먹다보니

 나-너의 입술은 온통 초록이다.

 

 

 

 시간의 바다에 노랑파도가 인다.

 그 노랑파도에 너-나-나-너-는 노랑섬으로 간다.

 

 시간의 바다에 초록파도가 인다.

 그 초록파도는 너-나-를 초록섬으로 끈다.

 

 시간의 바다에 빨강파도가 일렁인다.

 그 빨강파도는 너-나-너-를 빨강섬으로 몬다.

 

 

 

 시간은 잠들지 않는다. 목선은 오늘도 널 기다린다.

 

 

 뱀발. 때와 곳, 그리고 만남은 때로 다른 시간을 만든다.  그날부터 시간은 자란다.  함께 자라게 한 시간은 불쑥 그 공간에 꽃을 피운다. 시간은 늘 다르게 산다. 너-나, 너-나-너가 만든 시간은 다른 색깔이다.  그래서 각기 다른 시간들로 충만하다.  다른 시간을 만들까 설레인다. 갑호, 을호, 병호, 정호에 승선한 이들도 만들어 낸 시간도 다르다.  피운 꽃과 열매가 시간의 바다와 섬에 다녀온 뒤 함께 나누면 어떨까? 출항한 배들의 기쁨과 곡절을 섞어나누면 어떨까? 우리가 가진 것이 시간밖에 없다면... ...너-나-너-와 남다른 시간을 벌고싶다. 그 시간이 우리 몫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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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성질

 

55 1922년의 일기에서 카프카는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의 불일치가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 적어놓았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자는 것도, 깨어나는 것도, 삶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시계가 맞지 않는 것이다. 내부의 시계는 사악하게 혹은 악마라도 씐 듯이-어쨌든 비인간적으로-달려간다. 반면 외부의 시계는 비틀비틀하면서도 자신의 본래 속도를 유지하며 걸어간다.” 그의 주인공들은 너무 일찍 도착하면 부조리함을, 늦게 도착하면 죄의식을 느낀다.

 

61 1905년에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아인슈타인은 어떤 좌표게에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시간이 다른 좌표계에서 관찰해보면 얼마나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계산했다. 그리고 1916년 우주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들이 갖가지 중력을 산출하기 때문에, 그리고 중력은 가속도와 상응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물은 자기 자신의 특정한 시간을 갖는다.”고 결론지었다.

 

62 뒤르켐은 [분류의 미개형태]에서 시간은 사회조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지나는 길에 언급했다. 그리고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그는 사적인 시간과 사회적 기원을 갖는 ‘일반적인 시간’을 구분한다. “시간이라는 범주의 바탕에는 사회생활의 리듬이 존재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루, 한 주, 한 달, 한 해 등의 분할은 제의, 축제, 그리고 공동 행사의 주기적 순환과 일치한다.” 각 사회는 시간 속에서 생활을 조직하고 리듬을 정립한다. 그러고 나면 이 리듬은 모든 시간적 활동을 일률적으로 규정하는 단일한 틀이 된다.

 

76 시간을 개별적 단위들의 총합이 아니라 일종의 흐름으로 간주하는 이론은, 인간의 의식을 개개의 정신 기능이나 관념들의 집적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라고 보는 이론과 연결된다. 최초로 정신을 ‘생각의 흐름’이라고 부른 사람은 윌리엄 제임스였다.

 

78 베르그송에 따르면 “정신의 모든 심상들은 자유로이 흘러가는 주변의 물속에 잠겨들면서 물든다.” 정신적인 사건들은 저마다 그 이전과 이후 혹은 그것의 근거리나 원거리와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들은 정신적 사건 주변에서 ‘달무리’나 ‘가장자리 술장식’처럼 작동한다. 인간의 정신생활에 있어서 단일한 속도란 없다. 정신생활은 “날아다니기도 하고 가지 위에 차분히 앉아 있기도 하는 새들의 생활과 닮은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천천히 넘실거리며 흐른다고 할 수 있지만, 각각의 부분들은 상이한 속도로 움직이면서 급류의 소용돌이처럼 서로 부딪치며 흘러간다.

