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발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이 전반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규명하려고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내 견해로는 이론적인 위기나 실제 역사, 혹은 직접적인 상황의 현실과 변화의 조건 등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의 장구한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 17

 

우리는 경제적인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당연히 단순한 현실 순응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439

 

사용이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인간의 판단 우리는 사물을 사용하는 법과 사용하는 이유, 특수한 사용이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야 한다 과 연관되지만, 소비는 조야하고도 앞일을 생각지 않는 패턴 탓에 이러한 질문을 취소해버리고, 그러한 질문을 그저 외부적이고 자율적인 시스템의 생산물에 자극을 받아 질서정연하게 흡수하는 것으로 대체해버리기 때문이다. 443

 

1960년대의 영국은 사회적인 필요와 개인적인 필요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 상태가 생길 뿐 아니라 증대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이 시대 영국이 상점 진열장에서 풍요의 느낌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학교, 병원, 도로, 도서관 등에서는 종종 만성적인 부족을 목격하게 된다....이 분열된 사고의 마법은 너무 강고해서 깨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444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스위치를 누르면 그냥 전기불이 들어오는 줄 아는, 그런 인간이에요.” 우리는 어느 정도 이러한 위치에 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우리의 사고방식이 실제적인 관계의 넓은 영역을 습관적으로 억눌러버린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내돈, 내 조명등을 이렇듯 소박한 관점에서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념 자체가 뿌리부터 시들어 있기 때문이. 445

 

우리가 시장이 아닌 인간적 필요에서 출발한다면, 이러한 활동 분야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경제활동 자체를 판단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노력과 자원의 분배에서 생기는 균형이라는 문제까지도 적절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희미하게나마 널리 인식된 최근의 위험은 시스템을 인간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시스템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인식이 희미하다는 것은 이러한 과오의 원인을 잘못 짚는 데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것이 없으면 굶어죽을 텐데도 산업생산을 비판한다든가,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이야말로 우리가 이룩한 성장 대부분의 실체인데도 대규모의 조직을 비판한다든가, 마지막으로 우리를 불구로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적절한 사회의식의 결여인데도 사회의 압력을 비판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447

 

노동을 거래하는 지금의 체제는 결국 다른 모든 거래와 마찬가지로 제시된 가격에 판매자가 자신의 노동을 팔기를 거부할 권리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업은 시장사회에 통합된 한 부분이다. 당신이 유리한 점을 원한다면 불리한 점도 같이 가져야 한다. 그것이 파국과 혼란으로 치달을지라도 말이다. 448

 

이 경쟁적인 영역세서 중요한 점은 이제는 조직된 시장과 소비자의 개념들이 우리의 경제적 삶과 사회의 나머지 대부분을 결정한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도전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교란되어서 어떤 원칙을 갖춘 반대도 임금에 대한 요구와 파업의 끝없는 승강이와 씁쓸함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만족하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현 상황은 우리를 계속 서로 싸우게 하고, 매우 빠르게 조야한 경제적 냉소주의의 패턴을 장려하면서도 이에 대한 뚜렷하고도 실질적인 대안은 없다. 그 명백한 미래를 사실상 실현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그것을 실체화하려는 도전에 직면해야만 할 것이다. 454

 

일에서 우리 사회 대다수의 패턴은 모든 상황에 대해서 지도자를 고정할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단호하게 추진하는 것이 그들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라고 장려하는 식의 해석을 제공한다. 결국 개가 사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개 스스로가 줄을 이끌고 가는 것이다. 455

 

잠정적 진술이라는 관습은 의견을 말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특권과 합리적으로 떼어서 볼 수 있다는 데 가치가 있다. 이는 공동의 의견에 도달하려면 결국 필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노동운동의 솔직한 화법은 모든 것을 고려해보면, 인간 관리와 비밀스러운 독재자로보터 이슈들이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위대한 성과이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주의의 작동은 공격적인 주장을 하는 습관으로 인하여 해를 입었으며, 이는 분명 민주주의의 전 단계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해 외치고 때로는 공동의 과정을 개인적인 시위로 바꿈으로써 공동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인시키는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의 언어니까 말이다. 460

 

우리 삶의 다른 광범위한 분야에서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민주주의가 전국적 수준에서는 정부를 선출하는 과정으로 제한되어 있고 다른 분야의 사회 조직이 지속적으로 비민주적인 결정 양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은 현 상태대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도의 실제 권력이란 그들이 적극적으로 특수한 감정의 방식을 가르친다는 것이며,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제도가 부족하다는 것은 단박에 분명해진다. 464

 

일상적으로 만나면 대개 유쾌한 공공 관리가 왜 그렇게 자주 사회적인 보장을 전반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유달리 해를 끼치는 공무원으로 돌변하는가? 그 사람 위에 너무 많은 공무원들이 있는 것도 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일반적으로는 리더쉽, 행정의 패턴과 어조가 여전히 민주주의의 전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고객들을 다루는 사업가는 친절한 인상을 주도록 학습한다. 일반적으로 그 수준에서는 공무원들도 그러하다. 그러나 공영주택에 입주해 사는 사람들은 원래 열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공무원도 있는데, 그들은 그런 생각에 맞게 말하고 쓴다. 물론 치유법은 그들에게 인간 관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공공 설비의 분야에서 민주적인 형식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468

 

볕뉘. 이것저것 준비해서 저녁을 챙기고 나니, 피곤이 접힌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자정인근....일본사 첫모임 뒤풀이를 하고 있던 벗이 전화가 와 통화를 한다. 가까이 가깝게 울릉도라고 같이 갈 궁리중이라고... ...같이 가자고... ...  그 뒤로 책을 건네들고 본다. 문화혁명  새삼스러운 말일까?  저자는 그동안 배움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의무같은 것일지도... .자본주의가 소비자에 머무르는 인간을 양산해 쪼그라들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것도 개같은 지도자가 사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끌고가는 형국이 될 것이라고 한다. 에릭 홉스봄과 친구이자 문화연구를 평생에 걸쳐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의 지적 경향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것에 경도되자마자 그 양동이 안에 있던 마르크스주의와 그간의 축적물이란 아이를 같이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지적자산과 저력같은 것이 느껴진다.  연구가 아니라 실천의 방편이자 무기로서 이론작업에 얼마나 천착했는지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문화 앞부분에 용어설명을 읽다. 문화, 언어, 이데올로기....역사의 맥락을 짚어준다.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자장 속에 용어가 살아움직이게끔 하는 것 같다. 전체를 보려는 노력 또한 읽힌다. 1961년 저작인데 낯설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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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시민아카데미가 펴낸 인문학 잡지 <상상> 2호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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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요?'

