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어 터뜨리는 아우성

멈출 수 없어 흘러내리는 눈물

뜨겁다 못해 차가운        첫눈

차갑다 못해 시린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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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자꾸 되뇌는가

 

   

 

말을 만들거나 정한다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다 안을 수 없어서이기도 하고, 말로 묶어두자마자 운신의 폭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겠다. 하루하루 살아나기도 힘든데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삶을 추상화시켜 또 다른 구석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 여유롭게 생각할 기회를 뺏거나 여러 갈래길을 오히려 막는 것은 아닐까? 삶에 밀려가는 강도는 개개인마다 가족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가족이라는 것에 남아있는 정서적인 연대도 점점 사라져간다. 사연만큼 서로 떨어져나가 혼자를 생산하기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삶이 오롯이 가족과 개인을 짓누를 수밖에 없다. 잘 살든, 못 살든, 혼자이든, 여럿이든, 부양가족이 많든 적든, 아프든지 아프지 않든지……. ... 각자생존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피폐함은 늘어나고 원심력이 현실에 더 영향을 미쳐 더 크나큰 어려움이 목도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다.

 

삶의 버거움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뜩이나 조사하는 방법을 취해서도 안될 테고,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감추고 싶은 사실을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다. 가뜩이나 예기치 않은 불운에 연루되어 빚마저 진 마이너스 삶들이라면 더 그렇다. 그래서 모임들 사이사이 양념처럼 나누거나, 책과 주제를 핑계로 가늠해보기도 하고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상을 미뤄 짐작해보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 살림살이의 수준을 느낀다는 것마저 쉽지 않다. 아이들에 대한 기대도, 중요한 일의 순서도 모두 다를 테니까.

 

하지만 경제적 삶, 살림에 대한 규모나 틈을 엿볼 수 있다면, 자본주의 현실에서 그것이 제한하는 운신의 폭과 일상을 양적보다 질적인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면 어떨까? 모르는 것이 약인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현실을 드러내놓지 않으면 어쩌면 더 나은 일상과 출구에 대한 생각조차 헤아리기는 더 어려운 것은 아닐까?

 