 

79 제임스와 베르그송이 생각에 대해 다소 상이한 은유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이란 것이 불연속적인 부분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 의식의 모든 순간은 늘 변화하는 과거와 미래의 종합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은 흐른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94 버지니아 울프는 “리얼리즘 작가들의 끔찍한 서사방식. 점심 식사 때부터 저녁 식사 때까지의 경과를 서술하는 것, 그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옳은 일도 아니다. 그저 관습일 뿐이다.” 그녀는 시간을 문학 속에서 다루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토머스 하디의 견해를 언급해 놓았다. “지금 그들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우리는 처음이 있고 다음에 중간이 있고 마지막으로 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의 신봉자이다.”

 

96 앙리 위베르와 마르셀 모스는 [종교와 주술에 있어서 시간의 재현에 대한 개략적 연구]에서 종교와 주술에서 시간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시간이 연속의 경험, 그것도 양적인 경험이 아니라 질적인 경험에 대해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시간이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이며 확장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는 가역적이기도하다고 보았다. 뒤르켐과 함께 그들은 시간의 불균질성이 시간의 사회적 기원에 의해 보증된다고 주장했다.

 

97 베르그송의 뒤를 이어 위베르와 모스는 시간을 역동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시간을 “능동적인 긴장‘으로 보고 그러한 ”능동적 긴장에 의해 의식은 자립적인 지속들과 상이한 리듬들 간의 조화를 실현할 수 있다.“......우리가 일률적이고 균질적인 시간을 사적으로 경험할 때 심리적 긴장들이 구성되는데, 주술과 종교의 시간이란 바로 이 긴장들 사이의 절충물이다. 기념의식, 특히 주술적인 현상이나 성스러운 현상과 관련된 의식은 개개인의 고유한 삶의 리듬을 사회공동체의 일률적인 리듬에 통합시킨 것이다.

 

99 시간의 수, 구조,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립양상은 통념적인 시간 분류(공적인 시간과 사적인 시간)까지 더해지면서 한층 복잡해졌다.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시간은 유일무이하다.’라는 전통적인 견해 자체는 도전받지 않았지만 많은 사상가들은 사적인 시간의 복수성을 주쟁했다.... 사적 시간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도 시간마다 다르고, 사람의 개성이나 인격에 따라 개인간에도 차이가 있다. 또한 사적 시간은 사회조직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기 때문에 집단 간에도 차이가 존재한다....사적인 시간은 유동적인 것이며 사적인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이라는 혁신적인 생각도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철도가 깔리면서 전원의 아취와 고립이 동시에 파괴되었듯이, 세계 공통의 시간이 보편적으로 부과되자 사적 시간에 있어서의 독특한 사적 경험이 침식되기 시작했다.

 

 

공간의 성질

 

 

343 일반 상대성 이론과 함께 공간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우주의 모든 물질이 자아내는 모든 중력장들을 포함하며) 움직이고 있는 좌표계의 수만큼 공간이 있는 셈이었으니까. 1920년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생각을 대담하게 요약했다. “무한수의 공간이 있고, 그 공간들은 서로에 대해 움직이고 있다.” 다행스럽게 레닌은 혁명하느라 너무 바빠서 아인슈타인의 견해에 주목하지 못했다.

 

345 모든 생물은 하나의 동일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만의 주변세계를 갖고 있다. 종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외부세계에 반응하며 그 반응은 자신만의 특별한 내부세계를 창출한다. 하등동물들은 자극에 직접반응하며, 오직 시각기관을 보유한 고등동물만이 그들 특유의 공간감각을 발전시킨다. 고등동물의 뇌는 직접 접촉을 통해 주변세계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대상들을 환경 속에 비춰볼 수 있으며, 심지어 환경 속에서 공간적 관계를 반영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반영세계 혹은 역세계는 신경계와 근육조직의 유형에 따라 달라진다. 이리하여 내부세계, 주변세계, 역세계는 동물 각각의 ‘얼개구도’에 따라 다르며 각각의 공간감각을 구성해낸다.

