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그의 말을 그대로 찍어두고 싶어 신경을 바짝썼다. 만나본 인물들 가운데 그래도 선한디 선한, 순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은 키, 레미콘 판넬공을 하다가 눈썰미로 재료일을 배워 밥벌이를 하고 있다. 평소 정치성향을 삼가한터라 소주가 오르자 그는 "박근혜 공기업 개혁 해내지 않겠어요"라고 한다. 가족과 혈연과 죽은이의 부탁말씀과 모시고 있는 돈님의 사이가 엉성해보이지 않는다. 돈을 떼어내고, 정치를 떼어내고, 혈연을 떼어내고, 개인을 발라내어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얘기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무수히 많이 들었을 것이고 보았을 것이고, 그 사이 사이 돈님과 피의 끈적거림 사이를 뚫고 그의 마음까지 꽂히기에는 감내할 것이 무척이나 많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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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할아버지가 한자리 하라고 했다. 육사가면 마을잔치를 했다하고, 명문대가면 현수막이 붙었다. 한 할아버지 아래 육사 인사담당만한 친구는 계급정년에 걸려 진급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구미에 두칸방 빌라에 사는 그는 조그만 레미콘공장 월급쟁이 기술자다. 월급과 비용을 줄이려 두달째 놀고있는 그는 봄이 되어야 일할 수 있다.  이명박과 근혜대통령이다. 공기업 개혁 해낼 것이라고 한다. 경북 봉화 춘양고의 추억을 갖고 아이를 키우고, 친지를 만나고, 소주를 기울일 것이다. 서영춘이 되고 싶었다던 그는 꿈얘기에 설레였고 광주를 처음 가봤다는 얘기처럼 들썩였다. 그는 살아가고 살아낼 것이다. 그러다가 딸래미들 먹고사는것도 걱정하고, 한자리하지 못한 서운함을 갖고, 부자가 되지 못하는 자식들을 한탄하며 할아버지로 죽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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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제사 題辭)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충만감을 맛본다. 하지만 입을 열려고 하니 동시에 공허를 느끼게 된다. 지난날의 생명은 이미 죽어 없어졌다. 나는 죽은 생명에 대해 극도의 만족감을 맛본다. 왜냐하면 나는 죽음을 통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죽어 버린 생명은 어느덧 썩어 문드러졌다. 나는 썩어 문드러진 생명에서도 충만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으로도 생명이 공허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생명의 진흙이 땅 위에 팽개쳐져 있어도 높은 나무는 자라지 않고 들풀만이 잘랄 뿐이다.

이것은 나의 죄요. 허물이다.

 

들풀은 뿌리가 깊지 않다. 아름다운 꽃이나 잎을 피우는 것도 아니다. 들풀은 이슬을 마시고 물을 빨아 먹으며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피와 살을 먹고 저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들풀은 제 푸름을 자랑할 때도 인간들에게 짓밟히고 베이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죽어서 영원히 썩어 갈 때까지.

 

그러나 나는 담담하고 기쁘다.

 

나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리라. 나 스스로 사랑하는 나의 들풀이지만, 나는 이 들풀로 장식을 하려는 지면을 증오한다. 땅속의 불덩어리는 땅 밑으로 흐르다가 솟구쳐 오른다. 일단 용암이 분출되면 땅 위의 들풀과 높은 나무도 그래서 썩어 문드러지는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리라.

 

그러나 나는 담담하고 기쁘다.

 

나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소리높여 노래를 부르리라. 하늘과 땅이 이다지도 적막하기에 나는 크게 소리 내어 웃지도 못하고, 소리 높여 노래 부를 수도 없다. 설령 하늘과 땅이 이처럼 적막하지 않더라도 아마도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밝음과 어둠,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는 이 한 움큼의 들풀을 선사하고자 한다. 친구이든 원수이든, 인간이든 짐승이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든 미워하는 사람이든. 나 자신을 위하여, 친구와 원수를 위하여, 인간과 짐승을 위하여,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나는 바란다. 이 들풀이 죽어 없어지고 썩어 문드러지기 위해서 불길이 빨리 타오르기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일찌감치 살아 있지 않은 것이니 이는 실로 죽어 없어진다거나 썩어 문드러지는 것보다도 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떠나거라, 들풀이여! 나의 이 제사 題辭까지도.

 

 

 뱀발.

