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들이 아귀가 맞지 않아, 게으름을 피우며 그림판만 조물락, 이게 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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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2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2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또 다른 사랑]  삶이 지랄같으면 바꾸자

 -   분권, 연대 그리고 운동 그 찌질함을 위한 色주

 

분권의 경계를 새로 만들자

 

도시라는 공간에서 적정한 분권의 인구는 얼마일까? 중세시대를 예로 들거나 자급자족의 단위, 아니 기본적인 시스템에 역사적 답을 찾는 시도는 그리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여건과 조건이 다르므로 그 규모를 일부러 가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역사의 측면을 감안하여 분권의 의미를 찾는 것은 합당하다. 물론 역사 속에서 인물, 먹을거리, 축제, 스토리가 있는 꺼리를 찾아내는 것은 단순히 점과 점이 대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구조 속에서 마을 속에서 나를 위치지음으로서 의미의 뿌리를 내리게 한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하지만  이런 역사와 분권을 지금에 뿌리내리게 만드는 노력과 다른 면을 더듬어 보자. 이성과 설득의 언어구조에 갇혀있지 않고, 욕망과 쾌락, 죽임이 아니라 살림의 말들, 육화된 감각의 말들을 열어제껴보자. 최근에 인문의 경지에 물오는 슬로건을 보자. "배워서 남주자"  말의 결에 욕망과 쾌락 양념으로 육화시켜보자. "배워서 남주자 -> 배워서 자랑하자-> 배워서 잘난척하자."  배우는 것에 의무감이나 당연함이 스며있고 어쩔 수 없은 강박증, 앎이 의무란 더깨를 씌우는 남을 줘야한다는 틈바구니에서 벗어나보자. 알려주고 싶어 입이 방정맞게 근질거리고, 알고 싶어 안달나는 "자랑하자"가 더 나을 것이다.

 

조금 더 스펙트럼의 보라색 쪽으로 가보자. "잘난척해보자!!". 잘난척하지 못하면 안되는 분위기. 한판 겨룰 수밖에 없는 분위기, 뭔가 일어날 수밖에 없어 싸움구경을 해야되는 정적. "배워서 잘난 척 해보자"  알려줄 수 있는 곳은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잠시의 시간이라도 더 주고 싶다. 이것이 할 수밖에 없거나 더 알려주기 위해 갈고닦는 익숙함의 경지라면 어떨까? 배워서 남을 주어야 한다보다 배워서 잘난척하자가 더  앎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육화된 말이자 사건을 벌리려 안달난 자세이다. 움직이고 싶어 죽겠다 싶다.

 

이성과 설득의 언어에 족쇄처럼 걸려있지말고, 쾌락과 욕망을 자극하는 몸말,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육화된 언어의 결은 없는 것일까? 밥, 욕, 몸, 똥, 뼈. 숨. 뱀. 입, 코, 귀....마음과 몸을 연동시키는 살아있는 말들. 이성과 설득의 언어를 옆으로 지긋이 물려두고, 뭔가 움직이고 싶어 꼬물거리는 감각을 되살려보자. 마음이 움직이고 몸을 끄는 여운이 있는 감성이 배여있는 말들의 분위기로 고양시켜보면 어떠할까?

 

(삶이) 지랄같으면 오라.
 - 지금 여기 진보를 논할꺼다.

 

분권의 마지노선을 어디로 잡을 수 있을까? 20-30만정도의 구단위가 좋을까? 몇개의 일상이 겹치는 동단위가 좋을까? 조례로 통해 준강제성을 주거나,  일상의 독특한 경계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의 단위는 어디까지일까? 동단위가 될수도 있고, 면단위가 될 수도 있다. 몇개의 동이 될 수도 있고, 구가 될 수도 있다. 몇개의 구가 될 수도 있고, 시가 될 수도 있다.  얼마나 색다를 수 있을까? 정치를 고려한 기획으로 교육시키고 설득시키는 구조, 지난 과거의 시간을 겨워내는 작업으로 달라지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살펴야할 직설로 나아가는 분권의 싹은 없을까? 일상과 삶을 달리보게 만드는 방법은 없는가? 삶은 계란, 삶은 라면, 아니 삶의 정면 승부수는 무엇일까? 음식점은 라면으로 계란섞인 라면으로도 분권의 자장을 만들어낸다. 분권은 이 지긋지긋한 삶에 균열의 한방을 먹일 수 없는가?