 

368 현대의 미술은 더 이상 과학적 원근법의 규칙에 노예노릇을 할 수 없다. “강과 수목의 잎들, 그리고 강둑의 가치는, 그것이 아무리 실제적인 비례에 충실하다 해도, 그 폭이나 두께, 높이에 의해 측정되지 않으며, 이 차원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도 측정되지 않는다....”“수축시키든 팽창시키든 회화 평면을 변형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전 인격이다. 그러한 반응이 일어나면 평면은 그 인격성을 관람자의 이지 위에 다시 비춰주는데 바로 그때 회화 공간이 설정된다. 감성이 두가지 주체적 공간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는 통로로서의 회화 공간이 설정된 것이다.“ 소실점 기법의 전통적인 회화공간과 결별한 입체파의 글레즈와 메칭거

 

372 “우리가 안 지 오래된 곳들은 지금은 다만 우리가 편의상 만들어낸 작은 공간에 속해 있을 뿐이다. 그들 중 어느 곳도 그때 우리의 삶을 구성하더 인접한 인상들 사이에 끼어 있는 얇은 조각에 불과했다. 특정 형태에 대한 기억은 곧 특정 순간에 대한 회한일 뿐이다. 집, 길, 거리들은 아! 세월만큼이나 쉽사리 사라져가는구나.” 공간은 관점, 생각, 감정 등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공간 안의 사물들이 시간 속에서 부단히 변하는 과정을 겪는다.

 

375 객관적인 사실의 진리성에 대한 실증주의자의 신념과 정반대로 니체는 그런 것은 없으며 오직 있는 것은 관점들과 해석들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철학자들에게 “인식을 위해 다양한 관점과 정서적 해석을 이용하라.”고 촉구했다.

 

377 20세기 들어 관점주의를 정식화한 사람은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였다. 합리주의자들은 유일무이한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주관적인 관점으로 인해 야기되는 오류들을 제거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사고방식을 거부하면서 독자적인 관점주의를 정립한다. “이런 식으로 가정되는 유일불변의 현실은 .... 존재하지 않는다. 관점의 수만큼 현실들이 존재한다.” “ 신은 시점이며 위계다. 악마의 죄는 시점의 오류였다. 이제 시점은 관점들이 복수화됨에 따라 완벽해진다.” 합리주의적 입장은 공간의 균질성을 주장했는데, 오르테가는 현실에는 시점의 수만큼 많은 공간이 있다고 맞받아쳤다.

 

379 오르테가는 수학자의 관점이든 철학자의 관점이든 국가의 관점이든 간에 어쨌든 하나의 관점만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는 자기중심주의에 도전한 것이었다. 지성이 발전하고 문화가 진전하는 것은 구체적인 경험의 다양성이 사회에 충분히 수용된다는 보장이 있을 때다. 현실을 “하나의 종에서 다음 종으로, 이 민족에서 저 민족으로, 이번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흘러가면서 점점 더 보편적인 현실성을 획득하는 생의 흐름 속에” 놓을 수 있는 관찰자야말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자다.

 

 

뱀발.

 

1. 어제 밤 술에 감겨 해닥사그리할 때까지 갔다.  아침이 되어서야 빈 컵라면 그릇이 좌탁에 놓인 걸보니 어젯일이 옹송망송... ... 모처럼의 휴식 게으름도 보태고 오전의 말미까지 잇다가 책꽂이에서 지난 책을 꺼낸다. 조정환의 촛불의 시간까지 시간에 대한 세권을 따로 포개어 둔다.

