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생태론 (1)

코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배워 온 것은 철학, 역사, 경제학, 정치학을 포괄하는 조화로운 사회주의 체계의 모색 노력이다. 그리고 코뮌주의가 아나키즘에서 배워 온 것은, 위계구조는 리버테리언사회주의 사회를 통해서만 극복된다는 주장, 그리고 아나키즘의 반국가주의와 연방제다.  112

 

세상 사람, 즉 대중도 과거의 진보적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도 다르게 변하고 있으며 향후 수십 년간은 더욱 그럴 것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변화들,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롭고 광범위한 모순들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지난 두 세기 동안 거의 모든 혁명운동이 과거로부터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광범위한 중산층을 설득하여 새로운 민중적 프로그램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불만에 찬 소부르조아의 도움 없이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시도는 일말의 가능성도 갖기 어렵다.  126-127

 

국정운영과 정치의 차이

 

국정운영과 정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상호 반대되는 긴장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들은 계속 이 둘을 같은 것으로 혼동해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는 국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특권 계급의 이해관계 아래 시민을 지배하고 시민을 손쉽게 착취하기 위해 고안된 기구이다. 반면 정치란, 그 말 뜻 자체가, 자유 시민이 공동체의 일 처리와 자유 수호에 적극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는 1790년대 프랑스 혁명가들이 일컫던 시민주의의 구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라는 단어 자체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고대 아테네에서 이 말은 늘 민주주의와 함께 사용되는 가운데 시민에 의한 도시의 직접 지배를 의미하였다. 그러다가 수 세기에 걸쳐 이런 시민참여의 정치가 퇴락하고, 특히 계급이 형성되면서, 필연적으로 국가가 등장하고 그 국가에 의한 정치 영역의 침식과 합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39

 

국가와 정부의 차이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 국가는 억압하고 착취하는 계급이 피착취계급을 규제하고 강제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임이 분명하지만, 정부 내지 정치는 협의가 필요한 삶의 문제를 평화롭고 공정한 방식으로 다루기 위해 고안된 제도들의 총체다. 공무를 처리하는 시스템으로서의 모든 제도화된 협의기구는 국가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정부의 형태일 수밖에 없다. 한편 모든 국가는 응당 정부의 한 형식이긴 하지만 계급 억압과 통제를 위한 폭력 수단이다.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에게는 공히 곤혹스러운 것이지만, 피압박 민중들은 수세기에 걸쳐 군주, 귀족, 관료계급의 횡포에 저항하여 헌법의 제정을 요구했고 입헌 정부의 수립, 심지어 법률과 규범의 제정을 요구했다.  141-142

 

지나치게 단순한 이념인 에코-아나키즘과는 달리, 사회적 생태론은 친환경적으로 구성된 사회란 과거로 돌아가는 형태여서는 안 되고 앞으로 전진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래서 사회적 생태론은 전자처럼 원시적 삶, 내핍 생활, 극기 등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물질적 향유와 여유를 강조한다. 사람들이 즐겁게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문명 창조와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려면 지적, 문화적 자기 계발의 여유가 필요한데, 삶의 이런 여유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기술과 과학을 거부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행복과 여유 창조를 위해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생태론은 배고픔과 물질적 궁핍의 생태학이 아니라 풍요의 생태학이다. 143-144

 

자본제 사회 전반의 비판

 

코뮌주의는 위계적인 자본제 사회 전반을 비판한다. 그것은 정치와 경제 모두를 바꾸고자 한다. 코뮌주의의 목표는 경제의 국유화냐 아니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유지냐에 있지 않다. 그것의 목표는 경제를 자치체의 통제 아래 두는 데 있다. 코뮌주의는 생산수단을 자치체의 생존과 지속의 한 방편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모든 생산 기업에 대한 권한은 지역 의회가 갖는다. 그리고 지역 의회는 공동체 전체의 이해관계 충족을 위해 생산 기업이 맡아야 할 역할을 결정한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 만연한, 삶과 노동의 분리는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시민의 다양한 욕망과 욕구가 상실되지 않고, 생산 과정에서도 예술적 창조의 도전이 이루어지며, 생산이 제반 사상과 자기정체성의 확립에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된다. 고든 차일드가 신석기 시대 말기 도시 형성에 관해 쓴 글의 제목처럼,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Humanity makes itself." 그리고 인간이 자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지적 발전, 심미적 발전일 뿐 아니라, 욕구의 확대를 통해서, 또 욕구충족을 위한 생산 방법의 확대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잠재력과 그 실현을 확인하는 것은 창조적이고 유용한 활동을 통해서다. 152-153