지난 2006년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피습직후 병상에서 깨어나 한 첫 마디다. 박 전 대표가 물은 것은 대전시장 선거 판도였다.

최근 출간된 <상상> 2호도 "대전은요?"라고 묻는다. <상상>은 대전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인문학 잡지다. 이번호 <상상>의 시선은 '2015 대전이라는 도시'다. 도시 '대전'의 탄생에서 부터 현재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분량(184쪽)에 비해 두툼한 주제의식을 품고 있다.

첫 페이지는 지역 노동 현장의 목소리다. 자동차 엔진부품을 생산하는 대한이연(대전시 대덕구) 노동자의 삶이다. 글쓴이 이정림(지속가능한 공동체 연구자)이 현장 노동자(엄연섭)를 사전 인터뷰하고 현장 탐방기를 실감나게 엮었다.

노조간부는 가장 어려운 점을 묻는 질문에 "사회분위기로 인해 조직력이 약화될 것에 대한 불안"이라고 답한다. 최장집 교수가 말한 노동의 가치를 쓸모없게 만드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염려한 것이다.

대전은 아니지만 인근 충남 청양 비봉면 강정마을에서 현재진행형인 석면폐광산에 있는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장 반대 주민의 사연은 가슴 시리다. 전진식 기자(한겨레 21)는 마을 주민인 이기태 할아버지와 같은 마을에 사는 10살 소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할아버지는 지난 2011년 석면폐증 2급 진단을 받고 세숫대야에 한가득 피를 토해오다 지난해 12월 숨졌다. 같은 마을에 사는 초등학교 3학년인 10살 소녀를 보는 마을 주민들은 폐기물처리장에서 날리는 먼지와 석면광산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전 기자는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석화 청양군수, 관련 공무원들에게 말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더구나 그들의 고통에 단 1g이라도 책임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제라도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에 나서줄 것을 희망한다"고. 독자들에게는 "희망버스 또는 마음을 보내 달라"고 제안한다.

일제강점기 때 찍은 옛 '소제호'(대전시 동구 소제동) 사진을 통해 들여다 본 '대전의 탄생'(고윤수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은 대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소제호 주변에 살았던 우암 송시열과 일제강점기 때 소제호 입구에 만들어진 신사, 일본풍으로 변한 소제 공원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 '대전'의 탄생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는 자연스럽게 '도시 재생'을 벌이고 있는 현재와 이어진다. 이상희(대전근대아카이브즈포럼 연구원)는 대전역 광장에서부터 옛 충남도청사까지 원도심의 역사를 속도감 있게 훑어 낸다. 그는 176억 여원이 투여된 '목척교 리모델링' 공사와 으능정이에 165억 원을 들여 만든 '스카이로드'를 께름하게 평한다.

이용원(월간 토마토 편집국장)은 한술 더 떠 '목척교'와 스카이로드를 대전시가 만들어낸 '도시 괴물'로 규정한다. 그는 "경관을 재구성해야 한다"면서도 "자본주의적 상상력이 아닌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경관을 바로 보는 시작을 교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상희는 "원도심을 역사와 문화, 개발이 서로 공존하는 문화중심 공간으로 재생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대전시 도시재생본부에 대해서도 "도시재생이 부동산 개발의 또 다른 어휘로 사용되지 않길 바란다"고 충고하고 있다.

금홍섭(혁신자치포럼 운영위원장)의 '대전시의 무분별한 민자, 외자유치로 인한 사업 실패' 사례도 챙겨 볼만 하다. 갑천고속화도로 외자유치사업, 롯데테마파크 유치사업, 보문산 아쿠아월드 민간투자사업, 성북동 종합관광단지 외자유치사업 등을 사례로 혈세가 허투로 쓰고 있는 시정을 꼬집고 있다. 

송덕호(시민참여연구센터 과학문화위원)의 '과학 문화의 한계들'과 윤석진(충남대 국문과교수)의 '인문학과 과학기술, 그리고 문화산업'은 과학이 지역민을 위한 삶의 문화로 뿌리내리기 위한 조건과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데 필요한 화두를 제공한다.

지상대담 '경제문제 해결, 왜 어려운가'(조복현,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의 글은 실업과 소득불평등, 경제불안정이라는 화두에 대한 서로 다른 경제학자들의 입장을 비교적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조 교수는 "경제이론이 교묘히 기득권층의 이익을 우선하도록 수립되고 집행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글로 맺음하고 있다.  

이 밖에 '대전 시티즌 널 위해 노래해'(김준태 축구여행가), '대전지역 학생인권을 이야기하다'(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스페이스 씨(얼마 전 문 닫은 대안 공간)를 통해 본 지역대안공간의 방향성'(김경량 대안문화공간 운영자)의 글은 행복한 대전 만들기를 위한 구체적 고민을 안겨준다.    

'위화소설을 통해 본 중국이 현대'(신의연 서남대 중국학과 교수), '동아시아라는 화두의 여정'(윤여일 사회학자)의 글은 중국과 동아시아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알맞다.  

신명식 발행인은 " 조금은 가난하고 조금은 넉넉한 사람들이 한발짝 씩 다가가서 어깨를 기대고 살아가는 꿈을 담고 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대전시민아카데미가 연 2회 발간되는 <상상>은 지역을 기반한 인문잡지를 표방하며 향후 계간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잡지신청 및 문의/042-489-2130, tjca@hanmail.net)

태그:상상, 대전시민아카데미, 2호, 인문학잡지, 대전의 탄생

 

 

볕뉘.

 

1. 마을마다 잡지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깊이'와 '넓이' 그리고 '마음'을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렵더라도 꾸준히 해 볼 일이다. 상상구독 요청이 더 많이 들어오면 좋겠지만... ...년 2만원의 착한 가격으로 어줍잖은 글은 냉정히 편집해버리는 상상편집위원들과 편집장의 역할을 기대해보면 상상 3호는 정말 폐부를 깊숙히 찌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오마이뉴스의 허락을 얻어 전문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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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기회주의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삶이란 영원한 투쟁의 삶, 특히 자신과 투쟁하는 삶이라 생각한다...행복하게 지낼 양이면 쪼다로 살면 된다.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이다. 15

 

인민이여 안녕, 민주주의여 안녕

 

우리는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전연 겹쳐질 수 없는 이질적인 주체이면서 생뚱맞게 자신은 하나라고 자처하는 풍경을 마주한 바 있다. 그 때 거리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며 헌법1조가를 불렸다. 자신을 해방의 주체로 내세우는 보편적인 인민이라는 외양을 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회적 집단의 묶음에 불과했다. 실은 그 시위대를 조직하고 이끈 것은 16백여 개가 넘는 각각의 사회적 욕구와 이해에 따라 결집한 시민사회단체들이었다. 그리고 이 인상적인 장면은 이른바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상대함에 있어 좌파정치가 얼마나 무력하였는지를 보여주었다. 43-44 (촛불은 왜 무력한가? 무엇을 바꾸었나?)