 

2.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는 다시 펼쳐보니 발췌독을 하였다. 다시 잡아드니 1차세계대전까지 자본주의와 학문의의 경계들 넘나들면 통합적으로 쓴 38년간의 기록이다. 미술, 철학, 소설, 역사, 지역 어느 한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맥락을 이어주는 놀라운 책이다. 그 가운데 시간/공간의 성질에 대해 따로 새겨보다.

 

3. 카이로스 - 혁명은 시간은 여러번 강독하여 잔영이 아직 몸에 남아있다. 비교하여 읽다보니 오히려 시간, 공간에 대한 건드림의 맛이 차이가 난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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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동 없는 사색적 삶은 공허하고 사색 없는 행동적 삶은 맹목이다
    from 木筆 2013-04-18 11:12 
    시간을 나누고 쪼개어서 아무 형체가 없는 원자로 만들어 버렸다. 삶을 쪼개고 나누어서 삶은 없어지고 일의 신민으로 삶은 해체되어 버렸다. 일만 남고 해체되어 버린 자아는 바쁘다. 일의 마수에 걸려 나는 없어졌다. 너도 너에게 삶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어떤 삶을 살고자하는지 물어보는 것이 겸연쩍다. 일의 마법에 걸려 나는 조바심이 나고 주체를 못한다. 나를 달래주는 것은 아무 생각없이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는 팝콘이다. 나는 바빠 어쩔 줄 모른다. 채
 
 
 

 

 

 

 

 

 

 

 

 

 

 

 

 

 

 

 

 

 

 

 

 

 

 

 

 

 

 

 

 

 1.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 -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에 걸려있다. 개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이 글 속에 나타나 있다. 음식이란 것이 워낙 걸려있는 것이 많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정치, 사회적인 주제보다 더 걸려있는 것이 많다. 소, 돼지, 닭이 아니라 정작 물고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읽다가 해부해놓은 거기쯤에서 생각이 주춤거리고 있다.

 

 

2. 시간-인간-역사:  역사를 위한 변명이란 제목의 책이다. 시적인 감수성과 인간, 그리고 시간에 대한 열림을 요구한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처형이 된 그의 삶은 역사학자로서 인간적인 모습과 생각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시대의 흐름이 실증주의로 흐르거나 과거의 시간만 박제화시키는 상황에서 그의 평생에 걸친 학자로서 답하고 싶은 부분을 들려주고 있다. 인간과 삶, 역사가 감성과 감정의 결까지 스며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3. 행동경제학자의 생각에 대한 생각 -  얼굴표정을 보고 느끼는 직관적 느낌(빠른 직관) 133*17 처럼 복잡하게 생각해야 하는(느린 이성) 으로 인간의 사고체계를 구분하여 그 넘나듦과 부딪힘을 표현한다. 조금 조금씩 보고 있다.

 

 

4. 사회체계이론에서 시간과 구조에 대한 편을 다시 보고 있다.

 

5. 제3의 산업혁명은 본인의 의견이 미국이 아니라 오히려 EU에서 받아들이고 반영되고 있다고 한다. [에너지 네트워크]가 키워드 인 것 같은데 구체적일까? 물음표를 찍고 본다. 막연한 원칙인 듯 싶기도 하고 ,디테일이 뒤에 나오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뱀발. 모처럼 금요일밤을 청해 책마실을 작정했는데 모임소식에 반잠이 들다 깨어보니 11시가 넘는다. 펼친 책들을 조금씩 건너다니면서 본다. 밤 공기가 생각보다 좋다. 뒤척이며 본다. 서론의 말발처럼 본문이 확연히 끌리는 것이 생각보다 없다. 그래도 좀더 책마실 진도는 나가줘야 할 듯 싶다. 몇달 주춤했더니 생각보다 속도도 기억도 가물거린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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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운, 바람풍경 45.5*38.0cm  oil on canvas

 

 

 

박정우, blissful  53.0*45.5cm  acrylic and oil on canvas

 

