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그 어리석음의 뿌리

1.


 

아마 이 책을 보지 못하고 죽었더라면? 후회막급할 것 같다.   절판을 핑계로 읽지 못하고, 짧막한 소개서만으로 지나쳤다면 시간에 바래 잊혀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재발간(4쇄)되어 저렴?한 가격에 인류가 쌓아놓은 금자탑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뭉클하기까지 하다. 솔직한 심경..... 처음부터 호들갑을 떠드는 이유는 나름대로 다짐이다. 헛갈리는 개념때문에 아직 정의수준에도 범접하지 못하고 있는 초라함때문이다.

 
노예제도 안에서는 노예가 사람이 아니었다. 시민의 자유는 이러한 당연함때문이다. 농노역시 결혼은 물론 생사는 귀족과 영주에게 있었다. 귀족의 자유로움과 풍족함은 여기에 연유한다. 바이올린 1주자. 2주자 하인들로 악단을 조직할 수 있는 풍부함과 가정교사를 입주시켜 가르치는 풍유로움은 지금을 넘어선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하인은 태형은 물론 결혼도 마음대로 시켰다. 똑 같은 인간인가? 아니었다. 소유는 선점으로 때론 땀과 노동으로, 또는 시간의 제한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유는 도둑질이다라고 한다.


소유에 절어있는 우리가 어떻게 이 책 한권으로 그 소유의 인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정신나간 얘기 아닌가? 노예는 잘못되었다고 당신은 이제 확신한다. 그런데 소유제도가 노예제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해본 적이 있는가? 없어져야만 되는 것이란 말이다. 논리상의 모순이 없다. 노예도, 농노도 당신은 풀어주지 않았는가? 왜 소유가 도적질이 아닌가?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는데, 노예는 자유이자 인간이란 말을 어찌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피와 살육, 전쟁의 파고가 있고 나서야 아주 조금 그래 노예도 인간이야라는 신음이 새어 나온다. 저자는 연구보고서의 머리말에는 기관의 지원을 충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곧 물의를 일으키게 되고 한 교수의 도움으로 겨우 면책을 면하게 된다.

 

2.


공기를 소유할 수 있는가? 바다에서 생선을 잡아 소유를 주장하지만 그 바다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점유를 할 수 있지만 소유를 할 수 없음에도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합당한가라고 되묻는다.  쓸데없는 이유를 가져다붙임으로 그 사유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온갖 반론을 각오하고 그 근원을 다시 문제삼는다. 이 근거는 평등에 있다. 

 

2.1

 

캐캐묵은 문명의 종말이 다가왔다. 새로운 태양 아래서 지표면도 새로워질 것이다. 한 세대가 사멸하도록 내버려두자. 노쇠한 독직자들이 사막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자. 거룩한 대지가 그들의 뼈를 덮지는 않으리라. 세기의 부패에 격분하고 정의의 열정에 목마른 젊은이여. 만일 그대가 조국을 사랑한다면, 만일 인류의 복지를 염려한다면, 자유의 대의를 과감히 껴안아라. 그대의 낡은 이기심을 벗어 던지고 갓 태어난 평등의 도저한 물결에 몸을 맡기라. 그 물결에 잠긴 그대의 영혼은 지금껏 몰랐던 정기와 활력을 얻으리라. 그대의 유약해진 천성은 억누를 길 없는 활력을 얻으리라. 이미 시들어버린 그대의 마음은 아마도 다시 젊어지리라. 맑아진 그대의 눈앞에서 모든 것이 면모를 일신할 것이다. 새로운 감정들이 그대에게서 새로운 관념을 낳을 것이며, 종교, 도덕, 시, 예술, 언어 등이 더 장대하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대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신념을 확신하고 심사숙고 끝에 더욱 열정적이 되어 보편적 갱생의 여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대, 사악한 법률의 슬픈 희생자, 빈정거리는 세상에 의해 헐벗고 두드려 맞은 그대, 결실 없는 노동과 희망 없는 휴식에 지친 그대여, 용기를 잃지 말라. 그대의 눈물은 보상을 받으리라. 아버지들이 고통 속에서 씨를 뿌렷으니, 아들들이 환희 속에서 그것을 거두리라.