 

1990년대 이후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들의 모임과 같은 형태를 띤 사회운동이 범람하는 것을 목격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운동에서 사회를 총체화하는 정치적 결정을 스스로 떠맡는 주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순간 사회운동은 국회를 쳐다볼 뿐이다....우리는 어느 새인가 청문회와 감사의 전문가 및 스타가 되어 맹활약을 떨치지만 사회운동을 조직하고 그것을 정치적 결정의 주체로 구성하는 일에는 무력하기만 한 진보정당의 패주를 이미 지난 십 년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파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적 대의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애쓰는 야릇한 시대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44 ( 왜 사회운동은 대의제만 강화시키는가?)

 

달아나는 사회, 그리고 사회-주의 이후의 정치

 

사회적인 것을 사회로 변환시킬 수 있도록 했던 주요 조건들(조직화된 노동자운동의 등장과 테일러주의, 포드주의에 기반을 둔 경영자본주의의 정착, 국민국가의 일반화, 현실사회주의의 존재 등)이 소멸한 지금, 과연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합리성의 원리를 발견했던 정치가 소생하거나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65 이제 더 이상 국민이란 이름으로 제공되는 집합적인 연대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안전에 따라 시장이 제공하는 사이비 연대를 구입하는 산산이 흩어진 개인들의 연대이다. ....시민연대는 국민연대의 추상적이고 얼굴 없는 익명성을 대체한다고 자처한다. 숱한 협동조합, 대부조합, 생활공동체, 화폐공동체 같은 것이 유행하고 장려되고 있다...이것이 연대의 해체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연대의 조직인지 단정하기 어렵다....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시민연대가 신속하게 시장에 의해 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66-67(대안공동체, 대안 모색은 왜 삶과 진정한 변혁을 어렵게 하는가? 바꾸는 것은 무엇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 변화의 지점을 고민하고 있는가?)

 

우리가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 퍼뜩 떠오르는 것은 그들의 법률적 고용 조건보다 흔히 한국에서 ‘4대보험이라고 불리는 사회보장의 바깥에 있다는, 불안한 처지이다. 사회국가가 만들어 놓은 사회의 이미지, 즉 국민연대의 체계로서의 사회는 그 연대를 사회보장을 통해 물질화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사회보장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회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과의 연대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고, 연대에의 가입과 소속은 사회에의 가입과 소속이란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87 ( 왜 비정규직과 실업자는 국민이 아닌가? 국민일 수 없는가? 왜 시민일 수 없는가? 왜 인간이 아닌가? )

 

프랑스대혁명은 일체의 봉건적인 특권을 폐지함으로서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뜻에 따라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에 의해 비참한 삶으로 몰리게 된 자들이 요구하는 끊임없는 변화로부터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위협을 겪도록 예정되었다. 프랑스대혁명이 선언한 인권과 시민권은, 언제나 변화란 가능하며 그를 위해 누구나 행동할 수 있음을 적어도 이념적으로 약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나아가 시민이라면 나 또는 우리에게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권리 없는 정치란 말은 정치가 없다는 것과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치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가능성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조직하는 행위로서의 정치, 그리고 그것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의 권리 즉 주권은 처음부터 자신의 이율배반,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77-78 ( 혁명의 관성은 어떻게 150년을 견딜 수 있었는가? 그 조건은 무엇이었나? )

 

동즐로 같은 이는 주권의 모순이 어떻게 사회를 발생시켰는지 추적한다. 그는 권리와 필요를 중재하는 대상으로서 사회란 것이 출현하였음을 밝혀준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부정적 효과를 제어하려 억압했던 주권의 모순이 거듭해서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그건 사고의 방향에서 그는 68혁명의 반란을 사회국가가 만들어낸 사회가 한계에 봉착하면서 마침내 다시 되돌아온 주권적인 개인의 반란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바라본다. 그렇지만 그러한 주권적 개인의 반란은 새로운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전략으로 흡수되어버리고 만다. 지금 그러한 주권적 개인의 모습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사회 없는 개인의 연대, ‘기업가적 개인의 연대 아닌 연대로 대체되어버린다. 83-84

 

제거할 수 없는 정치의 불변항, 노동

 

정리해고, 비정규직, 더욱 팍팍해진 노동강도, 재병영화된 일터의 문화, 실질임금의 감소 등은 그냥 사회적 현상일 뿐이다. 사람들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노동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박탈당해 있으며 불안정하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사회주의자도 그렇게 말하고 자유주의자도 그렇게 말하며, 노동조합운동가도 그렇게 말하고 자선기관이나 인도주의기관의 활동가도 그렇게 말하고, 마침내 바티칸의 교황도 그렇게 말한다. 모두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악에 대하여 말한다. 실업과 빈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비참한 삶에 관하여 모두 개탄한다. 노동 그리고 노동하는 자의 사회적 삶은 언제나 우리를 화나게 하고 눈물짓게 하고 또 미치게 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94 가나의 시학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정치의 연료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자본은 영속적인 실업과 빈곤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자본이 존속하려면 그러한 노동권은 제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이 적용된 이차적이거나 하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시민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의 권리에 구체적인 낯을 부여한다. 노동의 자기 영유,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통해 형성된 인간-시민이야말로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시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의 하위 집합이 아니라 거꾸로 인권과 시민권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노동권을 제거하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인간도 제거하는 것이 된다. 109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이뤄지는 유동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자유·평등·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자유, 평등, 소유라는 천부인권의 신조가 기만일 뿐이며, 그것은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즤적 관념을 은폐하는 관념이라는 것이 아니다. 외려 벤담을 추가함으로서 소급적으로 앞의 자유, 평등, 소유라는 세 가지 낱말이 전연 다른 의미로 채색된다는 점을 말한다. 물론 벤담이 추가될 수 있는 조건은 그것이 바로 상품교환의 세계, 노동이 상품이 되어버린 세계일 때이다. 따라서 덧붙여진벤담은, 결국 사후적으로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어내면서 자유, 평등, 소유라는 개념들을 새로운 사슬로 묶어낸다. 114

 

우리는 게토나 방리유, 파벨라 대신에 자신의 얼굴을 숨긴 채 세계를 향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원한을 드러내는 개인을 볼 뿐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에겐 게토나 방리유가 없는 것일까 물어보아야 마땅하다. 120