 

좋은 삶의 추구

 

코뮌주의의 삶이 실현되면 기존의 경제학은 윤리학으로 바뀐다. 기존의 경제학이 가격 문제와 희소자원에 주로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윤리학은 인간의 욕구를 실현하는 일, 좋은 삶을 추구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물질욕과 이기주의 대신에 사람들 사이의 연대, 그리스어로 표현하자면 인간에 대한 사랑philia이 자리 잡는다.  154

 

코뮌주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회에 참석하는 다양한 직업의 노동자들이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자의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시민으로서 민회에 참석한다. 그러니까 직업은 특수 직종의 노동자지만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시민으로 참가한다는 말이다. 시민은 특수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자, 전문가, 개인이라는 편협한 신분 의식을 버려야 한다. 자치체의 삶 자체가 이런 시민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시민을 받아들이고 젊은이들을 교육한다. 결국 민회는 의사결정 기구일 뿐 아니라 복잡한 공동체의 문제, 지역의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사람들을 시민으로 키우는 교육의 장소이다. 153-154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당시 지역자치체의 고유 기능은 도구적인 것이 아니요, 경제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당시 아테네인의 삶을 돌아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판단은 맞는 것 같다. 지역자치체는 사람들이 모여 연합하는 무대요, 주민들이 함께 사회적, 정치적 조율을 이루어내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런 공동체적 삶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지역자치체는 인간이 이성, 자기의식, 창조성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구현하는 탁월한 터전이었던 것이다. 결국 고대 아테네인에게 정치는 현실의 정책 업무를 다루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안고 있는 시민의 활동이 곧 정치였다. 모든 시민은 도시의 제반 활동에 윤리적 존재로서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158

 

아나키즘과 차이

 

 

코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점이 많지만, 진정한 형태 즉 순수한 형태의 아나키즘과는 더욱 그렇다. 아나키즘 앞에 무정부주의적, 사회적, 신, 심지어 리버테리언 등 어떤 형용사가 붙어도 사정은 같다. 코뮌주의를 아나키즘의 한 변종으로 보는 것은 두 사상의 차이점을 간과하는 것이고, 두 주의가 민주주의, 조직, 선거, 정부 등에 대해 서로 상충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코뮌주의라는 정치적 용어를 만든 셈인 파리코뮌 투사 귀스타브 르프랑세는 단호히 선언했다. " (나는) 코뮌주의자다.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코뮌주의는 권력의 문제에 관여한다. 자칭 아나키스트들입네 하는 이들의 소위 공동체운동과 사뭇 다른다. 공동체주의자들이 벌이는 사업의 예는 서민차고지, 인쇄소, 생협, 뒷마당 가꾸기 운동 등이다. 하지만 코뮌주의자들은 온 힘을 모아 시의회 선거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시의회는 잠재적으로 매우 중요한 권력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또 코뮌주의자들은 시의회로 하여금 법률적 권한이 있는 마을 회의를 만들게 한다....이렇게 만들어진 마을회의는 그런 국가기관들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고 무력화시키는 노력을 할 것이다. 그러면 법률적 권한을 가진 마을 회의는 권력행사의 실질적 엔진이 된다....다음단계로 자치체 간 동맹을 맺고 그 동안 국민국가가 했던 역할에 도전하게 된다. 161-163

 

마지막으로 코뮌주의는 아나키즘과 달리 다수결의 원리에 따른다. 많은 사람이 모여 의사결정하는 데는 이 방법이 가장 공정하다. 본래의 아나키즘은 이 원리가 다수에 의한 소수 지배의 원리로서 권위주의적이므로, 다수결이 아니라 합의에 의한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합의란 것은 다수의 결정에 한 사람만 반대해도 무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합의를 고집하게 되면  사회 자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 소수자의 권리는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목표로 하는 자유의 구체적 현실에서는 반대 의사를 지닌 소수자의 권리가 다수자의 권리만큼이나 언제나 충분히 보호되도록 해야 한다.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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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도 꽃도 산도, 그 속에 넋을 잃고 빠져서 그리운 건 모두 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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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씨알

 

 

우뢰

 

 

해달

 

 

 

                                                                      서예대전이 걸려 파닥~, 그 가운데 몇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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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친은 환경위기가 사회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북친은 생태파괴의 증상을 단순히 확인하기를 넘어설 것을, 그리고 지배위계구조라는 사회관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이해할 것을 촉구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을 인간의 착취 대상으로 보는 생각은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생태 위기의 극복은 지배와 위계구조에 근거한 사회관계를 폐지하고 해방적 관점에서 사회관계를 재구성해야만 가능하다.  10

