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자, 살피자, 생각하자

미래가 보내는 징후

 

그러나 지켜보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대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장 33-37절)

 

역사의 해석

 

"과거는 문학 텍스트 속에 빛에 희해 감광건판 위에 새겨지는 상에 비유될 수 있는 자체의 이미지를 남겨놓는다. 미래만이 그러한 음화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효력을 가진 현상액을 갖고 있다." 월가점령시위, 아랍의 봄, 그리스와 스페인에서의 시위 같은 사건들은 그렇게 미래에서 보내온 징후로 읽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맥락과 기원을 바탕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역사주의적 관점을 뒤집어야 한다. 급진적인 해방적 분출을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들을 과거와 현재의 연속선상에서 분석하는 대신, 미래의 관점을 적용하여 현재에는 숨겨진 잠재성 있는 유토피아적 미래의 제한되고 왜곡된(때로는 심지어 도착적인) 파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29

 

코츠는 자신이 묘사하는 모든 중요한 유형의 소시오패스에게서 구원적인 특징을 찾아낸다. '책략가'유형은 친구를 골탕 먹이려는 계략을 세우며 어린애처럼 순순한 즐거움을 드러낸다. '야심가'는 특출난 창의성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가차없이 목표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표출한다. '집행자'의 형사 맥널티와 [24]의 바우어는 행복을 추구하는 일상생활보다 더 중요한 목표에 헌신한다. 이 세가지 특징을 조합하면 진정한 혁명가의 완벽한 모델이 되지 않을까? 즉 대의를 위하여 인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일을 하는 데 창의적으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자신의 행동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껴 희생적인 마조히즘의 모든 흔적을 털어내는 사람 말이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잭 바우어의 헌신과 스트링어 벨의 창의적인 실용정신, 그리고 호머 심슨의 심술궂지만 천진난만한 기쁨이 결합된 주체다.  226

 

오늘날 복지국가의 정수를 구하고 싶다면, 20세기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향수를 버려야만 한다. 스로터다이크가 제안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문화적 혁명이자 급진적인 심리 사회적 변화로, 오늘날 착취당하는 생산자 계층은 더 이상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상)층계급이라는 통찰에 기반을 둔다. 중(상)층계급은 무거운 세금으로 국민 다수의 교육, 건강 등의 재원을 대는 진정한 '기부자'라는 것이다....시민은 자신의 소득 일부를 국가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날 때부터 국가에 빚을 진 존재처럼 취급받는다......부자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기는 대신, 자발적으로 자신의 부를 어는 정도나 공공복지에 기부할지 결정할 (법적) 권한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세금을 급격히 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기부자가 스스로 어디에 얼마를 기부할지 결정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작은 여지라도 열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작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점차 사회 결속력의 근간이 되는 사회 전체의 윤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203-205

 

지젝의 세상을 바꾸는 제안

 

절대의 관점으로의 반성적 후퇴는 비활동으로의 철수를 수반하지 않고, 급진적인 변화의 공간을 열어준다. 핵심은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 자체, 그 기본 좌표를 바꾸는 것이다. 장 뤽 고다르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만 모든 것이 그대로 남는다."라는 말을 뒤집어 언젠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지게 하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혁명화가 요구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역동성 같은 일부 정치적 성좌에서는, 어떤 것도 바꾸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한 변화의 주체다. 변화의 원리 자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사회주의자이냐는 질문에 그는 스스로 자본주의가 유일한 게임의 규칙이라고 믿는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마르크스주의자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가 대규모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비극적인 세계관이 이 개혁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적 비전과 모순되지 않을까?.......우리는 오늘날 '전면적인 경제 불황'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전망이 진정한 집단적인 반체제주의를 야기할까?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이먼의 비극적인 비관주의를 완전히 수용하고 (시스템 내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200-202

 

제로-영점의 통과

 