 

아아, 자유의 신이여! 평등의 신이여! 내가 이성에 의해 깨닫기전에 이미 나의 마음속에 정의의 감정을 심어준 신이여,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가 지금껏 써내려 온 것을 내게 불러준 이가 바로 당신이오. 당신은 나의 사상을 만들어 주고 나의 연구를 지도하였으며, 나의 정신을 호기심에서, 나의 마음을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소이다. 그것은 내가 주인과 노예 앞에 당신의 진리를 널리 펼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나는 당신이 준 힘과 재능에 의해 말했을 따름입니다. 당신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몫입니다. 당신은 내가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아, 자유의 신이여! 아아! 나에 대한 세상의 기억을 지워주소서. 인류가 자유롭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마침내 깨우친 인민을 그저 나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서 볼 수 있게 해주소서. 고귀한 교육자들이 인민을 계도하게 하소서. 사심 없는 마음이 인민을 인도하게 하소서. 가능한 만큼 우리의 시련의 시간을 줄여주시고, 오만과 탐욕은 평등 속에 묻어 버리소서. 우리를 예종 속에 가두어 놓은 이 영예에 대한 허망한 욕구를 꺾어 버리소서. 이 가련한 자녀들에게 자유 속에는 어떤 위인도 영웅도 없다는 것을 알려 주소서. 권세자에게, 부자에게, 그리고 내가 당신 앞에서는 절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자들에게 그들의 탐욕이 가져올 공포를 일깨우소서. 그들이 앞을 다투어 회개하게 이끄시고 남보다 먼저 뉘우치는 자를 용서하소서. 그러면 위대한 자든 미천한 자든 박식한 자든 무지한 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애 속에 맺어질 것이며, 모두 함께 새로운 찬가를 부르면서 당신의 제단을 세울 것입니다. 자유의 신이여, 평등의 신이여!  416-418

 

 

3.


이 책의 이론상의 강점은 지금 대부분의 인문사회서적의 주류가 루소,로크,홉스, 마르크스를 바탕으로 되짚고 있는 반면, 사회계약의 본디 관점을 흔든다는 점에 있다. 재산권만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법체계란 현실은 사회계약론의 사고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함을 보인다. 그 현실만 되짚어보더라고 현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기본 체계의 허술함이 나타나고, 애초 그들이 주장한 생명권만 현실과 법에 반영된다라고 하더라고 제도상 이렇게 간접적인 살인이나 자살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에 의해, 왜 살아있는 동안 굶어죽어야 하고, 세상의 분노를 온몸에 안고 죽어야 한단 말인가? 사회계약론자들의 저류에 흐르는 맹점을 파고든다. 뉴턴이든 물리적인 법칙을 통해 세상을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고 통찰을 맛볼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 원리나 법칙 또한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재산권, 소유권, 세상이 아귀가 맞게 돌아가는 기본적인 원리인 평등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따져본다.

 

4.


어쩌면 우리는 조목조목 그 원리에 따라 문제들을 푸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세상의 기둥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주조물이 근거없는 모래위에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화 속의 도시 그리이스 로마를 고고학자가 하나하나 재발견하는 인문의 흔적을 살피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기가 발견한 진리가 이렇게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라고, 분서갱유를 당하는 심경이 어떨지 모른다고 두려움을 안고 글을 쓰는 곤란함이 다가설지도 모른다.

 

 

5.