좋은 삶은 무엇일까? 우리는 다루어볼 여력이나 남아있는 것일까? 현실감 없는 이야기를 이론의 책장에서 가져다쓰는 것은 아닐까? 어디까지 살펴볼 수 있을까? 고민을 나눌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 역시 책 속의 이야기일 뿐 지금 여기의 생생한 삶, 아픈 현실을 딛고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문턱너머의 이야기는 아닌가? 좋은 시절의 이론 속 탐구는 아닐까? 일상의 한 땀 한땀, 또 다른 아픈 생각들로 다시 채워지지 않는다면 이 역시 무용한 것은 아닐까? 그날그날 먹을 우유와 끼니 걱정도 어려운데, 여유가 가미되거나 경제적 삶이 받쳐주는 삶들의 현실을 어긋난 삶의 주변머리들이나 하는 얘기는 아닐까? 그래도 나눈다는 것은 정녕 우리들 관계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좋은 삶, 좋은 이야기들이 고아한 고전의 풍미들 속에 멈춰져있다면, 단 한걸음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어 이 또한 자신에 대한 위안이나 위문은 아닌가? 곁의 살림에 대한 가늠이 없다면, 다른 이들의 삶들의 변화를 읽거나, 눈여겨볼 수 없다면 이 또한 유행을 쫓아가는 이야기는 아닌가? 돈도 시간도 빙빙 돌아가는 현실에 매여 있는데 좋은 삶이 가당찮은 말씀아닌가? 현실은 그저 빙빙빙 현기증나게 돌고 있는데 무슨? 당신같이 여유붙들어맨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아니 또 다르게 생각하여 만의 하나 곁의 살림살이를 가늠하게 되어, 그것이 숨 쉬듯 서로의 일상 호흡으로 다가온다면 또 다른 출구가 될 수는 없을까? 곁의 삶의 패턴을 읽거나 소화하게 되거나 활동반경의 겹침도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참여의 한계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인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어떻게 매여있게 되는 것인지? 조금 더 새롭게 살려나가는 일들의 영역을 서로 찾을 수는 없는 것인지? 살림살이가 일상의 데이터와 매체를 통해 간접적인 확인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함이 각인되어 좀 더 가슴에 담는 말로 가슴에 새겨진 언어로 가슴을 뒤흔드는 몸짓으로 서로에게 다가서는 방법으로 전화되는 계기는 될 수 없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전제조건이 동일하다는 가정의 물음보다 선행되는 질문과 상황이 있다. 그냥 바라는 것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있고, 영역이 있고, 계획이 있기에 의도가 드러날수록 목적은 외면되는 것이다. 삶의 동선이 우연히 마주치거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만큼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겠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수밖에. 상황과 처지, 형편이 다 다르기에,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도, 그것을 너머선다는 것도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가늠할 수 없다. 이 간극이 줄어들지 않고 멀어지기만 하는지. 가까워지고 있는데, 멀어지지 않고 가까워지는데 오해하는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방편을 삼은 것이 무리수인지, 뜬구름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들은 점차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 경제적 삶은 더 더구나 궁금증의 터부영역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제적 살림, 그 쇠락의 파고는 어김없이 여기에 미치는 것이겠다. 점점 더 살림살이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안위를 찾을 수 있는 이들이 줄어드는 세상이다. 안온을 더 구할 수 있는데 기댈 수 있는 곳이 늘어나길 바라지만, 이 역시 이상이다. 갈증을 느끼지만 탄산수로 일시적인 해소만 할 뿐 끝내 약수를 구할 수 없는 현실. 어쩌면 그 현실을 직시해내고, 가능한 방법과 삶의 시나리오들을 강구해내지 않는다면 모임도 그 파고에 잠길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바라던 안위와 마주잡은 손의 따스함도 잃고 각자도생이란 형용모순인 말에 매여 버리는 것은 아닌가?

 

가까운 이들에게 삶을 걸고 삶의 맥락을 짚어낼 때, 일상의 결의 혼자에서 슬며시 곁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가까운 이들이 삶에 대한 단단한 벽을 좀더 말랑말랑한 것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나만의 갇힌 살림살이의 왜곡된 벽을 허물게 되어 살아지는에서 살아가는희미한 가능성을 맛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의 지평이 조금이나마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질 수는 없을까? 살림살이를 더 이상 고정된 것이나 내 삶을 짓누르는 등짐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덜어내야 하는 우리들 삶의 지혜로 가져올 수는 없을까? 자본주의라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살아지는것이 아니라 살아내는구명보트를 타는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다른 삶은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가

 

 

그때그때 살림살이의 수준과 굴곡을 가늠하지 못하면, 삶들의 형평성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생동감 있는 정책이나 정치적 행위로 번지지 못하고 단절되는 것은 아닐까? 닫힌 주장과 닫힌 해석에 머물러 설득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이란 팔 할이 경제적 삶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경제행위로 귀결되고 경제행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듯이 전체를 하나도 볼 수 없고 총체성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판단 고리는 경제로 시작하고 귀결되며 경제의 맥락과 배후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질문이자 주장이겠다.

 

연금, 공무원, 대기업, 정규직 등 상대적으로 안정된 일터와 생애주기 속에 있는 자신감들은 이런 평형감각 속에서는 다시 무게중심을 잡아야하고 잡을 수밖에 없다. 경제적 파이가 변했을 뿐만 아니라 변해가고 변해갈 것이기 때문에 깊이 있는 탐색과 자전거타기와 같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겠다. 경제적 풍요와 빈곤에 대한 일상의 감을 갖지 않고서는 정치토론이 불가능하고 불용하다. 비정규직, 노인과 노약자의 삶을 비교해서 얻은 감을 느끼지 못하고서는 맥락있는 정책과 대안이 나올 수 없지 않을까?