 

당분간 지극히 이성적인 얘기만 하자. 아직 상상력도 온몸으로 부여안을 수 있는 사랑력이 내겐 없다. 경험의 밑천이 일천하므로 말이다. 말들이 이 언어에 사로 잡혀있다. 어떤  마을사람들은 어떻게든 노인1인가족에게의 삶의 뒤안길은 없다. 이 동네에서 살면 어쨌든 굶지 않아 외롭지 않아 자살을 염두에 둘 걱정이 없는 곳이 있다고 하자. 삶과 사회적 관계망이란 문화자산의 비용이 얼마나 소요될까? 공통되는 자산이 아니라 실생활에 스며드는 곳이 이땅위에 있는 마을이 있을까? 이사가고 싶은 곳이 있는가? 남쪽은 있는가?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이 동네는 미국산쇠고기 매장이 시민 합의되어 성문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장벽이 있어 장사를 암묵적으로 할 수 없다거나, 최소한의 광우병사전검역시스템이 되어있다. 안전하다. 이런 안전의 분권이 리, 면, 동, 구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다양성, 탑다운이 아니라 바텀업, 분권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시를 설계하는데 있어 사람, 문화, 공간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본다고 하자. 사람은 자본가나 건축주의 입장만이 아니라 입주자는 물론 보행자와 자전거라는 시각으로 설계 포인트를 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와 노인의 관점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라는 스펙트럼아래 교육기관은 학생을 주체로 세워 보는 일, 여성이자 주부의 관점에서 살피는 일, 차상위계층이나 계급의 관점에서 기본계획을 입체적인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택시와 자가용, 물주의 흐름에 내맡겨져 있다.

 

지금 여기 도시공간들은 시간이 없는 것처럼 움직인다. 역사의 자장이나 문화의 생성, 미래세대에 대한 의식이라는 시간의 감이 부재하다.  독특함도 부족하고 스토리도 없는 천편일률적인 축제와 마을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공간만 돈과 행정에 사로잡혀 일을 처리하고 있을 뿐이지, 시공간으로 번지거나 뿌리내리는 기획이 없다. 역사와 문화, 삶의 자장을 새롭게 만드려고 하는 기획의 연결망과 곰삭일 수 있는 장조차 없다. 시민은 여전히 행정의 대상이자 일을 관철시켜야 하는 절차상의 인물들일 뿐이다.

 

도시, 시공간, 신시공간, 색다름, 운동

 

시민단체는 관과 대응하는 국면에서 여전히 이성적이다. 설득해야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벌어지고 있는 문화적 시공간의 단절을 보자. 중앙데파트나 홍명상가가 TNT에 헐리우는  신목척교의 탄생을 보자. 신설과 함께 사위워가는 공간을 멀뚱히 바라보며 무얼했는가? 그저 혼자의 맘 속으로 가져가게만 한다. 물리적인 공간이 사라지는 사건에도 도시의 익명성은 애절하지 못하다. 마을 동네 어귀를 지키는 나무만큼이다. 그 시공간을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줌에도, 절연의  의식마저 담지 못하고 있다. 기다란 여운이나 일상의 공간은 관철이냐 비관철이냐는 이성적이고 설득적인 측면만을 협공하고 있다. 사람들의 감성적이고 일상의 여운을 끄는 시공간에 대한 감흥을 증폭시킬 노력은 전무하다.

 

사람들이 투쟁이 성과만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도 앎이 많다. 납득을 넘어서는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서의 물꼬를 터뜨리는 일.  공유정서의 샘물점을 만드는 일 역시 논리적 측면과 이러저러니 합당하다는 산술만이 정답이 아니다. 그저 문화 공연을 한판 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온도를 올리고 공명하게 하는 새로운 시도와 실험이 아쉽다. 