 

어쨌든 사회문제라고 명명된 문제, 무엇보다 실업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나선다. 그리고 나아가 국가는 실업과 결부된 사회문제들, 폭력, 범죄, 알코올중독,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병리현상 따위를 해결하도록 종용받는다. 이 과정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답을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정치세력(대개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집단)이 부상한다. 그들은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워 사회문제의 해결을 내세운다.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은 알다시피 실업의 위험에 직면한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끔찍한 풍경에 겁을 집어먹은 중산층들이다. 극우 국수주의 정치집단이나 포퓰리즘 정치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이를 문화적인 문제 혹은 사회병리적인 문제로 가늠하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에 고유한 실업문제이기 때문이다. 121

 

안전이 사라진 세계에서 번창하는 불안의 분위기는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전염된다. 우리 역시 덩달아 노령화 시대, 백 세 시대에 온갖 질병과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이냐고 위협하는 보험업자들과 금융업자들의 공갈에 벌벌 떤다....자본이 노동을 () 생산할 수 없을 때, 국가는 그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본을 위한 것도 자본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123

 

노동의 편에 설 때에 비로소 실업은 자신을 재현할 수 있으며 아울러 자신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실업이 노동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여겨질 때, 그것은 그저 비참한 삶의 상태에 불과할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자신을 대표할 어떤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은 지리멸렬한 사회적 사실에 머물고 말 것이다. 이럴 때 실업문제란 환경 문제, 고령화 문제, 가정폭력 문제 같은 수많은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그렇지만 그에 연루된 사람들이 조금 많다는 이유로 조금 더 중요해진 문제일 뿐이게 된다. 127

 

한 낱말이 정서적으로 쇠락한다는 것은 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김지하의 신 새벽 뒷골목에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시구에 나오는 민주주의란 낱말은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평범한 용어가 아니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말을 뇌면서 떨거나 전율했던 이들에게,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사물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128

 

노동의 새벽에서 노동은 그저 세상사의 한 부분, 즉 객관적인 사태가 아니라 세상에 관한 시점의 차이를 낳는 대상으로 주관화된다. 노동은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삶의 사태가 아니라 갑자기 내가 세상을 응시하는 입장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주관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노동에 관한시가 아니라 노동이란 대상을 통해 촉발된 새로운 주체의 시점을 표상하는 시가된다. 그러나 지금 노동이란 말은 시체말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아무 감응을 주지 않는다. 130

 

인간-시민이란 범주의 등뒤에는 항시 노동이라는 유령이 붙어 다닌다. 그것은 결코 제거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우리는 오직 정치적 공동체와 권리의 주체만이 있는 정치학을 요구하며 노동 없는 해방의 정치를 강변하는 주장이 부쩍 관심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들 역시 평등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평등이란 착취와 그를 대신할 평등이 아니라 시민 됨의 자격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평등이다. 특히나 사회국가에서처럼 포용하면서도 불평등을 생산하는 세계가 아니라 배제가 문제되는 세계에서 평등을 더욱 그런 평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자신의 지위에서 영영 벗어날 길이 없어 보여 마치 특수한 정체성을 가진 자연스런 인구학적 집단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결국 이들에서 배제란 현실은 노동의 정치에 앞서 시민권의 정치가 우선시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132

 

무엇이든 권리의 가면을 쓰고 등장할 수 있는 권리의 낙원이 나타났을 때, 전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부르주아적 권리이다. 우리는 분명 권리의 낙원에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공교육을 거부하고 무력화할 수 있는 학습자-소비자의 권리, 파업이라는 노동자의 단결권을 제어하는 희대의 권리로 등장한 손해배상청구권 등만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정체성의 정치를 비롯한 소수자 권리와 같은 것은 인권-시민권은 실체가 없는 순수한 형식일 뿐이라는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보인다. 135

 

노동을 통해 매개된 민주주의의 전환, 인권-시민권의 제도화야말로 진정으로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란 이름에 부합하는 것이 될 수 잇다.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민주화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시민권을 합당하게 규정하고 현실화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는커녕 민주주의의 탈민주화라고 부를만한 사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그 어떤 정치적 민주화도 그들이 말하는 경제의 민주화, 탈국가화, 규제완화 등의 이름에 의해 손쉽게 무효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137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상품 소유자의 사적 소유를 언제나 우위에 둔다. 그리고 노동 역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그런 세계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불평등과 착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사라지고 있는 사회국가가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연대의 다른 이름인 사회를 통해 고용된 노동자는 물론 실업자, 여성, 아동, 노년, 질병에 걸리거나 재해를 입은 자 등의 삶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오직 시장에 입장할 수 있을 때, 즉 고용될 수 있을 때에만 그런 보호와 안전을 제공받는다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권리의 토대는 오직 시장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인권과 시민권을 쇠퇴시키고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업은 사회문제도 아니고 노동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다시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민주주의로서의 정치가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141

 

종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

 

경제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경제가 정치의 궁극적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치는 사고된경제, ‘반영된경제가 아니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한 번만 제곱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제곱해야 한다. 경제는 직접 정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외려 정치가 스스로의 대상을 갖도록 함으로서 정치를 결정한다. 따라서 정치의 비밀은 정치 자체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자신의 비밀을 갖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정치 자체의 차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른 곳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정치란 순전한 형식에 속하고 그것의 실질적 내용은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식의 아둔한 경제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경제에 의한 결정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한 것을 떠올리자면 경제와 정치를 종합할 수 있는 제3의 자리를 찾고자 애쓰지 않으면서, 즉 두 사이의 불가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양자의 전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길, 그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159-160

 

알튀세르는 전체와 총체를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헤겔이 총체를 주장했다면 바로 그것을 전체란 범주로 전환한 것이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말한다. 실은 이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그의 평생의 목표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최종심급, 구조화된 전체, 과잉결정, 모순을 불균등성같은 명제들은 실은 바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것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총체와 전체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를 우리는 총체란 중심과 기원을 갖는 반면 전체란 탈중심성과 불균등성 그리고 원인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자본의 한계는 자기 자신인 것처럼, 자신을 총체화할 수 없는 자본의 한계를 전체라는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제는 정치를 결정한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경제는 근본적으로 모순에 의해 시달리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총체로서 완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정치로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177-178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결정하는 경제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시에 흔히 현실경제, 경제현상이라고 부르는 경제도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제는 두 가지 대립적인 규정의 결합이다. 지젝은 이런 대립적 규정 사이의 차이, 두 가지 경제 사이의 간극이 정치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지젝은 전부는 아닌다시 말해 그것을 완결적인 총체로 닫아버리지 못하게 하는 적대, 모순(=경제+으로 인해 정치가 등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179