 

뒷북만 치는 정치와 정책, 문화흐름들은 정작 경제적 삶의 저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요구의 수준도 제도의 틀이 얼마나 왜곡되고 있는지 조차 보려고도 바꾸려고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보니 늘 피해자와 피해만 과장되게 나타나며, 같은 부류의 집단이 형평의 차이가 나는 집단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 평형감각조차 퇴화되어 버린 상태가 지금 여기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반대의 논거만이 충만하고, 단기적인 시각만이 돋보이고 좀 더 장기적인 실용적인 대안들이 회자되지도 살아남을 길도 없는 것은 아닐까?

 

행위 이면의 경제의 맥을 잡으려는 노력은 경제적 상처로부터 삶이 떨어져나가는 이들에 대한 아픔으로 이어져있는 것은 아닐까? 밀려드는 아픔들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을 헤아리고자 하는 것이다. 삶의 중심부에서 탈락하는 이들에게 삶이 바래져버리는 것을 사전에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렇게 팔딱거리는 그물 같은 맥동 속에서야 모임의 존속도, 네트워크의 미래도, 변화의 조짐도 흐릿함에서 또 다른 가시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의 이력과 삶의 맥락을 다시 보게 되는 바닥을 확인하고 나서야 일상과 삶의 질과 좀 더 다른 가치를 나누고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살피면서 궁구한 것을 그제야 현실 속에 적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살림살이의 파고와 아픔이 느껴지는 범위만큼에서야 자본주의를 벗어난 논의와 실천과 사유가 펼쳐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지역이란 실체 없는 것이 그제서야 구체적인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경제에 목매인 살아지는 존재에서 경제의 자장에 정치를 삶 속에 대입시켜볼 수 있게 되는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닐까? 중앙이 아니라 분권의 실마리는 살림살이에 좋은 삶들의 자흔들을 모아 흔들리는 자장 안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닐까? 원심력이 아니라 구심력은 그렇게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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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에 부영입니다. 이번주 토요일
시간 되시면 산호공연에 마실 겸 오세요.
직접 찾아 뵙고 초대장을 드려야 되지만, 왠지 쑥쓰럽기도 하고, 머쓱하여 문자로 대신 합니다. 이번 한 주는 비가 많이 오네요.
공연일정
일시:11.21(토)
장소:대흥동 소재 ˝소극장 핫도그˝
시간:오후 2시 또는 저녁 6시

발. 단체이름으로 후원금을 모았다. 확실치 않은 주말 일정이다. 따듯한 마음과 독려를 가는 앞길에 놓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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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뻐끔뻐끔 숨을 몰아쉬는 물고기들은 아닌가

-‘민주주의자본주의란 물을 다시 삼키다

 

 

물고기는 물밖으로 튕겨나온 뒤에야 물의 존재를 알 수 있다. 패인 수레바퀴 자국의 남은 물기로 온몸을 버둥거린다. 하루하루 일상은 어김없이 다시 온다. 왜 사느냐는 물음도 사치이고, 힘겹게 견디는 나날이 버겁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건조해지기만 한다. 그런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전제를 다시 한번 의심할 수 있을까? 삶이 목전에 위협을 느껴서야 다시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삶들을 비틀면서 감싸고 있는 물기축축한 사회의 존재를 다시 한번 의심해볼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낙인처럼 패여있는 수레바퀴 안, 뻐끔뻐끔 숨을 몰아쉬고 있는 물고기들은 아닐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를 그렇게 외치고 불렀건만 과연 무엇이 나아졌으며 우리는 국민이기나 한 것일까? 선거때만 돌아오는 주권은 있기나 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민의와 사회의 돌아가는 시스템 사이의 간극, 차이, 괴리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것은 아닌가?