 

사람들은 일인일색이 아니다. 비대칭적인 공간이 스스로 존재한다. 상황에 맞춰 다면적인 모습은 누구에게나 볼 수 있다. 일인다색의 시대다. 개인은 상황에 맞춰 응집하고 폭발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너무도 많은 상황과 대면할 수밖에 없기에 다중과 다면의 일상을 겪고 만들어간다. 정서적, 논리적 교감은 전혀 다른 결로 만나고 꽃피우고 지기를 되풀이한다. 계층과 계급의 결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결만 보면 제대로 볼 수 없다. 그 사이사이 피고지는 다른 색깔과 함께 연동하는 감성의 숨결과 정서를 읽자. 그 꽃같은 숨이 트이는 자장을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운 시공간. 새로운 돌발의 연대

 

모시인은 자신을 움직은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 한다. 사람은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팔할은. 사람을 움직이는 팔할은 쾌락과 충동, 그리고 욕망이다. 움직이게 하고 끌리게 하는 느낌의 뿌리는 설득과 권면에 있지 않다. 논리는 그 움직임에 대한 충동, 깨달음, 느낌의 종속변수다. 움직임에 뒤따라오는 그림자이다. 그 사후적인 성격인 이성의 그림자는 충동과 쾌락의 단절을 이어주는 도구이며 보존과 방부의 효과만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성과 설득은 보수적이며 지금이하이다. 지금이상은 여전히 욕망과 충동, 쾌락을 바탕으로 삶과 일상의 행동을 부추기고 꾄다.  지금으로부터 시공간은 뫔의 말로 열며, 뫔의 자극으로 생긴다.

 

이렇게 새로운 일상의 시공간이 생기고 자랄 수 있다. 새로운 말의 그물로 새로운 욕망이 생성되며, 새로운 쾌락과 충만이 출현한다. 새로운 자극과 새로운 방법, 삶의 뿌리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사랑은 분권의 씨앗으로 흔적을 남긴다. 씨앗은 이성과 설득과 권면으로 싹을 틔우지 못한다. 씨앗은 당신을 근질거리게 하는 쾌락과 욕망, 끌림과 설레임과 한통속일게다. 아마 당신이 분권주의자라면 말이다. 새로운 정치를 지향한다면, 새로운 일상을 꿈꾼다면, 새로운 마을을 꿈꾸어 왔다면 이성과 설득을 지금 멈춰보자. 세끼 먹거나 한끼 먹는 음식의 말로 단련해보자. 일상과 너-나와 주변을 색안경을 끼고 보자.

 

뱀발. 키워드로 보는 대전에 대한 강연, 명절 전후로 이어진 진보와 지역정치, 책이야기들이 섞인다. 남겨두지 않으면 잊혀질 듯싶어 성글게 쓴다. 유행을 넘어, 유행을 너머, 우리는 어느 작은 곳에서라도 시작할 수 없을까? 병행할 수 없을까? 왜, 여전히 휩쓸려다니기만 하는 것일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603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6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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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새벽 어스름을 밟다. 영** - 비** - 고*저수지. 가을안개가 무척이나 짙다. 돌아오는 길 금*산 일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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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연대로서 과학의 미래 

 

 

연대로서 과학의 미래

 

시민참여연구센터 부위원장 *** 

 

여는 말

 

“침대는 과학이다.”

 

한 만번쯤 들은 이말은 여전히 광고에 오르내린다. 사람들은 과학을 어떻게 직감적으로 받아들일까?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궁금하다. 과학자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아마 비이커와 하얀 까운을 입고 있는 모습이거나 어디 연구실에 쳐박혀 세상과 담을 쌓고 연구에 열중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정관념이 깨지거나 균열이 가지 않는 이상, 지금여기 과학기술자의 위상전이도, 인문사회와 만남은 없다고 여긴다. 과속방지턱 하나에도 그 숱한 당사자들의 의견과 주민의 견해가 녹아있다. 층간소음 기술 하나에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스며있다. 과학적이란 말의 느낌을 뒤집어 보지 않은 이상, 과학은 없다. 아마 당분간 과학이란 위험한 괴물을 지켜보기만 해야 될지 모른다. 그래서 여전히 당신에게 질문한다.

 

“과학이 무엇인가?” “과학기술이 무엇인가?”

 

 

자본주의와 과학의 동맹

 

「피에타」에서 김기덕 감독은 ‘돈은 시작이자 끝이다.‘라고 한다. 휠체어에 앉힌 스님을 강도가 담장위가 보이도록 들어올려주자 “제 삶이 어리석어서, 남들 만큼 보지 못한 겁니다.“ 라고 한다. 화면은 강과 산, 들이 보이는 저편을 멀리 쫓아간다. 황금사자상 수상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 피에타는 극단적인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본주의 중심인 돈이라는 것에 의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불신과 증오와 살의가 어떻게 인간을 훼손하고 파괴하며 결국 잔인하고 슬픈 비극적 상황을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피에타를 통해 돈이면 다 된다는 무지한 우리의 현주소를 돌아보고 더 늦기 전에 진실한 가치로 인생을 살기를 기원한다.”라고 관객들에게 전한다.