 

박근혜 정권이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표하기는커녕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권은 과도한 특권을 누리는 나머지 집단에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보통 국민을 대립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은 순순히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현정권을 비판하는 사회운동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 반응은 야박하게 말하자면 짜증스럽고 성가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포퓰리즘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자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두를 대표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우리는 성실하게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착한 국민과 조금도 특권을 내려놓지 않으려고발버둥 치며 우리에게 기생하는 사회의 공적이라는 대립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인기를 누리는 정치권력과 마주하고 있다....포퓰리즘은 바로 그런 두 제곱된 사고가 불가능할 때 불투명하게 보이기만 하는 정치를 그리기 위해 만들어낸 무력한 표상일 뿐이다. 184-186

 

 

 

 

볕뉘. 어젯밤 치통이 파도처럼 밀려와 애를 먹는 와중, 다시 한번 완독한다. 저자 스스로 비망록으로 쓰고 보여주기 부끄럽지만 애써 읽어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몇달 책 속의 책과 고민을 섞어본다. 서재 속 변증법의 낮잠을 강독한 분들이 함께 들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눈다는 것은 책만이 아니다. 경험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또 다른 사유의 방법을 문득 가져가는 것이기도 하다. 책 읽는 이들에게 골방은 그런대로 봐줄 만도 하지만 이렇게 외유를 하는 것도 더 좋은 방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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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5-06-24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개인적으로 서동진 님 좋아해요.
어려운 철학적 얘기를 쉽게 풀어가려고 애쓰신달까?
아쉽네요, 좋은 강좌가, 그것도 평일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곳에서 있군요~!

여울 2015-06-25 08:53   좋아요 0 | URL
그쵸 비교적 쉽게?
하지만 어렵게 어렵게 배워야 철학은 남는 거 아닌가요? ㅎㅎ

독자로서 질문과
저자로서 견해가
서로 섞여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겠어요.

이상적인 만남이긴 하지만요....저에게도 멀리 떨어진 곳이네요~~
 

볕뉘.

 

1. 가끔 책이 다가서는 느낌을 받는다. 밀쳐두고 있었는데 오늘만을 나를 챙겨달라는, 챙기고 싶은 날이었다. 그 책은 하루를 멍하니 버림받고 일요일 바닷가 옆 한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 시선을 끈다.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자연과 인간의 네덜란드-영국-미국의 상업-산업-금융의 순환구조가 잔상처럼 남아있기도 하다. 제임슨의 언제나 역사화하라는 명제도 그러하다. 경제와 형식을 눈치채지 못하면 전체에 근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늘 염두에 두어야할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예전에 읽은 리오리엔트가 생각이 난다. 동양이 유럽보다 훨씬 더 큰 부를 가지고 있었다라는 자각 뒤 여운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면서에 이 책은 그 궁금증을 잔뿌리처럼 내리면서 이어주고 있다. 울프는 1400년이후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인물을 통해 전대륙을 옮겨다니게 한다. 삶의 흐름으로 이어진 전체적인 조망을 우선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공납제적 생산양식, 다소 헷갈리겠지만 원시적 생산양식이 아니라 친족적 생산양식을 염두에 둔다.

 

2. 마르크스를 오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그의 변증법적이 접근방식이다. 예술가의 독특한 그림의 문체를 읽을 수 있듯이, 삶의 문체가 있다면 평생 유지한 관점이 이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전체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에는 예단이 없다. 그가 만일 지금 다시 재현한다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과물이나 한 말을 두고 단정짓는 것은 평생 피하고자 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속류마르크스주의자들은 늘 밑줄에 경도되어 있다. 경도되어야 할 것은 현실이다. 현실에서 전체, 총체를 향하는 노력이 조금 더 낫게 보는 이를 늘릴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강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좋은 책이 아니라 디딤돌로서의 책과 사실들... ...

 

3. 인디언 수많은 종족들이 모피교역에 어떻게 연루되면서 바뀌어나가는지, 왜 유독 아프리카가 노예무역으로 이어졌는지, 역사에 잡히지 않는 많은 흐름들이 융기하고 대륙을 잇고 뼈에 살점을 붙이고 혈액을 순환시킨다.  전체를 볼 수 없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4. 정치경제학에서 정치를 발라내어 정치학이라, 사회를 발라내어 사회학이라,  경제를 발라내서 경제학이라 이름짓고 결국 모르쇠로 일관하는 학문의 말로는 어쩌면 지금 여기 삶의 흐름이란 맥을 잡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는 반증에 늘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과학기술도 똑 같다.  그 총체라는 것, 전체라는 것, 실체라는 것, 또 다른 사고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전체를 맛보는 기술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학문이라는 것은 분과학문의 덧셈이 아니다.  통찰이나 깨우침같은 것이 학문을 살아있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껍다 아직 1/3을 남겨두고 있다.

 

 

울프의 연구에서 크게 관심이 가 있는 것은 경제적·정치적 힘의 격차가 존재하는 상황들에 사회적 관계들이 포섭되는 방식들이다. 자본주의를 다룬 이론들을 가져다가, 연구를 진행하면서 지역의 상황에 맞도록 이 이론들을 수정해서, 울프는 이 지금은 거의 보편적이 된 생산, 소비, 분배 체제가 갖는 거대한 변형력을, 그러니까 어떻게 교역이, 또 나중에는 대규모 산업적 생산이 세계 전역의 지역 공동체들을 변형시켰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19

 

학문적 연구에서는, 국경을 넘는 송금들을 지금껏 주로 개발이론의 틀 안에서 다뤘다. 지금까지 그 문화적·사회적인 총체적 배경 안에서 연구한 경우는 채 몇 명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태만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송금이 문화적 의미로 사실상 넘쳐나고 또 중요한 사회적 관계들의 성격을 매우 정확한 방식으로 반영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러하다. 송금이 도덕적인, 증여적인, 또 사회를 조직하는 측면들을 가진다는 점을 크게 강조할 경우, 세계화 인류학이 사회 분석의 분명한 한 형식으로서 인정을 받는 데 도움이 되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3

 

