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방을 안방으로 옮기다. 묶힌 책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누울 자리 서성일 자리, 개다리소반 옆에 조금 책들을 두다. 치우다가 화장대 공간이 마음에 들어 서재로 꾸며놓고 틈틈이 시간을 보낸다.

 

 

 

2. 소개받은 책의 몇 꼭지를 보았는데 마음이 흔들린다. 시간에 바래지 않는 글쓰는 능력이 있다. 소담스런 마음을 받아본다. 떨린다. 아껴 읽기로 하다.

 

 

 

3. 오고가는 길, 추위에 오래 머물지는 못하지만 미술관과 포은 정몽주의 임고서원에 잠시 들르다. 추위에 아랑곳 않는 은행나무 실루엣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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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는 역사에 개입하려고 할 때 오늘날 유행하는 고정된 '비판'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불평등한 현대세계 속에서 일본인은 어떻게 '평등'하게 살아가야 하는가였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상적인 상황으로 '평등'을 말하지 않고, 늘 현실에서 그러한 이상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올바름 선호'를 업으로 삼는 지식인과 달리, 언제나 현상에서 드러난 것을 뒤엎어 그 철학적 '진실'을 드러냈다. 그러한 '진실'은 때로 혀상과 충돌하거나 정반대편에 서기도 한다. 특히 서구이론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다케우치는 그러한 '진실'을 끊임없이 건져올렸다. 13


중국은 어떻게 루쉰이 절망을 담아 끝까지 맞섰던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노예가 주인이 된다고 노예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루쉰은 늘상 이야기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현실에서 부자유스러운 '노예상태'와 자신의 노예상태를 직시하지 않는 노예근성을 구분하여, 루쉰은 '깨어난 노예'라고 철학적으로 지적했다. 이때 그는 '깨어난 노예'는 자기임과 자기이외임을 동시에 거부한다는 정의도 잊지 않았다. 이리하여 절망과 저항이 비로소 연관을 맺게 된다. 20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자기해체를 진행하면서도 타자를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를 재건한다. 30

 

다케우치는 계몽가의 자세를 취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일본의 '마땅한 모습'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지 않았다. 역으로 그는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혼돈스런 부분에 진입하려 했으며, 조금이나마 역사를 변화시키려 했다. 31

 

"오로지 각각의 특수한 용어를 주문처럼 암송하는 능력만을 진보의 지표로 채용하는" 진보주의와 달리, 다케우치는 언어(개념, 카데고리)에 구애되면 역사를 희생시킬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말에 배반당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말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담았던 다케우치 요시미는 모든 카테고리에 대해 역설적인 태도를 취했다. 38 모든 역사상 인물과 만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스스로 묻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심판이나 변호를 멈출 때, 비로소 역사상 인물의 '원리성'이 떠오른다. 그 원리성이야말로 역사의 논리를 품고 있다. 39

 

'비판'이 생산성을 갖는지 여부는 그 기준이 무엇이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길들여져온 기준이란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다듬어진 살아 있는 이론 판단이라기보다는 서양에서 빌려온 이론의 결론이 압도적으로 많다. 바로 그 점이 원인이 되어 이론의 결론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워 '올바름'에 대한 욕구가 이상하리만큼 강해진다. 생산적인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이론감각을 결여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감각을 결여하고 있어 우리의 문화에서는 '올바름 선호'가 압도적인 풍조가 된다. 그러한 '선호'에서 빚어진 논의나 비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생산적인지는 근래 학문세계의 상황을 한 번 둘러보면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43 "관념을 추출하는 것이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는 과학적이라는 관념 속에 있을 뿐이다. 인간을 추출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사고, 인간은 궁극적으로 추출될 수 있다고 믿는 문학가는 문학이라는 관념 속에 인간을 밀어넣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들을 싣고 움직이는 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생각한다면 그들의 학문됨, 문학됨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학자가 된다 했을 때, 모든 것을 의심해도 좋지만 최후의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의심하면 그는 학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44


"인간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 하나 만사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며, 차라리 주체의 의도와 객관적 결과가 불일치하는 쪽이 현실적이지 않은가라는 인식. 이러한 진리는 젊은 다케우치가 역사 자체의 힘을 인식하는 선열한 계기가 되었다." 383 '말을 신용하지 않되 말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담는' 태도, 바로 말을 사고의 탄성으로 삼아 사상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384

 

세계가 단지 평면이 아니라 경계이자 위계이며 그래서 깊이를 갖는다고 여긴다면 비판의 행위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습니다.386


쑨거에게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비판이란 비판의 주체가 그 비판 행위로 전혀 상처입지 않는 비판입니다. 또한 자신의 비판하는 행위에 의해 자신이 다치지 않을 안전한 곳에서 하는 비판입니다. 비판행위로 비판의 주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 비판의 옳고 그름으로서는 따질 수 없습니다. 아마도 비판의 대상 안에 비판하는 주체가 내재하고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며, 이때는 비판의 올바름이 아닌 비판의 윤리성이 문제로 등장하게 됩니다...차라리 비판의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엄밀함보다는 자신을 걸 수 있는 판돈의 크기일 것입니다.  388