모든 것을 의미하는 존재의 핵심까지도 포기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며, '세상의 끝', 세상이 계속 돌아가게 만드는 에너지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사태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는 영점으로 돌아갈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급진적 변화로 전진하기 위해, 우리는 시스템을 계속 존속시킬 뿐인 저항 행위를 중단하는 영점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이상한 종류의 해방에서, 우리는 남들의 우려에 대해 걱정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순환적인 자기 파괴적 운동의 소극적 관찰자 역할로 물러나야 한다.......우리가 진정한 변화를 보기 바란다면 우리의 걱정과 관심은 우리의 주된 적이 된다. 우리는 상황을 좀 더 개선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시스템의 관성에 저항해 작은 싸움을 벌이기를 중단하고, 대신 다가올 더 큰 전투를 위한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197-199

 

장치 자체의 파열

 

딜레마를 탈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장치에 대한 저항'이라는 패러다임 전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장치는 자아 행위의 그물망을 결정하지만, 동시에 주체의 '저항'을 위한 공간, 주체가 장치 자체를 (부분적이고 주변적으로) 허물고 옮겨갈 수 있는 공간을 개방한다. 해방정치의 과제는 다른 곳에 있다. 주변부의 주관적 입장에서 지배적인 장치에 '저항'하는 식의 전략을 확산하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장치 자체 내에서 가능한 파열 양상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의 현장'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비록 당장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때로는 우리가 저항하는 장치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3-194

 

표현의 도약

 

마르크스도 [자본론]의 유명한 구절에서 상품의 교환과 순환의 감춰진 논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의인법에 의존한다. "만약 상품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는 인간들에게 관심사일지는 몰라도 물적 존재로서의 우리에게는 속하지 않는 것이다. 물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다. 상품으로서 우리가 교환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단지 교환가치로만 서로 관계를 맺는다." 우리도 의인화된 오페라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상품을 교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상품 자체가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를?

 

코페르니쿠스적 시 - 이 세계가 과연 코페르니쿠스적 시와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습관을 발전시킬지를 상상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고찰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른 해돋이' 대신 '이른 지구 이동'이라고 말하고, 데이지 꽃을 올려다본다거나 별을 내려다본다고 예사롭게 말할 날이 과연 올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신화가 될 만한 실로 수많은 거대하고 환상적인 사실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85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전체를 어떻게 예술로 재현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언제나 궁극적인 범인은 전체가 아닐까? 현대의 비극이라고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 그 답은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실재가 추상적이고, 자본의 추상적 가상적 운동이며, 실재와 현실의 라캉식 차이를 동원하자면, 현실이 실재를 가린다는 것이다. '실재의 사막'은 자본의 추상적인 움직임이고, 마르크스가 말한 '실재적 추상'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그저 실제를 암시할 뿐이다. 실재는 너무 힘이 세다."

 

국가 관료제의 기본 기능은 그 자체의 재생산이지 사회 문제의 해결이 아니고, 심지어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문제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관료제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자 관료주의적 질서에 대항하는 가장 대담한 음모는 관료집단이 처리해야 할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자체도 이와 똑같지 않을까?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추동력 역시 기존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확대재생산이 용이하도록 새로운 수요를 계속 창출하는 것이다.  172


어떻게 바꿀 것인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들!

 

대중은 아직 제기되지 않은 질문의 답을 알고 있고 벽보다 오래 살아남을 능력이 있다. 질문이 아직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러자면 진심으로 와닿는 용어와 개념이 필요한데 민주주의, 자유, 생산성 등 현재 사건들을 명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곧 새로운 개념과 더불어 새로운 질문이 대두할 것이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질문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니까. '곧'이라면 언제? 한 세대 내에. john berger166

 

'자유선거'와 진정한 해방적 반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식으로 표현하자면,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일반의지를 구현한 것은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이었다. 또 월가점령시위에서도 사실상 '99퍼센트'를 대변하며 제도적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한 것은 주코티 공원에 모임 소수의 군중이었다. 물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떻게 민주적 다당제 체계를 넘어 집단적 의사결정을 제도화할 수 있을까? 또 누가 이 재발명의 주역이 될 것인가? 잔인하게 말하자면, 당장 오늘 무엇을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그것을 아는 주체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장님이 장님에게 길을 안내하는, 좀 더 정확히는 장님끼리 길을 안내하면서 서로 상대방은 볼 수 있다고 믿는 교착상태인 것일까? 아니다. 각자 모르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중은 답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신들이 답을 가진(혹은 스스로가 답인) 질문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165