우리는 지구 크기의 당구장 같은 세계 모형을 만들어, 그 안에서 국가, 사회, 문화라는 저 실체들이 같은 수의 딱딱하고 둥근 당구공들처럼 서로 떨어져 돌아간다. 그리하여 세계를 색깔이 다른 공들끼리로 분류하기가, “동양은 동양, 서양은 서양, 결코 이 둘은 만나지 않으리라고 언명하기가 쉬워진다. 이렇게 해서 어떤 순수한 서양이 똑같이 순수한 동양에 마주 놓이게 되거니와, 이때의 동양이란 생명이 값어치가 없으며 노예적 대중은 여려 형태의 전제정 아래 굽실거리던 곳이었다. 나중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서양과 동양 둘 다로부터 자기네의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자, 우리는 역사적 지위를 구하는 이 새 신청자들을 저발전 상태의 어떤 제3세계에 할당하고는, 발전한 서양과 발전 중인 동양과 또 대비되는 것으로 취급했다. 54

 

전문화된 사회과학들은 전체론적 시각을 저버렸던바 그리하여 각각 밑이 빠진 물통에 물을 길어다 부어야 하는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은 저 고대 그리스 전설 속 다나에 자매들을 닮게 된다. 62

 

마르크스는 보편사를 주장한 역사가도, 사건사를 다룬 역사가도 아니었다. 물질적 관게들의 결합구조 또는 작동 양식을 연구한 역사가였다. 마르크스는 활동력의 대부분을 써가며, 당연하거니와, 한 특정 생산양식의 역사와 작동방식을 이해하려 노력했으니, 자본주의였고, 이것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려고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혁명적 변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전문화된 학문적 담론은 혁명과 무질서에 대한 해독제로서 발전했던 만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거니와, 이 유령 같은 질문자가 학문의 전당들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유령은 우리에게 불가결한 가르침을 준다. 첫째, 우리가 세계 시장의 성장사와 자본주의적 발전의 경과를 추적하지 않으면,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둘째, 이 성장과 발전을 설명할 가설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이 넓어져가는 흐름에 관한 역사와 가설 둘 다를 각 지역 인간집단들의 삶을 결정하고 바꾸는 흐름들에 다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82-83

 

네덜란드 연합주는 산업을 발전시키는 쪽으로 돌아서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해운, 조선, 또 여기에 맞물려 있던 활동들이 계속 중요했고 계속 수지도 맞았다. 둘째, 상업활동 쪽의 수익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는데, 사실 직물 생산에 투자하는 쪽의 수익보다 놓았다. 셋째, 네덜란드 연합주의 농업은 이미 자본집약적이고 전문화돼 있었으며, 거기다 높은 임금을 주고 있었고, 이런 까닭에 낮은 임금을 받고 산업노동력을 제공해줄 가난한 농촌 사람들이, 잉글랜드에는 있었으나, 여기에는 없었다. 넷째, 네덜란드의 발전상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두 기술이나 용역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궁극적으로 비롯된 것이었지, 자체의 튼튼한 자원 기반 같은 것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연합주는 인구가 적었다. 네덜란드 인구는 1514275000명에서 1680년에는 883000명까지 늘어났다가, 1750년에는 783000명으로 떨어졌다. 사실, 인력이 해운 쪽에서조차 부족해서, 18세기에는 스칸디나비아나 북독일 사람들이 갈수록 더 많이 고용돼 네덜란드 선박들에서 선원으로 일을 했다. 게다가 네덜란드 연합주는 석탄도 철도 나지 않았으니, 둘 다 풍부하게 묻혀 있던 잉글랜드와는 사정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이 공화국은 거의 자치적인 도시국가들이뭉친 정치적 단위였고, 도시들 각각에는 자체의 과두적 상인 지배집단이 있었다. 257

 

유럽 상인들은 심지어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할 때 채용되던 작업 조직이며 노동 조건까지도 여기서 또 저기서 바꿨다. 하지만 이네들이 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자기네 부를 자본으로 사용해서 생산수단을 획득해 변형시키고, 다시 노동자 계급이 팔려고 내놓은 노동력을 구매해 이 생산수단을 돌리는 것이었다. 264

 

이 공무-종교 조직은 생활단위를 초자연적 존재와 이어주는 의식들도 집행했다. 이런 의식들은 대체로 이중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기독교적이었고 한편은 이교적이었다. 기독교는 종교적 공간을 정하는 쪽으로는 종교적 시간의 경우보다 관심이 덜하다고 할 텐데, 예루살렘이나 로마, 아시시, 루르드 같은 종교적 장소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타락, 구속, 심판, 부활을 통한 시간의 누적이라 하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스파냐 지배 이전 종교들은 고도로 공간을 중심으로 조직돼 있어서, 공간상의 구획들을 가지고 시간의 구획들을 구별하고, 사회집단들의 속성들을 규정하며, 자연의 국면들을 구분하고, 초자연적 존재들을 분류했다. 이제 기독교 전례력과 에스파냐 지배 이전 종교들이 융합괴면서 기독교적 구원의 시간 틀이 기도교 이전 전통들의 이런 자연 대상들과 연결됐다....이 구조물을 조직하고 유지한 것이 포괄적인 정치단위인 잉카나 멕시카, 치브차였다. 정복은 이 더 큰 이념적 구조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기독교의 구원 계획을 들여놓았다....이렇게 해서 생겨난 종교적 구조들은 생활단위, 생활단위마다에서 서로 달랐거니와, 이념적 지역중심주의를 띠었던 점에서는 생활단위들이 정치적으로 분리돼 있던 양상과 비슷했다. 314 인디언 생활단위들은 이렇게 보면 더 큰 정치적·경제적 체제에 예속된 부분들이었으며, 이 체제가 바뀌는 데에 따라 같이 바뀌었다. 이 생활단위들은 에스파냐 지배 이전 과거의 부족적흔적들도 아니었고, 어떤 불변의 속성들로 특징지어지는 정태적 유형의 소농 공동체도 아니었다. 315

 

탈주노예들은 무리사회를 이뤘으며, 환경상의 조건들이 도와줬던 경우에는 더 안정적인 생활단위를 이루기도 했다. 마로나주는, 프랑스인들은 이 탈주 현상을 이렇게 불렀거니와, 재식농원 생활의 일관된 또 주요한 특징이었으니, 재식농원 체제로서는 서서히 그러면서 그치지 않는 일종의 출혈이었다. 탈주 노예들의 반란 공동체들은 어디서나 나타났다. ...이런 집단들은 밀수나 해적질에도 자주 손을 대서 자기네 생존형 농경을 보충했고, 남아메리카 북쪽 해안의 에스파냐 방어시설을 찔러노븐 무장 약탈 세력들에게 힘을 빌려줄 때도 많았다. 329

 