 

거시적인 안목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나만 잘먹고 잘살고, 우리가족 밥벌이 하기도 힘든데 왜 통찰을 가져야 한다고 주제넘은 소리를 들어야하는가? ‘지금여기300여년의 호흡으로 조금 떨어져서 다시 본다고 나아지는 것은 있을까?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어 분노의 나날을 지내는 것보다는 생산적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의 포화 속에 저자들은 이 질문과 박제화된 삶들을 분별해내게 할 수 있을까?

 

두 저자의 목소리는 남다른 데가 있다. 고병권 저자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되삼키고 있다. 또 한 저자는 항아리 속에선 항아리를 볼 수 없다라는 맑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본주의를 모르면 자본주의에 당한다고 경고한다.

 

현재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지는 이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마키아벨리가 여러 공국의 정치가로 조언을 하던 시대가 아니라 단일한 국가를 만들면서 법위에 존재하는 주권을 그려내고, 단체별로 조합별로 각각 힘이 다른 집단의 단결을 금지하면서 동등한 인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한다. 보댕, 홉스, 루소는 토지와 마을에 귀속되는 개인이 아니라 홀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법적으로 분리된 개인화가 되는 과정을 발명해내고 균질한 통일된 인민을 셀 수 있게 되기까지 끊임없이 사유했다. 그리고 그 사상을 토대로 근대국가가 발견되었다. 그 한가운데 외톨이가 된 개인은 사회계약이나 맹약이라는 형태로 자신이 권리를 양도하는 상상의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단결할 수도 없는 개인의 존재임과 동시에 국가의 인민이 되어가는 과정과 연결된 것이다. 그 과정은 동시에 국민이 되는 것이었다. 필연적으로 크고 힘센 짐승같은 민주주의의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대의제인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여기 민주주의의 속성과 같은 시작이며 아무런 해결도 할 수 없는 현재 민주주의의 봉착점이기도 하다고 한다. 봉건주의, 절대군주시대와 달리 법위의 힘인 주권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균질화된 인민이 법적인 힘을 갖고 대표를 통해 권한을 행사하는 것, 주권=인민=대표체계는 대의민주주의제의 출발이면서 자본주의의 탄탄한 지반을 다지는 것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그물망에서 난민은 국가도 없고 주권도 없고 국민도 아니면서 대표할 수 있는 민주주의도 없는 존재이다. 살아있으되 아무런 주권도 법적인 힘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추방되는 이주노동자도, 선거권도 없는 청소년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비정규직도, 선거때면 선거하지 않는 유권자는 결코 대의될 수 없는 것이 보고 있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이 그물에 빠져나가는 사이존재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현 대의민주주의 그물에서 대표될 수 없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하수구에 빠진 채 민주주의의 밧줄을 잡을 수 없다.

 

발라낸 개인으로 성장한 자본주의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미시적인 접근으로 그 많은 변화를 헤아릴 수가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은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 수많은 경제행위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에게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자본주의의 삶밖을 보고자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연구만한 시각이 없던 것이다. 위험한 자본주의라는 책은 저자가 맑스의 자본론을 40여년간 연구하면서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여 대학생들에게 쉽게 강연한 것이다. 그 사유와 연구를 통해서 현재의 자본주의가 얼마나 세계화하면서 국지적으로 구도를 바꾸고 있는지 보여준다. 최근 TPP의 경제협력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은 공적연금의 민간보험화와 대학교육의 세계적인 균질화와 시장화에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틀내에 어떻게 한계지을 수밖에 없는지 그 이력들을 세세하게 밝히고 있다.

 

 

두권의 책을 통해서 독자가 작은 통찰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 삶의 전제가 되는 민주주의 시스템과 300여년 움직여온 자본주의를 얼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는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의 전제가 되는 자본주의-민주주의 경계에 대한 시선을 놓치고선 좋은 삶도 함께하는 삶도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후배 고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 그중에서도 너를 제일 사랑한다. 부디 공부 좀 해라. 공부를 지독하게 하고 나서 지금의 그 발랄한 생리와 반짝거리는 이미지와 축복받은 독기가 죽지 않을 때, 고은은 한국의 장 주네가 될 수 있다. 철학을 통해서 현대공부를 철저히 하고 대성해라. 부탁한다.”