다케우치가 말하는 저항에는 두 가지 다른 저항이 포개져 있습니다. 첫번째 저항은 나를 패배하게 만든 상대에 대한 저항이며, 두번째 저항은 패배를 잊으려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저항입니다. 따라서 저항은 계속되는 패배감 속에서 지속됩니다. 다케우치는 이런 이중의 저항에 의해서만 동양은 진정 자신의 근대를 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390

 

 

뱀발.  몸 컨디션이 여의치 않아 대부분의 나날들을 숙소에서 독서 갈증을 풀고 있다. 잔뜩 포개어진 새책들 사이 맛만 보려던 것이 진도를 나가버린다. 서구 이론은 우리 몸에 맞는가? 맞지 않다면 동양이론은 잘 맞는가? 잘 맞는다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이론이 무엇이 문제인가? 동아시아의 사상이 잘 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관조하지 않고 역사란 몸에 담그는 일...그 안에 느끼고 보고 바꾸고....루쉰이 몸을 끌며 바꿔내는 것들은 보지 않고 바꿔진 것만 보는 습속은 여전히 서양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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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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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달이 어둠 속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눈 한 번 떼지 않고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폴오스터의 달의궁전 마지막 대목이다. - 유행과 사물의 감수성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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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빠'와'까' 그리고 광장과 밀실
    from 木筆 2014-02-12 09:13 
    '빠'와'까' 그리고 광장과 밀실 ㅡ 노명우라는 저자는 군중과 공중을 구분한다. 열광을 그 속에서도 느끼며 밖에서도 볼 줄 아는 법을 논한다. 철없는 무리도 아니며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내는 이도 아니다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드나든다.' 또하나의 가족' 후원자 가운데 이*재의 이름이 나오도록 본다. 아프다는 것을 안고 사는 것, 아비의 입장이 된다는 것과 관료조직의 역할을 한다는 건 다르다. 안타깝게도 해치워야 할 일과 삶들 사이의 간극을 끊임없이 벌리
 
 
 

 

 

 

 

 

 

 

 

뱀발. 겨울, 너로 가는 길  습습한 기운은 얼어버렸는지 아니면 어디 습기제거함이라도 있는 것인지 내리쬐이는 햇살은 피사체에 곱게 꽂힌다. 지난 가을내내 불던 바람의 결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맑은 하늘은 시리다. 말라버린 개망초들도 불꽃으로 점화될 듯 바스락거린다. 모처럼 향기있는 겨울날 갈매기처럼 배회한다.  텃밭 주인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을을 그대로 얼려둔 채로... ... 매화가 보고싶은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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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적인 사회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해방은 개인에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된다. 사회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들인 에너지는 개인에게서 자유를 향한 힘을 빼앗아버린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볼 경우 개인이란 아주 생생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할 경우 개인이란 관념은 단순한 추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지 않는 그 어떤 내용도 갖고 있지 않다. 즉 개인이, 사회가 그 자체의 상황을 넘어서는 데 조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저 사회를 넘어서려는 충동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201


 

반짝 1. 개인이 사회를 넘어서려는 충동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개인의 해방은 해가 된다.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보면 개인은 아주 생생한 것이지만 절대적으로 설정할 경우 개인은 추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막스 슈티리너는 유일자로서 개인을 상정하고 실제 그렇게 살았다. 자유라는 것이 공유-소유라는 실뿌리같은 곁을 헤아리지 않으면서 홀로 설 수 없다.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점을 깨닫는 것도 엄청난 일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후기자본주의 삶 아래에서 자유라는 것은 살림살이의 편차와 왜곡된 삶에 대한 상상력이 뿌리내리지 않는 이상, 그 자유와 사랑은 생명력이 길지 못하다. 자본이 삶의 결을 나누며 만들어낸 그물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들에게만 자유를 하사한다. 개인이 사회를 안을 수밖에 없고, 그 운신의 폭이 너로 인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을 인지하지 시작할 때 조금은 그 공간이 넓어지는 것이다.

 


비변증법적 사유 - 벤야민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긴 과제는, '낯설게 하는' 사유의 수수께끼 형상들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무의도적인 것을 개념의 왕국 속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즉 변증법적이면서 비변증법적으로 사유할 필요성이다. 203 - 벤야민이 역사는 지금까지 승자의 관점에서 씌어왔지만 이제는 패자의 관점에서 씌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여기에 무언가가 덧붙여질 수 있다면 그것은, 즉 인식은 일련의 승리와 패배로 점철된 역사의 불행한 직선적 성격을 재현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런 역동적 관계에서 빠져나간 것, 길가에 제쳐둔 것, 다시 말해 변증법에서 빠져나간 눈먼 지점들이나 폐기물들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지배적인 사회를 넘어서는 것은 단지 그것이 발전시킨 잠재력뿐만 아니라 역사의 운동 법칙에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 모든 것이다. 이론은 비스듬한 것, 불투명한 것, 붙잡히지 않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02


반짝 2. 진보라는 것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만, 자칭 진보의 시선에서 보면 유행의 흐름을 되짚을 이유가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힐링과 치유, 나꼼수를 비롯한 젊은층의 정치에 대한 관심, 김용옥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 강신주의 인문의 세련된 소비....유행이 있고 그 꼬리표에 한계역시 점철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보가 힐링과 치유를, 정치에 대한 각성을 이리 대중적으로, 인문에 대한 관심을 이렇게 앞서서 같이 못한 것도 인정을 해야한다. 소비와 세련된 소비, 개인에게 국한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다이나믹 코리아에 되풀이 되는 또 다른 시공간의 계기는 또 있지 않을까 싶다.