서로 얘기를 나누고 싶은 것은 아나키스트라는 밑줄과 후세 이론가들이 폄하하는 비평과 평론이 아니다. 행간에 묻어 있는 절절함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 그 치밀한 연구와 설득하기 위한 당당함이다. 학문의 전문성에 전혀 굴함이 없는 학문들 사이를 꿰뚫는 통찰들이다. 그 과정의 결들만 살피고 읽더라도 세상을 해부하고, 조금 미동하게 하는 과학의 날카로움, 그 과학에 기대고자한 노력을 흔적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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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그 접힌 흔적을 남겨두지만 애써 지워버리기로 한다. 책의 한 가운데로 가로지르거나 어느 길로 들어섰는지 잊어버릴만 하면 그 지나온 나무들과 숲을 다시한번 눈치채게 해준다. 책장을 덮고 어떻게 이 느낌들을 펼쳐야 할까 고민하고 있다. 어디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숙제처럼 제출해야 하는 의무감도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갈피와 받은 소회를 남겨두지 않으면 아마 번거로운 수고를 다시 할까 싶기 때문은 아닐까? 백목련은 지고, 자목련의 자태가 조금 정신을 잃을 듯 산발하기 직전이다. 눈치없는 비라도 세차게 뿌린다면 계속 눈길을 줘야 할지 걱정도 되지만 밖의 자색과 핏줄, 안의 뽀얀 흰색은 시선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봄날이다.


세넷은 어떤 점을 늘 염두에 둔 것일까? 몸으로 배운다는 것, 음악을 한다는 기예,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예를 말한다. 몸으로 익히는 과정, 리허설, 듣고 반응하고 다시 되먹임하는 과정들에 명민하다. 맥루한이 소설과 문학에 심취한 문학도였다는 사실이, 매스미디어란 학문의 심급을 뒤흔들어 올려놓았듯이, 줄리어드 음대생의 삶의 흔적은 그가 추구하는 학문과 호흡하여 사회과학 인문과학의 변증법적 정합성을 뒤흔들어 놓는다.  대화적 대화와 감정이입이라? 변증법적 대화가 중앙집중식이거나 이념편향이어서 문제의 소지가 많다는 것이나 공감의 몰입버전이 아니라 순간순간 주체의 갈길에 간섭하지 않는 감정이입을 두드러지게 한다.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좌파의 구별도 그러하다. 좌파의 역사 가운데 중앙집권식의 정치적 좌파는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념적 연대는 물론,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고 시도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적 좌파가 집중의 문제나 실질적인 연대의 문제를 제기하고 상향식의 과정을 도외시 한점을 든다. 몇세기의 역사가 그 상향식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역사에서 배워야 할 사실들을 여전히 잊어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자본주의라는 짐승을 길들이지도 못하면서 끌여온 결과는 무엇일까? 경쟁만이 전부라고 하거나, 철저히 개인을 고립시켜 움츠러들게 만든 결과 사람들은 사회적 해결을 위해 협력이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는지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세상이 울화를 만들어내고, 그 분노는 그대로 거울처럼 자신에게 돌아와 우울이라는 전염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 작금은 현실은 아닌가?