 

 

베버가 말한 쇠로된 울타리, 루쉰이 말한 쇠감옥으로 비유된 자본주의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는다. 그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주눅들지 않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땅속에 잠자고 있던 공룡시대의 화석연료라는 명망을 불과 200∼300년만에  바닥을 드러내놓는다. 철도와 도로, 도시를 반복해서 만들어 놓았다. 경쟁과 기업에 인격을 부여한 뒤, 자본의 성장에 필요한 것만 삼켜먹는 과학의 힘에 근거해 선형 발전을 이루어놓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여전히 돈은 돈을 삼키고, 기술은 기술을 삼키고 불린 배는 가장 강한 적자 하나만 남겨놓는다. 여전히 태양은 둘이 필요없다. 자본주의는 여전한데 국가는 한 하늘아래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구가 두 개가 아닌 이상, 세상이 두 곳이 아닌 이상, 지구가 더워져도, 국가는 상황에 밀려도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

 

가뭄과 홍수, 폭염과 한파, 양극화된 기후는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이들에게 더 비참하고 참혹하다. 석유정점과 지구온난화에 대한 다른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 절반의 굶주림과 절반의 삶에 대해 별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국가라는 장벽은 견고하게 무책임하다. 타국의 다른 삶에 도의적 관심을 기울일뿐 제도적 관심은 없다. 그 와중에 과학은 세상을 하나의 구역으로 묶었다. 경제적인 세계화로 우리는 오대양육대주의 모든 먹을 것을 나누고 이동시킬 수 있다. 돈이 있다는 전제하에 먹고 살만한 정도만 세계화되어 있다. 과학은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것일까? 돈과 성장이란 이름표를 붙인 자본에 철저히 복무한 것은 아닌가? 2∼300년 화석연료로 우린 100억명도 더 먹여살릴 제화를 생산해놓고 있다. 정치적으로 세계화가 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궁무진한 도시와 에너지와 절반의 풍요를 한편으로 다른 한쪽은 절반의 가난이란 선물을 보란 듯이 펼쳐보인다. 세상은 더워질만큼 더워졌다.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낙관주의

 

스마트폰, SNS, 나로호, 과학벨트, 기초과학자없는 과학, 비정규직으로 넘치는 연구소. 문과 그리고 이과.

 

지금 여기 과학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어디쯤 머물고 있을까? 휴전선으로 나뉘어진 분단국가처럼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나이에 이과생은 더 이상 역사를 공부할 이유가 없다. 문과생은 더 이상 수학과 과학을 공부할 이유가 없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아야 한다. 문과이므로 기술에 가린 사람들의 고생과 어려움은 뒤로 숨는다. 이 기술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플지 생각하지 않는다. 연구하지 않는다. 돈이 되어야 하므로, 문과생은 기술적 어려움과 곤란과 세세함을 헤아릴 엄두도 내지 않는다. 줄이고 많이 벌어야 하므로 그깟 고생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과학발전에 대한 과도한 낙관이 만연해서, 과학자는 사회가 과학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다고 불만이 많고, 시민들은 과학기술이 낳은 위험들에 그대로 노출된다. 사회와 과학기술을 관통하는 어떤 노력도 부재한 상황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우리 사회의 취약성이 커지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에서 시도 사람의 무늬를 구별해낼 수 없다. 방정식이 시어처럼 얼마나 정갈한지 느낄 수 없다. 불쑥 튀어오르는 것이라고는 로또같은 대박이란 신화만이 있다. 석유화학공업에 나랏돈을 투자하고, 원자력발전에 지원하고, 우주과학처럼 저기 중앙집중적이고 거대한 과학만이 있다.  황우석에 취하고, 디워에 허우적거린다. 과학에 민족이란 자긍심의 외피를 씌워 중심을 잃게 만든다. 무엇인가 해결해줄 구세주처럼 필요할 때만 섬긴다.

