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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흙발로 집안을 뛰어다녀도 어른들은 꾸중하지 않고, 공부하라는 말도 하지 않으며, 특히 체벌이 금지된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그들의 으뜸 신조다. 소로가 "각자가 듣는 음악에 맞춰 소신을 가지고 걷게 하라"고 한 말이 인디언 문화의 핵심적 가치관이다. 각자는 모든 면에서 서로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개인인 동시에 단체의 일원으로 창조된다 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은 다수의 필요가 개인의 필요를 능가할 수는 있지만 창조의 일차적 목적이 다수의 요구보다 우선하므로 개인과 민족 사이의 균형이 가능하다 고 본다. 민족은 개인을 그 울타리 안에 포함시키거나 배제할 수 있지만 누구에게도 특정한 생각과 행동을 강요할 수 없다.

 

꽃잎 한잎. 

 

 박홍규교수의 인디언아나키즘을 읽고 있다가 덜컥 생각이 턱에 걸려버린다. 각자는 개인인 동시에 단체의 일원으로 창조된다.  개인은 모임의 일원으로 그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다. 어떻게 창조될 수 있을까? 낯선 이 문구에 생각이 걸려 넘어진다. 자꾸 그 생각턱을 돌이켜본다. 모임의 성원으로 창조된다.  다음 밑줄을 더 새겨본다. 다수의 필요가 개인의 필요를 능가할 수 있다. 하지만 창조의 일차적 목적이 다수의 요구보다 우선한다. 새겨보니 창조가 목적이다. 다수의 필요가 일차적 목적이 아니라 창조가 제일 앞자리를 차지한다. 모임의 일원이 아니라 모임에서 창조의 장으로서 시공간이 생겨난 것이라 해석해본다.  모임, 단체의 일원으로 개인은 창조의 시공간이 별도로 만들어져 특별하고 특이한 생각과 행동을 보장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렇게 다시 새겨도 고정관념은 늘 단체의 성원, 단체의 구성원의 위계와 관행에 짓눌려버릴 것이다. 일상에서 개인과 모임, 단체의 간극에 창조란 몸말이 불쑥 씨앗처럼 피어날 수 있을까?  모임, 단체에서 개인은 구성되고 대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다.

 

국가로 발전되기 이전의 대부분의 비정주 수렵 채집민 소집단 사회와 촌락사회에서는 오늘날 같으면 소수의 특권층만이 누리는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보통사람들이 대부분 누리고 있었다. 사내들은 어느 날 어떤 일을 얼마나 할 것인가, 아니면 일을 할 것인가 하지 말 것인가를 스스로 정했다. 여자들도 남자들에게 예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혼자 매일 할 일과 일의 속도를 정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할 일을 할 뿐 어디서 언제 해야 한다는 것을 남이 정하는 일이 없었다. 비켜서서 재어 보고 헤아리는 간부나 감독이나 우두머리 따위는 없었다......남녀 누구에게나 자연의 혜택을 평등하게 나누어 가질 권리가 있었다. 지대도 세금도 공물도 없었으니 그것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일은 없었다.

 

 

꽃잎 두잎.

 

"매일 할 일과 일의 속도를 정했다" 오늘 삼성경제보고서를 보니 힐링이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 근로자들의 상태가 정상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사전조처를 취해야 된다는 말씀이었다. 힐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힐링이 과잉인 시대다. 소프트한 치료만을 발설하거나, 사후 약방문 격이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어떤 일을 얼마나 할 것인가, 아니면 일을 할 것인가 하지말 것이가를 스스로 정했다."  로망일까? 그리고 다시 나에게 되뇌여본다. '일을 할 것인가 하지 말 것인가' 정신병은 사회의 구조를 시간의 뒷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나타난다. 부적응의 농도차이를 보이며 드러난다. 마음의 상처와 병들은 개인의 강도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틀과 뼈대를 고치지 않고서는 치료의 한계를 드러낸다. "혼자 매일 할 일과 일의 속도"를 정할 수 있는 구조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힐링을 원하지 않는다. 잔치가 그리워지고 기쁨을 서로 나누고 싶은 축제가 기다려지고 설레일 것이다.  세상은 남는 것에 경도되어 너무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닌가? 정상적이 일의 궤도란 무엇일까? 몸에 영혼은 붙어있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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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발.  메모장 흔적을 살펴보니 지난해 장미꽃 필 무렵이다. 나 - 나너- 나너나 - 우리 - 모임 - 맘 - 뫔 - --  또 다시 닿는 순환을 끄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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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주*샘, 장마가 오르락내리락 하며 불볕도 마다하지 않는 여름도 무척 깊어졌네요. 삼계탕이든 국밥이든, 영양보충을 해줘야 한계절 지낼 만 하다죠.  보양식과 함께  청원 부용에 있는 부강이란 동네가 떠오르네요. 세종시 편입 문제로 동네가 들썩였던 곳이기도 하고, 대전 갑천에서 흐르는 물과 청주 무심천을 따라 내려오는 강물이 합강하려는 부근이기도 하지요.  부강이란 동네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초원(장경숙샘)의  상상잡지 준비호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이란 비평글을 본 연유도 있네요. 일제에는 큰 시장이었기도 했고 가네코 후미코가 고모네집에 식모살이를 하다시피 한 곳이죠. 한번 걷고, 두번 걷고 골목길을 걸으며  그 간절함을 나눌 수는 없었지만, 이내 몸에 익숙해져 이제 그 길들과 아담한 시장풍경이 그립기도 하네요.