 

비교적 얇고 서술하는대로 읽어나가면 금방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대 독서에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세상을 보는 눈도 이 시선들로 인해 조금이라도 초점이 맞추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저자들의 무등에 타고 잠깐이라도 멀리 바라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느낄 수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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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방식은 삶의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죽음이란 자기를 버리는 하나의 형식이며, 이 형식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살아 있는 동안 예행연습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은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지평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일 뿐이다. 38

 

자유낙하라는 소설은 추락이 인간의 자유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곤궁과 착취하고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간파한다. 추락은 우리 인간이 자가당착에 빠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간이 자가당착에 빠진 동물인 이유는 창조력과 파괴력이 똑같은 원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언어를 쓰는 동물은 신적인 창조 능력을 획득한다. 그러나 창조의 강력한 원천이 대부분 그렇듯 이 능력은 근본적으로 위험하다. 언어를 지닌 동물은 지나치게 빨리 발전하다가 한계를 넘어 자기 자신을 무화시킬 위험에 늘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45

 

인간의 의미화 능력에는 엉뚱한 길로 빠질 끊임없는 가능성이 탑재돼 있다. 옆길로 샐 가능성이 없는 이성은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자유에 파멸이 내재해 있는 셈이다. 48

 

악을 인간 조건의 바뀌지 않는 존재론적 특성으로 여기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유혹에 빠지는 일은 인간이 악 앞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자인하는 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하고 공존해야 한다....질병도 연속성이 있지만, 의사들은 질병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운명론적 체념에 빠져 치료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54

 

악은 자기가 완전히 독립적이며 무에서 홀연히 나타났다고 믿지만, 사실 악은 혼자 생겨나지 않았다. 악 이전에는 늘 무엇인가 먼저 존재했다. 이것이 악이 영원히 비참한 이유 중 하나다. 82

 

파시즘은 타도해야 마땅하지만,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휴머니즘에 파시즘 타도라는 과제를 달성할 능력이 있을까? 결국 자유주의도 고매한 이론처럼 허약한 신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인류의 사악함을 교양 철철 넘치게 혐오하며 외면하는 자유주의나 휴머니즘 따위의 신념으로 어떻게 파시즘을 쳐부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방법은 이열치열, 곧 악을 포용함으로써 격파시키는 방식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모더니즘은 둘 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즘보다 위험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파시즘 만한 깊이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다. 89

 

모더니즘과 파시즘은 모두 원시와 진보를 통합하려 한다. 정교함과 자연스러운 충동, 문명과 대자연, 지식층과 민중의 통합이 목적이다. 현대 기술의 추진력은 전근대의 야만적본능에게서 동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합리주의적 사회 질서를 내던져버리고 야만의 자연스러움에 깃든 뭔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새 미개함이 옛 야만하고 다른 점은 바로 자의식이다. 92

 

악은 인과율을 거부한다. 목적을 고려해야 하는 악은 자아 분열에 빠지고, 정체성이 파괴되며, 처지에 안 맞게 너무 앞서가는 꼴이 된다. 그러나 무는 이런 방식으로 분할되지 않는다. 무가 시간 속에 있을 수 없는 까닭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시간은 차이의 문제인 반면 악은 지루할 만큼 영원히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108

 

오셀로는 수수께끼의 핵심을 뽑아내자는 생각에 빠져 애초에 수수께끼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115

 

악은 순수한 도착이다. 악은 일종의 장대한 우주적 심술이다. 악은 불의를 숭앙받을 만한 업적으로 만들려고 기성의 도덕적 가치를 뒤집겠다는 주장을 하지만, 정작 자기는 도덕적 가치나 업적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악이 은폐하던 비밀이다. 119