 

대중화에 대한 과도한 관심, 순환 인식의 오류

 

 

이렇게 우리에게 과학은 무엇인가 해결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과학에 뭍어있는 부정적인 영향에 관심이 없다.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발전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부정적 영향 역시 과학기술이 해결하리라고 여기는 순환인식의 한계에 사로잡혀있는 것이 지금은 아닐까? 일련의 근현대 흐름에 있어 인식의 한계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낙관으로 과학기술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재고가 없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일의 성력화를 가져와 고용없는 성장으로 대표되는 일자리까지 줄어든 것이 지금 현재의 사태이다. 이런 기조를 바탕으로 청년세대의 어려움까지 나타나는데 그것에 대한 탐구도 전혀 없는 상황이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에서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선형의 발전을 이루어왔다. 중화학공업, 조선산업, 전기전자, 원자력산업, IT에 이르기까지 그 근거에 이르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 지금까지 번지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위험이 거듭되어 증폭되거나 되먹임되어 나타나는 공해병, 환경호르몬, 유전자조작, 광우병, 기후온난화, 산사태, 원자력, 급발진, 세계 절반의 기아와 빈곤에는 눈을 가리거나 과학기술의 부착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다.

 

 

정치의 공모자로서 거대과학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여파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일본과 유럽에서 본질적인 논의는 지금여기로 들여오지 않는다. 그 숱한 대중언론매체는 원자력산업의 존립을 뒤로 숨긴채 에너지 부족을 빌미삼아 사회로 가져가는 것조차 차단한다. 미래세대에게 과연 합당한가라는 본질적 물음을 드러내지 않고 지금의 에너지 위기로만 문제를 돌리려고 한다. 나로호를 비롯한 우주산업의 세세한 문제점과 연관된 기술의 발전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수면아래로 잠복되어 있다. 정치권의 치적이나 국면 타개용으로 이용되며 그 발표 시점들이 맞추어질 뿐이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휴대폰산업의 발전에 넋을 잃고 있는 동안, 그렇게 쉽게 휴대전화를 갈아치우며, 그 숱한 단종과 지출비용을 지불하고도 내구성과 소비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KTX를 비롯한 속도의 경계를 넘는 초과속의 시대에 살면서 유지관리나 안전의 근본문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과학벨트가 가져오는 지역의 정치적 손익만 계산할 뿐, 지역사회가 건축토목산업의 임시 발전만 이어오고, 과학적인 역량의 향상으로 이어지는지는 묻지 않는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이 많은 연구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지만, 그 문제점이 기관의 연구역능에 얼마나 많은 폐해를 끼치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가 되는지? 기술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사회는 안중에도 없다. 그 물음에 오히려 과학기술과 꼭 연관되어야 하는가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이에게 되묻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과학기술계의 현실이 도처에 깔려있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사용

 

 

지금 이땅 위에서 본질적인 질문을 구하지 않은 채 과학기술의 대중화와 여러 과학기술적 문제점에 대한 방패막이로 전락하고 있는 과학에게 무엇을 얘기해주어야 할까? 과학을 보는 시선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까? 어떻게 해야 황폐해 가기만 하는 자본주의적 삶에 온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을까?

 

이제 과학기술은 다른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나 싶다. 성장과 발전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도 그 독선의 자장이 많은 여파를 미친다.  존 벡위드 교수는 자전적인 삶을 다룬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그린비출판사, 2009) 그는 대장균 박테리아에서 유전자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음에도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중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결정들에 대한 통제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으로 그는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과학의 반역자, 배신자로 취급되기까지 하였다.

 

부정효과에 대한 연구와 사회적 사용에 대한 환기

 

비단,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과학만능주의는 살펴봐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과학에 붙어있는 과학-사회의 연결고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과학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연구하는 순진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중의 시선은 과학이 자신이 원하는 것 외에 원하지 않는 부정적인 여파를 연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연구의 투명성, 윤리성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재앙으로 닥쳐오는 위험을 막기위해서라도 과학의 시선만이 보고자하는 외연의 부정적인 효과를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연구하게 하여야 한다. 과학의 부정적인 효과만이 아니라 인문사회학적, 법제적 연구를 병행되도록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 과학기술은 다른 궤도를 가야 한다. 거대자본의 지원과 국가의 혜택을 받아 성장한 거대과학을 쫒기만 하는 과학과 연구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여야 한다. 4대강 개발 등 국가의 연구에 반기를 드는 과학자들이 소외되게만 할 수 없다. 태양광에너지, 풍력에너지, 바이오매스 등 자연에너지에 관심을 돌릴 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제를 찾거나, 지역의 삶의 자장에 여파를 미칠 수 있는 과제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거대자본과 거대기획으로 자본과 연구가 함께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공공의 이익을 구하는 인식전환이 절실한 시점이기도 하다.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연구기관은 연구기관대로 섬처럼 자본의 수혈을 받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무수한 삶들, 지역의 공공의 이익에 대한 전향적 연구, 거대과학의 틈바구니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부정적 결과의 예방을 위한 사회적사용을 위해 시스템과 인력과 돈을 써야한다.