저지대 해안들과 섬들에 조성된 재식농원 지대에서, 유럽인 재식농원주들과 그 후손들은 기존의 친족질서적 사회들과 공납제적 사회들의 저항을 꺾고, 이제 이 사회들을 아프리카인 노예 작업대들로 대체해, 강제 집단농경 체제 아래서 일을 시켰다. 이 체제는 수출용 작물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했던 것이지만, 또 재식농원 지대를 격리시키기도 했으니, 내륙으로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이 해안 지대의 노동자들이 내륙 변경으로 탈출하지 못하게도 했던 것이다. 수출용 작물들을 생산하면서 이 지대는 유럽 쪽 시장들에 단단히 매이게 됐고, 거기다 새 노예들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게되면서, 재식농원 아메리카는 세 대륙이 참여하며 확대돼가던 노예무역에 직접 통합됐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인 노예들과 그 후손들은 브라질의 대서양 해안지대에서 지배적 인구집단이 됐고, 카리브 해의 섬들이며 해안 지대에서도, 또 콜롬비아, 에콰도르,페루를 잇는 해안을 따라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331

 

이런 식으로 말과 총이 조합되고, 거기다 상업적 관계들이 확대되는 상황이 맞물리면서 대평원 인디언식 결합구조가 출현하는 조건이 갖춰졌으니, 길지 않은 몇 년이 지나는 동안의 일이었다. 이 결합구조는 빠르게들 채용하는데, 말을 쓰지 않던 수렵-채집민들이나 경작민들이나 차이가 없었다. 여기에다, 이 다양한 인간집단들은 서로를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 닮아갔으며, 서로의 기원이 달랐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수렴이 일어난 이유들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생태적 적응 방식이 내재했다. 들소 떼는 겨울 동안에는 흩어졌는데, 작은 무리를 이뤄 무리를 이뤄 이동해 산속에서 겨울을 났고, 봄에 풀 많은 평원으로 돌아왔다가 7월과 8월 짝짓기 철 동안 다시 거대한 떼를 이뤘다. 들소사냥도 이 주기에 맞춰가야 했다. 373-374

 

포틀래치가 경쟁이나 동맹 맺기에서 가졌던 정치적 기능들은 더 강화됐다. “피의 강을 재물의 강으로 막았다포틀래치가 일종의 저축하기였다면 친족질서적 관계들을 저축했던 것이지 공납제적 부나 자본의 저축은 아니었다. 391

 

백인 하인들이나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들은 자기네 집단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도움을 끌어낼 수 있었던 반면, 아프리카인 노예들은 탈주 노예들의 지원받을 기회를 강제로 차단당했다. 이 교역의 한쪽 끝인 아프리카에서 팔리거나 잡히면서 이네들은 친족들이며 이웃들과 관계가 끊겼거니와, 아메리카 항구들에 도착해서는 부족이나 언어상으로 출신이 다른 노예들끼리 의도적으로 섞어놓아 연대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인들한테로 넘어가고 나서는, 이네들은 백인 하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또 분리됐으니, 법률상의 차별이 이런 분리를 확인했다면 인종주의적 정서의 발달은 이를 더 강화시켰다. 만약 탈주를 했을 때는, 이네들의 피부색은 보상받는 일을 바치던 모든 노예단속반에게 식별표시가 돼줬다. 결국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았을 경우 얻을 수 있었던 노동력은 이런 것이었으니, 한 소유주의 통제 아래 두고 고되고 지속적인 작업에 동원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 따르는 법률상의 또 관습상의 제한은 최저선까지 완화돼 있었다. 이것이 신세계에서 다른 노동 집단들이 대안으로서 갖고 있던 가능성을 닫아버린 것이다.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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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지금까지 논한 바와 같이,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자기반성과 분석은 대다수 동료 사회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독자적인 지적 전통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가 쓸 수 있는 사상적 개념적 자원이 서구의 것밖에 없다는 슬픈 현실을 노정한다. 즉 우리는 서구의 개념적 자원과 이론적 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구의 지적 지배를 인정하고 그에 도전함으로써 뭔가 새로운 것을 변증법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우리의 학술문화에서 하기 어려웠던 지적 도발을 하고 싶었다. 250-251

 

개인의 느낌이 다루는 주제라면 굳은 강의실에서 세미나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집에서 읽고 느낌을 가지면 될 것이다. 토론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느낌혼잣말이 부유하는 가운데 대체 무슨 놈의 접점이 생기겠는가? 접점에서 갑론을박해야 쟁점이 발화할 텐데 여기저기서 갑론을박만 무성하다. 60 ( 볕뉘 1. 조한혜정교수가 학생들과 수업하는 내용을 지적하면서 하는 내용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세미나가 그렇기도 한다. 인상비평에 가깝고, 혼자도 인상만 남기고 만다. 이론의 맥을 잡고 서로 다투는 것도,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희귀한 일이다. 자칫 논쟁을 발화하자고 하면 비판이 아니라 비난으로 느끼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적풍토의 현실이 이렇다. )

 

윌리엄스는 반영매개대신 한계짓기압력 가하기라는 은유로써 언어를 통한 인간의 상호작용 영역에서 결정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는 토대와 상부구조는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토대가 이미 사람의 일상세게에 스며들어 그들의 언어와 인식, 상호작용을 가능케하는 틀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토대가 압력을 가하고 한계를 짓는다는 그의 주장을 문화유물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윌리엄스에게 토대(물질적인 것)는 상부구조(문화)배여 있거나 녹아들어가 있는것이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상부구조를 원격조종하는 게 아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역사의 진정한 전제라고 부른 물질적 삶의 조건인 토대는 속류 마르크스주의 추종자들의 주장처럼 언어나 역사적 자료와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66 ( 볕뉘 2. 80년대 학생운동은 무엇을 지향했을까? 89년 소련의 몰락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마저 내동댕이친 것이 우리의 실수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외치고 이해하던 것은 대부분 속류마르크스주의였을 것이다. 토대와 상부구조를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변증법이라는 것도 정반합으로 암기하고 마는 소련동구류의 인식에 그쳤는지도 모른다. 그런 몰이해와 지적인 전통과 다른 흐름을 붙잡으려는 노력은 부족하거나 현실을 보는 눈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는 것 같다. 김경만저자가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핵심에 대한 몰이해다. 인식의 확장을 위해 깊이 들어가지 않는 사회학에 대해 내놓으라는 교수들의 지적단절이 아닌가 싶다. 더 이상 학문을 하거나 지적흐름을 살피려고 하지 않는 그 지점에 마르크스가 서 있다. 복기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속류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이러한 일련이 지적흐름을 살피는 것이 또 다른 현실에서 김경만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론을 모색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쿤에게 패러다임은 추상적인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소위 예시라 부른 실제 문제풀이 과정에 녹아들어가있다. 또한 그는 주어진 문제들을 풀어가는 행위/실천의 과정 자체가 바로 실재라고 주장한다. 실재 역시 문제풀이 행위에 녹아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결국 과학자들은 문제풀이라는 실천 행위와 실재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습득한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문제풀이를 통해 습득한 실재의 경계 안에서(한계짓기!) 문제풀이, 즉 가설을 수립하거나 실험을 진행하고, 이 과정에서 쉽사리 그 경계선을 넘지 못하게끔 제약을 받는다(압력 가하기!) 67