 

대개 누군가를 대량 학살로 치닫게 하는 부류의 타자는 어떤 이유에서건 자기의 자아 심층부에 자리한 끔찍한 공허를 드러나게 하는 자들이다. 이 경우 그자는 이 고통스러운 부재를 물신, 도덕적 관념, 순수성이라는 환상, 광적 의지, 절대 국가, 총통의 남근 이미지로 채우려 한다. 이런 면에서 나치즘은 다양한 부류의 근본주의를 닮았다. 타자를 제거하는 도착적 쾌락은 자기의 건재를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정체성 중심부의 공허는 죽음의 전조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려면 당신의 자아에 이런 투라우마를 구현하는 자들을 일소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심지어 이론상의 정복도 불가능한 죽음이라는유일한 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126-127

 

지구상의 유대인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 나치에게 매혹적인 계획이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 일이 미적으로 완벽하다는 점이었다. 완벽한 파괴라는 관념에는 악마적 환희가 있다. 결함과 미진한 결말과 조잡한 근사치 따위는 악이 못 견뎌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악이 관료주의와 태생적으로 친밀한 이유다. 반면 선은 사물의 얼룩덜룩함과 미완의 성질을 사랑한다. 128

 

악은 삶에는 어차피 아무 가치도 없지 않느냐고 귓가에 속삭임으로써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거짓 위안을 준다. 늘 그렇듯이 악의 적은 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가 잘 알고 있던 대로, 악이 선의 면전에 침을 뱉는 이유는 선이야말로 단연코 가장 충만하면서도 가장 깊이 향유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134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사악함을 기뻐하는 자들을 파괴적 기쁨과 비참한 행복을 느끼는 자들이라 묘사한다. 이것은 이른바 현대식 용어로 도착적 쾌락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139

 

알코올 의존자는 절망한다. 그 사람은 출구라고는 없어 보이는 갈망과 자기혐오의 영원한 회로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비유하자면 일종의 지옥에 살고 있는 셈이다. 143

 

절망에 빠진 자들은 자멸적일 뿐 아니라 오만하다. ...절망의 증거야 말로 이자들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며, 이자들이 자기이기를 바라는 이유, 고통에 빠진 자기가 되려는 이유다. 145

 

악은 재치도 임기응변의 수완도 전혀 없기 때문에 큰 슬픔이나 환희나 격정을 마주하면 아장아장 걷는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한다. 악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이유는 믿음을 가질 만큼 충만한 내면의 삶을 갖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지옥은 형언할 수 없는 추한 것들의 현장이 아니다. 지옥이 그런 곳이라면 차라리 들어가겠다고 자원할 가치가 있으리라. 154

 

아퀴나스는 악을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결핍이라 여긴다. 아퀴나스에게 악이란 결핍이며, 부정이고, 결함이며, 상실이다. 악은 일종의 기능 부전이자 존재 심층부의 결함이다....고통이란 삶의 충만함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다. 155

 

악은 물질이나 세력이 아니다. 악을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포 영화처럼 악을 물신화하는 짓이다. 악은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속성이지 우리 너머의 어떤 외계 세력에게서 솟아나오는 무엇이 아니다. 또한 악이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이유는 악 자체가 인간의 자유가 가져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악이란 존재로 더 충만한 것이 존재가 결핍된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다. 이런 면에서 악은 일종의 영적 슬럼화다. 156

 

악한은 삶의 기술이 결여된 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삶이란 색소폰 연주하고 같아서 끝없는 연습을 거쳐 능숙해져야만 한다. 악한 자들에게 삶이란 요령부득의 문제다....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이런저런 면에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고장 난 존재다. 그렇지만 악한 자들이 삶의 기술에 엄청나게 무지하다면 나머지 우리들의 수준은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158-159

 