 

 

시야확보와 시공간 확장을 위한 과학, 그 시급성

 - 지금 여기만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여기저기를 위한 과학

 

 

미래세대를 위한 과학이란 말은 안타깝게도 너무도 늦은 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자본에 추동된 관성을 가진 발전을 멈추기가 어렵다. 정치적인 해결책을 모색한다고 하더라도 필요불급한 시간은 어김없이 미래세대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마땅히 먹고살 권리가 있는 살아있는 삶에 자살을 강요하는 현실을 보면 정치적 타개책이 더 급선무인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삶을 위해 모든 제도와 시스템, 모든 과학이 기여하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역사나 모법의 인권정신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최소한 과학기술이 낳은 편리성과 혁명성이 돈의 증식과 일자리 감소에만 혈안이 되도록 하면 안될 것이다.  그 과학기술의 수혜가 개개인의 삶, 최소한의 여유, 삶을 꾸려나가는 비용이 최소화되는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 못지 않게 전지구적 변환과 위험의 노출에 민감해져야 하는 것이 과학이다. 자본주의의 출발과 함께 성장동력으로 기능한 과학기술은 누적될 수밖에 없는 방사성폐기물을 화석에너지 고갈을 대비한 에너지이며 안전기술이 발전해 예방되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바이오에너지 원료를 수급하기 위해 광범위한 산림을 훼손하는 일과 식량을 독점하기위한 유전자조작, 광범위한 공장형 축산의 폐해가 여전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기후변화로 온갖 구조적 설계결함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고, 한 하늘 아래 절반이 기아와 굶주림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과학기술이 얼마나 사회에 몽매했으며, 얼마나 그 연결고리를 끊어 자본의 증식을 위해서만 기여했는지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가린 위험과 위험이 얽히고 섥혀 위험의 증식에 기여했는지 냉철하게 되살펴야 한다. 이삼백년동안 화석에너지를 남김없이 쓰도록 애쓴 결과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왔을지언정, 한 하늘아래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의 윤택과 전혀 별개였음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하물며 끊임없이 폐기물을 누고 가둘길이 없는 태고적 에너지를 쓰겠다는 원자력발전에 대해 전환적인 정책을 시도해야 한다.

 

이땅만이 아니라 먹을 물, 입을 옷, 따듯한 잠잘 곳도 없는 저기로 향하는 과학기술이 필요한다.

 

적정기술, 중간기술, 강한기술

 

과학기술과 인문, 사회를 연결짓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세대, 과학기술의 수혜세대로서 지금이땅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기후변화와 맞물려 다시한번 짚어봐야할 지점은 무엇일까? 과학기술의 위험성은 국경을 넘는다. 과학기술의 긍정성은 일할 시간을 현저히 줄였다. 더 이상 똑같은 생산성을 갖기 위해 사람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상은 빈부차이를 떠나 과학기술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또 마지막하나, 과학기술은 아직까지 빈부차이에 현저히 낯을 가린다는 점이다. 여전히 가난한 이들을 쫓지 않는다. 자본의 꼬리만 쫓는다.