 

민주주의적 환상

 

마르크스는 자유의 문제를 고유의 정치적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국가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는가? 사법부가 독립적인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가? 인권이 존중되는가? 등) 실제 자유의 핵심은 오히려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혁이다. 우리가 소유구조나 직장 내 관계 등을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 것은 그 문제들이 정치적 영역을 벗어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급진적 변화는 법적 '권리' 등의 영역 밖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반자본주의적 성향이 아무리 급진적이라도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늘 민주주의 기제를 적용하는 틀 안에서 해법을 모색할 것이다....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161

 

탈정치적인 전문가 통치에 대한 거부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지배적인 경제 조직체 대신 무엇을 제안할지 고민하고, 대안적인 조직 형태를 상상하고 실험하며, 현 체제 속에서 새로운 조직의 싹을 발굴하기 시작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단순히 시스템을 멈춰 세우는 대중 시위의 카니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 역시, 무엇보다도 새로운 형태의 조직, 규율, 고된 노력을 의미한다. 레닌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간에, 그는 새로운 형태의 규율과 조직의 시급한 필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153

 

자본주의라는 짐승

 

자본주의는 의미를 탈전체화한 최초의 사회경제적 질서다. 의미의 차원에서는 전혀 세계적이지 않다. 결국 세계적인 '자본주의 세계관'이나 고유한 '자본주의 문명'이란 없다. 세계화의 근본적인 교훈은 바로 자본주의가 기독교에서 힌두교나 불교에 이르는, 또 서에서 동에 이르는 모든 문명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세계적 차원은 오로지 의미 없는 진리의 층위에서만, 글로벌 시장 메커니즘이란 실재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110

 

사회가 잘 조직화된 합리적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비합리적' 폭력이라는 추상적 부정성이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2011년 영국 폭동에서 시위자들은 어떠한 요구도 내걸지 않았다. 우리가 목격했던 것은 영도의 저항이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폭력이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돕겠다고 나선 사회학자, 지식인, 논평가들을 보고 있자니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시위를 그들에게 익숙한 용어로 번역하려는 필사적인 노력 끝에 그들이 거둔 유일한 성공은 폭동이 제시한 주요 수수께끼를 교란시킨 것뿐이었다.

 

오늘날 영화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아랍계 테러리스트와 각종 범죄자나 반영웅들 뿐이고, 디지털 기술로 고전 영화에서 담배를 지우는 방법까지 논의되어왔다. 이 새로운 금기 자체가 윤리학의 위상이 크게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헤이스규약은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춰 성적 사회적 규약을 강요했지만 새로운 윤리학은 건강에 초점을 둔다. 이제는 우리의 건강과 복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악인 것이다. 103

 

오늘날 우리는 생태자본주의부터 기본소득자본주의까지 자본주의를 순치하려는 수많은 공세 속에서 살아간다....우리의 목표는 이윤을 추구하는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글로벌 복지와 사회 정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를 조정하고 규제해나가는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와 정의를 고수하는 원칙주의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보통 그러하듯, 선의로 시작하여 조만간 두 가지 차원의 적대라는 실재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자애로운 사회적 규제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엔가 우리는 숙명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자본주의라는 짐승과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일까? 아무리 자본주의가 생산적이라고 해도,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43-44

 

특권을 누리던  '봉급 부르주아'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이는 오늘날의 수많은 파업에서도 이러한 환상이 도착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시위는 프로레타리아적 시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할 위험에 저항하는 시위다. 달리 말하면 정규직을 얻는 것 자체가 특권인 요즘 상황에서 감시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경찰, 사법관계자, 교사, 대중교통 근로자등 주로 공무원직에 근무하여 직업이 보장된 특권층 노동자일 것이다....봉급 부르주아 하위계급이 프로레타리아로 전락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최고경영자와 은행가들이 과도할 정도로 높은 보수를 받는다. 미국에서 실시된 조사에서 입증되었듯이, 이러한 보상은 기업의 성과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경제적으로 불합리하다. 이러한 추세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가 더 이상 자기 통제적인 안정성의 내재적 적정수준을 찾지 못한 채 점차 통제 불능의 상태로 치닥고 있다는 신로로 읽어야 할 것이다.35-37