이념형의 진보, 정치적 좌파가 몇세기를 거쳐 그 실패의 싹과 증거를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면, 인류가 실험해봐야 할, 사회적 좌파가 건드리고 검토해보거나 르네상스, 종교개혁, 농노제, 노예제도의 붕괴가 가져오는 변곡점은 정녕 없는 것일까? 씨앗처럼 뿌리내리면서 자라나는 좌파가 챙겨야 할 역사적 맥락와 시연과 리허설고 사회-문화적 좌파의 고리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써넷는 말한다. 미국 사회당 당수 토머스의 삶을 말하고, 누누이 반복해서 예절의 배경과 역할, 의례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당부한다. 의례가 반복되고 작은 시공간을 트이게 만들어 변화가 시작되는 사례를 짚는다. 논리와 이념, 정치적 습속이 아니라 연주 리허설에서 시연을 하고 고개짓으로 다시 고칠 것을 요구하는 과정을 미세하게 들여다볼 것을 조율한다. 구직을 원하는 중년의 구직자를 위해 카운셀러가 갖고 있는 카드는 구직자의 처지에 따라 침묵의 카드부터 백여개도 넘는 디테일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정녕 다시 돌아봐야하는 것일까? 역사에서 잊고 있던 큰 장면들은 어떠한가? 일상에서 협력이 되지 않거나 미쳐 듣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보수적인 팩트의 현실로 가는 길조차 모르는 것은 어떤 이유때문일까? 정치적이란 말과 사회적이란 말을 구분할 수 있는가? 변증법적 관계와 대화적 관계로 변화가 현실의 꼬인 매듭을 풀 수 있을까? 그가 말하는 감정이입과 공감의 버전의 차이가 아직 낯설다. 야생의 동물같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부드럽게 시작의 물꼬를 다시 놓으므로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저자의 말을 믿어도 될까? 늘 사회나 곁을 빼놓고 사고하는데 익숙해진 우리 자본주의인간이 불쑥 도움을 청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문화적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정치적 권력만 잡게 되면 바꾸는 건 순식간이라고 하는 엘리트주의 천지인 현실과 정치의 오만함을 어떻게 숨죽이고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풀릴 듯한 생각들도 다시 접혀진다. 나는 혼자다. 아직도 곁의 너-나-의 촉수가 자라지 못해서 일까? 저자의 책이 관념덩어리로 혼을 잠시 빼내어서 흔들리는 것일까? 그래도 읽지 않는 것보다 읽고 느낌을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도 인문서치고는 술술 잘 읽히는 편이다. 당신의 건독을 빈다. 그리고 작은 느낌이 피고, 그 느낌을 봄꽃처럼 술 한잔에 나누고 털고 싶다. 게 중 하나의 꽃씨라도 척박한 토양에 떨어지면 좋겠다. 꽃이 피든말든, 새싹이 자라든 말든.....한잔 술 건배하자

 

투게더 책갈피 !! 

 

브뤼노 라투르는 어느 의미심장한 구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라는 것이 그 자신이 만든 테크놀로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홀바인 이후 거의 4세기가 지났지만 탁자 위의 도구들은 여전히 신비스러운 대상물이다. 협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라투르의 선언을 고치고 싶다. 우리는 아직 근대인이 아니다. 몽테뉴의 고양이는 사회가 아직 더 길러내야 하는 인간의 능력을 대변한다. 440

 

프로이트는 누군가 질 높은 삶을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묻자 "사랑하고 일하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조언에는 공동체가 빠져있고, 사회적 팔다리는 절단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는 공동체적 삶을 하나의 소명으로 끌어안았지만, 그녀가 말한 공동체는 대부분의 빈민들이 직접 경험하는 종류의 공동체는 아니었다. 그것은 이상화된 정치적 공동체, 참여자들이 모두 동등한 입지에 서있는 공동체였다. 우리는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 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다. 432

 

토머스는 1930년대 이후 왜 노조가 점점 더 구조화되고 내적으로 관료화되어가면서 생명력이 고갈되었는지를 몰었다.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원들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행동할 줄은 알지만, 노조원들과 비공식적으로 허물없이 어울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는 자발적인 멤버십이 쇠퇴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는 더 급진적이 되라고 촉구했다. 이는 더 많은 것을 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다르게 행동하라는 요구였다. 바로 이런 도발적인 비판을 그는 미국의 다른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던졌다. 공동체적 헌신의 세 가지 형태 가운데,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즐거움의 방향으로 가장 많이 기울어진 것이 토머스의 경우였다. 430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그저 자부심이 낮아진 증상으로 보는 통념을 공격했다. 그는 우울증이란 그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상태라고 주장했다. 이 분노는 그다음 단계로서 자신에게 향하게 된다. 자기 비난이 타인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더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그는 우울증이 부모, 배우자, 연인, 친구에 대한 분노를 은폐하는 가면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감히 그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분노이다. 403

 

중성적이고 비인격적인 가면은 배우가 외부를 보게 하고, 그럼으로써 관객과 함께 누리는 공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복잡한 협력은 그런 외향적 전환을 실행하여 공통의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일상의 외교는 표현력 풍부한 사회적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 추상적 교훈에서 구체적인 정치적 결과가 따라 나온다. 390

 