 

생산력에 조응하는 생산관계 속 위치, 즉 주어진 계급구조 아래 특정한 계급에 위치한 사람들은 계급 하비투스를 몸에 체화하고 있는데, 이것이 일상의 모든 국면에 판단 기준으로 작동해서 사람들의 언어와 사고를 제한하고 압력을 행사한다. 69 (볕뉘 3. 계급의 특성이 달리나타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스펙트럼을 계층으로 포함해서 더 형식의 관점에서 넓게 봐야할지도 모른다. 그 한계를 보거나 사유할 수 있을 때 현실은 또렷하게 상이 맺히기도 하고 더 유연하게 상황을 헤쳐갈 수 있는 여력도 생기게될지 모른다. 계급에 매개하거나 녹아있는 다양한 삶의 양태들에 대한 학문의 결과물이 없다. 인식조차 없으니 그런 결과를 바란다는 것도 의아할 것이다. 문화분석이라는 형태로 뭉둥그려 해석하고 마는 것이 지금은 아닌가 싶다. )

 

윌리엄스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수정분화시켜서 지배문화’ ‘잔여문화’ ‘부상문화같은 일련의 개념들을 내놓는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헤게모니는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전제하지만 당대 사회의식 전체를 완벽하게장악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지배적 의식에 편입되길 거부하는 과거의 지배적 사유가 잔존하고, 한편으론 지배적 의식에 대항해 새롭게 부상하는 의식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헤게모니가 있는 지배적 의식이 존재하지만, 당대 사회의식 전체는 항상 이 세 힘의 역동적 관계, 즉 지배와 저항의 동력학적 관계에 따라 형성하고, 변화하고, 이행한다. 70

 

최재천과 그를 따라하는 학자들은 이미 30년 전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논쟁을 폐기물 재생업자처럼 지금수입해 재생하는 걸까?” 80 위키피디아와 식탁류의 책들은 내용의 간략함이란 공통분모가 있다. 간결함이 왜 문제가 되는가? 어떤 주제든 간에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학자가 논문을 쓸 때 위키피디아를 보고 짜깁기해서 쓸 수는 없다. 논문을 풀어가다 보면 반드시 깊이 파고드는논의가 필요한데, 이런 식의 짜깁기로는 깊이 들어가기는커녕 금세 바닥이 드러나고 말기 때문이다. 78 과학의 대중화니,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니 하는 온갖 구호를 갖다붙이겠지만, 나는 이런 행태가 지적 거인들과의 힘겨운 싸움은 회피한 채 세속적인 성공을 향한 쉬운 길로 가려는 기회주의의 소산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81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미명하에 저자-출판사-미디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해온 학자들은 자신이 대중적 지식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교묘히 감추고, 오히려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당한 상징자본을 획득한 저명한 학자인 양 행세한다. 85

 

한국 사회과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서구이론이 한국에 적실성이 없는데도 무차별적으로 차용한 데 있는 게 아니라, 애당초 적실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황소걸음같은 진득한 탐색과 고구가 전혀 없다는 데 있다 92

 

항해 도중 고장난 배를 수리하려면, 배 전체를 바다 한가운데서 전부 해체해 다시 조립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배의 다른 부분들은 괜찮다고 가정하고 당장 필요한 부분을 배가 떠있는 상태에서 수리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또다른 부분을 다른 모든 부분은 괜찮다는 가정 아래 고쳐야 한다. 이 과정이 하버마스가 제시한 의사소통행위를 통한 언어게임/전통의 변화를 예시해주는 적절한 은유다. 100

 

우리는 이미 서구 사회과학의 개념적 자원과 틀에 젖어 있고 그 언어게임 안에서 움직여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 전통은 유교가 아닌 서구 사회과학임을 강조한다. 유교를 재해석하는 것은 여러 문제가 있고 비용면에서도 현실성이 없는 작업이다. 매몰비용을 생각하면 서구이론과 개념에 따라 연구해온 우리의 과제는 내재적 비판을 통해 서구 사회과학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지, 고비용 저효율이 거의 확실한 유교의 재활용은 아니다. 101-102

 

자료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111

 

이론은 실재나 현실을 잡아내거나 담아내기 위해 고안된 유기적으로 연결된 개념들의 망이다. 118

 

낮은 봉우리들은 최정상의 거장들을 추격하고 있는 학자, 예컨대 랜들 콜린스, 조너선 터너, 악셀 호네트, 존 오닐 등이라고 할 수 있다. 122

 

상아탑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고통이며, 지금까지 진화해온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의 망을 통해 형성된 계보나 전통 에서 논쟁해 창의적 이론을 정립하는 것만이 고통스럽지만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징이익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129

 

하버마스나 부르디외 같은 서구학자가 방한하면 정작 자신의 주장은 까맣게 잊은 채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법석을 떨며 세계적인 학자이니 한국 현실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간청하는 양면적인 모습이 우리 학술문화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글로벌 지식장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국제 미아로 전락해버린 데는 이러한 병적인 풍토와 서글픈 자화상이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131

 

볕뉘 4. 글로벌 지식장도 중요하지만 학문을 하는 사람, 학문하려는 태도와 지속성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분위기가 우선인 듯하다. 그것이 지켜진다면 관심사를 이어나가고 심화시켜 나가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 수 있지 않을까. 가라타니 고진을 지금을 120년전 청일전쟁의 전야와 같다고 말하면서 남북을 쇄국과 개화의 두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해서 다소 의아했다. 하지만 어찌보면 그렇게 봐도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하다. 외부의 흐름을 소화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크게 달라진 것도 없으며 풍토또한 단 한발자욱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횡행하는 반지성주의나 대중과 뒤섞여버리고자하거나 가르치고자 하는 표풀리즘이 제 살을 더 깊숙이 찌르거나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은 아파해야 할 것 같다. 지적전통이라는 것은 이렇게 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현실을 읽지도 못하는 현실 안에서...볕뉘 5. 담론과 해방이후 너무 오랜만이라 지적인 단절이 있었나보다 했다.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 다행이다. 독자로서 이것저것 바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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