 

 

신은주, sound of spring-forest 1    72.7*23.0  acrylic on canvas

 

 

 

 

김부권, 공간속의 생(봄)  90.0*60.0*5cm  mixed media

 

 

임립

 

 

뱀발. 일터 일 사이 점심무렵 이동중 임립미술관에 들러 살핀다.  짜임새와 색감,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는 색상들 위에 연꽃, 새 콕콕...그 결들을 살피다 오다. 저번 보다는 나은 느낌이다. 전에는 조금 칙칙했는데 소전시실은 조금만 더 밝으면 어떨까 싶다. 조명이 어두운 것도 좋긴 한데..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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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움직인 동선에 대해 피터지게 절망하라(作)

통합진보당 사태, '들어나 보자' 토론회 열려
부정·중앙위 사태·비대위·사퇴와 혁신방향 등 4가지 키워드 놓고 열띤 토론

 

뱀발.

 

1. 토론자 세분의 토론을 듣는 내내, 색깔은 다르지만 말 몇마디라도 아끼려는 배려가 느껴진다. SNS로 상황을 보는 것이 피상적이라면.  그 사람들 사이사이를 관통하며 넘으려는 분위기가 애틋하다. 민*련 뒤풀이 자리에 토론회 참석한 인원들이 합석한다. 좀더 솔직하고 좀더 강변하고, 좀더 시간의 길이를 넓혀 생각해보려 하지만 자신의 색깔, 그 자장을 벗어나서 교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자리가 만들어진 힘의 근원은 평당원의 절박함과 절실함이 이끈 사소함이란 것에 놀랍다. 그 동기이자 친구들의 연대와 시도도 괜찮다. 지역의 정당원에게 새로운 접근의 씨앗으로 번지면 좋겠다는 욕심도 은근히 스며들었다.  좋은 사람들이고 열정이 있는 분들은 쉽게 만나기 힘든데 말이다.

 

2. 당내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당외를 바라보는 시선이 함께 필요한 것은 아닐까? 1%, 2%를 얻었다면 이런 논의자체가 없지 않겠나 싶다. 220만 + 알파의 시선이 녹아있는 진보에 대한 열망과 눈높이에 대한 정치적인 이해가 있으면 안될까 싶기도 하다.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누누이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이다. 그는 최근 한 컬럼에서 진보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그 그릇을 어떠한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의 현상황이 똑똑한 지도자는 많은데 현명한 지도자가 없는 것은 아닌가라고 일침을 놓는다.

 

3. 집권하려는 진보는 시간에 강한가? 자신의 시각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을 아파했던가? 평범한 사람들이 진보그룹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지극히 상식적이고,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판단은 아닐까? 시간이 지나더라도 진보주의자는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도 원칙도 본받고 싶은 흔들리지 않는 지극히 작은 파편은 아닐까? 선거때면 그 아이템을 가지고 나타나는 출몰에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색깔이 있는 정파,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패권에 벗어나, 늘 소수파의 의견과 아이디어가 시간이 지나도 다시 들어보고 운영에 접목시키는 유연함들을 더 갈구하는 것은 아닐까? 

 

4. 언론의 비이성적인? 행태를 뛰어넘는  통합의 정치력은, 이미 현실이 되어 괴물로 다가와버린 상황이지만  해결해나가는 정치력를 논할 수 있을까?

 

5. 어쩌면 지역은 다른 목소리와 다른 현실을 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처지에 맞는 또 다른 논의들이 또 다른 작은 국면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진성당원이 옛날의 영광을 논하는 분회모임들이 아니라, 옛날의 부끄러움을 안고 신입당원의 파릇함에 몸도 참여도 내어주는 헌신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6.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고들 얘기하지만, 늘 시간은 되돌릴 수 있다. 늘 시간은 새롭게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국면이 지나고, 선거가 지나도 있는 사람은 그대로 이다. 정치적인 제도 안의 힘의 발휘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여전히 그물안에 당원들과 바라보는 사람들은 별반 변한 게 없다. 그러니 그 사람의 삶의시선에 눈돌리고 사회문화적인 자산을 위해 차곡차곡 저금하는 일밖에 없다.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의 힘으로 돌리려는 노력이 더 바지런해야 하지 않을까? 저기 멀리있는 서울의 시선에 고정되는 것도 좋지만 지역의 시선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사후의 이야기지만 지역의 다른 이견과 또 다른 방법적인 과정은 없는 것은 아닐까?