 

마르크스의 해답에서 벗어나기-사회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는 구조적 불균형이 그 특징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적대는 자본주의가 등장할 때부터 있어왔고, 더군다나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자기 혁명과 자기 확대로 이끌어온 원동력이다. 자본주의는 미래로 도피하여 구속을 벗어나기 때문에 번영한다. 또 인류는 "언제나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라는 '현명하게' 낙관적인 생각을 버려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틀에서 벗어나려면 현대 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한다. 첫째, 이윤 추구에서 지대(주로 사유화된 '공유지식'과 천연자원에 기초한 두가지 형태)추구로 전환되는 장기적 추세다. 둘째, 더 오랜 기간 '착취'당하는 일이 오히려 특권으로 인식되면서 실업의 구조적 역할이 한층 더 강화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은 장 클로드 밀네가 '봉급 부르주아'라고 부른 새로운 계급의 부상이다.  28-29


기  타

 

유럽은 대체로 글로벌 자본주의 발전의 규제자역할을 하고 때로는 보수적인 전통의 수호들과 영합하기도 한다. 둘 다 유럽이 주변화되고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지름길이다. 이 교착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의 급진적이고 보편적인 해방의 유산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단지 타인에 대한 관용을 넘어 진정한 공존과 다양한 문화의 혼합을 영속시킬 수 있는 적극적이고 해방적인 지배문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지배문화를 위한 다가올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타인을 존중하지 말고, 그들에게 공동의 투쟁을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를 가장 크게 압박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95

 

국가가 대표할 만한 잠재적 대상 가운데 레닌이 하나 빠트린 것은, 모든 경제 정치적 권력을 지닌 수백만 명의 막강한 기관, 바로 국가(기구) 그 자체였다. 라캉이 "내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다. 폴, 에르네스트, 그리고 나."라고 인용했던 농담처럼, 소비에트 국가는 세 계급, 즉 영세농, 노동자, 그리고 국가 자체를 대표했다. 레닌은 '경제적 토대'안에서 그 핵심요인인 국가의 역할을 간과했다. 모든 사회적 통제 기제로부터 자유로운 독재 국가의 성장을 막기는커녕 방치함으로써 국가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공간을 열어주었다. 국가가 외재적인 사회적 계급은 물론 국가 그 자체까지 대표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만 누가 국가 권력을 보유할 것인가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다.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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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성석제의 음식이야기다. 채식주의자의 사연이 끌린다.


 

[오! 당신들의 나라] 에런라이크, 툭하면 구조조정하면서 게을러서 실업자 된다고 말하는 친절한 그들/말끝마다 실적 따지더니 회사 주가 떨어져도 챙길 건 챙기는 대범한 그들/불법 체류자들 때문에 실업이 는다면서 집에서 불법체류자 부려먹는 평등한 그들/가난한 아이들 무상 진료는 막으면서 애완견에겐 항암치료 시켜 주는 다정한 그들/ 사근사근 웃으며 대출 권할 땐 언제고 이젠 집 빼앗아 가는 냉철한 그들/전용기 타고 캐비아 먹으면서 임금이 올라 경제가 이 모양이라는 똑똑한 그들.