 

어쩌면, 세상은 전세계적인 경제만의 민주화의 단계를 넘어, 그 위험성이 국지적인 것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과학기술의 위험성의 뇌관이 터짐에도 아마 경제적 위험성에 더 일찍 노출될 확률이 크다. 그래서 전지구적인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과학기술은 이 지구화만이 아니라 지역화, 분권화, 사회적 약자의 근본적인 인문의 물음을 동시에 답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제3세계,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 북반구위주로 제작된 지도를 거꾸로 돌리면 남반구에서 독감도, 쓰나미로 인한 피해도, 기후재난으로 인한 피해가 더 크고 깊다. 식수도 없고, 난방도 없고, 그나마 도시는 초창기 영국자본주의의 폐해를 고스란히 이식한 상태로 열악함과 곤궁함이 재현되고 있다. 여기는 중화학공업도 조선도, 대규모 건설토목산업의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기술과 의약품의 지원만으로도 삶의 결을 유지 할 수 있다. 일부 대학에서 적정기술의 형태도 시도되고 있다는 점으로도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거창한 시혜가 아니라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소한의 삶의 궁핍으로 벗어날 수 있는 손길의 힘이 여기 있는 것이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안은 조력발전의 최적지이기도 하다. 대안에너지를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런데 그 갯벌들이 우리만의 갯벌이 아니다. 세계 10대 간만의 차이가 큰 곳을 지켜내지 않으면 철새들의 생존과 보존도 위태롭다라고 하면, 그리고 그 연구결과가 이미 상황이 벌어진뒤에 나온다고 하자. 대안에너지도 필요하고 생태계 보존도 필요한가? 어떻게 해야되는가? 생존권도 보장되어야 하는가?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시켜 다시 보내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 수 있겠지만, 태양에너지든 바이오매스, 풍력도 대규모 단지 건설의 발상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어야 한다. 슈마허의 중간기술처럼 적절하게 사람과 동네가 결합되어 그 기술의 파장을 느낄 수 있는 범위의 자장에 대해서도 고려해봐야 한다.

 

에너지협동조합으로 거대자본에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삶의 기본요소로 에너지 자립과 공유의 방법이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중간기술이 적정기술과 결합되면 자본에 굴복하지 않고, 기술과 사람, 삶의 자장과 권한을 조금 더 확장해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삶의 유대를 도시라는 형태를 고집하지 않게 하는 단초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여기가 아니라 남반구의 저기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가지를 생각해보자. 신제품들이 기본적인 내구성을 갖게되고, 그 제품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가? 시장의 여건과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가격과 소비자 선호도에 따라 구매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자본의 전략이 기종들을 단종시키며 손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기본적으로 시간에 강한 제품을 만들려는 전략이 배제되어 있다면 심각한 문제는 아닐까? 과다한 비용을 지출해서 다른 부문의 지출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제조업에서 강한기술의 장기적으로 살아남으며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회는 강한 기술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기업들도 이윤을 확보를 위해 상대적으로 단게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하지만 시간대비 지출을 늘리게 됨으로써 대중들은 왜곡된 소비를 강요당하는 측면이 강하다.

 

지금여기에서 인간답게 살기위한 기술의 총량은 얼마일까? 대형평수의 공동주택에서 꼭 살아야 하는가? 남들이 갖는 물건은 꼭 가져야 하는가? 가구를 대물림해서 쓰게되면 고리타분한 일일까? 심미적인 것을 고려해서, 시간이 걸려도 상품성이 없어도 만드는 수제상품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시간에 바래지 않는 강한기술은 필요한가? 이것이 대세가 되면 자본주의는 유효한가? 현실 가능한가? 비경제적인 것은 아닌가?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을 조금 생각해보는 과학기술이 가져올 혜택은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를 살면서 그렇게 관점을 달리해보는 것이 합당한가?

 

 

지역운동, 사회활동의 연대로서 과학

 

과학에 대한 왜곡된 인식, 예를들면 과학만 발라낸 모든 것. 과학에 붙어있는 지역, 위험, 비정규직을 비롯한 사람, 정치, 삶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인문에 대한 감수성의 부재가 안개처럼 지금여기를 배회하고 있다. 사회단체는 단체대로 덧칠한 자신의 색깔이란 깃발을 나부낀다. 인문과 사회를 발라낸 과학처럼, 과학뿌리가 없는 사회와 인문의 그림자처럼 지역은 공배수와 공약수를 찾지 못한 채 자신의 길만 길이라고 주장하며 거리에 나서고 있다. 시민들은 갈길을 잃은 채 인문의 향기가 나는 곳으로만 냄새에 이끌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기만 할 뿐이다.