 

성장은 시장 자체가 만들어내는 '객관적 요인'들, 즉 도덕적 고려나 윤리적 설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요인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 발전과 기술 혁신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경쟁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기업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경쟁에서 지면 끝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탐욕 역시 중요한 동인이겠지만, 기업가로 하여금 생산 설비 확장을 하도록 하는 직접적 요인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앞서기 위함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본가는 경쟁자를 잡아 먹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52-3

 

역사를 보면, 교통수단은 원시적이었지만 인구가 백만에 육박하던 유럽의 주요도시들이 정치적으로 생동감 넘치는 분권 제도와 그 조화에 기초하여 잘 굴러왔음을 알 수 있다. 1500년대 초반 민중 반란을 일으켰던 스페인 카스티야의 도시들, 1790년대 초 파리의 여러 지구와 그들의 민회, 그리고 1960년대의 마드리드 시민운동에 이르기까지 대도시의 지역자치 운동이 권력은 과연 어디로 모아져야 하는지, 그리고 사회생활은 어떤 제도로써 유지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이슈를 제기해 왔다.  87-88

 

과거 혁명적 노동자들의 계급운동은 단지 산업현장에서의 운동만이 아니었다. 거의 폭동에 가까웠던 파리 노동운동은 기본적으로 수공업자의 운동이었으며 자기 활동 구역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운동, 비슷한 처지의 동병상련에서 야기된 운동이었다. 17세기 런던의 수평파에서 20세기 바르셀로나의 아나르코-생디칼리스토에 이르기까지 급진 변혁운동이 이면에는 언제나 공동체의 강한 유대가 있었고, 거리와 광장, 카페를 중심으로 한 시민영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89-90

 

지역자치체는 잠재적 시한폭탄이다. 지난 수 세기에 걸쳐 각종 시도가 있었지만, 지역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 국가의 복제품으로 전락한 지자체 제도를 변혁하는 일은 역사적 의미를 지닌 중요한 정치적 과제다. 오늘날 신사회운동은 침몰하고 있다. 무엇보다 시민적 공공의 장으로서의 가능성와 정치적 전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신사회운동은 쉽게 의회주의로 빠져든다. 역사를 돌아보면, 리버테리언이론들은 항상 자유로운 자치체를 중요시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자유로운 자치체야말로 새로운 사회의 세포조직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상태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서 자유로운 자치체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은 코뮌들의 코뮌이라는 위대한 리버테리언적 이상과 그 이상의 구현을 위한 정치 운동을, 그 운동이 현재 잠자고 있다는 이유로 피해가려는 것과 같다. 풀뿌리 이중 권력을 수립해야 하고 풀뿌리 시민권 개념이 자리 잡아야 한다. 또 지자체 중심의 경제시스템을 갖추어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와 집중화된 거대기업의 커져만 가는 권력에 맞서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위한 지속적 제도 기반은 다름 아닌 지역자치 제도 확립에 있다. 또 우리가 지역자치의 구조를 얼마나 많이 변혁하느냐, 과연 그것들을 새로운 시민적 공공의 장으로 만들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92-93


사회적 생태론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이론이 아니다. 계몽주의의 이상, 그리고 (1)지난 두 세기의 혁명적 전통이 사회적 생태론의 뿌리다. 사회적 생태론의 사회분석과 목표는 마르크스, 그리고 표트르 크로포트킨 같은 급진 사상가의 이론을 배경으로 한다. 특히 그들 이론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아이디어에 근거한다. 또 사회적 생태론은 (2)1936-37년 스페인 혁명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위대한 혁명 유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이론이다. 한편 사회적 생태론은 제 사상의 신자유주의적 개량 내지 구역질나는 온건중도주의의 입장에 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좌파 전통을 욕되게 하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산업주의" 입장이 그런 행보를 보여왔다. 그리고 "탈유물적" 영성주의는  두말할 것도 없다. 탈유물론적 영성주의는 에코-페미니즘,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 심층 생태론, 그리고 소위 "사회적 심층 생태론" 내지 "심층 사회 생태론"에 의해 조성되었다.  101-102

 