 

1. 자꾸 엇나가고 흐려지는 것 같아 캔버스 위에 만년필로 또박또박 써본다. -- 김수영의 풀과 엇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폭과 깊이....들풀 이라는 책제목의 글과 23편을 꼼꼼이 다시 읽어보고 소회를 남겨야겠다.

 

2.외우면서 옮겨 적다보니 어감이 많이 다르더군요. 느끼다와 알다의 차이, 본다라고 적었는데 원문에는 맛본다 였어요.... 루쉰은 알아주는 이도 없고, 외치자니 그 또한 아무런 파장도 없을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그는 적막하다고 말하더군요. ..'입을 열면 공허를 느끼게 된다'고 하지만 ..곧이어 '생명이 공허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어요. 그는 절망을 먼저 느끼죠. 희망이 허망한 것처럼 절망도 허망하다고 하죠. 빛보다는 어둠의 편이 차리를 지금을 낫게 만든다라고 하죠.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어둠에 선다라고 말에요. 아마 제 표현대로 하면 그는 철저한 덧셈주의자가 아닐까해요. '철저'와 '왔다'를 그는 경멸하니...이 표현도 어색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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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0. "가령 말일세.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오래지 않아서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사멸되어 가고 있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비교적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켜서, 그 소수의 불행한 이들에게 구제될 수 없는 임종의 고초를 겪게 한다면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1.

"나는 소와 비슷하다. 먹는 것은 풀이고, 짜내는 것은 우유와 피다."


나의 독자 가운데 어떤 사람도 다음과 같은 것을 알지 못했다. 곧 그는 나의 작중인물을 조소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조소했다는 것을, 내 속에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추악함이 그 어는 누구의 경우보다도 더 잡다하게 모여 있다. 만약 그것들이 갑자기 한 차례 내 앞에 보였다고 한다면, 나는 목을 매달아버렸을 것이다. 나는 나의 작중인물에게 자신의 추악함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행해졌다. 나는 자신의 결점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다른 상황 속에 두고, 자신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모욕을 주었던 모델적인 적으로서 그려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를 증오와 조소와 기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격했다. 누군가가 나의 붓에서 처음으로 내 앞에 나타난 괴물을 보았다면 그는 반드시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고골리) 113


2.


그가 대항했던 것은 실은 상대가 아니라, 그 자신 속에 있는 어찌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그 고통을 자신에게서 뽑아내어 상대방 속에 두었다. 그리고 그 대상화된 고통에 그는 타격을 가했다. 그의 논쟁은 이렇게 해서 실행되었다. 그 자신이 만들어낸 '아Q'와 싸웠던 것이다.  133


그는 그 자신이 소외한 자기 이외의 것과 논쟁을 통해서 대결한다. 그 대결의 장소는 그가 자기를 표현하는 장소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에 의해서 그가 만들어내었던 작품과도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작품은 그에게서 탄생됨으로써 그를 소외하는 위치에 서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에서 보상을 요구받는다. 소설 속에 자기를 버리지 않았던 그는 이제 소설 밖에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절망의 '외침'이 그에게 있었다. '외침'은 소설이며 시였다. 지금 그것은 그와 그 자신 이외의 것 사이에 있다. 133

 

3.


희망이란 무엇인가? 창녀여.
누구에게나 웃음을 팔고 모든 것을 주며,
그대가 많은 보물 - 그대의 청춘을 잃었을 때
그대를 버린다.
(중략) 그의 시가 지금까지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슬프다
(중략) 그는 말한다. 절망은 허망이다. 희망이 그러함과 같이. 만약 내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희망' 속에서 아직도 구태여 살아가야 한다면, 저 흘러가버린 슬프고도 덧없는 청춘을 찾아내리라. 그것이 비록 내 몸 밖에 있다 할지라도. 내 몸 밖의 청춘이 한번 소멸되면, 내 몸 안의 황혼도 동시에 시틀 테니까  (희망)


4.

노인: 손님, 어서 앉으시오. 이름은 무엇이오?
행인: 이름요?- 저도 모릅니다. 저는 철든 이후로 혼자였기에, 제 이름이 무언지 모릅니다. 길을 걷노라면, 사람들이 되는 대로 부르기는 했지만, 너무나 여러 가지여서 저 자신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같은 이름은 두 번 다시 듣지를 못했으니까요.
노인: 허, 그렇다면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행인: (잠시 망설이다가) 모릅니다. 저는 철든 이후로 그저 이렇게 걷고 있습니다. (과객)


5.