 

문과출신은 과학을 모르쇠로만 일관하고, 이과는 사람의 결인 인문을 등한시하는 현실은 사회단체의 모습과 흡사하다. 다른 단체와 색깔을 섞지 못하며, 딱딱한 관성에 경직된 모습으로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한다. 단체와 단체로서 예의를 갖출 뿐, 삶과 일상이 녹아 겹치지 못한다. 사회단체는 여러 지구적변화와 근간이 되는 과학기술의 기초를 협동조합 근황만큼 궁금해야 한다. 여러 기술이 지금 여기만 합당한지 살펴보지 말고 저기로 기웃거려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연구의 단초에 대해 첫걸음으로 다시 고민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시민참여의 다양한 형태인 합의회의, 시나리오 워크숍, 시민배심원, 시민자문위원회, 규제협상, 포커스 그룹 등으로 지금여기의 의제와 참여를 활성화시키는 일부터 진행하며 접점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지금 여기, 금융공황의 경제적 위험 속에 살고 있는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거기에 부여잡힌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명확한 것은 나의 옆에 너가 있다는 사실이며, 나-너 가 움직이며 활동하는 삶터, 지역이 있다는 사실이다. 제 각기 앎들과 삶을 연결시키려는 희망 또한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내가 보는 눈으로만 볼 수 없으며, 네가 보는 관점으로만 보기에도 너무도 뚜렷한 한계가 있다.  세상은 내가 사는 삶으로만 살기에는 너무도 재미없고 보람도 없으며, 네가 사는 삶으로도 너무도 큰 한계가 있다. 좀더 다른 관점, 좀더 다른 일상, 좀더 다른 지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떠나야 스스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반경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불확실성과 위험 앞에 서로 평등하게 서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세세함과 꼬치꼬치란 연구자의 자세는 인문사회과학은 자연이공계 과학자들과 겹친다. 세상을 파고들며 일상으로 끌어내려는 노력과 열정은 대동소이하다. 나름대로 골방에서 나와 일상과 삶을, 사회적 활동을 겹치려는 노력이 유달리 필요하다. 제도권 안과 밖, 곁을 넘나드는 실험적 시도, 모색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 지금 여기 섬처럼 떨어져 있는 가교를 잇는 방편으로서도 발라낸 과학이 아니라 여기저기 묻혀있는 공약수와 공배수의 과학으로 거듭나야 너도 나도 산다.

 

 

맺는 말

 

 

지금까지 과학은 자본을 쫓거나, 자본을 쫓아가기만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으려했고,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중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이는 것에만 열광했다. 돈에 연루된 과학의 그늘, 그 무리지은 위험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지 않았다. 그 위험들은 통제되지 않고 통제시킬 수 없는 단계까지 와 버렸다. 지금. 여전히 늦은 것인가? 아니다. 과학은 드러나지 않는 곳을 비추고 어루만지는 과학으로, 자본을 쫓기만 얼굴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맹목적인 대중화가 아니라 사람의 결을 살피는 인문의 과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대상을 발라내는 과학이 아니라 부문의 경계을 넘고 너머 스며드는 과학으로 위상을 달리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과학은 과학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이며, 정치적인 문제이며, 저기와 지금여기의 삶을 다루는 장이다.  그래서 그 물길을 자본만으로 향하지 않게 해야된다. 거대과학에만 복무하게 해서도 안된다. 지역에서 새로운 대안과 사회적 실험의 고리를 찾아야 한다. 부문과 부문을 이어주며 새로운 에너지와 새로운 삶의 결을 제시해줄 수 있는 바탕이 되어야 한다. 결국 과학도 제자리에 설 수 있는 인문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과학이란 더깨가 씌워져 있는 낡은 옷을 던져버려야 한다. 과학기술은 절대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삶을 부여잡고 있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야생동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까지 삶과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임을 여기저기서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돈만 따라가느라 당신들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던 것이 보이지 않는가? 그 편리함의 이면에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불편함들의 배후가 어디까지인지... ...

다 보셨나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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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_과속방지턱이 품고 있는 함의...
    from 木筆 2013-08-26 17:37 
    27 지속가능한 교통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지하철,철도, 전차, 승용차, 에너지 공급시스템, 도로교통 시스템, 환경 안전성 평가 기술 등과 같은 '기술시스템'과 보험제도, 환경규제, 라이프스타일, 교통수단 소유방식, 노사관계 등과 같은 '사회시스템'이 동시에 구축되어야 한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은 그것을 위한 새로운 사회 기술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51 돌봄 서비스의 질을 제고하는 연구개발사업에서 이루어지는 사회-기술기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