지나치게 단순한 이념인 "에코-아나키즘"과는 달리, 사회적 생태론은 친환경적으로 구성된 사회란 (3) 과거로 돌아가는 형태여서는 안 되고 앞으로 전진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래서 사회적 생태론은  전자처럼 원시적 삶, 내핍 생활, 극기 등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4) 물질적 향유와 여유를 강조한다. 사람들이 즐겁게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5)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문명 창조와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려면 지적, 문화적 자기 계발의 여유가 필요한데, 삶의 이런 여유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기술과 과학을 거부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행복과 여유 창조를 위해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생태론은 배고픔과 물질적 궁핍의 생태학이 아니라 (6) 풍요의 생태학이다. 요약하면, 사회적 생태론은 일정한 계획과 관리의 중요성, 또 민회의 민주적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각종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결코 개인의 이탈행동이나 기행같은 멋대로의 행동을 예찬하지 않는다. 144


자본주의는 인간관계만을 점점 더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한때 그것에 반대했던 바로 의식마저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자기 궤도 내로 흡수해 버렸다. 일찍이 샤를 푸리에는 한 사회가 문명으로서 갖는 위상은 그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오늘날의 모습을 보며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한 사회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퇴락하였는가는 그 사회가 신비주의와 절충주의에 얼마나 빠졌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기준들을 적용해 볼 때, 20세기 끝무렵의 자본주의 사회만큼 한때 급진적이었던 저항세력을 철저하게 변질시킨 사회는 없다. 104

 

세상 사람, 즉 대중도 과거의 진보적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게 변하고 있으며 향후 수십 년간은 더욱 그럴 것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변화들,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롭고 광범위한 모순들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지난 두 세기 동안 거의 모든 혁명운동을 실패로 이끈 치명적 오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혁명운동이 과거로부터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광범위한 중산층을 설득하여 새로운 민중적 프로그램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불만에 찬 소부르조아의 도움 없이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시도는 일말의 가능성도 갖기 어렵다. 126-127

 

국정운영과 정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상호 반대되는 긴장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들은 계속 이 둘을 같은 것으로 혼동해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는 국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특권 계급의 이해관계 아래 시민을 지배하고 시민을 손쉽게 착취하기 위해 고안된 기구이다. 반면 정치란, 그 말 뜻 자체가, 자유 시민이 공동체의 일 처리와 자유 수호에 적극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138

 

아나키스트들은 오래전부터 모든 정부를 곧 국가로 간주하여 비판했다. 모든 종류의 사회 조직을 제거해야 한다는 그들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하지만,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 국가는 억압하고 착취하는 계급이 피착취계급을 규제하고 강제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임이 분명하지만, 정부 내지 정치polity는 협의가 필요한 삶의 문제를 평화롭고 공정한 방식으로 다루기 위해 고안된 제도들의 총체이다. 공무를 처리하는 시스템으로서의 모든 제도화된 협의기구는 국가의 존재여부와 무관하게 정부의 형태일 수밖에 없다. 한편 모든 국가는 응당 정부의 한 형식이긴 하지만 계급 억압과 통제를 위한 폭력수단이다.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에게는 공히 곤혹스러운 것이지만, 피압박 민중들은 수세기에 걸쳐 군주, 귀족, 관료계급의 횡포에 저항하여 헌법의 제정을 요구했고 입헌 정부의 수립, 심지어 법률과 규범의 제정을 요구했다. 그뿐인가. 이를 문서로 공식 천명하는 운동을 해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리버테리언들이 정부 자체를 반대하고 심지어 법률까지 반대하는 것은 자기 꼬리를 삼키는 뱀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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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2)
    from 木筆 2012-09-19 14:04 
    코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배워 온 것은 철학, 역사, 경제학, 정치학을 포괄하는 조화로운 사회주의 체계의 모색 노력이다. 그리고 코뮌주의가 아나키즘에서 배워 온 것은, 위계구조는 리버테리언사회주의 사회를 통해서만 극복된다는 주장, 그리고 아나키즘의 반국가주의와 연방제다. 112 세상 사람, 즉 대중도 과거의 진보적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도 다르게 변하고 있으며 향후 수십 년간은 더욱 그럴 것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변화들, 그리고
 
 
 

[불끈!!!모임](假) 천하에쓸데없는문화모임(제안글)

 

 

0. 밑밥 - 세상은 유용만 원하고 발라내고 칭찬한다. 허나 정작 그 유용만 똬리를 틀고 명멸한 무용은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유용은 무용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무용에 대한 하대와 멸시는 결국 그 유용마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든다. 쓸데없음의 쓸모에 대해 논하고, 연구하고, 아이디어를 유용과 무용이 함께하도록 구한다.