 

7. 시간은 만들 수 있다. 절박한 시선과 아픔이 응축된다면 천명?이 넘는 아주 작은 곳을 새로움의 색깔을 퐁당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적인 먹거리만에 대한 논쟁을 안고넘어서 일상을 후비는 진보의 반복되는 답습(패턴)을 논할 수 있다면 어떨까?

 

8. 개인적으로 통진당 지지자이자 이름만 년수만 오래된 당원이다. 이번 선거에선 잠재적 숫자확보의 가능성을 믿었기에 녹색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의 배후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것이 진보의 뿌리이자 나처럼 진보연하는 이들의 지난 궤적에 더 관심이 많다. 언제나 그들은 더 똑똑하고 더 당당했던 것은 아닌가? 심리적인 우월함? 과연 믿을 만한 생각인가? 옆의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들에게 기대거나 삶을 올려다보기나 한 것인가? 삶의 연대로 이어져 있는 그들의 틈과 틈 사이에 관심이나 있기나 한 것인가?

 

9. 정치는 순간을 살지만, 그래도 사회문화는 다른 시간을 살 수 있다. 너-나의 느낌은 현실에서 또 다르게 시간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 너-나의 시간이 만들고 키우고 자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느낌을 너-나의 일상이란 인큐베이터에 키워보는 것이다. 더 떳떳하게 하고싶은 것은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해야된다는 강박에 벗어나 하고싶은 것들의 연대, 그렇게 일을 저질러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시간들이 다르게 자라고 모아져, 그 시간들을 같이 키울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사회문화적인 자산이 없고서는 늘 뿌리채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진보는 도나 모가 아니라 개,걸,윷의 풍부함에 있는 것은 아닐까?

 

10. 정말 쓸데없이 생각을 키워본다. 정작 당사자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하지만  쓸데없고 딴청을 부리는 이도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엄중한 시국에 말이다. 하지만 엄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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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적시간, 사적시간 그리고 진보의 재구성(酌)
    from 木筆 2012-06-01 18:01 
    먼댓글에 모임과 생각을 잇는다. 시간에 대한 맷집을 갖거나, 시간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균질하지 않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진보가 시간에 대한 강박을 갖지 않으려면 공간과 시간이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다 균질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자신이 몸담고 호흡하고 생각의 결을 만질 수 있는 생활의 시공간이 이질적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진보의 문화적 진부함을 되새겨 보자는 것이다. 정치적 사건이 있으면 서울말, 서울평, 서울시선으로 도배될
 
 
여울 2012-05-2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댓글의 4년전 기억을 더듬는다. 어쩌면 4년마다 반복되는 통증의 패턴은 이렇게 비슷한지? 아마 4년이전, 그러니 8년전 승리?에 고무된 이면은 너무도 고루했다. 그리고 분당의 절차를 밟았다. 어쩌면 진보연하는 분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서 순수한 것이 아니라 순진하기까지한 진보의 걸음걸이에 딴지를 건 생각들이다. 여전히 물밑에 담고 있는 마음이 그러하다면, 열정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면 한번 곰곰 따져보자. 아마 늦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는 늘 과거에 연유한다. 그만큼 그 수준만큼 역사를 밀고간다. 다행이 운이 좋은 것은 아니었을까? 명심할 것은 작아지고 낮아지는 수밖에, 주변에 발닿고 있는 곳이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