가게 외부에서는 로컬169의 노조 조직가들이 한국인 상인과 싸우면서 노동법과 적정 임금, 근로시간 등을 준수하도록 강요했지만, 이 싸움 자체가 사회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조직가들과 뉴욕 주는 노동법 세미나를 열기 시작했고, 세미나에 참석한 한국인 상인들에게 수강확인증을 발급해주었다. 뉴욕 시 경계 지역인 플러싱에서 한국인 상인 250명가량이 이런 1일 대학을 졸업했다. 요는 그들에게 법을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태도를 바꾸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369

 

전문적 중재자들은 폭풍우가 불고 나면 상황을 정리하여 생산적 결과를 얻어낼 방법을 찾는다. 중재자 없는 중재도 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지만, 그 경우에는 질서라든가 일반성 같은 것은 거의 찾기 힘들다. 긴장감의 근원이 수리 과정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발언과 침묵 사이의 균형은 양편 모두에서 외형 변화를 겪을 것이다. 이렇게 다시 균형 잡는 행동에서 모종의 예절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370

 

전문적인 구직 카운슬러와 직장 클럽의 조직자들은 모두 실망감을 다루는데 능숙해져야 한다. 이런 카운슬러와 조직자들은 사회의 리얼리스트들이다. 반면 우리 부모 세대와 같은 수준의 완전고용 상태로 돌아가게 해준다고 약속하는 정치가들은 사회의 환상가들이다...그들의 노력이 구직자와 조언자 모두에게 귀중한 이유는 경제적이기보다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으로 무엇이 수리 작업에 개입되는지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마음속이 썩어 문드러진다 하더라도 타인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361

 

사회과학은 체화라는 보기 싫은 전문용어를 써서 신체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을 연결한다. 우리는 세 가지 종류의 체화를 찾아보려 한다. 신체적 노동의 리듬이 어떻게 의례에 체화되는가, 신체적 동작이 어떻게 비공식적 사회관계에 생명을 불어넣는가, 물리적 저항을 뚫는 기능공의 작업이 사회적 저항과 차별성을 상대한다는 과제에 어떻게 빛을 던져주는가, 하는 것이다. 319


현대적인 예절의 형태는 분노의 폭발을 융통성 있게 조절하게 해주며, 팀워크의 안일한 친밀함과 피상적으로 예절만 차리는 태도를 기피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선조들은 공손함을 실행하는 그 순간부터 그것을 규범화하고자 한 데 비해, 지금은 예절이 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인성으로 변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 규범을 스스로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규범화되었든 비공식적이든 예절을 실행시키는 것은 의례이다. 외향적 행동은 반복되어 하나의 습관으로 각인된다. 단기적 시간 단위는 예절을 녹여 없애는 용제이다. 이 때문에 금융자본주의는 무례함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그 업계의 엘리트들은 단기적 시간 단위를 통해 이득을 얻었지만 평범한 노동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285


"영국의 가장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이 유복한 가정의 아이들에 비해 TV와 인터넷 모니터 앞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시를 연구자 에드 메이요와 애그니스 네언은 발견했다. 그들의 자료는 충격적이다. 빈곤 가정의 아이들은 더 형편이 나은 아이들에 비해 컴퓨터 앞에서 밥을 먹을 확률이 9배, 잠들기 전까지 컴퓨터를 하고 있을 확률이 5배 더 높다. 그들이 발견한 내용은 티브 시청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연구와도 일치한다....소셜 네트워크와 관련해서 매우 기본적이지만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 있다. 직접 만나는 관계, 개인적인 인맥, 또는 직접 참석한다는 것이 특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35

 

PR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처음 지적했듯이, 차별화하는 비교는 열등감을 이용한다. 홍보하는 사람은 신랄한 구절로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를 설득하여 그 자신이 뭔가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것을 '지위'광고라고 불렀다. 광고인의 과제는 소비자들에게 대량생산된 물품을 구입함으로써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데 있다....자신들이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지위대상은 그런 감정을 달래주는 용도로 쓰인다. 230

 