 


순수성이 순수하지 못한 까닭은, 교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순수성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다는데서 비롯된다. 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순수성의 사제들이 이런 순환의 메커니즘을 통달하게 되자 이 순환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돈의 베일을 쓴 춤을 추게 된다. 208


반짝 3. 개인이 발라져 나온 뒤, 수많은 철학자들이 개인의 순수성을 가정하고 되짚었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순수하다는 사유자체가 이 사회에서는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는 말이다. 세속에 물들려고 하면 할수록 어쩌면 순수성을 확장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듯이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더 이상 곤경을 모르는 인류는, 곤경에 벗어나기 위해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장치, 그렇지만 풍요로움과 함께 곤경을 확대 재생산해왔던 그 모든 장치가 미친 짓이었으며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사실에 희미하게나마 생각이 미칠 것이다 즐김자체도 이러한 정황에 따라 바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존재하는 즐김의 도식이 바쁘게 쫓아다니기, 계획만들기, 의지를 세우는 것, 정복하기에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 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 해방된 사회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질 경우 사람들은 '인간적 가능성의 실현'이나 '풍요로운 삶'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된다.....그러한 의기양양한 대답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209


반짝 4.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뭉뚱그리거나 대표해서 사회를 표현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역시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로 퉁칠 것은 어떠한 것도 없다고 가정하는 편이 낫다. 현실은 버젖이 헌법에 있는 생존권도, 노동권도 행복을 추구할 권리도 사문화시켰다. 이순간에도 죽음을 택하는 이들로 사회적 타살로 피가 흥건하다. 노동권을 주장한 합법적인 상황에도 손해배상을 들이대며 희희낙낙하는 세상이다. 우리 사회는 끼리끼리의 사회다. 그래서 삶도 들여다볼 수 없으며 보이지 않기에 아파하지도 않는다. 세상에서 10번째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사랑하고 자유, 올곧게 서는 살아가는 개인들이 느껴야 하는 것은 소유와 공유, 살림살이의 비교로 이어지는 형평에 대한 감각이다. 세속의 벌이와 쓰임에 대한 공유에서 비롯된 절절함이 다시 오지 않는 이상 공허한 자유, 쇼윈도우에 전시된 자유와 사랑이 될 확율이 크다.

 

 

뱀발.

 

느낌을 붙잡으려 직접 쓰다가 날라가버렸다. 임시저장이 되었다고 여겼는데 웬일인지 조급을 감지한 듯, 피시는 그렇게 응답한다. 곰곰발님이 지적한 강신주는 세련된 자본주의 사용설명서가 되었고 세련된 소비를 하고자하는 소비자들이 있어 순환된다는 말에 부분적으로 수긍하지만, 강신주현상에 대해서는 진지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인 긍정이 아니다. 살림살이와 삶의 제한된 동선, 그룹핑되어 다른 삶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우리들에 대한 고민으로 번지는 또 다른 유행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원래 유행을 믿지 않는 편이지만, 역동적으로 왜곡된 공간이라 꼭 그렇지 않다고 판단할 근거도 없다.

 

마립간님의 거시적인 자본주의의 경로를 생각해본다. 그것이 또 다른 자본주의여도 파국이어도 할말이 없다. 하지만 나를 한국, 중국, 유럽, 미국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의 한곳에 냉혹하게 떨어뜨려보는 상상력이 오히려 지금여기를 그래도 낫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위무해본다. 자본주의도 없다. 신자유주의도 없다. 안개가 짙다. 나만이 아니라 같이 빠져나가야 한다. 만들어가야 한다. 답은 저기에 없다. 여기에서 만들어야 한다. 세속의 철학인 살림살이에 푹 적신 상처받은 말과 삶이 순수하고 예쁘기만 한 말과 사람들을 너머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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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1-22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언을 하자면, 과학의 큰 발전 예로 들어 뉴턴 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은 매년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류 전체의 사고의 축적이 충분히 되어 창발의 동력이 발생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철학이나 사회제도도 지적 축적과 사회적 동인이 축적된 상태에서 폭발적인 창발이 가능하죠. 어쩌면 김용옥씨나 강신주씨는 그런 운이 없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과학에서는 방향성이 있다고 추정되는데, 철학과 사회제도는 잘 모르겠습니다. 약간은 자아라는 의식meme이 확장이 있었는데,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과 정확히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대하기는 지금 여기에서 답을 찾고 싶은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여울 2014-01-23 08:14   좋아요 0 | URL
비코의 새로운 학문을 추천 드리고 싶군요. 인간은 자연과학과 달리 봐야한다는 관점이지요. 오늘도 즐독 되시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