 

0.1 밑밥  - 사람들은 말한다. 천재의 삶을 논한다. 쾨테와 피카소, 베토벤을 논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모신다. 작품이 아니라 그 삶까지 우러러 봐야 하는가?  세상은 말과 책, 위인의 권위를 정원의 연못에 모아둔다.  쇼윈도우에 전시해둔다.  끊임없이 우러르고 쳐다본다.  그 연못안의 느낌, 쇼윈도우 안의 느낌들을 향기 맡을 수 없다. 밖의 느낌을 되돌려줄 수 없다. 느낄 수 없다. 불감증이다. 느낌을 가져가 몸을 충만하게 하지 못한다.

 

0.1.1 밑밥 - 냉철한 이성과 따듯한 가슴. 어떤이는 머리에서 원하는 것을 구하고, 어떤이는 끓는 가슴의 열정만 믿고 따른다. 세상에서 가장 먼거리인 머리와 가슴 사이는 더 멀어진다. 말뿐인 것에 귀기울이고 솔깃해, 느낌에서 얻는 법을 잃는다. 사람들 사이 말뿐임과 느낌의 거리감을 살펴볼 수 없다. 느낌을 헤아린다. 그 세심함을 살핀다. 손과 발의 묵묵함으로 그래도 굴러가고 끌고가는 세상을 다독인다.

 

0.2 밑밥 - 어떤이는 몇일만에 책한권을 냈다고 한다. 세상은 천부적인 재능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쓸데없는모임은 그 작품에 스며드는 일상의 괴로움과 역겨움을 나눈다. 하루가 아니라 몇년의 고통을 톱아본다. 그 작품을 내기위해 그 친구를 논할 것이다. 그 자양분의 출구가 비범이 아니라 평범의 누적에 있음을 밝히고 지금여기서 나눈다.

 

0.3 밑밥 - 예술과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예술인과 문화인의 오-버는 녹녹치 않게 뺄셈을 할 것이다.  관심받지 못하는 일상인의 예술성을 논할 것이다. 붐벼 북적이는 식당 뒷편의 예술을 논할 것이다. 접시닦이의 난이도와 기술, 예술성을 논한다. 그 일상이 얼마나 멋진 점심과 저녁을 만들어내는지 들여다볼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들의 연결된 비범함을 다룰 것이다.

 

0.4 밑밥 - 둘만 있어도 민주주의다.  플러스 알파,  셋만 있으면 세상이다. 복잡함과 미묘함을 톡!톡! 건든다. 힘의 디테일을 살핀다. 기울어진 관계를 보살핀다. 기우뚱한 관계를 들썩인다. 생각의 지렛대, 아이디어의 지렛대, 발랄함의 지렛대로 모임을 들썩 들었다 놓는 모색을 한다.

 

1. 무엇을 가지고 노나-  上上(문화공간)을 가지고 놀 수 있거나, 기획꺼리를 소소하게 나눈다. 팟캐스트꺼리를 가지고 논다. 신상  및 모임 뒷담화는 기본이다.  가쉽도 기본이다. 쓸데없는 것들을 쓸데없을 때까지 나누고 모은다. 그리고 철없는 아이들의 생각들도 백원, 이백원, 천원에 사고, 왕림하게 하여 들어본다. 일상의 이야기도 산다. 돈받고 들어주고 기록도 한다.

 

2. 어떻게 노나 - 한달에 한번 모인다. 쓸데없는 생각을 모아모아 , 긁어긁어 가지고 오시면 된다. 코묻는 생각도 가져오시고, 열받아 밤새 끙끙앓는 고민도 가져오시고, 세상을 뒤바꿀 기획(안)도 있으시면 서슴으면서 오시라.

 

3. 주문의 한계는 있나 - 사생활, 공생활, 사-공생활, 연애, 결혼, 중매, 체위, 섹스, 일터, 군대, 학교, 알바.. 쟈스민혁명, 아나키즘, 68혁명, 인문학, 아줌마인문학, 인문정신... 휴전선....등등 없다. 경계는....네것이다.

 

4. 대추내놔라, 감내놔라 하나 - 감도 대추도, 꼬추도 내놓으라 할거다. 헛점을 보이면 쳐들어간다. 단디 각오하시라.

 

뱀발. 삼순이,삼돌이밴드...지난 해의 기쁜 기억들과 함께 공간구성과 운영으로 인해 논의가 쉽지만은 않다. 유선으로 통화하고, 몇차례 따로 만남을 통해 서로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본다. 다 잘 되었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재정가뭄에 시달려 쉽지만 않다. 1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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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2012-08-2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완벽한 정리^^그런데 천하에쓸데없는문화모임~이라기 보다는 천하에쓸데없는연구소 로 칭했으면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