 

[패션의 탄생] 패션사를  화악!! 느끼게 만들 책

 

 

 

 

 

뱀발.  간식을 챙겼다. 잡지같은 책들로 골라  간지처럼 읽는다. 패션 인물사는 한번 본적이 있다. 일일이 손길이 간 강민지라는 저자의 패션이 눈길을 끈다. 열정도 그렇고 아껴서 봐야겠다.  긍정의 배신의 저자의 에세이집도 기대된다. 서문에 강렬함으로 어퍼컷의 묘미가 감칠 맛이겠다 싶다.  사당동 더하기 25는 추천받고 사둔 책인데 보기를 주저하고 있다. 책사이 영상 CD부터 보려는데 영상만 뜨고 소리가 나지 않아 대기하고 있다. 시간에 강한 연구. 시간에 흔들리지 않는 일들. 묵묵히 버텨내는 삶의 단면이 두툼할 것 같다. 묵직한 책들 사이, 도서관에서 잠깐 빌린 책들이 그나마 들숨, 날 숨 한모금을 줄 듯 싶다. 기대되는 며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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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본주의의 단계는 한편으로 생산력의 고도화에 의해 리니어한 발전을 함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적'인 단계와 '제국주의적' 단계가 서로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형태를 취한다. 388-399

 

생산지점에서 노동자는 경영자와 같은 의식을 가지기 때문에 특수한 이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예를들어, 기업이 사회적으로 유해한 것을 하더라도, 노동자가 그것을 제지하거나 고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엇다. 생산지점에서 노동자가 보편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은 어렵다. 그에 반해 예를들어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소비자 주민 쪽이 민감하고, 곧바로 세계시민의 관점에 설 수 있다. 즉 노동자계급은 제3국면에서 보편적 '계급의식'을 갖기가 용이하다고 해도 좋다.....소비자란 프로레타리아가 유통의 장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비자운동은 바로 프로레타리아운동이고, 도 그와 같은 것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시민운동이든 마이너리티나 젠더 운동이든 그것들을 노동자계급의 운동과 다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411-412

 

마르크스주의자는 마르크스가 프루동을 비판했기 때문에, 유통과정에서의 대항운동을 경시해왔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본에 대항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은 역시 유통과정에 있다. 그것을 통해 자본이 이윤추구를 위해 범하는 많은 잘못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비판하고 시정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그것에 의해 비자본제적인 경제를 스스로 창출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비자=생산협동조합 및 지역통화, 신용시스템 등의 형성이 그것이다....자본은 자기증식을 할 수 없을 때, 자본이기를 멈춘다. 따라서 언젠가 이윤율이 일반적으로 저하되는 시점에서 자본주의는 끝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전 사회적인 위기를 분명히 초래할 것이다. 그 때 비자본제경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이 그 충격을 흡수하고 탈자본주의화를 돕는 일이 될 것이다.....생산과정에 대한 과도한 중시와 유통과정의 경시가 자본의 축적과정에 대응한 대항운동을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정하는 데에는 좀 더 근본적으로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에서 보는 시점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412-413

 

1990년 이후 상황 하에서 칸트, 헤겔, 마르크스라는 고전철학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재검토하는 것은 액추얼한 문제이다. 이 경우 우리는 칸트는 헤겔에 의해 극복되고, 헤겔은 마르크스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통념을 배척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칸트를 각지의 자본과 국가에의 대항운동이나 코뮌이 나누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시 읽어야 한다. 42

 

뱀발. 1.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본다. 서문에 학문에 대한 이력에 대해 상세히 서술해 지난 기억을 살펴볼 필요까지는 없다. 책날개에는 세계동시혁명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뒷표지에는 서문의 한단락이 올라와 있다.

 

'세계동시혁명'은 항상 주창되었지만, 그저 슬로건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 동시혁명으로서만 가능하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 세계동시혁명이라는 신화적 비전은 지금도 남아있다. 예를들어, 다중의 글로벌한 반란이라는 이미지가 그 일례이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끝날 것인가는 빤히 보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계동시혁명이라는 관념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다른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지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이 책은 교환양식을 통해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새롭게 봄으로써 현재의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전망을 열려는 시도이다.

 

 

 

 2. 레미제라블을 본다. 아카데미 벙개 뒤풀이의 기억만 어렴풋하다. 바리케이트의 저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을까라는 문자다. 바리케이트의 저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없다. 아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혁명이 가능할까? 혁명이 불가능할까? 어떤 혁명? 혁명은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이어진다고 했지. 아리기를 비롯한 거시 역사학자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가 반복한다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몸으로 맞서 있다.