나는 청년들에게 내가 걷는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권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이나 처지가 같지 않습니다. 사상의 귀결점도 아마 일치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만일 나더러 청년들이 무슨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지를 꼭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남을 위하여 생각해두었던 말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첫째는 생존, 둘째는 충족, 셋째는 발전입니다. 만약 감히 이 세 가지를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상대가 누구이든 우리는 그에 반항하고 그를 박멸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또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하여 몇 마디 부언해야겠습니다. 즉 내가 말하는 생존은 결코 구구한 삶이 아닙니다. 충족은 사치가 아닙니다. 발전도 방종이 아닙니다.  베이징통신, 1925  149

 

6.

"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깨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형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렇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희망이란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말살시킬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란 것은 미래에 있는 것이므로, 설사 내가 반드시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해도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 이것이 처녀작인 [광인일기]다. (45')

 

 

 

 

 

 

 

 

 

 

 

 

 

 

 

 

 

뱀발. 

 

1. 친구 진신이(金心異)는 비문이나 베끼고 있는 루쉰에게 와 글을 써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하지만 루쉰은 주저주저합니다. 진신이가 쇠로된 방 이야기를 하죠. 절망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음을 한다는 것이 번역같은 것 밖에 없었죠. 루쉰은 말합니다. 희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리고 글을 쓰겠다고 응답합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독특한데가 있습니다. 작품에 모든 것을 던져놓지 않습니다. 절대로... 작품 속에 그의 그림자와 싸웁니다. 그리고 그 작품을 다케우치 요시미는 옷을 벗듯 던져버린다고 표현합니다.  과객의 표현처럼 무수한 필명을 쓰면서 걷습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저 걷습니다.

 

2.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루쉰을 알기위해서는 그가 돌고 있는 회귀의 축을 읽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루쉰이 의사로 마음먹고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러일전쟁을 다룬 환등사진 속에 구경꾼 속에 잡혀있는 중국인을 보게됩니다. 의술로 메이지유신의 새로움을 배우면 해결될 줄 알았던 일이 정신의 사변형은 결코 흔들리게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또 3.18 사건으로 제자가 죽는 사건을 목격하면서 생활에 있어 끊임없이 그를 향해 도는 회심回心을 합니다. 물론 그는 과격주의다 그의 표현대로 서구의 왔다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죠. 부정의 부정, 그에게 소화되지 않고 소화되어 그의 것이 되지 않는 이상 따르지도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도 그러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카프와 같은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이들과도 끊임없는 힐난을 받고 논쟁을 하였죠. 모든 사물과 주의에 쩡짜..저항이라고도 말하던데  우리말로는 찍자를 놓다. 찍자를 부리다라는 어감이 좀더 나을 듯합니다. 찐짜라는 전라도 방언이 있기도 합니다만... ..

 

3. 그의 번역문이나 소개글이 많지만 직접 창작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외침, 방황이란 소설과 들풀, 아침에 꽃을 줍다라는 잡문..다섯 종밖에 없습니다. 주의할 것은 모두에도 언급하였지만 소가 풀을 먹고 우유와 피를 짜내듯이 그의 작품은 그와 그 자신의 외의 것 사이에 있습니다. 아픔을 삭히고 어루만지고 통증을 느끼다가 토해내지 않으면 안될 때에야 토해낸 것이고 , 그 작품 역시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그림자로...그림자와 작품밖의 그는 또 다시 싸우는 것이죠.

 

4. 청년들에게 강연을 부탁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피해다니다가 겨우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해줄말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 길을 걷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첫째 생존, 둘째 충족, 셋째 발전이라고 하죠. 허망하나요? 하지만 오해할까봐 덧붙이죠.  생존은 구구한 삶이 아닙니다. 충족은 사치가 아닙니다. 발전은 방종이 아닙니다. 생존은 구구한 삶이 아닙니다. 충족은 사치가 아닙니다.... 그래요. 루쉰의 말은 "사람은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했어요. 생명은 어디든 길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5. 절망이 허망한 것처럼 희망도 그러하다. 희망은 창녀같다. 희망은 창남같다. 청춘을 잃으면 버리는 것이다. 왜 절망을 이야기할까요. 무덤과 죽음을 이야기할까요. 죽음에 맞서야 삶이 다가서는 것이라는 것일까요. 아직 희망도 절망도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 수학책을 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