연대는 현대의 정치학에서 하나의 강박이 되었다. 한 세기 전에 좌파가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향식으로 연대를 이루고자하는 진영과 상향식으로 이루고자 하는 진영이 연대의 방식을 양분한다. 하향식 정치학은 협력의 실천에서 특별한 문제에 봉착하는데 그 문제는 정치적 제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는 종종 사회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드러난다. 반면 상향식으로 구축된 연대는 상이한 사람들 사이의 결속력을 확보하려고 애를 쓴다. 이것은 대화적 원칙의 또 다른 측면이다. 210


의례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는 연극적 표현이다. 결혼식에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구글웨이브에는 바로 그런 표현적인 요소가 부족했다. 구글웨이브에서는 교환이 감정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정보를 공유하는 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즉 컴퓨터의 연극적 내용이 빈약했던 것이다. 157

차별화하는, 대화적인 교환에는 전혀 다른 차원이 또 있다. 그 경험이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르다는 것이 반드시 더 낫거나 더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중세의 모든 길드의 모든 작업장에서는 하루 일과를 끝낼 때 이런 기도문과 비슷한 것을 읊었다. 매일 일과가 끝날 때 각 개인이 공동체에서 공동의 선을 위해 기여한 바를 의례를 통해 부각시킨 것이다....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성을 찬양하는, 즉 각 개인의 특유한 가치를 긍정하는 의례들은 차별화하는 비교의 쓴 맛을 줄여주고 협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144

도시의 산책자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자신이 본 것에서 자극을 받았으며, 이런 인상들을 집으로 가져갔다. 18세기의 여행자가 19세기에는 관광객으로 바뀐 것도 이와 동일한 변화였다. 여행자는 자유롭게 문을 두드리고 그 집이나 농장의 주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관광객들은 대개는 매우 신중하게 안내서를 손에 든 채 둘러보았지만 자신들이 여행하는 지역의주민들을 대화에 끌어들이는 것은 꺼려했다. 142


오스트리아 빈 태생인 카우츠키는 독일에서 천직이던 기자 직업을 버리고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젊은 시적에 월간지인 [현대]를 창간했다. 중년에는 혁명의 불가피성이라는 교조의 옹호자가 되었으며, 생애 후반인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서 실제로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정부의 외무부 관리가 되었다. 전사로 살아온 긴 생에세서, 그는 자신의 운동이 그 조직적인 정치적 칼날을 잃는 순간 독일에서의 사회적 개혁과정이 중단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이 된 1920년에 러시아 그루지야를 여행하고 그루지야의 사회민주주주의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교해본 카우츠키는 환멸을 느꼈다 114

 

1844년 오웬은 일련의 규율, 즉 로치데일 원칙을 작성했다. 그것은 마르크스 추종자들보다는 덜 전투적인 노선을 따르는 좌파의 횃불 역할을 했다. 첫째, 작업장은 누구에게나 개방된다.(평등고용의 원칙). 둘째, 1인 1표(작업장에서의 민주주의), 셋째, 거래에 따른 잉여금의 분배(이윤공유), 넷째, 현금 거래9그는 추상적인 빚을 혐오했으므로 현대의 신용카드를 기피한다.) 다섯째, 정치적, 종교적 고립(그러므로, 작업장에서의 차이에 대한 관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섯째, 교육의 진흥이다. 85

 

굳이 읽으려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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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숨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from 木筆 2014-07-29 16:33 
    자유 - 저는 '자유' 그 자체만을 떼어서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다소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건 마치 남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내를 언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이런 차원에서 자유란 안전보장이라는 개념과 결혼한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자유없는 '안전보장'이란 노예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안전보장 없는 '자유'란 혼란이자 불확실성이며, 계속되는 두려움과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자유와 안전 사이의 관계를
 
 
 
[펌] 인터뷰 나무밴드
민주라는 가수에 대해

음반이 나왔네요!! 이렇게 낯설군요. 낯섬은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일... 마음도 지친 몸도 달래면서 길을 걸어나서면 어떨까요. 꽃비가 내리는 날들... 가슴이 먹먹한 노래로  이 달을 시작해보죠... ... 

 

들어보시려면https://tumblbug.com/ko/namoo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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