 

3. 그 혁명이 아니고, 그 바리케이트가 아니다. 장발장이 피고인을 살리자니 자신이 죽고, 자신이 살자니 피고인이 죽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현실이다. 자베르가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안개같고, 지난 가치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지난 것으로 아무런 추측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지금여기이지 않을까?

 

4. 칠흙같이 어두운 밤, 지난 서사의 지식과 가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다 버리고 온몸으로 발로 더듬고 확인하며, 느릿, 더디, 꼼꼼이 가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론의 촛불이 스며나오는 것도 어쩌면 지난 것을 잇지 않고 지우려하는 노력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가정하에서 시작하는 것이 역사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 잣대를 지금 여기에 가는 길만큼 비추어보는 일부터 시작이지 않을까?

 

5. 역사가 가두어놓은 낡은 그물을 거두는 일. 이론이 가는 길과 몸이 그 희미한 촛불에 여운을 기대며 가는 일들. 이론은 독이자 꿀이다. 독인지 꿀인지 알 수 없다. 궤적이 말할 수 있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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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자, 살피자, 생각하자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좌파는 아직 철저하게 바닥까지 떨어지는 위기를 맞지 않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제 친구 알랭 바디우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바디우가 레닌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죠.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말은 20세기 이래 지속되어온 좌파가 비록 영광스러운 순간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절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중략) 문제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종말을 향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중략) 1990년도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모든 사회적 모델들, 즉 공산주의 국가형태, 조금 완화된 사회민주주의 형태, 직접 민주주의 모델 등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 모든 것을 새롭게 사유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완전히 새로운 자본주의를 생각해야한 합니다...(중략) 오늘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란 다소간의 불교적 색체가 깃든 쾌락주의입니다. "너 자신을 실현하라. 실험하라. 만족하라. 삶을 만끽하라" 등의 것들은 오늘날 일반화된 쾌락주의입니다. ...고정된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31-133


정치적 올바름과 나르시시즘적 경제논리

 

섹스는 할 수 있지만 사랑은 하지 않는다. 열정적인 애정은 없으니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등. 우리는 마치 3-4세기에 쇠퇴해가던 로마 제국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이것은 매우 슬픈 것이죠. 윌리엄 예이츠의 유명한 시구가 생각납니다. 자신의 시 the second coming에서 그는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있다"고 말했지요. 오늘날 정치에 있어 우리는 어디서 열정을 찾을 수 있습니까?  138

 

이방인의 시선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외국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얼마나 어리석은 의식을 갖고 있느냐며 말이다. 그러고는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만약 우리의 오래된 사회규범 또한 외국인의 눈으로 보게 되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보편적 선을 향한 유일하게 훌륭한 길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볼 때, 이방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고 또 상상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인류에게 가장 훌륭한 사유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97

 

당대의 이론적 문제

 

오늘날 '인간됨'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전자 조작이나 생태계 파괴 등은 인간됨에 대한 근본 개념을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인간됨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게 할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물리적 정신적 속성을 변화시키고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한계를 넘어서 큰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보다 더 종속적인 존재가 되고, 더 취약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 할 수 있죠.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에 대한 그 어떠한 윤리적 규준 혹은 지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206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구분에는 아주 분명한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측면을 하나의 추상적인 문제로 합칠 수 있다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 사유의 궁극적 과제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한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207

 

불/가능한 것의 경계흐리기

 

냉소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맞아. 30년마다 혁명적 봉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도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어. 그러니 우리는 결국 다시 돌아가야돼"라고 말이죠. 예를 들어, 오늘날 프랑스의 어느 보수주의자도 "나도 68혁명 현장에 있었어. 나 또한 물론 시위를 했지. 하지만 후에 나는 현실주의자가 되었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사유의 방식을 재정의하는 것, 그리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재사유하는 것 말입니다. 209


 