니다. 1.2, 3 , 4 자연수는 일상적으로 있었는데 영, 0이라는 개념은 발견에 가까웠다고 하더군요. 절망과 0, 영도...바닥은 어딜까요? 수영하다고 좀더 깊은 곳으로 가다가 발이 닿지 않는 것을 문득..겁이나고 무서워집니다. 액체근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말하죠. 바닥이 얼음이없다. 그런데 다 녹아버린 것이다. 절망입니다. 사람들이 허우적거립니다. 하지만 숨을 참고 더 내려가봅니다. 바닥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그 0의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절망과 바라는 희망사이에는 무수한 숫자가 있습니다. 루쉰은 역사에 대한 물음에 답합니다. 노예로 살아온 시기와 좀더 편한 노예로 살아온 두시기밖에 없다고...역사를 곰곰히 들여다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더라고...자세히보니 보이기 시작하는데 食 食자가 겹치더라고 말입니다. 식인의 역사만 있더라고 말합니다.

 

6. 아직 모르겠습니다. 발제를 자청하다 읽었던 책들을 얼마나 편의대로 읽었던 것인지..부정도 쩡짜도....나이 쉰에 개처럼 컹컹거리기나 한 건 아닌지...ㅜㅜ 곁에 두고 다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될 것 같아서요. 차근 차근... ..생활인이나 이념이나 가치나.... (60')

 

-1. 들에는 풀이 넘치기만 하는 건 아닐까? 혹시!! 지금도 여전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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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삶과 죽음의 대립 대신, 고통에 대한 이해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져야 한다 (2)
    from 木筆 2014-11-25 08:05 
    권력 징병제-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여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문제가 공유되고 약자의 고통이 가시화, 공감, 분담되는 '시끄러운' 상황이 평화다. 지원병제는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조용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징병제보다 무서운 것이 그것이다. 185팍스코리아나 - 어떤 가치도 온 누리에 골고루 퍼지지 않는다. 미국 밖에서 전쟁이 없다면 미국 군수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뻔뻔한 이의 마음의 평화는 억울한 사람이 겪는 마음의 고통의 대가다.
 
 
 

 

욕이 없는 세상, 예의바른가? 자발적굴종인가?

 


파리의 밑바닥 생활까지 가지 않더라도, 점심시간에 수많은 손님을 치뤄내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일을 해내기 위해 말을 될수록 단음절로 줄여 말한다. 중국집에 종업원들이 요리이름을 칭하는 것도 그러하다. 주방안에서는 거의 욕이 절반이 섞여있을지 모른다. 안전을 요하는 곳에서도 차분한 설명과 논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몸을 긴장하게 만들어 자칫 벌어질지 모르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요즘 술자리나 모임자리에 꼭 그런 사람이 없다. 차분하고 수더분하고, 울화를 삭이는 기술이 체화된 것인지 쌍시옷이 없는 세상이다. 가스통을 드는 고엽제나 전우회의 그림자가 없는 일상은 너무 평온하다. 쌍팔년 이전 이야기를 현실에 대입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도 하지만, 데모만 하던 학생들은 버스 안에서도 동네 선술집에서도, 파출소에서도 화를 참지못해 논쟁이 싸움으로 번졌다. 상대방도 살아봐서 아는데를 연신하며 두고보자를 반복했다. 언젠가부터 평온한 이 사회는 만나지 않는다. 만나더라도 몇몇만 만난다. 만나더라도 정치이야기를 피한다.  정치를 하더라도 논쟁하지 않는다.


예의바르다.


먹고 살만함을 가장하여 너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건강에 여념이 없다. 끊임없이 나로 함몰하는 순간...말 못하고 느낌을 토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우울하다.  문어보다 구어, 구어보다 말의 느낌, 주문, 그리고 욕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직접 표현하고 불같은 강도로 인해 상대방에게 마음 속까지 뚫고 들어간다.

 

 

먹고 살만하지 않다. 열에 여덟은? 나만 잘 살 수 없다. 잘 살아도 이제 그렇지 않는 이들이 보일 수밖에 없다. 분하면 분하다라고, 욕하고 싶으면 욕해야되고, 울분은 토해내야 한다.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도, 사회가 좀더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욕이 필요하다. 선술집에서 내탓이 아니라고 남탓이라고 치고받고 상처도 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해진다.  지금 이 사회는 속병직전이다. 골병직전은 아닌가?

 

 


울지만 마라!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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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2-1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 흘려줄 감성조차 없었다면 이 사회는 더 각박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울기만 하는 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어디서든 만나던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네요.

여울 2014-02-13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해요. 어쩌죠. 울기만 하잖아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