 

 


 

가네코 후미코를 생각하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엠마골드만이 겹쳐요. 불우하다고 하기보다도 더 처참한 환경, 노예의 삶을 벗어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뜨겁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네요. 눈물겨운 삶 속에 어떻게 그렇게 꽃처럼 피어날 수 있는지를 보면, 상징자본이니 문화자본이니 하는 이론의 함정이 부질없이 보이기도 해요.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삶이 이렇게 다시 필 수 있다고 여겨요.  두 분다 아나키스트이죠. 역사에도 지워지고 발굴조차 되지 않고 있는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로 폄훼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죠. 그녀들이 만났던 크로포트킨, 바쿠닌, 프루동.......가네코 후미코는 막스 슈티리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온전히 번역된 번역서도 없는 실정이긴 하지만, 그 얘기도 살짝 들려주면 좋겠어요.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읊었네요. 초원님이 상상잡지에 소개한 가네코 후미코와 옥중수고를 이제서야 완간한 나는나란 제목의 책도 있더군요. 그리고 손수 디자인한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란 책 좀 소개해줘요.  이곳 인근에는 구룡포라는 통영 풍의 일본인 마을과 골목, 일제시대 아나키스트의 흔적이 많은 마을들 속에 있어요. 가네코 후미코의 연인이었던 박열의 고향이 이 근처이기도 하죠.

 

 

 

 

 

 

주*샘, 저도 같이 읽어보려합니다. 여름 더위를 식혀줄 안내독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소나무 향기가 가득한 파도보러 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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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계량화되고 수치화되는 정책의 기준을 신뢰할 수 없다.

데이터로 집행되는 정책의 강압도 믿고 싶지 않다.
책상 위에서 만들어지며 데이터로 만들어진 자료로 획일화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정책에 반영한다면서 듣는 귀는 대부분 현실의 먹이사슬과 출렁임을 설명을 해대어도 느끼지 못한다. 이해의 한계에 갇힌 엘리트-결정사슬을 구원할 길이 없다.
양심적인 엘리트는 끙끙대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조각조각 끼워맞추며 반영한다고는 하지만
느끼지 못했으므로 그 정책은 이해관계를 자르지도 반영하지도 못하고 유행에 바랜다.
누더기가 된 정책의 기준은 개인의 이익과 힘에 쏠려 갈 곳을 잃어 배회한다.

 

1.


삶을 맛보려하지도 맛을 살리려고도 하지 않는 정책들,
애초 삶의 실뿌리는 다 잘려나가면서 처리하거나 처리되는 행정들.
행정들은 또 다른 정해진 삶은 사는 이들에게 접수되고 처분되어 애초에 날 것은 소멸되어간다.

 

3.

내려간다는 것은 어디까지 일까?
이해하지 못하고, 알려고만 해서 만들어지는 정책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 것인가
괴물이 되어 삶을 짓밟는 정책의 무게는 누구를 위해 짓누르는 것일까
바닥이나 그 지친 삶의 말, 느낌이 전율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정책이나 안을 해결하는 것이 되돌아오기는 한 것일까? 정책의 결과물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줘야 되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가? 처리라는 괴물같은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지는 정책들, 다른 삶의 자장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만들어지는 대안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생명력이 있는 것일까? 그 유효기간을 실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4.

 

비루함과 처절함, 처연함이 행정이라는 필터 속을 통과하며 살아남는 법이 있을까? 행정의 결재라인에 온기가 고스란히 전달되어 실감나는 정책이 운신할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어떤 식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만들어진 안은 또 필터에 걸리고 느낌이라는 온기는 다 걸러지고 나면 대체 누구를 위해 정책은...조직과 제도를 위해 봉사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조직을 모시는 정책...늘 삶보다 상위의 목적에 함몰되는 것은 아닐까?

 

 

5.

 

정책이란 화롯불처럼, 삶과 절규의 온기가 고스란히, 때로 공평하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그 온기를 고스란히 여럿에게 느낄 수 있게 전달해주는 것은 아닐까?

 

6.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의 사이, 그 막다른 절벽에 엘리트가 서있는 것은 아닐까? 아는 것에서 끝이나 느낌의 싹을 잘라버리는 데에 익숙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다른 진리에는 관심도 없는 전문가와 엘리트주의의 몽매에 대해 개탄스럽지 않을까?

 

7.

 

 엘리트주의는 허물어질 수 없는 것일까?  느끼지도 살아 숨쉬지도 못하는 행정의 그물에 파닥거리는 엘리트를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숱한 경륜과 경력을 뱃지에 귀속시키려는 명예욕의 누추함을 공공연히 들여다볼 수는 없는 것일까? 조직의 논리보다 고발과 갈등이 그 곪은 상처를 오히려 시원하게 소독할 수 있다고 장려하는 길은 없을까?

 

뱀발.  엘리트의 아둔함은 다른 삶의 끈을 잡아보거나 이식하려고 하지 않는 버릇의 반복때문은 아닌가 영원히 구제되지 않는 습관, 영원히 구제되는 습관들, 삶을 빠져나가는 정책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그 연관된 맥락의 그물이 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느낌들이 오지 않는 겉핥기의 답습... ...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어떤 사람의 어떤 삶의 자장까지 느껴야 되고, 어떻게 어디까지 어떤 제도, 시스템까지 꿰어야할 정책이 삶의 아귀를 벗어나 빠지지 않는 것인지... 더 많은 정보를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험이 없는 정보만을 선택하려는 버릇. 어쩌면 느끼지 못하고 평가잣대를 만든다는 일, 이해가 될 듯 말듯하며 정책에 반영한다고 하는 일, 맥락이나 연관사슬의 출렁임도 느끼지 못한 채로 기한에 밀려 처리하려는 습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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