"공동선은 단순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성질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궁극적 선은 무엇인가? 이는 물론 배제된 자들의 정치-사회적 침입과 복원이다. 지젝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급진적 좌파는 이 세계에 배제된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결단을 이미 내린 상태이다. 자본주의적 삶에서 최상의 선은 물질적 삶의 안정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표면적인 정치적 담론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은 손대지도 못하고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투쟁 정도로 '정치적 올바름'을 어설프게 소비할 뿐이라고 지젝은 비판한다. 그렇기에 지젝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통해서 진정한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할 수 있으며, 그것을 시도하는 정치-사회적 행위야말로 새로운 선의 범주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1990년 이후의 모든 것은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며, 대의를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새로운 선, 다시 말해 새로운 대의를 찾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과업이라고 말한다. 선악의 초월이 아니라 도덕적 다수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이론 작업과 실천 행위야말로 오늘날의 좌파가 당면한 과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선은 해답이 아니라 "문제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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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자, 살피자, 생각하자

사색의 삶

 

깊은심심함 - 향기를 시각화하는 데는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사색의 능력이 반드시 영원한 존재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34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백치가 보통은 계산기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 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한다.52


 

성과사회의 피로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66

 

눈 밝은 피로, 근본적 피로, 우리-피로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짧고 빠른 과잉 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저 길고 느린 형식의 주의 말이다...."매일 저녁 여기 리나레스에서 나는 많은 꼬마 녀석들이 노곤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사물들은 반짝이고 어른거리면 가장자리가 흔들린다. 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그렇게 우리는 - 내 기억으로는 늘 밖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 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피로의 구름이, 에테를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있었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 평화의 시간이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우울증의 메카니즘

 

오늘난 성과주체가 앓는 우울증 등의 질환은 이렇게 내면화된 타자와의 갈등관계 또는 양가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우울증에는 아예 타자의 차원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소진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거니와 이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오히려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파괴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과잉 자기 관계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94

 

 

결코 저항적일 수 없는 가상공간,SNS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다. 실재가 무엇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가상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러한 실재를 지워나간다. 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다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95

 

유대란 중력이 없는 우울증

 

과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강력한 유대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슬픔은 대상과의 강력한 리비도적 유대관계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그 점에서 우울증과 구별된다. 반면 우울증은 대상이 없고 따라서 지향점도 없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와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의 체험 뒤에 온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그나마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도 없다.96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

 

투쟁이 집단, 이데올로기, 계급 사이에서가 아니라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성과주체의 위기에 그렇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문제는 개인 사이의 경쟁 자체가 아니고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이다. 그로 인해 경쟁은 절대적 경쟁으로 첨예화된다.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인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101

 

자학으로 이상자아

 

복종적 주체가 초자아에게 예속된다면, 성과주체는 자신을 이상 자아에게 기투한다. 예속과 기투는 상이한 두 가지 존재 양식이다. 초자아에게서는 부정적 강제가 발생한다. 반면 이상 자아는 긍정적 강제력을 발휘한다. 초자아의 부정성은 자아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이상 자아를 향한 기투는 자유의 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만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 자아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진다.102

 

 

 

성과사회의 폭력성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시켜 프로젝트가 된다. 하지만 주체(예속)에서 프로젝트 전환으로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자에 의한 강제가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로 대체될 따름이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103

 

아감벤의 호모사케르와 비교

 

성과사회의 한복판에서 아감벤은 주권사회를 기술하고 있다. 아감벤 사상의 시대착오적 성격은 여기서 기원한다. 그가 추적하고 폭로하는 폭력은 오로지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정성의 폭력에 국한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에 특징적인 긍정성의 폭력, 고갈과 포섭으로 표출되는 폭력은 아감벤의 시야를 벗어난다. 그는 이미 낡게 느껴지는 부정성의 세속화된 형식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까닭에 긍정성의 극단적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순응적 합의에서 나온다....자기 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한다. 착취는 지배 없이 관철된다. 여기에서 자기 착취의 효율성이 생겨난다....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성과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된다. 자기 자신의 주권자, 호모 리베를 자처하는 성과주체는 호모 사케르임이 밝혀진다.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109

 

활동과잉 인간에 대하여

 

니체라면 활동과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가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112

 

 

벌거벗은 건강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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