악은 몇몇 악의 실행자들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만큼 엘리트주의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악이 천지에 만연해 있다는 식으로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도 안 된다. 금전 이득을 얻으려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핵무기를 사용할 채비를하는 따위의 평범한 악이 순수한 악보다 훨씬 더 만연해 있다. 악은 잠 못 이루고 애태워 걱정해야 할 만큼 특별한 것이 아니다. 160-161

 

신이 악을 허용하는 이유를 따져 묻는 짓은 신을 합리적이거나 윤리적인 존재로 여기는 처사인데 신은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신을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일은 외계인이 삼각형 초록색 눈을 가지고 유황을 들이마시는 격이다....이런 식의 묘사는 빈약한 인간의 상상력만 부각시킬 뿐이다...기껏해야 신을 인간의 형상을 본떠 왜소하게 만들려는 맹목적 계몽주의 관점일 뿐이다. 신은 인간 논리의 범위 안에 가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176

 

많은 악은 나태와 두려움과 탐욕과 집착 등 고요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딱히 남부끄러울 것도 없는 동기에 따라 야기된다. 178

 

역사

 

헤겔은 역사를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지혜와 개인의 미덕이 희생되는 도살장이라 봤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 속 행복의 시대는 텅 빈 페이지들이다. 또한 헤겔은 악과 부정과 인간 정신이 창조한 가장 번영한 제국의 몰락’, 그리고 인간 존재의 형언하지 못할 불행에 관해 이야기한다.....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서의 행간에서 눈물과 아우성과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소리와 공포에 질린 대중의 비명과서로 죽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인간사의 영원한 불행에 관해 쓴 테오도르 아도르노 또한 견해가 똑같았다. ...인간 문명은 대부분 약탈과 탐욕과 착취의 역사였고,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다. 183

 

인간은 윤리적으로 모호하고 선악이 뒤섞여 있는 잡종이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왜 선이 정치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빈도가 그렇게 낮을까? 분명 사회사와 정치사의 성격, 곧 구조와 제도와 권력 절차의 특징 때문이다. 184

 

많은 부도덕한 행동이 물적 제도하고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원죄가 인간만의 잘못이 아니듯 그 행동이 전적으로 부정을 저지르는 이들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실 나는 원죄 교리를 유물론식으로 이해해보자고 제안한 셈이다. 행위란 행위자가 사악하지 않아도 사악할 수 있다. 선도 마찬가지다. 악당도 이따금씩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선행은 분명 선인보다 중요하다. 188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을 놓고 신뢰할 만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절망적일만큼 일그러진 조건 속이 아니면 인간을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조건이 달랐다면 인간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조건을 겪어보지 못했는데 당연하지 않는가....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야말로 따분할 정도로 끈질긴 착취라는 주제의 이런저런 변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종들을 돌파해 진정한 역사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가 어떤 윤리적 성분으로 구성된 존재인지 알아낼 기회를 갖게 된다. 분명 입맛에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마땅히 인간은 결국 내내 괴물이었다는 사실만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자원을 향한 끝없는 투쟁이나 잔인한 권력의 강제에 따른 시각의 왜곡 없이 자기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자리에는 서게 될 것이다. 190-191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정치 개혁에 더 큰 위협을 제기하는 요소는 악몽 같은 역사에 관한 인식이 아니라 무분별한 진보주의다. 193

 

이 책의 관점에서 보면 9.11 테러는 이라기보다는 부정이며, 이런 구분은 궤변을 훨씬 뛰어넘는 논거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실로 인류의 안정과 생존은 악과 부정 사이를 구별하는 데 달려 있다고 판명될 것이다. 악한 자들의 파괴 행동은 설득으로는 막을 수 없다. 이 사람들이 하는 짓에는 합리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악한자들은 사람들이 사안을 보는 데 쓰려 하는 합리성 자체를 문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반면 합리적이거나 심지어 훌륭한 목적을 성취하려고 뻔뻔스러운 수단을 쓰는 사람들하고는 이론적인 논쟁이 가능하다.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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